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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가 1:1-16 리더이기 때문에 더더욱 하나님께 듣고 물어야 한다

1. 미가서 1:1절은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유다의 왕들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 시대에 모레셋 사람 미가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 곧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에 관한 묵시라"

2.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스라엘이 힘든 이유가 다른 나라들과 달리 이스라엘에 왕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했고, 왕을 세웠다. 그리고 지금 그 왕의 계보가 요담과 아하스 까지 내려온 것이다. 

3.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유력한 왕에게 직접 말씀하지 않으시고, 누군지도 모르는 모레셋 사람 미가에게 말씀하고 계신다. “백성들아 너희는 다 들을지어다 땅과 거기에 있는 모든 것들아 자세히 들을지어다 주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대하여 증언하시되 곧 주께서 성전에서 그리하실 것이니라 여호와께서 그의 처소에서 나오시고 강림하사 땅의 높은 곳을 밝으실 것이다" (2-3절).

4.  하나님은 왜 이스라엘 백성들의 염원을 담아 세운 왕에게 말씀하지 않으시고, 변방의 미가라는 한 선지자, 아무도 누군지 모르는 사람에게 말하셨을까? 주석을 찾아보니 미가는 한 번도 명시적으로 ‘선지자'로 일컬어진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5. 그 이후의 본문을 보면 하나님께서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의 죄를 말씀하신다. 이스라엘 왕들도 이 죄를 피해가지 못했던 것 같다. 리더십을 보여야 할 왕들이 오히려 이러한 죄들을 방조하고 조장하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지 않으시고 미가를 통해서 말씀하신 것이다. 

6. 리더의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항상 더 깨어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리더의 자리에 있기 때문에 더 많은 영향력을 가질 수 있고, 더 중요한 결정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리더가 잘 못 세워지면 나라까지 위태해지는 것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 많이 봐 오지 않았는가? 

7. 선교사의 자리는 원하든 원치않든 리더의 자리에 있을 수 밖에 없는 자리이다. 이러한 리더의 자리에 서 있기 때문에 항상 더 깨어 있고, 항상 더 조심하고, 항상 더 나를 깊이 돌아봐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복음(기쁜 소식)을 전하러 와서 오히려 나쁜 영향을 태국 사람들에게 미칠 수 밖에 없다. 

8. 하나님께서 오늘 나에게 말씀하시는가? 나는 듣고 있는가? 혹시 내가 듣지 못해서, 내가 범죄해서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에게 말씀하시도록 상황을 만들어가고 있지는 않은가? 날마다 깨어 있고, 날마다 듣고 순종하는 자로 살아가고 싶다. 나의 연약함이 태국에 세워지고 있는 교회에, 또 하나님의 나라에 허물이 되지 않기를 원한다. 

9. 그러기 위해서는 날마다 들어야 하고, 날마다 물어야 한다. 다윗이 늘 하나님께 듣고, 물었고, 순종했다. 나의 삶도 다윗과 같기를 원한다. 

10.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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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Thinking)/Meditation2023. 2. 28. 1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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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20:17-34 그리스도의 관심과 나의 관심은 일치하는가?

1. 예수님의 관심은 그 분이 져야 할 십자가와 부활에 있었다. 왜냐하면 그 십자가 사건이 인류의 모든 것을 바꾸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방인들에게 넘겨 주어 그를 조롱하며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 박게 할 것이나 제삼일에 살아나니라”

2. 예수님께서 이렇게 심각하고도 중요한 이야기를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세배대의 아들의 어머니와 제자들의 관심은 다른 곳에 있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무엇을 원하느냐 이르되 나의 이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 (21절)

3. 그런데 이러한 모습이 바로 나의 모습이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이야기하고, 부활을 이야기 하시지만 나는 자주 나의 소망과 나의 원함을 주님께 이야기 하게 된다. 주님의 우편과 좌편에 앉아서 누릴 그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4. 세배대의 아들의 어머니는 진정으로 예수님의 길이 어떤 길인지를 몰랐다. 만약 예수님의 좌, 우편이 십자가 상의 좌, 우였다면? 과연 부탁을 할 수 있었을까? 오히려 예수님께서 기도하셨던 것 처럼 이 잔을 옮겨 달라고 부탁했어야 하지 않았을까? 십자가와 부활의 길은 예수님만 걸어가시면 되고, 그녀는 그 이후의 자녀들에게 있을 콩고물에만 관심이 있기 때문이다.

5. 예수님의 제자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이 부탁을 엄청 분하에 여긴다 (24절). 세배대 아들의 어머니와 제자들, 그리고 나의 차이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그녀도 제자들도 나도 십자가보다는 부활의 영광에만 오로지 관심이 있기 때문이다. 십자가를 지나야만 부활이 있는 것이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지 않고서 어찌 부활의 영광을 함께 누리겠는가?

6. 우리가 주를 위해 살아간다고, 주를 위해 무엇인가를 행한다고 말하지만 결국 우리는 나의 영광만 생각하는 사람들일 뿐이다. 우리는 너무나도 은혜가 필요한 사람들일 뿐이다. 맹인들의 고백이 그래서 우리에게는 절실히 요청된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30절 하반부)

7. 나의 관심이 나의 생각이 나의 물질의 사용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 그리스도인가 아니면 그 부활의 풍성함에서 오는 어떤 콩고물인가? 복음을 위해 살아가는가? 생존을 위해 살아가는가? 

8. 태국은 종교비자가 따로 있고, 나도 그 종교비자를 사용하고 있다. 어제는 특별히 1년 비자 갱신을 받았다. 앞으로 1년을 새로 섬길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비자를 받으면서 기쁜 마음과 동시에 힘들고 어려운 마음도 함께 들었다. 왜냐면 나는 이 비자에 합당하게 살아가고 있는 것인지? 나는 정말 태국교회와 선교를 위해 섬기고 있는가? 나의 유익이 아니라 태국 교회의 유익이 되고 있는가? 라는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다. 내 관심과 생각이 그리스도와 정말 같은가? 나는 정말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있는가?

9. 더 깊이 그리스도를 바라보기 원한다. 그리하여 나의 생각과 나의 관심이 그 분의 생각과 그 분의 관심과 일치가 되어서 딴 생각을 하며 다른 방향을 바라보는 선교사가 되지 않기를 원한다. 태국 땅에 유익이 되는 선교사로 살아갈 수 있기를 원한다. 

10.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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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Thinking)/Meditation2023. 2. 24. 1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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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19:1-12 옳음을 증명하려 하지 말라, 계명보다는 사람이다

1.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에 대해 시험하기 위한 이혼에 관한 질문에 대해 대답하신다 (3절). 요즈음은 이혼이 정말 많기 때문에 예수님의 대답이 살짝 고리타분하게 느껴질 것 같았고, 예수님께서 현대인의 다양한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2000년 전에 대답하신 것이라고 미리 생각하고 있었다. 

2. 바리새인들의 질문은 나와 비슷한 생각이었던 것 같다. “사람이 어떤 이유가 있으면 그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 (3절) 그들은 아내를 버릴 수 있는 어떤 이유를 찾았다. 다른 건 몰라도 이 정도 이유면 이혼할 충분한 사유가 되지 않느냐는 질문이었다. 

3. 예수님의 대답은 이혼할 이유를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결혼의 원리를 말씀하셨다. “그런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니" (6절)

4. 사람은 항상 이유를 찾는다. 내가 할 수 없는 이유, 내가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 그리고 그 이유는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결정에 대한 합당한 근거를 제공하고, 우리가 하나님이 정하신 원리 보다도 내 생각, 내 이유가 더 옳다고 생각하게 만든다. 즉 우리가 생각하는 어떤 이유는 내가 하나님보다 더 옳은 존재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5. 하나님께서 정하신 원리는 부부는 이혼해서는 안된다. 하나님이 두 사람을 한 몸으로 만드셨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면 우리의 인생에서 발생하는 그 수많은 어려움들을 부부는 어떻게 이겨내야 할까? 너무나도 가치관이 달라서 아무리 합의점을 찾아도 찾지 못할 때에는? 폭력을 행사하거나 다양한 죄로 인해 생기는 아픔들과 트라우마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6. 하지만 이유를 찾는 이유가 여전히 나의 옳음을 증명하고 싶은 것은 아닐까? 하나님께서 주신 원리는 맞다고 인정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나의 복잡다단한 일상을 모르신다고 증명하고 싶은 것은 아니었을까? 그래서 나는 옳고, 하나님은 틀렸다고 말하고 싶은게 아니었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7. 결국은 바리새인들과 같은 문제에 봉착한다. 누가 더 옳은가? 나인가? 하나님이신가? 하나님이시라면 그저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면 된다. 결혼의 계명에 대해 말씀하신 것 처럼 우리는 하나님께서 짝지어 주신 것을 나눌만한 권한이 없는 사람들이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순종이다. 

8.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에게 계명이 사람보다 중요하다고 말씀하시는 분이 결코 아니시다. 안식일 계명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존재하신다고 말씀하신 분이 예수님이 아니신가? 그렇다면 예수님이 우리의 어쩔 수 없는 상황의 이혼에 대해서도 결코 정죄하실 분이 아니고 우리를 이해하실 분임을 믿는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혼하지 않고 가정을 가능하면 지켜야겠지만 정말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서는 그 계명보다 더 크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이해해주실 것을 믿어야만 한다. 

9. 예수님의 말씀 앞에서 나의 옳음을 증명하려고 하지 말자. 한낱 먼지인 내가, 아무런 지혜도 능력도 없는 내가, 무엇을 근거로 하나님보다 나를 옳다 하는가? 하나님이 온 우주를 창조하실 때 내가 거기 있었는가? 아니다. 그러니 주님께서 맞다고 하시면 그게 맞는 것이다. 그리고 주님께서도 정죄하지 않으신 영혼들을 향해 계명을 들이대지 말자. 더 중요한 것은 항상 계명이 아니라 사람이다. 살리기 위한 삶을 살자. 

10.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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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Thinking)/Meditation2023. 2. 23. 1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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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18:21-35 나의 악함을 직시할 때 용서할 수 있게 된다

1. 베드로는 예수님께 자신의 형제가 죄를 범하면 몇 번을 용서해줘야 하는지를 묻는다. 그리고 그는 의기양양하게 일곱 번이면 충분하지 않겠냐고 예수님께 묻는다. 

2. 왜냐하면 유대인의 랍비들의 가르침에 따르면 3번 까지를 용서해야만 했다. 용서의 한도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베드로는 유대인의 한도치의 두 배이며, 완전 수인 7번을 제시한다. 이는 베드로 자신이 유대인들이 세운 기준보다도 훨씬 더 관대한 사람임을 드러내려고 한 것 같다. 

3. 하지만 예수님의 대답은 우리의 생각과 베드로의 관대함을 훨씬 더 뛰어 넘는 수준이었고, 우리가 계속해서 용서해야 함을 이야기 하시면서 달란트 비유를 들어 설명해 주신다. 

4. 이 달란트 비유에서 우리 각 사람은 이미 만 달란트를 탕감받은 자이다. 우리의 엄청난 죄의 빚을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모두 탕감 받은 자라는 것이다. 그런데 만 달란트 빚을 탕감받은 사람은 자신에게 겨우 백 데나리온 빚진 사람도 탕감해주지 않고 오히려 그를 옥에 가두게 된다 (30절). 이게 바로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5. 결국은 내가 어떤 사람인지, 얼마나 큰 죄를 용서 받은 사람인지를 깨닫는 것이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핵심이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그저 용서하라고, 혹은 그게 율법이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우리가 용서해야 할 까닭은 우리가 이미 용서 받은 자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6. 우리는 더 큰 죄(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셔야만 사함을 받을 만큼의)도 용서 받았으면서 우리에게 작은 잘못을 저지른 사람도 용서 못해서는 되겠냐는 것이 오늘 비유의 핵심이다. 

7. 그리고 35절은 말한다.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그저 용서하는 수준이 아니라 “마음으로" 용서해야 한다. 이것은 우리의 마음 깊은 곳에서 용서하라는 뜻이다. 마음 속 깊은 곳에서의 적대감이 남아 있지만 말로만 하는 용서가 아니란 뜻이다.

8. 이러한 기준에서 비추어 보니 나는 아직도 제대로 용서하지 못한 사람들이 있다. 용서하려고 했지만 여전히 마음 깊은 곳에서 용서하고 싶지 않는 것들이 남아 있는 경우들이 있다. 하지만 내가 해야 할 일은 내가 일만 달란트를 탕감 받은 사람이고, 일백 데나리온을 빚진 자를 불쌍히 여겨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용서가 잘 안되는 이유는 반대로 생각하기 때문인 것 같다. 내가 하나님께 받은 용서가 일백 데나리온이고, 그가 나에게 진 빚이 일만 달란트 같기 때문이다. 

9. 나의 죄성을, 내가 얼마나 죄인인지를 모르기 때문에 그렇게 느껴지는 것이다. 결국 용서는 스스로에 대한 자아 정체성에서 부터 비롯된다. 나는 얼마나 죄인인가? 나는 얼마나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한 죄인인가? 나는 어느정도 크기의 용서를 받은 죄인인가? 내 죄와 내 악함을 더 직시하게 되기를 원한다. 그래서 다른 이들을 진정으로 용서할 수 있게 되기를 원한다. 묵상을 마치면서도 아직도 잘 안된다는 것을 느낀다. 주님께 은혜를 구한다. 

10.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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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Thinking)/Meditation2023. 2. 16. 1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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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16:1-12 표적이 없어서가 아니라 내가 문제인 것이다

1.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은 예수님께 표적을 구한다. 하지만 그들이 구하는 표적은 진정 예수가 누구이신지를 구하기 위함이 아니라 그저 예수를 시험하여 넘어뜨리기 위함이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와서 예수를 시험하여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보이기를 청하니" (1절)

2. 우리가 무엇인가에 대해 표적을 구하는 이유는 아마도 정확히 분별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그러나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은 이미 예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는 답을 정해놓고 예수께 표적을 구하였다. 

3. 심지어 그들은 이미 칠병이어의 기적을 경험하지 않았는가? (마 15:32-39) 답을 정해놓고, 시험을 하기위해 물으니 기적을 보아도, 병자를 고쳐도 그들은 제대로 된 답을 얻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4.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보여주시기로 한 표적은 요나의 표적이었다. 요나의 표적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건으로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사흘 밤낮을 있었던 것 처럼 그리스도께서도 죽으시고 사흘 후에 부활하실 거란 이야기다. 

5. 예수님은 그들에게 결국 그 표적을 보여주신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믿지 않는다. 믿지 않기로 작정한 사람들, 자신들이 답을 정해놓은 사람들은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여도, 모든 악한 것과 약한 것을 고치셔도 그리고 심지어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서 죽어 모든 영혼들을 대속해도 믿지 않는다. 

6. 믿음이란 신비한 것이다. 그래서 믿음 또한 하나님의 선물인 것이다. 우리의 마음이 열리면 우리는 그 어떤 것도 믿을 수 있지만 우리의 마음이 닫혀 있으면 그 어떤 놀라운 기적을 보더라도 우리는 믿지 아니할 이유를 찾게 되는 것이다. 

7. 결국은 하나님 앞에서의 겸손함이다. 내가 아무런 가치가 없는 존재이고, 내가 얼마나 큰 죄인인지를 깨달을 때, 나의 힘으로 내 자신을 조금도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것을 절실하게 느낄 때, 우리는 마음이 겸손하여 하나님 만나길, 우리의 구원자를 만나길 소망한다. 하지만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처럼 나는 충분히 괜찮은 사람이고, 나는 충분히 나를 구원할만한 사람이라고 여기며 어디 한번 해봐라 라는 모습으로 그리스도를 볼 때에는 아무것도 보이지도 믿어지지도 않을 수 밖에 없다. 

8. 나는 오늘 어떤 부류의 모습으로 서 있는가? 하나님 앞에서 나의 존재를 정확하게 보며, 내가 나의 구원에 어떠한 것도 기여할 수 없다는 절망 속에서 영원한 소망이신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있는가? 아니면 나는 꽤 괜찮은 사람이고, 이정도면 충분하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있어도 없어도 괜찮은 존재로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가? 표적을 구하는게 중요한게 아니다. 표적은 이미 2000년 전에 십자가 위에서 다 보여졌다. 그리스도의 부활의 증인들이 자신의 생명을 걸고 그 부활을 증거하지 않았는가? 지금 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여전히 그리스도를 따르고 있지 않은가? 표적의 문제가 아니라 나의 문제이다. 표적을 구하려고 하였던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의 교훈을 삼가라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해야 한다 (12절). 

9. 표적이 아니라 나 자신을 점검하기 원한다. 나의 존재의 가벼움과 절망을 더 깊이 깨닫게 되기를 원한다. 그리하여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 Not i, but Christ를 경험하게 되기를 원한다. 

10.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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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Thinking)/Meditation2023. 2. 14. 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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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15:21-28 사랑이 모든 일의 이유이자 결론이다. 

1. 예수님께서 두로와 수로 지방으로 가셨다. 거기서 귀신 들린 자녀를 가진 가나안 여자를 만났다. 그녀는 유대인과 혼혈 결혼한 사마리아인도 아니었고 유대인들로부터 개 이하의 취급을 받던 완전한 이방인인 가나안 여인이었다. 

2. 가나안 여자가 엄청난 무시와 수치를 당할 줄 알면서도 예수님 앞에 나아갈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그의 딸이 흉악한 귀신에 들렸기 때문이었다.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 들렸나이다 하되" (22절)

3. 예수님은 그녀를 심하게 거절하셨다. 들은 척도 안하셨다. 제자들이 와서 제발 한 마디만 해달라고 할 정도였다.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되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그를 보내소서" (23절)

4. 예수께서 대꾸를 하지 않으셔서 계속 소리지르는 것 같으니 한 마디 해서 보내줘서 조용히 만들어 달라는 제자들의 부탁이었다. 그러나 그녀를 개에 비유하는 예수의 말씀에 이렇게 대답한다. “여자가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27절)

5. 이 여자가 이렇게 무관심과 수치스러운 상황을 견뎌낼 수 있었던 딱 하나의 이유는 바로 그녀가 사랑하는 딸 때문이었다. 귀신 들린 딸이 너무나도 불쌍하고 사랑하기에 그녀는 모든 상황을 견뎌내면서 예수님께 끝까지 매달릴 수 있었다. 물론 예수님께서 평소와 다르게 그녀에게 막 대하신 이유는 그녀의 믿음을 보시기 위함이었다. 

6. 하지만 그녀의 믿음의 시작은 믿음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사랑에서 시작된 것이다. 사랑하였기 때문에 그녀는 모든 것을 인내할 수 있는 믿음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사랑은 우리로 하여금 견디게 하고, 사랑은 우리로 하여금 끝까지 견딜 수 있는 믿음을 가지게 한다. 사랑이 모든 것을 시작하게 하는 열쇠이다. 그런데 이 여인을 보다보니 떠오르는 한 사람이 있었다. 바로 예수님이셨다. 

7. 예수님도 우리를 사랑하셔서 이러한 하나님 아버지와 냉대와 거절을 십자가에서 받으셨다. “제구시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지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를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막 15:34)

8. 아마도 이 순간 예수님은 그녀를 거절하면서 자신의 미래를 보셨을 수도 있을 것이다. 자신이 모든 죄를 지고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에 영원부터 함께 하셨던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신을 거절하실 거라는 사실을 말이다. 그럼에도 예수께서도 우리를 사랑하셨기에 영원전부터 영원까지 함께 하실 하나님 아버지와의 단절을 견디실 수 있으셨고, 우리를 위해 모든 물과 피를 아낌없이 쏟으실 수 있었다. 결국은 사랑이다. 사랑에서 시작되고, 사랑으로 마친다. 우리가 걸어간 그 자리에 사랑만 남아야 한다. 

9. 사랑이 모든 믿음, 소망의 이유이자 결론이다. 오늘 가나안 여자를 보면서 믿음만 볼 것이 아니라 그 믿음의 뿌리인 사랑을 보고 배울 수 있기를 원한다. 사랑하는 자로 살아가기 원한다. 사랑이 충만하여 사랑을 나눌 수 있는 자가 되기를 원한다. 

10. 오늘도 샬롬 

*오늘은 발렌타인데이입니다. 태국 기독교인들은 이 날을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기에 매우 좋은 날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어떤 거리낌 없이 사랑에 대해서 이야기 할 수 있는 날이긴 하니까요.. 사랑하는 여러분들도 삶에서 그 누군가에게 가장 큰 하나님의 사랑을 나누실 수 있는 한 날 되시길 기도합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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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Thinking)/Meditation2023. 2. 13. 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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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15:1-20 전통이 아니라 복음으로 

1. 수쿰빛언약교회에 하나님께 은혜를 부어 주셔서 많은 영혼들이 복음을 듣고 믿게 되었다. 그래서 감사하게도 공간의 문제를 고민하게 되었고, 그 고민의 결과로 교회를 분립하기로 하였다. 

2. 교회를 분립하려고 하면서 많은 사람들의 어려움을 듣게 되었다. 교회에 오기에 먼 거리, 대중교통 이용의 어려움, 주일에 출근해야 하고, 부모님이 주일 오전 시간에 못 나가게 하고(고등학생들), 알바를 가야 하고 등등등… 

3. 그래서 분립하는 교회는 예배에 참석하는 사람들의 시간과 상황에 맞도록 예배를 조정하기로 했다. 예를들면 수요일 오후 7시, 목요일 오후 4시 등등으로 말이다. 그런데 이게 마음을 너무나도 불편하게 만들었다. 내가 드린 주일예배는 주일, 즉 일요일에 드리는 예배였고, 흔히 말하는 주일 대 예배(실제로는 틀린 표현이지만)가 다른 예배보다 더 중요하다는 전통이 나에게 자리잡고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4. 그 전통을 깨뜨리는게 너무나도 힘들었다. 주일에 예배를 드리지 않는다는 것은 생각할 수가 없었다. ‘만약 목요일에 예배를 드린다면 주일에는 뭘 하고 싶은거지?’ 라는 생각에 마음이 불편해졌다. 그러나 아무리 성경을 찾아봐도 성경에 내가 생각하는 주일(일요일)에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말씀은 없었고, 이것은 단지 교회의 전통임을 알게 되었다. 

5. 오늘 바리새인들과 예수님은 이 유대인의 음식 먹기 전에 손 씻는 장로들의 전통으로 인해 논쟁이 벌어진다. 바리새인들은 장로의 전통을 지켜야 함을 강력하게 말하면서도 자신들의 유익을 위해 부모님에 대해 ‘드림이 되었다' 말함으로 섬기기를 포기하였다. “당신의 제자들이 어찌하여 장로들의 전통을 범하나이까 떡 먹을 때에 손을 씻지 아니하나이다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냐*" (2-3절)

6. 전통과 하나님의 말씀 무엇이 더 중요한가? 교회의 전통과 영혼구원 무엇이 더 중요한가? 교회의 전통과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신 계명 무엇이 더 중요한가? 예수님의 이 질문은 다시 한번 나로 하여금 정말로 무엇이 더 중요한지를 깊이 고민하게 만든다. 

7. 내가 편하고 당연하게 느끼는 전통인가? 아니면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사랑하신 한 영혼인가? 결국은 전통이냐? 복음이냐? 의 문제로 귀결된다. 내가 편하고 익숙한 전통이 아니라 불편하고 때로는 어렵더라도 복음을 위해 살아가야 한다. 그것이 선교사의 삶이고, 믿는 자의 삶일 것이다. 

8. 물론 전통이 다 나쁜 것은 아니다. 전통은 다 그 나름대로의 의미가 있고 존중받아야 한다. 그러나 그것이 복음과 상충된다면 전통보다는 복음을 선택해야 한다는 말이다. 내가 생각하고 있는 전통 때문에 하나님의 복음을 헛되게 만들지 않기를 원한다. 이번에 한동대학교 NIBC팀을 받으면서 더 이런생각을 깊이 하게 되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분량이 있고, 그들이 섬길 수 있는 분량이 있는데 내 생각으로 전통으로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을 제한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 나라는 함께 세워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서로가 연약하고 부족하여도 함께 가족이 되는 것이고, 함께 빛과 소금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9. 전통이 아니라 복음을 쫓아가기 위해서 더 예민하고, 넓고 깊게 생각하고 기도할 수 있게 되기를 원한다. 나의 유익이 아니라 교회와 성도들의 유익이 되는 길을 더 깊이 찾아봐야 겠다. 

10. 오늘도 샬롬 

*사진은 수고하고 돌아간 한동 NIBC 방콕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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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13:51-58 선입관을 가지지 않으려면…

1. 삶을 살아가면서 어떤 사람에게 선입관이 형성되는 경우가 있다. 그와 있었던 경험이나 그의 외적인 면에서 풍기는 어떠함이 그를 그런 부류의 사람으로 만들고, 그 사람은 나의 마음 속에서 점점 더 그런 부류의 사람이 되어 간다.

2. 그런데 선입견은 그 사람이 실제로 그런 사람일 수도 혹은 아닐 수도 있지만 대부분은 아닐 가능성이 높다. 결국 그 사람의 어떠함보다 내가 그 사람에 대해 가지고 있는 느낌, 생각, 보여지는 것으로 그 사람을 판단한다는 것이다. 

3. 지나간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많은 천국의 비유를 가르치셨고, 많은 기적들을 행하셨다. 그런데 사람들의 선입관의 벽을 넘지 못하셨다. “고향으로 돌아가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그들이 놀라 이르되 이 사람의 이 지혜와 이런 능력이 어디서 났느냐 이는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그 어머니는 마리아,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라 하지 않느냐? 그 누이들은 다 우리와 함께 있지 아니하냐 그런즉 이 사람의 이 모든 것이 어디서 났느냐 하고" (54-56절)

4.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의 질문 속에는 예수님에 대한 그들의 선입견이 담겨 있다. 예수님의 행하신 기적과 말을 듣고 예수님을 판단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예수님의 가정에 대한 정보로 예수님을 판단하고 있다. 목수의 아들이기 때문에 성경에 대한 지식이 있을 수 없고, 그의 가문(족보)과 가족들을 볼 때 평범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도 그럴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5. 그 결과는 57절 상반부이다. “예수를 배척한지라" 자신들의 선입관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를 배척하였다. 배척이라는 원어 단어를 살펴보면 단순한 거절 정도가 아닌 적극적인 반대, 공격적인 성향까지 포함하는 의미이다. 

6. 이 선입관이 지금 우리 시대 그리스도인들이 겪게 되는 가장 큰 문제 중의 하나라고 여겨진다. 직접 예배와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고, 직접 성경 말씀을 읽으면서 하나님에 대해서 알아가기 보다는 쉬운 방법을 택한다. 누군가의 간증을 읽고, 누군가가 정리해 놓은 글이나 영상을 통해서 하나님을 배운다. 하나님을 간접적으로 만나게 되니 하나님에 대한 선입관이 생길 수 밖에 없다. 

7. 그러니 하나님에 대해 깊이가 없다. 하나님에 대한 치열한 고민과 질문이 없다. 그러다 보니 조금만 고난이 와도 낙망하게 되고, 하나님에 대한 오해는 점점 깊어져만 간다. 실제로 성경적 근거가 없는 내용 임에도 불구하고 누군가의 설교나 누군가의 말로 전해 들은 내용을 진짜인 것 처럼 생각하고, 그것을 성경보다도 더 굳게 믿는다. 그리고 성경에서 확인해 볼 생각도 하지 않는다. 

8. 이러한 선입관을 가지게 만드는 태도를 우리는 버려야 한다. 야곱은 하나님을 직접 만나기 전까지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이라고 부르지 않고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이라고 불렀다. 할아버지의 하나님, 아버지의 하나님이었지만 나의 하나님은 아니었던 것이다. 하나님을 직접 만나고, 내가 성경을 읽고, 내가 기도해야만 한다. 그래야만 나의 하나님이 되는 것이다. 누군가가 요약해 놓은 몇몇 구절을 읽고 그것이 나의 신앙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이러한 태도들이 결국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을 잘못된 지식으로 배척하게 만들 수 있다. 

9. 나는 오늘 하나님을 만나고 있는가? 하나님과 교제하기 위한 정기적인 루틴을 가지고 있는가? 바쁜 중에도 고요한 시간을 내어 그 분과 함께 있는가? ‘주의 말씀이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의 빛이니다'라고 고백하면서도 말씀을 보지 않고 하루를 보내고 있지는 않은가? 예수님께 선입관을 가질 수 있는 태도들을 버리고 예수님을 직접 만나는 하루, 그리고 나의 삶이 되기를 원한다.

10.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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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