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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 1:35-45 주께서 원하시면...

오늘 본문을 여러번 읽으면서 마음에 지속적으로 들어오는 말씀은 40절의 ‘원하시면’ 이었다. 
이 고백을 한 사람은 나병환자였다. 이스라엘 사회에서 나병환자들을 대하는 당시의 사회적 태도를 생각해 보면 (불결한 자로 무시하고 격리했던...), 그들이 예수님께 요구해야만 할 것 같은 내용은 예수님의 마음이 어떠하신지가 아니라 자신들의 마음이 어떠한지 였을 것이다. 

고침 받고 싶다고… 더 이상 이러한 인생은 싫다고… 왜 우리 인생은 이렇게 힘들고 고통스럽냐고 주님께 물어야 정상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름이 나오지 않는 한 나병환자의 고백은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40절)’ 였다. 

지금 이 인생의 절대절명의 순간(그가 다시 예수님을 만날 수 있을지는 누구도 알 수 없지 않은가?) 에도 그는 자신의 뜻을 주장하지 않고 예수님의 뜻을 보여달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원하시면 자신을 고쳐 달라는 고백이었다. 어마어마하게 넓은 그의 마음이 사실 실감이 잘 나지 않는다. 

그런데 묵상하면서 이 나병환자야말로 주님의 마음을 가장 잘 알았던 사람이란 생각이 든다. 우리 주님의 마음은 고난받는 자들과 억눌린 자들과 병든 자들과 늘 함께 계셨다. 주님이 과연 이러한 자들을 고쳐주기 싫어서 안 고치신 적이 있었을까? 주님의 마음은 늘 그들과 함께 계셨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장 깊이 아는 자가 할 수 있는 고백이 바로 ‘주께서 원하시면’ 인 것 같다.내가 원하는 대로의 삶, 내가 바라는 대로의 삶,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을 하는 삶이 아니라 나의 한 번 뿐인 인생을 주께서 원하시는 것들을 하기 위한 삶으로 살겠다는 고백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아는 자가 할 수 있는 고백이다. 하나님은 그런 고백을 하는 자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일들을 이뤄가신다. 

한 나병환자의 그러한 고백을 통해 나병환자는 고침을 받았고, 예수 그리스도는 높아지셨다 (45절).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 나는 ‘주께서 원하시면’의 인생인가? 아니면 ‘내가 원하는 것’을 하려는 인생인가?삶을 살면 살 수록 주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내 욕심과 생각이 무엇인지 때로는 너무나도 확실하고 때로는 너무나도 혼란스럽게 느껴질 때가 많다. 사실 잘 모르겠다. 하지만 내 마음은 ‘주께서 원하시면’을 묻고 있는가? 아니면 묻지 않고 내가 원하는 것을 하고 있는지 쉬이 알 수 있다.

어제 밤 캄보디아로 비자를 받기 위해 급하게 들어왔다. 수요일 밤에 방콕으로 돌아가게 되는데, 이렇게 어렵게 기다려서 받는 비자를 누구를 위해 쓸지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내가 이 곳에서 얼마든지 체류하는데 사용할 수 있고, 내 욕심을 채우는데도 쓸 수 있는 비자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지 않기를 원한다. ‘주께서 원하시면’의 질문을 하며 이 비자를 사용하게 되기를 원한다. 이 비자를 주님께 올려 드린다. 내가 잘해서 받은 비자가 아니지 않은가? 주를 위해 주께서 원하시면의 인생을 위해 사용되는 비자가 되기를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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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 1:12-20 광야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도 광야를 견디셨다. 그러고 보면 예수님은 늘 그러셨던 것 같다. 
새벽 미명에 기도의 자리를 지키는 것, 사역을 시작하기 전에 광야를 견뎌내신 일, 그리고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신 일…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몸으로 오셨기 때문에 특별한 능력으로 그러한 일들을 견뎌내신 것이 아니라 우리와 같이 힘든 시간들을 보냈지만 그 시간들을 하나님과 함께 걸어가는 길을 택하셨던 것이다. 

세례를 받고, 하늘에서 소리가 들리고, 그리고 나서 간 곳이 광야였다. 뭔가 어울리지 않는 자리로 간 것 같지만 가장 정확하고 적절한 자리였다. 바로 성령이 인도하셔서 간 곳이기 때문이다. 이제 예수님께서 흔들리지 않고 사역을 시작하셔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광야의 시간을 견뎌내야 하고, 그 광야에서 하나님을 독대해야 하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조차도 그러하셨다. 그리고 불평없이 견뎌내셨다.

그리고 나서 그의 사역의 선포가 시작되었다.‘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예수님이 광야를 통과하신 것은 예수님을 예수님되게 한 중요한 사건으로 여겨진다. 물론 그 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하나님이시다. 하지만 그 분도 통과하셔야 할 만큼 광야는 중요한 곳이다. 모범을 보여 주시기 위함이었든, 혹은 정말 예수님도 통과 하셨어야만 했든… 
예수님은 광야의 시간을 충실하게 보내셨다. 예전의 어느 책에서 이 시간을 예수님의 무명의 시간이라고 표현한 것이 기억이 난다. 그 무명의 시간을 충실하게 보내심으로 유명의 시간에도 교만하지 않고 자신의 사명을 잃어버리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다.

광야의 시간들을 충실하게 보내고 하나님 나라는 시작이 되었다. 우리에게 가장 적절한 때에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신다. 하나님께서 나를 광야로 불러주셨으니 기쁘게 이 시간들을 감당하고 싶다. 광야에는 시험과 들짐승이 함께 있는 곳이지만, 그 곳에는 하나님이 함께 계신 곳이다. 내 상황이 예수님과 동일한 것은 분명히 아니지만 이 시간을 하나님과 함께 가려 한다. 

광야에서는 뭔가 엄청난 것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이시간을 견뎌내고, 그리고 하나님을 더 깊이 만나는 것 뿐이다. 
오늘도 그러한 한 하루가 되기를… 사람의 눈에 보이기 위한 엄청난 것을 하려고 하기 보다는 이 시간들을 견뎌내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법을 배우는 하루가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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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 1:1-11 나 자신과 하나님을 제대로 아는 것 위에 다른 것을 더하자 

마가복음의 시작은 매우 빠르게 전개된다. 하나님 나라가 급하게 임하고 있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걸까? 그 중에 한 사람이 보인다. 그는 세례요한이다. 그는 이 바삐 전개되는 하나님 나라의 임재 속에서도 그에게 주어졌던 그 길을 걸어가고 있다. 바로 주의 길을 준비하고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해야 하는 것이었다 (3절). 

그는 그의 사명을 수행했다. 아니 그냥 해낸 정도가 아니라 잘 해냈다. 그 이유는 그가 그 자신에 대해서 정확히 알았고, 그리고 자기 뒤에 오실 분에 대해서 정확히 알았던 것이었다. 내가 누구인지를 정확히 아는 것,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정확히 아는 것이 우리 인생의 가장 중요한 일이란 생각이 든다. 이 두 가지가 확실하면 그 다음부터는 명확해진다. 

하나님은 하나님 되시고, 나는 내가 되어야 하고… 
내가 결코 하나님의 자리에 오르려 하지 않고, 내가 내 삶의 주인되지 않고, 
내 삶에 하나님이 하나님 되심을 보는 것….

이것이 바로 내가 누구인지, 하나님이 누구인신지를 아는 자의 삶인 것 같다.
세례요한은 그렇게 살았다. 그래서 그 유명한 그의 고백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요 3:30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세례요한은 당시 자신의 인기나 모여드는 사람들의 숫자를 보며 얼마든지 오해하거나 자신의 작은 왕국이라도 건설할 수 있을만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를 확실히 알았고, 뒤에 오실 분이 누구인지를 확실히 알았다. 그는 그 분 뒤에 오실 그리스도를 예비할 자이고, 뒤에 오실 분이 그리스도임을 알았기에 그는 월권하지 않았고, 그는 그의 삶에서 헛된 시도를 하지 않고 불꽃처럼 살다가 갈 수 있었다. 

오늘 나는 내가 누구인지를 정확히 알고 있는가? 태국에서 선교사로 살아가는 이 삶에서 나는 누구인가? 나는 오늘도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고 있는가? 
그렇다면 하나님은 누구신가? 정말로 살아계시며 내 삶을 인도하시는 하나님, 전능하시며, 내 모든 것을 아시는 아버지로 오늘도 만나고 있는가? 내가 누구인지도,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도 모르면서 까불지 말자. 

작은 일에 기뻐하고, 작은 일에 슬퍼하지 말고, 
오늘도 내가 누구인지를 알고,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알아서 그 안에서 참 평안과 기쁨을 누리자. 세례요한과 같이 불꽃같이 살다가 가더라도, 내가 하나님의 자리에 앉으려는 시도를 하지 않는 내가 되자. 
묻지 않는 자는 듣지 않는 자는 내가 하나님이라고 시인하는 꼴이니 묻고, 듣는자가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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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Thinking)/Meditation2019. 2. 28. 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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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118:1-29 감사의, 찬양의, 삶의 이유가 되시는 하나님

오늘 시편의 시작은 ‘여호와께 감사하라’라고 시작한다. 그리고 시편의 전체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건지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 편이 되셨기 때문이라는 이유를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기이한 일을 행하셨음을 (22절) 말하고 있다. “건축자가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신약 성경을 읽으며 예수님이 인용하신 구절이다. 정말로 기이한 일이다. 인생에서 일어나기 어려운 일이다. 쓸모 없어서 버린 돌이 집에서 가장 중요한 머릿돌이 될 수 있는가? 그러면 그 집에 과연 안전하게 세워질 수 있는가? 가치 없어서 버린 돌이 가장 중요한 돌이 될 수 있는가? 어떻게 생각해봐도 불가능하다. 

마치 예수님께서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비유에서 하신 것 처럼 말이다.
마 19:24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

불가능하단 말이다. 마치 버린 돌이 머릿돌이 되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놀라는 그들을 향해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마 19:26 예수님께서 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하나님께는 불가능이 없다. 하나님은 다 하실 수 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시다. 그렇기 때문에 부자도 천국에 들어갈 수 있고, 낙타도 바늘귀에 들어갈 수 있고, 버린 돌도 머릿돌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지금 그런 하나님과 함께 걸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시편의 기자처럼 감사할 수 밖에 없다. 그런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내 편에 계시기 때문에 나는 두렵지 않은 것이다 (6절). 그래서 감사하지 않을 것은 아무것도 없다. 모든 것이 감사의 조건이요, 모든 것이 찬송의 이유가 되는 것이다. 

정말 감사한 일 한 가지는 장장 6개월을 거의 다 채우고 나서 어제 드디어 비자 초청장이 나왔다. 비자가 나온 것이 아니고 비자 초청장이 나온 것이다. 얼마전에 비자 문제로 공항에서 잡히고 난 경험이 있다 보니까 이 문제가 더 절실했었고, 아내와 마라의 비자 만료일이 다가오고 있어서 그 전에 초청장을 받지 못하면 또 다시 비자 연장을 위해 타국을 방문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여행에 따른 재정도 문제였고, 또 예준, 요엘이를 두고 가야 하기 때문에 여러가지로 신경이 많이 쓰였는데, 다행히 비자 초청장이 제 때에(?) 나와서 다음주에 캄보디아 프놈펜에 있는 태국 대사관으로 가서 비자를 받아오면 이제 비자 프로세스가 시작이 된다. 물론 예준이와 요엘이를 4일이나 두고 가야 하는 상황이지만...

애가 타는데,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저 기도하고, 기다리는 것 밖에는… 하나님이 여러 막힌 담 처럼 보였던 것 들 중에서 먼저 하나를 열어 주셨다. 사방이 막혀 있는 것 같은 이 힘든 마음 속에서 여전히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는 사인처럼 보인다. 그래서 이번 일이 더 감사하다. 

여전히 해야 할 일들이 많다. 여전히 기도로, 하나님과의 동행으로 풀어가야 할 문제들이 많다. 문제보다 더 크신 하나님을 만나길 원한다. 삶의 모든 일이 그 분 손에, 그 분의 계획 안에 있음을 잊지 말고, 겸손하게 주님 앞으로 더 가까이 나아가자. 정갑신 목사님의 워딩 중에 참 좋아하는 것이 이것인데 '더 중요한 것은 어디로 가느냐가 아니라 누구와 함께 가느냐이다’ 

오늘도 내 감사의 이유되시는 찬양의 이유되시는 내가 살아가는 이유가 되시는 주와 함께 걸어가기를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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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Thinking)/Meditation2019. 2. 27. 1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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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116:1-117:2 내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

가끔 이야기를 하다가 답답하면 우리가 벽에다 대고 이야기 하는 것 같다고 말을 할 때가 있다. 그만큼 양방향이 아닌 일방적인 커뮤니케이션이 어려운 것이다. 어제 본문에서 우리는 그러한 경우를 보았다.
115:6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며...
115:6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며…
우상은 우리로 하여금 답답하게 만든다. 생명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 우리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116:1 여호와께서 내 음성과 내 간구를 들으시므로…
116:2 그의 귀를 내게 기울이셨으므로…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벽에다 대고 이야기 하는 느낌을 결코 주지 않으신다. 그 분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며, 그 분의 귀를 우리에게 기울이시는 분이시다. 우리에게 관심이 많으시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이시다. 

요즈음 답답한 일이 좀 많다. 답답한 마음에 입을 닫고 조용하게… 그리고 약간은 얼이 빠져 있는 것 같은 느낌으로 어제 저녁을 가족들과 함께 먹는데, 예준이가 우리 집은 식사 시간이 너무 조용하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행복해야 할 가정의 식사 시간이 아빠의 고민으로 인해 아이들까지 염려하도록 만든 것이었다. 

하나님께 다 아뢰지 못하니까 내가 그 영향을 받아서 답답해 하고 있다. 내가 하나님 앞에다가 나의 마음을 토해 놓지 못하니까 그 영향이 아이들에게 미치고 있다. 하나님께서 내 기도를 듣고 계시는데도 염려하고, 말문을 닫고 있는 것이다. 

오늘은 조금 더 오래 기도하는 자리에 머물기 원한다. 들으시는 하나님 앞에, 귀를 기울이시는 하나님 앞에 머물러 있기 원한다.설교 준비는 조금 뒤로 미뤄두고… 그의 앞에 머물러 있는 시간 속에서 다시 나를 회복하기 원한다. 그의 안에서 쉼을 누리기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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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Thinking)/Meditation2019. 2. 26. 1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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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115:1-18 여호와께서 우리를 생각하사(기억하사)

시편 115편의 구조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눠진다. 1-8절까지는 우상의 허망함과 우상을 섬기는 자들의 의지의 허망함을 나타내고, 9-18절 까지는 우리가 우상이 아니라 하나님 한 분만을 섬기고 의지하며 그 분만 찬양해야 함을 말하고 있다. 

우상은 눈, 코, 입 모든 것을 갖추고 있는 듯 하지만 그것 에게는 생명이 없다. 숨도 못 쉬고, 그 모든 것들이 기능하지도 못한다. 그 이유는 사람이 만들어 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어떠하신가? 그 분은 우상이 아니다. 창조된 존재도 아니다. 그 분은 스스로 있는 자시다. 살아계신 하나님이시다. 그렇기 때문에 그 분은 우리를 생각하실 수 있다 (12절). 

이 생각하신다는 원어 ‘자카르'는 구약에서 매우 중요하고, 또 구약을 이끌어가는 원동력이 되는 단어 중 하나이다. 이 단어의 뜻은 ‘remember, 기억하다’란 뜻으로, 하나님께서 인간과 언약을 맺으시고, 그 언약을 기억하시고 우리의 인생에 계속해서 개입하시고, 우리 인간을 인도해 나가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기억하시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고, 지금도 일하시는 것이다.

그 분은 살아계신 하나님이시기에, 약속에 신실하신 하나님이시기에 여전히 악하고, 여전히 문제 많고, 여전히 하나님을 배반하는 우리도 기억하신다. 그리고 지금 오늘 이 순간에도 여전히 우리를 기억하고 계신다.

오늘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나 또한 그 분을 기억하는 것이다. 그 분이 내 삶 가운데서 어떠한 놀라운 일을 행하셨는지, 나를 얼마나 극심한 사망 가운데서 구하셨는지, 나를 얼마나 사랑하셔서 그 아들을 보내주셨는지, 새 생명을 주심 뿐만 아니라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살아가게 하셨는지, 그 것들을 잊지 말고 기억하는 것이다. 

기억하는 것 뿐만 아니라 부르신 그 모습대로 살아내는 것이 결국 내가 그 분께 드리는 찬양과 송축이다 (17-18절). 하나님께서 나를 기억하심으로 나를 우상의 허망한 것들에서 불러주셨다. 그리고 하나님을 만나게 하시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허망함 속에 살아가고 있는 태국의 영혼들을 위해 전할 수 있도록  불러 주셨다. 앞의 일들을 두려워 말자. 하나님이 나를 기억하신다. 그리고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내자. 

주일 설교를 준비하고 있다. 많은 부담과 고민들이 있다. 어떠한 형태로 전하는 것이 좋을지, 어떻게 내용을 전개하면 좋을지… 태국어는 잘 할 수 있을지...고민은 꼬리를 물고, 시간은 빨리 지나가기만 한다. 하지만 하나님이 나를 기억하신다는 사실을,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기억하신다는 사실을 전하는 시간이 되기를 원한다. 오늘도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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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Thinking)/Meditation2019. 2. 26. 1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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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114:1-7 주님께서 부르신 곳으로 가자.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왔다는 의미는 단순히 그들의 힘든 노예의 삶이 해방된 사실만을 말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왜냐하면 2절에서 유다는 여호와의 성소가 되고라고 설명하고 있는데, 성소는 하나님이 거하시는 전이기 때문이다. 이제 정말 그들은 ‘내(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이다. 정말로 출애굽 할 때 그들이 바로에게 설명한 것 처럼 ‘광야에서 절기를 지키기’ 위해서 애굽을 나가는 것이다.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 움직일 때, 바다가 도망하고, 요단이 물러갔다 (3절). 땅도 떨고 (7절), 반석을 쳐서 샘물이 난다 (8절). 하나님께 예배하려 나가는 이스라엘 백성들, 하나님과의 그 언약을 맺어 자신의 백성들이 된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돌보시고 인도하시는지에 대한 기록이다. 결국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이러한 놀라운 일들을 행하신다는 믿음이 없는 사람은,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은 이렇게 안전해 보이는 애굽을 떠나 아무것도 없어 보이는, 모든게 부족해 보이는 광야로 나가지 못한다. 

광야는 모든 것이 부족하지만, 모든 것이 완벽하신 하나님께서 부르신 곳이다. 
광야는 위험해 보이지만 모든 물과 산을 움직이시는 분께서 인도하시는 곳이다.
반면에 애굽은 모든 것이 풍성해 보이고, 모든 것이 있어 보이고, 안전해 보이지만, 그 곳에는 모든 것 되시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곳이다. 대신에 거짓 신이 존재하는 곳이다. 모든 것(Everything) 되신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곳은, 아무 것도 없는 곳(Nothing)인 것 과 마찬가지이다. 

광야로 나아가자. 그 곳이 광야이든 어디든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곳으로 나아가자.
모든 것 되시는 하나님께서 께서 계시는 곳으로 가자. 
하나님께서 변화시킬 것이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움직이실 것이다. 
내가 할 일은 하나님과 함께 가는 것이다. 그 곳이 광야이든,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이든 (시23)…
주와 함께 가는 길이다. 두려워 말자. 

계 14:4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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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Thinking)/Meditation2019. 2. 22. 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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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111:1-10 여호와를 경외함

결국 모든 키를 쥐고 있는 것은 여호와를 경외함이다. 
111:10 여호와를 경외함이 지혜의 근본이라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다 훌륭한 지각을 가진 자이니 여호와를 찬양함이 영원히 계속되리로다

우리의 삶을 움직이는 그 무엇인가가 때로는 필요한 재정, 때로는 유력한 누군가의 말, 때로는 우리를 움직이는 내 안의 어떠한 동력(우상)일 때가 많지만, 오늘 시편 본문을 보면서 느끼는 것은 결국 그 모든 것을 넘어 이 모든 것에 역사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2절에 여호와께서 행하시는 일들이 크시오니라고 말하고 있으며, 7절에서는 그의 손이 하는 일은 진실과 정의이며 그의 법도는 확실하니라고 언급하고 있다. 하나님은 실수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은 공의로우시며, 하나님은 영원토록 그의 언약을 세우시며, 그는 거룩하신 분이시다 (8절). 

따라서 우리가 할 일은 지혜를 가지는 것이고, 지혜를 가지는 키는 바로 '여호와를 경외함'이다. 유력한 그 무엇인가를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만 경외해야 하는 것이다. 경외한다는 것이 무엇일까? 여러가지로 표현할 수 있겠지만 아마도 지금 내 삶에서 일어나는 일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인정하는 것, 참새 한 마리도 그냥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 (마 10:29), 하나님께서 지금도 내 삶에 역사하시고, 내 삶을 다스리신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 그것이 지금 오늘 내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방법이다. 

이미 임하신 하나님 나라 안에서 살아가며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며,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경외함이다. 그 어느 것도 모르겠고, 한치 앞도 잘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부르신 이 자리에서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바로 오늘을 살아가는 것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다. 

내가 하려고 하지 말자. 재정을, 말을, 유력한 누군가를, 내 안에 우상들을 의지하지 말자.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 경외하자. 
오직 하나님만… 오직 하나님만…
그래서 그 분 안에 흘러넘치는 지혜를 누리는 하루가 되자. 지혜는 경외함으로만 얻을 수 있다. 
지혜를 얻는 자가 되자. 그래서 지금 이 상황에서 나에게 가장 적절한 지혜를 구하자. 주님 나를 도우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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