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 4:1-13 진정한 안식에 들어가려면 말씀 앞에 서야만 합니다
1. 오늘 본문은 안식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이 안식은 지금의 우리 삶에서의 안식을 말할 수도 있지만 문맥상 우리가 죽고 나서 누리게 되는 영원한 안식에 대해 말하고 있다고 느껴진다.
2. 안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믿음"이다. 2절을 보면 “그들과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들은 바 그 말씀이 그들에게 유익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과 결부시키지 아니함이라" 들은 복음이 믿음이 되지 못하면 영원한 안식에 들어갈 수 없다.
3. 3절은 이를 확정한다. “이미 믿는 우리들은 저 안식에 들어가는 도다" 아마도 이 안식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천국과 동일한 의미인 것 같다. 우리는 믿음으로 천국으로 영원한 안식으로 간다.
4. 그런데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을 다른 단어로 확장을 한다. 6절이다. “그러면 거기에 들어갈 자들이 남아 있거니와 복음 전함을 먼저 받은 자들은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말미암아 들어가지 못하였으므로" 믿음과 순종은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5. 우리가 영원한 안식을 누리기 위한 복음을 들었다면 그 복음을 믿는 것 뿐만 아니라 복음의 계명에 순종하는 것이 우리의 삶이어야만 한다. 한국 교회는 믿음을 너무 중요시 한다. 믿음이 중요한 것 당연히 맞다. 그러나 야고보 사도가 말한 것 처럼 복음에 순종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약 2:17)
6. 예수께서 우리에게 주신 복음은 우리에게 단 두 가지의 계명 만을 이야기 한다. 첫째는 하나님 사랑이고, 둘째는 이웃 사랑이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우리에게 안식이 있을 수 없다. 당연해 보인다. 그러나 둘째 계명도 첫째 계명과 동일하다. 이웃 사랑이 없이는 우리의 믿음 자체가 죽은 것일 뿐이다.
7.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 말하면서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성경을 한 단어로 요약한다면 ‘사랑'이라고 말하지 않는가? 그런데 우리에게 사랑이 없다면, 사랑하지 않는다면 성경의 모든 말씀이, 그리스도의 모든 사랑이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으며, 그 복음이 우리를 어떤 안식을 허락할 수 있겠는가?
8. 그러나 사랑하겠다는 결심이 우리를 사랑하는 존재로 만들지 않는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설 때에야만 우리는 그제야 사랑할 수 있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히 4:12-13) 말씀 앞에 서서 우리의 연약함과 거짓됨을 바라보고, 하나님 앞에 우리의 악함이 드러나게 될 때 우리는 겸손하게 되고, 또한 그들을 나보다 낫게 여기며 사랑을 시작할 수 있게 된다.
9. 사랑하려는 나의 노력은 나의 의만 가지게 할 뿐이고, 그 노력은 쉬이 중단되게 된다. 오늘 안식을 누리기 위해 내가 해야 할 것은 사랑하려고 결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 앞에서 내 자신을 돌아보고, 내가 얼마나 악한 존재인지, 그럼에도 날 위해 허락하신 그리스도께서 얼마나 크신 사랑으로 나를 덮으셨는지를 보아야만 사랑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사랑하려고 하지 말고 말씀앞에 서려고 하자. 그게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의 첫 출발점이다.
10. 사랑하는 하루,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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