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Thinking)/Meditation2019. 4. 30. 15:30
728x90
반응형

시 120:1-7 주 안에서 부르짖는일!!

 

누구에게나 어려운 일, 환난은 생기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 환난 중에 어떤 행동과 말을 하느냐는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같은 상황이어도 모든 사람은 다르게 반응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오늘 시편의 기자는 그 환난 중에서 ‘여호와께 부르짖었다’라고 1절에서 말하고 있다. 환난 중에서 해야 할 일은 부르짖는 것이다. 

 

부르짖는다는 것은 단순히 말을 통해 기도를 아뢰는 것 그 이상이다. 아마도 멀찍이 떨어져서 입만 움직인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그 안에 거한다는 말일 것이다. 우리는 그의 안에서 부르짖어야 한다. 중요한 것은 그의 안에서 부르짖는 것이다. 소리내어 부르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의 안에서 부르짖는 것이다. 

 

어린 아이가 배가 고플 때 엄마의 품 안에서 울며 온 힘을 다해 그 젖을 무는 그런 이미지가 떠오른다. 어린 아이에게는 오직 그것이 목표이고, 지금 우는 이유이기 때문이다. 엄마의 가슴팍에서 울어야 하는 이유이다. 부르짖는데 하나님 밖에서 부르짖기 시작하면 크게 외치고, 기도하는데도 하나님의 뜻과는 다르게 행동하고, 다른 방향으로 갈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그의 안에서 부르짖으면 우리에게 반드시 응답하신다 (1절). 

 

지금이 부르짖어야 할 때이다. 그런데도 막상 그렇게 끈질기게 열심으로 부르짖지 못하는 것 같다. 하나님 안에서 부르짖기 원한다. 나에게 유익이 되는 방향이 아니라 진실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있게 되기를 원한다. 

 

주님 주 안에서 진심으로 부르짖는 오늘 하루가 되기를 원합니다. 저를 도우소서 

728x90
반응형
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19. 4. 26. 12:13
728x90
반응형

시 119:73-96 주님 날 가지세요!!

 

오늘 본문도 계속 주님의 말씀을 바라는 시편기자의 고백들이 담겨 있다. 많은 고백들이 있었지만 그 중에 내 마음을 흔든 한 마디는 바로 94절이다. 

 

94 나는 주의 것이오니 나를 구원하소서… 

     I am yours; save me, (ESV)

 

영어 성경의 번역이 더 마음을 흔든다. I am yours. 

무슨 요즈음 아이들이 자기들 아이돌 연애인에게 하는 고백같다. 언젠가 봤던 고백이 아마 이랬던 것 같다.

‘난 니꺼, 날 가져!!’ 뭐 이런 식이였던 것 같다.

 

오늘 시편의 기자는 하나님께 어떤 느낌으로 고백을 했는지는 모르겠다. 그런데 느껴지는 것은 그 사랑… 자발적으로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그 사랑… 그 사랑이 보였다. 마치 "제 인생에 많은 일들이 있고, 어려움도 있고, 원수들은 나를 잡아먹으려고 달려오지만… 그것들과 상관없이 하나님 저는 하나님 것입니다”라고 고백하는 것 처럼 느껴진다.

 

우리의 인생에는 항상 어려움들과 두려움들과 우리가 넘기 힘든 여러가지 상황들을 마주하게 된다. 하지만 상황을 이기는 것은 우리가 아니다. 상황을 넘어설 수 있는 힘도 우리의 것이 아니다. 우리가 이러한 인생 속에서 해야 하는 것은 이 시편의 기자와 같이 그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하나님 저는 하나님의 것입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이다. 

 

왕이신 하나님을 사랑할 때 우리의 삶의 상황들은 달라 보이게 된다. 상황이 변해서가 아니라 이제는 우리의 시선이 상황이 아니라 왕을 바라보게 되기 때문이다. 나도 오늘 주님께 상황을 넘어 나의 사랑을 고백한다. 하나님 저 주님 겁니다!! 날 가지세요!! 뭔가 조금 경박해 보이긴 하지만 내 마음은 그렇다. 그 왕을 향한 사랑이 지금 나를 이 곳에 있게 하고, 그 왕을 향한 사랑이 나를 움직이게 하기 원한다. 물론 이 사랑도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분이 날 붙들고 계심을 잊지 말아야 한다. 

 

주님 나를 가지세요!!  

728x90
반응형
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19. 4. 25. 18:35
728x90
반응형

시 119:49-72 내가 조금이라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기도를 멈추라

 

시인은 고난을 당한 것 같다. 그래서 71절에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런데 하나님께 하는 기도는 오히려 ‘주의 종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하소서’ 이다. 하나님이 자신에게 위로의 말씀을 하셨는데, 시인은 그 말씀을 자신에게 기억나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기억하시라고 말하고 있다. 도대체 왜일까? 자신의 해야 할 책임을 왜 하나님께 떠넘기는 것일까? 

 

말씀을 묵상하다 보니 어제 묵상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 같다. 아마도 시인은 자신이 하나님의 그 위로의 말씀을 기억한다고 하더라도 (50절) 자신의 그 위로의 말씀을 붙들 자신이 없었던 것 같다. 자신의 답답한 지금의 고난과 나아질 것 같지 않아 보이는 그 상황 속에서 자신의 힘으로 말씀을 붙들고 살아갈 자신이 없었던 것 같다. 자신의 연약함을 알았고, 주님 앞에 그 연약함까지도 내어 놓은 것이다. 그래서 자신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께서 그 위로의 말씀을 기억하시고 자신을 붙들어 주시기를 간구한 것 같다. 

 

'하나님 제가 하나님께서 하셨던 그 말씀을 기억하게 해주세요’ 라는 기도는 '기억하게만 해주시면 제가 할 수 있습니다'의 고백이다. 반면에 '주님 주님이 저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하소서’의 기도는 '제가 할 수 없으니 주님이 말씀하신 일을 저의 삶에 이루어주소서'의 기도이다. 나는 어떤 타입의 사람인가? 

 

종종 자신감에 차서 시인의 기도와는 다르게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나게 해달라’는 기도를 하는 것 같다. 나에 대한 과도한 신뢰이고, 말도 안되는 근거 없는 자신감이다. 여태 많은 실패들을 해 온 것을 누구보다도 내가 잘 알고 있지 않은가? 오늘은 나의 기도가 변하기 원한다. 나에 대한 조금의 신뢰나 자신도 하지  않기를 원한다. 나는 할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신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 분은 전부 이시다.

 

결국 Not I but Christ의 진리인 것이다. 나는 못한다고 기도해야 한다. 나는 안된다고 기도해야 한다. 오직 하나님께서 내 삶에 일하시기를 간구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하시고, 그 말씀대로 이루어 주시길 기도해야 한다. 나의 기도가 변하는 하루가 되기를 원한다. 조금이라도 내가 가능할 거라고 생각하는 헛된 망상을 버리고 오직 주만 의지하는 하루가 되기를 원한다.

 

Not I but Christ 구호 뿐만 아니라 삶이 되기를 원한다.

728x90
반응형
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19. 4. 24. 12:56
728x90
반응형

시 119:25-48. 내 힘을 빼고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는 것, 기도

 

내 힘으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그 모든 것이 사실 내 힘으로 가능한 것이 하나도 없다. 오늘 본문의 시인은 정말로 자신이 주의 계명을 사랑하고, 그 계명을 지키겠다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서 계속해서 드려지는 시인의 고백은 자신이 하겠다가 아니라 하나님이 이렇게, 저렇게 도와달라는 고백이 계속해서 먼저 나오고 있고, 그 렇게 해주시면 자신이 율법에 지키는 일에 헌신 하겠다고 기도하고 있다.

 

25절 내게 가르치소서

26절 깨닫게 해주소서

27절 나를 세우소서

29절 내게 은혜로이 베푸소서

32절 내 마음을 넓히소서

33절 가르치소서

34절 깨닫게 해주소서…

 

다 쓸 수 없지만 시인의 고백은 계속해서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도와달라고 기도하고 있고, 그 이후 자신이 끝까지 율법을 지키겠다고 이야기 하고 있다. 말씀을 내 힘으로 지키겠다고 고백하는 것은 얼마나 가당치도 않은 일인가? 우리는 이렇게 기도해야 한다. 내가 말씀을 지키려고 내 힘으로, 내 의지로 시도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하나님이 이것을 지키고, 순종할 힘을 주시도록 기도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실 때에야 우리는 지킬수 있게 된다. 

 

내가 하려는 시도를 멈추고, 하나님이 하시도록 나를 내어 드리는 것이 바로 기도이다. 내 힘으로, 내 의지로, 내가 할 수 있다는 마음으로 하려다가는 율법에 치여 망한다. 왜냐하면 내 힘으로, 의지로 지킬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오직 주님께 내 힘과 의지를 내어 드려야 한다. 이것이 기도이고, 오늘 시편 기자의 삶의 자세이다.

 

주님께 기도하며 나를 내어 드리기 원한다. 더 엎드리기 원한다. 내가 할 수 없다고 더 말하고, 주님의 도움이 더 필요하다고 말하기 원한다. 그렇게 기도하는 하루, 내 힘을 빼고 주님께 맡기는 하루 되기 원한다. 올해 초 다짐했던 것처럼 느리더라도 바른 길로, 늦더라도 주님이 인도하시는 길로 가자. 그렇게 묻는 하루가 되자. 

728x90
반응형
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19. 4. 23. 13:41
728x90
반응형

시편 119:1-24 읽는 말씀이 아니라 행하는 말씀으로

 

시편 119편은 말씀과 율법에 대한 내용이다. 율법과 은혜를 비교를 한 사도바울의 신약에 익숙한 나로써는 이 시편 119편이 말하는 토라(율법) 사랑이 그렇게 마음에 와 닿지 않는다. 율법은 살리는 것이 아니라 죽이는 것이고, 율법은 은혜(예수 그리스도)가 오기 전에 우리를 지도하는 몽학선생에 불과한 것인데, 시편의 기자는 왜 이리 율법을 사랑한다고 고백하고 있을까? 

 

이 율법이 무엇인지를 한참을 고민했다. 이 율법이 의미하는 것이 꼭 '무엇을 해라, 무엇을 하지 말아라’ 식의 우리가 지켜야 할 계명들의 나열이 아니란 것을 알게 되었다. 당연히 그 계명, 그 자체도 포함이 되겠지만 좀 더 생각해보면 이 본문에서 말하는 율법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말씀 그 자체이다. ‘성경'이라고도 할 수 있겠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신 그 ‘계시’ 즉, 우리가 듣고, 읽을 수 있는 형태로 계시된 그것이 바로 여기서 말하는 율법이라고 생각된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을 비롯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신 그 모든 말씀이 여기서 말하는 율법이다. 

 

그래서 시편의 기자는 18절에서 ‘내 눈을 열어서 주의 율법에서 놀라운 것을 보게 하소서’ 라고 말하는 것이다. 단순히 무엇을 지키고 안 지키고의 계명의 문제라면 그 안에서 무슨 놀라운 것을 볼 수 있겠는가? 그래서 이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칭한다. 그런데 여기까지 묵상하고 나니 '나는 이 말씀을 정말로 사랑하고 있는가? 나는 정말 이 말씀을 지키고 따르고 있는가?' 의 질문이 들기 시작했다. 그것이 율법이든,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든 나는 정말 이 말씀을, 이 율법을 사랑하는가? 정말로 이 말씀을 따르고 있는가? 지식적으로 이것이 율법인지 말씀인지를 구별해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정말로 중요한 것은 내가 지금 오늘 이 말씀대로 살고 있는가? 가 중요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 

 

신학을 공부하고, 책을 읽으면서 머리는 크고 있는데, 삶은 그 큰 머리를 따라가고 있지 않은지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것이 단지 읽고 묵상하는 것으로 끝나고 있지는 않는가? 정말 나는 말씀을 사랑하는가? 그 말씀을 사랑하여 순종하는가?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사람이 아니라 말씀에 순종하는 내가 되기를 원한다. 지식적으로 말씀을 더 깊이 아는 것에 그치지 않고, 아는 말씀이 내 삶에 영향력을 미치며 그 말씀이 나를 변화시키는데 까지 이르기를 원한다.

 

오늘도 읽는 말씀이, 묵상하는 말씀이 나의 삶을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기를 원한다.

728x90
반응형
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19. 4. 22. 15:51
728x90
반응형

막 15:16-32 사명에 따라서...

 

십자가에 달리시는 예수님을 향한 모든 그들의 조롱의 말들은 다 사실이었다. 

유대인의 왕(18절)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었도다 (31절)

이스라엘의 왕 그리스도가 (32절)

 

하지만 예수님은 어떤 말씀도 하시지 않았고, 어떠한 그들의 희롱과 조롱에도 전혀 대꾸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이 조롱한 그 사실처럼 예수님은 자신의 생명을 드려서 남을 (모든 인류를) 구원하셔야만 했다. 자신은 철저히 버려지셔야만 했다. 모든 인간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하나님 자신이 오셨고, 하나님 자신이 화목 제물로 자신을 드리기로 하신 것이다. 자신을 구원할 수 없었던게 아니라 우리를 위해 자신을 구원하지 않으신 것이다.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 때문에 우리는 구원받았다. 

 

예수님은 처음부터 자신을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시지 않았다. 예수님은 다른 자들을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사명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신 것이다. 사실을 사실이라고 대꾸하지 않으시고, 그들의 조롱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으셨다. 사명이 확실하신 예수님이 확실하게 그 길을 걸어가신 것이다. 무엇을 위해 살아가고 있는가? 나의 사명이 무엇인가? 매우 중요한 대목이다. 

 

사명이 다른 모든 것을 컨트롤 한다. 하고 싶은 말, 하고 싶은 일… 그 모든 것을 말이다. 예수님은 말씀하지 않으셨고, 예수님은 자신을 구원하지 않으셨다. 그렇다면 나는 오늘 무슨 말을 하고, 무슨 일을 할 것인가? 끝까지 내가 짊어져야 할 나의 사명은 무엇인가? 

내가 하고 싶은 말, 하고 싶은 일 보다도 내 사명에 의해서 말하고, 움직이는 내가 되기를 원한다. 

728x90
반응형
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19. 4. 22. 15:50
728x90
반응형
막 16:14-20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본 자들에게 주어진 마지막 명령이 15-16절에 나타나고 있다.

 

"또 이르시되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 사실, 복음을 우리는 전해야 할 사명을 받은 것이다. 그것도 가족에게, 동네에 사는 사람에게만이 아니라 온 천하를 다니며 만민에게 전파해야 하는 것이다. 복음의 기쁜 소식이 모두에게 전해져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때로는 복음을 전하기 보다는 복음을 내 안에 간직하려고만 하는 경우도 많은 것 같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과 아무런 상관없이 살아가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예수님은 부활하셨는데, 우리는 죄 용서 받은 십자가의 사건만 마음에 품고, 그 안에서만 머문다. 내가 용서 받았고,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화목했다는 그 사실만이 내 안에 있어서 내가 가장 중요하고, 내가 용서받은 사실만이 중요할 때가 나에게는 참 많은 것 같다. 
 
다른 사람들도 그러한 하나님과의 화목을 경험해야 하고,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첫 열매가 되신 것과 같이 우리도 장차 부활할 것이고, 이미 하나님 나라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들어와 있다는 사실을 경험하며 살아가고, 또 그것을 전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고 나를 위해 살아간다. 그래서 복음을 전하기 보다는 복음을 받은 우리들끼리 행복하게 잘 사는 것을 더 많이 생각하게 되는 것 같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만나 더 많은 영혼들에게 나아가 이 복음을 전하는 것이 내가 할 일이다. 십자가에서만 머무는 것은 예수님의 복음에서 반쪽 짜리이다. 예수님은 부활하셨고, 예수님의 제자들과 초대교회 성도들이 전한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보다는 예수님의 부활이었다 (사도행전 참고).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서 더 깊이 경험하고 알아가길 원한다. 나 또한 (십자가 까지만 생각하는) 일부의 복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부활이 내 삶에서 실제가 되는 그러한 삶을 살아내고, 또 이 곳에서도 그것을 전하기 원한다. 
 
오늘도 무엇을 외칠 것인가? 부활절을 지내며 무엇을 생각하고, 더 묵상하게 되는가? 그것이 예수님의 부활이 되기 원한다. 하지만 예수님의 부활만 전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에 대해서 균형잡히게, 균형잡힌 복음 즉, 십자가와 부활의 의미를 충분히 전할 수 있는 준비가 되기를 원한다.
 
예수님이 죽음에서 부활하셨다. 그리고 나도 그 분과 함께 죽었고, 다시 살았다. 다시 산 내 인생이 주님 주신 이 복음전파의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게 되기를 원한다. 순간 순간 부활이 내 삶에서 실제가 되고, 부활이 내 삶에서 살아갈 이유가 되기를 원한다. 새 하늘과 새 땅을 소망하는 오늘, 내가 되기를 원한다. 

"

728x90
반응형
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19. 4. 18. 12:51
728x90
반응형

"

막 15:1-15 사람의 길, 하나님의 길
 
두 사람이 비교가 된다. 모든 사람을 구원코자 하여 자신에게 온 수 많은 고발들에 대해서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신 예수님이 계신다 (5절). 그에 비하여 무리에게 만족을 줘서 자신의 안위를 챙기려고 죄 없는 예수님을 무리에게 십자가에 못 박히도록 넘겨준 빌라도가 있다 (15절). 
 
누구를 위해서 어떤 가치를 위해서 살아가고 있느냐의 문제였다. 이에 따라서 삶의 방법이 달라진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살아가신 예수님은 자신을 향한 비난을 감당하셨다. 그리고 그러한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으셨다. 자신이 가야만 하는 길을 아셨고, 묵묵히 그저 그 길을 걸어 가셨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길이었고,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길이었다.
 
하지만 빌라도는 그렇지 않았다. 민란이 일어나면 로마에서의 자신의 평가가 나빠지고, 자신의 지위를 잃을 수도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선택한 길은 분노한 무리들에게 만족을 주는 것이었다. 그들이 무슨 요구를 하든지 그들이 원하는 일들을 들어주기로 했다. 하나님과 전혀 상관없는 길이었다. 자신만을 위한 길이었다. 그리고 그의 자신을 위한 선택은 하나님의 아들을 못 박도록 사람들에게 내어준 것이었다. 자신의 지위는 계속 지킬 수 있었을지 모른다. 유대인들로부터 똑똑한 왕이라고 사람들로부터 칭송 받았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과 전혀 상관없이, 자신의 길을 간 것이다.  
 
갈 1:10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예수님도 사도 바울도 사람들을 좋게 하려고도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지도 않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마음이었고 그것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드렸다. 설사 그것이 자신의 생명이었을지라도 말이다. 

 

오늘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가? 많이 자유해진 것 같지만 여전히 다른 사람들의 평판과 말은 나를 신경쓰이게 만든다. 사람을 좋게 하려고, 혹은 사람들을 기쁨을 구하려 하는 마음들이 여전히 내 안에 있다. 문제를 만들지 않고, 좋게 좋게 가려는 마음들이 분명히 내 안에 있다. 하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좋게 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마음으로 하나님의 길을 쫓아가야 하는 것이다. 
 
내 안에 빌라도와 같은 마음들을 내려놓고, 예수님이 가셨던 그 길을 걸을 수 있기를 원한다. 정말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알아, 그 뜻을 묵묵히 쫓아가는 내가 되기를 원한다. 똑똑한 사람이 되기 보다는 사람들에게 칭송받는 사람이 되기 보다는 주님의 뒤를 묵묵히 쫓을 수 있는 내가 되기를 원한다. 머리로 주님을 쫓지 말고 기도로 주님을 쫓는 오늘이 되길 원한다. 
 

"

728x90
반응형
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19. 4. 17. 12:44
728x90
반응형

막 14:66-72 부인하지 않으려면 그 분 안에 있어야 한다.  

 

예수 안에 혹은 예수와 함께 있는 베드로는 자신이 절대 예수를 부인하지 않을 것이라고 큰소리 쳤다. 정말 그럴 수 있을거라 생각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살아계신 하나님이 자신과 함께 계셨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 베드로는 예수님을 멀찍이 쫓아갔다. 예수님 안에, 예수님과 함께 있지 못하고 멀찍이 떨어져서, 66절을 보면 베드로는 아랫뜰에 있었다. 예수님과 함께 지내는 시간이 아닐 때에 일은 벌어졌다.

 

베드로는 건장한 남자 어부였기에, 대제사장의 여종 한 사람이 자신에게 예수의 제자라는 혐의(?)를 씌울 때 부인하지 않고 충분히 도망할 수도 있었다. 그게 아니라면 자연스럽게 무시하고 갈 수도 있었다. 하지만 베드로는 부인하게 된다. 68절에 이제 그는 앞뜰로 나아간다. 다른 여종이 혐의를 씌울 때 그는 또 부인한다. 마지막으로 곁에 있는 사람들이 그에게 말할 때 (70절) 그는 세 번째로 예수님을 부인하게 된다. 

 

단순히 물리적인 공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처럼 우리가 그 분 안에 거할 때, 그 분이 우리 안에 거할 때라야 우리는 우리의 성정과 연약함을 이기고 주님을 쫓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베드로는 지금 주님 안에 거하는 그 일을 실패한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를 향해 ‘내 안에 거하라’ (요 15:4) 라고 말씀하신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 거하지 않을 때 우리는 언제든지 베드로가 부인한 것과 같은 일들을 경험할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베드로의 부인을 보면서 내가 저 상황이었다면? 나는 과연 어땠을까?를 생각해보게 된다. 당연히 쉽지 않다고 생각된다. 지금 내 삶에 발생하는 여러 복잡다단한 일들도 마찬가지이다.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상황에서 내가 하나님과 동행하고 있는가? 내가 주님 안에 있는가? 내가 그 분 안에 거하는가? 이것이 핵심임을 잊지 말자. 

 

오늘도 그 분 안에 거하기를… 주어진 상황과 결정해야 할 일들 속에서 주님 안에 거하길… 

정말 그렇게 하루를 살아내길… 아멘

728x90
반응형
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19. 4. 15. 12:19
728x90
반응형

막 14:43-52 내 분량만큼 예수님 뒤를 쫓아가기

 

예수님이 잡히셨다. 예수님은 말씀을 이루시기 위해서 그저 무력하게 잡히셨다 (49절). 주를 부인하지 않겠다고 했던 그들의 다짐과 무색하게 그들은 다 도망갔다. 

50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한 청년이 벗은 몸에 홑이불을 두르고 예수를 쫓아갔다. 도대체 그는 누구인가? 왜 쫓아갔는가? 자료를 찾아보니 그에 대한 언급이 이 곳에만 나오고, 이름이나 다른 자료가 없어서 이 청년을 마가복음의 저자 마가로 추측한다고 이야기 하고 있다. 그가 부끄러워서 이름도 기록하지 못하고 자신의 일을 이 마가복음에만 삽입했다고 추측하고 있다. 

 

왜 벗고 있었는지 잘 모르겠다. 소란한 소리에 잠에서 깨서 그냥 옷을 못 찾고 그냥 보이는데로 덮고 있던 이불을 들고 나온 것인지… 아니면 어떤 상황이었는지... 솔직히 왜 벗은 몸에 이불만 걸치고 나왔는지 추측하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아마도 그가 급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가기 위해서 한 선택 정도로 보여진다. 그렇게 눈에 잘 띄는 모습으로 예수를 쫓다가 그는 예수를 잡은 무리들에게 붙잡혔다. 그 이후 그가 한 선택은 베 홑이불을 버리고 벗은 몸으로 도망하는 것이었다. 

 

그는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으로 주님의 뒤를 쫓았다. 그렇게 쫓다가 잡히자 도망갔다. 그에게는 아픈 과거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렇게 무력하게 도망갈 수 밖에 없을지라도, 베 홑이불을 두르고 벗음 몸으로라도, 그렇게라도 예수님을 쫓아가는 선택을 하였다.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예수님을 절대 버리지 않을거라고… 그렇게 다짐하던 제자들은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갔다. 하지만 이름도 기록되어 있지 않은, 마가라고 추측만 하는 이 청년은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서 예수를 쫓아갔다. 그렇게 쫓아가다가 잡히니 도망갔다. 하지만 그럼에도 계속 예수를 쫓아서 마가복음의 저자가 되었다. 

 

엄청난 헌신, 엄청난 사역, 엄청난 그 무엇인가를 해서 성경에 이름이 나온 위대한 믿음의 영웅이 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그저 자신의 분량만큼 계속해서 예수를 쫓아가는 선택을 했다. 

 

오늘 나의 삶은 어떠한가? 내가 지금 예수를 쫓고 있는가? 화려해 보이는 그 무엇인가를 쫓고 있는 것은 아닌가?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방법으로 예수를 쫓고 있는가? 계속해서 쫓아가고 있는가? 

 

이 이름모를 청년과 같이 계속해서 예수를 쫓아갈 수 있게 되기를 원한다. 작아도, 보잘 것 없어도, 벗고 있어도 그저 그 분의 뒤를 쫓아가기 원한다. 예수께서 보여주시는 것 까지만 쫓아가기 원한다. 주님 나의 마음을 붙잡아 주소서

728x90
반응형
Posted by 신애친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