생각(Thinking)/Meditation2024. 10. 8. 0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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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 6:1-11 ’척'은 통하지 않는다

1.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우리가 하나님께 돌아오길 원하신다. 그러나 돌아온다는 것은 그저 몸만 돌아오는 것은 아닐 것이다. 우리의 마음은 우상에게 가 있는데, 내 몸만 하나님 앞에 나와 예배의 자리에 있다고 한들 그게 하나님이 바라시는 것일까? 분명히 아닐 것이다. 그래서 1절의 ‘돌아가자’라는 말이 의미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의 회복을 요청하는 말일 것이다. 

2.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1절) 우리의 죄로 인해 우리는 어려움을 겪어야 하지만 그 속에서 또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 느껴진다. 잘못한 자녀에게 매를 대었더라도, 그 상처가 덧날까봐 상처에 약을 바르고 애닳아 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 느껴진다. 

3.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러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 다가오신다. 지식적으로 나는 너희들의 아버지이고, 너희는 나의 아들이라고 말씀하시지 않는다. 우리의 잘못과 죄에 대해서는 따끔하게 훈계하시지만, 또한 그보다 넓은 사랑으로 우리를 여전히 품어주고 계신 것이다. 진리와 사랑이 함께 있는 아버지의 사랑이시다. 

4. 그렇기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about) 지식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관계이다. 3절에서 여호와를 알자고 말하지만 이 ‘알자’라는 것은 하나님에 대해 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 속에서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히브리 언어에서 ‘알다’는 관계적 지식을 의미한다. “그러나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 (3절)

5. 이 관계는 형식적인 관계가 아니다. 이 관계는 보여주기식도 아니다. 이 관계는 사랑 안에서 충분히 서로를 경험하고 이해하며, 말하지 않더라도 눈빛만 보더라도 서로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는 그런 깊은 관계이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6절). 

6. 형식적인 관계라면 제사를 원했을 것이다. 내가 당신을 예배하고 있습니다란 보여주기식으로도 충분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관계이고, 그 관계의 핵심은 우리의 마음이다. 나의 마음에 지금 무엇이 자리잡고 있는지, 누가 내 마음의 주인인지, 내가 지금 누구를 가장 사랑하고 있는지, 그 질문들의 대답을 원하신다. 

7. 형식적인 관계는 오히려 쉬울 수 있다. 척하면 되기 때문이다. 존중하는 척, 사랑하는 척, 염려하는 척 하면 된다. 그러나 그 척에서는 아무런 관계도 생기지 않는다. 우상에는 척만 해도 충분하다. 왜냐하면 우상은 죽어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마음 깊은 곳 까지는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서는 척은 통하지 않는다. 사랑하는 척, 예배하는 척, 기도하는 척은 통하지 않는다. 

8. 나는 오늘 내 마음을 아시고, 내 마음의 깊은 곳을 감찰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어떤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고 있는가? 혹시 ‘척'하고 있진 않은가? ‘척'하면서도 얼마든지 사람은 속일 수가 있다. 그러나 결코 하나님의 마음을 속일 순 없다. ‘척'하면서 예배하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적 지식을 쌓아가는 오늘 하루가 되기 원한다. 입만 살아서 사랑한다고 말하며 마음은 우상에게 가 있는 자가 아니라 입도 마음도 하나님께만 향한 자가 되기 원한다. 형식만 남은 사랑이 아니라 형식도 갖춘 사랑을 하는 자가 되기 원한다. 삶의 모든 자리에서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 분만 사랑하며, 그 분의 길을 따라가는 오늘 하루가 되기 원한다. 

9. 특별히 몸이 좀 좋지 않은 아내와 말을 잘 듣지 않는 아이들에게도 아빠의 삶 속에서 하나님이 드러나길 원한다. 가벼운 엉덩이, 사랑과 존중의 말로 오늘을 내 몸이, 내 입이 그리스도께서 주인 되심을 선포하기 원한다. 

10.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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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24. 10. 5. 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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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 4:1-10 모르니까 망하는 것이다

1. 이스라엘 백성들은 고멜의 음란의 행위로 대표되는 것 처럼 하나님을 배반하고 또 배반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붙잡으시고, 또 사랑하시지만 오늘 본문에서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지고 있지 않은 것들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신다. 

2. 먼저 그들이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하나님께서 고발하신다. “이스라엘 자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여호와께서 이 땅 주민과 쟁변하시나니 이 땅에는 진실도 없고 인애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고” (1절) ESV번역으로 찾아보면 진실과 인애는 faithfulness와 steadfast love이다. 

3. 이 두 가지 단어, 신실함 혹은 진리로 사용되는 에메트라는 단어, 그리고 자비, 끝없는 사랑의 의미로 사용되는 헤세드라는 단어는 구약성경에서 주요하게 사용되는 단어들로 주로 하나님의 성품에 관계된 단어들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자들로서 죄로 인해 완벽하지는 못하더라도 부분적으로 이 단어들의 의미가 우리의 삶에서 나타나야만 한다. 

4. 그런데 지금 이스라엘의 모습 속에는 아무런 신실함도, 진리도, 자비도, 사랑도 보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진리이신 하나님이 그들의 삶에 없기 때문이다. 이것을 1절 마지막에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고" 라고 표현하고 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으니 우리의 모든 도덕적 기준도 어그러진다. 

5. 2절에서는 그러한 모습을 묘사한다. “오직 저주와 속임과 살인과 도둑질과 간음뿐이요 포악하여 피가 피를 뒤임음이라" 절대 선이신 절대 진리이신 하나님이 없다면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의 목적도 없어진다. 착하게 살아야 할 이유가 무엇일까? 이 질문 이전에 먼저 생각해야 한다. 무엇이 착한 것일까? 무엇이 선인지 무엇이 좋은 것인지 기준이 없기 때문에 남을 돕고, 배려하고, 사랑해야 할 이유도 없거니와 이런 행위가 좋다고 어떻게 판단할 수도 없다. 

6. 6절 말씀이 사실이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하 럯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하나님을 모르면 망하게 된다. 이렇게 되지 않으려면 우리는 하나님을 알아야 하고, 만나야 한다. 이 구절의 대답으로 호세아는 6:3절에서 이렇게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 

7.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우상숭배를 하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악을 행하며,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사랑하지 않는다. 여호와 하나님을 더 깊이 아는 것이 내 삶이 더 거룩해지고, 그 분의 통치 속에서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나는 힘써 여호와를 알려고 하고 있는가?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고 있는가?

8. 최근 유튜브 채널 삼프로tv라는 경제 채널에서 ‘더 릴리전’ 이라는 주제로 기독교에 대해 다루고 있는 것을 들었다. 잘잘법에서 많은 이야기를 해주신 연세대 김학철 교수님이 나와서 해박한 지식과 지혜로 예수님과 복음에 대해 MC들의 짖굳은 질문에도 자세히 설명해주신다. 분명히 이 채널에서는 흥미로, 조회수를 위해 시작한 영상들인데 예수님에 대해 듣고 이해를 하면서 MC들의 태도가 조금씩 변해가는 것을 본다. 처음에 MC분들은 예수님에 대해 잘 알지 못하고, 어디서 들은 지식들로 기독교에 대해 선입견,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질문에 대한 설명과 되어진 상황을 들으면서 이해를 하게 되고, 예수님에 대해 관심도 가지게 된다. 하나님을 알되 제대로 알아야 하는 이유이다. 

9. 세상 사람들도 하나님을 알고자 이런 노력을 하는데, 우리 믿는 자는 더욱 그래야만 한다. 알되 제대로 알아야 한다. 아는 것에서 끝나서도 안된다. 그 분의 성품이 내 삶에 반영되어야 한다. 그러기에는 너무나도 부족하지만, 그럼에도 오늘 그 분을 조금 더 알아가기 위해 말씀을 펴고, 묵상을 하기 원한다. 어제 보다 조금 더 그 분을 알아가는 하루가 되길…

10.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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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24. 10. 4. 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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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 3:1-5 낭비된 사랑

1. 호세아의 사랑을 받았던 고멜은 호세아를 다시 떠나 음란을 저지른다. 고멜이 왜 이렇게 까지 했어야만 했는지 잘 짐작이 가지 않는다. 그러나 그녀는 남편으로 만족할 수 없었고, 다시 남편을 떠나 다른 남자에게로 간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호세아로 하여금 고멜을 값을 치르고 사 오라고 하신다. 

2.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이 다른 신을 섬기고 건포도 떡을 즐길찌라도 여호와가 저희를 사랑하시나니 너는 또 가서 타인에게 연애를 받아 음부 된 그 여인을 사랑하라 하시기로" (1절) 호세아는 내키지 않았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미 마음을 정하셨다. 그녀가 어떻든지, 어떠한 상황이든지 그녀를 사랑하기로 결정하셨다. 

3. 호세아는 그녀를 위해 은 열 다섯개와 보리 한 호멜 반의 값을 치르고 그녀를 데리고 온다. 찾아보니 보통 노예의 평균 가격이 은 30이었다고 하니 그녀를 세상이 어느정도로 가치를 매기고 있는지 얼마나 그녀를 낮게 보았는지 알 수 있다. 

4. 사실 그녀의 모습이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모습이다. 우리는 인권이다, 하나님의 형상이다 해서 우리 스스로를 무척이나 과대평가 하고 있다. 우리의 존재가 엄청나게 높고, 뛰어나며 우리는 이런 좋은 대우를 당연히 받아야만 하는 존재로 여길 때가 많다. 그러나 우리의 모습은 이 고멜과 전혀 다를게 없다. 

5. 하나님을 배반하고, 하나님을 거역하고, 내가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였고 내가 내 삶의 주인이 되고자 하였고, 호세아와 같이 우리를 여러번 찾아오신 하나님을 거절하고, 하나님과 같이 있지만 여전히 다른 남자들(우상들)을 그리워하고 사랑하는 자들이었다. 우리의 가치가 은 열 다섯개 정도 되는 (현재 돈으로 약 30만원 정도) 존재들이었다. 

6. 그런데 이런 우리를 하나님께서 사랑하셨다. 사랑하셔서 우리가 돌아서도 거역해도 배반해도 계속 우리를 찾아오신다. 사랑하신다. 호세아를 통해 보이시는 하나님의 마음이다. 우리의 가치는 은 15개 밖에 안되는데, 우리를 영원히 사랑하시고, 영원히 자신의 것으로 삼으시기 위해 하나님 자신의 생명을 우리에게 쏟아 부으셨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건이다. 

7. 이런 말도 안되는 사랑이 어디 있는가? 30만원으로 사면 되는 존재에 온 우주를 창조하시고, 운행하시고, 통치하시는 왕의 생명을 대가로 지불하다니… 낭비도 이런 낭비가 없다. 그러나 이 낭비적인 사랑이 우리를 살리신 것이다. 팀 켈러의 책의 제목 처럼 the Prodigal God이 우리 하나님이신 것이다. 

8. 이 낭비적일 만큼 무모하고 엄청난 사랑을 받은 나는 고멜과 다른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 다르다고 말하기에는 참으로 부끄럽다. 나 또한 고멜처럼 내 삶에 존재하는 우상들을 사랑하고, 우상들에게 내 삶이 매이는 적이 얼마나 자주인가? 하나님 앞으로 돌아왔다고 말하지만 또 다시 우상을 찾아 나가기를 얼마나 반복하고 있는가? 그런데도 이 낭비적인 사랑이 또 나를 찾아오고, 또 나를 붙드시고, 또 나를 인도하셔서 그 분의 품으로 인도하시지 않는가? 이 낭비의 사랑이 없다면 내가 존재할 수도 없다. 

9. 오늘도 이 사랑을 묵상하며, 이 사랑에 잠기기 원한다. 세상 사랑들이 낭비라고 다 손가락질 하고 화를 내어도 우리 하나님께서는 나를 위해 충분하다고 말씀하신다. 전혀 아깝지 않다고 말씀하신다. 이 사랑을 더 깊이 알아가기 원한다. 계산적으로 보기에는 낭비적인 사랑이지만, 나에겐 너무나도 충분한 사랑을 배워가기 원한다. 그리고 내 삶에 그 사랑으로 인해 변화된 삶으로, 또 그 사랑을 내 삶으로 드러내는 삶으로 변화되기 원한다. 

10.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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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Thinking)/Meditation2024. 9. 24. 0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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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 11:22-36 질서,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것

1. 본문은 성벽의 재건 후 사람들이 어디서 살아가며 어떠한 일을 담당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11장 1절을 보면 백성의 지도자들이 예루살렘에 거주했고, 백성은 전체의 1/10만 예루살렘에 거주할 수 있었다. “백성의 지도자들은 예루살렘에 거주하였고 그 남은 백성은 제비 뽑아 십분의 일은 거룩한 성 예루살렘에서 거주하게 하고 그 십분의 구는 다른 성읍에 거주하게 하였으며”

2. 그 때에 예루살렘은 내가 살고 싶다고 살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 곳의 거주지는 한정적이었고, 예루살렘이 영적, 도시 행정적 제 기능을 할 수 있도록 꼭 필요한 사람들에게만 열려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도자들은 예루살렘에 거해야만 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지도자들 외에 또 예루살렘 안에 거주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바로 레위인들이었다. 

3. “노래하는 자들인 아삽 자손 중 미가의 현손 맛다냐의 증손 하사뱌의 손자 바니의 아들 웃시는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레위 사람의 감독이 되어 하나님의 전 일을 맡아 다스렸으니 이는 왕의 명령대로 노래하는 자들에게 날마다 할 일을 정해 주었기 때문이며” (22-23절) 아삽의 자손들, 즉 예배를 담당했던 레위인들의 자손들은 하나님의 전 일을 맡아 다스리고, 예배하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거주했다. 

4. 예루살렘 성벽이 왜 재건되었고, 왜 예루살렘 도시를 재건했는지를 생각해보면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처음 그 일을 시작한 이유를 잊어버리지 않고, 그 이유에 맞게 계속해 나가면 되는 것이다. 다시 이스라엘로 하여금 하나님 앞으로 돌아가게 하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곳이 되게 하기 위해서 성벽을 재건하였기에 그 중심에는 예배자들과 예배를 돕는 자들이 있어야 한다. 

5.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았더라’라고 말씀하신 것은 모든 것이 그 목적에 그 질서에 맞게 그 자리에 있다는 말이다. 레위인들이 예루살렘 도시 안에 거하면서 예배를 드리고, 예배를 돕는 일을 하는 것은 질서에 맞는 일이다. 우리를 지으신 목적대로 우리를 부르심 목적대로 살아가면 그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일이다. 

6. 이 일을 진두 지휘한 느헤미야는 자신을 어려움 가운데서 은혜로 불러주셔서 이 일을 맡기신 하나님의 목적과 이유를 단 한 순간도 잊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그 부르심의 목적과 이유에 따라 중요한 것을 중요한 곳에 두고, 해야 할 것을 해 나간 것이다. 즉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일을 한 것이다. 

7. 모든 것이 그 목적에 맞게 그 자리에 존재하면서 질서를 지키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 목적을 잃어버리고, 자리를 벗어나기 때문에 대부분의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나는 나를 부르신 그 자리에 있는가? 나를 불러주신 목적대로 살아가고 있는가? 선교지에서 잠시 떨어져서 안식년을 보내면서 자주 드는 마음은 빨리 태국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것이다. 빨리 형제, 자매들을 만나고 싶고, 함께 교회를 다시 세워가고 복음을 전하고 싶다는 마음이 계속 든다. 

8. 그러나 오늘 묵상을 하면서 이런 마음도 어쩌면 주님의 질서에 맞지 않는 마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가정을 13년 만에 첫 안식년으로 불러주셨다. 그렇다면 내가 해야 할 것은 여전히 태국과 수쿰빛 언약교회를 마음에 두고 생각하고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지금은 불러주신 이 자리에서 주님께서 허락하신 것들을 누리고 쉬면서 지내는게 오히려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일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허나님께서 너무나도 많은 분들의 헌신과 배려로 이런 기회를 허락해주셨고, 안식을 취한다는 것이 매우 중요하고, 꼭 필요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러지 못하거나 그럴 수 없는 상황에 계신 분들과 남아 있는 성도들과 교회를 생각하며 여전히 마음이 불편한 내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 

9. 묵상중에 하나님께서 조금은 마음을 편하게 먹어도 된다고 말씀하시는 것 같았다. 주께서 허락하신 자리에서 조금은 누리라고 말씀해주시는 것 같았다. 그래서 지금은 마음이 조금은 평안하다. 물론 내일은 또 마음이 불편할 수 있겠지만.. 질서에 맞게 오늘을 살아가기 원한다. 하나님 보시기에 좋으시도록 그 목적과 질서에 맞게 그 자리에 있기 원한다. 무거운 짐을 주님 앞에 내려 놓고 쉬는 하루가 되기 원한다. 

10.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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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Thinking)/Meditation2024. 9. 20. 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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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 10:1-31 리더의 자질

1. 이스라엘 백성들은 느 8장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깨닫고, 9장에서 회개의 기도와 고백을 한 후에 10장에서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겠다는 적극적인 약속, 언약을 기록하고 그 곳에 자신의 이름을 써서 인봉하며 공식적으로 선언한다. 

2. 인봉한 자들의 이름이 나오는데, 가장 먼저는 총독인 느헤미야의 이름부터 나온다. “그 인봉한 자는 하가랴의 아들 총독 느헤미야와 시드가야,” (1절). 그리고 2-8절 까지에는 제사장들의 이름이 나오며, 9절 부터는 레위 사람들의 이름이, 14절 부터는 백성들의 우두머리들의 이름이 나온다. 직분이 높은 사람에서 부터 낮은 사람들로 이름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이를 볼 때 개혁권한과 책임을 가지고 있던 높은 자들에서 부터 아래로 진행되었음을 추론해 볼 수 있다. 

3. 28절을 보면 이 곳에는 이름이 등장하지는 않지만 남은 백성들과 제사장들 레위 사람들과 문지기들, 그리고 노래하는 사람들도 함께 결단했음을 알 수 있다. 그 결단은 일단 오늘 본문에서는 세 가지로 나타난다. 1) 이방인과 혼인 금지 2) 안식일 지키기 3) 7년마다 희년 지키기 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참 이스라엘로 살아가기 위한 정체성을 지키는 위한 율법들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율법을 지키기로 결단하게 된다. 

4. 이러한 결과들을 보면서 리더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된다. 만약 느헤미야가 리더가 아니었다면.. 느헤미야가 자신이 가진 총독의 지위를 적절하게 사용하지 못했다면.. 느헤미야가 학사 에스라를 불러 말씀을 듣지 않았다면 과연 오늘의 결단은 있을 수 있었을까? 이스라엘 역사를 보면 다윗의 길을 가지 않은 왕들로 인해 모든 공동체가 그 죄로 물들고, 죄로 인해 어려움을 겪는 것을 얼마나 많이 보았는가? 

5. 리더의 자리는 얼마나 무거운 또 무서운 자리인가? 나로 인해 나 뿐만 아니라 나의 가족과 나의 공동체가 모두 영향을 받을 수 있는 자리가 리더의 자리이기에 더 겸손해야 하고, 더 주님의 음성에 귀 기울여야 하는 자리가 리더의 자리 아닌가? 한 대통령이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비가 많이 와도 내 탓인것 같고, 비가 오지 않아도 내 탓인것 같다" 비가 오고 오지 않고가 어찌 대통령의 탓인가? 그러나 리더는 그정도의 무게감과 책임감을 느껴야 하는 자리이다. 

6. 목사는, 선교사는 사역지에서, 그리고 아빠는 가정에서 내가 원하든 원치 않든 간에 리더의 자리를 감당해야 하는 사람이다. 때로는 이 리더의 자리가 무겁고 버겁기 때문에 하지 않고 싶을 때도 많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리더의 자리로 세워주셨다면 우리가 (그 분의 도우심 안에서 감히) 감당할 수 있는 자리이며, 또 내가 눈물로 기도로 감당해야만 하는 자리이다. 

7. 떠나온 수쿰빛 언약교회를 생각해보고, 지금 우리 가정을 돌아보면서 나의 부족함을 많이 느끼게 된다. 쉬이 분노하고, 때로는 감정을 조절하지 못하며,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내 생각이나 내 뜻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내 자신을 보게 된다. 그러나 오늘 이 결단이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8장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닫는 것에서 시작되었다. 리더의 할 일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고, 듣고 깨닫는 것이다. 그리고 교회 성도들과 나의 가족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또한 대하고 듣고 깨달을 수 있도록 인도하고 격려하는 것이다. 

8. 리더십은 내가 그 분 안에 있을 때에만 발휘되는 것이다. 내가 그 분 안에서 들을 때에만 발휘되는 것이다. 내가 그 분 안에서 다른 이들을 섬길 때에만 발휘되는 것이다. 그 분을 나의 진정한 리더로 모시고 따라갈 때에만 발휘되는 것이다. 리더인가? 말씀을 읽어라. 리더인가? 말씀을 들으라. 리더인가? 말씀을 깨달으라. 리더인가?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듣고 깨닫도록 초청하고 함께 하라. 그러면 내가 리더십을 발휘하지 않으려고 할지라도 리더십이 발휘될 것이다. 나는 교회에서 가정에서 어떤 리더인가? 어떤 리더로 살아가기 원하는가? 리더의 무게를 느낀다면 그 분 안에 머물라. 그 분의 말씀을 청종하라. 그러면 감당할 수 있는 힘을 주실 것이다.

9.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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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Thinking)/Meditation2024. 9. 19. 0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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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 9:32-38 누가 더 큰가? 

1.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읽음을 통하여 자신들의 어떠함과 상관없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기억하고 또 자신들의 추악한 죄악을 다시 한번 직면하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한 번도 이스라엘을 버리신 적이 없지만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단 한번도 꾸준히 자신들의 신실함을 지킨 적이 없었다. 

2. 어제 본문 마지막 구절은 이렇게 고백한다. “주의 긍휼이 크시므로 저희를 아주 멸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도 아니하셨사오니 주는 은혜로우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심이니이다" (31절)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은혜로우심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항상 하나님을 거절하고, 하나님을 등지는 선택을 하였다. 

3. 그렇기에 그들의 고백은 자신들의 당한 고난 마저도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이라고 고백한다. “그러나 우리가 당한 모든 일에 주는 공의로우시니 우리는 악을 행하였사오나 주는 진실히 행하셨음이니이다" (33절).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공의로우심에 대한 진정한 이해가 있었기에 회개하게 된다. 

4. 그러나 우리는 많은 순간 어떠한 고난이 찾아오거나 예상하지 못한 어려움을 만나면 그 속에서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공의로우심을 찾기 보다는 나의 의를 앞세우게 된다. “하나님 내가 이렇게 주를 섬겼는데, 내가 이렇게 헌신 했는데, 내가 이렇게나 헌금 했는데…” 등등의 고백으로 대표되는 나의 행위를 하나님 앞에 강조한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 내게 어떻게 이러실 수 있으세요?” 

5. 성경 속에서 우리가 만나는 하나님은 언제나 공의로우시고, 언제나 신실하시고, 언제나 사랑이시다. 내가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면 자꾸만 (앞세울 것도 없는 비루한) 나의 의를 앞세우고, 하나님을 나의 행위에 따라 나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지는 이상한 분으로 만들어 버린다. 하나님은 그렇게 쪼잔하시고 작으신 하나님도 아니다. 

6. 오늘 본문 32절 전반부 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백하는 하나님을 보자. “우리 하나님이여 광대하시고 능하시고 두려우시며 언약과 인자를 지키시는 하나님이시여…” ESV에서는 Our God, the great 라고 표현하고 있다. 우리 하나님이 그렇게 작고 쪼잔하신 하나님이 아니라 너무나도 크고 광대하시고 위대하신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나의 작은 머리 속의 판단이나 계획이 결코 하나님 보다 더 클 수 없다는 것이다. 결국은 하나님 문제가 아니라 나의 문제인 것이다. 

7.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들의 작음과 죄악됨을 알고, 하나님의 광대하심을 깨달으며 회개하게 되었고, 그들은 하나님과 언약을 체결하고자 한다. “우리가 이 모든 일을 인하여 이제 견고한 언약을 세워 기록하고 우리의 방백들과 레위 사람들과 제사장들이 다 인을 치나이다 하였느니라" (38절). 

8. 오늘 누구를 크게 보고 있는가? 나인가? 아니면 하나님인가? 입으로는 하나님을 크신 하나님, 위대하신 하나님이라고 하면서도 여전히 내 계획, 내 생각을 놓치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나의 공로를, 나의 행위를 하나님 앞에 늘어놓으면서 하나님을 내 뜻대로 움직이려고 하고 있지는 않은가? 오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정말로 하나님의 위대하심 앞에 무릎꿇지 않으면 언제나 ‘나' 중심으로 돌아가고, 하나님을 쪼잔한 분으로 만들어 내 마음대로 움직이려고 하게 된다. 내 삶에 언제나 하나님께서 진실하게 행하셨음을, 그러나 나는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 악하고 추악하였음을 잊지 말고, 은혜 앞으로 나아가자. 

9. 지금 상황에 대해서 감사하자. 나는 다 알지도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지만, 그 분은 내 길을 더 잘 아시니까.. 

10. 오늘도 샬롬

*요 몇일 허리 컨디션이 좋지 않더니 어제 저녁부터 심해져서 약을 먹고 쉬고 있습니다. 속히 회복되도록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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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Thinking)/Meditation2024. 9. 17. 0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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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 9:9-18 하나님의 말씀이 기준이 되는 삶

1. 8장에서 학사 에스라와 함께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들은 백성들의 반응은 회개였다. 9잘 1-2절은 이렇게 시작된다. “그 달 스무나흗 날에 이스라엘 자손이 다 모여 금식하며 굵은 베 옷을 입고 티끌을 무릅쓰며 모든 이방 사람들과 절교하고 서서 자기의 죄와 조상들의 허물을 자복하고"

2. 오늘 9절부터 18절까지의 본문은 바로 그들의 허물의 자복이다. 9-15절까지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의 압제 하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위해 무엇을 하셨는지를 고백한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고통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다 (9절). 그리고 애굽을 치셨다 (10절 상반부), 그리고 명예를 얻으셨다 (10절 마지막).

3. 이스라엘 백성들을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밤에는 불 기둥으로 인도 하셨고 (12절), 그들에게 하나님의 율법을 주시며 만나주셨고 (13-14절), 그들의 목마름을 아시고 물을 주셨으며, 그들에게 땅을 주리라 한 약속대로 땅을 주셨다 (15절). 그러나 15절 마지막은 “말씀하셨사오나"로 마쳐진다. 즉 우리에게 신실하게 좋은 일들을 행하신 하나님과는 다르게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악하게 행하였다는 것이다. 이것이 이들의 회개의 이유였다. 

4. “그들과 우리 조상들이 교만하고 목을 굳게 하여 주의 명령을 듣지 아니하고 거역하며 주께서 그들 가운데에서 행하신 기사를 기억하지 아니하고 목을 굳게 하여 패역하여 스스로 한 우두머리를 세우고 종 되었던 땅으로 돌아가고자 하였나이다" (17절 상반부) 이것만이 아니다. “또 그들이 자기들을 위하여 송아지를 부어 만들고 이르기를 이는 곧 너희를 인도하여 애굽에서 나오게 한 신이라 하여 하나님을 크게 모독하였사오나" (18절). 

5.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반대로 이스라엘은 교만하였고, 목이 굳었고, 하나님을 기억하지 아니하였고, 하나님이 아닌 우상을 세워 하나님이라고 하며 하나님을 모욕하였다. 하나님 입장에서는 ‘적반하장도 유분수’인 놈들이었다. 은혜도 모르고, 앞뒤도 모르고, 감사도 모르는 것이 바로 이스라엘이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이러한 죄악들을 회개하였다. 

6. 그 회개의 시작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에서 시작되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만이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판단하는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버린 이스라엘 백성들은 옳고 그름의 기준을 잃었다. 내가 생각하기에 좋은 것이 좋은 것이고, 내가 생각하기에 나쁜 것이 나쁜 것이었다. 기준이 없다면 내 마음대로 하게 된다. 이것을 성경 사사기는 한 문장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삿 21:25). 

7.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시대는 다들 자신이 옳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절대적인 진리가 없는 포스트 모더니즘 시대에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 누구도 절대적인 진리에 대해서 말하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 믿는 자들은 포스트 모더니즘 시대에 살아가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의 절대성을 붙들어야만 한다. 그래야 우리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옳고 그름에 대해서 알고, 잘못된 길로 갔을 때에는 오늘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이 회개할 수가 있게 된다. 

8. 아담이 하나님 처럼 되려고 했던 것의 핵심도 바로 옳고 그름을 스스로 정하려고 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줄로 재어준 구역이 아니라 내가 내 삶의 주인이 되고, 왕이 되어서 내 마음대로 결정하고, 내 마음대로 옳고 그른 것을 정의하려고 하나님처럼 되고자 했다. 그런 아담의 후손들인 우리들도 여전히 우리 마음에 내가 마음대로 하고 싶은 욕구들이 가득하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보는 것 처럼 우리는 우리 마음대로 하면 악으로, 죄로, 거짓으로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존재들이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진리 그 자체이신 하나님의 말씀이다. 말씀이 없이는 우리는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9. 오늘 무엇을 붙들고 있는가? 내 생각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인가? 무엇을 옳다고 믿는가? 내 생각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인가? 무엇이 내 삶을 이끌어 가고 있는가? 내 생각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인가? 하나님 말씀이 내 삶의 기준이 되고, 하나님의 말씀에 생명을 거는 자가 되기 원한다. 주님께서 말씀하시면 내가 나아가고 주님 뜻이 아니면 멈춰서는 자가 되기 원한다. 그러기 위해 오늘도 말씀을 펴고 읽으며, 묵상하는 자가 되자. 

10. 오늘도 샬롬

https://youtu.be/rBaNX_REjbA?si=sNxEcUhOobZtCRd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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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Thinking)/Meditation2024. 9. 11. 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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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 6:15-7:4 무엇이 나를 드라이브 하고 있는가? 

1. 많은 방해 속에서도 두려움으로부터 듣지 않았던 느헤미야의 리더십을 통해 성벽 건축을 무사히 마치게 된다. “성벽 역사가 오십이 일 만인 엘룰월 이십오일에 끝나매" (15절). 

2. 느헤미야 자신도, 그리고 이 성벽재건에 참여했던 사람들도, 그리고 이를 방해했던 자들도 이 일이 느헤미야로 부터 말미암은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역사하신 일임을 알았다. “우리의 모든 대적과 주위에 있는 이방 족속들이 이를 듣고 다 두려워하여 크게 낙담하였으니 그들이 우리 하나님께서 이 역사를 이루신 것을 앎이니라” (16절). 

3. 이런 느헤미야를 도비야는 또 방해하고자 한다 (17-19절). 그러나 느헤미야의 리더십을 보면 이런 일에 동요하거나 성벽 건축의 완성에 도취되지 않고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다시 시작한다. 그것은 성벽의 문지기를 세우고, 예배하는 자들을 세우는 일이었다. “성벽이 건축되매 문짝을 달고 문지기와 노래하는 자들과 레위 사람들을 세운 후에” (7장 1절)

4. 그는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아는 사람이었다. 자신을 두렵게 하는 것도, 자신이 해낸 성취도 그에겐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느헤미야를 움직이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사명, 즉 성벽을 중수하는 것이었다. 성벽이 중수되고 나면, 이제 성벽 안으로 도시가 생기게 되고, 도시가 생기면서 다시 성전이 중수되고, 하나님의 통치가 회복되는 그런 그림을 그는 그리고 있었다. 1장 5절에 보면 그는 ‘언약'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있기 때문이다. 

5.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사랑, 하나님의 언약의 성취에 대한 소망이 그를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예루살렘의 황폐화라는 눈에 보이는 엄청난 어려움도, 여러 번의 죽음의 위협도, 다양한 성벽재건의 방해 공작도 그를 막을 수 없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그를 움직이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이었기 때문이다. 

6. 오늘 본문을 보면서 나를 드라이브 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를 생각해보게 된다. 목사로, 선교사로 살아가고 있는 내 삶을 드라이브 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나도 느헤미야와 같이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사랑, 하나님의 언약의 성취에 대한 소망이 정말로 나를 움직이고 있는 원동력일까? 나는 어린 양 되신 예수께서 이 모든 만물을 회복시킬 것을 소망하면서 오늘을 살아가고 있을까? 아니면 등떠밀려서 하기 싫은 일들을 억지로 하고 있진 않을까? 

7. 하나님께서 다스리고 계신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에 성벽 건축을 마친 후에 세운 사람들이 문지기를 제외하고는 다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들이었다. “노래 하는 자들과 레위 사람들"로 대표되는 예배를 섬기고 주관하는 자들을 세운 것이다. 나는 어떤 사람들을 세워가고 있는가? 혹시 예배자를 세우기 보다는 교회의 일꾼들을 세우려고 하진 않았을까? 나의 자녀들이 예배자로 세워지기를 애쓰고 있었을까? 

8. 결국 지금 일어나는 또 하고 있는 모든 일들은 지금 내가 누구를 믿고 사랑하고 소망하느냐에 달려 있다. 내 관점이, 내 생각이 하나님을 향해 있지 않다면, 온 천하 만물들이 회복될 마지막 날을 바라보고 있지 않다면 두려움이 나를 드라이브 하게 될 것이다. 염려가 나를 드라이브 하게 될 것이다. 때로는 조금의 성취에도 자만하게 되거나 조금의 어려움에도 낙망하게 될 것이다. 내가 바라고 소망해야 할 오직 한 분 그리스도께 집중하는 삶이 되기를 원한다. 모든 민족과 족속과 방언이 한 목소리로 어린 양을 예배하게 될 그 날을 소망하기 때문에 오늘을 살아가기 원한다. 

9. 다시 한 번 내 삶을 점검하자. 나의 시선이 어디를 향해 있느지, 나의 소망이 어디에 있는지..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밖에 내가 사모할 이 없나이다” 시 73:25를 계속해서 고백하는 오늘이 되길

10.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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