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Thinking)/Meditation2023. 1. 31. 1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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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12:14-21 ‘자기애'를 넘어 사랑을 흘려보내는 자로

1. 오늘 본문에서는 두 부류의 사람이 있다. 첫 번째 부류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사랑하시지만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예수를 죽이는 죽이려는 자들, 즉 바리새인들이다.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까 의논하거늘" (14절) 이들은 받은 사랑과 상관없이 다른 이를 죽이려고 한다. 

2. 두 번째는 예수님이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온유하고 모든 이들을 품으시며 그들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아낌없이 내어 놓으시는 분이다. 예수님에 대한 이사야 선지자의 설명이다. “보라 내가 택한 종 곧 내 마음에 기뻐하는 바 내가 사랑하는 자로다" (18절 상반부) “그는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 아니하리니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상한 갈대를 꺽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 (19-20절). 

3.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의 행동의 결과가 왜 이리 다른가? 아마도 그 받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반응의 차이일 것이다. 사랑을 받았지만 그 사랑의 의미와 그 사랑의 실체를 모르기 때문에 그 사랑이 자기 안에만 머무는 사람과 (바리새인들) 자신이 받은 사랑이 어떠한 가치가 있는지를 알기 때문에 그 사랑이 흘러가는 사람의 차이이다.

4. 물이 한 곳에 머물면 썩듯이 하나님의 사랑도 우리 안에만 머물면 열매를 맺지 못하고 썩어버린다. 받은 사랑은 다른 이들에게 흘러갈 때에만 의미가 있는 것이다. 바리새인들이 왜 그렇게 예수께 분노하였는가? 

5. 그들이 가지고 있던 종교의 기득권이 하나님의 계명보다 더 컸기 때문이다. ‘자기애’가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보다도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율법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한다. 

6.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마 22:37-40)

7. 우리의 사랑은 ‘자기애’를 넘어서야 한다. 나를 사랑하는 것은 쉽고 때로는 교묘하다. 우리는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얼마든지 다른 사람에게 선행을 베풀 수도 있고,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을 위해 희생할 수도 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자기애로 인해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애와 이웃 사랑이 같아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8. 자기애와 이웃사랑이 같으려면 결국은 내가 받은 사랑이 얼마나 큰 사랑인지를 깨달아야 한다. 내가 사랑 받을 자격이 없었던 사람이었음을 정확하게 알아야 한다. 내가 얼마나 죄인인지를 정확하게 직시해야 한다. 죄인으로서의 자각이 크면 클 수록 은혜도 큰 법이다. 나는 하나님을 배반하고 자기애로 똘똘 뭉친 사람이었는데 이러한 나를 사랑해주셔서 지금의 내가 존재하지 않는가? 내가 받은 그 큰 사랑은 나의 삶을 통해 다른 이들을 향해 흘러가야만 한다. 바리새인들과 같이 사랑받았지만 ‘자기애’를 위해 다른 이들을 죽이려는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처럼 사랑받았기 때문에 다른 이들을 위해 사랑을 흘려 보낼 수 있는 사람으로 오늘을 살아가기 원한다. 

9.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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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Thinking)/Meditation2023. 1. 27. 1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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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10:5-15 복음의 우선순위 및 전략

1.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있는 이 시간에 말씀하신 것은 먼저 이스라엘의 잃은 양들에게 가라는 것이었다. “예수께서 이 열둘을 내보내시며 명하여 이르시되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오히려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5-6절)

2. 왜 이방인들을 비롯하여 모든 사람에게 동시에 가라고 하지 않았는가? 아마도 거리나 시간 등등의 여러가지 제한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기에 우선순위와 전략이 필요했다. 

3. 모든 일이 마찬가지 이겠지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도 우선순위와 전략이 필요하다. 예수님도 주먹구구식으로 하지 않았다. 모든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결국은 우리의 옆에 있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부터 시작해야 하는 것이다. 

4. 예수님의 다음 전략은 무엇을 전해야 할지를 제자들에게 정확하게 말씀하셨다. “가면서 전파하여 말하되 천국이 가까이 왔다 하고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며 뒤신을 쫓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 (7-8절)

5. 복음을 전해야 할 대상과 복음의 메시지가 분명하였기 때문에 제자들은 그저 그 말씀에 순종하면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무익한 종일 뿐이다. 우리가 하는 것은 그저 순종해야 하는 일 뿐이기 때문이다. 

6. 우리의 역할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대로, 보여주신대로 그저 순종하는 것 뿐이다. 물론 우리에게 이성을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의 시대적 배경과 문화 등을 충분하게 고려해야만 한다. 어떻게 전해야 복음을 듣는 자들의 마음에 복음이 깊이 들어갈지에 대해서 고민해야 할 것은 우리의 몫이다. 

7. 태국인들을 위해 어떻게 복음을 이야기하고, 어떻게 그들과 관계를 세워가야 할지에 대해서 계속해서 연구가 필요하다. 특히나 고등학생과 청소년의 경우에는 태국인도 아닌 내가 언어와 문화의 차이 뿐만 아니라 세대차이 까지를 고민하며 하는 것이 정말 쉽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8. 이번에 빌리버스 공동체와 함께 왓타텅 중고등학교의 학생들을 섬기며 복음의 핵심은 지키면서 복음을 전달하는 옷에 대해서 좀 더 고민해볼 수 있었다. 중고등학생들이 좋아하는 것들 (한국음식, 한국문화와 K-pop)을 통해 그들과 관계를 쌓아가며  친구가 되어 주고, 그들과 공동체를 형성하는 것에서 부터 복음을 전하는 것이 시작된다. 물론 이 단계에서는 복음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조바심을 버리고 그들과 음식을 나누고 식탁공동체를 형성하며 우리는 복음의 가장 큰 정신인 사랑을 나눠야만 한다. 

9. 깨어진 그들의 관계에, 외로움과 두려움을 다른 여러가지 것들로 채우고 있는 그들의 삶에 우리는 우리가 거저 받은 사랑을 나눠야만 한다. 조건없는, 대가를 바라지 않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그들에게 나누게 되면 그들은 우리에게 관심을 보이게 된다. 그렇게 관계를 쌓아가다가 때가 이르면 복음을 전하게 된다. 좀 더 연구가 필요하겠지만 복음은 급하지 않게 관계 속에서 전해야만 한다. 그래야만 그들이 우리의 식구로 자연스럽게 들어올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결국 전도는 사랑이다. 믿음, 소망, 사랑 중에 사랑이 제일이라고 바울도 이야기 하지 않았는가? 전도를 하기 이전에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는 자가 되기 원한다. 그들이 우리의 전도의 열매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그리스도의 사랑을 입은 자들이기 때문이다.

10.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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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Thinking)/Meditation2023. 1. 27. 1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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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10:34-42 매일 사랑의 우선순위를 다시 세우는 일, 성화

1. 34-37절에서는  누가 그리스도께 합당한 자인가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말씀하고 계신다. 예수님께 합당한 자는 사랑의 우선순위가 바르게 서 있는 사람이다. 즉, 부모님 보다도 자식들 보다도 그리스도를 더 사랑하는 자만이 예수님께 합당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부모님도 자식도 버리라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보다는 덜 사랑하라는 것이다.

2. 보통 이 구절을 읽으면 불편한 마음이 든다. 왜냐하면 예수님 때문에 가족들을 포기하라는 말로 들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경우는 극히 드물다. 실제의 삶에서는 예수님이냐 가족이냐를 선택해야 할 극단적인 상황이 평생에 몇 번 있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3. 그리고 보통 사람들의 사랑의 우선순위는 예수님과 가족을 비교할 수준까지 가지 않는다. 우리는 항상 나 자신을 가장 사랑하고, 내가 세상의 중심이며, 내가 하나님 처럼 되려고 하는 아담의 죄성의 모습을 그대로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즉 예수님보다 다른 어떤 것도 (심지어 자신 조차도) 더 사랑하지 말라는 것이다. 

4. 예수님께서는 우리 삶의 사랑의 우선순위를 바르게 세우길 원하셨다. 왜냐하면 그 사랑의 우선순위에 따라서 우리의 모든 행동과 사고방식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요즈음 용어로 생각한다면 일종의 프레임 혹은 패러다임인 셈이다. 프레임이 행동을 결정하게 된다. 나를 사랑하는 프레임을 가진 사람은 나 중심적으로 생각하고, 움직이고 행동하게 된다. 

5. 그러나 예수님을 가장 사랑하는 프레임을 가진 사람만이 자기 십자가도 질 수 있고 (38절)  (당연하지 않은가? 나를 가장 사랑하는데 어떻게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겠는가?), 자기의 목숨도 아까워하지 않을 수 있으며 (39절), 다른 이들을 아낌없이 대접할 수도 있다 (40-42절). 그러나 반대로 사랑의 우선순위가 바르게 세워지지 않은 사람은 예수님께 합당하게 살아갈 수가 없다. 

6. 결국 이 사랑의 우선순위의 핵심은 ‘not I’ 인 것이다. 하지만 이 ‘not I’ 만 생각하게 된다면 이것은 불교의 자기비움이나 고행을 통해 자신의 욕구를 억제하려는 노력과 별반 다를게 없다. 우리는 ‘but Christ’를 목적으로  ‘not I’를 하게 되는 것이다. 내 사랑의 우선순위가 그리스도께 있을 때에만 ‘but Christ’가 가능하게 된다. 

7. 우리의 자기 부인은 ‘자기 부인'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그리스도로 채움에 있는 것이다. 나 자신 뿐만 아니라 세상 그 어느 누구도 그리스도 보다 더 사랑할 수 없는 이유는 그리스도 안에 모든 아름다운 것들이 있기 때문이다. 온 우주를 창조하신 거룩한 하나님께서 우리와 동일한 모습으로 오셔서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 사건이, 즉 복음이 우리에게 있기 때문에 우리는 ‘not I, but Christ’의 삶을 소망하고 살아가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8. 오늘 나의 사랑의 우선순위는 바로 서 있는가? 그 우선순위 때문에 나는 오늘도 자기 부인을 하며,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고 있는가? 내 목숨도 아깝지 않으며, 다른 이들을 전적으로 대접하고 있는가? 돌아보면 부끄럽기 그지 없는 삶이다. 사랑의 우선순위는 여전히 나에게 향해 있다. 항상 내가 제일 중요하고, 나를 가장 사랑한다. 아내를 사랑하고, 아이들을 사랑한다 하지만 그 중심에는 ‘자기애'가 가득 차 있다. 나의 삶은 결코 주께 합당한 자의 삶이 아니다. 

9. 그럼에도 감사한 것은 이러한 ‘자기애'로 가득찬 나와 같은 사람을 주님께서 귀하다 하시고, 주님의 신부라 말씀해 주시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복음 때문이다. 내 평생의 삶에서 이 사랑의 우선순위에 대한 싸움이 계속 일어날 것이고 거의 대부분은 그 싸움에서 이기지 못할지도 모른다 (아니 확실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사랑하셔서 자기 몸을 버리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와 함께 계시기에 오늘도 다시 일어서서 이 싸움을 다시 싸워 나간다. 그리고 이러한 여정이 성화일 것이다. 내 삶에서 조금이라도 주께 합당한 자가 되기를 소망한다. 매일 부족해도 다시 복음의 능력으로 일어설 수 있는 자가 되길 원한다. 

10.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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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23. 1. 17. 1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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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8:14-22 부차적인 것들이 아니라 하나님 한 분 만으로 만족하기 원합니다

1.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아가는 동안에는 계속 우리가 해야 하거나 감당해야 할 일들이 끝이 없다. 그 중에서는 우리가 생각하기에 중요하다고 느껴지는 일들이 있다. 

2. 그러한 일들은 마땅히 주님께 향해 있어야 하는 우리의 시선들을 빼앗아 가기도 하고, 우리로 하여금 그 일에 몰입이 되어 다른 일들을 할 수 없게도 만든다. 그것은 먹고 살기 위한 일일 수도 있고, 내가 사랑하는 취미나 그 무엇인가일 수도 있다. 

3. 예수님의 제자 중에 한 사람이 예수께 묻는다. “주여 내가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21절 하반부) 예수님의 대답은 이렇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니라" (22절).

4. 하나님께서는 십계명을 통해 분명히 우리에게 부모님을 공경하라고 하셨다 (출 20:12, 신 5:16). 그런데 왜 오늘 본문에서는 그것과 결이 다른 이야기를 하시는 것일까? 사실 다른 결의 이야기라기 보다는 우선순위를 말씀하시는 것이라고 이해하는 편이 좀 더 정확해 보인다. 

5. 눅 14:26에서도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라고 할 때 ‘미워하면'이라는 단어는 싫어 하라는 뜻이 아니라 비교급이다. ‘덜 사랑하지 아니하면’ 이라고 해석해야 좀 더 옳다. 즉 하나님 보다 가족이나 자기 목숨을 더 사랑한다면 문제가 된다는 것이다. 

6. 지금 무엇을 가장 사랑하고 있는가? 하나님인가? 아니면 그 외에 다른 어떤 좋은 것들인가? 지금 누구를 따라가고 있는가? 예수님인가? 아니면 그 외에 다른 어떤 좋은 것들인가? 예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너는 나를 따르라"

7. 중요해 보이고, 좋아 보이는 그 무엇인가가 아니라 예수님 자신을 따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온 우주에서 내 삶에 가장 중요한 분이시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면 우리가 예수님을 따라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8. 작년 마지막 두 달 동안 여러가지 이유로 다섯 곳에서 후원을 중단하겠다는 연락을 받았다. 선교지에서의 사역과 또 삶과 직접적으로 연결이 되어 있기에 그러한 연락을 받는 것이 참으로 마음이 어려웠다. 이걸 어떻게 해결해야 하나 라는 생각에 하나님에 대한 쓴 마음도 들었다.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사역에 열매가 있고, 필요가 점점 늘어나는데 후원은 늘어나기는 커녕 오히려 줄어들고 있는 것이다. 여러가지로 어려운 마음을 붙들고 기도하며 지내고 있는데 지난 주일에 한 친구의 연락을 받았다. 그간 계속 보내야지 하고 있었지만 순종하지 않았는데 주일 말씀을 들으면서 마음에 찔림이 있어서 헌금을 좀 보냈다는 것이었다. 어려운 중에 있는 친구의 후원을 받으면서 여러가지 생각이 들었다. 

9. 우리 가정과 수쿰빛 언약교회를 위해 후원하시는 분들이 다들 이렇게 어려운 중에도 불구하고 후원하고 계신데 나는 그 한 분, 한 분의 헌신과 주님을 따르려는 마음을 보기 보다는 결과만 보고 있었구나 라는 생각이 들어서 회개를 하게 되었다. 그리고 또한 ‘주님께서 이 상황을 알고 인도하고 계시구나’ 라는 마음이 들어서 감사하게 되었다. 상황은 변하지 않았지만 내 마음과 우선순위는 변하게 된 것이다. 내가 지금 함께 걸어가고 있는 분이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모든 것을 아시고, 모든 좋은 것을 더하시는 분이 아니신가? 그런데 나는 지금 무엇을 더 소망하고 바라고 있는가? 채우시는 주님인가? 아니면 주님께서 채우실 재정인가? 나의 우선순위가 조정되기 원한다. 선물 그 자체가 아니라 선물을 주시는 분께 나의 시선을 고정하기 원한다. 좋아 보이고, 중요해 보이는 것들은 부차적인 것일 뿐이다. 하나님 한 분으로 인해 만족하기 원한다. 

10.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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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Thinking)/Meditation2023. 1. 12. 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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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6:1-18 하나님의 인정만으로 충분하다

1. 오늘 본문에서의 핵심은 1절이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하느니라" (1절)

2. 이것을 다시 이야기 하면 하나님께 상을 받으려면 우리의 의를 사람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만 보여드리면 된다는 것이다. 물론 하나님은 우리의 은밀한 것을 아시기 때문에 보여드릴 필요도 없겠지만 말이다.

3. 구제할 때도 외식하지 말라는 것이다. 2절에서 나팔을 분다는 의미는 자신의 구제할 때 나팔을 불어서 모든 사람의 이목을 집중시킨 후에 구제를 하는 것으로 오직 자신의 의를 드러내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로 나팔을 분다면 낯 부끄럽겠지만 우리는 교묘하고 은밀한 방식으로 나팔을 불며 내가 한 일을 드러내는 재능을 가지고 있다. 

4. 기도할 때도 외식하지 말아야 한다. 사람들에게 보이기 쉬운 자리에서 거룩해보이는 목소리로 손을 들고 기도하지 말고, 골방에서 하나님께만 기도하라는 것이다. 기도는 사람이 들으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아뢰는 것이다. 

5. 금식도 마찬가지이다. 얼굴에 “나 금식하고 있어요" 라고 힘든 표정을 지으며 금식하지 말고, 오히려 더 밝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금식하여 오직 하나님만이 알도록 하라는 것이다. 

6. 결국 핵심은 나의 모든 신앙의 행위가, 선함을 행하는 동기가 누구를 위한 것이냐는 것이다. 나 자신인가? 아니면 하나님인가? 내가 얼마나 좋은 사람인지를, 내가 얼마나 영적인 사람인지를 교묘하게 증명하려고 하는 모든 시도는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우상숭배일 뿐이다. 

7. 선교사로, 사역자로 살아가면서 외식의 문제는 사실 피하기 힘든 문제이다. 나는 그정도 거룩하거나 영적인 사람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때로는 나도 모르게 거룩한 척을 하거나 영적인 척을 해야 할 때가 있다. 그런데 문제는 거룩한 척을 하게 되면 실제의 내 모습과 상관없이 내가 정말로 그런 사람이라고 오해하게 되는 것이다. 사람들의 인정을 구한 것이다. 

8. 나를 증명하려는, 나의 의를 증명하려는 모든 시도는 우상숭배일 뿐이다. 이미 이 땅에서 상을 다 받았기 때문에 하늘의 아버지로 부터의 상은 전혀 없다. 그렇다면 나는 누구의 상을 소망할 것인가? 헛된 인정으로부터 벗어나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인정을 구해야 한다. SNS가 지배하는 세상 속에서는 타인의 인정을 구하는 것이 너무 쉽다. 천천히 오는 하나님의 인정을 구하기 보다는 나를 자랑하는 듯한 글에 즉시로 달리는 ‘좋아요’ 숫자로 일희일비 하기 얼마나 쉬운가? 

9. 나를 드러내려는 모든 시도들을 멈추기를 원한다. 나 자신만 아는 교묘하고 은밀한 방식의 자기 증명의 시도를 버리고, 온전히 하나님께로만 집중하자. 하나님께서 이러한 마음을 아실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마음을 기뻐하실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런 마음에 주님의 상을 주실 것이다. 

10.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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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Thinking)/Meditation2023. 1. 11. 1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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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5:33-48 불편한 삶에 대한 소망

1.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의 삶은 달라야 한다. 그러나 다르다는 것이 그저 선을 행하는 정도의 삶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온전함'을 이뤄내는 인생이어야만 한다. 그런데 이 온전함은 우리에게 불편함을 초래한다. 

2. 33-37절에서는 맹세하지 말 것을 이야기 한다. 왜냐하면 맹세라는 것은 우리가 끝까지 지켜야 하는 것인데 우리에게는 그럴 능력이 없다는 것이다. 맹세를 지킬 수 있을거라 확신하지만 우리는 우리의 머리카락 하나도 검게 할 수 없는 피조물일 뿐이라는 것이다. 

3.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전과는 다른 법을 요청하셨다. 이전 법은 함부라비 법으로 대표되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였다. 복수가 당연하고, 내가 받은 만큼 돌려주는게 마땅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사랑의 법'을 말씀하셨다. 

4. 그리고 원수조차도 사랑하라고 말씀하신다.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43-44절). 이 얼마나 마음이 불편한가? 우리에게 편안한 것은 원수를 미워하는 것이지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5. 마지막으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온전하심을 닮으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48절). 우리와 같은 악한 죄인들에게 이러한 모든 일이 어떻게 가능한 것인가? 

6. 가능함 여부를 떠나서 우리가 반드시 이렇게 살아가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그렇게 우리를 사랑하고, 선대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45절 하반부) 하나님은 언제나 의인과 악인에게 동일하게 공평하시다. 

7. 그리고 그 공평함의 극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그 누구든지, 그가 어떠한 사람이든지 관계없이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에게 어떠한 것도 요구하지 않는다. 그저 믿음 만을 요구한다. 

8. 그러나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이후의 삶에는 그저 선을 행하는 정도의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온전함을 요구하신다는 것이다. 우리의 구원과 구원 받은 이후의 삶을 동일 선상에 두고 생각해서는 예수님을 오해하게 된다. 구원받은 이후의 삶은 우리의 구원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즉 막 살아도 진정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의 구원이 취소되거나 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에게 온전함(그리스도의 삶을 닮아갈 것)을 요구하셨다. 

9. 소금과 빛의 사명을 우리에게 요구하신 것이다. 한국 기독교가 신뢰를 잃어가고, 소금과 빛의 사명을 잃어가는 이유는 바로 이 구원과 구원 이후의 삶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오해했기 때문이다. 그저 구원만 받으면 모든 것이 오케이, 값싼 은혜와 값싼 회개를 끊임없이 생산해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오늘 나의 삶은 어떠한가? 하나님의 온전하심을 추구하고 있는가? 아니면 나 또한 값싼 은혜와 회계 속에서 편안함만을 누리고 있는가? 신앙은 편할 수가 없다. 신앙을 가진 우리의 삶은 불편해야만 한다. 오늘도 값비싼 은혜와 값비싼 회계 속에서 불편하게 살아가기를 소망한다. 

10.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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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5:13-20 바리새인들의 의보다 더 나은 의, 사랑

1. 소금과 등불은 그 고유의 역할이 있다. 어떤 것도 대신 할 수 없는 유니크함이 특징이다. 하지만 그 유니크함을 잃어버린다면 아무 짝에도 쓸모 없게 되는 것이 소금과 등불이다.

2. 13절은 이것을 잘 말하고 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3. 이 이야기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하는 우리 기독교인들 에게도 유니크한 고유의 역할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역할은 다른 종교인들이 대신할 수 없는 일이다. 그 일은 우리의 착한 행실을 통해 하나님을 보게, 알게, 영광을 돌리게 하려는 것이다. 

4.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16절). 세례 요한의 회개의 메시지에서도 우리의 변화된 삶을 강조하였다면 예수님께서도 마찬가지로 우리의 변화된 삶을 통해 세상이 하나님 아버지를 보게 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5. 예수님은 한 발짝 더 나아가셨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20절)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그 시대에서 가장 율법을 잘 지키는 사람들이었다. 외식하는 모습으로 성경에서 자주 묘사되지만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열심은 대단했다. 

6. 그러한 그들의 의보다 더 낫지 못하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말씀하셨는데 이는 아마도 예수님께서 율법에 대한 동기와 율법을 지키는 행위 모두를 말씀하신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율법을 지키는 행위는 있었지만 율법의 정신, 즉 사랑은 없었기 때문이다. 

7. 그들은 사람을 구하는 행위도 안식일에는 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율법이 사람보다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율법의 정신은 율법 그 자체가 아니라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 때문이다. 사랑이 없는 율법은 건조할 뿐이고, 내가 모든 율법을 지킨다고 하더라도 사랑없는 율법은 사람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죽이기 때문인 것이다. 

8. 우리 기독교인들의 삶은 이 두 가지가 다 있어야 한다. 바리새인들의 의보다 더 나아야 한다. 즉 율법의 정신도 지키고, 율법의 행위도 지켜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오신 이후에는 율법의 행위는 사랑의 행위로 다 대치가 되었다. 더 이상 구약의 율법대로 무엇은 먹고 무엇은 먹지 않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은 오직 사랑이다. 세상이 기독교인들에게 바라는 것도 정죄가 아닌 “사랑"이 아닐까? 

9. 거룩하게 살려고 애쓰되, 우리의 거룩의 기준으로 세상을 정죄하지 않는 것, 오직 그리스도의 사랑으로만 세상을 섬기는 것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의 보다 더 나은 삶이 아닐까? 이러한 우리의 삶을 보았을 때 세상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을까? 우리의 거룩도, 사랑도 놓치지 않는 것이 복음을 가진 자의 삶이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나의 실상은 너무나도 추악한 죄인일 뿐이다. 거룩도 사랑도 없다. 은혜가 필요하다. 은혜로 말미암아 거룩도 사랑도 붙들고 살아갈 수 있는 2023년이 되기를 원한다.

10.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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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3:1-12 값비싼 회개

1. 세례 요한의 메세지는 짧고 간결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2절)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우리는 우리의 죄들과 반드시 결별해야만 했다.

2. 하지만 세례 요한의 회개의 강권은 지금 우리 시대의 기독교가 보편적으로 가지고 있는 ‘값싼 회개’가 아니었다. 희개했으니까 끝이 아니라 그가 말하는 회개는 이전 삶과의 단절 및 새로운 삶으로의 나아감 또한 요구하고 있다.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8절) 

3. 좀 강하게 이야기 한다면 회개의 합당한 열매가 없는 삶은 진정한 회개를 한 삶이 아니고 천국에도 들어갈 수 없는 삶이다. 어떤 사람이 회개했다면 그 회개가 진정한 회개였는지 아니었는지는 그 삶이 말해주게 된다는 것이다.

4. 우리가 잘 아는 삭개오의 삶을 보면 그는 회개한 이후 자신의 죄에 대해서 진정으로 돌이켰다.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눅 19:8)

5. 그는 자신의 부정적으로 모은 모든 소유를 잃게 될 지라도, 그래서 그가 정말 가난하게 살아갈 수 밖에 없을지라도 예수님을 선택하기로 한 것이다. 그의 회개를 예수님께서는 진정으로 칭찬하셨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눅 19:9)

6. 진정한 회개는 반드시 값비싼 삶의 변화를 동반해야만 한다. 하지만 지금 우리 시대의 회개는 너무 쉽다. 내가 회개하면 끝이다. 내가 하나님께 회개하면 그 사람에게 사과하지 않았더라도, 삶의 변화가 없었더라도 나는 회개하고 구원받은 백성이 되는 것이다. 무례한 기독교를 만들어낸 것이다.

7. 하지만 세례요한의 메시지는 그런 값싼 회개를 거부한다. 값싼 회개를 하는 사람들에게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부른다. 지금 들어도 쎄게 느껴지는 이 말은 그 시대의 쌍시옷의 욕이었을 것이다. 나의 회개는 이 기준에 비추어서 어떠한가?

8. 2023년에 내 삶에 회개에 합당한 열매가 맺어지길 원한다. 입으로만 회개하고 삶의 변화가 없는 값싼 회개가 아니라 내가 손해를 볼지라도, 혹 내가 어려움을 당하게 되더라도 진정한 회개가 내 삶에 있는 한 해가 되기를 원한다. 그리하여 하나님과 더 깊은 관계로 들어갈 수 있는 자가 되기를 원한다. 

9.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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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2:13-23 죽음을 목적으로 사는 삶은 사랑하는 삶이다

1. 우리를 위해 오신 임마누엘 하나님은 태어난 이후에도 많은 어려움들을 겪으셨다. 세상의 왕들은 진정한 왕으로 오신 아기 예수님을 미워했다. 

2. 하지만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오신 아기 예수님을 하나님께서는 보호하여 주셨다. 주의 사자를 통해 애굽으로 피하게 하셨다 (13절). 아기 예수를 구하셨지만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 안에 있는 모든 사내아이들이 죽게 되었다. 

3. 이 모든 사내아이들이 죽었을 때 하나님은 어떤 마음이셨을까? 죄 없는 생명들의 죽음이 너무나도 고통스럽지 않으셨을까? 하지만 더 고통스러운 사실은 지금은 생명을 구한 이 아기 예수 그리스도가 죽음을 목적으로 태어났다는 사실일 것이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아이가 더 큰 고통 속에서 죽어야 함을 알고 계셨을 것이다. 그리고 그 때에는 더 이상 구해줄 수 없었다는 사실 때문에 도 고통스러우셨을 것이다. 

4. 하나님께서는 예수께서 고난당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기 이전부터 그 고통을 경험하고 계셨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단지 예수님 때문 만이었을 것일까?

5. 하나님을 배반하고 돌아선 모든 인류로 인해 하나님은 계속 고통 가운데 계셨을 것이다. 그리고 모든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아브라함을 선택하셨고, 이스라엘을 선택하셨고, 수많은 선지자와 사사들, 왕들을 세우면서 기다리셨었다. 

6. 이스라엘은 그런 하나님을 끊임없이 배반했다. 누가복음의 포도원 비유와 같이 포도원 사람들을 위해 결국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셨다. 그 마지막에 자신의 아들이 십자가에 달리게 될 것을 아시면서도 말이다. 

7. 임마누엘은 결국 사랑이다.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와 함께 계시는 것이다. 사랑하기 때문에 자신의 아들을 내어주시는 것이다. 사랑하기 때문에 자신의 아들을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는 것이다.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에…

8. 죽음을 목적으로 사는 것은 결국 사랑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도 사랑하는 것이다. 나를 사랑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나를 미워하고 죽이려드는 그 사람들도 사랑하는 것이 사랑이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임마누엘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신 사랑이다. 그런데 내 안에는 그러한 사랑이 없다. 내 안에는 그러한 사랑을 할 힘도 없다. 

9. 결국은 그 사랑을 먼저 충분히 누리는 것이 필요하다. 사랑을 충분히 누리는 정도가 아니라 그 사랑 안에서 흠뻑 젖어서 흘러 넘칠 정도가 되어야 한다. 그래야 사랑할 수 있다. 올 한해 사랑하는 자로 살아가기 원한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 뿐만 아니라 나에게 적대적인 사람들까지도 품을 수 있는 2023년이 되기 원한다. 그렇게 본을 보여주신대로 사랑하자. 

10.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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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1:18-25 임마누엘 그리고 샬롬 

1.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인간은 땅위에 살고 있다는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생각이었다. 즉 하나님과 우리는 멀리 떨어져 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2. 태초부터 하나님은 늘 우리와 함께 계셨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것을 느끼지 못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에게 임재의 상징으로 언약궤를 주셨고, 장막을 주셨다. 

3. 그 장막은 성전으로 발전했고, 화려한 솔로몬 성전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신다는 큰 상징이었다. 그러나 언약궤와 그 성전은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과 늘 동행한다는 마음보다도 특정한 공간과 시간에 하나님께서 임재하신다는 생각을 가지도록 만들었다.

4. 그런데 하나님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 이 땅으로 오셨다 (22절).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었다. 하나님은 하늘에만 계신 분이 아니라 이제 인간의 몸으로 친히 우리와 함께 하기 위해서 이 땅으로 오신 하나님이셨다. 

5. 임마누엘의 신앙은 우리의 삶을 바꾸기에 충분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더 이상 저 하늘 너머에 계신 먼 하나님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분은 우리의 삶 전체를 직접 경험하시고, 우리의 모든 연약함을 체휼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6. 임마누엘의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연약함을 체휼하시고 이해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임마누엘의 하나님은 우리의 인생의 모든 부분을 함께 하신 분이시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모든 것을 예수님께 아뢸 수 있고,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아픔과 연약함을 공감하시게 된다. 

7.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23절) 얼마나 힘이 되는 말씀인가? 얼마나 격려와 위로가 되는 말씀인가? 나의 연약함에도 죄악됨에도 불구하고 그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니 얼마나 감사한 말씀인가? 그리고 그 분이 나의 모든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지 않은가?

8. 올 한해를 임마누엘의 하나님과 동행하고 싶다. 잘하고 있는 부분도, 잘하지 못하고 있는 부분도 그 분 앞에 꺼내어 놓고, 그 분의 도우심을 구하고 싶다. 늘 나와 동행하시는 그 하나님과 더 깊은 교제를 가지고 싶다. 그 하나님을 더 알아감으로 인해 사랑을 더 배우고, 더 사랑하고 싶다. 하나님께서 어떤 특정한 공간과 시간이 아니라 모든 장소, 모든 시간 속에서 나와 함께 하심을 잊지 않고 살아가고 싶다. 임마누엘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되시는 2023년을 살아내고 싶다. 예수님이 계셨다면 이 상황에서 어떻게 하셨을지를 계속 질문하면서 올 한해를 걸어가기 원한다. 

9. 오늘도 샬롬


*2022년 한 해 동안 저희 가정과 수쿰빛 언약교회를 후원해주시고, 함께 걸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2023년에도 모든 분들이 임마누엘 하나님과 늘 동행하시길 기도하고, 하나님께서 더 좋은 것들로 채워주시길 기도 드립니다. 샬롬과 임마누엘이 함께 하시는 2023년 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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