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Thinking)/Meditation2018. 10. 7. 1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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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 3:40-54 우리를 사랑하시는 아버지께 돌아가자. 

  1. 우리가 스스로 우리의 행위들을 조사하고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2. 우리의 마음과 손을 아울러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들자

우리는 돌아가야만 한다. 우리를 그 분의 형상으로 지으시고, 우리를 그 크신 사랑으로 사랑해 주시는 그 하나님께로 돌아가야만 한다. 우리가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본분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 분이 여호와 우리 하나님이시 때문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잘못들을 겸손하게 인정하고 (조사하고), 주님께 항복하는 것이 우리의 할 일이다. 손만 들어서는 안된다. 마음도 들어야만 한다. 

손만 드는 것도 어려운데 마음을 드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가? 하지만 우리의 마음을 주님께 들어야만 한다. 그래야 우리는 우리의 것들을 버리고 우리의 왕 되신 하나님께 돌아갈 수 있다. 오늘도 손만 들고 싶은 마음.. 때로는 손도 들고 싶지 않은 마음을 억누르고, 주님께 손과 마음을 든다. 항복한다. 나를 주님께 내어 드리고, 주님께서 나를 살려주시길, 고쳐주시길 원하는 마음에 나를 내어 드린다. 

내 마음대로 살고 싶고, 내 뜻대로 하고 싶은 내 마음을 내어 드린다. 내가 주인인 삶도 내어 드린다. 내어 드린다고 쓰고 있는 지금도 내어 드리는 것이 쉽지 않다. 그래도 다시  하나님께 이러한 연약한 마음도 올려 드린다. 주님 주님께로 돌아가니 불쌍히 여겨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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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18. 10. 6. 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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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 3:19-39 여호와가 나의 기업이시기에, Therefore I will hope in Him. 

내 마음에 고난과 슬픔을 담고 살아가지만 우리가 그것을 이겨낼 수 있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22-23절 때문이다.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다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 가장 깊은 고난 가운데서도 우리가 지금 오늘을 살아갈 힘이 생기는 것은 바로 그 분의 인자하심과 성실하심 때문이다. 

자신들의 죄악들로 인해 나라를 빼앗기고, 포로로 잡혀가고, 정말 그 어느 것 하나 선한 것이 없어 보이는 그 때에 그들이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자신들의 죄로 인해 징계를 주신 그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그것 이외에는 답이 없다. 지금의 상황에서는 징계를 받는 것이 맞다. 죄의 결과이니까… 하지만 죄로 인한 징계 혹은 우리가 겪고 있는 어떠한 어려움이 있더라도 그 분의 인자와 긍휼, 성실하심을 바라볼 때 우리는 다시 회복되고, 다시 하나님과의 은혜의 깊은 관계로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지금 당장 보이지 않아도, 지금 당장 갑갑하고 답답해도 그 분의 성품을 의지하며 기다리는 것이 정답이다.

이것을 25-26절에서 다시 이야기 하고 있다. ‘기다리는 자들에게나 구하는 영혼들에게 여호와는 선하시도다 사람이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림이 좋도다’ 
보이지 아니하는 막막함, 답답함, 때로는 우리의 연약함을 통해서 겪는 모든 고난과 고통,
그 속에서 우리가 참으로 의지할 것은 언제나 선하시고, 언제나 자비하시며, 우리의 어려움과 슬픔을 모두 체율하신 예수님 한 분을 바라보는 것이다. 
예수님이 나를 이해하신다. 예수님이 나를 도우신다. 예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이 나의 기업이 되시는 것이다 (24절). 한글성경에는 그래서 내가 그를 바라리라 라고 24절의 뒷부분을 번역하지만 ‘바라리라’라고 번역된 단어의 원뜻을 찾아보니 소망을 가지다, 기다리다 로 번역되어 있다. 그래서 ESV는 therefore I will hope in Him. 이라고 번역했다. 여호와가 나의 소망이 되시기 때문에 내가 오늘도 소망이 있는 것이고, 이 어려움과 고난과 슬픔 속에서도 기다릴 수 있는 것이다. 
근거 있는 소망과 근거 있는 기다림으로 오늘을 살아낼 수 있기를 원한다. 삶의 막막함과 답답함 속에서도 우리를 인도하시는 가장 선하시고, 가장 성실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업이 되어 주심에 오늘을 또 다시 살아갈 힘을 낸다. 

내 삶에서 더욱더 주를 바라보기 원한다. 내 시선이 주님께 고정되기 원한다. 오늘은 주님이 나의 기업이심이 좀 더 삶에서 드러나기를 원한다. 
Therefore I will hope in H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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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18. 10. 5. 1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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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 3:1-18 NIBC, Not I but Christ

우리의 삶은 때로는 답답해 보이고 막막한 순간에 마주치게 된다. 오늘 시인의 모습이 그렇다. 사방에 우겨쌈을 당하고, 답답해서 더 이상 아무런 말을 할 수 없을 것만 같은 시점이다. 18절에는 그래서 ‘스스로 이르기를 나의 힘과 여호와께 대한 내 소망이 끊어졌다’고 까지 표현하고 있다. 시를 읽고 있는데도 답답한데 실제로 이 상황 속에 있어야만 했고, 이 상황을 견뎌야만 했다면 얼마나 답답하고 힘이 들었을까? 심지어 그는 1-6절에서 이 상황이 그에게 전적으로 닥친 고난이라고 인식하고 있었다. 

오늘 본문 예레미야 애가의 저자를 누구로 보느냐에 대한 의견은 여러가지가 있을 수 있다. 예레미야로 볼 경우 그가 얼마나 많은 순간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서 경고하고, 기도하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는가? ‘눈물의 선지자’가 그의 별명 아니었는가? 그런데도 닥친 재앙을 그 자신에게 돌리고 있다. 예레미야가 정말 무엇을 잘못 했는가? 잘못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지 않았는가? 이해가 되지 않지만 오늘 본문의 저자는 그 벌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니라 자신이 받고 있음을, 그 고난을 당하는 자가 ‘자신’임을 이야기 하고 있다 (1절). 

18절의 그가 고백한 그의 상황이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향해 외쳤던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와 매치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자신이 잘못 한 것이 없는데도, 묵묵히 이 상황을 받아내고, 감내해야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게 바로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복음인 것이다. 복음이란 누구에게 좋은 소식인가? 그리스도께도 좋은 소식인가? 아니었다. 그 분께는 땀이 피가 되도록 기도해야 되는 고난이고 고통이었다. 그럼 누구에게 좋은 소식인가? 바로 우리와 같은 죄인에게다. 

오늘 시인의 저자가 자신에게 그 모든 고난을 돌리는 까닭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그를 보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용서하시고, 회복시켜 주시길 바라는 ‘기쁜 소식(복음)'을 향한 부족한 표현이다. 물론 이것을 완성시키신 분은 예수님이시다. 오늘 시인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모형을 보여주는 그림자였다.  

그렇다면 선교사에게, 리더에게 복음은 어떠한 것인가? 우리에게도 마찬가지로 복음이란 어쩌면 예수님이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하신 것과 같은 고난의 시간이고, 해산의 시간일 것이다. 물론 우리도 복음을 먼저 거져 받지 않았는가? 우리가 그저 예수님의 공로로 용서받았고, 용납받았으니 우리도 예수님이 그 길을 걸어가신 것과 같이 그 고통을 감내하고, 억울함을 감내하고, 그들을 위해 땀방울이 핏방울 되도록 기도하며, 그들을 위해 수고하고 헌신하는 것이 우리가 가진 복음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일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땅에서 억울함을 수없이 만나게 되고, 내가 무슨 낙을 보려고 이 자리에 서 있는지를 수 없이 고민해야 되고, 손해봐야 하며, 때로는 답답하고 막막한 순간을 수도 없이 마주쳐야 하는 사람들이다. 

태국 사람들의 속이 보이지 않고, 때로는 우리를 이용하려고 해도 우리는 그들을 위해 기꺼이 고난을 감내해야 하는 사람들인 것이다. 이 묵상을 삶으로 살아내는 것이 이렇게 글로 쓰는 것처럼 쉽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것이 쉽지 않음을 너무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예수님처럼 땀방울이 핏방울 되도록 기도하며 자신을 내려놓는 길을 걸어가야 하는 것이다. 싸우면 지는 것이다. 소리 지르면 지는 것이다. 우리는 져야만 이기는 싸움에 참여한 이상한 왕을 쫓아가고 있는 이상한 사람들인 것이다. 

오늘도 기도한다. 내 힘으로 살지 않기를, 내 생각으로 판단하지 않기를 말이다. 
롬 8:5절에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라고 말씀하고 있다. 오늘도 무엇을 따르고 있는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가? 
골 3:1-2에서는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복음을 먼저 받은 우리가 복음을 위해 살아가는 방법은 희생과 자기부인이다. 져야만 이기는 이 싸움에 위의 것을 생각함으로 오늘도 겸손하게 이 길을 걸어가기 원한다. 
결국은 NIBC이다. Not I but Chr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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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18. 10. 4. 2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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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 2:11-22 답답함을 넘어 처절함으로 그들을 위해 기도하기

예레미야애가를 보고 있으면 마음이 답답하다. 그 자비로우신 하나님께서 이정도까지 그들에게 고개를 돌리셨다면 그들의 잘못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잘못인가? 분명 그들의 잘못임에도 불구하고 마음이 답답하다. 왜 구해주시지 않는지, 왜 자비를 베푸시지 않는지…
하지만 이 애가를 작성하고 있는 화자의 마음은 단순히 답답함을 넘어선다. 그는 정말로 슬퍼하고, 정말로 울부짖는다. 18-19절에서 외치는 그의 말은 단순한 텍스트로 들리지 않는다. 
  1. 그들의 마음이 주를 향하여 부르짖기를 딸 시온의 성벽아 너는 밤낮으로 눈물을 강처럼 흘릴지어다. 스스로 쉬지 말고 네 눈동자를 쉬지 말게 할지어다.
  2. 초저녁에 일어나 부르짖을지어다 네 마음을 주의 얼굴 앞에 물 쏟듯 할지어다 각 길 어귀에서 주려 기진한 네 어린 자녀들의 생명을 위하여 주를 향하여 손을 들지어다 하였도다

그들을 위해서 계속해서 부르짖고, 눈동자를 쉬지 않을 정도로 울라고 했다. 그리고 자녀들의 생명을 위해서 주를 향하여 손을 들지어다 라고 말하였다. 아마도 선지자와 자신들의 백성들의 죄를 안타까워하며 그 틈에 서라고 권유하고 있다. 아마도 선지자가,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역자가 해야 하는 모습일 것이다. 

지금 태국의 영적인 상황을 보며 나도 그 틈에 서서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울고 있는가? 
참 알면서도 안되는 힘든 일인 것 같다. 어쩌면 알지 못해서, 제대로 그렇게 느끼지 않고 있어서 그렇게 못하는 것은 아닌지? 게을러서인지? 아니면? 뭘까? 
애가를 보면서도 단순히 답답함만을 느끼는 것이 내가 영적으로 민감하게, 혹은 이 상황에 대해서 민감하게 반응하지 못함은 아닌지? 영혼들을 더 돌아보고, 사랑하며, 그들을 위해서 더 기도하는 선교사가 되어야겠다. 애가의 화자처럼 답답함을 넘어선 영적인 움직임이 내 삶에서 나타나기 원한다. 아직은 그게 뭔지 정확히 모르겠지만, 조금씩 더 보기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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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Thinking)/Meditation2018. 10. 3. 1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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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 2:1-10 예수께 길을 묻고 가는 하루

하나님의 진노가 이스라엘로 향했다. 잡혀가고, 성전이 무너지고, 원수들의 손에 넘겨졌다. 9절을 보면 그들은 그들을 지켜줄 물리적인 성문과 빗장을 잃었으며, 리더쉽을 (왕과 지도자) 잃었다.  하지만 오늘 본문을 읽으면서 가장 큰 진노라고 느껴졌던 것은 9절 하반부에 나오는 부분이다. ‘그 성의 선지자들은 여호와의 묵시를 받지 못하는도다.’ ESV 성경은 her prophets find no vision from the Lord. 라고 번역하고 있다. 즉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모든 계시와 방향을 잃어버린 것이다. 

방향을 잃어버렸다는 것은 매우 무서운 큰 일이다. 하지만 더 무섭게 느껴진 것은 우리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모르고 있을 때, 우리가 방향을 잃어버린지도 모르게 되는 것이다. 방향을 잃어버렸다는 것을 자각한 것만으로도 은혜로 보여진다. 하지만 이것을 안 사람은 예레미야애가를 기록하고 있는 선지자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계속 몰라왔고(예레미야를 참고해보면..) 여전히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르고 있다. 길을 잃어버렸고, 여호와께서 더 이상 계시를 주지 않으시고 계시다는 것을 모르고 그냥 거짓 선지자들의 달콤한 소리에 그냥그냥 사는 것이다.  

‘그냥그냥,’ ‘되는대로,’ ‘사는게 사는거지’ 이 얼마나 무서운 말들인가? 방향도 길도 잃어버리고 그럼에도 그 길을 찾지 않는 삶은 얼마나 무섭고도 두려운 삶인가? 이렇게 길을 잃은 우리에게 예수님은 찾아오셔서 ‘I Am the Way’ 라고 말씀해주셨다. 예수님이 길과 방향을 잃은 우리에게 내가 길이라고 말씀해 주셨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도 예수님을 붙잡아야만 하는 것이다. 

나는 내가 가야 하는 길을 알고 있는가? 매일 말씀 묵상을 하면서도 내가 듣고 싶은 말씀만 듣고, 내가 원하는 말씀만 추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 나는 정말 길과 방향을 매일 ‘내가 길이다’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으로 부터 듣는가? 아니면 내 자신으로 부터 듣는가? 혹시 요나와 같이 ‘되는대로,’ ‘배가 오는대로’ 타고 가고 있지는 않은가? 스스로 기도가 부족함을 느낀다. 말씀묵상을 하면서 기도를 하는데, 기도가 충분하지 못하다고 생각이 든다. 오늘은 좀 더 기도하는 시간을 가지면서 주님께 듣고, ‘그냥그냥,’ ‘되는대로’가 아니라 주님이 말씀하시는 ‘그 길’로 가는 하루가 되기 원한다. 

요 14: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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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18. 10. 2.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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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 1:12-22 죄야 나랑 같이 죽자

본문의 화자는 계속해서 자신의 죄를 꺼내어 회개하고 있다. 18절에는 여호와는 의로우시도다 그러나 내가 그의 명령을 거역하였도다 20절에는 나의 반역이 심히 큼이니이다 라고 고백하고 있다. 회개하고 있는 것 같은 화자는 21절에서 갑자기 ‘그러나’로 시작되는 탄원을 한다. ‘그러나 주께서 그 선포하신 날을 이르게 하셔서 그들이 나와 같이 되게 하소서’ 22절에는 ‘내게 행하신 것 같이 그들에게 행하옵소서’ 라고 탄원하고 있다. 한마디로 같이 죽자는 이야기다. 나도 죄인이라서 내가 이 벌을 받는 것은 마땅하니, 저 놈들도 죄인이니 저 놈들도 나와 같이 벌을 주소서 라는 탄원이다. 

그들의 죄나 나의 죄나 동일하다. 나의 죄나 너의 죄나 동일하다. 우리는 모두 죄인이 맞다. 우리는 이 애가의 화자와 같이 고백할 수 밖에 없다. 나도 죄인, 쟤들도 죄인, 우리 모두 죄인.. 그래서 우리는 그 죄로 인한 고통과 고난을 당해야만 한다. 그게 정상이다. 그런데 나도, 너도, 우리도 죄인이 이 땅에 그 죄를 자신에게 돌리는 한 분이 나타나셨다.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지고 죽으셨다. 눅 23:24에서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라고 말씀하셨다. 그 분은 나도, 너도, 우리도 죄인인 곳에 오셔서 우리 모두가 죽어야 되는 상황 속에서 우리를 살리기 위해 오셨다. 죄를 알지도 못하시는 분께서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 죄가 되신 것이다. 

내 삶에 소망이 없다. 죄짓는 것 말고는 다른 것이 아무것도 없다. 누군가의 표현처럼 ‘죄짓는 공장’같은 느낌이다. 잠시도 죄 없는 상태로 살 수 없다. 계속해서 죄를 더할 뿐이다. 그런데도 내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예수님 때문이다. 나를 위해 죽으셨을 뿐만 아니라 내가 그 이름을 믿을 때 나에게 새로운 생명과 새로운 삶을 주신 그 분 때문에 오늘을 살아낼 수 있는 것이다. 오늘 애가의 저자와 같이 내 인생도 끝장이 나야 마땅하다. 망해야 마땅하고, 죽어야 마땅하다. 그런데 나를 살게해주시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신 예수님께서 계시니, 오늘도 다시 힘을 낸다. 죄와 같이 나도 죽기 원한다. 

죄와 같이 죽어야 다시 살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죽어야만 그와 함께 다시 사는 것이다. 말은 쉬운데, 죽기가 쉽지가 않다. 쉽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안죽고 싶다. 그래도 죽어야 한다. 그래도 내 자아를 죽여야 한다. 오늘도 말씀 안에서 내가 누구인지, 내가 왜 죽어야 하는지를 발견하며, 그렇게 살아가는 하루가 되기 원한다. 이 무능하고 절망적인 상황에서 나를 구원해내신 예수님을 찬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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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Thinking)/Meditation2018. 10. 1. 1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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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 1:1-11 슬프고 힘든 날의 간구

유다는 사로잡혔고, 예루살렘은 무너졌으며 그들은 비웃음 당하였고, 먹을것도 없어진 비참한 상황이었다.
그들은 알고 있었다. 8절에 예루살렘이 크게 범죄함으로.. 그들의 범죄가 지금의 상황을 만들었다는 것을 그들은 알았다. 보통 그렇지 않지만 이 상황은 그들의 죄가 그들의 삶의 고통과 고난을 초래한 케이스이다. 그렇기 때문에 화자는 계속 자신의 잘못을 회개하다가 9절에 가서야 겨우 ‘나의 환난을 감찰하소서’라고 기도한다. 그리고 11절에는 ‘여호와여 나를 돌보시옵소서’라고 기도한다. 

결국은 하나님 앞에 나와야 하는 관계의 문제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이후로 삶을 살아가면서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통해 즉시로 심판하시는 일은 거의 없다고 생각한다. 은혜를 주셔서 기다려주신다. 고난과 고통의 대부분은 그저 삶에서 당연히 일어나는 것 들이다. 하지만 이런 모양이든 저런 모양이든 고난이 발생했을 때 우리는 힘들 수 밖에 없고,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이다. 예레미야 애가의 화자는 자신의 죄로 인해 주저주저 하다가 결국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다. 하나님 앞에 나아와야 하는 것이다. 

우리의 죄가 붉고, 두려울지라도 우리가 붙잡아야 할 것은 예수님의 이름이다. 예수님의 이름 안에서 우리의 잘못을 고하고, 그 분께서 우리를 용서하신 십자가의 사건을 붙잡아야 하는 것이다. 거룩한척, 고상한척 하는 것이 아니라 부끄럽지만, 쪽팔리지만 그저 주님을 붙잡는 것이 우리의 할 일이다. 아이들, 아내 이야기가 큐티에 자주 나와서 좋은 부모, 남편인 것 같다고 이야기를 들었던 적이 있다. 참 부끄러웠다. 너무 안되서, 너무 힘들어서 매번 묵상에 등장하는 것인데, 그걸 보시고 잘하는 것 같다고 하니 더 부끄러울 따름이다. 요즈음 가장 힘든 것 중 하나는 아이들과의 기싸움(?) 그리고 아이들과의 관계에서의 중재와 내가 화를 내지 않는 일이다. 너무 힘이 든다. 진짜 왠수가 따로 없다. 하루 종일 지켰던 마음의 고요와 평안이 깨지는 건 순식간이다. 

하지만 이러한 것들을 또한 주님 앞에 내려놓고 구한다. 나는 이걸 해낼 힘이 없고, 나는 죄인이라 매번 넘어지고, 또 넘어진다다고.. 염치없고 부끄럽지만 다시 주님 앞으로 나아간다.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자신들의 죄로 날려 먹은 사람들도 주님 앞에 나가지 않는가? 나 역시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주신 기업인 아이들을 날려 먹을 것 같은 나도 주님 앞에 그저 나아간다. 그리고 우리 형제들을 생각하며 주님 앞에 아뢴다. 그들의 진로와 결혼, 그리고 거룩함을 위해 주님 앞에 아뢴다. 아이들 때문에 우리 형제들 때문에 내가 주님 앞에 더 나갈 수 있음에 감사한다. 

오늘도 하나님 앞에서 하루를 겸손하게 구하며 살아가기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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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18. 10. 1. 1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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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98:1-9 주님의 인자와 성실이 이끌어 가는 인생이 되자.

오늘 첫 텀때 함께 지냈던 태국 형제, 자매들과 오전에 시간을 보냈다. 집으로 초청해서 함께 식사를 했고, 이것 저것 이야기도 하고, 함께 좋은 시간을 보냈다. 마지막으로 식사하고 4년이 지나 다시 식사를 한 것 같다. 다 오진 못했고, 다 함께 하진 못했지만 그래도 함께 교제를 하고, 대화를 나누고 하니 예전생각이 났다. 예전에 매일같이 만나며 교제하고 함께 대화하고, 이것, 저것을 함께 나눴던 시간들이 기억이 났다.

3절에 ‘그가 이스라엘의 집에 베푸신 인자와 성실을 기억하셨으므로 땅끝까지 이르는 모든 것이 우리 하나님의 구원을 보았도다’ 라고 말씀하고 있다. 지금 내 머리속에 나오는 생각들이 내가 어떻게 해서 생겨난 기억들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사랑하셔서, 그들을 기억하셔서, 그들에게 인자와 성실을 베푸셨으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구원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나의 일도, 그들의 어떠함도 아니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고, 베푸신 사랑이었다. 

행복했던 시간들을 마무리짓고 우리 형제, 자매들을 돌려 보내면서 내 마음에 드는 생각은 주님을 향한 찬양이었다. 그들이 여전히 믿음 안에 굳게 서 있고, 여전히 학업과 일 속에서 씨름 하고 있는 모습을 보며 주님을 찬양하게 되었다. 그들을 보면서 아쉬운 부분이 전혀 없을 수는 없겠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시편의 저자처럼 4~6절에 나오는 것과 같은 찬양이었다. 

여전히 어떤 길로 주님을 따르고 섬겨야 할지 많은 생각과 고민들이 있다. 하지만 우리 형제, 자매들과 만나면서 드는 마음은 정말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니 우리는 그 분께 우리의 삶을 의탁드리는 것이 맞다는 생각이 든다. 무엇을 할까? 무엇을 섬길까? 무엇을 드릴까? 보다는 지금 나를, 우리 가정을 어떻게 인도하시는지 보며 그 분께 순종하고, 그 분을 따라가는 것이 내가 할 일임을 고백하게 된다. 

내가 한 것이 없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나는 그냥 오늘도 그 분의 뒤를 따를 것을 결정한다.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어다 (욥1:21 하반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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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18. 9. 28. 1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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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97:1-12 예수님 옆에 껌딱지 되는 하루 

하나님께서 모든 세계를 다스리신다(1-6절). 그래서 우리는 그 하나님을 믿고 살아가는 것이다. 참새 한 마리도 그냥 떨어지지 않고, 우리의 머리털까지 세신 바 되는 그 하나님, 온 우주를 단 하나의 오차도 없이 운행하시는 하나님을 우리는 믿고 살아간다. 그런데 그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두 주인을 섬기지 않는 것이다. 7절에 조각한 신상을 섬기고, 허무한 것들을 자랑하는 자들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 그들의 끝은 수치를 당할 수 밖에 없다. 온 우주를 다스리시는 왕의 왕이신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 손으로 만든 혹은 하나님이 만들어 놓으신 그 무엇인가를 하나님 대신 섬기는 것은 얼마나 불쌍한 일인가? 

10절은 다시 반복하고 있다. 우리가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는 사실을 다시 확인하고 있다. “여호와를 사랑하는 너희여 악을 미워하라” 
우리는 여호와를 사랑하면서 또한 악도 사랑할 수 없다. 여호와를 섬기면서도 다른 신을 섬길 수 없다. 여호와를 사랑하는 것은 우리의 모든 존재와 우리의 모든 삶을 걸고 해야 하는 일이다. 그래서 다른 것들을 동시에 사랑하거나 가질 수 없다. 우리는 하나를 선택해야 하고, 그 선택된 하나는 오직 하나님이어야만 한다. 

매일 매일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기로에 선다. 하나님과 나머지 것들…
하지만 그 상황에서 하나님을 선택하기란 참 쉽지가 않다. 앞 쪽에서 이야기 한 것 처럼 하나님이 온 우주 만물의 창조주이신 것을 알면서도 내 맘대로 하고 싶어 한다. 내 결정을 신뢰하려고 하고, 내 감정과 내 상황과 내 환경을 내가 가장 잘 아는 것 같다. 그래서 자꾸만 나를 신뢰하려고 한다. 아니라는 것을 머리로는 아는데, 충분하지 않다. 그래서 여호와를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다른 것도 사랑한다. 
이 땅에서 살아가는 내 평생 끝나지 않을 싸움일지도 모르겠다. 누구를 신뢰할 것인가? 누구를 사랑할 것인가? 누구와 함께 걸어갈 것인가? 

나는 할 수 없는 사람이다. 그래서 이러한 선택의 순간에 하나님을 선택했던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본다. 금식을 마치신 후 왔던 사단의 시험에 예수님은 이기셨다. 그런데 나는 못 이긴다. 그래서 예수님을 붙든다. 예수님은 붙들어도 되고, 안 붙들어도 되는 그러한 분이 아니다. 무조건 붙들어야 하는 그런 분이다. 나를 바라보며 더 절망할 때 더 예수님을 붙잡는다. 오늘도 나의 죄성을 바라보며 절망한다. 그래서 예수님을 더 붙든다. 오늘도 그 새로우신 예수님을 더 붙들고 살아가기 원한다. 순간 순간 쉬이 잊어버리기에 내 손에, 내 눈 앞에 말씀을 써 놓으며 그 분을 쫓아가기 원한다.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시 119: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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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18. 9. 27. 1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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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96:1-13 날마다 새로운 주님을 새 노래로 찬양합니다.  

1절에 '새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라’ 라고 시편이 시작된다. 읽자마자 바로 들었던 질문은 "왜? 왜 새노래야? 이전 노래면 안돼? 예전 찬양이면 안돼?" 라는 불만이 터져 나온다. 그래서 열심히 ESV 성경을 찾아 보았다. 
"새 노래 (참조, 40:3 , 96:1 , 98:1 , 144:9, 149: 1; 사 42:10; 계 5:9 , 14:3) 는 꼭 새로 작곡된 노래톨 의미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새 노래는 하나님의 은혜를 새롭게 경험한 데서 나온 반응으로 이 노래를 부르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역시.. 이 새 노래는 단순히 새로운 노래가 아니라 매일 매일 새로운 주님과의 만남에서 나오는 우리의 반응임을 이야기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읽고 나니 마음이 더욱 어렵다. 내가 정말 새 노래로, 매일 새로운 주님과의 만남 속에서 주님을 노래하고 있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아니다. 어제의 은혜, 몇 년전의 은혜, 혹 그것도 아니라면 그 이전, 이전의 은혜로 붙들고 살고 있지 않는가? 2절에서는 ‘그의 구원을 날마다 전파할지어다’ 라고 이야기 하고 있는데, 날마다 똑같은 것을 앵무새같이 말하는 것을 말하는 것은 분명히 아닐 것이다. 

오늘 만난 주님, 오늘 받은 은혜, 오늘 새롭게 회복된 내 심령이 주님의 구원을 외처야만 하는 것일 것이다. 선교사로 살아가면서도 오늘의 은혜가 아니라, 오늘 만난 신선한(?) 주님이 아니라 어제의 주님, 언젠가 만난 주님을 붙들고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나님을 매일 새롭게 경험해야만 하는데, 그래서 내가 만난 그 주님을 오늘 이야기 해야 하는데도 말이다. 매일 큐티 하는 시간을 더 붙잡기 원한다. 내가 큐티 했다는 스스로에게 만족감을 주려는 면피용 큐티를 하려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주님을 만나고, 그 새로운 주님을 경험하고, 내 안에서 그 새로운 주님을 향한 찬양이 터져 나오길 원한다. 그리하여 시인처럼 하나님의 영광과 그 분의 오심을 진정으로 찬양할 수 있게 되기를 원한다. 

내 삶에 이 ‘새 노래’가 충만한 하루가 되기를 원한다. 태국어 공부를 통해서도, 아이들의 양육을 통해서도, 우리 형제, 자매들과 보내는 시간을 통해서도 ‘새 노래’가 흘러 나오길 원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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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