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Thinking)/Meditation2019. 4. 22. 1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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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 15:16-32 사명에 따라서...

 

십자가에 달리시는 예수님을 향한 모든 그들의 조롱의 말들은 다 사실이었다. 

유대인의 왕(18절)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었도다 (31절)

이스라엘의 왕 그리스도가 (32절)

 

하지만 예수님은 어떤 말씀도 하시지 않았고, 어떠한 그들의 희롱과 조롱에도 전혀 대꾸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이 조롱한 그 사실처럼 예수님은 자신의 생명을 드려서 남을 (모든 인류를) 구원하셔야만 했다. 자신은 철저히 버려지셔야만 했다. 모든 인간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하나님 자신이 오셨고, 하나님 자신이 화목 제물로 자신을 드리기로 하신 것이다. 자신을 구원할 수 없었던게 아니라 우리를 위해 자신을 구원하지 않으신 것이다.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 때문에 우리는 구원받았다. 

 

예수님은 처음부터 자신을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시지 않았다. 예수님은 다른 자들을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사명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신 것이다. 사실을 사실이라고 대꾸하지 않으시고, 그들의 조롱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으셨다. 사명이 확실하신 예수님이 확실하게 그 길을 걸어가신 것이다. 무엇을 위해 살아가고 있는가? 나의 사명이 무엇인가? 매우 중요한 대목이다. 

 

사명이 다른 모든 것을 컨트롤 한다. 하고 싶은 말, 하고 싶은 일… 그 모든 것을 말이다. 예수님은 말씀하지 않으셨고, 예수님은 자신을 구원하지 않으셨다. 그렇다면 나는 오늘 무슨 말을 하고, 무슨 일을 할 것인가? 끝까지 내가 짊어져야 할 나의 사명은 무엇인가? 

내가 하고 싶은 말, 하고 싶은 일 보다도 내 사명에 의해서 말하고, 움직이는 내가 되기를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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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19. 4. 22. 1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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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 16:14-20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본 자들에게 주어진 마지막 명령이 15-16절에 나타나고 있다.

 

"또 이르시되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 사실, 복음을 우리는 전해야 할 사명을 받은 것이다. 그것도 가족에게, 동네에 사는 사람에게만이 아니라 온 천하를 다니며 만민에게 전파해야 하는 것이다. 복음의 기쁜 소식이 모두에게 전해져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때로는 복음을 전하기 보다는 복음을 내 안에 간직하려고만 하는 경우도 많은 것 같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과 아무런 상관없이 살아가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예수님은 부활하셨는데, 우리는 죄 용서 받은 십자가의 사건만 마음에 품고, 그 안에서만 머문다. 내가 용서 받았고,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화목했다는 그 사실만이 내 안에 있어서 내가 가장 중요하고, 내가 용서받은 사실만이 중요할 때가 나에게는 참 많은 것 같다. 
 
다른 사람들도 그러한 하나님과의 화목을 경험해야 하고,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첫 열매가 되신 것과 같이 우리도 장차 부활할 것이고, 이미 하나님 나라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들어와 있다는 사실을 경험하며 살아가고, 또 그것을 전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고 나를 위해 살아간다. 그래서 복음을 전하기 보다는 복음을 받은 우리들끼리 행복하게 잘 사는 것을 더 많이 생각하게 되는 것 같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만나 더 많은 영혼들에게 나아가 이 복음을 전하는 것이 내가 할 일이다. 십자가에서만 머무는 것은 예수님의 복음에서 반쪽 짜리이다. 예수님은 부활하셨고, 예수님의 제자들과 초대교회 성도들이 전한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보다는 예수님의 부활이었다 (사도행전 참고).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서 더 깊이 경험하고 알아가길 원한다. 나 또한 (십자가 까지만 생각하는) 일부의 복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부활이 내 삶에서 실제가 되는 그러한 삶을 살아내고, 또 이 곳에서도 그것을 전하기 원한다. 
 
오늘도 무엇을 외칠 것인가? 부활절을 지내며 무엇을 생각하고, 더 묵상하게 되는가? 그것이 예수님의 부활이 되기 원한다. 하지만 예수님의 부활만 전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에 대해서 균형잡히게, 균형잡힌 복음 즉, 십자가와 부활의 의미를 충분히 전할 수 있는 준비가 되기를 원한다.
 
예수님이 죽음에서 부활하셨다. 그리고 나도 그 분과 함께 죽었고, 다시 살았다. 다시 산 내 인생이 주님 주신 이 복음전파의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게 되기를 원한다. 순간 순간 부활이 내 삶에서 실제가 되고, 부활이 내 삶에서 살아갈 이유가 되기를 원한다. 새 하늘과 새 땅을 소망하는 오늘, 내가 되기를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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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19. 4. 18. 1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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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 15:1-15 사람의 길, 하나님의 길
 
두 사람이 비교가 된다. 모든 사람을 구원코자 하여 자신에게 온 수 많은 고발들에 대해서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신 예수님이 계신다 (5절). 그에 비하여 무리에게 만족을 줘서 자신의 안위를 챙기려고 죄 없는 예수님을 무리에게 십자가에 못 박히도록 넘겨준 빌라도가 있다 (15절). 
 
누구를 위해서 어떤 가치를 위해서 살아가고 있느냐의 문제였다. 이에 따라서 삶의 방법이 달라진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살아가신 예수님은 자신을 향한 비난을 감당하셨다. 그리고 그러한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으셨다. 자신이 가야만 하는 길을 아셨고, 묵묵히 그저 그 길을 걸어 가셨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길이었고,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길이었다.
 
하지만 빌라도는 그렇지 않았다. 민란이 일어나면 로마에서의 자신의 평가가 나빠지고, 자신의 지위를 잃을 수도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선택한 길은 분노한 무리들에게 만족을 주는 것이었다. 그들이 무슨 요구를 하든지 그들이 원하는 일들을 들어주기로 했다. 하나님과 전혀 상관없는 길이었다. 자신만을 위한 길이었다. 그리고 그의 자신을 위한 선택은 하나님의 아들을 못 박도록 사람들에게 내어준 것이었다. 자신의 지위는 계속 지킬 수 있었을지 모른다. 유대인들로부터 똑똑한 왕이라고 사람들로부터 칭송 받았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과 전혀 상관없이, 자신의 길을 간 것이다.  
 
갈 1:10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예수님도 사도 바울도 사람들을 좋게 하려고도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지도 않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마음이었고 그것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드렸다. 설사 그것이 자신의 생명이었을지라도 말이다. 

 

오늘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가? 많이 자유해진 것 같지만 여전히 다른 사람들의 평판과 말은 나를 신경쓰이게 만든다. 사람을 좋게 하려고, 혹은 사람들을 기쁨을 구하려 하는 마음들이 여전히 내 안에 있다. 문제를 만들지 않고, 좋게 좋게 가려는 마음들이 분명히 내 안에 있다. 하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좋게 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마음으로 하나님의 길을 쫓아가야 하는 것이다. 
 
내 안에 빌라도와 같은 마음들을 내려놓고, 예수님이 가셨던 그 길을 걸을 수 있기를 원한다. 정말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알아, 그 뜻을 묵묵히 쫓아가는 내가 되기를 원한다. 똑똑한 사람이 되기 보다는 사람들에게 칭송받는 사람이 되기 보다는 주님의 뒤를 묵묵히 쫓을 수 있는 내가 되기를 원한다. 머리로 주님을 쫓지 말고 기도로 주님을 쫓는 오늘이 되길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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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19. 4. 17. 1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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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 14:66-72 부인하지 않으려면 그 분 안에 있어야 한다.  

 

예수 안에 혹은 예수와 함께 있는 베드로는 자신이 절대 예수를 부인하지 않을 것이라고 큰소리 쳤다. 정말 그럴 수 있을거라 생각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살아계신 하나님이 자신과 함께 계셨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 베드로는 예수님을 멀찍이 쫓아갔다. 예수님 안에, 예수님과 함께 있지 못하고 멀찍이 떨어져서, 66절을 보면 베드로는 아랫뜰에 있었다. 예수님과 함께 지내는 시간이 아닐 때에 일은 벌어졌다.

 

베드로는 건장한 남자 어부였기에, 대제사장의 여종 한 사람이 자신에게 예수의 제자라는 혐의(?)를 씌울 때 부인하지 않고 충분히 도망할 수도 있었다. 그게 아니라면 자연스럽게 무시하고 갈 수도 있었다. 하지만 베드로는 부인하게 된다. 68절에 이제 그는 앞뜰로 나아간다. 다른 여종이 혐의를 씌울 때 그는 또 부인한다. 마지막으로 곁에 있는 사람들이 그에게 말할 때 (70절) 그는 세 번째로 예수님을 부인하게 된다. 

 

단순히 물리적인 공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처럼 우리가 그 분 안에 거할 때, 그 분이 우리 안에 거할 때라야 우리는 우리의 성정과 연약함을 이기고 주님을 쫓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베드로는 지금 주님 안에 거하는 그 일을 실패한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를 향해 ‘내 안에 거하라’ (요 15:4) 라고 말씀하신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 거하지 않을 때 우리는 언제든지 베드로가 부인한 것과 같은 일들을 경험할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베드로의 부인을 보면서 내가 저 상황이었다면? 나는 과연 어땠을까?를 생각해보게 된다. 당연히 쉽지 않다고 생각된다. 지금 내 삶에 발생하는 여러 복잡다단한 일들도 마찬가지이다.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상황에서 내가 하나님과 동행하고 있는가? 내가 주님 안에 있는가? 내가 그 분 안에 거하는가? 이것이 핵심임을 잊지 말자. 

 

오늘도 그 분 안에 거하기를… 주어진 상황과 결정해야 할 일들 속에서 주님 안에 거하길… 

정말 그렇게 하루를 살아내길…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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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19. 4. 15. 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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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 14:43-52 내 분량만큼 예수님 뒤를 쫓아가기

 

예수님이 잡히셨다. 예수님은 말씀을 이루시기 위해서 그저 무력하게 잡히셨다 (49절). 주를 부인하지 않겠다고 했던 그들의 다짐과 무색하게 그들은 다 도망갔다. 

50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한 청년이 벗은 몸에 홑이불을 두르고 예수를 쫓아갔다. 도대체 그는 누구인가? 왜 쫓아갔는가? 자료를 찾아보니 그에 대한 언급이 이 곳에만 나오고, 이름이나 다른 자료가 없어서 이 청년을 마가복음의 저자 마가로 추측한다고 이야기 하고 있다. 그가 부끄러워서 이름도 기록하지 못하고 자신의 일을 이 마가복음에만 삽입했다고 추측하고 있다. 

 

왜 벗고 있었는지 잘 모르겠다. 소란한 소리에 잠에서 깨서 그냥 옷을 못 찾고 그냥 보이는데로 덮고 있던 이불을 들고 나온 것인지… 아니면 어떤 상황이었는지... 솔직히 왜 벗은 몸에 이불만 걸치고 나왔는지 추측하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아마도 그가 급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가기 위해서 한 선택 정도로 보여진다. 그렇게 눈에 잘 띄는 모습으로 예수를 쫓다가 그는 예수를 잡은 무리들에게 붙잡혔다. 그 이후 그가 한 선택은 베 홑이불을 버리고 벗은 몸으로 도망하는 것이었다. 

 

그는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으로 주님의 뒤를 쫓았다. 그렇게 쫓다가 잡히자 도망갔다. 그에게는 아픈 과거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렇게 무력하게 도망갈 수 밖에 없을지라도, 베 홑이불을 두르고 벗음 몸으로라도, 그렇게라도 예수님을 쫓아가는 선택을 하였다.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예수님을 절대 버리지 않을거라고… 그렇게 다짐하던 제자들은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갔다. 하지만 이름도 기록되어 있지 않은, 마가라고 추측만 하는 이 청년은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서 예수를 쫓아갔다. 그렇게 쫓아가다가 잡히니 도망갔다. 하지만 그럼에도 계속 예수를 쫓아서 마가복음의 저자가 되었다. 

 

엄청난 헌신, 엄청난 사역, 엄청난 그 무엇인가를 해서 성경에 이름이 나온 위대한 믿음의 영웅이 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그저 자신의 분량만큼 계속해서 예수를 쫓아가는 선택을 했다. 

 

오늘 나의 삶은 어떠한가? 내가 지금 예수를 쫓고 있는가? 화려해 보이는 그 무엇인가를 쫓고 있는 것은 아닌가?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방법으로 예수를 쫓고 있는가? 계속해서 쫓아가고 있는가? 

 

이 이름모를 청년과 같이 계속해서 예수를 쫓아갈 수 있게 되기를 원한다. 작아도, 보잘 것 없어도, 벗고 있어도 그저 그 분의 뒤를 쫓아가기 원한다. 예수께서 보여주시는 것 까지만 쫓아가기 원한다. 주님 나의 마음을 붙잡아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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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19. 4. 13. 1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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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 14:22-31 주님이 계시는 그 자리, 갈릴리

 

성만찬 이후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신다. 27절을 보면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제자들의 고백은 베드로가 먼저 자신은 그리하지 않겠다고 말한다 (29절). 그리고 베드로와 모든 제자들이 다시 한 번 말한다.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30절)’ 제자들은 자신에 차 있었다. 어떠한 고난이 와도 그들은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을 용기가 있었다. 절대로 부인하지 않을 자신도 있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를 다 아시고 먼저 말씀하셨다. 

28.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

 

예수님이 먼저 갈릴리로 가겠다고 하신 말씀이 무슨 의미일까? '아마도 너희들이 나를 배신하고, 말씀과 같이 양들이 흩어짐 같이 다 흩어지더라도 내가 먼저 너희들이 있게 될 그 갈릴리에 있을 것이다' 라고 말씀하신 것일 것이다. 우리는 늘 주님을 배반하고, 주님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주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하지만 그럼에도 주님께서는 언제나 우리가 돌아갈 그 갈릴리에 먼저 가서 계신다. 우리가 태어나고 나고 자랐을 뿐만 아니라 실패하고 넘어지고 좌절해서 돌아갈 수 밖에 없는 그 갈릴리로 말이다. 

 

요엘이를 키우면서 이 녀석의 반응을 잘 견디지 못하는 날 보면서 늘 제자리인 것 같을 때가 있다. 

큐티를 하지만 내 삶이 변하지 않는 것을 보면서 내가 늘 제자리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선교사로 살아가지만 여전히 이기적이고, 여전히 다른 사람에 비해서 내가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인정받기 원하는 그 욕구를 보면서 예수를 25년이나 믿었는데도 내 신앙이 제자리에 있는 것 같아 좌절스러울 때가 있다. 

 

그런 나에게 오늘 주님께서는 내가 그 갈릴리에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 같다. 내가 너의 좌절과 실패와 넘어짐과 그 마음의 욕망을 알고 계신다고 말한다. 마치 제자들이 예수님을 배신할 것을 아시면서도 그들의 용감무쌍한 고백을 들으시고 그 이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에서 기다리겠다고 하신 것 처럼 말이다. 

 

입술로는 제자들과 같이 주를 위해 죽을 수 있을 것 처럼 말하지만 여전히 나는 죽기가 싫다. 손해보기가 싫다. 더 움직이고, 더 섬기고 싶지 않은 마음이 가득하다. 하지만 주님께서 그런 나를 아시고 내가 돌아갈 그 갈릴리에서 기다리시고 계신다고 말씀하신다. 그래서 용기가 난다. 주님이 내가 모든걸 완벽하게 해내길 바라시는게 아니라 내가 실수하는 그 자리에서 나를 잘 아시고 나를 돕기위해 기다리고 계심을 말씀을 통해서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도 좌절하지 않기를… 그리고 다시 한번 갈릴리에 계신 주님을 만나 힘을 내기를 원한다. 늘 제자리인 것 같지만 그 제자리는 주님이 함께 계신 바로 그 자리이기 때문이다. 여전히 입술로만 주님을 섬기는 것 같은 나이지만, 부활하셔서 나를 찾아오신 그 주님을 만남으로써 생명도 주를 위해 내놓을 수 있는 그런 믿음을 가지는 내가 되고 싶다. 내가 받은 위로를 요엘이에게 나눠줘야겠다. 아빠도 늘 제자리인 것 같다고… 요엘아 그 자리에 주님이 함께 계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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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19. 4. 12. 1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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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 14:12-21 각기 다른 모습으로 다시오심을 준비하는 자들

 

유월절 만찬에 대한 본문이다. 만찬을 하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준비를 해야 한다. 예수님과 제자들의 유월절 만찬이니, 제자들이 준비하든지, 아니면 예수님이 준비하시든지 둘 중의 하나이다. 질문은 먼저 제자들이 한다. 12절에서 ‘우리가 어디로 가서 선생님께서 유월절 음식을 잡수시게 준비하기를 원하시나이까?’ 라고 질문하였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면 자신들이 어디론가 가서 준비하겠다고 말한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은 제자들 너희들도 아니고, 예수님 자신도 아니고 물 한 동이를 가지고 가는 사람을 만나서 그에게 물어보라고 하셨다 (13-14절). 그가 큰 다락방을 예비하여서 제자들에게 열어주었고, 제자들이 거기서 유월절 음식을 준비하였다. 

 

도대체 그 물동이를 지고 가던 사람은 누구인가? 도대체 그는 왜 자신의 다락방을 예수님을 위해 열어 주었는가? 우리는 그가 누구인지를 모른다. 왜 그랬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또한 예수님께 쓰임받은 사람 중에 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초림의 길에, 특별히 십자가를 지시는 길을 준비한 사람이었다.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딱 한번 이 곳에 등장하였다. 물론 그 이후에 그가 어떤 사람이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성경이 기록하지 않기 때문에…

 

하지만 어제 예수님의 머리에 향유를 부은 여자와 같이 물 동이를 가지고 가던 이 사람 또한 예수님의 길을 준비한 사람이었다. 그가 다락방을 열어서 예비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예수님이 제자들을 위해 발을 씻기는 것을 볼 수 없었을 것이고, 성만찬도 볼 수 없었을 것이다 (물론 예수님이 다른 방식으로 하셨겠지만…).

 

결국 우리의 역할이 다르고, 예수님을 만난 시기가 다르고, 예수님의 길을 준비하는 모습이 다르지만 우리가 그 분을 사랑함으로 하는 모든 일은 그 분의 길을 준비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사랑함으로 향유를 부었고, 사랑함으로 자신의 다락방을 열어드렸다. (물론 본문 어디에도 물동이를 지고 가던 사람이 예수님을 사랑했다든지 혹은 제자였다고 말하진 않는다. 하지만 단순한 기적의 사건으로만 보려고 하지 않는다면 얼마든지 추측이 가능하다고 본다) 우리는 여러 각기 다른 모습으로 그 분의 다시오심을 준비하는 자들인 것이다. 

 

마리아가 향유를 부은 것처럼, 자신의 다락방을 열어 드린 것처럼 우리는 오늘도 그 분의 재림을 준비하는 하루를 보내고 있다. 16절에서 언급하고 있는 것 처럼 ‘말씀대로… 준비하니라’ 우리는 말씀을 쫓아 오늘도 재림을 준비하는 하루를 보내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오늘 하루를 쉬이 보낼 수 없다. 오늘 하루를 그냥 어제와 같이 보낼 수 없다. 오늘도 말씀대로 순종하며 준비하는 삶을 살아내야 하는 것이다. 

 

송끄란 연휴기간이라고는 하지만 요즈음 독서를 좀 소홀히 했다. 태국어 공부도 조금 소홀히 했다. 다시 한번 마음을 정하고 준비하기 원한다. 예수님의 다시 오심을 준비하는 오늘 하루가 되도록 대충 살지 않고, 대충 보내지 않기 원한다. 오늘도 나는 준비하고 있는 자로 깨어 있기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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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Thinking)/Meditation2019. 4. 11. 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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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 14:1-11 허비?? 준비!!

 

내가 성경에서 참 좋아하는 본문이다. 예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향유 옥합을 예수님의 머리에 붓는 여인과 돈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에 대해서 비난하는 예수님의 제자… 뭔가 선명한 대비가 되는 본문이다.

 

오늘 예수님은 가난한 자들을 돕지 말라고 말씀하신게 아니었다. 그들을 원하는대로 도우라고 말씀하신다 (7절). 하지만 때로는 가난한 자들을 돕는 것 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고 말씀하신다. 그것이 오늘은 여인의 향유를 깨뜨려 부어 예수님의 장례를 미리 ‘준비'하는 것이었다. 예수님께 좋은 일을 하는 것이 가난한 자들을 돕는 것 보다 더 우선시 되어야 한다. 그것이 오늘 주님이 하신 말씀하신 것이다. 

 

가난한 자를 돕는 것보다 예수님께 좋은 일을 하는 것, 그것은 때때로 아니 종종 사람들에게 불편함을 줄 수 있다. 오늘 본문에서는 '어떤 사람들이 화를 내어 서로 말하되 (4절)’ 라고 말하고 있다. 예수님을 위해 좋은 일을 할 때, 그것을 비난하고 비판하는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들은 또한 향유를 ‘허비’한다고 비난한다. 어떻게 보면 그들의 판단은 합리적이다. 계산해보면 그들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그들의 눈에 낭비 같아 보이는 일을 우리는 지금 시간과 물질과 열정을 사용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허비’같이 보이는 일을 예수님은 ‘준비’라고 말씀하신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 일을 해야만 한다

 

합리적인 생각을 넘어서, 때로는 사람의 눈에 중요해 보이는 일을 넘어서, 예수님께 좋은 일을 하는 내가 되기를 원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내 인생의 ‘낭비’가 아니라 주님의 오실 길을 ‘준비’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람들의 판단에 목숨걸지 않기 원한다. 그들이 뭐라고 말하던 예수님께 좋은 일을 뚝심 있게 해 나가는 내가 되기를 원한다. 물론 독선적으로 나만 옳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준비’할 수 있게 되기를 원한다. 

 

오늘 우리 형제, 자매들 중에서 송끄란(태국 설날임)때도 기숙사에 남아 있는 형제, 자매들과 함께 점심식사를 하려고 초청했다. 어제 저녁부터 청소하고, 아내는 음식을 준비하고 바쁘다. 함께 식사와 교제함을 통해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 가족임을 그리고 예수님의 사랑과 우리 가족의 사랑이 그들에게 흘러 가기 원한다. 짧은 교제의 시간이지만 이 시간을 하나님께서 축복해주시길 원한다. 그리고 오늘도 이 모임을 통해서 예수님께 좋은 일을 하며 ‘준비’하는 우리 가정이 되기를 원한다. 

 

매일 이렇게 예수님께 좋은 일을 하며 예수님의 다시 오심을 ‘준비'할 수 있기를 원한다. 오늘도 향유를 부을 수 있기를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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