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Thinking)/Meditation2023. 7. 22. 12:05
728x90
반응형

롬 2:17-29 ‘복음의 통로’ 로서의 정체성

1. 로마서에서 먼저 유대인들의 위선과 죄를 지적한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가졌다고 말하며 율법을 가진 자신들을 자랑하지만 그들은 그 율법을 지키지 않는 자들이다. 

2. 유대인들은 이러한 생각 속에서 자신들이 교사요 스승이라고 믿는다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모본을 가진 자로서 어리석은 자의 교사요 어린 아이의 선생이라고 스스로 믿으니" (20절)

3.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을 선택하신 것은 맞으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이방의 빛’으로 부르셨지 교사요 선생으로 부르시지 않았다.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영광을 전하는 통로로 부름받은 자들이 자신의 통로됨을 잊어버리고 자고하며 자신을 교사로 선생으로 높이고 있었던 것이다.

4. 그리고 더 말이 안되는 것은 그들이 자신을 교사로 선생으로 자처하면서 그들의 가르침대로 살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면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은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도둑질하지 말라 선포하는 네가 도둑질하느냐 간음하지 말라 말하는 네가 간음하느냐 우상을 가증히 여기는 네가 신전 물건을 도둑질하느냐" (21-22절)

5. 이렇게 안타까운 유대인의 모습이 곧 나의 모습이 아닌가? 나에게서 보여지는 연약한 모습들이 아닌가? 선교사로 살아가기 때문에 나 스스로를 교사와 선생으로 생각하는 때가 꽤 있는 것 같다. 물론 역할적인 측면에서는 그런 부분이 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나를 ‘이방의 빛'으로 부르셨지 자고하는 교사와 선생으로 부르지 않으신 것을 명심해야 한다.

6. 자고 하지 않고, 스스로를 오해하지 않으려면 내가 선교사 혹은 목사라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부르심의 기능적인 면에 대한 집중이 아니라 부르심의 존재적인 면에 집중해야 한다. 

7. 하나님께서는 나를 복음을 전하기 위한 통로로 부르셨다. 통로에게 필요한 것은 흘려 보내는 것이다. 그리고 통로가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내가 그 복음을 흘려 보내는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 복음이 나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나 또한 복음이 필요한 그 한 사람일 뿐이라는 것이다. 

8. 육체의 할례(율법) 보다는 마음의 할례를 받아야 한다. 사람의 칭찬이 아니라 하나님의 칭찬을 받아야 한다 (29절). 그게 피조물이며 복음의 통로된 자가 가져야 할 자세이다. 내가 주인이 아니고, 내가 복음이 아니고, 나는 그저 전달자일 뿐이다. 오늘도 전달자로서의 나를 기억하며 주님 앞에만 진심으로 서고 주님께만 칭찬받는 자가 되기를 원한다. 

9. 오늘도 샬롬 

728x90
반응형
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23. 7. 21. 12:23
728x90
반응형

롬 2:1-16 절망이 소망으로 

1. 로마서 전반부를 읽고 있으면 우리 인간이 얼마나 죄인인지를 깨닫게 된다. 그런데 살다 보면 이 죄인들은 이 사실을 쉬이 잊어 버린다. 그래서 자신들이 죄인인지도, 얼마나 악질인지도 잘 모른다. 

2. 우리는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쌓아가는 자들일 뿐이다 (5절).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를 꽤 괜찮은 사람으로 착각하고, 이 정도면 괜찮은 신앙인, 이 정도면 괜찮은 지식인이라고 자부하게 된다. 그리고 죄를 지으면 회개하면 되지 라고 쉽게 생각한다. 

3.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분명히 말한다.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여…” (4절 전반부). 회개도 우리의 힘으로 우리의 능력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또한 우리의 결정이나 의지가 우리를 회개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도 아니다.

4. 오직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우리를 회개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시는 것이며, 오직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우리를 이끌어 회개에 이르게 하시는 것이다. 구원이 우리에게서 나는 것이 아닌 것 처럼 우리의 회개도 우리로 부터 나는 것이 아니다. 

5. 인간은 구원에서도 회개에서도 무능하다. 우리는 하나님의 도우심이 아니고서는 조금도 의로워질 수도 구원을 얻을 수도 또 회개할 수도 없는 존재들일 뿐이다. 우리는 구원자가 필요한 존재들일 뿐이다. 

6. 이러한 무능한 자들에게 율법을 주셨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 율법을 행하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 (13절). 그러나 우리가 과연 율법을 행하는 것이 가능한 자들인가? 

7. 율법을 생각할 때에 얼마나 답답한가?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그 말씀 앞에 내가 얼마나 무력하고 절망적인가? 사랑이 조금도 내 안에 없음을 자녀를 키우면서, 또 매일의 일상의 삶을 살아가면서 얼마나 자주 느끼는가?

8. 절망을 소망으로 바꾸시는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가 너무나도 내 삶에 필요한 이유이다. 오늘도 나의 절망을 본다. 그리고 그 절망 속에서 소망이 되시는 그리스도를 또한 본다. 내 능력으로, 내 힘으로 조금도 바꿀 수 없는 나의 삶을 그리스도께 또한 의탁한다. 사역도 주님께 의탁한다. 내가 무슨 능력으로 하나님의 사역에 참여하겠는가? 성도들을 섬길 능력이 가르칠 능력이 내 안에 있겠는가? 그래서 오늘도 필요한 것은 ‘Not i but Christ’의 삶이다. 뭘 하려고 하지 말고, 변하려고 하지 말고 그리스도와 함께 죽자. 주와 함께 죽으면 주와 함께 살 것이다. 

9. 오늘도 샬롬 

728x90
반응형
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23. 7. 19. 10:32
728x90
반응형

롬 1:1-17 복음에 빚진 자

1. 사도바울은 자신이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택정함을 받은 사도라고 자신을 소개한다 (1절).  그리고 이 복음은 어느날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니라 구약에서 부터 계속해서 선포된 것임을 말한다.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2절)

2. 하나님께서는 구약, 신약 전체를 통해서 계속 하나님의 복음을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신다. 문제는 그것을 듣는 우리였다. 이스라엘은 복음의 절반만을 깨달았고, 그들은 자신들을 위한, 향한 복음만을 생각했었다. 

3. 그러나 바울이 보고 있는 복음은 이스라엘이 이해했던 복음에 비해 더 크고, 놀라우며, 유대인들만을 위한, 향한 복음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이 복음을 전하는 것에 자신의 생명을 걸었고,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다. 로마에도 복음을 전하기 위해 그는 여러번 애를 썼다 (13절). 

4. 복음은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이 빚진 자라고 이야기 한다.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14절) 세상에서 가장 크고 놀라운 소식을 먼저 들은 자의 반응은 사실 이게 정상이다. 

5. 이 좋은 소식을 나만 알고 있어서는 안되겠다는 빚진 마음이 저절로 드는 것이다. 그리고 이 좋은 소식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16절)

6. 나는 복음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나를 위한, 나를 향한 소식이라고만 생각하고 있지는 않은가? 복음은 모든 사람들을 위한 것이며, 모든 사람들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우리가 왜 복음을 우리의 삶에서 게속 전해야 하는가? 내가 복음을 먼저 들은 빚진 자이기 때문이다. 

7. 빚진 자의 의식 없이는 우리는 공로를 주장하게 된다. 내가 하나님의 복음을 위해 수고하고 애쓴 것이 생각난다. 하나님을 위해 드린 나의 물질, 시간이 생각나게 된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모든 죄와 악함을 탕감 받은 자들 아닌가? 내가 감당할 수 없는 모든 빚을 탕감받았는데, 우리가 조금 수고한다고 해서, 조금 애쓴다고 해서 무엇이 우리의 공로가 될 수 있을 것인가? 

8. 복음을 전하는 것은 수고와 애씀이 아니라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기쁘고 감사한 일이다.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 정말 우리가 필요할까? 아마도 아닐 것이다. 하나님께서 홀로 하시면, 혹은 내가 아니라 다른 누군가와 하신다면 훨씬 더 효율적이고 잘 전해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일을 우리와 함께 하시겠다고 우리를 부르신 것이다. 내가 사도 바울과 같이 잘하지 못해도 상관없다. 뛰어나지 않아도 상관없다. 그저 우리 자신을 오병이어와 같이 주님께 드린다면 놀랍고 아름답고 능력있으신 주님께서 우리를 통해 오천명을 먹이시는 기적을 행하시는 것이다. 

9. 복음에 우리의 삶을 드리기 원한다. 모든 사람이 선교사가 되고, 목사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 아니라 삶의 자리에서 복음을 전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빚진 자임을 잊지 말고, 나같이 연약하고 부족한 사람을 통해 복음을 전하게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올려 드린다. 

10. 오늘도 샬롬

*신학교 수업을 하면서 너무 감사한 것은 수업 내용을 통해서 학생들의 마음과 생각이 변화되는 것을 직접 보게 되는 일이다. 1교시 마치고 쉬는 시간에 자신이 자세하게 필기한 내용을 보여주면서 하나님께서 이 수업을 통해서 자신에게 어떠한 말씀을 하셨고, 자신이 어떤 은혜를 받았는지 나누는데 그 나눔이 너무 은혜가 되고 감사가 되었다. 

신학교 강의를 준비하고 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시는 은혜가 더 크고, 미래의 목회자들을 세워간다는 생각에 계속 하고 있습니다. 힘을 내어 계속 할 수 있도록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샬롬

 

728x90
반응형
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23. 7. 19. 10:30
728x90
반응형

잠 8:22-36 지혜를 얻기 위해서는 그리스도를 알아야 한다. 

1. 잠언 8:22-31절에서 지혜를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이 지혜는 우리가 생각하는 지혜와 달리 좀 독특하다. 22절에는 “태초에 일하시기 전에 나를 가지셨으며" 라고 설명하며 이 지혜가 이미 모든 것이 창조되기 전부터 하나님과 함께 있었음을 설명하고 있다. 

2. 하나님께서 하늘을 지으실 때에도(27절), 바다의 한계를 정하고(28절), 땅의 기초를 정하실 때에도 (29절) 함께 있었다. 30절은 이렇게 말한다. “내가 그 곁에 있어서 창조자가 되어 날마다 그의 기뻐하신 바가 되었으며 항상 그 앞에서 즐거워하였으며"

3. 여기까지 묵상하니 한 말씀이 자동적으로 떠오른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요1:1-3)

4. 이 지혜는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 성자 하나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그런데 이 본문은 35-36절에 가서는 이 지혜를 반드시 얻어야만 함을 설명한다. “대저 나를 얻는 자는 생명을 얻고 여호와께 은총을 얻을 것임이니라 그러나 나를 잃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해하는 자라 나를 미워하는 자는 사망을 사랑하느니라" (35-36절) 

5. 우리는 왜 이 지혜를 얻어야만 할까? 왜 이 지혜를 잃으면 우리의 영혼을 해하게 되는 것일까? 우리는 우리를 구원할 어떤 능력도 없는 피조물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실 때에 우리는 그 자리에 없었다. 우리는 내 몸이 어떻게 창조되었는지, 이 우주가 왜 이렇게 큰지 조금도 알지 못한다. 

6. 우리는 우리 자신을 구원할 능력도, 우리의 삶을 변화시킬 힘도, 우리가 왜 태어나고 왜 살아야 하는지, 또 왜 죽어야 하는지도 조금도 알지 못하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 안에 없는 지혜를 우리는 지혜 그 자체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얻어야만 하는 것이다. 

7. 그 지혜가 육신을 입고 이 땅으로 오셨다. 그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래서 우리가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그 그리스도를 우리의 구원자, 우리의 하나님으로 믿어야만 하는 것이다. 우리가 믿을 때에 그 지혜가 내 안에서 살아서 역사한다. 이 세상의 창조 원리를 조금도 이해하지 못하는 내 머리가 아니라 모든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지혜로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8. 그래서 구원도 얻을 수 있고, 우리의 삶도 변화시킬 수 있으며, 우리의 삶의 의미와 이유를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생명이 있고, 그리스도 안에 능력이 있고, 그리스도 안에 모든 지혜의 부요함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알아야 한다. 그리스도를 계시해 놓은 성경을 부지런히 읽고 묵상해야 한다. 그래야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는 것이다 (35절). 

9. 어제 교회에서 주일 말씀을 전하면서 한 번 더 다짐을 하게 되었다. 더 부지런히 말씀을 읽고 연구해서 우리 태국의 영혼들에게 진정한 하나님의 말씀의 의미와 사랑을 전하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오늘 뿌리고 심어야 한다.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것을 게을리 하지 말자. 그 안에 생명이 있다. 

10. 오늘도 샬롬 

 

 

728x90
반응형
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23. 7. 14. 11:11
728x90
반응형

잠 7:1-9 읽어야 마음에 새긴다. 

1. 하나님의 말씀은 그저 듣고 흘려서는 안되는 말씀이다. 왜냐하면 온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들에게 계시하신 유일한 말씀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보느냐가 이 말씀을 어떻게 대하느냐를 결정한다. 

2. 나는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보고 있는가? 인터넷으로 보는 수 없는 기사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취급하고 있지 않은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기 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쓴 글들을 오히려 더 많이 읽고 묵상하고 있지는 않은가?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잘 붙들자. 

3. 새번역을 보면 1절은 “아이들아, 내 말을 지키고, 내 명령을 너희 마음 속 깊이 간직하여라" 라고 번역한다. 단순히 읽는 차원이 아니라 잊지 않도록 마음 깊이 간직해야 한다. 이 구절은 3절에서 더욱 발전된다.

4. “그것을 너의 손가락에 매고, 네 마음 속 깊이 새겨 두어라" (3절) 말씀을 마음에 새기기 위해서는 눈으로 수 없이 보아야 한다. 보지 않은, 읽지 않은 말씀을 결코 기억하고 마음에 새길 수 없다. 말씀을 눈에 잘 띄는 곳에 써 놓고, 계속해서 읽어야 한다. 

5. 그리고 그 말씀을 마음판에 새겨야 한다. 마음판에 새긴다는 것은 여러가지로 생각할 수 있겠지만 습관화 한다는 의미가 아닐까? 군대에 있을 때 누군가가 손을 대면 내 계급과 이름을 대어야 하는 관등성명처럼, 나를 건들면 그 말씀이 튀어 나오는 그러한 정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6. 그렇게 말씀이 나를 움직이는 원동력이 되면 그 말씀의 능력이 내 삶을 죄로부터, 악으로부터, 또 음행하는 여자로부터 지켜줄 것이다 (5절). 말씀이 나를 움직이도록 해야 한다. 

7. 그러기 위해서는 왕도가 없다. 부지런히 읽고, 묵상하고, 또 읽어야 한다. 성경을 어플이 아니라 책으로 늘 지니고 다니고, 열어 보아야 한다. 스마트폰 시대가 오면서 책으로 된 성경을 잘 가지고 다니지 않게 되고, 그러다 보니 읽는 시간도 줄어든 것 같다. 

8. 더 많이 읽고, 더 많이 묵상할 수 있게 되기를 원한다. 성경에 대한 컨텐츠는 넘쳐 나는데, 정작 성경을 보지 않는 아이러니에 빠지지 말자. 한국어, 영어, 태국어로 성경을 부지런히 읽자. 말씀을 전하고 가르쳐야 할 선교사가 아닌가? 더 많이 읽고 더 많이 묵상하자. 아침에 보내는 이 묵상도 면피용으로 하지 말자. 더 깊은 말씀 안으로 들어가자. 그 모든 것은 말씀 읽기에서 부터 시작된다. 말씀을 읽자. 

9. 오늘도 샬롬 

728x90
반응형
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23. 7. 12. 10:50
728x90
반응형

잠 6:1-19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은 사랑의 관계의 확장이다

1. 오늘 잠언은 게으름 (6-11절)과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는 악(16-19절)에 대해서 말한다.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법칙은 심은 데로 거두는 것이기 때문에 게으르면 아무런 열매도 얻지 못한다. 

2. 그러나 감사(?)하게도 게으른 자를 하나님께서 싫어하신다고 기록되어 있지는 않다. 게으르다는 것은 선악의 개념은 아닌 것 같다. 그러나 게으를 때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달란트를 땅에 묻어 놓게 되는 것이며, 열매가 없고, 궁핍한 삶을 살아가게 된다. 선악의 개념은 아니지만 좋지 않은 것만은 확실하다.

3. 그러나 12절 부터는 선악의 개념이 들어 있다. 불량하고 악한 자에 대해서 이야기 하면서 구부러진 말을 하는 사람에 대해 말한다. 16절은 이렇게 시작된다.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는 것 곧 그의 마음에 싫어하시는 것이 예닐곱 가지이니" 분명히 하나님께서 미워하고 싫어하시는 것들이다. 

4. “곧 교만한 눈과 거짓된 혀와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는 손과 악한 계교를 꾀하는 마음과 빨리 악으로 달려가는 발과 거짓을 말하는 망령된 증인과 및 형제 사이를 이간하는 자이니라” (17-19절)

5.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죄는 게으름처럼 자기 자신에 대해 어떻게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관련된 것들이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나의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신 이웃들에게 해를 끼치고, 이웃들에게 거짓을 말하여 갈라지게 하며 무죄한 자들을 아프게 하는 자들을 미워하신다. 

6. 삼위일체 하나님께서는 사랑의 관계로 존재하시기 때문에 우리 또한 하나님과의 또 이웃과의 사랑의 관계 속에서 존재하길 원하시는데, 하나님께서 미워하는 자들은 그 관계를 깨뜨리는 자들인 것이다. 게으름은 자신에게 관련된 것이니 자신만 잘하면 되지만 관계를 깨뜨리면 모두가 힘들게 되기 때문에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는 것이다. 

7. 나는 어떤 사람인가? 사랑의 관계를 세워가고 확장해 나가는 사람인가? 아니면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무너뜨리고, 끊어버리려고 하는 사람인가? 여호와께서 사랑하시는 자인가?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는 자인가? 

8.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자로, 사랑의 관계를 세워가고 확장해 가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랑받음이 먼저 필요하다.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사랑받지 않고, 내가 소중한 존재임을 알지 못한다면 어찌 다른 이들을 사랑할 수 있겠는가? 사랑의 근원이신 하나님께로 더 나아가야 하는 이유이다. 충분히 사랑받아야 사랑할 수 있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항상 조심해야 한다. 좋은 의도로 이야기를 하더라도 나의 의도와 상관없이 가는 경우도 얼마나 많은가? 다른 사람에 대해 판단하기 전에 내가 얼마나 사랑받고 있는 사람인지, 내가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 사람인지를 먼저 평가하자. 

9. 수쿰빛 언약교회의 사랑의 관계가 나로부터 시작되기를 소망한다. 사랑의 문화, 사랑의 섬김, 사랑의 교제가 나로부터 시작되어 더 깊어지길 소원한다. 그러기 위해서 오늘 더 주님 앞으로 나아가서 더 사랑받고, 그 주님과 더 깊은 관계를 맺자. 입은 닫고, 마음을 열자.

10. 오늘도 샬롬 

728x90
반응형
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23. 7. 10. 13:21
728x90
반응형

잠 5:1-14 나를 믿지 말고 가까이 가지 말라

1. 하나님의 지혜가 아닌 이 세상의 것들은 항상 우리에게 멋져 보인다. “대저 음녀의 입술은 꿀을 떨어뜨리며 그의 입은 기름보다 미끄러우나” (3절) 하와가 뱀의 꼬임에 넘어갈 때 들었던 마음과도 비슷하다.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창 3:6 전반부)

2. 우리를 유혹하기 원하는 모든 것들은 다 그럴듯 해 보인다. 있어 보이고, 아름다워 보이고, 저것만 가지게 혹은 하게 된다면 행복해질 것이라고 우리 스스로를 생각하게 만든다. 그러나 보이는 것에 현혹되면 무엇이 진리인지, 무엇이 거짓인지를 분간하지 못하게 된다. 왜냐하면 우리의 눈은 (마음은) 우리가 신뢰할 만큼 정확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3. 우리의 마음이 현혹이 되면 그 때 부터는 합리적인 이유들과 근거들을 대면서 내가 좋아하는 것을 선택한다. 그것이 설사 우리의 삶이 망가지고, 하와와 같이 죽음으로 가는 길이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4. 잠언은 이렇게 죄를 향해 달려가는 우리를 권고한다. “그런즉 아들아 나에게 들으며 내 입의 말을 버리지 말고 네 길을 그에게서 멀리 하라 그의 집 문에도 가까이 가지 말며” (7-8절) 성경이 우리에게 말하는 것은 그럴 여지를 남기지 말라는 것이다. 

5. 보았기 때문에 현혹될 여지, 들었기 때문에 헷갈릴 여지를 남기지 말라는 것이다. 아예 그 자리를 피하고, 가까이도 가지 말라는 것이다. 조금도 넘어질 여지를 두지 말라는 것이다. 요셉이 그랬다. 그는 보디발의 아내가 아예 옆에 오지도 못하게 하지 않았는가? 그런데 나는 어떠한가? 

6. 나는 때로는 큰 착각을 하는 것 같다. 내가 가까이 가도, 그 옆에 있어도 내 자신을 그것으로부터 충분히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하거나 나는 그것과 상관없이 괜찮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엄청난 착각이며, 하나님의 말씀보다도 내 자신을 더 믿고 있는 것이다. 

7. 뱀의 꼬임에 넘어갔던 아담과 하와도 자신이 넘어질 거라고 생각하면서 뱀의 말을 듣고, 선악과 열매를 쳐다 보았던 것은 아니었다. 자신에 대한 과신이, 자신감이 그들을 넘어 뜨렸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고후 10:12

8. 내가 누구인지를 아는 것이 은혜이고, 복음의 시작이다. 내가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힘이 없다는 것, 내가 유혹에, 세상의 것들에 너무나도 쉽게 흔들리는 사람임을 깨달아야만 여지를 남기지 않을 수 있다. 내가 얼마나 절망적이고, 아무것도 아닌지를 더욱 더 깊이 깨닫는 하루가 되기 원한다. 내 삶을 지켜나가는 것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임을 고백하며, 조금도 자고하거나 교만하지 않는 자로 살아갈 수 있게 되기를 소원한다. 

9. 오늘도 샬롬

728x90
반응형
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23. 7. 10. 13:19
728x90
반응형

잠 2:16-22 기억하는 자는 반복해서 읽고 듣는다

1. 지혜가 없는 자는 보통 다른 사람들의 지혜있는 이야기를 잘 듣지 않고 자신의 생각대로 행동한다. 즉 내가 아는 것이 전부인 것 처럼 행동하게 된다. 들을 귀 없는 자이다. 

2. 이와 더불어서 오늘 본문에서는 지혜 없는 자를 또한 ‘하나님의 언약’을 잊어버린자라고 표현하고 있다. 즉 ‘기억하지 못하는 자’이다. 하나님께서 어떠한 은혜를 베푸셨는지, 하나님께서 자신과 어떠한 사랑의 관계를 나누셨는지를 기억하지 못하는 자이다.

3. “그는 젊은 시절의 짝을 버리며 그의 하나님의 언약을 잊어버린 자라” (17절). 원래 우리가 어떤 자였는가? 하나님을 거역하고, 불순종하고, 피조물인데 창조주처럼 되려고 했던 자였다.

4. 그러한 우리를 하나님께서 사랑하여 주셔서 죽은 바 되었던 우리를 그리스도로 인해 살려주셨다. 살려 주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를 자녀로, 또 그리스도의 신부로 불러 주셨다. 이것이 복음이다. 

5. 그런데 지혜가 없는 자는 이 복음을 잊어버리고, 내가 잘나서 혹은 내가 뛰어나서 지금의 자리에 서 있는 줄로 착각하고 있다. 기억하지 못하는 자이기에 악한 자가 된 것이다. 

6. 지혜의 근원이신 하나님은 절대 잊어버리지 아니하신다. 그 분은 우리와 맺은 언약을 늘 기억하신다. 노아의 홍수의 때를 보자. “하나님이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는 모든 들짐승과 가축을 ”기억“하사 하나님이 바람을 땅 위에 불게 하시매 물이 줄어들었고” 창 8:1 하나님은 우리와 맺은 언약을 결코 잊지 아니하신다. 문제는 항상 하나님 편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편에서 발생한다. 

7. 레위기에서도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그들의 하나님이 되기 위하여 민족들이 보는 앞에서 애굽 땅으로부터 그들을 인도하여 낸 그들의 조상과의 언약을 그들을 위하여 “기억”하리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레 26:45 

8. 우리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맺은 언약을 결코 잊지 아니하신다. 따라서 우리가 지혜자가 되려면 언약을 잊어버리지 않아야 하고, 기억해야 한다. 잊지 않고 기억하기 위해서는 반복해서 들어야 한다. 반복하지 않는 모든 것은 금세 사라질 뿐이다. 말씀을 반복해서 읽어야 하고, 또 반복해서 들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이미 하셨다. 중요한 것은 오늘의 삶 속에서 나의 반응이다. 

9. 마태복음 7:6에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고 하셨다. 하나님의 언약을, 하나님의 말씀을 경히 여기지 말고, 우리의 삶을 구원하시는 지혜로 여기고 읽고, 암송하고, 들으며 오늘을 살아가자. 

10. 오늘도 샬롬 

728x90
반응형
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23. 7. 10. 13:18
728x90
반응형

잠 2:1-15 지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데서 시작된다

1. 잠언서는 우리에게 계속 지혜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있다. 지혜를 듣고, 간직하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지혜는 우리 자신에게서 나올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혜는 항상 지혜로운 자, 지혜 그 자체 되시는 하나님으로부터 듣는 것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하나님으로부터 듣는 것이 없이는 우리는 결코 지혜를 말할 수 없다. 

2. 오늘 본문에서도 마찬가지로 말한다. “내 아들아 네가 만일 나의 말을 받으며 나의 계명을 네게 간직하여  네 귀를 지혜에 기울이며 네 마음에 명철을 두며" (1-2절)

3. 그러나 듣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지혜를 구하고 찾아야만 한다. “은을 구하는 것 같이 그것을 구하며 감추어진 보배를 찾는 것 같이 그것을 찾으면 여호와 경외하기를 깨달으며 하나님을 알게 되리니" (4-5절)

4.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나주시는 것은 항상 일방적인 사건이다. 우리가 찾는다고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나 주셔야지만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가만히 있어야 한다는 것도 결코 아닐 수 밖에 없다. 

5. 우리는 언제든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이다. 하나님으로부터 지혜를 들을 수 있고, 그 지혜를 암송할 수 있고, 그 지혜를 내 삶에 매일 적용할수 있다. 그 지혜는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다.

6.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그리스도, 그리고 그 오실 그리스도와 오신 그리스도를 기록한 66권의 성경이 바로 하나님의 지혜이고, 하나님의 말씀이다. 매일 이 말씀을 대함이 없이 우리가 어찌 하나님의 지혜를 가지겠는가? 

7. 오늘도 묵상을 통해 이 말씀을 대한다. 하지만 아침에 한 번 읽고 끝내는 묵상이 아니라 하루 종일 그 말씀을 생각 속에서 마음 속에서 새기고 읽고, 되뇌어야 한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부지런히 읽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다른 것도 중요하지만 그 이상으로 관심과 중요성을 두고 매일 읽어야 하는 것이 또한 성경인 것이다. 그래야만 우리는 지혜를 얻을 수 있고, 그 지혜를 마음에 새길 수 있다.

8. 라인그룹에서 성경을 읽는 사역을 시작하면서 3개월을 혼자서 열심히 읽었다. 지금은 교인들이 매일 돌아가면서 읽고 있고, 나는 한국을 다녀오면서 그나마 1주일에 한 번 읽는 것도 다른 자매에게 맡기게 되었다. 사역이 잘 돌아가는 것은 감사한데, 문제는 내가 성경읽기에 조금 나태해진 것 같다는 생각 때문이다. 내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사역의 일부로 읽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다시 성경읽기에 힘을 쏟기를 원한다. 사역이나 보여주기가 아니라 진정으로 그 지혜를 얻기 위해서 말이다.

9. 오늘도 샬롬 

728x90
반응형
Posted by 신애친구™
728x90
반응형

잠 1:20-33 지혜를 듣고 싶다면 그 자리를 떠나라

1. 지혜는 계속해서 듣지 못하는 우리에게 외치고 있다. “지혜가 길거리에서 부르며 광장에서 소리를 높이며 시끄러운 길목에서 소리를 지르며 성문 어귀와 성중에서 그 소리를 발하여 이르되" (20-21절)

2. 지혜가 아무리 외쳐도 듣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가 서 있는 자리가 시끄러운 자리이기 때문이다. 길거리, 광장, 시끄러운 길목, 성문 어귀, 성중 모두 많은 사람들이 함께 있는 자리이고, 각자의 생업을 하거나 분주한 자리이다. 이런 자리에서는 아무리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셔도 들을 방도가 없다. 

3. 지혜로 부터 하나님으로부터 들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많은 사람들과 함께 있는 자리가 아니라 생업을 하고 있는 분주한 그 자리가 아니라 조용하고, 그 누구도 간섭할 수 없고, 다른 일로 멀티태스킹을 하지 않아도 되는 그 자리에 있어야 한다. 

4. 예수님도 기도하며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 하실 때 오히려 조용한 곳으로 가셨다. “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 예수께서 일어나 한적한 곳으로 가서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막 1:35

5. 나의 자리를 조용하고, 방해받지 않는 한적한 자리로 옮기지 않으면서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지 않는다고 불평하는 것은 내가 듣고 싶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 “내가 불렀으나 너희가 듣기 싫어하였고 내가 손을 폈으나 돌아보는 자가 없었고" (24절)

6. 다른 소리들이 들리지 않는 곳으로 가야 한다. 어떤 소리도, 어떤 일도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혜가 우리를 부르는 소리를 듣는 것을 방해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데서 모든 것이 회복되고 모든 것이 새롭게 시작되기 때문이다. “오직 내 말을 듣는 자는 평안히 살며 재앙의 두려움이 없이 안전하리라" (33절)

7. 오늘 나는 어디에 앉아 있는가? 하나님의 세미한 소리가 들리는 자리에 앉아 있는가? 아니면 유튜브와 사람들의 잡담과 해야 할 일들이 가득한 길거리, 광장, 시끄러운 길목에 앉아 있으면서도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는다고 불평하고 있지는 않은가? 

8. 듣기 원한다. 듣고, 들은대로 살기 원한다. 그러기 위해서 들을 수 있는 환경을 만들기 원한다. 들을 수 있는 자리로 옮겨가기 원한다. “주여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삼상 3:9 일부). 

9. 오늘도 샬롬 

728x90
반응형
Posted by 신애친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