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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7:14-20 선하신 하나님은 선한 우리의 삶에 담아서 전해야 한다

1.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미가는 하나님을 양 떼를 먹이시는 목자로 표현한다. “원하건데 주는 주의 지팡이로 주의 백성 곧 갈멜 속 삼림에 홀로 거주하는 주의 기업의 양 떼를 먹이시되…”(14절). 

2. 하나님은 우리의 목자이시다. 이러한 메타포는 시편 23편에서도 우리가 확인할 수 있다. 목자의 이미지는 날마다 우리를 성실하게 우리를 인도하여 먹고, 마시게 하는 하나님을 떠오르게 만든다. 

3. 실제로 하나님은 그런 분이시다. 때로는 드러나게, 우리가 느낄 수 있도록 특별 은총으로, 때로는 드러나지 않고, 매우 평범한 일반 은총으로 우리의 삶을 날마다 인도해나가시는 분이시다. 

4. 그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먹이시고, 입히시는 것 뿐만 아니라 인간의 죄악을 아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해주시고,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며, 우리를 자녀 삼아주신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는 끊임없이 죄를 짓고, 끊임없이 반역하는 인간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 

5. “주와 같은 신이 어디 있으리이까 주께서는 죄악과 그 기업에 남은 자의 허물을 사유하시며 인애를 기뻐하시므로 진노를 오래 품지 아니하시나이다 다시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우리의 죄악을 발로 밟으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깊은 바다에 던지시리이다" (18-19절)

6. 실제로 18-19절의 말씀을 이루시기 위해서 하나님 자신이 직접 인간의 몸으로 오셨고,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서 자신의 몸을 속죄 제물로 십자가에서 드리셨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의 모든 죄를 가리셔서 다시는 우리를 죄인이라고 하지 않으시고, 아들이라, 의인이라고 칭하셨다. 

7. 세상에 이런 신이 어디 있는가? 사랑 때문에 거룩하신 그 분이 우리를 매일 용서하시고, 사랑 때문에 고난 받는 것을 선택하시고, 사랑 때문에 십자가에 달려 죽는 것을 선택하신 그런 신이 어디에 있는가? There is none like You. 

8. 최근 삼일절의 한 목사의 말도 안되는 언행이 도마에 올랐다. 일제 강점이 한국의 근대화에 기여했다는 잘못된 역사관, 그릇된 신학을 가진 한 목사가 기독교인들을 싸잡아서 욕먹게 만들었다. 가뜩이나 어려운 기독교에 또 한 번의 강펀치를 날린 것 같은 느낌이다. 뭔가 부끄럽고 뭔가 아프다. 목사라는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책도 안 읽고, 생각의 사유도 할 줄을 모르는가? 하나님이 이렇게 좋은 분이시면 뭐하는가? 그 좋은 분을 전하는 우리도 그 분을 닮아가는 자가 되어야 하지 않는가? 좋은 것은 좋은 그릇에 담아야 그 내용물의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지 않은가? 세상에 다른 사람에게 좋으신 하나님을 소개하고 싶다면 우리 또한 좋은 그릇이 되어야만 한다. 

9. 이번에 그 목사와 같은 상황은 아니지만 내 안에도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 것이 없다. 필요한 것은 오직 주님의 은혜이고, 주님의 도우심이다. 좋은 그릇이 되기 위해서는 오직 주님의 도우심이 필요할 뿐이다. 선한 것이 없는 내 안에서 선한 것을 짜내려고 하지 말고, 선하신 주님과 동행함으로 인해서 그 분의 선하심이 나도 모르게 내게 묻어날 수 있도록 그렇게 살아갈 수 있기를 원한다.

10.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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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3:1-12 들으려면 사랑해야 한다

1. 이스라엘의 리더들은 타락했다. 그들의 타락상을 1, 5, 9절에서 고발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들으라” 라고 하며 말씀하신다. 

2. “내가 또 이르노니 야곱의 우두머리들과 이스라엘 족속의 통치자들아 들으라 정의를 아는 것이 너희의 본분이 아니냐 너희가 선을 미워하고 악을 기뻐하여…” (1-2절 상반부)

3.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며 들으라고 한 이유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데도 듣지 않았기 때문이다. 말씀으로 온 세상을 창조하시고, 만 왕의 왕이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데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듣지 않았다. 

4. 듣는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왜냐하면 들으려면 마음을 열어야 하기 때문이다. 들으려면 겸손해야 하기 때문이다. 내가 하나님보다 더 옳다고 생각하는 한, 내가 하나님보다도 더 지혜롭다고 생각하는 한 들리지 않는다. 

5. 오늘 이스라엘 백성들이 듣지 않은 이유는 바로 그것이다. 자신을 하나님보다 옳게, 낫게, 지혜롭게 여긴 것이다. 자신들이 죄악을 범하고, 정의를 가리고 (1절), 입에 음식이 들어올 때 (나에게 유익이 될때에만) 만 평화를 외치고 (5절), 정의를 미워하고 정직한 것을 굽게 만들면서도 자신들이 하고 있는 것을 옳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6. 이러한 굳은, 높아진 마음은 결국 사랑이 없어서이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이웃에 대한 사랑이 없기 때문에 그들은 듣지 않는 것이다. 듣기 위해서는 귀를 열기 위해서는 사랑이 필수적으로 전제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7. 하나님도 이웃도 사랑하지 않았기 정의도 중요하지 않았다. 오로지 내 입 안으로 들어오는 먹을 것, 내 유익, 내 이익이 가장 중요한 것일 뿐, 나머지는 어떤 것도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8. 나는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하는가? 사랑하고 있는가? 듣고 있는가? 하나님께서 들으라 말씀하실 때, 귀를 열고 듣는가? 아님 여전히 나를 하나님 보다 옳다 여기며 귀를 닫고 있는가? 들어야 한다. 들어야 산다. 들어야 회개하게 되고, 들어야 회복하게 되고, 들어야 부흥하게 된다. 나는 오늘도 듣고 있는가? 듣기 위해 사랑하기 위해 시간과 에너지를 쏟고 있는가? 

9. 듣는 자로 하루를 살기 원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아내의 말을, 아이들의 이야기를, 성도들의 이야기를 듣기 원한다. 

10.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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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2:1-13 나에 대한 정확한 인식: 나는 더 많은 용서를 받은 자이다

1. 하나님의 경고의 메시지가 임한다. 그 경고의 메시지는 “그러므로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이 족속에게 재앙을 계획하나니 너희의 목이 이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요 또한 교만하게 다니지 못할 것이라 이는 재앙의 때임이라 하셨느니라" (3절)

2. 하나님의 경고를 받았으면 적어도 뭐라도 바꿔야 되지 않는가?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히려 이 예언조차도 듣기 싫어한다. “그들이 말하기를 너희는 예언하지 말라 이것은 예언할 것이 아니거늘 욕하는 말을 그치지 아니한다 하는도다" (6절)

3. 굳어진 마음에는 아무것도 들어오자 않는다.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도, 하나님의 예언이 들려도 이럴리가 없다는 자신의 생각을 더 의지하게 된다. 그래서 예언자의 입을 닫게 만든다. 

4. 이스라엘의 이러한 행동을 보면 ‘이것들 정말 확 쓸어버려?’라는 생각이 들만도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러지 않으셨다. 오히려 그들을 더 사랑하셔서 여호와께서 남은 자들을 모으시며 그들의 선두에서 가시겠다고 말씀하신다.

5. “야곱아 내가 반드시 너희 무리를 다 모으며 내가 반드시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모으고 그들을 한 처소에 두기를 보스라의 양 떼 같이 하며 초장의 양 떼 같이 하리니 사람들이 크게 떠들 것이며 길을 여는 자가 그들 앞에 올라가고 그들은 길을 열어 성문에 이르러서는 그리로 나갈 것이며 그들의 왕이 앞서 가며 여호와께서는 선두로 가시리라" (12-13절)

6.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다. 이스라엘의 반역에도, 이스라엘의 불순종에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여전히 사랑하시고, 여전히 그들을 모으시고, 그 앞에서 선두로 가시며 그들을 보호하신다. 

7. 하나님의 사랑은 이렇게 크다. 나는 요엘이의 짜증 하나도 잘 받지 못하는데도 말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한결같다. 아무리 배신하고, 불순종해도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사랑하는 그 분의 백성들을 포기하지 않으신다. 

8. 내 마음에 사랑이 없음을 느낀다. 그래서 자꾸 빠글거린다. 참아주고, 기다려주고, 인내해주는게 너무 어렵다. 그래서 순간 순간 예민해지기 일쑤이다.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해서인가? 나는 그래도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해서 그런것인가? 중요한 것은 나 또한 오늘 본문과 같이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받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오래 참아주시고, 기다려주시고, 끝없이 용서해주셔서 오늘의 내가 있는 것인데 나는 나에게는 너무 관대하고 남에게는 너무 타이트한 잣대를 들이댄다. 결국은 내 자신에 대한 인식,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의 크기에 대한 실제적인 인식이 부족함이다. 

9. 머리로 아는 것은 아는 것이 아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머리로만 알았기에 하나님의 경고 조차도 듣지 않으려고 한 것이다. 마음으로, 진정으로 알기 원한다. 그래서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고, 사랑을 어디에서는 누구에게든 실천 할 수 있기를 소망한다. 

10. 오늘도 샬롬 

*사진은 교회의 분립 이후 처음으로 시작하게 된 쁘라뚜남 가정교회입니다. 첫 번째 모임이었는데 4명이 참석하였고, 그 중에서 두 자매(능, 쁠러이)가 영접 기도를 같이 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영혼들을 불러 주시니 너무 감사합니다. 펫티 자매를 통해서 모임이 시작되었는데, 계속해서 하나님께서 이 모임을 통해 많은 영혼들이 복음을 들을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시고, 직장을 마친 후 모임을 하게 되어 늦은 시간에 하게 되는데 (밤 9:30-11시) 모두가 피곤치 않고 이 모임 속에서 하나님의 회복과 사랑의 역사라 일어날 수 있도록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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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가 1:1-16 리더이기 때문에 더더욱 하나님께 듣고 물어야 한다

1. 미가서 1:1절은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유다의 왕들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 시대에 모레셋 사람 미가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 곧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에 관한 묵시라"

2.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스라엘이 힘든 이유가 다른 나라들과 달리 이스라엘에 왕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했고, 왕을 세웠다. 그리고 지금 그 왕의 계보가 요담과 아하스 까지 내려온 것이다. 

3.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유력한 왕에게 직접 말씀하지 않으시고, 누군지도 모르는 모레셋 사람 미가에게 말씀하고 계신다. “백성들아 너희는 다 들을지어다 땅과 거기에 있는 모든 것들아 자세히 들을지어다 주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대하여 증언하시되 곧 주께서 성전에서 그리하실 것이니라 여호와께서 그의 처소에서 나오시고 강림하사 땅의 높은 곳을 밝으실 것이다" (2-3절).

4.  하나님은 왜 이스라엘 백성들의 염원을 담아 세운 왕에게 말씀하지 않으시고, 변방의 미가라는 한 선지자, 아무도 누군지 모르는 사람에게 말하셨을까? 주석을 찾아보니 미가는 한 번도 명시적으로 ‘선지자'로 일컬어진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5. 그 이후의 본문을 보면 하나님께서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의 죄를 말씀하신다. 이스라엘 왕들도 이 죄를 피해가지 못했던 것 같다. 리더십을 보여야 할 왕들이 오히려 이러한 죄들을 방조하고 조장하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지 않으시고 미가를 통해서 말씀하신 것이다. 

6. 리더의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항상 더 깨어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리더의 자리에 있기 때문에 더 많은 영향력을 가질 수 있고, 더 중요한 결정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리더가 잘 못 세워지면 나라까지 위태해지는 것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 많이 봐 오지 않았는가? 

7. 선교사의 자리는 원하든 원치않든 리더의 자리에 있을 수 밖에 없는 자리이다. 이러한 리더의 자리에 서 있기 때문에 항상 더 깨어 있고, 항상 더 조심하고, 항상 더 나를 깊이 돌아봐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복음(기쁜 소식)을 전하러 와서 오히려 나쁜 영향을 태국 사람들에게 미칠 수 밖에 없다. 

8. 하나님께서 오늘 나에게 말씀하시는가? 나는 듣고 있는가? 혹시 내가 듣지 못해서, 내가 범죄해서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에게 말씀하시도록 상황을 만들어가고 있지는 않은가? 날마다 깨어 있고, 날마다 듣고 순종하는 자로 살아가고 싶다. 나의 연약함이 태국에 세워지고 있는 교회에, 또 하나님의 나라에 허물이 되지 않기를 원한다. 

9. 그러기 위해서는 날마다 들어야 하고, 날마다 물어야 한다. 다윗이 늘 하나님께 듣고, 물었고, 순종했다. 나의 삶도 다윗과 같기를 원한다. 

10.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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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Thinking)/Meditation2023. 2. 28. 1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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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20:17-34 그리스도의 관심과 나의 관심은 일치하는가?

1. 예수님의 관심은 그 분이 져야 할 십자가와 부활에 있었다. 왜냐하면 그 십자가 사건이 인류의 모든 것을 바꾸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방인들에게 넘겨 주어 그를 조롱하며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 박게 할 것이나 제삼일에 살아나니라”

2. 예수님께서 이렇게 심각하고도 중요한 이야기를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세배대의 아들의 어머니와 제자들의 관심은 다른 곳에 있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무엇을 원하느냐 이르되 나의 이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 (21절)

3. 그런데 이러한 모습이 바로 나의 모습이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이야기하고, 부활을 이야기 하시지만 나는 자주 나의 소망과 나의 원함을 주님께 이야기 하게 된다. 주님의 우편과 좌편에 앉아서 누릴 그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4. 세배대의 아들의 어머니는 진정으로 예수님의 길이 어떤 길인지를 몰랐다. 만약 예수님의 좌, 우편이 십자가 상의 좌, 우였다면? 과연 부탁을 할 수 있었을까? 오히려 예수님께서 기도하셨던 것 처럼 이 잔을 옮겨 달라고 부탁했어야 하지 않았을까? 십자가와 부활의 길은 예수님만 걸어가시면 되고, 그녀는 그 이후의 자녀들에게 있을 콩고물에만 관심이 있기 때문이다.

5. 예수님의 제자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이 부탁을 엄청 분하에 여긴다 (24절). 세배대 아들의 어머니와 제자들, 그리고 나의 차이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그녀도 제자들도 나도 십자가보다는 부활의 영광에만 오로지 관심이 있기 때문이다. 십자가를 지나야만 부활이 있는 것이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지 않고서 어찌 부활의 영광을 함께 누리겠는가?

6. 우리가 주를 위해 살아간다고, 주를 위해 무엇인가를 행한다고 말하지만 결국 우리는 나의 영광만 생각하는 사람들일 뿐이다. 우리는 너무나도 은혜가 필요한 사람들일 뿐이다. 맹인들의 고백이 그래서 우리에게는 절실히 요청된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30절 하반부)

7. 나의 관심이 나의 생각이 나의 물질의 사용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 그리스도인가 아니면 그 부활의 풍성함에서 오는 어떤 콩고물인가? 복음을 위해 살아가는가? 생존을 위해 살아가는가? 

8. 태국은 종교비자가 따로 있고, 나도 그 종교비자를 사용하고 있다. 어제는 특별히 1년 비자 갱신을 받았다. 앞으로 1년을 새로 섬길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비자를 받으면서 기쁜 마음과 동시에 힘들고 어려운 마음도 함께 들었다. 왜냐면 나는 이 비자에 합당하게 살아가고 있는 것인지? 나는 정말 태국교회와 선교를 위해 섬기고 있는가? 나의 유익이 아니라 태국 교회의 유익이 되고 있는가? 라는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다. 내 관심과 생각이 그리스도와 정말 같은가? 나는 정말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있는가?

9. 더 깊이 그리스도를 바라보기 원한다. 그리하여 나의 생각과 나의 관심이 그 분의 생각과 그 분의 관심과 일치가 되어서 딴 생각을 하며 다른 방향을 바라보는 선교사가 되지 않기를 원한다. 태국 땅에 유익이 되는 선교사로 살아갈 수 있기를 원한다. 

10.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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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Thinking)/Meditation2023. 2. 24. 1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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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19:1-12 옳음을 증명하려 하지 말라, 계명보다는 사람이다

1.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에 대해 시험하기 위한 이혼에 관한 질문에 대해 대답하신다 (3절). 요즈음은 이혼이 정말 많기 때문에 예수님의 대답이 살짝 고리타분하게 느껴질 것 같았고, 예수님께서 현대인의 다양한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2000년 전에 대답하신 것이라고 미리 생각하고 있었다. 

2. 바리새인들의 질문은 나와 비슷한 생각이었던 것 같다. “사람이 어떤 이유가 있으면 그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 (3절) 그들은 아내를 버릴 수 있는 어떤 이유를 찾았다. 다른 건 몰라도 이 정도 이유면 이혼할 충분한 사유가 되지 않느냐는 질문이었다. 

3. 예수님의 대답은 이혼할 이유를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결혼의 원리를 말씀하셨다. “그런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니" (6절)

4. 사람은 항상 이유를 찾는다. 내가 할 수 없는 이유, 내가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 그리고 그 이유는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결정에 대한 합당한 근거를 제공하고, 우리가 하나님이 정하신 원리 보다도 내 생각, 내 이유가 더 옳다고 생각하게 만든다. 즉 우리가 생각하는 어떤 이유는 내가 하나님보다 더 옳은 존재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5. 하나님께서 정하신 원리는 부부는 이혼해서는 안된다. 하나님이 두 사람을 한 몸으로 만드셨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면 우리의 인생에서 발생하는 그 수많은 어려움들을 부부는 어떻게 이겨내야 할까? 너무나도 가치관이 달라서 아무리 합의점을 찾아도 찾지 못할 때에는? 폭력을 행사하거나 다양한 죄로 인해 생기는 아픔들과 트라우마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6. 하지만 이유를 찾는 이유가 여전히 나의 옳음을 증명하고 싶은 것은 아닐까? 하나님께서 주신 원리는 맞다고 인정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나의 복잡다단한 일상을 모르신다고 증명하고 싶은 것은 아니었을까? 그래서 나는 옳고, 하나님은 틀렸다고 말하고 싶은게 아니었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7. 결국은 바리새인들과 같은 문제에 봉착한다. 누가 더 옳은가? 나인가? 하나님이신가? 하나님이시라면 그저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면 된다. 결혼의 계명에 대해 말씀하신 것 처럼 우리는 하나님께서 짝지어 주신 것을 나눌만한 권한이 없는 사람들이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순종이다. 

8.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에게 계명이 사람보다 중요하다고 말씀하시는 분이 결코 아니시다. 안식일 계명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존재하신다고 말씀하신 분이 예수님이 아니신가? 그렇다면 예수님이 우리의 어쩔 수 없는 상황의 이혼에 대해서도 결코 정죄하실 분이 아니고 우리를 이해하실 분임을 믿는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혼하지 않고 가정을 가능하면 지켜야겠지만 정말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서는 그 계명보다 더 크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이해해주실 것을 믿어야만 한다. 

9. 예수님의 말씀 앞에서 나의 옳음을 증명하려고 하지 말자. 한낱 먼지인 내가, 아무런 지혜도 능력도 없는 내가, 무엇을 근거로 하나님보다 나를 옳다 하는가? 하나님이 온 우주를 창조하실 때 내가 거기 있었는가? 아니다. 그러니 주님께서 맞다고 하시면 그게 맞는 것이다. 그리고 주님께서도 정죄하지 않으신 영혼들을 향해 계명을 들이대지 말자. 더 중요한 것은 항상 계명이 아니라 사람이다. 살리기 위한 삶을 살자. 

10.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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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23. 2. 23. 1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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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18:21-35 나의 악함을 직시할 때 용서할 수 있게 된다

1. 베드로는 예수님께 자신의 형제가 죄를 범하면 몇 번을 용서해줘야 하는지를 묻는다. 그리고 그는 의기양양하게 일곱 번이면 충분하지 않겠냐고 예수님께 묻는다. 

2. 왜냐하면 유대인의 랍비들의 가르침에 따르면 3번 까지를 용서해야만 했다. 용서의 한도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베드로는 유대인의 한도치의 두 배이며, 완전 수인 7번을 제시한다. 이는 베드로 자신이 유대인들이 세운 기준보다도 훨씬 더 관대한 사람임을 드러내려고 한 것 같다. 

3. 하지만 예수님의 대답은 우리의 생각과 베드로의 관대함을 훨씬 더 뛰어 넘는 수준이었고, 우리가 계속해서 용서해야 함을 이야기 하시면서 달란트 비유를 들어 설명해 주신다. 

4. 이 달란트 비유에서 우리 각 사람은 이미 만 달란트를 탕감받은 자이다. 우리의 엄청난 죄의 빚을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모두 탕감 받은 자라는 것이다. 그런데 만 달란트 빚을 탕감받은 사람은 자신에게 겨우 백 데나리온 빚진 사람도 탕감해주지 않고 오히려 그를 옥에 가두게 된다 (30절). 이게 바로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5. 결국은 내가 어떤 사람인지, 얼마나 큰 죄를 용서 받은 사람인지를 깨닫는 것이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핵심이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그저 용서하라고, 혹은 그게 율법이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우리가 용서해야 할 까닭은 우리가 이미 용서 받은 자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6. 우리는 더 큰 죄(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셔야만 사함을 받을 만큼의)도 용서 받았으면서 우리에게 작은 잘못을 저지른 사람도 용서 못해서는 되겠냐는 것이 오늘 비유의 핵심이다. 

7. 그리고 35절은 말한다.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그저 용서하는 수준이 아니라 “마음으로" 용서해야 한다. 이것은 우리의 마음 깊은 곳에서 용서하라는 뜻이다. 마음 속 깊은 곳에서의 적대감이 남아 있지만 말로만 하는 용서가 아니란 뜻이다.

8. 이러한 기준에서 비추어 보니 나는 아직도 제대로 용서하지 못한 사람들이 있다. 용서하려고 했지만 여전히 마음 깊은 곳에서 용서하고 싶지 않는 것들이 남아 있는 경우들이 있다. 하지만 내가 해야 할 일은 내가 일만 달란트를 탕감 받은 사람이고, 일백 데나리온을 빚진 자를 불쌍히 여겨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용서가 잘 안되는 이유는 반대로 생각하기 때문인 것 같다. 내가 하나님께 받은 용서가 일백 데나리온이고, 그가 나에게 진 빚이 일만 달란트 같기 때문이다. 

9. 나의 죄성을, 내가 얼마나 죄인인지를 모르기 때문에 그렇게 느껴지는 것이다. 결국 용서는 스스로에 대한 자아 정체성에서 부터 비롯된다. 나는 얼마나 죄인인가? 나는 얼마나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한 죄인인가? 나는 어느정도 크기의 용서를 받은 죄인인가? 내 죄와 내 악함을 더 직시하게 되기를 원한다. 그래서 다른 이들을 진정으로 용서할 수 있게 되기를 원한다. 묵상을 마치면서도 아직도 잘 안된다는 것을 느낀다. 주님께 은혜를 구한다. 

10.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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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23. 2. 16. 1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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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16:1-12 표적이 없어서가 아니라 내가 문제인 것이다

1.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은 예수님께 표적을 구한다. 하지만 그들이 구하는 표적은 진정 예수가 누구이신지를 구하기 위함이 아니라 그저 예수를 시험하여 넘어뜨리기 위함이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와서 예수를 시험하여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보이기를 청하니" (1절)

2. 우리가 무엇인가에 대해 표적을 구하는 이유는 아마도 정확히 분별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그러나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은 이미 예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는 답을 정해놓고 예수께 표적을 구하였다. 

3. 심지어 그들은 이미 칠병이어의 기적을 경험하지 않았는가? (마 15:32-39) 답을 정해놓고, 시험을 하기위해 물으니 기적을 보아도, 병자를 고쳐도 그들은 제대로 된 답을 얻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4.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보여주시기로 한 표적은 요나의 표적이었다. 요나의 표적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건으로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사흘 밤낮을 있었던 것 처럼 그리스도께서도 죽으시고 사흘 후에 부활하실 거란 이야기다. 

5. 예수님은 그들에게 결국 그 표적을 보여주신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믿지 않는다. 믿지 않기로 작정한 사람들, 자신들이 답을 정해놓은 사람들은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여도, 모든 악한 것과 약한 것을 고치셔도 그리고 심지어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서 죽어 모든 영혼들을 대속해도 믿지 않는다. 

6. 믿음이란 신비한 것이다. 그래서 믿음 또한 하나님의 선물인 것이다. 우리의 마음이 열리면 우리는 그 어떤 것도 믿을 수 있지만 우리의 마음이 닫혀 있으면 그 어떤 놀라운 기적을 보더라도 우리는 믿지 아니할 이유를 찾게 되는 것이다. 

7. 결국은 하나님 앞에서의 겸손함이다. 내가 아무런 가치가 없는 존재이고, 내가 얼마나 큰 죄인인지를 깨달을 때, 나의 힘으로 내 자신을 조금도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것을 절실하게 느낄 때, 우리는 마음이 겸손하여 하나님 만나길, 우리의 구원자를 만나길 소망한다. 하지만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처럼 나는 충분히 괜찮은 사람이고, 나는 충분히 나를 구원할만한 사람이라고 여기며 어디 한번 해봐라 라는 모습으로 그리스도를 볼 때에는 아무것도 보이지도 믿어지지도 않을 수 밖에 없다. 

8. 나는 오늘 어떤 부류의 모습으로 서 있는가? 하나님 앞에서 나의 존재를 정확하게 보며, 내가 나의 구원에 어떠한 것도 기여할 수 없다는 절망 속에서 영원한 소망이신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있는가? 아니면 나는 꽤 괜찮은 사람이고, 이정도면 충분하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있어도 없어도 괜찮은 존재로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가? 표적을 구하는게 중요한게 아니다. 표적은 이미 2000년 전에 십자가 위에서 다 보여졌다. 그리스도의 부활의 증인들이 자신의 생명을 걸고 그 부활을 증거하지 않았는가? 지금 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여전히 그리스도를 따르고 있지 않은가? 표적의 문제가 아니라 나의 문제이다. 표적을 구하려고 하였던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의 교훈을 삼가라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해야 한다 (12절). 

9. 표적이 아니라 나 자신을 점검하기 원한다. 나의 존재의 가벼움과 절망을 더 깊이 깨닫게 되기를 원한다. 그리하여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 Not i, but Christ를 경험하게 되기를 원한다. 

10.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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