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Thinking)/Meditation2022. 10. 13. 1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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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5:8-20 모든 것에 의미를 주시는 분을 만나라

1. 세상의 헛됨을 이야기 하는 전도자는 재물에 대해서도 이야기 하고 있다. “은을 사랑하는 자는 은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풍요를 사랑하는 자는 소득으로 만족하지 아니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 (10절) 

2. 솔로몬은 그 시대의 거부였다. 그가 가진 어마어마한 재물들을 생각해본다면 저 고백은 솔로몬이 가질대로 가져보고 나서 한 이야기라고 생각할 수 있다. 물론 이 허무함은 다음 절들을 살펴보면 많이 가져서 허무하기 보다는 많이 가졌기 때문에 발생하는 다른 많은 문제들 때문에 허무한 것이다. 

3. 많이 가졌기 때문에 사람을 많이 써야 하고 (11절) 많이 가졌기 때문에 도둑이 들까 염려하게 된다 (12절). 그리고 많이 가졌으나 그가 가진 어떤 것도 가지고 죽을 수 없기 때문이다 (15절). 

4. 특별히 물질만능주의를 살아가는 지금 이 시대에는 솔로몬의 허무감을 생각하기 보다는 솔로몬 처럼 먼저 많이 가지려고 사람들은 노력한다. 소유는 사실 중요한 것이다. 그 누구도 소유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할 수는 없다. 우리는 열심히 살고, 열심히 벌어야 한다. 

5. 하지만 그 소유가 우리 인생의 종착점이나 우리 인생의 전부라면 그 마지막은 전도자의 고백처럼 ‘헛됨' 밖에 남을 수 없다. 하나님께서 부를 주셨다면, 소유의 풍성함을 주셨다면, 그 때부터는 어떻게 사용하느냐의 문제인 것이다. 

6. 한동대에 평생 모은 113억의 재산을 기증하고 돌아가신 장응복 님이 기억이 난다. 그는 의사로 살면서 번 돈으로 주식에 투자해서 거부가 되었지만 계속해서 근검절약하며 살았고, 그가 번 돈의 부분을 자식이 아닌 한동대에 기증하였다. 

7. 과연 이 분이 솔로몬과 같이 허무함을 느꼈을까? 솔로몬은 가지는 것에 집중했다면 장응복님은 자신이 가진 것에 대해서 왜 가졌는지, 어떻게 써야 하는지에 대해서 집중하였고, 자신이 가진 부를 필요한 곳에 흘려 보냈다. 

8. 장응복님은 전도서에 대해서 잘 이해하셨던 것 같다. 그가 가지고 갈 수 있는 소유가 없다는 것을 알았고,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자신의 소유를 가장 잘 사용함으로서 소유에 대한 허무를 극복했다. 우리의 인생은 항상 그렇다. 의미를 찾지 못하면 허무해진다. 내가 왜 이 땅에 왔는지, 내가 왜 이 땅에서 이렇게 살아야 하는지, 나를 하나님께서 부르신 이유가 뭔지를 알아야 내가 가진 은사들, 내가 가진 소유들을 바른 방향으로 사용할 수 있게 된다. 방향을 찾게 되는 것이다.

9. 허무함은 길을 잃었을 때 나타난다. 내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알아야 허무함을 극복할 수 있다. 나의 삶의 목적과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나를 지으신 분을 만나야 한다. 나를 만드시고, 나에게 삶의 목적과 이유를 주신 분을 만나야만 허무함을 극복하고, 바른 방향으로 갈 수 있다. 결국 인생의 해답은 하나님을 만나야만 한다. 하나님을 떠나서는 우리는 인간으로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 하나님을 더 깊이 만나야 한다. 하나님 안에서의 나를 발견해야 한다. 그래야 인생을 의미있게 살 수 있다. 오늘 그 하나님을 더욱 더 찾기 원한다. 

10. 오늘도 샬롬 


장응복님 기사 링크: https://www.chosun.com/national/national_general/2022/03/09/OIKQQFDHBBHJNDFWSTKDD7YV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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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22. 10. 6. 1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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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2:1-11 사랑의 법

1. 전도서의 큐티는 어렵다. 왜냐하면 계속 헛되다 밖에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서는 그 헛된 것의 출처가 나온다. 그래서 그나마 큐티가 수월했다.

2. 10절이다 “무엇이든지 내 눈이 원하는 것을 내가 금하지 아니하며 무엇이든지 내 마음이 즐거워 하는 것을 내가 막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나의 모든 수고를 내 마음이 기뻐하였음이라 이것이 나의 모든 수고로 말미암아 얻은 몫이로다"

3. 전도자가 무엇을 행하는 기준은 바로 자신의 눈과 마음이 원하는 것에 있었다. 기준이라는 것은 변하지 않는 것이어야 한다. 기준은 영원히 아름답고 영원히 선한 것에 두어야 한다. 그런데 그 기준이 우리 눈과 마음이라니…

4. 그러니 그가 느끼는 것은 허무일 수 밖에 없었다. “그 후에 내가 생각해 본즉 내 손으로 한 모든 일과 내가 수고한 모든 것이 다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며 해 아래에서 무익한 것이로다" (11절)

5. 우리 눈과 마음에 기준을 두고, 눈과 마음이 원하는 것을 할 때에 우리에게 남는 것은 허무 뿐이다. 우리의 눈이 원하는 것, 마음이 원하는 것은 욕심일 뿐이고, 믿을 수 없는 것이다. 또한 거기서 결코 선한 것이 나올 수 없다는 것을 우리가 잘 알고 있지 않은가?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롬7:18)

6. 허무함에서 빠져 나오려면 우리의 기준을 바꿔야 한다. 영원한 하나님께 변하지 않으시는 신실하신 분께 우리의 기준을 둬야 우리는 우리 인생의 의미를 찾을 수 있고, 허무함을 극복할 수 있다.

7. 여전히 내가 눈이 원하는 것, 내 마음이 원하는 것을 하고 있으면서 허무하다고 말하고 있지는 않은가? 내 기준을 믿을 수 없는 것들에 두면서 그 믿을 수 없는 기준을 따라 행하면서 힘들어 하고 있진 않은가?

8. 하나님의 법은 사랑의 법이다. 눈이 원하는 것도 아니고 마음이 원하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을 가장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다. 그 사랑의 법이 내 삶의 기준이어야만 한다. 지금 하고 있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는 것인가? 지금 섬기고, 일하고, 공부하고 움직이고 있는 것이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 하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내 눈과 내 마음을 위해서 하고 있는 것인가? 사랑의 법이 기준이 된다면 내 삶의 허무감을 넘어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9. 오늘 나는 사랑하고 있는가? 그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는가? 내가 하는 수쿰빛 언약교회와 신학교 강의, 연구소 사역이 과연 태국인들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기 때문에 하고 있는 것인가? 사랑의 법이 나를 지배하고 있는가? 더욱 더 사랑할 수 있기를, 오직 사랑만이 남기를 원한다. 

10.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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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22. 10. 6. 1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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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1:1-11 헛됨은 예배로만 채울 수 있다

1. 전도자에 따르면 모든 것이 헛되다. 유명한 구절이다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2절). 우리의 인생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헛된 것이 사실이다.

2. 모든 사람은 태어나고, 모든 사람은 비슷한 경험을 거치며 살다가 죽는다. 학교에 다니고,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아이를 키우고 하다보면 백발의 노인이 되어가고, 그러다 보면 이 인생은 헛되어 보인다. 

3. 진화론적 관점에서 보면 인생은 헛될 수 밖에 없다.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도대체 왜 태어났는지, 이 우주는 왜 존재하는지, 우주는 왜 이렇게도 말도 안되게 큰지, 우리는 단 하나의 의미도 이유도 알 수가 없다. 그저 왔다가 이유도 모르고 살아가다가 그저 가는 존재일 뿐이다.

4. 창조주이신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면 우리의 인생은 무의미할 수 밖에 없다. 전도자의 말처럼 다 헛되며 도대체 아무런 의미를 인생에서 찾을 수 없다.하다. 우리의 존재 의미는 무엇이고, 우리는 왜 사는가? 

5. 전도자가 느끼는 허무함은 사실 우리 삶에서 자주 느낄 수 있는 감정이다. 우리를 지으신 분의 목적과 이유를 알지 못한다면 말이다.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다면 끝까지 허무할 수 밖에 없고, 그 허무감을 여러가지 다른 것으로 채우려고 할 수 밖에 없다. 

6. 하나님은 우리를 왜 지으셨는가? 온 우주를 왜 창조하셨는가? 우리가 다 이해할 수 없지만 하나님이 계시지 않았다면 이 모든 우주는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유가 없었다면 우리 모두는 지금 살아있을 이유가 없다.

7. 그러기에 우리는 그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 그 하나님께 우리가 왜 창조되었는지, 우리가 왜, 무엇을 위해 살아가야 하는지 들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과 인격적이고 친밀한 교제를 위해 창조되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인간에게로 확장된 존재이다. 

8. 그러기에 하나님이 없으면 아무것도 설명되지 않고, 아무것도 이해되지 않을 수 밖에 없는 존재이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는 예배에서 절정을 이룬다. 우리는 예배(하나님과이 인격적인 교제)하기 위해 창조된 자들이다. 그러면 선교는 무엇인가? 존 파이퍼의 말처럼 예배가 없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교제가 그들에게 없기 때문에 선교가 존재하는 것이다. 그들의 허무함과 헛됨을 채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을 그들에게 소개하기 위해서 우리는 선교를 하는 것이다. 

9. 지난 주일에도 새로운 한 분이 오셨다. 이름이 쿤 끼앙인데 예전에 예수님을 영접을 하긴 했지만 더 잘 깊이 알고 싶어서 교회를 찾았다고 한다. 쿤 끼앙 처럼 우리 인간에게는 어떤 것으로도 채워질 수 없는 마음의 허무함과 빈 공간이 있다. 오직 그리스도만으로 채워질 수 있는 공간이다. 허무와 헛됨을 느끼는 태국의 영혼들을 위해 복음이 계속 증거되어야 한다. 허무함을 채우기 위해 드라마, 사랑, 돈 등으로 채워보지만 채워지지 않는 그들을 계속 초청해야만 한다. 전도자의 외침과 같은 외침을 하고 있는 태국의 모든 영혼들을 주님께서 불러주시길 소원하며 내가 그 일에 나의 삶을 더욱 더 드릴 수 있길 원한다. 

10. 오늘도 샬롬 

* 쿤 끼앙 형제가 예배에 정기적으로 참석하며 하나님을 알아갈 수 있도록, 좋은 리더가 말씀을 가르칠 수 있도록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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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22. 9. 30. 1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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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15:35-49 부활이 능력이 되기를

1. 고린도전도는 처음에 십자가로 시작해서 부활로 마친다. 지금 바울은 계속해서 부활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있다. 부활은 솔직히 믿기 쉬운 개념은 아니다. 그것은 지금도 바울의 시대도 마찬가지였다.

2. 바울은 이를 설명하기 위해 비유를 든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자연을 통해 뿌린대로 거두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바울도 이를 설명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3. “죽은 자의 부활도 그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니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니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영의 몸도 있느니라" (42-44절)

4. 사실 썩을 것을 심으면 썩을 것이, 욕된 것을 심으면 욕된 것이, 약한 것을 심으면 약한 것이 나와야 한다. 이것이 자연의 섭리요, 우리가 삶으로 경험으로 잘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우리에게 부활이 있을 수 있는가?

5. 45절에서 바울은 이것이 우리로 부터 오는 것이 아님을 설명한다.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생령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우리는 살려주는 영이 되시는 마지막 아담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부활하는 것이다. 

6. 그래서 예수 안에 있는 자들만 부활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 안에는 썩을 것만, 욕된 것만, 약한 것, 악한 것만 가득하기 때문이다. 부활도 우리의 의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심겨져서 썩을 우리의 육체가 썩지 아니할 몸으로 살아나게 되는 것이다. 

7. 49절은 또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 (첫째 아담)을 입은 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이의 형상을 입으리라" 우리가 부활 때 입을 형상은 첫째 아담의 썩어질 흙에 속한 것이 아니라 하늘에 속한 그리스도의 형상을 입게 된다. 우리는 이것을 소망하며 이 땅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8. 캄보디아에서 NIBC선교사님들이 리트릿을 하기 위해 방콕으로 와서 교제를 할 수 있는 시간이 있었다. 그 분들이 사역으로 삶으로 참 많이 지쳐 있음이 느껴졌고 교제하는 중에 나도 별반 다르지 않게 많이 지쳐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만약 예수가 진짜가 아니라면, 부활이 없다면 우리의 이 수고와 애씀이 다 무슨 소용이 있을까? 이 땅에서 심는 썩을 것들, 욕된 것들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이 우울증을 앓도록 하면서 까지 태국에 있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9. 힘들어도 지쳐도 지금 이 자리에 서 있을 수 있는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진짜이시고, 이 땅은 잠시이며 우리에겐 영원한 부활이 있다는 것이다. 이 복음을 나만 누리고, 나만 복 받기 위함이 아니라 태국의 영혼들과 함께 누리기 위해서이다. 지치고 힘든 마음을 주님께서 위로해 주시길 원한다. 부활에 대한 소망과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갈망이 연약한 육신에 힘을 더하여 주시길 원한다. 그리스도의 의로 인한 부활은 진짜이다. 힘들어도 어려워도 이 길을 포기할 수 없는 이유이다.

10.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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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22. 9. 27. 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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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15:1-11 빚진 자

1. 바울이 스스로에게 가진 정체성은 복음에 빚진 자였다. 그는 복음을 받을 자격이 없는 자였지만 복음을 은혜로 받은 자라고 스스로 생각했다. 그래서 자신이 고난을 받더라도 어려움을 겪더라도 복음을 전하는 것을 당연한 일로 여겼다.

2. 9-10절을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사도 중에서 가장 작은 자라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로 칭함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니라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3. 자신이 자격 없는 자였는데 복음을 은혜로 받았기 때문에 그 은혜가 헛되게 하지 않기 위해서 자신은 복음을 위해 수고 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바울을 보면서 마음에 드는 어려움은 나는 바울 보다도 못한 자라는 생각이다.

4. 바울은 율법에 흠이 없는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이었다. 그는 종교적 열심이 그 누구보다 강하였으며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였기 때문에 오히려 교회를 핍박한 자였다. 그러한 그도 복음을 받기에 자격없는 자라고 느꼈다면 나는 얼마나 더 자격이 없는 자인가?

5. 그런데 많은 순간 내가 자격이 없다고 느끼기 보다는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며 그래도 나는 꽤 괜찮은 자라고 스스로를 볼 때가 많다. 보통 비교는 위로 비교하기 보다는 아래로 비교하며 우월감을 가지려고 하는 경우가 많다. 나보다 열심 있고, 나보다 신실하신 분들과 비교하지 않고 나보다 조금 더 못한 사람들과 비교하며 내가 낫다는 생각을 하기가 쉽다. 

6. 하지만 바울이 스스로를 바라보는 정체성처럼 우리 모두는 그 누구도 조금도 복음을 받기에 합당한 자가 아니었다. 조금 더 착하게 살고, 조금 더 나아보이는 것은 사실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근본적으로 죄가 가득한 악인일 뿐이기 때문이다.

7.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롬 1:14) 나는 스스로를 빚진 자라고 여기는가? 나의 정체성은 복음에 빚진 자인가? 그래서 그 은혜에 감사해서 복음을 위해 수고하고 있는가? 복음을 위해 헌신하고 있는가? 힘이 닿도록 애쓰고 있는가?

8. 바울을 보면서 배워야 한다. 그는 죽도록 충성하였고, 복음을 위해서라면 그 무엇도 마다하지 않았다. 나는 어떤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지 어떤 선교사인지 스스로에게 되묻게 된다. 비교하면서 비교우위를 가지거나 거기서 오는 우월감을 가지려고 하지 말고 내가 빚진 자임을 계속해서 되새기도록 하자. 내가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었으나 사랑 받은 자임을,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될 이유가 없었으나 하나님의 자녀가 된 권세를 가졌음을 잊지 말고, 더 충성하고, 더 사랑하자. 

9. 오늘도 샬롬


*지난 주일에 새로 온 손 형제 입니다. 라오스 형제인데 예수님에 대해서 관심이 있다고 해서 저희 라오스 성도들이 교회로 데리고 왔습니다. 손 형제가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 하나님으로 영접할 수 있도록 기도해주세요. 그리고 저희 교회는 5개국(태국, 미국, 한국, 라오스, 베트남)의 형제, 자매들이 태국어로 함께 예배하고 있습니다. 어떤 언어로 예배하게 되든지 수쿰빛 언약교회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사랑에 빚진 자로 모든 성도들이 세워질 수 있도록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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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22. 9. 20. 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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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11:17-34 성찬을 생각하며 다른 이들과 한 몸을 이루라

1. 고린도 교회에 있었던 어려움 중의 한 가지는 한 몸이 되지 못함 이었다. 19절을 보면 파당이 존재했고, 21절을 보면 함께 만찬을 할 때, 서로를 기다리지 못하고 먼저 먹고 먼저 마시는 자가 있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이미 취했는데도 어떤 이들은 시장하였다. 

2. 그런데 아마도 이미 취한 인물들은 부유한 자들이었고, 주린 자들은 가난한 자들이었거나 종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종들은 자신의 주인을 섬기다가 늦게 와서 예배에 참석하니 이미 부유한 자들이 먹어버려서 음식이 없는 것이다. 부유한 자들은 음식이 충분했을텐데도 기다려주지 않았다. 

3. 사도 바울은 주의 성찬을 27-29절에서 예로 들면서 그리스도의 공로로 말미암아 우리가 서로 한 몸임을 강조한다. 그리스도께서도 우리와 함께 먹고 마셨음을 강조했다. 그리고 그의 권면은 33절이다. “그런즉 내 형제들아 먹으러 모일 때에 서로 기다리라"

4. 함께 먹는 건 사실 아무것도 아닌거 같지만 매우 큰 사건이다. 함께 먹음을 통해서 우리는 한 가족도 되고, 한 몸도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 가족이 함께 밥을 먹을 때 나를 기다려주지 않고 내 것을 남겨놓지 않는다면 아마도 엄청나게 서운할 것이다.

5. 주의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한 몸이고, 한 지체라고 말하면서 그들을 위해 음식을 기다려주지 못한다면 어찌 한 몸이 되고, 한 지체가 될 수 있겠는가? 예수님께서도 늘 제자들과 함께 드시지 않았는가? 

6. 사도행전 2장의 초대교회의 모습을 보면 그들은 늘 함께 먹고 마셨다. 떡을 함께 떼고, 함께 찬양하고, 함께 기도하고, 함께 예배하였다. 그때 그들에게 나타난 현상은 자신의 땅과 재물을 팔아 필요한 자들을 도운 것이다. 

7. 함께 먹을 때 한 몸이 되는 것이다. 아직 오지 못한 형제, 자매가 있다면 기다려야 한다. 그래야 한 몸과 한 지체가 될 수 있다. 하지만 교회에서 기다려줘야 하는 것이 비단 먹는 것 뿐일까? 한 몸이고 한 지체라면 우리가 기다려줘야 하는 것은 더 많을 수 밖에 없다. 

8. 기다려줄 수 있는 이유는 한 몸이고, 한 지체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계속해서 마음에 드는 질문은 ‘정말 한 몸인가? 한 지체인가?’ 라는 질문이다. 나는 수쿰빛 언약교회의 교인들과 교회의 리더십과 정말로 한 몸인가? 나의 아이들에게 정말 한 지체로 살아가고 있는가? 때때로 한 몸이 되기 보다는 내 한 몸을 더 많이 생각할 때가 많기에 나의 이기심이 연약함이 한 몸, 한 지체 됨을 방해하는 것은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바울의 권면처럼 그리스도께서 성찬을 통해 우리와 한 몸이 되신 사건을 더 깊이 이해하고 묵상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복음만이 나의 이기심을 넘어 나와 다른 이들을 한 몸 되게 하심을 잊지 말자.  

9. 결국은 복음이고, 결국은 그리스도께로 돌아가야 한다. 그 분께서 나와 한 몸 되시기 위해 치르신 그 십자가의 사건을 내 몸에 새겨야 한다. 그 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면서도 그 의미는 기억하지 못한채 나만 생각하는 그 이기적인 마음을 십자가에 못박기 원한다. 오늘도 그리스도를 더 깊이 알아가기 원한다. 그래서 한 몸되기 원한다.

10. 오늘도 샬롬 

* 욥형제는 미국에서 학부를 MIT에서 나오고 박사를 버클리에서 한 인재입니다. 미국에서 얼마 전에 귀국해서 저희 교회에 나왔는데 집에 교회와 너무 멀어서 (1시간 30분) 고민 중에 있습니다. 직장을 구하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인도해 주셔서 직장을 잘 구하고, 계속해서 저희 교회와 한 몸을 이뤄갈 수 있도록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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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22. 9. 20. 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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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11:2-16 머리가 되고자 하는 자는 먼 섬기는 자가 되라

**기도제목이 아래에 있습니다. 

1. 요즈음 우리 사회는 젠더 이슈가 큰 갈등으로 부상하고 있다. 젠더에 따른 갈등의 문제는 충분히 이해가 된다. 특별히 아내가 없는 이 시간동안 아내가 그동안 해 온 일들을 혼자서 해보면서 정말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2. 오늘 본문은 특별히 여자의 인권이 바닥 중에 바닥이었던 바울의 시대적 배경에서 생각해보면 고린도교회에서 편지를 받았을 때에는 매우 파격적인 내용이었을 거라고 생각된다. 물론 지금 우리 시대에는 고리타분하게 느껴질 수가 있을 것이다. 

3. 바울은 창조의 원리에 따라서 남자와 여자가 다른 권리와 의무를 지님을 이야기 하고 있고, 여자의 머리가 남자, 남자의 머리는 하나님 되심을 설명하고 있다 (3절). 이것은 어떤 계층 구조를 의미하는 것은 분명히 아니다. 창조의 원리를 설명하는 것이다. 

4. 왜냐하면 바울은 11-12절에서 이를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주 안에는 남자 없이 여자만 있지 않고 여자 없이 남자만 있지 아니하리라 이는 여자가 남자에게서 난 것 같이 남자도 여자로 말미암아 났음이라 그리고 모든 것은 하나님께 났느니라"

5. 중요한 것은 남자도 여자도 각각 개별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남자는 여자에게 내가 머리라고 주장하며 자의적으로 권위적으로 주장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12절이 말씀하는 의미가 창조의 순서는 비록 남자가 먼저이더라도 남자도 여자도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것이다. 

6. 하나님을 자신의 머리에 두지 않는 남자가 여자에게 자신이 머리  임을 주장할 수 있는가? 하나님의 주권과 왕 되심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나는 아내에게 머리라고 주장할 수 있는가? 남자도 피조물이기에 불가능하다. 바울이 권면하는 것은 피조물로써 모든 것에 앞서 하나님을 머리에 두라는 것이다. 

7. 하나님이 나의 머리 되시면 (권위자가 되시면) 모든 것이 가하다. 하나님이 나의 머리가 되시면 아내에게 헛된 권한을 어떻게 행사하겠는가? 어떻게 아내에게 잘못된 권위를 보여주겠는가? 하나님의 내 삶의 주인이신데 내가 어찌 다른 이들을 욕되게 하고, 저주할 수 있겠는가?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신 그 말씀 앞에서 아내에게 어떻게 내 권위만 주장할 수 있겠는가? 

8. 창조의 원리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남자가 여자의 머리 됨이 아니라 (부수적일 뿐이다)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머리 됨인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나의 머리가 되셔야 한다. 내 삶이 그리스도께 온전히 뿌리내리고 그 분께 들으며 그 분의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 그런 이후에 남자는 아내에게 또 가정에서 머리가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되심과 같이 말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어떻게 교회의 머리가 되셨는가?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주시며 섬김으로 머리가 되셨다. 머리가 된다는 것은 권한이나 권력을 행사한다는 것이 아니라 죽기까지 섬기는 것을 의미한다. 

9. 예수께서 보이신 본 처럼 섬김으로 가정의 머리가 되기 원한다. 아내의 머리가 되기 원한다. 수쿰빛 언약교회의 가장 섬기는 자가 되기 원한다. [마20:27-28]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28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아내의, 가정의, 또 공동체의 머리가 되고자 하는 자는 먼저 섬기는 자가 되라.

10. 오늘도 샬롬

* 아내가 없는 지난 2주 동안 제가 계속 아팠습니다. 첫 주는 장염으로, 둘째 주는 허리가 아파서 거의 누워서 지냈습니다. 큐티를 정리해서 못 보내니 무슨 일이 있냐고 연락 주시기도 하시고, 또 기도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요엘이와 아내는 10월 중순 즈음에 돌아올 것 같습니다. 요엘이의 치료가 계속 잘 이루어지고, 한국에서 진료 등으로 계속되는 운전과 여행으로 많이 지친 신애 선교사와 또 계속 몸이 좋지 않았던 저를 위해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세 아이들이 이 시간을 통해서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날 수 있도록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샬롬

*하나님은 계속 영혼들을 보내주시고 계십니다. 왼쪽 자매가 토이 자매, 오른쪽 자매가 엠마 자매입니다. 어제 교회에 처음 나왔는데 잘 적응하고, 예수님을 더 깊이 알아갈 수 있도록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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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카테고리 없음2022. 9. 5. 1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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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3:16-4:5 공로 사상을 버리자

1. 오늘은 좀 삐딱하다. 말씀이 마음에 잘 와 닿지 않는다. 특별히 4:1-2절이다.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2. 그래도 지금까지 내 나름대로는 충성되게 살았다고 내 인생을 자평 할 수 있겠다 (교만해 보일 수 있다는 것도 안다). 그런데 요엘이와 아내의 검사 결과를 받으며 마음에 큰 상함으로 다가온다. “그래도 주님 내가 주님께 이렇게 충성했었는데요.. 주님 좀 너무 하신거 아닙니까?” 라는 말이 올라온다.

3. 아침에 파송교회 선교담당 목사님께 이 소식을 전하는데 그 분은 개척준비를 하고 계시는데 아킬레스 건이 끊어져서 아무것도 못하고 누워만 계신다고 한다. 12월에 개척해야 하는데… 그 분의 속상함이 전해져왔다. 내가 그 분을 좀 아는데 그 분도 엄청나게 충성되신 분이다. 

4. 왜 충성했는데, 복음을 위해 애쓰는데 우리 삶에는 어려운 일들이 끊이지 않을까? 하나님께서는 왜 순적한 길로 인도하시지 않을까? 답을 아는 것 같았는데도 여전히 상함이 가시질 않는다. 상함이 은혜보다 큰 상황이다. 

5. 그러나 바울의 그 다음 말씀들이 마음을 때린다. “내가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나 이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심판하실 이는 주시니라” (5절) 바울도 자신이 잘못한게 분명히 아무것도 없지만 자신은 그것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될 수 없다는 것을 다시 한번 이야기 한다. 

6. 우리는 복음 외에는 그 누구도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될 수 없다. 하나님께 내가 이정도는 했으니 나는 하나님께 받을 자격이 충분히 있다고 말할 수 없는 자들이다. 사도 바울의 인생을 보면 그는 얼마나 받을만 했는가? 하지만 그는 오히려 더 많이 복음을 위해 매를 맞고, 고난을 당하지 않았는가? 그런데도 그는 여전히 주님께 모든걸 의탁하지 않았는가? 

7. 여전히 나에게 ‘공로 사상’이 남아 있음을 깨닫게 된다. 믿음으로 은혜로 구원 받았음에도 여전히 나는 내가 하나님께 무엇인가 요구하려고 하고, 하나님이 나를 위해서 무엇인가 해줘야 하는 존재로 자꾸 깍아내리려고 한다. 하나님이 적어도 나한테는 이러시면 안되는거 아닌가요? 라는 생각이 남아 있다. 

8. 우리의 신앙은 고난의 시간에 더 드러나게 되어 있다. 좋고, 행복할 때에는 무엇이 문제인지 잘 모른다. 내가 믿음이 좋은 줄 착각한다. 나는 복음 안에 서 있다고 확신한다. 삶에 자그마한 파도가 몰아쳐도 드러나는게 나의 신앙의 연약함이다. 삐딱했던 마음이 나의 연약한 믿음에 부끄러워진다. 여전히 하나님께 의지할 수 밖에 없는 무익한 종임에도 공로를 피워보려했던 연약함이 부끄러워진다. 그래서 다시 그리스도 앞으로 복음 앞으로 나아간다. 우리를 가장 잘 아시고, 가장 선한 주님의 길로 우리를 인도하시는 그 분 앞으로 나아간다. 

9. 아내와 요엘이가 태국으로 돌아오기 위해서는 아직 넘어야 할 산들이 많다. 이 여정 가운데 주님과 동행하며 하나님에 대한 신뢰는 더 커지고, 쓸모없는 공로 사상은 더 버릴 수 있는 내가 되기를 바란다. 오직 복음으로

10. 오늘도 샬롬

*김신애 선교사와 요엘이를 위해서 계속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좋은 선생님을 만나서 약물 치료가 잘 될 수 있도록, 태국에서도 약을 계속해서 잘 공급받을 수 있도록, 재정 등 필요가 채워지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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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