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Thinking)/Meditation2018. 9. 26. 1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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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큐티를 매일 나누는 이유는 현지에서 사역하는 선교사가 말씀을 붙들고 어떻게 살아가는지, 그 수 많은 연약함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어떻게 인도하시는지, 어떠한 은혜를 누리는지를 나누고 싶어서 였습니다. 사실 한, 두 달에 한번 보내는 기도편지만으로는 공유할 수 없는 부분들이 너무 많고, 그것들을 통해서는 저의 겉모습만 보고 잘하고 있다고만 하실 것 같아서…(이 것 조차도 오지랍일수도 있겠지만…), 그리고 이 사역에 동참해주시는 분들과 함께 이 길을 걸어가고 싶어서 매일 보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동의를 구하고, 때로는 동의 없이 시작해서 보내고 있는데, 혹시 받으시는게 불편하시면 바로 말씀해주세요. 샬롬 :-)

시 95:1-11 그래도 오늘을 다시 살아갈 힘을 낼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이 나를 통해 찬양 받기 원하신다는 것이다. 

오늘 본문의 구조는 1-5절까지에서는 1, 2절은 찬양을 하자라고 권유하고 3-5절에서는 그 이유를 이야기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가장 크신 왕이시고, 그 분이 모든 만물을 지으셨기 때문이다.
6절에서도 하나님을 찬양하자고 하며 7절에서는 그 이유를 그 분이 우리 하나님이시고, 우리는 그의 백성이고, 그의 기르시는 양이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사실 하나님은 온 우주 만물의 찬양을 늘 받고 계신 분이시다. 모든 만물이 주의 아름다우심과 주의 행하신 일들에 대해서 쉬지 않고 외치고 있다. 왜냐하면 그것들이 모든 창조물들의 할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우리에게는 우리가 창조 받았다는 이유 (3-5절) 말고도 7절에서 다른 이유를 말씀해주실까? 
하나님은 우리와 늘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싶어 하신다. 처음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드시고, 생기를 불어 넣어주신 그 때부터 지금까지… 그 분이 우리의 하나님이 되셨고, 그 분이 우리 아버지가 되셨고, 우리는 그 분의 백성으로 자녀로, 아들로, 딸로 불러주신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모든 만물보다 더 찬양해야 할 이유이다. 
오늘 본문을 보면 찬양은 우리의 입술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으로 하는것이다. 8절에는 우리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지 말 것을 이야기 하고, 우리의 조상들처럼 하지 말 것을 이야기 하고 있다. 그들이 하나님을 의심하고, 마음이 완악하여 하나님을 멀리한 것과 같은 삶이 아니라 우리는 오늘 우리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가장 가까이에서 마음을 열고 찬양하라는 것이다. 

그렇게 하루를 살아가기 원한다. 내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내가 하고싶은데로, 내가 원하는데로 하는 삶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을 기억하고, 그 분이 나의 아버지이심을 기억하고, 그 분이 나의 하나님이심을 기억하여 입으로 그 분을 찬양하고, 내 삶으로 그 분을 찬양하는 하루를 살고 싶다. 
오늘 아침 후회되는 일들을 좀 글로 써 보았다. 사실 인생을 돌아보면 늘상 후회되는 일 투성이다. 하지만 후회되는 일들을 적고 정리하면서 드는 생각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다시 힘을 내어 오늘을 살 수 있는 것은 그 하나님께서 나의 아버지이시란 것이다. 그 하나님께서 여전히 내 삶을 통해 찬양을 받으시고, 영광을 받으시려고 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 하루도 다시 힘을 낸다. 늘 내 삶이 하나님께 좋지 않은 모습이고, 영광을 돌리기 보다는 걱정과 근심이었겠지만… 그래도 하나님께서 내 삶을 사용해 주시고, 계속해서 내 삶을 통해 영광과 은혜를 누리려고 나를 자녀로 아들로 부르셨으니, 다시 오늘도 살아갈 힘을 낸다. 오늘을 가벼이 살지 않으리라. 후회없이 정성스럽게 살기 원한다. 


*오늘 아침에 쓴 글을 같이 첨부합니다. 마음에 든 생각들을 쓴 글이라 두서가 없지만.. 제가 하고 있는 생각들이기에…

태국에 다시 돌아와서 이제 3개월을 지나면서 느끼는 세 가지 후회가 있다.

첫 번째는 언어의 흐름이 끊어진 것에 대한 후회이다. 3년 반을 태국에 있었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서 거의 4년을 있다가 나오니 결국 태국어가 다시 바닥으로 간 느낌이다. 뭐 한국에서도 늘 느꼈던 것이지만 제대로 하는 언어가 없다. 한국어, 영어, 태국어 다 엉망이다. 물론 한국 본부 사역과 그간 지낸 시간을 생각하면 감사한 시간이었음에는 분명하지만 언어의 관점으로만 보면 그렇다.

두 번째는 그렇게 최선을 다해 살았다고 생각했던 첫 번째 텀 사역이 내가 정말 최선을 다했었을까? 란 후회이다. 정말 후회를 남기지 않을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요즈음 돌아보니 후회가 되는 일들이 많다. 내가 마음을 쏟았던 우리 형제, 자매들을 더 만나고 더 교제해야 하는데 아직은 쉽지가 않다. 우리 형제, 자매들과도 4년의 갭이 있는데, 내가 더 가까이 가려고 노력해야 되는 부분일 것이다.

세 번째는 좀 더 지혜롭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이다. 늘 너무 지금에만 최선을 다하고 있으니 앞을 바라보지 못할 때가 많았던 것 같다. 항상 모든 힘을 다해 지금을 산다고 생각하는데, 지금을 열심히 살며 미래도 보고 필요한 준비들을 했었어야 했는데, 조금만 더 앞을 바라보고 예상을 하고 준비를 했었으면 하는 후회이다. 사실 앞을 바라보는 지혜가 없었던 것 같다.

후회한들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냥 오늘을 다시 최선을 다해 사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 그리고 이제는 오늘만이 아니라 조금 더 미래를 보고 무엇을 준비해야 할지, 하나님께서 어떻게 인도해 나가시는지를 함께 보기 원한다.
사실 내가 내일을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지혜를 구해야겠다. 오직 주님께서 도우시길 간구한다. 가볍게 살지 말자. 내가 이 자리에 서 있는 이유를 발견하고, 오늘도 달려가자. 오늘 하루도 정성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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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18. 9. 25. 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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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 13:18-25 기도와 (주님으로 부터, 사람으로 부터) 들음을 통해 조금 더 성숙하기 원합니다.

히브리서를 마무리하면서 히브리서 저자의 요청은 자신을 위해 기도해달라는 것이었다 (18절). 기도의 제목은 자신이 더욱 속히 돌아갈 수 있도록 기도해달라는 것이었다 (19절). 그리고 그들을 위해서 축복하며 기도했다 (20-21절). 성도간의 교제는 만나서 식사를 하고, 삶을 나누고 하는 것과 더불어 기도이다. 자신의 기도제목을 나누고, 또 다른 형제, 자매들을 놓고 축복하며 기도하는 것이다. 우리 가정과 태국선교를 위해 기도로 계속해서 섬겨주시는 분들이 계시다. 그 분들에게 더욱 더 기도를 부탁하고, 나 또한 더욱 기도해야겠다. 하나님께서 그 분들을 그리스도의 은혜로 축복해 주시고, 그 분들의 삶을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해달라고 말이다. 한 분 한 분 떠올리며 오늘은 축복하기 원한다. 진심으로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수고와 헌신을 하나님의 방법으로 갚아 주시길 주님의 손에 의탁드린다.

22절에는 권면의 말을 용납하라고 말씀하신다. 사실 이게 가장 어렵다. 아내와 다퉜던 일도 사실 아내의 권면의 말을 제대로 듣지 못해서였다. 권면의 말, 사랑의 말인데 그게 왜 나를 비난하는 말로 들리고, 공격하는 말로 들리는지... 아마 내 안에 그런 부분이 실제로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존재하는 연약함이었기에 잘 듣지 못하고 그 권면에 오히려 기분이 상하고 마음이 상하는 것이었다. 인정하기 싫은 나의 모습을 아내가 알고 있는 것이 싫었던 것인지.. 아니면 여전히 그런 나의 모습을 포장하고 싶었던 것인지... 어느정도 일치하는 이야기가 있는가 하면 또 그렇지 않은 이야기도 있으니 이런 모든 감정들이 혼합되어 결국은 분노나 상함으로 나타나는 것 같다. 
권면의 말을 용납하는 하루가 되기 원한다. 아내의 말에 더욱 귀를 기울이자. 내가 원했던 방법과 말은 아니었지만 아내만큼 나를 알아주고, 위해주는 사람이 또 어디에 있을까? 내 연약함을 드러냄으로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는 하루가 되기 원한다. 주님께서 듣지 못하는 귀와 상한 마음을 만져주시기 원한다.

좀 더 기도하기 원한다. 기도와 (주님으로 부터, 사람으로 부터) 들음을 통해 조금 더 성숙하는 내가 되기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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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18. 9. 24. 1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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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 13:1-17 형제를 사랑하기 위해 주님을 깊이 바라보자. 

어제 큐티가 사람과 사람 사이의 화평을 추구하자였는데, 완전히 실패했다. 저녁 이후 아내와 말다툼이 있었고, 아내에게 소리를 질렀다. 아내와 거의 싸우지 않는데, 최근 몇년동안 가장 크게 잘못한 것 같다. 무슨 내용으로 다퉜고, 무슨 내용 때문에 화가 났고 보다도 내가 아내에게 소리를 지르고, 아이들이 소리지르는 아빠로 인해 느꼈을 공포감에 참 미안했고, 그리고 묵상한 내용이 삶에 아무런 적용이 없었음에 무력감을 느꼈다. 남편으로써 아빠로써 완전히 실패한 하루였다. 말씀묵상을 왜 하는지에 대해서도 다시 한번 고민해보게 되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을 펴는 것이 두려웠다. 

오늘 본문은 1절이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고’로 시작한다. 1절부터 마음이 불편하다. 내가 아내도 아이들도 사랑하는 마음으로 섬기지 못하고 실패를 겪고 나서 보는 첫 말씀의 시작이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고’이다. 늘 부족한 사람임을 알고 있지만 나는 자신을 가장 사랑하는 것 같다. 아내를 사랑한다고, 아이들을 사랑한다고, 형제들을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언제나 가장 사랑하는 존재는 바로 ‘나’이다. 나는 언제나 중요하고, 나는 언제나 인정 받아야 하고, 나는 언제나 사랑받아야 한다. 

그런데 주님은 오늘 나에게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라’고 말씀하신다. 나보다 다른 사람들을 더 사랑하라고 하신다. 예수님이 그 자신을 내어주심과 같이, 그리고 그 자신을 내어준 그 형제들을 사랑하라고 하신다. 다시 한번 말씀 앞에 나를 내려놓고, 도우심을 구한다. 나는 형제를 사랑할 수 없다. 내 본성으로도, 내 의지로도 못한다. 그래서 주님을 붙들어야 한다. 죽기까지 사랑하셔서 우리를 살리신 그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바라봄을 통해서 다시 한번 무너진 내 마음을 추스린다. 잠시 잠깐만 사랑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사랑하기 원한다. 역시 그러기 위해서는 계속 주님과 동행해야 한다. 잠깐 정신줄을 놓으면 다시 내 본성대로, 내가 원하는대로 가게 되어 있다. 

이미 아내에게 아이들에게 사과했지만 마음이 편하진 않다. 말씀이 내 삶을 이끌어 나가길 원한다. 오늘은 정말 형제들을 사랑하기를 계속할 수 있기를 원한다. 내 힘으로 안된다는 사실을 절대로 잊지 말고, 주님께 나를 의탁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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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18. 9. 23. 1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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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 12:14-29 사람과 사람 사이의 화평함을 추구하자. 

14절은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라고 이야기 하고 있다. 그러면서 하는 이야기는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이다. 거룩함은 충분히 이해가 되는 단어인데, 왜 굳이 거룩함 앞에 화평함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을까? 
묵상하다보니 거룩함과 화평함은 굳이 구분할 수 있는 단어가 아닌 것 같다. 화평하지 않고서는 거룩할 수 없고, 거룩하지 않고서는 결코 화평할 수 없다. 예수님께서 성경의 모든 계명을 두가지로 요약하셨는데, 하나님 사랑, 예수님 사랑인데 아마 마찬가지인것 같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서는 이웃을 사랑할 수 없고, 이웃도 사랑하지 못하면서 하나님을 사랑한다 말할 수도 없는 것이다. 

나는 거룩함은 그래도 추구하고 있어 보이는데, 화평함은 잘 추구하지 않는 것 같다. 거룩함은 내가 무슨 잘못을 했는지 쉽게 보이지만, 화평함은 오히려 무시할 수도 있고, 원래 그런거야 라고 넘길 수도 있고, 뭐 굳이 그렇게까지 라고 생각할 때도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할 것을 말씀하고 있다. 새 언약의 공동체는 이렇게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서 하나님과의 화평함을 입은 사람들이 들어가는 공동체이다. 이미 하나님과 화평하고서도 사람과 화평하지 못한다면 우리가 어찌 거듭났다고 할 수 있겠는가? 

내가 지금 가장 화평해야 하는 사람은 아마도 요엘이 같다. 사실 요엘이와의 관계를 내가 잘 못넘기는 것 같다. 둘째의 어려움을 내가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인지? 아님 그 아이의 기질을 잘 이해하지 못해서 반응이 다르게 나가는 것인지? 정말 잘 모르겠다. 그리고 한 가지 더는 다른 선교사님들과의 관계인 것 같다. 나는 기본적으로 친한 사람들과 어울리고 싶어하는 마음이 많다. 그래서 불편한 관계를 안 만들려고 하고, 그러다 보니 많은 사람들과 알고 지내지 못한다. 예수님이 우리를 하나님과도 화평하게 만드셨는데, 나는 그것을 누리려고만 하고, 내가 화평하려는 노력은 게을리 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 조금 더 열린 마음을 가지고 사람들을 대하고, 불편한 관계를 두려워하지 않는 내가 되기를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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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18. 9. 21. 1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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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 11:27-40 예수, 예수, 예수

믿음으로 살아간다고 해서 핑크빛 미래가 나타나고, 우리 삶의 문제가 다 해결이 되고, 병이 낫고 하면 얼마나 좋겠는가? 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것은 그렇지 않다. 성공주의적인, 번영신학에서 이야기하는 것과 매우 다르다. 믿음으로 살아도 고난 당하고, 고통 당하고, 때로는 이보다 더 힘든 육체적인 시련, 정신적인 시련을 겪기도 한다. 이 히브리서가 기록된 시기에는 로마제국으로 시작된 대박해가 있었기에 그들에게 전해지는 이 메시지가 결코 멀리 있는 것 처럼 느껴지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이전에 하나님을 따라갔던 사람들과 다른 것은 약속된 것, 더 좋은 것을 받은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39-40절). 우리는 더 이상 그림자만 보거나 성소와 지성소를 멀리서만 보는 사람들이 더 이상 아니다. 우리는 이제 그 더 좋은 약속이신, 지성소이신 그리스도를 직접 만나고 경험하는 사람이다.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에게 주어진 가장 큰 기쁨은 이 땅에서 잘 되고, 고난이 없는 그런 삶이 아니라 이 땅에서 그 더 좋은 약속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동행한다는 사실이다. 말씀(약속)이 육신되어 오신 예수님을 매일의 삶에서 우리가 경험하고 만나고, 동행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많은 순간 예수님께 기도하는 것이 내 앞에 어려운 일들을 없애 달라는 것이다. 이렇게 해주시고, 저렇게 해주시고, 힘들지 않게 해주시고, 고난이 없게 하시고...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의 마음은 그런 어려움과 고통들이 설사 내 앞에 있더라도 더 좋은 것, 약속된 것인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걸어가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고난을 없애버렸기 때문에 더 이상 힘들지 않은 삶이 아니라 가장 크신 예수님이 동행하시기 때문에 내 앞에 고난이 더 이상 커 보이지 않게 되는 신비한 은혜가 넘치는 삶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삶인 것이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은 38절처럼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게 된다. 

나는 예수님과 동행하려고 하는가? 아니면 문제를 바라보면서 나 스스로가 해결하려고 하고 있는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나의 믿음이다. 어떤 순간에도 믿음으로 살아내려고 예수님을 바라보는 그 ‘믿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그 자리에 굳게 서 있는 ‘믿음’
'주 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디나 하늘나라'라고 고백하는 ‘믿음'

오늘도 그 ‘믿음’으로 하루를 살아가기 원한다.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만 바라보고..
스스로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만 의지하는 하루가 되기 원한다. 
내 앞에 있는 더 좋은 것을 잃어 버리지 않기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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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18. 9. 20. 1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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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 11:13-26 믿음을 따라 죽은 믿음의 영웅들을 따라가기 원합니다. 

오늘 본문은 13절에서는 어제 본문에서 나왔던 믿음의 용사들이 다 믿음을 따라 죽었다고 이야기 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이 약속을 받지 못하였다고 말하고 있다.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했다고 말하고 있다. 
믿음이라는 것은 정말 ‘인내’인 것 같다. 그저께 묵상했던 것처럼 믿음으로 사는 삶은 주님의 말씀에 복종하며, 그 자리에 굳게 서 있는 삶인 것 같다. 내 눈 앞에서 뭔가 이루어지고, 성취되는 것들이 지금 당장 보이지 않더라도 우직하게 그 자리에서 서 있는 것이 믿음으로 사는 삶이다. 즉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고,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다스리고 계신다는 그 믿음으로 지금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도 그 자리에 굳게 서 있을 수 있는 것이 믿음이다. 

아브라함도 후손이 하늘에 별들과 같이 많게 될 것을 보지 못했다. 그는 약속을 믿었을 뿐이다. 그래서 믿음으로 자녀 이삭을 바칠 수 있었다. 요셉은 어떠한가? 그의 유골이라도 애굽을 벗어나길 소망했고, 하나님께서 주실 약속의 땅에 대한 약속을 가지고 죽지 않았는가? 모세는 어떠했는가? 세계 최강대국의 왕자의 삶이 아니라 노예인 히브리인으로의 삶을 선택하고, 함께 고난 받기를 믿음으로 선택하지 않았는가? 

이렇듯 믿음의 삶이란 때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답답함과 고통을 넘어, 지금 당장 성취되지 않는 하나님으로 부터 온 약속을 붙들고 지금의 삶을 묵묵히 살아내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제 더 나은 본향 (16절)을 사모하며 살게 된다. 보이지 아니하시는 이미 임하신 하나님의 나라의 통치가 내 삶에 이루어지며, 장차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가게 된다. 믿음을 따른 사람들의 특징은 조급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우리의 삶에서 믿음이 사라지면 그 곳에는 우리의 조급함에서 나온 염려와 근심들만 남는다. 그래서 우리는 믿음을 굳게 붙잡아야 하는 것이다. 

오늘 나는 믿음으로 살고 있는가? 참 어려운 질문이다. 보이지 아니하는 믿음 보다는 뭔가 눈에 보이는 것, 일들, 사람들을 자꾸만 신뢰하려는 나를 보게 된다. 기다리는게 너무 싫고, 기다리고 싶지 않아서이다. 약속은 주셨는데, 약속의 끝은 너무 멀어보이고, 지금의 상황은 가까워 보이기 때문이다. 그저 하나님만 붙들기를 원한다. 답답해도, 막막해도, 주님만...
그런데 주님만을 붙들 힘은 나에게 없다. 내가 무슨 수로? 주님이 나를 붙잡아 주셔야만 한다. 그리고 주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들어야 기다릴 수 있지 않은가? 
말씀을 더 가까이 하며, 기도하기 원한다. 나의 염려와 근심을 예배하지 않고 주님만 예배하기 원한다.
주님께서 나를 붙잡아 주시길 간절히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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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18. 9. 19. 1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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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 11:1-12 누구인지 정확하게 알 때 흔들리지 않게 믿을 수 있다. 

쉽지 않은 주제인 믿음에 관해서 이야기 하고 있다. 도대체 믿음이란 뭘까? 1절에서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라고 이야기 하고 있다. 실상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영어의 의미로는 assurance, 확신, 장담 정도로 번역할 수 있을 것이고, 증거는 conviction, 납득, 확신, 신념 정도로 번역할 수 있을 것이다. 굳이 이렇게 풀이해서 말하지 않더라도 우리의 인식 안에서 믿음이라는 것은 많은 부분이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 함을 알 수 있다. 3절 후반부에는 우리에게 보이는 것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것)이 보이지 아니하는 것으로 말미암았다고 이야기 하고 있다.

우리가 아는 것 처럼 믿음은 보이지 않는 영역이다. 보이지 아니하지만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다는 것, 그리고 그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다스리고 계시다는 것, 그리고 그 하나님께서 보이지 않지만 우리가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을 신뢰할 때 우리의 믿음을 인정해주신다는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눈에 보이지도 만져지지도 않기 때문에 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우리가 정확하게 알지 못하면 우리는 바른 믿음을 가지지 못한다. 그래서 오늘 본문의 저자는 6절에서 믿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고, 우리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살아계시고, 그 분이 우리가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때 상 주시는 이심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고 이야기 하고 있다. 이 것은 결코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보고, 긍정의 힘을 믿어야만 한다고 말하려는 것이 결코 아니다. 

정말로 그러하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우리에게 늘 좋은 것으로 주시는 우리 아버지이시다. 때로 우리가 연약하고 부족할 때도 우리에게 믿음과 인내를 가르치시는 분이시다.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면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면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마7:9-11) 아버지가 자식에게 좋은 것 밖에 줄 수 없는 것 처럼 하나님께서는 늘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시는 선하신 아버지이시다.

우리의 보이지 않는 믿음은 반드시 이 좋으신 하나님을 향해야만 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렇게 좋으신 분이라는 것이 확신되어야만 우리는 그 하나님을 오해하지 않고 믿을 수 있다. 그리고 보이지 않아도 불안해 하지 않을 수 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물으신 질문이다. 그렇다면 나는 예수를 누구라 하는가? 나는 이 하나님을 정말로 좋으신 하나님으로 믿고, 그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가? 아니면 두려워서 아니면 억지로, 안 믿으면 지옥에 간다니까 울며 겨자먹기로 믿고 있는가? 나는 진정으로 예수님을 누구라 하는가? 나에게 정말 확신이 있는가?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assurance와 conviction이 있는가?

보이는 세계에 살면서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때로는 넌센스해 보인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을 알 수 있도록 말씀을 허락해 주셨다. 그 말씀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고, 인격적인 그 분을 경험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알게 된다.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께서 보이는 세상을 다시리고 계신다는 것을... 그것을 믿고 신뢰할지, 아니면 그냥 무시할지는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믿음이고, 확신이다.

한번도 믿음이 충분하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믿음은 언제나 부족해 보인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부족하면 더욱 더 그 분에 대해 의심이 생기는 것 같다. 오늘도 더욱 힘써 하나님을 알기 원한다. 내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단번에 믿어지지 않는다고 하는 내 결정을 절대로 신뢰하지 말자. 보이지 아니하지만 모든 역사를 다스리시고 인도해가시는 하나님 한 분만을 신뢰하고 믿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하루가 되기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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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18. 9. 17. 1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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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 10:19-25 예수의 피를 통해 우리를 공동체로 부르셨다. 

예수가 우리를 위해 죽으셨기 때문에 우리는 소망이 생겼다 (23절). 죽을 수 밖에 없고, 아무런 소망이 없던(늘 죽음으로만 달려가던...) 우리에게 소망이 생긴 것이다. 살 소망이 생겼고, 그냥 사는 것만이 아니라 잘(?) 살 소망이 생긴 것이다. 이 땅에서의 시간을 낭비하거나 허비하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도 하나님의 나라를 누리며 살 수 있는 소망이 생긴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를 우리에게 몸으로, 피로 주신 하나님께서 미쁘시기 때문이다 (23절). 

그 미쁘신 하나님께서 나를 붙잡아 주시니 나의 삶은 더이상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니다. 이제 우리를 생각해야만 하는 삶이 되었다. 하나님이 예수를 통해 나를 부르신 것처럼 우리도 불러 주셨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렇기 때문에 서로를 1. 돌아보아야 하고, 2. 사랑과 선행을 격려해야 하고, 3. 모이기를 힘써야 하는 것이다. 이 땅에서 살아갈 소망이 생겼지만, 여전히 우리는 연약하고, 우리는 부족하기 때문에 쉬이 넘어지고, 쉬이 좌절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공동체를 주셨다. 이 공동체는 함께 서로를 돌아봐야 한다. 나 혼자만 잘 믿고, 잘 누리며 사는 것이 아니라 함께 갈 수 있도록 격려하고 도와주어야 한다.

선교사로 이 땅에 와 있지만 우리 형제, 자매들의 삶을 통해서 마찬가지로 격려와 위로, 그리고 은혜를 함께 누린다. 누가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고, 누가 복음을 듣는 사람이고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요 한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나 홀로 가는 길이 아니다. 말이 잘 안 통하고, 문화와 생각이 다르지만 우리는 예수 안에서 한 성도이며, 한 공동체이고,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한 공동체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늘 격려하고, 권하고, 사랑해야 하는 것이다. 

어제 영광교회 형제, 자매들과 열심히 축구와 응원을 하고, 집으로 데려다주고, 대화를 나누고, 그리고 같이 짧게나마 식사를 하면서 한 공동체로서의 기쁨을 누렸다. 내가 복음을 전하러, 혹은 주기위해 온 사람이라는 생각이 아니라 함께 한 몸을 이뤄가는 한 지체로써의 영광과 기쁨을 날마다 더 누릴 수 있기를 원한다. 그리고 지금 이 곳에 형제, 자매들 뿐만 아니라 거리로는 멀리 떨어져 있지만 한국에서 한 몸처럼 지냈던 우리 형제, 자매들과도 역시 한 몸의 한 지체로써의 영광과 기쁨을 더 누릴 수 있기 원한다. 

오늘 큐티 카톡을 빌어서 문안합니다.
그리스도의 몸 된 당신과 한 지체, 한 공동체, 한 마음을 누릴 수 있어서 참으로 감사합니다. 그리고 부족한 저를 보듬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도 그런 그리스도의 몸이 되겠습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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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18. 9. 16. 1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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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 10:1-18 내 몸의 절망을 그리스도의 몸의 소망으로 바꾼다. 

율법의 기능은 죄를 깨닫게 해준다. 하지만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율법은 우리를 절대 구원할 수 없다. 
5절에서 이러한 우리를 위해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하지 않으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몸.을 예비하셨도다’라고 이야기 하고 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한 방법은 율법이 아니라 예비하신 한 몸이다. 그 몸이 우리를 살리고, 그 몸이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구원받는 존재이다. 

이미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오셨고, 그 몸이 찢기심을 통해 우리가 나음을 입었다. 그런데 12-13절을 보면 예수께서 자신의 몸을 영원한 제사로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셔서 그 후에 자기 원수들을 자기 발등상이 되게 하실 때까지 기다리신다고 말씀하신다. 이미 영원한 한 제사를 드리셨는데 왜 기다리시는 것일까? 바로 은혜의 시간이기 때문이다. 
톰 라이트 (N.T. Wright)의 설명에 따르면 새로운 황제가 등극하게 되면 등극하기 전 그 황제가 등극한다는 소식이 들릴 때부터 이미 황제의 권력이 행사된다고 한다. 그 좋은 소식이 들리는 것만으로도 많은 것들이 변하기 시작한다고 한다. 하지만 왕권의 완성은 그 황제가 즉위할 때가 된다고 한다. 톰 라이트는 우리의 살고 있는 지금의 시기도 그렇다고 설명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셨다는 좋은 소식이 들렸고, 그것은 모든 것을 변화시켰지만, 아직 영원한 왕권의 완성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시기까지 늦춰져 있고, 우리는 지금 이 시기를 살아가고 있다고 설명한다. 

즉 우리는 지금 영원한 왕이신 그리스도께서 모든 것을 완성하시기 전에 허락하신 은혜의 시기를 살아가는 것이다. 그 분은 기다리고 계신다. 누구를? 죄인들을... 죄 가운데 서 있는 우리들을... 죽을 수 밖에 없는 하나님을 배신했던 인간들을... 17절에 또 그들의 죄와 그들의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니 라고 기록하고 있다. 예수님은 왕으로써 우리의 죄를 용서하신다. 그리고 기억조차 하지 않으신다. 그래서 우리가 살 수 있는 은혜를 누리는 것이다. 

은혜의 시기를 사는 이 때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다시금 율법으로 돌아가지 않는 것이다. 율법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으로 얻게 된 은혜로 돌아가야 하는 것이다. 마치 율법이 우리를 구원할 것처럼 율법의 올무에 매여 살아가지 않고, 오직 우리를 살리신 그리스도의 공로를 믿는 믿음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복음은 우리를 결코 정죄하지 않는다. 복음은 우리를 결코 넘어지게 하지 않는다. 복음은 결코 우리를 다시 율법의 올무에 매이도록 하지 않는다. 오늘을 율법이 아닌 은혜로 사는 내가 되어야만 한다. 

복음에 합당한 삶, 복음적인 삶이란 어떤 것일까? 그리스도의 성품이 내 안에 흘러 넘치는 삶이 아닐까? 그리스도의 사랑이 가득 채워진 삶이 아닐까? 그리스도께서 하신 것과 같이 희생하는 삶이 아닐까? 하지만 도대체 내가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 수 있는 사람인가? 절대 아니다. 불가능하다. 내 안에 선한 것이 없다. 그래서 넘어져도, 실패해도 율법이 아니라 그리스도로 돌아가기를 원한다. 그래서 오늘도 말씀을 붙든다. 말씀을 붙드는 것 만이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깨달을 수 있는 유일한 점검표가 된다. 말씀을 보면서 내가 그리스도가 아니면 안되는 무능한 존재임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된다.

말씀을 볼 때, 내가 어떠한 사람인지 보게 될 때, 절망에 빠지기도 한다. 어쩌면 이렇게 무능한지.. 어쩌면 이렇게 불쌍한지.. 하지만 이러한 나를 위해 자신의 한 몸을 바치신 그리스도를 더욱 생각하게 된다. 내 몸의 절망을 그리스도의 몸의 소망으로 바꾼다. 이것이 내가 오늘을 살아낼 수 있는 유일한 힘이 된다. 나는 안된다. 나는 무능하다. 그래서 오직 그리스도에게만 기댄다. '그는 흥하여야 하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라고 한 세례요한의 고백이 오늘 내 삶에 이뤄지길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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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18. 9. 15. 1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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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 9:23-28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자. 

모형, 그림자
그것들이 존재 하는 이유는 진짜가, 실체가 우리에게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그 진짜를 이해시키기 위해 뭔가 부족함에도 사용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진짜가 나타났다. 예수님이 이미 우리에게 오셨다. 

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오늘 본문에서 그 진짜 예수님께서 한 번 오신 것이 끝이 아니라고 또한 말씀하신다.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
예수님께서 다시 오셔야만 하는 것은 우리의 구원을 완성하시기 위해서이다. 
지금 이 땅에서 예수님을 알고 믿고 살아가고 있는 기쁨 이 정도가 아니라, 
영원한 그리고 완전한 완성, 계시록에서 말하고 있는 ‘새 하늘과 새 땅’의 완성을 위해서 다시 오실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신다는 약속이 지금 이 순간,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와 어떠한 관계가 있을까? 아직 완성되지 않은 우리의 삶이 어떠한 의미를 주는가? 
우리의 삶은 지금 그림자, 모형을 보고 살아가는 삶이다. 완전한 실제가 완성이 아직 오지 않은 삶이었다. 우리는 이 땅이 끝인 것 처럼 살지 말아야 한다.
정말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끝이 아니다. 영원으로 가는 문이며,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전의 준비의 삶이다. 우리는 이 땅에서 영원히 살 거라는 마음이 아니라, 이 땅은 잠시 거쳐가는, 스쳐가는 곳임을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이 땅이 영원하지 않을 것도 기억해야 한다. 
영원할 것만 같고, 이 생이 마지막일 것 같은 두려움을 버리고, 우리에게는 새로운 세계가 열릴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 
눈에 보이는 것이, 감정으로 느껴지는 것이 결코 다가 아니다. 우리가 지금 누리는 모든 것은 그림자요, 모형일 뿐이다. 

더 좋은 것을 사모해야 한다. 아직 우리에게 나타나지 않은 더 좋은 세계를 사모해야 한다. 그 날에는 예수님을 얼굴과 얼굴을 마주봄 같이 직접 보게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영원하지 않은 땅에서 영원을 바라보며 살 수 있는 것이다. 
오늘 다시 태국으로 돌아가게 된다. 내 삶이 조금 더 본질에 가까워질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내가 이 땅에서 영원히 살 것 처럼 살면서, 이 땅의 것들에 집착하면서 어찌 하늘의 것들을 우리 형제들에게 전할 수 있을까? 
그래서 사도바울 선생님은 골로새서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나 보다. 

골 3:1-4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우리의 삶은 계속해서 위의 것을 추구해야 한다. 땅의 것을 추구하다가 보면 우리는 땅의 것에 파묻혀서 질식되고 말 것이다. 그런데도 계속해서 잠시 잠깐 있을 땅의 것을 영원한 것으로 생각하고 그것을 쫓는 것이 나의 삶이다. 조금 더 본질에 가까운 것을 추구하고 그렇게 살아내기를 원한다. 그리스도를 더 깊이, 더 넓게 알기 원합니다. 모형이나 그림자가 아니라 예수님 한 분만을 바라보기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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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