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Thinking)/Meditation2024. 5. 20. 2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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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 10:1-17 절대 선, 절대 진리이신 하나님

1. 솔로몬의 잠언이다. 솔로몬은 오늘 본문에서 두 가지 다른 타입의 인생을 보여준다. 그것을 1절에서는 지혜로운 아들과 미련한 아들로 표현한다. “솔로몬의 잠언이라 지혜로운 아들은 아비를 기쁘게 하거니와 미련한 아들은 어미의 근심이니라" (1절).

2. 이 지혜로운 아들은 본문을 살펴보면 계속 의인, 손이 부지런한 자, 마음이 지혜로운 자, 바른 길로 행하는 자, 생명의 샘, 명철한 자, 훈계를 지키는 자 등으로 절이 바뀌면서 계속 다른 표현으로 나타난다. 반대로 미련한 아들은 악인, 손을 게으르게 놀리는 자, 추수 때에 자는 자, 입이 미련한 자, 독, 미움, 징계를 버리는 자 등으로 마찬가지로 표현되고 있다. 

3. 결국 지혜로운 아들은 바른 길로 행하는 자이다. 지혜로운 아들은 길이 바르다는 것을 자신이 정하지 않는 사람이다. 즉, 바른 길에 대해서 아비에게, 어미에게, 그리고 하나님으로 부터 듣고 그 들은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이 지혜로운 아들인 것이다. 

4. 포스트 모더니즘 시대의 특징은 내가 결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모든 사람의 기준이 다르기 때문에 각자의 눈에 아름다운 것이 다르다. 그렇기 때문에 나의 미의 기준을 다른 사람에게 적용하여 강제할 수 없다는 것이다. 물론 개인의 개성과 취향을 존중하는 것은 포스트 모더니즘 교육을 받은 나로써도 나쁘지 않게 느껴진다. 

5. 그러나 바른 것에 대해 각자 기준을 정하는 것은 이제 무엇이 바른 것인지, 무엇이 악한 것인지를 구분할 수 없도록 만든다. 그리고 결정적인 문제는 내가 그 바름을 정할 수 있는 지혜도, 지식도 없다는 것이다. 내 마음을 따라서 행하다 보면 나의 이기심을 만나게 되고, 자기 중심성에 빠지며, 언제나 나를 남보다 사랑함을 발견하게 된다. 

6. 그러기에 우리의 바름의 기준은 나에게서 나와서는 안된다. 홀로 의로우신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야만 하는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기준이 없다면 손이 게으른 것이, 추수 때에 자는 것이, 다른 사람들에게 독을 머금은 말을 하는 것이 무슨 문제가 되겠는가? 내가 괜찮다는데, 내가 옳다는데 말이다. 그래서 오늘 솔로몬이 말하는 지혜로운 아들이 되려면, 바른 인생을 살아가려면 우리는 하나님을 알고, 그 분의 말씀에서 그 ‘바름'을 찾아야 하는 것이다.

7. 특별한 일이 없다면 누구나 지혜로운 아들이 되고 싶으 럯이고, 바른 길로 행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싶을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하나님을 만나고 그 분의 말씀을 읽어야 한다. 절대적인 진리가 없다면 모든 것이 상대적이 되고 만다. 다 상대적이라면 그것이 죄라고 무슨 기준과 근거로 말하겠는가? 하나님이 없다면 이 모든 우주는 약육강식이 당연시 여기게 되고, 고아와 과부는 어쩔 수 없이 스스로 살아내야 하며, 약자를 배려할 필요가 없는 곳이 되어 버리고 만다.

8. 그러기에 절대 선, 절대 진리이신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생각하지 않고서는 우리는 결코 지혜로운 아들이 되어 바른 길로 걸어갈 수 없다. 지혜로운 자, 명철한 자가 되고 싶다면 그 하나님을 더 깊이 만나고, 그 하나님의 진리를 더 굳게 붙들어야 한다. 훈계를 지키는 자가 되려면 그 훈계를 진리로 믿어야 한다. 지켜도 되고, 안지켜도 되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는 것이다. 

9. 하나님의 선하심과 진리에 대한 확신과 소망을 가지고 있는가? 오늘 나는 참 진리이신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있는가? 지혜로운 아들로 살아가길 원한다. 바른 길로 행하는 아들이 되기 원한다. 사랑하며, 생명을 살리고, 고아와 과부를 돕는 자가 되기 원한다. 어떠한 말씀도 내 안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렇게 살아가라고 하신 것이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살아가기 원한다. 부족하여도, 연약하여도 순종하기 원한다. 

10. 오늘도 샬롬 

*5월 기도편지를 보내드린 것 처럼 저희 가정은 6월 12일에 한국으로 돌아가서 7월 중순부터 안식년을 시작하게 됩니다. 케어그룹과 성도들 심방, 1:1 성경공부 등 한국으로 돌아갈 때까지 계속 해야 하는 일들이 아직 남아 있긴 하지만 마지막 설교도 했고, 목양팀과의 마지막 식사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모임들을 통해 저희 가정의 3기 사역을 마무리를 하면서 형제, 자매들의 피드백을 듣게 되는데, 정말로 많은 감사와 사랑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태국의 형제, 자매들과 태국에서 팀과 교회로 사역을 하였지만 이 모든 시간동안 함께 기도하며 동역해주셨던 한국의 팀 멤버인 여러분들이 아니었다면 아마 지금까지 이런 모습으로 섬기고 있지 못했을 것입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리고, 또 저희 가정의 안식년과 다음 사역 준비를 위해서도 계속 기도와 동역을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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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Thinking)/Meditation2024. 5. 14. 0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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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 13:1-16 Stay hungry

 
  1. 에브라임의 범죄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그들의 범죄는 자신을 높이는 범죄였다. 1절 중반부를 보면 “그가 이스라엘 중에서 자기를 높이더니 바알로 말미암아 범죄하여 망하였거늘" 에브라임은 자신을 높였다. 자신을 높인다는 것은 비교하는 것을 통해 다른 사람들보다 상대적으로 높아지려고 했다는 것이다. 
  2.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 스스로를 다른 사람들과 비교한다. 처음에는 좋은 마음으로 시작 하더라도, 나중에는 결국 비교를 통해 내가 높아지든지, 아님 그(녀)가 높아지든지 하여 마음이 높아지거나 혹은 어려워진다. 비교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나 자신을 내 모습 이대로 못 보게 만드는 큰 죄이다. 

  3. 에브라임은 비교를 하여 높아진 이후에는 이제 자신의 우상을 만든다. “이제도 그들은 더욱 범죄하여 그 은으로 자기를 위하여 우상을 부어 만들되 자기의 정교함을 따라 우상을 만들었으며" (2절 전반부) 자신이 비교를 통해 우위를 점하고, 자신이 높아지고 나서는 이제 그러한 자신을 지키고 보호해 줄 우상이 필요해진 것이다. 올라갔기 때문에 떨어질 것이 두렵기 때문일 것이다. 올라간 그 자리를 지켜내야 하기 때문이다. 우상은 우리의 두려움을 먹고 사는 존재이다. 

  4. 비교는 두려움을 낳고, 두려움은 우상을 만들어낸다. 비교와 우상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필요하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그러나 애굽 땅에 있을 때부터 나는 네 하나님 여호와라 나 밖에 네가 다른 신을 알지 말 것이라 나 외에는 구원자가 없느니라" (4절).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하나님을 만날 때에 우리는 그제서야 비교를 멈추고, 우상을 버리게 된다. 

  5. 온 우주를 창조하시고, 그 모든 것들을 운행하시는 분을 만날 때 우리는 우리의 두려움에서 벗어나게 된다. 그리고 그 하나님께서 나를 내 모습 그대로 사랑해주심을 깨닫게 될 때에야 비교를 멈추게 된다. 그리스도를 만나고 경험하게 될 때에만 우리는 타인과의 비교를 멈추고, 그 분의 아름다우심으로 인해 우상들을 미워할 수 있게 된다.

  6. 이 모든 죄의 시작은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이다. 하나님 보다 내가 높아지려고 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뿐이겠는가? 나는 어떠한가? 내가 똑똑하고 잘났다고 믿기 때문에(실제와 다르더라도) 하나님께 묻지 않는다. 그래서 일이 잘 되면 내가 잘나서, 내가 애썼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조금만 일이 잘 안풀리면 하나님을 원망한다. 잘되면 내 덕, 안되면 하나님 원망을 한다. 

  7. 하나님은 우리의 상황을 이렇게 진단하신다. “그들이 먹여 준 대로 배가 불렀고 배가 부르니 그들의 마음이 교만하여 이로 말미암아 나를 잊었느니라" (6절) 배가 부름이 나를 망하게 한다. 영적인, 육적인 배부름이 나로 하여금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나의 배를 의지하게 만든다. 나의 배를 의지함이 나를 교만하게 만든다. 그리고 나의 교만함은 결국 하나님을 잊어버리게 만든다. 

  8. 하나님의 에브라임을 향한 이 진단이 나를 돌아보게 만든다. 혹시 지금 나는 배가 부르지 않은가? 영적, 육적으로 너무 배부르게 먹고 있진 않은가? 배가 불러서 묻지도 않고 듣지도 않고 있지는 않은가? 나의 배부름이 영적인 나태와 교만으로 가고 있지는 않은가? 다시 말씀 앞으로 돌아가 그 분의 말씀을 듣고, 말씀 안에서 내 자신을 점검해야 한다. 특별한 때에만 무슨 일이 있을 때에만 할 것이 아니라 상시점검이 필요하다. 특히나 사역자로서 나를 더 엄격해 보아야 한다. 아내가 가끔 지적하는대로 나는 나에게 관대하고 다른 사람에게 엄할 때가 있다. 반대가 되어야 한다. 상시점검을 통해 나에게 엄격하고 다른 사람에게 관대한 사람이 되길 원한다. 

  9. 스티브 잡스의 스탠포드 졸업식 연설의 한 마디가 떠오른다. “Stay hungry” 지금 이 순간에게 나에게 필요한 말이다. 좀 더 절제하고, 좀 더 점검하자. 그리고 날마다 하나님 말씀 앞에 서자. 그게 영과 육이 사는 길이다. 

  10.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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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 2:14-3:5 ‘내가' 하겠다

1. 호세아 2장의 후반부는 고멜로 상징되는 이스라엘, 즉 신실한 남편이신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과 이세벨에게로 달려가 음란을 저지르는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이다. 

2. 2:14부터 23절까지의 모든 주어는 ‘내가'이다. 너희들이 나(하나님)를 버리더라도, 다른 신들을 찾아갈지라도, 너희들이 얼마나 망가지고 얼마나 엉망이 되더라도 ‘내가' 이 모든 관계와 문제들을 해결할 것이다 라는 하나님의 의지와 사랑이 담겨 있다. 

3. 16-17절이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 날에 네가 나를 내 남편이라 일컫고 다시는 내 바알이라 일컫지 아니하리라 내가 바알들의 이름을 그의 입에서 제거하여 다시는 그의 이름을 기억하여 부르는 일이 없게 하리라" 19-20절이다. “내가 네게 장가 들어 영원히 살되 공의와 정의와 은총과 긍휼히 여김으로 네게 장가 들며 진실함으로 네게 장가 들리니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

4. 어느 구절도 너희가 착하게 살면, 너희가 율법을 지키면, 저희가 무엇 무엇을 하면 이라는 조건이 붙지 않는다. 모든 구절이 증거하는 것은 너희의 악함을, 너희의 연약함을, 너희의 모든 죄악을 ‘내가’, ‘나 여호와가' 회복시킬 것임을 말씀하고 계신다. 

5. 이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이고, 이것이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복음이다. 내가 어떤 존재였는가? 우리는 조금도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 내 이익과 내 환경을 따라서 하나님을 이용하고, 하나님을 버리는 자들이다. 내가 얼마나 엉망인 존재인지는 그 누구보다도 내가 더 잘고 있지 않은가?

6. 그러한 우리를 하나님은 그 분의 주권적인 은혜로 사랑하셨다. 우리로 하여금 무엇을 하면이라는 조건을 달지 않았다. 그저 사랑하셨다. 그저 용서하셨다. 그저 구원하셨다. 그렇게 내가 한 것 같이 주장하는 나의 믿음조차도 나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지 않은가? 성경이 아니고서는 누가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겠는가?  고전 12:3 “성령으로 아니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으니”

7. 호세아서에서의 불 붙는 사랑, 그 뜨거운 사랑이 나를 향한 것이다. 나는 언제나 주님을 거절하고, 주님을 내 입맛에 맞게 사용하고 있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다. 내가 고멜과 다르다고, 이스라엘 백성들과 다르다고 어찌 말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우리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우리도 ‘내가' 사랑하겠다, ‘내가’ 책임지겠다, ‘내가’ 구원하겠다고 말씀하시면서 그 강권적인 사랑으로, 그 강권적인 은혜로 붙들고 계신다. 그리고 ‘나는 나’ 이신 그 하나님께서 그 약속대로 이 땅으로 오셨다. 그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8. 나의 망가짐과 나의 절망을 본다. 악하고 음란하며 거짓되고 사랑이 없는 나를 본다. 또한 그런 나를 여전히 ‘내가' 사랑하겠다고 말씀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함께 본다. 나를 보고 있을 땐 절망 밖에 없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볼 때에는 소망이 생긴다. 왜냐하면 그 소망의 원천이 내가 아니기 때문이다. 약속대로 나를 구원하실 그리스도께 소망이 있기 때문이다. 안식년을 준비하면서 1년간 남겨질 성도들과 수쿰빛 언약교회를 생각하게 된다. 처음에는 염려가 앞섰다. 그러나 이제는 소망이 생긴다. 왜냐하면 여전히 이 교회를 이끌어 가시는 분, 이 교회에 역사하시는 분이 내가 아니기 때문이다. 나 같은 절망적인 존재를 사용하셔서 진주를 만드시는 그리스도께서 주인이시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수쿰빛 언약교회를 그리스도께서 머리 되신 ‘내'교회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내가 뭐 그리 한게 있는가? 다 주님께서 하셨지…

9. 안식년 동안 우리 가정을 위해 하실 놀라운 일들을 소망해보게 된다. 또 수쿰빛 언약교회를 위해 행하신 놀라운 일들을 소망해보게 된다. 아직은 보이지 않고, 우리 앞에 어떤 일들이 찾아올지 알지 못하지만, 내가 할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 아버지께서 ‘내가' 하시겠다고 하시니 염려하지 말고 소망하자. 

10. 오늘도 샬롬 

*저희 가정의 안식년과 수쿰빛 언약교회를 위해 '하나님께서 하시도록'기도를 부탁드립니다. 늘 함께 걸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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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Thinking)/Meditation2024. 4. 27. 1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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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 40:1-24 탓하는 자가 되지 않으려면…

1. 욥은 의로운 자였다. 그러나 고난의 시간을 통과하면서 그의 변론과 대화 속에서 그의 이름은 바뀌었다. 그는 ‘하나님을 탓하는 자'가 되어 버렸다. “여호와께서 또 욥에게 일러 말씀하시되 트집 잡는 자가 전능자와 다투겠느냐 하나님을 탓하는 자는 대답할지니라" [욥 40:1-2]

2. 우리의 인생에서 일어나는 일을 가장 손쉽게 처리하는 방법 중 하나는 아마도 누군가를 혹은 무엇인가를 탓하는 것일 것이다. 나의 어려움의 상황을 다른 사람에게 전가시키고, 그 사람을 탓하고, 이런 일이 일어날 수 밖에 없도록 만든 환경을 탓하는 것이다. 

3. 그러나 오늘 하나님께서 욥에게 말씀하시는 것 처럼 하나님을 다른 사람을, 혹은 환경을 탓하는 것은 우리 기독교인이 할 모습은 결코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든 일이 하나님께 속하였고, 하나님께서 세상 모든 일을 다스리신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바울의 고백처럼 말이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 [롬11:36]

4. 탓을 한다는 것은 내가 괜찮은 사람이고 나는 별다른 문제가 없다는 전제 위에서 시작한다. 이 전제를 지키기 위해서 다른 이를 깎아 내려야만 한다. 8절이 이를 말한다. “네가 내 공의를 부인하려느냐 네 의를 세우려고 나를 악하다 하겠느냐" 욥은 자신의 온전함을 증명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깎아 내리고 있는 것이다. 또한 탓을 한다는 것은 나는 문제 없었는데, 다른 사람이 상황이 문제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결국 남탓의 가장 큰 근원은 ‘나'에 대한 ‘자기애’이며, 이는 곧 우상숭배이다. 

5. 물론 욥의 상황을 보았을 때에 욥의 상황은 쉽지 않았다. 자기가 잘못한 것이 뭐가 있었는가? 어느 날 갑자기 사탄의 참소로 시작된 고난이 아닌가? 갑자기 친구들이 위로해주러 왔다고 하면서도 그 친구들이 욥을 정죄하고 욥의 마음을 격동케 하지 않았는가? 그의 상황은 충분히 이해가 된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욥에게 원하시고 질문하는 것은 이러한 상황과 상관없는 하나님을 향한 변함없는 신뢰이다. 

6. 하나님을 향한 이 변함없는 신뢰는 내가 나의 구원을 위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데서 시작된다. 내가 하나님의 어떤 질문에도 대답하지 못한다는 그 절망감에서 시작된다. 왜냐하면 내가 다른 이를 탓하는 이유는 내가 스스로 충분히 잘 할 수 있었는데, 그 사람이, 또는 그 환경이 개입되어 상황을 망쳤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탓 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 없이 내가 스스로 잘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 모든 악함의 시작이고, 넘어짐의 시작이다. 

7. 나는 하나님의 도우심 없이는 단 한 순간도 괜찮을 수 없으며, 하나님께서 지키시지 아니하시면 단 한 번의 호흡도 내쉴 수 없는 존재임을 깨달아야만 한다. 뭔가 아는 것 같고, 뭔가 잘 하고 있는 것 같고, 뭔가 나는 괜찮은 존재 같다는 그 생각이 나를 망치는 지름길이다. 모든 일에서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분의 지혜를 구하고, 그 분을 신뢰하며 걸어가는 것이 지혜이다. 결국 이 본질이 우리 단체가 그렇게 이야기 하는 NIBC의 본질이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 분이 모든 것 되시기 때문에 그 분 안에 있을 때 나는 의미있는 것이다. 

8.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정말로 아무것도 아니다. 모든 일은 주님께 속하였고, 주님께서 행하신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매일을 최선을 다하려고 애쓴다. 최선을 다하며 주님의 도우심을 구한다. 그러다 보니 여전히 다른 사람을 탓하거나 하나님께 책임을 돌리는 일들을 나도 모르게 마음으로 하게 될 때가 있다. 남을 탓하는 일을 멈추고 싶다. 하나님을 탓하는 일을 멈추고 싶다. 그러려면 내 모습을 정확히 보아야 하고, 내 상태를 정확히 보아야만 한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 분이 모든 것 되신다. not I but Christ가 단순한 구호가 아니라 내 삶의 목표와 이유가 되기 원한다. 

9. 오늘도 샬롬

*수쿰빛 언약교회는 감사하게도 큰 공간에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하면 서 더 많은 사람들이 함께 예배 드리게 되었습니다. 방문자도 많아지고, 예배 참석도 더 늘어난 것 같습니다. 참 감사한 일입니다. 건강한 교회로 그리스도의 제자를 세워가는 교회로 세워질 수 있도록 계속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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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 28:1-28 사랑 안에서의 진리

1. 친구들의 말에 대한 욥의 대답이다. 그는 28장의 초반에는 인간의 뛰어남을 어느정도 설명하고 있다. “사람은 어둠을 뚫고 모든 것을 탐지하여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있는 광석도 탐지하되" (3절)

2. 그러나 그는 지금 인간의 지혜없음에 대해 설명하기 위해 어느정도의 빌드업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욥은 이야기 한다. “그러나 지혜는 어디서 얻으며 명철이 있는 곳은 어디인고" (12절)

3. 인간이 뛰어난 척, 아는 척, 지혜로운 척 해봤자 소용없다는 것이다. 친구들이 이 고난에 대해 뭔가 아는 것 처럼 하면서 욥에 대해서 조언하고, 때로는 나무라고 있지만 그렇게 지혜로운척 하지 말라는 말이다. 막말로 이야기 하면 “그래서 너희들이 뭘 아냐? 지혜도 없는 것들이…” 뭐 이정도의 독설을 돌려서 이야기 하고 있다. 

4. 왜냐하면 욥은 지금 자신의 상황이 친구들이 말하는 것과 같지 않고, 친구들의 조언과 나무람이 자신이 처한 상황에 맞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욥의 말이 맞다. 친구들은 고난에 힘들어하는 욥을 위로하기 위해 왔고, 처음 친구들의 어조는 위로와 사랑이었다. 

5. 그러나 욥이 그들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의 의로움을 계속해서 주장하자 친구들의 어조는 점점 더 강해지고, 점점 더 욥을 비난하고, 욥의 죄를 강조하고 있다. 욥의 반응은 그래서 지혜를 이야기 한다. 너희들은 지혜가 없어 모르지만 우리 하나님은 모든 것을 다 아신다는 것이다. 

6. “하나님이 그 길을 아시며 있는 곳을 아시나니 이는 그가 땅 끝까지 감찰하시며 온 천하를 살피시며 바람의 무게를 정하시며 물의 분량을 정하시며 비 내리는 법칙을 정하시고 비구름의 길과 우레의 법칙을 만드셨음이라 그 때에 그가 보시고 선포하시며 굳게 세우시며 탐구하셨고 또 사람에게 말씀하셨도다" (23-28절 전반부)

7. 지혜란 무엇일까? 28절 후반부이다. “보라 주를 경외함이 지혜요 악을 떠남이 명철이니라" 욥은 주를 경외함이 지혜라고 말하고 있다. 주를 경외한다는 것은 아마도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일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 따라오는 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다른 이웃들을 사랑한다는 것일 것이다. 욥의 친구들에게서 보듯이 사랑없는 지식은 생명을 살리지 못한다. 그렇기에 지혜란 ‘사랑 안에서의 진리’를 의미한다고 보는 편이 적절할 것 같다. 

8. 진리는 정말 중요한 것이다. 우리는 성경이 말하는 진리를 사수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 이외에 다른 길은 없으며,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 그러나 이 진리를 사수하고, 전하면서도 중요한 것은 사랑 안에서 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무리 옳은 말을 해도, 아무리 복음을 이야기 해도 그 안에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대계명을 생각해보면 더 선명하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뿐만 아니라 이웃을 또 내 몸과 같이 사랑해야만 한다. 진리를 가르칠 때에도 사랑 안에서 가르쳐야 하고, 복음을 전할 때에도 사랑 안에서 전해야만 한다. 사랑은 모든 것의 기초토양이며, 사랑은 모든 사역의 근본이다. 사랑이 없으면 진리도 때로는 칼이 되어 상대방을 찌를 수 있다. 그러나 또한 진리 없이는 참 사랑도 없다. 

9. 교회 안에 동성애 성향이 있는 형제, 자매들이 드러나게 혹은 드러나지 않게 있다. 태국이라는 상황에서는 어쩌면 너무나도 당연한 일일 것이다. 최근 그것이 목양팀 안에서 이슈화되고 논의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함께 이야기 하는 것은 그들 또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은 사람이며, 그리스도의 사랑에 합당한 자들이라는 것이다. 다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바로 ‘사랑 안에서의 진리’를 전하는 것이다. 아닌 것에는 아니라고 분명히 말해야 한다. 그러나 그 아닌 것을 말하기 위해 얼마나 열심히 사랑으로 빌드업을 해야 하는지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생명을 살리기 위해 사랑 안에서의 진리를 외치는 자가 되고 싶다. 혐오와 죄를 남기는 교회가 아니라  사랑과 생명을 남기는 교회가 되기 원한다.  오늘 욥이 말한 것과 같이 지혜 (사랑 안에서의 진리)를 가지기 원한다. 

10. 오늘도 샬롬 

* 저희 교회가 큰 장소로 옮겨가면서 예배의 분위기도 많이 좋아지고, 새로운 사람들도 계속 방문하고 있습니다. 저희가 사용하는 장소가 정부의 건물이라 이번 주는 송끄란 휴일로 인해 사용하지 못하게 됩니다.   장소와 상관없이 예배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은혜가 성도들에게 임하게 되길 기도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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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21:15-25 주님께서 아신다

1.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찾아오신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고난 당하시는 동안에 3번 예수님을 부인했다. 그래서 신학자들 중에 이런 베드로의 무너진 자존감의 회복을 위해서 예수님도 베드로에게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3번을 물으셨다고 한다. 일정부분 동의가 된다. 

2. 그러나 첫 번째 질문과 두, 세 번째 질문이 살짝 다른데 첫 번째 질문에서 먼저 멈추게 된다. 첫 번째 질문은 비교급이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15절) 비교급의 의미는 다른 제자들이 사랑하는 만큼 베드로도 주님을 사랑하는지에 대해서 묻고 계시는 것이다. 베드로는 짜증이 났을수도 있겠다. 

3. 왜냐하면 다른 제자들은 도망간 이후 주님이 고통당하시던 순간에 어디에 있었는지도 모른다. 주님을 따라오지도 않았기에 부인할 기회 조차도 없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럼에도 위험을 감수하고 예수님을 따라 온 베드로에게 ‘네가 다른 제자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이런 질문을 하시면 베드로의 마음이 억울하지 않았을까? 

4. 성경은 베드로의 어떤 억울함도 설명하지 않고 있다. 그런데 이 본문을 읽는 내가 억울하다. “예수님 저 나머지 제자들은 코빼기도 안 보이게 도망갔는데, 저는 그래도 주님을 따르다가 부인하지 않았습니까? 주님을 따르다가 생긴 영광의 상처 아니겠습니까?” 라고 내가 항변하고 싶다. 그러나 베드로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고 대답한다.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15절 하반부)

5. 베드로의 대답에 모든 것이 담겨 있다. 그가 억울하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주님께서 아시기 때문이다. 베드로의 부인도, 주님을 부인할 수 밖에 없었던 베드로의 심정도, 코빼기도 안 보이던 제자들과 비교 하시더라도 베드로가 여전히 주님을 사랑하고, 신뢰하고, 주님께 항변하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주님께서 알고 계시기 때문이다. 

6. “주님께서 아신다” 이 말은 어떻게 보면 너무 무책임해보이고, 나와 상관없이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이 말이 진짜라면, 이 말이 진실이라면 우리는 어떤 억울함과 어려움 속에서도 이겨낼 수 있다. 왜냐하면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께서 나의 이 억울하고, 속상하고, 안타까운 상황을 알고 계시기 때문이다. 

7. 나의 삶을 돌이켜 보면 나에게도 이러한 순간들이 참 많았다. 어떤 일들은 여전히 트라우마 처럼 남아서 나를 힘들게 하고, 또 한 발자국 앞으로 내딛는 것을 힘들게 하는 일도 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이 지지하지 않거나 이해하지 못할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순간 속에서 내가 여전히 주님과 함께 걸어가는 걸음을 택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주님께서 다 알고 계시기 때문이다. 

8. 주님이 내 이름을 아신다. 주님이 나의 사랑을 아신다. 주님이 나의 어려움과 힘듦을 아시고, 주님이 나의 그 환난과 고통을 아신다. 아실 뿐만 아니라 그 안에 함께 계신다.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 히 2:18 예수님께서 우리의 모든 것을 알고 이해하시는 것은 단순히 전지전능한 하나님으로서 아시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이 모든 것을 경험하셨다. 그래서 예수님의 이해는 지식으로서의 앎이 아니라 경험적이고 실제적인 앎이다. 바로 그 예수님께서 아신다는 것이다. 

9. 주님이 아시는데, 주님이 이해하시는데, 굳이 뭘 더 항변하고, 굳이 뭘 더 말하겠는가? 내가 할 일은 그 주님과 함께 걷는 것, 그 주님과 함께 오늘을 살아내는 것 뿐이다. 주님께서 아신다. 할렐루야!!

10.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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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20:19-31 참 평안

1.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이후 제자들은 두려웠다. 자신의 주님으로 하나님으로 고백한 그리스도를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따랐지만 그 마지막은 십자가였고, 예수님은 죽으셨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예수님을 아직 만나지 못한 제자들은 당연히 믿지 못했고, 두려웠을 것이다.

2. 19절 상반부가 이를 잘 나타내고 있다.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그들은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문을 닫고 꽁꽁 숨어 있었다. 그들에게는 소망이 없는 시점이었다. 

3. 그러나 닫힌 문들을 뚫고(?) 예수님께서 찾아오셔서 그들에게 말씀하신다.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19절 하반부).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평강, “샬롬'을 이야기 하신다. 

4. 그리고 또 한 번 예수께서는 샬롬을 말씀하신다.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21절) 두 번의 샬롬을 말씀하신 이후에 성령에 대해 이야기 하신다.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22절)

5. 샬롬, 평안은 우리에게 나올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니다. 사실 우리의 삶에 얼마나 많은 두려움과 의심이 있는가? 얼마나 자주 그러한 감정과 현실에 맞닥뜨리는가? 그 두려움 속에 예수님께서 계시지 않다면, 성령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다면 우리에게 평안은 결코 있을 수가 없다. 

6. 예수님이 그들 가운데 오신 그 순간 제자들은 그제서야 기뻐하고 안심할 수 있었다.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20절). 내 안에 평안을 누리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임재하심이, 함께 하심이 절실히 필요하다. 

7. 오늘 나의 삶은 누구와 걸어가고 있는가? 나의 목표, 나의 결심, 나의 만족을 이뤄내기 위해 평안 없이 달려가고 있지는 않는가? 예수께서 내 안에 머물러 계실 틈도 없이, 예수님과 대화할 시간도 없이 나의 것들을 이루기 위해 달려가고 있지는 않은가? 그런 삶에는 결코 샬롬이 있을 수 없다. 

8. 부활절을 맞이해서 교회가 첫 예배를 과학교육센터 안 회의실에서 드렸다. 넓은 공간에서 드리는 예배는 에게이로 까페에서 드리는 것 과는 또 다른 감동과 감격이 있었다. 교회가 성장하고, 성도들이 늘어나고, 교회가 세상을 더 많이 섬길 수 있고 참 감사하다. 선교사로써 이보다 더 행복한 순간들이 있겠는가? 그러나 규모가 커지는 것, 교회가 성장하는 것으로 인해서 나와 그리스도의 인격적인 관계가 깊어지지 못하고 평안을 잃어버린다면 그것은 더욱 더 경계하고 조심해야 할 일이다. 그럴 수록 더 홀로 있는 시간을 가져야 하고, 그럴 수록 더 주님께서 내 안에, 내가 주님 안에 거하는 시간을 가져야만 한다 .성장이 목표가 아니라 각 사람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의 성숙이 목표가 되어야 한다. 

9. 교회는 새로운 한 걸음을 내딛었다. 그 속에서 계속해서 평안을 누릴 수 있게 되기를 원한다. 평안은 골방에서 나온다. 평안은 그리스도와의 사랑의 관계에서 나온다. 평안이 내 삶에 있기를 원한다. 

10. 여러분들의 오늘에도 평안이 있길 원한다. 오늘도 샬롬

*교회가 부활절을 기점으로 과학교육센터의 회의실 한 곳에서 예배드리게 되었습니다. 음향과 악기를 설치하고 하는 시간도 더 많이 들고, 저희가 사용하는 건물이 아니기에 조심스러움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 장소를 더 많은 태국 사람들이 주님께 돌아오는 처소로 사용하여 주시고, 모든 성도들이 이 장소에서 주님을 만나고, 주님을 더 높이 높여드릴 수 있는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샬롬의 공간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늘 함께 걸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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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Thinking)/Meditation2024. 3. 28. 1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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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19:1-16 하나님 나라 

1. 하나님은 유대인들의 왕이시다. 예수님도 그렇기에 ‘하나님 나라’에 대해 말씀하셨다. 하나님 나라가 의미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왕이시고, 하나님께서 온 세상 만물을 그 분의 뜻 안에서 통치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선포하는 것이다. 

2. 모세의 시대에 하나님은 왕이셨다. 모세를 통해서 유대인들을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다스리시며 이끌어 나가셨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다른 민족들 처럼 눈에 보이는 사람인 왕을 원했다. 그래서 세워진 왕이 사울이었다. 그러나 사울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왕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맘대로 이스라엘을 통치했다. 그래도 유대인들은 좋았다. 자신들이 왕을 가지게 되었으니… 

3.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을 통해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지 않은 사울 왕을 버리고, 다윗 왕을 세우셨다. 다윗 왕이 진정한 유대인의 왕이었다. 그러나 진정한 왕은 여전히 하나님이셨다. 다윗은 자신의 뜻대로 결정하지 아니 했고, 하나님께 묻고,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며 움직였기 때문이다. 인간인 왕이었지만 이스라엘의 왕은 여전히 하나님이셨다. 그렇기에 다윗의 자손들은 남유다의 왕으로 계속 세워졌고, 하나님은 다윗의 씨앗을 통해 이 유대인의 왕의 계보를 이어가셨다. 

4. 그러나 남유다가 망하면서 유대인은 이제 더 이상 왕을 가질 수 없는 로마의 속국이기에, 그들이 왕을 가진다는 것은 로마에 대한 반역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들에게 왕이 없다는 유대인들의 말은 맞는 말이다. “그들이 소리 지르되 없이 하소서 없이 하소서 그를 십자가에 못박게 하소서 빌라도가 이르되 내가 너희 왕을 십자가에 못 박으랴 대제사장들이 대답하되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 하니" (15절).

5. 그러나 유대인의 말은 맞지만 또한 틀렸다. 그들의 왕은 가이사가 아니기 때문이다. 유대인의 정체성에서 여전히 유대인의 왕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기 위해서 자신들의 왕이신 하나님까지 부인하게 된다. 

6. 오히려 이방인인 빌라도가 예수님을 왕으로 인정하고 있지 않은가? “이 날은 유월절의 준비일이요 때는 제육시라 빌라도가 유대인들에게 이르되 보라 너희 왕이로다" (14절) 예수님을 왕으로 인정한 빌라도는 오히려 예수님의 생명을 살리려 하고, 자신들의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하기를 거부한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한다. 아이러니의 극치이다. 

7. 결국은 예수를 어떤 분으로 보는지가 나의 오늘의 태도와 삶을 결정한다. 나는 예수님을 진정한 나의 유일하신 왕으로 보고 있는가? 그리하여 예수님의 통치가 내 삶 안에 나타나고 있는가? 예수로 살고 예수로 죽는가? 아니면 유대인들처럼 예수님의 왕 되심을 부인하며, 내 뜻과 내 생각대로 살아가고 있는가? 만약 내가 내 뜻과 내 생각대로 살아가려고 한다면 나는 나의 통치를 받고 있는 것이지 예수의 통치를 받고 있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 나라가 아니라 내가 주인이고, 내가 왕인 나의 나라에 살아가는 것이다. 

8. 이 고난 주간에 누가 왕인지를 다시 한번 돌아보게 된다. 내 삶의 주인이 정말 누구인가? 내 삶의 진정한 왕이 정말 누구인가? 하나님이신가? 아니면 ‘나'인가? 사울은 자신이 왕이었다. 그래서 하나님께 묻지 않았다. 듣지 않았다. 자신의 판단과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이 가장 중요했고 그것에 따라 행동했다. 그래서 결국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게 되었다.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지 않는 사람이 어찌 하나님 나라를 설명하고, 다른 이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통치 가운데 살아가도록 권면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이 내 삶의 왕이시라면 내가 하나님의 통치를 받고 살아간다면 다윗의 삶과 같이 물어야 한다. 들어야 한다. 순종해야 한다. 

9.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선포하신 것은 ‘하나님의 나라'였다. 물론 나의 죄사함도 너무나도 중요하지만 ‘하나님 나라'는 더 크고 중요한 개념이다. 그렇기에 내가 오늘 하나님의 통치를 받고 하나님의 나라를 살아가지 않는다면 예수님의 고난과 순종하심이 단순한 나의 죄 사함으로 축소되어 버리게 된다. 하나님 나라를 살아낼 수 있게 되기를 원한다. 내 뜻과 내 생각으로 살아가지 않고, 오직 주님께 묻고, 듣고, 순종하는 자로 오늘을 살아가기 원한다. 

10.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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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Thinking)/Meditation2024. 3. 26. 1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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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18:12-27 얕고 가벼운 사랑을 가진 자 (중요 알림 맨 아래 있어요)

1. 예수를 반대하고, 예수를 죽이려던 무리들은 예수를 잡아 결박하여 안나스에게로 끌고 간다. 안나스는 누구인가 하면 그 해의 대제사장인 가야바의 장인이었다 (13절). 곰곰히 생각해보니 대제사장의 장인이 무슨 타이틀이며 권력의 일부분인가 싶다. 그는 예수님을 심문하거나 예수님에 대해 어떤 판결을 내릴 수도 없는 자였다. 

2. 그저 호기심 때문이었든지, 아니면 사위를 등에 업은 권력자였든지 간에 그는 결박된 예수를 먼저 만났고, 예수를 심문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의 질문은 좀 이상하다. “대제사장이 예수에게 그의 제자들과 그의 교훈에 대하여 물으니" (19절) 그의 질문은 제자들에 대한 것이었고, 예수께서 무엇을 가르치셨는지를 물었다. 

3. 권력자들이 두려워하였던 것은 민란이었고, 그들은 예수께서 왕으로 오셔서 자신들의 권력을 빼앗기는 것을 원치 않았기에 아마도 예수께서 그정도 세력을 갖추고 계신 분인지, 또 그 분의 가르침 속에서 어떤 사회를 전복시킬만한 가르침이 있었는지를 물어보려고 했던 것 같다. 

4. 그러나 예수님의 대답은 오히려 드러내놓고 세상에 이미 이야기를 했으니 대답할 가치가 없다고 하셨다. 원하던 것을 얻지 못한 안나스는 예수를 대제사장에게 보낸다. “안나스가 예수를 결박한 그대로 대제사장 가야바에게 보내니라" (24절). 

5. 안나스의 모습을 보면서 지금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들이 먼저 떠올랐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대답에서와 같이 모든 것을 드러내서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드러내 놓고 세상에 말하였노라 모든 유대인들이 모이는 회당과 성전에서 항상 가르쳤고 은밀하게는 아무 것도 말하지 아니하였거늘" (20절) 예수님은 다 드러내놓고 말씀하셨고, 그 분의 말씀은 성경에 모두 기록되어 있다. 

6.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이미 밝히 드러나 있음에도 그것을 들으려고도, 읽으려고 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관심과 소망 때문에 예수님을 자신의 의도대로 만나서 재단하려고 하거나 혹은 예수를 거절하려고 한다. 그리고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다. 많은 사람들이 안나스와 같은 스탠스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더 무거운 점은 나도 아니라고 말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7. 고난주간이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시고, 고난 당하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신게 너무나도 확실하다. 그런데 나는 어떤 태도로 예수님을 만나고 있는가? 안나스와 같이 내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예수님을 만나다가 아니다 싶으면 버리는 사람은 아닌가? 나의 소원을 예수님께 투영하여 예수님을 이용하려고 하는 무리는 아닌가? 예수님에 대한 나의 사랑과 태도를 이 고난주간에 점검하게 된다. 

8. 나는 안나스와 같지 않다고 너무 쉽게 자신하지 말고, 내가 진실로 예수님을 사랑하는지, 내가 진실로 예수님을 따라가고 있는지, 내가 진실로 예수님을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섬기고 있는지를 돌아보는 고난주간이 되기 원한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한 이야기도 나온다. 그도 진심으로 예수님을 생각했고, 사랑했다. 오죽했으면 모든 제자들이 예수님을 버리고 가버렸지만 예수께서 심문받는 자리까지 쫓아오지 않았는가? 그러나 베드로의 부인은 베드로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우리는 그 누구라도 베드로처럼 주님을 부인할 수 있는 자들이다. 그리스도를 향한 우리의 사랑이 그 정도로 얕고 가벼울 수 있음을 인정해야만 한다. 그러나 우리의 얕고 가벼움에도 언제나 그 자리에서 우리를 사랑해주시고 붙들어주시는 예수님이 계시기에 우리는 우리의 사랑을 지킬 수 있는 것이다. 

9. 내가 얼마나 가벼운 사랑을 가진 사람인지를 진심으로 깨닫고, 진정한 사랑을 보여주신 그리스도를 만날 때에야만 우리는 비로소 주님을 사랑할 수 있게 된다. 내가 안나스와 같은 사람임을 잊지 말고, 안나스와 같은 나도 사랑해주신 주님을 기억하는 고난주간을 보내도록 하자. 

10. 오늘도 샬롬 

중요한 알림!
오늘 아침 예수향남교회 선교담당 목사님으로부터 연락을 받았는데, 몇일 전에 예수향남교회의 한 권사님이 모르는 번호의 문자로 저의 새마을금고 계좌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선교담당 목사님께서 계좌를 확인해보셨고, 보이스피싱으로 결론이 내려졌습니다. 심지어 계좌의 예금주도 ‘심재우'로 뜬다고 합니다. 저는 새마을금고 계좌가 없습니다. 주의하시라고 당부를 드립니다. 잘 아시는 것 처럼 저희 가정은 기도편지에 후원계좌를 올려 놓지 않았고, 먼저 계좌를 보내면서 후원을 요청한 적도 없습니다. 다만 후원을 하시겠다고 연락을 주시는 분들에게만 계좌를 공유하고 있고, 국민은행이 주계좌입니다. 공식적으로 기도편지 이외에 후원요청을 한 일이 없으니, 앞으로도 없을 예정이니 그렇게 알고 주의해주시길 바랍니다. 늘 함께 걸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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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24. 3. 25. 1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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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18:1-11 I am NOT

1. 무리들이 예수님을 잡기 위해서 왔다. “유다가 군대와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 얻은 아랫사람들을 데리고 등과 횃불과 무기를 가지고 그리로 오는지라" (3절). 

2. 예수께서는 이 시간을 위해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셨다. 그랬기에 지금은 어떠한 두려움도 없이 담대하게 이 시간을 맞이하고 계신다. “예수께서 그 당할 일을 다 아시고 나아가 이르시되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 (4절).

3. 그들이 나사렛 예수를 찾는다고 말하였을 때 예수께서는 대답하신다. “내가 그니라" (4절).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내가 그니라"의 헬라어 표현은 그 유명한 “에고 에이미"이다. 영어로 표현하면 “I am…”이다. 

4.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진술하는데 사용된다. “나는 생명의 떡이다“ (6:35, 41, 48, 51), “나는 세상의 빛이다" (8:12), “나는 양의 문이다" (10:7, 9), “나는 선한 목자이다" (10:11, 14),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11:25),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14:6), 그리고 나는 참 포도나무이다" (15:1, 5)이다. 

5. 예수님께서 말한 “내가 그니라"라는 표현은 단순하게 그들에게 “내가 나사렛 예수다”라고 답하는 정도가 아니라 “내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이다"라고 대답하는 신적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이제 다가올 고난과 십자가의 죽음, 그리고 부활의 영광을 감당해야만 하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드러내신 대답이다. 물론 거기 누구도 이해하지 못했겠지만 말이다. 

6. 그래서 베드로는 자신의 칼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베어버리지 않는가? “이에 시몬 베드로가 칼을 가졌는데 그것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서 오른편 귀를 베어버리는 그 종의 이름음 말고라" (10절). 예수님의 놀랍도록 의연하고 당당하심은 베드로의 급하고, 섣부른 행동과 비교된다. 

7. 내가 누구인지 아는 ‘나의 정체성', 그리고 하나님께서 누구이신지를 아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예수님을 이토록 당당하고, 고통과 죽음 앞에서도 의연하고 자신의 부르심과 사명 앞으로 걸어가도록 만들었다. 

8. 물론 나는 예수님이 아니다. 나는 죄인이다. 내가 얼마나 큰 죄인인지를 아는지가, 그리고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내 삶을 결정한다. 이 부분에서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바로 세례 요한이다. 그에게 많은 사람들이 와서 묻는다. 당신이 그리스도 입니까? 엘리야 입니까? 세례요한은 대답했다. “나는 아니라 (I am not)" (요 1:21중) 예수님의 대답과는 정 반대의 대답이다.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I am” 이라고 대답하실 수 있지만 우리는 언제나 “I am not”이라고 세레요한처럼 대답 해야만 한다. 나는 그가 아니다. 나는 안된다. 나는 불가능하다. 

9. 나는 나를 어떤 존재로 보는가? 종려주일과 고난주간을 맞이하면서 나를 다시 한번 돌아보게 된다. 나는 하나님의 일에 조금도 도움이 안되는 악하고 게으른 종일 뿐이다. 이런 나를 사용해 주시는 주님 앞에 내가 드릴 수 있는 것은 순종과 감사, 그리고 겸손이다. 조금도 나를 과대평가하지 말고, 조금도 나를 착각하지 말자.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무익한 종일 뿐이다. 무익한 종은 나의 해야할 일을 하면 된다. 무익한 종의 정체성으로 오늘도 살아갈 수 있게 되기를 소원한다. 

10. 오늘도 샬롬 

* 어제 종려주일에 나뭇가지를 흔들며 호산나를 함께 외쳤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왕 되심을 선포하며, 그리스도께서 태국의 진정한 왕이심을 선포 하였습니다. 이번 한 주 동안 모든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고난과 사랑을 더 깊이 묵상하는 고난주간이 되게 하시고, 성금요일에 성찬을 통해 더 깊은 주님을 만나고 경험할 수 있도록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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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