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Thinking)/Meditation2019. 3. 29. 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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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 10:13-16 ‘아이다움'

하나님 나라는 어린 아이와 같은 자들의 것임을 예수님께서 말씀해주셨다 (10:14). 왜 어린아이와 같은 자들일까? 어린 아이들이 뭘 했길래? 라는 생각이 들었다. ‘공로’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나 보다. 어쩌면 어린아이와 같다는 말이 뭘 했다가 아니라 '뭘 하지 않아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어린 아이들은 엄마, 아빠를 믿는다. 뭘 해서 믿는게 아니라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믿는다. 왜냐하면 엄마, 아빠이기 때문이다. 모든 믿음과 신뢰가 부모에게로 향해있다. 아이들이 집 정리를 하는가? 집안일을 하는가? 아니다 그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그들이 부모에게 보여주는 신뢰로 이 가족 구성원이 되어 집에 같이 사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해서 행위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그냥 가족이기 때문에 들어가는 것이다. 자녀로써 아버지되신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다. 믿는 것이다. 하나님께 아뢰는 것이다. 마라와 있으면 이러한 ‘아이다움'을 많이 느끼게 된다. 

마라는 아빠를 사랑한다. 
아빠를 믿는다. 
마라는 아빠한테 물어본다. 
마라는 아빠와 뭐든 하고 싶어 한다. 
이것이 복음의 가치관이다. 우리는 아무것도 한게 없지만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용납 받은 것이다. 
그런데 나는 아버지 하나님을 이렇게 대하고 있는가? 

하나님 앞에서 ‘아이다움’을 가진 내가 되고 싶다. 안다고, 할 줄 안다고, 이해했다고, 뻐기지 않고, 아버지와 함께 하고 싶어하는 그 아이의 모습이 나에게도 있기를 원한다. 

그런데 현실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자꾸만 다음을 생각하게 된다. 
항상 저 사람의 말이 뭔가를 염두에 두지 않은 진심일까를 생각해보게 된다.
내가 진심을 대한다고 해서 상대방도 진심으로 대하는 것이 아님을 자꾸 알아가게 된다.
사람들이 보는 나의 모습에 자꾸 나의 모습을 맞춰가려고 한다. 

다시 복음의 가치관이 내 안에서 회복되기 원한다.
손해 보더라도, 배신 당할지라도 믿어주고, 사랑하고, 용납 하기를 원한다. 

나이가 들어갈 수록 깊이는 깊어지지만 ‘아이다움'을 잃어버리지 않는 내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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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19. 3. 27. 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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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 9:38-50 Not my words, but His Words

주님의 제자들에게 요구되는 또 다른 기준은 어제 보았던 하향성의 삶을 추구와 더불어 판단의 기준 또한 우리가 아니라 주님의 말씀에 가장 큰 권위를 두는 것이다 (Not my words, but His Words). 38절에서 어떤 자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것을 요한이 보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재미있는 것은 귀신을 내쫓는 것은 주의 이름으로 한다고 말하면서 그 이후에는 그것을 판단하는 주어가 계속 ‘우리’로 나온다.

38 요한이 예수께 여짜오되 선생님 우리를 따르지 않는 어떤 자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를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

결국 그 사실을 본 것도 <우리>였고, 귀신을 내쫓은 사람이 따르지 않은 것도 예수님이 아니라 <우리>였던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금한 것도 결국 <우리>였다. 제자들에게 중요한 판단기준은 예수님의 말씀이 아니라 귀신을 내쫓은 이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한 것이 아니라 결국 <우리>였을 뿐이다. 얼마나 자주 말씀보다 <우리> 혹은 <나>의 느낌과 판단과 생각을 더 중요한 자리에 올려놓고, 그것을 말씀보다 더 의지하여 다른 사람을 쉽게 판단하는가? 

제자들의 모습이 나의 모습이다. 언제나 내가 이해가 되어야 하고, 언제나 내가 느끼는 감정이, 나에게 든 생각이 더 중요하여서 대부분 상황을 매우 객관적으로 보는 아내가 그게 아닌 것 같다고 말해도 그게 잘 들어오지 않는 것이 나의 모습이다. 예수님은 오늘 말씀하신다.

40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니라
41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50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하시니라

주님의 이름으로 일하는 자들은 우리의 경쟁상대가 아니다. 그들과 경쟁해서 무엇을 하겠는가? 우리가 해야 할 것은 그들에게 필요한 것들을 공급하고, 그들과 화목하는 것이다. 그들과 화목하는 것 뿐 아니라 함께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 가는 것이다. 내 안에 있는 판단들을 멈추고, 내 감정들을 추스리고, 내 생각, 내 감정, 내 말보다 더 중요한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기 원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 무엇보다도 더 중요하다고 내 마음에 결정하고 그렇게 붙들 때에 그제서야 내 생각이 멈추고, 내 감정이 멈추고, 내 말이 멈출 것이다. 

오늘도 내 삶에 Not my words, but His Words의 정신으로 살아내기 원한다. 내 생각, 내 감정, 내 기준, 내, 내, 내, 내… 제발 멈추자. 나는 그럴 힘과 능력이 있는 존재가 아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그 분으로 살아내는 하루 되기 원한다. 내 힘으로 살아내려고 하는 이 결정도 멈추기 원한다. 오직 그 말씀의 권위와 말씀의 능력을 의지하기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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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19. 3. 26. 1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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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 9:30-37 하향성의 삶

제자들은 예수께서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날 것을 이야기 하시는데도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30-32절). 이해만 못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은 심각하신 예수님의 말씀과 상관없이 누가 큰지에 대해서 싸우고 있었다 (33-34절). 제자들이 이해한 하나님 나라가 어떤 것인지 알 수 있어 보이는 대목이다. 그들은 여전히 하나님의 나라가 세상 나라와 같은 방식으로 세워지고 움직여질 것을 기대하고 있었다. 강자가 약자를 다스리고, 높은 곳에 앉은 자가 낮은 곳에 앉은 자를 다스리는 세상의 방식 말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의 생각이 틀렸음을 가르쳐 주신다. 우리가 끝 사람이 되어야 하고,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함을 가르치신다 (35절). 그리고 어린아이를 영접하는 것이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고,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임을 말씀하신다 (37절). 

예수의 제자가 가야 할 길은 섬기는 길이다 (35절). 예수의 제자가 가야 하는 길은 세상의 방법과 다른 거꾸로 된 길이다. 왜냐하면 제자는 스승을 따라야 하는데, 스승이신 예수님께서 그 길을 걸어가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시면서 예수님이 가신 그 길은 군림의 길이 아니였고, 높아지려는 길이 아니었고, 올라가려 하는 길이 아니었다. 

오히려 낮아지는 길이었고, 제자들의 발을 씻는 길이었고, 순종하는 길이었고, 죽음으로 가는 길이었다. 예수님은 하향성의 길을 걸어가셨고, 이것이 바로 그 분의 제자들에게 요청되는 삶이었다. 세상과 다른 방법으로 살아가는 삶이 익숙해야 함에도 아직도 이러한 삶은 불편하고 어렵고, 때로는 두렵기도 하다. 

하지만 제자는 스승이신 예수님이 걸어가신 그 길을 따라가야만 한다. 거꾸로 된 (upside-down) 이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이 내 삶에서도 드러나야 한다. 상향성을 추구하는 삶이 아니라 하향성을 추구하는 삶을 오늘도 걸어야 한다. 

오늘 내가 올라가려고 하는 부분은 무엇일까? 여전히 타인들로부터의 인정의 욕구가 꿈틀거리고, 여전히 하나님 나라의 거꾸로 된 가치관이 아니라 제자들과 같이 높은 곳에 앉고 싶어하고, 절대로 아닌척 하며 높은 곳을 누리고 싶어하는 것이 나 아닌가? 이 올라가려는 상향성을 포기하는 것이 바로 나의 제자도이다. 오늘을 예수의 제자로서의 삶이다. 

고개를 드는 것은 하늘의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으로 충분하다. 고개를 뻣뻣하게 들지 말고, 겸손하게, 고개를 숙이고 예수님의 제자로써 예수님이 걸어가신 길을 걸어가는 오늘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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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19. 3. 25. 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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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 9:14-29 기도하자

귀신 들린 아이에게서 귀신을 내쫓아 달라 하였으나 제자들이 하지 못했다 (18절). 이를 보고 예수님은 믿음이 없는 세대라고 말씀하셨다 (19절). 그리고 예수님은 귀신 들린 아이에게서 귀신을 쫓아 내셨다. 제자들이 묻는다. 우리는 왜 귀신을 쫓아내지 못합니까? (28절) 예수님은 답하신다 

29절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

믿음이 없는 세대에게 기도가 부족함을 말씀하셨다. 다른 본문에서는 이 부분을 기도와 금식이라고 번역한 곳도 있다. 기도 만이든, 혹은 기도와 금식이든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기도를 하는 것이다. 기도를 하면서 하나님께서 능치 못함이 없으심을 고백하는 것이다 (23절). 기도없는 사역이 불가능하심을 오늘 예수님께서는 보여주셨다. 

우리 형제, 자매들을 위해 가족들을 위해 가장 부족한 것 중 하나가 시간을 떼어서 기도하는 것인 것 같다. 예수님이 본을 보이신 것과 같이 새벽 미명에 한적한 곳으로 가서 기도하는 것이 가장 어렵다. 분주함 가운데서 하나님을 찾고 그 분께 기도하는 것이 가장 어렵다. 하지만 예수님은 오늘 하라고 말씀하신다. 그렇게 순종하기 원한다. 

아이들을 위해, 아내를 위해, 우리 형제, 자매들을 위해, 교회를 위해… 오늘은 기도하기 원한다.
영적인 능력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일하시도록 그렇게 기도하기 원한다. 묵상을 마치고 평소보다 더 길게 기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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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19. 3. 25. 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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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 8:27-9:1 예수님에 대한 사랑 이웃들에 대한 사랑과 또한 그들을 향한 희생으로 점철된 삶이 바로 예수님을 따르는 길이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한 후에 드디어 자신이 십자가를 지셔야 함을 이야기 하신다. 하나님의 일은 십자가를 지는 것이고, 인간의 생각은 이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 베드로는 예수님을 붙들고 항변한다 (32절). 하지만 예수님은 베드로가 하는 일이 하나님의 일이 아니라 사람의 일을 생각하고 있음을 이야기 하고 있다 (33절). 하나님의 일은 인간이 생각하지도 못하고, 들어도 이해하지 못하는 하나님의 지혜의 신비인 것 같다.이와 마찬가지로 34절부터는 하나님의 일에 대해서 다시 설명하신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쫓는 것 (34절)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고,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35절)

잘 알고 있던 말씀들이지만 역시나 하나님의 일은 쉬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 자기를 부인하라고 한다.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하신다. 가장 귀한 나의 목숨을 잃으라고 하신다. 나의 삶을 버리라고 하신다. 예수님과 복음을 위해 우리의 삶을 드리라고 초청하신다. 그래야 우리가 구원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을 따르는 길, 즉 하나님의 길은 우리의 생각과는 항상 반대일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언제나 우리의 희생 (자기부인)이 필요하고, 부끄러움의 상징인 십자가를 져야 한다. 다른 사람의 삶을 위해 나의 삶을 내어주어야 한다. 예수님에 대한 사랑, 이웃들에 대한 사랑과 또한 그들을 향한 희생으로 점철된 삶이 바로 예수님을 따르는 길이다. 

여기까지 묵상하고 보니 예수님을 따르는 길이 힘들 것 같고, 어려울 것 같고, 뭔가 부담이 되는 길 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이 길은 어렵고 힘들고, 부담만 되는 길이 아니다. 이 길은 기쁨으로 걸어가는 즐거움으로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34절) 길이기 때문이다. 나 홀로 가는 길이 아니라 예수의 제자로 살아가기 원하는 사람들이 함께 걸어가는 길이고, 그 길 위에는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걷고 계시기 때문이다. 이렇게 쫓아가는 자들을 예수님이 부끄러워 하시지 않기 때문이다 (38절). 그리고 걔중에는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9:1)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사람들의 (29절) 사랑과 희생을 통해 이 땅 위에 임한다 (9:1). 
오늘도 더 내가 이렇게 살아가기 원한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또한 이 사랑을 바탕으로 이웃을 위해 예수님을 모르는 자들을 위해 희생하는 이 즐거운 길을 걸어가기 원한다. 나 홀로가 아니라 세상 끝날까지 함께 하시는 그 분과 함께 말이다. 조금 더 불편하게, 조금 더 낮은 자세로, 그리고 더 많이 탕감받은 자의 삶으로 오늘도 살아가기 원한다. 

내가 오늘 희생할 수 있는 것은? 아이들에게, 아내에게, 그리고 우리 형제, 자매들에게… 
좀 더 움직이고, 좀 더 시간을 내어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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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19. 3. 22. 1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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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 8:14-26 나의 관심과 예수님의 관심사를 일치하자. 

예수님의 칠병이어의 기적을 맛 보고 난 후에도 제자들은 여전히 떡을 걱정한다. 가져왔어야 하지만 가져오지 않은 떡을 걱정한다. 왜냐하면 지금 제자들에게 중요한 것은 영적인 것들이 아니라 예수님이 주실 수 있는 ‘떡'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예수님은 바리새인들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말씀하신다. 누룩은 바리새인들과 헤롯이 제자들에게 줄 수 있는 나쁜 영향력일 것이다. 관심사가 다르다. 그러니 서로 대화가 되지 않는다. 

칠병이어라는 놀라운 예수님의 기적을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경험해도, 제자들이 보는 것과 예수님이 가르쳐 주시길 원하는 것이 서로 다르다. 우리는 보고 싶은 것을 보고, 듣고 싶은 것을 듣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아무리 설명 해주셔도 (17-21절) 마음이 둔하여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21절). 

하나님이 정말로 나에게 들려주시는 원하는 이야기들을 내 마음이 둔하여, 내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들어서 제대로 내 마음 밭에 뿌리내리지 못하게 되지 않기를 원한다. 제대로 듣고, 제대로 배워 나에게 하시는 말씀을 듣고, 더 순종할 수 있는 내가 되기를 원한다. 

특별히 요 몇일 미국 그레이스 포인트 교회의 토니 전도사님과 제이 전도사님과 태국 선교지 정탐 방문 함께 다닐 수 있는 기회들이 있었다. 함께 사역지들을 동행하며 많은 교제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레이스 포인트 교회의 가치와 핵심 비전, 그리고 사역의 모습 등을 들을 수 있었다. 작은 지역 교회에서 시작하여 지금은 청년 리더들이 1,000명이 넘는 교회가 되었고 그 리더들 중에서 70%이상이 비기독교인이 개종하여 헌신하게 되었다는 그들의 스토리는 정말 내 마음을 뛰게 만들었다. 교회 개척의 비전을 통해 미국 전역에 29개의 대학에 교회를 개척하였고, 또한 지금도 계속 개척중이다. 또한 초창기 리더들의 비전이 세대를 넘어 전해져서 교회개척과 사람을 세워가는 비전이 계속 확장되고 있다고 한다. 아이들을 위한 케어, 함께 섬기는 모습, 또 부부를 위한 특별한 시간들을 보내는 방법, 냉장고 체크 리스트 등 들으면서 많은 생각들과 도전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여전히 계속 자신들의 연약한 부분들을 함께 공유하며 시스템을 만들어 가는 모습들도 참으로 인상적이었다. 어떻게 이러한 교회가 알려지지 않았을까? 라는 질문이 들 정도였다. 

여러가지 변화의 시기를 겪고 있는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왜 이 분들을 만나게 하셨을까? 라는 질문들이 당연히 들어야 하고, 내가 이 상황에서 마음이 둔하지 않아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들을 잘 깨달을 수 있게 되기를 원한다. 여전히 이 분들을 만난 이유에 대한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내가 듣고 싶은 것, 내가 보고 싶은 것만 보아 예수님과 다른 이야기만 하는 제자들과 같지 않기를 원한다. 

‘청년’들을 생각하고, 단어만 들어도 가슴이 뛴다. 그런데 나와 동일한 마음을 가지고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며 너무 행복한 마음이 들었다. 주님이 나에게 이를 통해서 말씀하는 것이 무엇이든 잘 들어서, 잘 배우고, 잘 깨닫기를 원한다.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들이 나에게 나쁜 영향력을 미치지 않을 수 있도록 나를 지켜내기 원한다. 오늘도 나의 관심사가 예수님의 관심사에 일치되기를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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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19. 3. 20. 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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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 7:24-27 식탁 아래 그 자리를 잊지 말자. 

수로보니게 여인… 
그녀는 성경에서 참으로 독특한 존재이다. 이방인들이 많이 등장하는 성경이지만, 내 기억상으로는 어느 이방인도 자신이 '개 같은 존재'임을 이야기하거나, 반대로많은 이방인들의 믿음을 칭찬하셨던 예수님도 이 여인에게 처럼 강한 어조로 구원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음을 그리고 이방인들은 그 부스러기를 먹는 존재들임을 말씀하신 사건은 없는 것 같다. 한 마디로 무언가 특별한 그 무엇인가가 있는 것 같다.

예수님이 쏘아 부칠 때에 그녀는 그 쏘아 부치는 말에 흔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여전히 자신의 딸을 고칠 수 있는 분이 예수님 밖에 없음을 확신했기 때문에 그 말에 흔들리지 않고, 계속해서 은혜를 구했다. 
“주여 옳소이다마는…” (27절)

주님께서 쏘아 부치는 말이 분명 맞습니다 라고 고백하는 중이다. 하지만 이 여인은 자녀들이 아니라도, 설령 개일지라도 그 주인의 식탁에서 나오는 은혜를 누릴 수 있음을 고백한다.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나는 내가 늘 자녀의 자리에 있기를 원했다. 물론 나는 하나님의 자녀이다.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이시다. 
하지만 원래 내 자리는 저 여인과 같이, 식탁 아래의 개와 같은 이방인의 자리였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우리를 양자로 불러 주신 것이다. 
수로보니게 여인을 불러주신 것 처럼… 그녀의 믿음을 보신 것 처럼… 자격없는 나를 자녀로 불러 주셨다. 
이해할 수 없는 은혜이다. 

복음의 핵심은 내가 누구인지,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아는 것이다. 
하지만 어느새 내가 자녀라는 것이, 내가 상속자라는 것이 머리 속에 들어오면서 내가 원래 누구였는지를 점점 잊게 된다. 은혜로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 나의 어떠한 행위들이나 공로들이 들어오게 된다. 알고보면 별다를게 없는데도… 다른 척 한다. 
교만이다. 

내가 은혜로 지금 이 자리에 서 있음을 결코 잊으면 안된다. 은혜를 잊어버리니 복음이 더 이상 감사하게 느껴지지 않는 것이다. 
당연한 것이 되어 버린다. 내가 자녀인 것이 당연한데 무엇이 감사하겠는가? 

복음을 기억한다는 것은 내가 결코 지금 이 자리에 서 있을 수 없는 죄인인데, 예수님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지금 이 자리에 서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복음을 실천한다는 것은 나와 같은 죄인들을 위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해주신 것 같이 값 없는 사랑으로 그들을 온전하게 사랑하는 것일 것이다.

오늘 하루 내가 당연하게 생각했던 것들을 감사하기 원한다. 
우리 가정과 태국의 형제, 자매들을 위해서 잊지 않고 기도해주시는 분들
어려운 환경 중에도 재정으로 후원해주시는 분들과 교회들
사랑하는 우리 가족들, 특별히 투병중에 계신 우리 아빠, 그리고 많은 사랑하는 동역자들
그리고 내가 값 없이 받은 구원...

당연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믿기만 하면 구원받을 수 있다고 소개하는 복음 조차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나머지를 다 담당하신 것이 아닌가?
내가 누구인지(얼마나 큰 죄인인지.. 구원 받을 수 없는 존재인지를) 알고, 하나님이 얼마나 크신 분인지를 아는 그런 하루가 되고 싶다.
그리고 어떤 것도 당연하게 생각하지 말고 진심으로 감사하며 더 사랑하기 원한다. 

내가 원래 있어야 했던 식탁 아래 그 자리를 잊지 않는 자가 되기 원한다.
은혜가 은혜로, 사랑이 사랑으로 느껴질 수 있는 나의 자리를 잊지 않으며, 그 은혜와 그 사랑에 감격해 오늘 하루를 살아낼 수 있는 내가 되기를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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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Thinking)/Meditation2019. 3. 19. 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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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 7:1-23 무엇이 더 옳은가? 전통인가? 말씀인가? 

오늘 논쟁의 핵심은 전통이 옳으냐, 아니면 하나님의 계명이 옳으냐이다.하나님의 계명이 이야기 하지 않는 멍에를 전통이란 이름으로 지게 하였기 때문이다. 손을 씻는 것이 하나님의 직접 말씀하신 계명과는 상관이 없다. 하나님의 계명은 자신을 부정한 것들로 부터 지켜 거룩함을 지킬 것을 요청하였으나 인간의 전통(장로들의 전통)은 (5절) 손을 반드시, 항상 씻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안 씻으면 그것이 정죄함을 가져오게 된다. 그리고 그 전통이 하나님의 계명 보다 더 위에 존재하는 것 처럼 지킬 것은 강요하고 있다. 

전통이란 좋은 것이다. 조상들의 지혜, 경험, 그 속에서 우러나오는 귀한 것이다. 하지만 그 전통이 하나님보다 앞설 때, 그것은 전통이 아니라 멍에가 되는 것이다.갈라디아 교회의 성도들에게는 그것이 할례였다. 할레는 매우 좋은 전통이고, 거룩함과 구별됨을 상징하지만 그것이 할례라는 제도 그 자체를 넘어서 그것이 우리의 구원을 좌지우지할 만한 무엇인가가 된다면 그 할례는 폐해야 하는 것이 마땅하다. 오늘 이 전통도 그러하다. 손 씻는 것이 뭐가 나쁘겠는가? 그런데 손 씻는 것이 서로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계명보다도 앞선다면 손 씻는 것이 우상이 되는 것이다. 좋은 전통이 얼마든지 우상이 되고, 멍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신앙생활에서 전통과 하나님의 말씀을 구분하는 것은 매우 필요해 보인다. 전통이 좋은 것임을 알기에 존중하지만 전통이 결코 하나님의 말씀보다 앞서서는 안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전통은 전통으로 가능하면 지켜져야하겠지만 전통보다 더 중요한 것이 하나님이 말씀임을 결코 잊지 말아야겠다.나의 삶을 돌아보면서 아이들에게 자주 신앙의 전통을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강조하는 나를 보게 된다. 찬양은 이렇게 해야 해, 이건 서서 해야 해, 저건 앉아서 해야 해… 등등으로 아이들에게 신앙에서 필요한 마음과 태도를 가르치기 보다는 때때로는 내가 가지고 있는 전통을 가르치려고 할 때가 많다. 특별히 나는 기존의 것을 굳이 바꾸려하지 않는 태도를 (약간 보수적인..) 가지고 있기 때문에 아이들의 새로운 사고와 생각들을 가끔 아빠의 권위라는 것으로 누르려고 할 때가 많다. 차근차근 들어주기 보다는, 이미 판단하고, 재단하고, 혼내거나 뭐라고 하고 있는 것이다. 신앙의 핵심이 드러나는 태도에 있지 않고, 마음에 있지 않은가? 신앙의 핵심은 얼마나 경건한 모습으로 예배를 드리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는가가 아닌가? 

선교사로 살아가면서 나 또한 외식 할 때가 얼마나 많은가? 목소리로, 사용하는 언어로, 드러나는 표정으로, 행동으로 외식하지 않는가? 마음 속에는 음란한 생각들과 욕심들과 탐욕으로 가득 차 있으면서도 겉으로는 얼마나 거룩한 용어와 거룩한 표정으로 가릴 때가 많은가? 진정한 복음이 나를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외식이 나를 움직일 때가 얼마나 많은가?다시 말씀으로 돌아가야한다. 어떤 것도 하나님의 말씀보다 우선시 될 수 없다. 외식은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을 의식할 때 나타나는 현상이다.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고 사람을 의식할 때, 진짜 나를 감추기 위해서 나오는 것이 외식이다.외식하지 않으려면 다시 말씀 앞으로, 다시 복음 앞으로 계속해서 나아갈 때에만 가능한 것이다.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사람이 되기 원한다. 
사람의 인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정을 구하는 사람이 되기 원한다.
사람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 때문에 살아가는 사람이 되기 원한다. 

오늘 하루도 아이들에게 전통이 아니라 복음의 가치를 전하는 아빠가…
오늘 하루도 아내에게 전통이 아니라 사랑을 말하는 남편이…
오늘 하루도 우리 형제, 자매들에게 전통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의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가 되기를 원한다. 
그렇게 오늘 하루를 살아내기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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