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Thinking)/Meditation2018. 10. 17. 1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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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 2:1-10 복음에 합당하게 살아내자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디도에게 노년층을 향해, 장년층을 위해, 그리고 종들을 위해 교훈을 주고 있다. 때로 가끔 그런 이야기를 듣는다. 우리는 복음을 얻었고, 복음으로 인해 의롭게 되었기 때문에 대충 살다가 마지막 죽기 전에 회개하면 용서 받는거 아니냐고? 그러니까 하고 싶은거 다 하고 살겠다는 식의 이야기 말이다. 틀린 말은 아니다. 회개하면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시는 그 분께서 다 용서해주신다. 우리의 어떠함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 바울은 어떻게 살아야 할지 교훈을 준다. 이 교훈은 가벼워보이지 않는다. 1절에는 인내함에 온전하게 하고, 2절에는 선한 것들을 가르치는 자들이 되고, 4절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라고 권하고 있다. 위에서 이야기 한 어떤 사람의 이야기와는 완전히 다른 교훈을 말하고 있다. 즉 우리가 들은 복음에 합당하게 살기를 바울은 권하고 있다. 바른 복음을 들었으니 바르게 살아야 하는 것이다. 요즈음 일어나는 모든 기독교에 대한 비방과 비난은 사실 바울이 권한 모습대로 우리가 살지 못하기 때문이다. 젊은 남자에게 바울이 권한 것은 “신중”하도록 권면하고 “범사에 네 자신이 선한 일의 본을 보이며 교훈에 부패하지 아니함과 단정함과 책망할 것이 없는 바른 말을 하게 하라’라고 이야기 하고 있다. 즉, 선한 일에 본을 보이고, 단정하고 책망받지 않을 말을 하라는 것이다. 그 어느 것 하나도 쉬운 것이 없다. 이것은 내가 지켜내야 할 의무이다. 해도 되고 안해도 되는 인격수양의 차원이 아니다. 왜냐하면 7절 하반부에 이는 대적하는 자로 하여금 부끄러워 우리를 악하다 할 것이 없게 함이라, 10절에 이는 범사에 우리 구주 하나님의 교훈을 빛나게 하려 함이라 라고 이야기 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도 잘 있다가 갑자기 터져 나오는 화를 억제하지 못할 때가 많다. 물론 밖에서는 절대 안나온다. 주로 집 안에서… 터져 나온다. 집 안이 가장 다른 사람의 눈도 없고, 상대적으로 나보다 약자들 (아내, 아이들)이기 때문인 것 같다. 가장 편한 곳이기 때문에 가장 나의 진정한 모습이 나오는 것이다. 코칭을 통해 배운데로 감정의 에너지를 터트리지 말고, 조금씩 조금씩 에너지를 빼내어 주자. 나의 모든 삶의 행위를 통해서 주님만 빛나시도록 하는 삶을 살고 싶다. 편하다고 내 맘대로 하는 것은 복음에 합당하지 않은 삶이다. 복음을 받았으니 복음에 합당하게 살수 있도록 매일매일 조금씩 더 주님 앞으로 나아가자. 나만의 릴렉스 타이밍과 방법을 만들자. 정갑신 목사님 설교처럼 주님을 위해 살지 말고 주님에 의해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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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18. 10. 16. 1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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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 1:10-16 믿음으로 온전하게 하는 꾸짖음

오늘 본문은 불순종하는 자들에게, 헛된 말을 하며 속이는 자들을 엄히 꾸짖을 것을 디도에게 권하고 있다. 리더로써 마땅히 해야 할 것을 하라는 의미일 것이다. 하지만 꾸짖는 것이 자신의 감정을 담아 감정적으로 해서도 안되고, 단순히 책망하기 위함이 되어서는 안됨을 이야기 하고 있다. 13절에 '엄히 꾸짖으라 이는 그들로 하여금 믿음을 온전하게 하고’ 라고 이야기 하고 있다. 왜 꾸짖어야 하는가? 그들의 믿음을 온전하게 하려고 하는 것이다. 하지만 성경과 다르게 나에게는 많은 순간 옳고 그름만을 가르기 위해 꾸짖음이 사용되는 것을 본다. 

아이들을 양육함에 있어서 엄히 꾸짖으면서 그들의 믿음을 온전하게 하고, 바른 길로 가게 하려고 꾸짖기 보다는 내 감정을 실어서 혼내거나, 두 번째는 그들의 태도가 틀렸음을 지적하는데 머무는 경우가 많다. 아이들의 믿음을 세우기 위한 지혜로움은 부족하고, 결국 아이들에게 남는 것은 수치감과 정죄감만 남도록 내가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은 누가 옳고 그름을 가리느라 아이들의 믿음을 온전하게 하는데까지 이르게 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믿음을 온전하게 하기 위한 꾸짖음은 어때야 하는가? 

오늘 본문이 여기에 대해서 자세히 이야기 하고 있지는 않다. 다만 꾸짖음이 반드시 믿음을 온전하게 하고, 유대인의 허탄한 이야기와 진리를 배반하는 사람들의 명령을 따르지 않게 하려 함이라 (14절) 라고 이야기 하고 있다. 분명히 아이들에게 옳고 그름에 대해서는 가르쳐야 한다. 그래야 잘못된 길로 가지 않는다. 하지만 그 옳고 그름을 가르치는데 까지 가기에는 많은 지혜로움이 있어야 한다. 특별히 아이들의 감정을 공감해주고 만져주는 것에 대해서 배우고 있는데, 나는 그러한 부분에 대해서 참 무지함을 많이 깨닫고 많이 배우고 있다. 아이들 뿐만 아니라 형제를, 자매를 믿음으로 온전하도록 세우는 방법을 나는 아직 잘 모른다. 하지만 분명히 알아야 하는 내용들이다. 

중요한 부분이니 좀 더 묵상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원한다. 오늘은 정말 아이들에게 형제들에게, 자매들에게 그들의 연약함을 보며 옳고 그름을 가르는 눈이 아니라 이해하고 공감하는 마음으로 볼 수 있는 하루가 되기를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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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18. 10. 15.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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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 1:1-9 자녀를 위해서 삶으로 가르치고 기도하는 것이 장로의 자격이다.

사도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디도에게 장로와 감독의 자격을 설명하고 있다. 장로의 자격에서 마음에 들어오는 부분은 그가 한 아내의 남편이고, 또한 불순종하는 일이 없는 믿는 자녀를 둔 자여야 한다는 것이다. 남편으로써 또한 아이들을 키우는 입장에서 한 아내의 남편이라는 모습은 그래도 어떻게 내 의지로 할 수 있는 부분이니 쉬워보인다. (그나마 쉽다는 것이지 절대 쉽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아이들에 대한 문제는 다르다고 느껴진다. 아이들 때문에 요즈음 하루도 마음이 편할 날이 없어서 그래서인지? 이 구절이 더 무거워 보인다.

6절을 보면 장로의 자격은 ‘방탕하다는 비난을 받거나 불순종하는 일이 없는 믿는 자녀를 둔 자’여야만 한다. 한 마디로 자녀가 믿음 위에 잘 서 있고, 부모의 권위에 순종하며, 절제할 수 있는 아이로 키워야만 한다는 것이다. 자신을 컨트롤 하는 것 보다 더 어려운 것은 자녀들을 컨트롤 하는 것이다. 사실 최근의 나의 삶은 자녀들을 컨트롤 하다가 나를 어찌하지 못해서 화가 나거나 아이들에게 소리를 지르는 것이 매일의 일상으로 살고 있다. 그런데 아이들이 절제를 배우려면 결국은 부모가 절제의 모습을 말이 아니라 삶으로 보여줘야만 한다. 사실 지금 가장 힘든 부분이 이 부분이다. 아이들 앞에서 늘 무엇인가를 참다 참다 결국에는 빵 터지는 모습만 보여주고 있는게 나의 모습인데, 오늘 본문의 장로의 조건이 참으로 무겁게 느껴진다. 장로에게 주어진 무게는 단순히 나만 잘 믿는 믿음의 사람이 되어서는 안된다. 자녀 또한 믿음과 사랑으로 반듯하게 키워내는 사람이어야만 한다. 자녀들이 부모들의 거울이기 때문에 사도바울이 왜 그런 조건을 걸었는지 충분히 이해가 된다. 아마도 겉으로 보이지 아니하는 삶을 보기 위해서 였으리라. 감독은 이 장로의 조건위에 또 더 붙는다. 초대교회의 장로와 감독이 얼마나 하나님 앞에 사람 앞에 신실했는지를 볼 수 있다.

선교사로 아이들을 키우며 내가 최근에 느끼는 좌절감은 상당하다. 아이들에게 무엇인가를 가르치고 본을 보여주는 것이 너무나도 힘이 든다. 그동안 이정도까지는 아니었는데 하는 생각이 들다가도 뭐 도찐개찐이지 라는 생각도 든다. 솔직히 정말 내 힘으로 안된다는 것을 처절하게 느낀다. 아이들에게 말하는 것도, 가르치는 것도, 내가 아이들의 모습을 참고 인내하는 것도 내 힘으로 전혀 되질 않는다. 내가 할 수 있다고 믿고 있는 것들이 무너지고 있다. 은혜를 구해야만 한다. 어제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아이들을 키우는 건 ‘은혜’ 말고는 설명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그렇다. 내가 무엇인가를 잘해서 아이들이 잘 크는 것이 결코 아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내가 주님 앞에서 바로 서는 것, 그리고 아이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다. 

아이들을 위해서 기도하자. 내가 장로의 자격을 얻기 위해? 내가 선교사로써 아이들을 잘 키웠다는 평판을 듣기 위해서가 아니라 아이들이 정말 이 땅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자랄 수 있도록, 방탕하지 않도록, 비난을 받거나 불순종하지 않을 수 있도록 기도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자. 기도하는 아빠가 되는 하루가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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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18. 10. 15. 0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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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 1:15-25 바울의 동역자들, 그리고 나의 동역자들…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바울은 빌레몬에게 오네시모를 환대해 줄 것을 요청하면서 그를 동역자로 호칭하였고, 그리고 마지막 23절, 24절을 지나며 그 자신의 동역자들의 이름을 부르며 문안하고 있다. 한마디로 빌레몬 니가 지금 나열된 이 사람들과 같은 동역자라는 것이다. 23절에 바울과 같이 감옥에 갇혀 있는 에바브라, 마가복음의 저자 마가, 바울의 3차 전도여행에 동역한 아리스다고, 바울과 함께 동역하다가 세상을 사랑해 데살로니가로 간(아직 가지 않았다..) 데마, 그리고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를 열거 했다. 이름만 들어도 쟁쟁한 동역자들이었다. 바울이 그들과 같은 수준으로 빌레몬을 대해준다는 의미였고, 빌레몬에게도 그에 걸맞는 순종을 요구했다.

동역자의 관계란 것은 이런 것으로 보여진다. 같이 감옥에 갇히고, 같이 전도여행에 동참하고, 마지막을 지키고, 서로에게 순종과 사랑, 그리고 격려와 안부를 전하는 것이 동역자 관계인 것이다. 내 삶을 돌이켜 볼 때, 나의 삶에도 많은 동역자들이 함께 해오고 있는 것 같다. 내가 사도바울과 같은 수준의 사람이 아닐지라도 연약하고 부족하여도 늘 나와 함께 동역하고, 동행해주고, 순종과 사랑, 격려와 안부를 보내주시는 분들이 있다. **특별히 이 큐티를 받으시는 분들이 나에게 그러한 분들이다.**

부족한 큐티를 보내기로 결정한 동기도, 나와 함께 같이 이 사역을 함께 하시는 분들에게 말씀 묵상을 통해 어떻게 내 삶이 변해가는지(아직 잘 안 변하고 있다 ㅜㅜ), 그리고 하나님께서 태국 선교에 어떻게 일하시는지, 그리고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은혜에 대한 감사를 전하기 위해서 시작했다. 좋은 소식만 보내지 못하고, 자주 연약한 모습을 더 많이 전하지만, 이 분들이 항상 함께 기도해주시고, 응원해주시고, 후원해주심으로 오늘 하루도 이 곳에서의 삶을 살아내고 있다. 가끔 보내주시는 ‘오늘은 왜 큐티 안 보내요?’ 라는 질문이 가장 감사하고, 또 가장 두려운 질문이다. 정말 감사드린다. 

오늘은 늦은 밤에 묵상을 하게 되는데, 사실 주일 예배를 마치고 우리 영광교회 형제자매들과 더욱 한 몸이 되고 싶어 11월 초에 치앙마이로 가는 아웃리치에 동참 하기로 했다. 교회의 주변인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으로 함께 하고 싶어서 내린 결정이었고, 결정을 내리고 아웃리치 리더 중 한 형제인 싸네 형제에게 물어보니 감사하게도 허락을 해주었다. 더 감사한 일은 돌아올 때 차량을 운전할 사람이 없어서 고민 중이었는데, 그게 해결이 되었다고 오히려 나보다 더 기뻐하는 모습을 보았다.  

나도 우리 형제, 자매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어서 기뻤고, 함께 갈 수 있음에 기뻤다. 잘은 모르겠지만 하나님의 선교는 이렇게 서로가 서로에게 동역자가 되려고 하는 그 몸들(그게 교회이든 공동체이든..)을 통해서 이뤄지는 것 같다. 오늘 바울이 열거한 동역자들과 같은 동역자들이 한국에 태국에 있음에 참으로 감사하다. 그 분들과 함께 계속해서 하나님의 선교들을 이뤄나가고 싶다. 그 분들이 나에게 신실한 동역자가 되어주신 것 처럼, 나도 그 분들께 신실한 동역자가 되어 드리고 싶다. 

사랑하는 동역자 여러분 참 감사합니다.
여러분들이 있어서 저는 너무나 행복한 선교사입니다.
저도 여러분들에게 더 좋은 동역자로, 이 하나님의 선교에 함께 하겠습니다.
감사하고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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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18. 10. 13. 1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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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레몬서 1:1-14 삶의 여유와 타인에 대한 존중은 하나님이 주인되실 때에 경험된다. 

바울과 빌레몬의 관계는 매우 친밀하고 또한 깊은 관계였던 것으로 보인다. 바울은 빌레몬을 향해 ‘우리의 사랑을 받는 자요 동역자’ 라고 1절에서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4절에 보면 빌레몬을 위해 늘 기도했었다. 잘 보면 아마도 빌레몬을 양육하였거나, 빌레몬에게 영적인 스승이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왜냐하면 8절을 보면 ‘그리스도 안에서 아주 담대하게 네게 마땅한 일로 명할 수도 있으나’ 라고 표현하기 때문이다. 바울은 그렇게 명할 수 있는 권위가 빌레몬에게 있었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는 결코 그렇게 하지 않는다. 

9절에 바울은 오네시모를 위해 ‘도리어 사랑으로 간구한다’라고 이야기 하고 있다. 그리고 14절에는 ‘다만 네 승락이 없이는 내가 아무것도 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너의 선한 일이 억지같이 되지 아니하고 자의로 되게 하려 함이라’라고 고백하고 있다. 바울이 하고자 한 일은 빌레몬을 도망간 오네시모라는 종을 자신을 섬기는 일로 쓰겠다는 말이었으나, 결코 바울은 자기 편한대로, 자기가 옳다고 느끼는대로 하지 않는다. 그는 동역자와의 관계를 존중하고, 느리더라도 서로 협력하고 사랑할 수 있는 방법으로 일을 처리하고 있다. 

많은 순간 효율성을 중시하는 나에게 오늘 바울의 모습은 참으로 귀하다. 어떠한 선한 일도 절대로 억지로 해서는 되지 않는다. 매일 집에서 쉽게 겪는 일이다. 아이들에게 아무리 바른 방향으로 양육하고 가르쳐줘도 그것이 아이들의 마음에 동의가 안되면 그냥 잔소리로 느껴질 뿐인 것이다. 동역의 모습은 어떠한가? 역시 마찬가지로 억지가 아니라 서로가 서로의 관계를 존중하고, 사랑하고, 기도하며 가야 하는 것인데, 마음이 조급하면 이러한 부분들을 보지 못하고 효율성만을 위해 움직이게 되지 않는가? 

효율성이 중시되는 사회에서 사역에서, 가정에서도 효율성만 추구하며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된다. 인격적이고, 사랑으로 그리고 느리더라도 옳은 방향으로 함께 가야 하는 것인데, 내가 생각하는 방향이 옳다고, 내가 바라보는 관점이 옳다고 가족들에게 또 우리 형제들과의 모습 속에서 나의 것을 자꾸만 밀어넣으며 정죄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게 된다. 기본적으로 급한 성격인 탓에 누군가를 기다려주고, 이해해주는 것이 늘 쉽지 않다. 하지만 사도바울이 인생의 노년에 그것도 감옥안에서 자신의 필요를 위해 오네시모라는 한 종을 쓰고자 함에도 그는 절대로 서두르지 않았고, 자의로 하지 않았다. 

바울의 이러한 태도의 이면에는 ‘하나님께서 가장 좋은 것을 주시는 분’이라는 믿음이 있었던 것 같다. 우리의 서투른 판단과 계획보다도 더 크고 아름다우신 하나님의 계획과 인도하심을 쫓아가는 것이 가장 빠르고 가장 정확한 길임을 바울은 알고 있었다. 결국 자신이 하나님이 되어 자신이 원하는 시점, 자신이 원하는 방법으로 일이 진행되기 보다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이 원하는 시점과 방법에 하나님께서 일하실 것을 기대했기 때문에 자신의 생각에 좋아보이는 것, 쉬워보이는 길을 내려놓고 모든 동역자들과 선을 이루는 길을 선택할 수 있었던 것 같다 .

매일 매일, 순간 순간이 늘 이 싸움인 것 같다. 누가 나의 하나님이신가? 나인가? 하나님이신가? 하나님만이 내 삶의 하나님이 되신다면 그 분만이 내 삶의 하나님으로 인정된다면 우리는 우리의 계획과 생각을 내려놓을 수 있게 된다. 내가 하나님보다 지혜롭거나 내가 하나님보다 정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오늘도 나 스스로에게 묻는다. 내 삶에 누가 하나님이신가? 내가 하나님이 되려고 하는 마음에서 뿜어져 나오는 것은 주변 사람들을 향한 독이다. 내 마음대로 하려고, 되려고 하는 마음에서 나오는 독… 오늘도 독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는 하루가 되고 싶다. 내가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만 하나님 되시는 하루가 되고 싶다. 

다시 내려놓는다. 관계들, 사역들, 내 계획들, 생각들… 하나님만이 온전히 내 삶의 왕이되시길 간구하고 그리고 선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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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18. 10. 12. 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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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 5:11-22 내가 할 수 있다는 교만함이 아니라 은혜로만 할 수 있다는 겸손함

11절부터 17절까지는 우리의 죄 때문에 얼마나 그들이 슬프고 힘든지를 이야기 하며 이 모든 것이 ‘오호라 우리의 범죄 때문이니이다’ 라고 (16절) 고백하고 있다. 사실 우리 삶의 문제들은 정말로 우리의 죄 때문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려움과 고통을 허락하시진 않는다 (연단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우리의 욕심을 쫓아가다가 주로 당하는 어려움이다. 

그런데 오늘 화자는 21절에서 ‘여호와여 우리를 주께로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주께로 돌아가겠사오니’라고 고백하고 있다. 처음에 읽으면서 마음이 불편햇다. 자기들이 회개하고, 자기들이 주님 앞으로 나아가면 되는거지 그걸 안하고 하나님께 자신들을 돌이켜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좀 이상하게 느껴졌다. 자신들이 주님께 돌이키지 않는 것을 하나님께 핑계대는 그런 느낌이었다고나 할까? 그런데 사실 우리는 주께로 돌이킬 수 없는 존재들이다. 빛이 없는 절망적인 상황 속에 살아가는 것이 우리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말씀을 읽으면서 나는 내 마음속에 ‘내가 할 수 있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읽었으니 이 말씀이 내 마음에 이해가 될리가 없다.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이고, 모든 것이 주님이 하신 것인데… 심지어 내가 복음을 듣고, 믿고, 예수를 주라 고백하는 이것 조차도 주님이 하신 것인데… 내가 무엇인가 했고, 내가 무엇인가에 기여했다는 생각이 은연중에 있었던 것 같다. 

오늘 아침에 한 자매가 나에게 자신의 연약함을 나누었다. 큐티를 나누는데 그 속에서 자신을 드러내고 싶어하는 마음이 들어서 너무 불편하다는 내용이었다. 그걸 보고 이렇게 답을 해줬다. '우리 마음에 그러한 나를 입증하고 싶어하는 존재감이 전혀 없을 수 있을까? 절대 그렇지 않을거야. 그럼에도 우리가 묵상을 나눌 수 있는건 그런 깨닫는 마음을 주실 때 반응할 수 있는 것 조차도 내가 나를 깨닫게 한 것이 아니라 은혜로 깨달은 것이기 때문일거야. 은혜를 아는 자만이 나눌 수 있는 것이니까. 오늘 내가 나누는 말씀도 주님이 말씀해주시지 않았다면 주님이 나에게 깨닫게 해주시지 않았다면 결코 알 수 없었던 은혜를 나누는 거니까…’ 

답을 이렇게 해주고 나서 큐티를 하면서도 화자가 고백한 ‘우리를 주께로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주께로 돌아가겠사오니’라는 고백이 이상하게 들린 것이다. 결국 나도 이 자매의 고백과 마찬가지로 ‘나의 존재감’을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고 있는 어떠한 것에서 찾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다는 교만한 마음이 가득하니 은혜를 주신 하나님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존재감'을 큐티를 통해서 흘려보내고 있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의식하고 있었든 그렇지 않았든 말이다. 

오늘 이 시편의 화자와 같이 기도한다. ‘여호와여 나를 주께로 돌이키소서’ 내가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며, 은혜로 받을 것을 은혜로 나누는 겸손함이 내 삶에 흘러나기를 원한다. 교만하지 않기를 원하나 자꾸만 행위를 의지하고, 행위를 통해 나의 존재감을 찾는 이러한 비복음적인 삶을 끊어내고 싶다. 주님이 나의 전부 되시며, 그는 흥하여야하고 나는 쇠하여야 하는 겸손함을 배우는 하루 되길!!

Romans 8:36 For from him and through him and to him are all things. To him be glory forever. Amen.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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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Thinking)/Meditation2018. 10. 11. 1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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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 5:1-10 인정받고 싶은 마음 때문이 아니라 사랑하는 마음으로 최선을 다하는 하루

6 우리가 애굽 사람과 앗수르 사람과 악수하고 양식을 얻어 배불리고자 하였나이다 
7 우리의 조상들은 범죄하고 없어졌으며 우리는 그들의 죄악을 담당하였나이다 
8 종들이 우리를 지배함이여 그들의 손에서 건져낼 자가 없나이다 
9 광야에는 칼이 있으므로 죽기를 무릅써야 양식을 얻사오니 
10 굶주림의 열기로 말미암아 우리의 피부가 아궁이처럼 검으니이다 

오늘 본문의 화자는 자신들의 죄를 고백한다. 그들의 죄는 하나님이 아닌 것들을 의지하고, 하나님이 아닌것들을 통해 그들의 배를 채우고자 한 것이다. 언제나 풍족하신 아버지를 멀리하고, 쥐엄열매를 먹고자 한 둘째 아들과 같았다. 그런데 오늘 이스라엘 백성들의 고백을 보고 있자니 떠오르는 한 사람이 있었다. 바로 아담이었다. 

아담은 자신에게 모든 것을 주신 풍족하신 아버지와 함께 있었고, 모든 것이 그의 것이었다 하지만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는 마음으로 죄를 지었고, 그에게 남겨진 것은 수고하고 땀을 흘려야 먹을 수 있는 고통과 고난, 그리고 죽음이었다. 애가의 화자가 이야기 하는 고난이 참 비슷하다. 그들도 하나님 아닌 것을 의지하였고, 이제는 죽기를 무릅써야 양식을 구할 수 있고, 굶주림의 열기로 피부가 아궁이처럼 검게 되었다. 

죄와 타협한 결과는 언제나 처참하다. 죄는 언제나 우리에게 달콤함을 먼저 보여준다. 마치 하나님같이 될 것 같고, 배부를 것 같은 이미지를 보여준다. 하지만 실상은 어떠한가? 죄는 우리를 이용하고, 우리가 죄를 짓게 되면 더 깊은 정죄와 더 비참한 삶으로 우리를 떨어뜨리고 만다. 하지만 우리는 어리석게도 죄의 결과보다는 죄의 달콤함이 먼저 보이는 사람들이다. 아담이 그랬던 것은 우리 모두가 그러할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죄를 이길 힘은 결코 내 안에서 나올 수가 없다. 죄를 안지어야지 한다고 안지을수도 없다. 우리의 몸은 사망의 몸이고, 우리는 곤고한 사람들(롬 7:24)이다. 하나님 같이 되려고 하는 마음이 아니라 하나님만 의지하는 마음이 죄를 이길 수 있다. 우리가 결코 아무것도 선한 것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우리가 곤고한 사람임을 인정하고, 우리가 가망성이 없는 사람임을 인정하고, 오직 주님 앞으로만 나아가야 한다. 

내 마음으로 내가 내 삶의 주인이 되려는 욕망이 모든 죄의 뿌리인 것을 알게 된다. 내가 하나님처럼 되려고 하는 마음이 나를 자꾸만 휘젓는다. 모든 것이 내가 원하는 타이밍, 내가 원하는 방법, 내가 원하는 장소에서 이뤄지길 바라며 하나님께도 자꾸만 그렇게만 기도한다. 시간, 방법, 장소까지도 내려놓는 내가 되기 원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원망과 절망을 보면서 다시 한번 내가 내 삶의 주인이 되지 않기를 다짐한다. 다짐으로 결코 되지 않는다. 의지한다. 자꾸만 내 얼굴의 가면을 벗고 하나님 앞으로만 나아간다. 

좋은 남편, 좋은 아버지가 되려는 마음이 아니라 좋은 남편, 좋은 아버지라는 다른 사람들로 부터 인정받고 싶은 마음을 내려 놓는다. 신실한 선교사가 되려는 마음이 아니라 신실한 선교사라는 주변사람들의 인정을 받고 싶은 마음을 내려놓는다. 그저 내 모습 이대로 받아주시는 하나님 앞에 나를 올려드린다. 그리고 오늘 하루도 그저 인정받고 싶은 마음 때문이 아니라 사랑하는 마음으로 최선을 다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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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Thinking)/Meditation2018. 10. 10. 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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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 4:11-22 묵상과 삶이 일치되는 삶이 되지 아니하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들의 죄는 여호와의 명령과 말씀에 불순종한 것이다. 13절에 보면 그들에게 말씀을 전해주던 의인들의 그들은 그들의 죄를 가리기 위해 죽였다. 그들이 받는 보응은 예루살렘의 멸망이다. 하지만 그들은 그들의 죄악을 직시하는 대신 헛된 도움을 그들을 구원할 수 없는 나라들을 통해 기대했다 (17절). 한마디로 죄는 자기들이 짓고, 원망은 하나님께 하며, 자신의 죄로 인한 결과를 위해 하나님이 아니라 주변의 나라들을 쳐다보는 아무런   소득없는 일들을 하고 있어 보인다. 그들이 했어야 하는 것은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이었고, 여호와의 말씀을 준행하며, 하나님을 자신의 왕으로 모시고 그 분을 위해 살아야만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핵심은 보지 못하고 곁다리만 긁고 있었다. 

나의 삶은 어떠한가? 나의 눈은 어디를 보고 있는가? 하나님을 본다고 하면서도 다른 의지할 것들을 늘 쳐다보고 있지는 않은가? 아침마다 묵상을 하면서도 하루종일 그 묵상의 내용을 마음에 품고 살아가기 보다는 자꾸만 다른 것을 찾는다. 헛된 곳들을 바라보며, 헛된 도움들을 찾는 것 같이 말이다. 말씀보다도 다른 책이나 다른 중요한 만남들을 의지하려고 하는 마음도 발견한다. 말씀을 붙드는 것 같기는 한데, 핵심은 온데간데 없고 다시 내가 주인이 되려고 하는 시도들을 계속 하고 있다. 묵상만 한다 뿐이지 삶의 열매가 없으면 멸망한 이스라엘 백성들과 무엇이 다른가? 그들도 자신들이 선택받은 민족들이고,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졌다고 자부하지 않았었던가? 

말씀이 묵상으로만 그치지 않고 삶의 변화로 넘어오길 원한다. 엊그제 아내가 내가 묵상한 것을 보면서 '오빠 오늘 묵상한 것과 다르게 살았네’라고 말하는데 마음에 분이 솟아 올랐다. 실제로 그렇게 살지 못했었기 때문에 오는 부끄러움과 민망함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면서 자기방어를 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런데 아내 말이 맞았다. 묵상과 삶이 일치되지 못하면 참 부질없는 삶이 되고 만다. 말씀을 가졌으되, 예수를 부인했던 그 시대의 유대인들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하나님 앞으로 돌아가고, 다시 그 분이 내 삶의 주인이 되시도록 내 삶을 내어 드리자. 

말씀이 오늘 내 삶 가운데 온 종일 나를 붙드시도록… 그리하여 내가 그 분을 사랑하고, 순종하고, 그 분이 내 삶의 주인되신다는 사실이 인정되는 하루가 되기 원한다. 요셉의 삶을 보면서 주변에서 모두가 하나님을 본 것 처럼… 물론 쉽지 않지만, 말씀에 나를 내어드린다. 목소리를 낮추고, 분을 낮추고, 기도하자. 주님 나를 도와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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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18. 10. 9.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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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 4:1-10 내 백성을 사랑하시는 아버지 하나님

하나님의 백성은 몰락하였다. 더 이상 손 쓸 여지도 없이.. 그들은 몰락하였고, 인간 이하의 삶을 살아가게 된다. 오늘 본문에서 계속 반복되는 것은 그들의 궁핍과 쇠약, 그리고 멸망할 때 얼마나 비참했는지를 반복하고 있다. 하지만 오늘 화자(하나님)는 여전히 그들을 내 백성이라고 부른다. 그들이 죄를 행하였어도, 비참해졌어도, 더 이상 무엇인가 소망이 없는 상태에서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내 백성으로 부르신다. 

우리가 흔히 하는 말 중에서 사랑의 반대말은 미움이 아니라 ‘무관심’이라고 한다. 하나님의 자신의 백성에 대한 사랑은 우리가 어떠함과 상관없이 여전하다. 무관심이 아니라 여전히 사랑이다. 마치 아이들이 잘못을 해서 부모에게 혼을 나서 매를 맞은 상황과 비슷해 보인다. 자녀들이 매를 맞아서 아프고, 쓰라리고, 너무너무 슬프고 힘든 상황이더라도, 그 분께서 우리의 좋으신 아버지임은 변함이 없다. 마치 부모님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마음이 매를 대더라도 변함없는 것 처럼 말이다. 매는 사랑의 도구요, 징계를 통해 가르치기 위함이었다. 

오늘 본문에서 자녀를 혼낸 아버지 하나님을 만난다. 자녀들을 혼내고 난 아버지는 마음이 아프다. 가슴이 답답하다. 하지만 자녀들이 옳은 길로 가도록 때로는 그 감정을 넘어서서 가르쳐야만 한다. 하지만 그러한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자녀들을 내 백성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이 끝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녀를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이 여전히 진행중임을 의미한다. 나를 향한 사랑, 형제, 자매들을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이 우리의 어떠함과 관계없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아무 이유 없이 사랑하시는 것이다. 때로는 우리의 삶에 어려움과 두려움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과분한 사랑을 받으며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삶이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 더욱 가까이 나아가자. 고난과 두려움이 있을 때 의심하지 말자. 
그리고 자녀들에게도 그러한 아버지가 되어주자. 아이들이 아버지를 통해 하나님의 성품을 경험한다고 하는데, 참 큰일이다. 사랑받는 자로써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고, 이유없이 받은 사랑을 나눠줌에 있어서 다른 사람들에게 사랑할 이유를 찾지 않는 하루가 되기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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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18. 10. 8. 1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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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 3:55-66 내 삶에 남아 있는 그 분의 신실하심의 흔적

오늘 본문에서 애가의 화자의 고백은 단순하다. 55-58절까지는 여호와께서 들으셨다고 고백하고, 59-62절까지는 보셨다고 고백하고 있다. 모든 시제는 과거로 쓰여져 있다. 즉 하나님께서 그동안 자신에게 어떻게 했는지를 다시 돌아보고 있다. 그리고 63절부터는 이제 현재형으로 돌아온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던 것 처럼 이제 그들에게 보응해달라고 탄원한다. 시인은 역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구하고 있다. 언제나 변함없으신, 언제나 신실하신 그 분께서 지금껏 자신의 삶에 개입하신 것과 같이 지금 자신의 어려움과 고통 가운데 개입해달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나도 나의 삶을 돌아본다. 1993년 예수님을 믿으면서 선교사로 헌신하고, 2009년 선교사로 가기 위해 직장을 그만두고, 벌써 2018년이 되었다. 그간 하나님께서 보여주시고 인도해주신 내용들은 수도 없다. 그 분은 언제나 신실하셨고, 그 분은 언제나 한결같이 야곱과 같은 나를 선한 길로 이끄셨다. 내가 보통 기도하는 제목들이 이 애가의 화자와 별로 다를게 없어 보인다. '지금 위태하니, 지금 어려우니, 지금 답답하니 나를 좀 도와주세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늘 선한 계획으로 나의 삶을 그 분의 시기와 그 분의 타이밍에 인도해주셨다. 

오늘 애가의 화자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으로 그들을 멸절시켜 달라고 한다. 원수들이 얼마나 꼴보기 싫었을까? 하지만 지금 나에게 동일한 사건은 없다. 나에겐 저정도로 꼴보기 싫은 사람은 없다. 다만 오늘 내가 기억하고 싶은 것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이다. 얼마나 신실하게 인도하셨는지,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셔서 인도하시는지.. 그것들은 내 삶에 흔적으로 남아 있기 때문에 내 삶을 돌아볼 때, 어떠한 물건을 볼때, 상황을 볼때, 다 기억이 나기 마련이다. 어마어마한 출애굽을 보고도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했던 이스라엘 백성과 같이 되지 않기를 원한다. 오늘은 내 삶에 남아 있는 그 분의 흔적들을 보며 감사하고, 다시 한번 그 분과의 관계를 점검하기 원한다. 오늘도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일하시고 계심에 감사하며, 그 분과의 시간을 가지기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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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