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Thinking)/Meditation2019. 4. 13. 1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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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 14:22-31 주님이 계시는 그 자리, 갈릴리

 

성만찬 이후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신다. 27절을 보면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제자들의 고백은 베드로가 먼저 자신은 그리하지 않겠다고 말한다 (29절). 그리고 베드로와 모든 제자들이 다시 한 번 말한다.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30절)’ 제자들은 자신에 차 있었다. 어떠한 고난이 와도 그들은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을 용기가 있었다. 절대로 부인하지 않을 자신도 있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를 다 아시고 먼저 말씀하셨다. 

28.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

 

예수님이 먼저 갈릴리로 가겠다고 하신 말씀이 무슨 의미일까? '아마도 너희들이 나를 배신하고, 말씀과 같이 양들이 흩어짐 같이 다 흩어지더라도 내가 먼저 너희들이 있게 될 그 갈릴리에 있을 것이다' 라고 말씀하신 것일 것이다. 우리는 늘 주님을 배반하고, 주님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주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하지만 그럼에도 주님께서는 언제나 우리가 돌아갈 그 갈릴리에 먼저 가서 계신다. 우리가 태어나고 나고 자랐을 뿐만 아니라 실패하고 넘어지고 좌절해서 돌아갈 수 밖에 없는 그 갈릴리로 말이다. 

 

요엘이를 키우면서 이 녀석의 반응을 잘 견디지 못하는 날 보면서 늘 제자리인 것 같을 때가 있다. 

큐티를 하지만 내 삶이 변하지 않는 것을 보면서 내가 늘 제자리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선교사로 살아가지만 여전히 이기적이고, 여전히 다른 사람에 비해서 내가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인정받기 원하는 그 욕구를 보면서 예수를 25년이나 믿었는데도 내 신앙이 제자리에 있는 것 같아 좌절스러울 때가 있다. 

 

그런 나에게 오늘 주님께서는 내가 그 갈릴리에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 같다. 내가 너의 좌절과 실패와 넘어짐과 그 마음의 욕망을 알고 계신다고 말한다. 마치 제자들이 예수님을 배신할 것을 아시면서도 그들의 용감무쌍한 고백을 들으시고 그 이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에서 기다리겠다고 하신 것 처럼 말이다. 

 

입술로는 제자들과 같이 주를 위해 죽을 수 있을 것 처럼 말하지만 여전히 나는 죽기가 싫다. 손해보기가 싫다. 더 움직이고, 더 섬기고 싶지 않은 마음이 가득하다. 하지만 주님께서 그런 나를 아시고 내가 돌아갈 그 갈릴리에서 기다리시고 계신다고 말씀하신다. 그래서 용기가 난다. 주님이 내가 모든걸 완벽하게 해내길 바라시는게 아니라 내가 실수하는 그 자리에서 나를 잘 아시고 나를 돕기위해 기다리고 계심을 말씀을 통해서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도 좌절하지 않기를… 그리고 다시 한번 갈릴리에 계신 주님을 만나 힘을 내기를 원한다. 늘 제자리인 것 같지만 그 제자리는 주님이 함께 계신 바로 그 자리이기 때문이다. 여전히 입술로만 주님을 섬기는 것 같은 나이지만, 부활하셔서 나를 찾아오신 그 주님을 만남으로써 생명도 주를 위해 내놓을 수 있는 그런 믿음을 가지는 내가 되고 싶다. 내가 받은 위로를 요엘이에게 나눠줘야겠다. 아빠도 늘 제자리인 것 같다고… 요엘아 그 자리에 주님이 함께 계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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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Thinking)/Meditation2019. 4. 12. 1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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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 14:12-21 각기 다른 모습으로 다시오심을 준비하는 자들

 

유월절 만찬에 대한 본문이다. 만찬을 하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준비를 해야 한다. 예수님과 제자들의 유월절 만찬이니, 제자들이 준비하든지, 아니면 예수님이 준비하시든지 둘 중의 하나이다. 질문은 먼저 제자들이 한다. 12절에서 ‘우리가 어디로 가서 선생님께서 유월절 음식을 잡수시게 준비하기를 원하시나이까?’ 라고 질문하였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면 자신들이 어디론가 가서 준비하겠다고 말한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은 제자들 너희들도 아니고, 예수님 자신도 아니고 물 한 동이를 가지고 가는 사람을 만나서 그에게 물어보라고 하셨다 (13-14절). 그가 큰 다락방을 예비하여서 제자들에게 열어주었고, 제자들이 거기서 유월절 음식을 준비하였다. 

 

도대체 그 물동이를 지고 가던 사람은 누구인가? 도대체 그는 왜 자신의 다락방을 예수님을 위해 열어 주었는가? 우리는 그가 누구인지를 모른다. 왜 그랬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또한 예수님께 쓰임받은 사람 중에 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초림의 길에, 특별히 십자가를 지시는 길을 준비한 사람이었다.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딱 한번 이 곳에 등장하였다. 물론 그 이후에 그가 어떤 사람이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성경이 기록하지 않기 때문에…

 

하지만 어제 예수님의 머리에 향유를 부은 여자와 같이 물 동이를 가지고 가던 이 사람 또한 예수님의 길을 준비한 사람이었다. 그가 다락방을 열어서 예비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예수님이 제자들을 위해 발을 씻기는 것을 볼 수 없었을 것이고, 성만찬도 볼 수 없었을 것이다 (물론 예수님이 다른 방식으로 하셨겠지만…).

 

결국 우리의 역할이 다르고, 예수님을 만난 시기가 다르고, 예수님의 길을 준비하는 모습이 다르지만 우리가 그 분을 사랑함으로 하는 모든 일은 그 분의 길을 준비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사랑함으로 향유를 부었고, 사랑함으로 자신의 다락방을 열어드렸다. (물론 본문 어디에도 물동이를 지고 가던 사람이 예수님을 사랑했다든지 혹은 제자였다고 말하진 않는다. 하지만 단순한 기적의 사건으로만 보려고 하지 않는다면 얼마든지 추측이 가능하다고 본다) 우리는 여러 각기 다른 모습으로 그 분의 다시오심을 준비하는 자들인 것이다. 

 

마리아가 향유를 부은 것처럼, 자신의 다락방을 열어 드린 것처럼 우리는 오늘도 그 분의 재림을 준비하는 하루를 보내고 있다. 16절에서 언급하고 있는 것 처럼 ‘말씀대로… 준비하니라’ 우리는 말씀을 쫓아 오늘도 재림을 준비하는 하루를 보내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오늘 하루를 쉬이 보낼 수 없다. 오늘 하루를 그냥 어제와 같이 보낼 수 없다. 오늘도 말씀대로 순종하며 준비하는 삶을 살아내야 하는 것이다. 

 

송끄란 연휴기간이라고는 하지만 요즈음 독서를 좀 소홀히 했다. 태국어 공부도 조금 소홀히 했다. 다시 한번 마음을 정하고 준비하기 원한다. 예수님의 다시 오심을 준비하는 오늘 하루가 되도록 대충 살지 않고, 대충 보내지 않기 원한다. 오늘도 나는 준비하고 있는 자로 깨어 있기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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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Thinking)/Meditation2019. 4. 11. 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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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 14:1-11 허비?? 준비!!

 

내가 성경에서 참 좋아하는 본문이다. 예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향유 옥합을 예수님의 머리에 붓는 여인과 돈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에 대해서 비난하는 예수님의 제자… 뭔가 선명한 대비가 되는 본문이다.

 

오늘 예수님은 가난한 자들을 돕지 말라고 말씀하신게 아니었다. 그들을 원하는대로 도우라고 말씀하신다 (7절). 하지만 때로는 가난한 자들을 돕는 것 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고 말씀하신다. 그것이 오늘은 여인의 향유를 깨뜨려 부어 예수님의 장례를 미리 ‘준비'하는 것이었다. 예수님께 좋은 일을 하는 것이 가난한 자들을 돕는 것 보다 더 우선시 되어야 한다. 그것이 오늘 주님이 하신 말씀하신 것이다. 

 

가난한 자를 돕는 것보다 예수님께 좋은 일을 하는 것, 그것은 때때로 아니 종종 사람들에게 불편함을 줄 수 있다. 오늘 본문에서는 '어떤 사람들이 화를 내어 서로 말하되 (4절)’ 라고 말하고 있다. 예수님을 위해 좋은 일을 할 때, 그것을 비난하고 비판하는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들은 또한 향유를 ‘허비’한다고 비난한다. 어떻게 보면 그들의 판단은 합리적이다. 계산해보면 그들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그들의 눈에 낭비 같아 보이는 일을 우리는 지금 시간과 물질과 열정을 사용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허비’같이 보이는 일을 예수님은 ‘준비’라고 말씀하신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 일을 해야만 한다

 

합리적인 생각을 넘어서, 때로는 사람의 눈에 중요해 보이는 일을 넘어서, 예수님께 좋은 일을 하는 내가 되기를 원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내 인생의 ‘낭비’가 아니라 주님의 오실 길을 ‘준비’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람들의 판단에 목숨걸지 않기 원한다. 그들이 뭐라고 말하던 예수님께 좋은 일을 뚝심 있게 해 나가는 내가 되기를 원한다. 물론 독선적으로 나만 옳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준비’할 수 있게 되기를 원한다. 

 

오늘 우리 형제, 자매들 중에서 송끄란(태국 설날임)때도 기숙사에 남아 있는 형제, 자매들과 함께 점심식사를 하려고 초청했다. 어제 저녁부터 청소하고, 아내는 음식을 준비하고 바쁘다. 함께 식사와 교제함을 통해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 가족임을 그리고 예수님의 사랑과 우리 가족의 사랑이 그들에게 흘러 가기 원한다. 짧은 교제의 시간이지만 이 시간을 하나님께서 축복해주시길 원한다. 그리고 오늘도 이 모임을 통해서 예수님께 좋은 일을 하며 ‘준비’하는 우리 가정이 되기를 원한다. 

 

매일 이렇게 예수님께 좋은 일을 하며 예수님의 다시 오심을 ‘준비'할 수 있기를 원한다. 오늘도 향유를 부을 수 있기를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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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Thinking)/Meditation2019. 4. 10. 1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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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 13:28-37 깨어 있으라

 

결국 우리는 시대를 분별하는 눈을 가져야 한다. 28절의 말씀처럼 무화과나무가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가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 아는 것 처럼 인자가 오는 때의 그 징조를 보고 우리는 그 때가 가까운 줄을 알아야만 한다. 그런데 32절 부터는 그 날과 그 때를 아무도 알지 못한다고 말씀하신다.  천사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신다고 하셨다 (34절). 그러고 하시는 말씀은 깨어 있으라는 것이었다. 

 

시대가 분별이 되었다면 예수 그리스도가 오신 그 이후 부터의 모든 시대는 예수께서 다시 오심을, 그리고 이 땅을 회복시키실 것이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땅을 심판하실 것임을 기다리는 세대가 되었다. 우리가 분별하든 분별하지 못하든 재림의 날이 오늘 또 하루가 더 가까워졌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깨어서 분별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말씀은 어느 누구에게만 하신 것이 아니라 모든 자에게 하신 하나님의 말씀이다 (36절). 우리는 지금 깨어 있어야 한다.

 

단순히 졸지 않는다고 우리의 삶이 깨어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깨어있으라'는 것은 단순히 자지 말라는 말이 아니다. 시대를 분별하고, 그리스도 인으로써 그 안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고민하고, 새 하늘과 새 땅이 임하기 전까지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살아내라는 말이다. 멍하게 있으면, 정신 줄 놓고 있으면 절대로 깨어 있을 수 없는 것이 우리의 삶이다. 멍 놓고 있으면 세상이 주는 가치관에 물들고, 그것의 위험성도 깨닫지 못하고 따라가게 되는 것이 지금 우리의 삶이다. 

 

어제 아내와 좀 오래 대화를 나누었다. 내가 그 동안 멍놓고 지냈던 부분들에 대해서 깨닫는 시간이었다. 아이들에게도 아빠란 권위로 나도 모르게 짖눌러서 내가 원하는 아이로 만들려고 하는 것을 보게 되었다. 혼자 생각했던 것은 그간 내가 깊이 생각하지 못하고, 중요한 것을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내가 그냥 하던대로 일반적으로 다른 사람이 하던대로 하며 쫓아가고 있었다는 것이었고, 무척이나 후회가 되었다. 깨어 있지 못했기에 아내와 아이들이 나로 인해 힘들었던 것이었다. 

 

좀 더 정신을 차려야겠다. 그냥 사니까 사는 삶이 아니라, 복음으로 정말 살아내는 삶을 살아가고 싶다. 아내의 어려움을 이해해주는 남편이 되고 싶다. 아이들에게 아버지의 권위로 누르는 자가 아니라 아이들과 정말 마음이 통하고 대화가 통하는 아버지가 되고 싶다. 세대를 분별하는 크리스챤이 되고 싶다. 정신 차리고 나를 세상을 돌아보자. 마지막이 가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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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 13:1-13 복음을 전파해야 한다

 

끝, 마지막은 반드시 온다. 그것이 어떠한 형태로 오든지간에 말이다. 

우리의 삶에도 죽음이라는 끝이 온다. 과학자들에 따르면 (그들이 신앙이 있든 없든간에…) 이 우주에도 언젠가 종말이 있을거라고 말한다. 무엇인가가 시작이 되었다면 당연히 끝도 있는 것이다. 

 

마지막이 올 것을 아는 자의 삶은 언제나 그 마지막을 준비해야 한다. 오늘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그 마지막이 올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준비하라고 말씀하신다. 특별히 예수의 이름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그 마지막에 매질과 권력자들과 임금 앞에 서야 함을 말씀해주신다 (9절). 하지만 그럼에도 무엇을 말할지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신다. 왜냐하면 성령께서 우리의 할 말을 주장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핍박을 생각하면 두렵다. 그럼에도 예수님께서는 10절에 '또 복음이 먼저 만국에 전파되어야 할 것이니라'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내가 반드시 죽게 되고, 이 세상에 마지막은 반드시 오게 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해야 할 일은 먼저 만국에 복음을 전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마지막이 두려워 벌벌 떠는 자가 아니라 마지막을 알기 때문에 더 열심으로 복음을 전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마지막이라는 두려움이 나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그 마지막까지 나와 함께 하시며 그 마지막을 다른 시작으로 만들어 가시는 분과 내가 동행하기 때문에 더이상 두려워하지 않고, 더 지금 해야 할 일에, 지금 해야만 하는 일에 충성해야 하는 것이다.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이 바로 이 10절 말씀이다.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다. 내가 하는 말로, 삶으로 태국의 영혼들에게 복음을 전파해야 하는 것이 마지막을 아는 내가 해야 할 일이다.특별히 어제는 주일 설교였다. 주일 설교를 통해서 복음을 전했다. 말을 통해 우리 형제, 자매들에게 복음을 전한 것이다. 이제 나머지 6일은 내가 삶을 통해 그들에게 복음을 전할 차례이다. 송끄란 휴일이라 많지 않은 형제, 자매들이 샬롬 기숙사에 남아 있다. 송끄란은 여기 설날인데,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 그들과 함께 더 가족의 교제할 수 있는 이번 한 주가 되기를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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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 12:13-27 산 자의 하나님께서 동행하신다

 

부활이 없다고 믿는 사두개인들이 (18절) 예수님께 부활에 대해서 묻는다. 아무리 봐도 정상적인 물음이 아니다. 예수님을 어려움에 빠뜨리고 싶어 하는 의도이다. 13절 표현에 의하면 예수님을 책잡으려 하는 행동이다. 부활에 대한 질문은 결국 다 죽고 나서 어떻게 될 것이냐에 대한 질문이다. 이 땅에서의 부활의 삶을 살아내는 삶 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 천국에 가는 것이라는 질문에 불과하다.

 

예수님은 이러한 그들에게 우문현답을 하신다. 중요한 것은 너희들이 죽어서 천국에 가서 만나는 하나님이 아니라 지금 이 땅에서 살아서 만나는 하나님임을 이야기 하고 계신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살아계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27절). 하나님은 우리에게 단지 천국에 가기 위한 티켓을 주시기 위해, 그 티켓을 얻어 그 천국이라는 곳에서 만나기 위해 존재하시는 분이 아니다. 오히려 지금의 일상의 삶에서 늘 함께 하시며 우리의 삶에 늘 간섭하시고, 나의 일거수 일투족을 아는 분이 우리 하나님이신 것이다. 왜냐하면 그 분이 바로 살아계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은 아브라함의 그 갈 바를 알지 못하고 약속의 땅을 향해 가는 삶 속에서 아브라함의 하나님을 만났고, 

이삭은 이삭의 잠잠하고 조용한 일상의 삶 속에서 이삭의 하나님을 만났고,

야곱은 야곱의 그 힘들고 두려운 삶을 이겨내기 위해 속이고, 또 속임받는 삶 속에서 야곱의 하나님을 만났다. 

 

오늘 내가 만나야 할 하나님, 내 삶의 여정 속에서 만나야 할 하나님을 내가 만나고 있는가? 

아브라함과 같이, 이삭과 같이, 야곱과 같이... 내 삶의 고단하고 피곤한 여정을 나와 함께 걷고 계신 그 분을 만나고 있는가? 

죽은 자의 하나님, 단순히 내가 천국에 가서 만날 하나님이 아니라 지금의 오늘을 함께 하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고 있는가? 

 

하나님께서 산 자의 하나님이라는 사실은 나에게 큰 위로가 된다. 나그네와 같이 살았던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삶에 함께 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지금 오늘을 살고 있는 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아시고, 우리를 돌보신다. 이렇게 묵상하면서도 이사를 생각하면서 수 많은 고민을 하게 된다. 하나님이 아시고, 하나님이 동행하심에도 이 고민들이 떨쳐지지 않는다. 아이들의 통학을 고려하고, 교회와의 사역지와의 거리를 고려해 위치를 고민하고, 렌트비와 이사에 따른 재정을 고려하고, 앞으로의 사역 방향과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어떤 것인지를 고민한다. 무엇도 한 가지 쉬운 것이 없다. 

 

하지만 그래도 감사한 것은 산 자의 하나님께서 나의 이런 고민 가운데 함께 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이시고, 고민은 고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런 고민과 생각들 가운데 함께 하신다. 모든 것을 다 말씀해주시지 않아도, 모든 것을 다 깨닫게 해주시지 않아도, 한 걸음 한 걸음 내딛게 하신다. 

 

두려워 말자. 나는 산 자와 함께 하시는 살아계신 하나님과 함께 걷고 있다. 

내 두려움과 고민, 생각들을 주님께 더 나누고 올려드리자. 주님이 지금 함께 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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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 12:1-12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아는)지혜와 (내게 주어진 구역을 아는)은혜

 

농부들은 세를 내고 이 포도원에서 지냈다. 포도원을 만들고 산울타리를 두르고 즙 짜는 틀을 만들고 망대를 만든 사람이 주인이다 (1절). 그런데 그 사실을 잊어버린 것인지 아니면 잊기를 원한 것인지… 그들은 주인이 포도원 소출 얼마를 받기 위해 보낸 종들을 다 죽였다 (3-5절). 아마도 주인이 1절에서 타국에 갔다고 하니 그 동안 자신들이 주인이 될 수 있을거라 생각한 것 같기도 하다.

 

주인이 누구인지 모르면, 주인이 지금 같은 공간이 아니라 다른 곳에 있다고 생각하면 사람이 이렇게 뻔뻔해진다. 주인이 아니면서 주인행세를 하게 되는 것이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지구, 그 위에 우주, 내가 먹고 있는 물, 숨쉬는 공기, 그리고 심지어 내 몸까지 내가 만든 것이 하나도 없다. 내가 안 만들었다면 만드신 그 누구인가가 있다는 것이고, 그 분이 창조주 하나님이시다. 그런데 내가 만들지 않았으면서도, 내가 이 모든 것들에 주인행세를 하려는 것은 이 농부들과 비슷한 행동이다. 

 

결국 주인행세를 하는 농부들은 그 주인이 왔을 때 진멸당하고, 포도원은 다른 사람들에게 주게 된다 (9절). 분명히 이것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은 이스라엘을 향한 경고이다. 하지만 또한 마찬가지로 창조주를 무시하고 내 삶의 주인이 내가 되려는 자들에게 주시는 경고임에 분명하다. 오늘 내 삶에, 내 하루에, 내 일상의 주인은 누구이신가? 주인되신 하나님이신가? 아니면 농부와 같은 나인가?

 

주인 행세를 하는 그 마지막은 진멸이다 (9절). 내가 주인이 아닐 때에는 결코 주인이 되려고 해서는 안된다. 내가 주인이 아님을 내 주변의 모든 자연과 이 땅과 하늘이 증명하고 있지 않은가? 그렇기에 내가 누구인지,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아는 것이 지혜가 되는 것이다. 내게 줄로 재어진 구역이 어디인지를 알고 그 구역 안에 머무르는 것이 은혜이다. 오늘도 그 지혜와 그 은혜로 하루를 살아내기 원한다. 그 지혜와 은혜가 있었던 이가 바로 세례요한이었다. 그의 고백과 같이 주인이신 하나님은 흥하시고, 농부와 같은 나는 쇠하는 그런 하루가 되기를 원한다.

 

특별히 내가 살고 있는 (내게 주어진) 구역을 옮기려고 집을 보고 있는 중이다. 이사는 언제나 쉽지 않다. 이사를 하면서 늘 느끼는 것은 내가 나그네라는 것이다. 한국에서 이사할 때에도 '이렇게 집이 많은데 왜 내가 살 집은 없지?’라는 생각이 많이 했었다. 지금 태국에서는 더 많이 그런 기분을 느낀다. 우리 가정의 상황과 재정에 맞는 집을 찾는 일이 정말 쉽지가 않다. 그래도 분명히 우리가 머물 곳이 분명히 있을 것이고, 우리는 그것을 확실히 알게 될 것이다 (영광교회 주변에 빈 집이 별로 없다는 것을 새롭게 알게 되었다). 하지만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 분의 선하신 계획대로 인도하실 줄을 믿는다. 왜냐하면 그 분께서 나를 이 곳으로 이끌어 오셨고, 그 분이 나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가장 좋은 길로 우리를 인도해주시기를… 

그 은혜가 정해주시는 구역 안으로 들어가길 원한다. 

저희 가정의 상황에 맞는 적절한 집을 만날 수 있게 기도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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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 11:20-33 권위의식이 아니라 소명의식으로 사는 사람이 되자

 

오늘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의 권위에 대해 묻는다. 한 마디로 우리는 권위가 있는 대세사장과 서기관들인데, 너는 쥐뿔도 없는 시골 나사렛 출신의 촌놈 아니냐? 니가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 와 같은 질문이다. 아마도 목사나 선교사로 따지면 '너 어디서 안수 받았어? 너 어느 파송교회 출신이야?' 정도의 질문일 것이다. 예수님을 한마디로 출신도 잘 모르고, 권위도 없어 보여 믿을 수 없는데 기적이 일어나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 이것에 대해서 그들은 동의할 수 없는 것이다.

 

이들의 말이 어느정도는 맞다. 권위는 주어지는 것이다. 권위는 내가 가지고 싶다고 가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내가 내 스스로에게 권위를 부여할 수도 없다. 권위는 위로부터 오는 것이다. 요한의 세례의 권위가 하늘로 부터 오는 것과 같이 예수님의 권위도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다. 우리는 그 권위를 따라야 한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주신 하나님의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서도 예수님은 그 권위에 대해서 따로 말씀하시지 않았고, 권위를 내세우지도 않으셨다. 그런데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는 왜 권위가 필요했을까? 그들은 자신의 기득권과 자신들의 지위를 지키기 위해서 권위가 필요했던 것이다. 즉 자신의 이기적인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권위라는 것을 이용한 것이고, 그 인간의 권위라는 것은 오히려 하늘로부터 내려온 권위들을 박살내고 있다. 세례요한이 그렇게 죽었고, 이제 예수님에게까지 왔다. 예수님을 그들의 권위로 찍어누를 셈이었다. 

 

하나님의 말씀과 주신 사명 위에는 별로 권위가 필요없다. 하늘로부터 내려오고, 사람들이 인정한다. 하지만 우리의 것, 그 무엇인가를 지키기 위해서, 내가 다른 사람보다 높다는 그 어떠함을 누리기 위해서는 인간이 세운, 인간들이 만들어내는 권위가 필요하다. 모든 권위가 필요없고, 권위는 나쁜 것이란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어떠한 사람인가? 위로부터 오는 권위가 있는가? 

그게 아니라 내 지위, 나의 우월함을 표현하기 위해 사람들이 세워가는 권위에 나를 기대는가?  나는 도대체 어떤 사람인가? 

권위의식이 아니라 소명의식으로 사는 사람이 되기 원한다. 

대접받고 싶고, 상석에 앉고 싶고, 누군가가 나를 알아주기를 원하는 그런 권위가 나를 이끌어 가지 않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하나님께서 주신 소명이 나를 이끌어가는 그런 삶을 살아내고 싶다. 내 스스로의 권위로 나를 증명하려고 하지 말고, 오직 말씀으로 나의 소명으로 나의 삶을 살아내고 싶다. 

 

아이들에게, 아내에게…

그리고 우리 형제, 자매들에게…

권위가 아니라 사랑으로, 소명으로 이들을 대하고 싶다. 

 

정말 나는 내가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너무 커서 사랑과 소명이 나의 삶을 이끌어 가는 것이 힘들다. 

하지만 실패해도, 잘 안되어도 오늘 다시 말씀을 붙들고 예수와 같이 소명의식으로 살아내기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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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 11:1-19 이해되지 않아도 순종하기

예수님은 화려하고, 아름다운, 기수가 타기 쉽게 잘 길들여져 있는 백마가 아니라 아무도 타보지 않은 나귀, 즉 보잘 것 없고, 어리고, 훈련되지 않아 그다지 가치가 없는 나귀를 타셨다 (2-7절). 세상을 구할 메시아의 모습으로 전혀 어울리지 않는 모습으로 오셨다. 왜냐하면 하나님 나라가 그러한 모습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어린아이가 큰 자이고, 섬김을 받아야 하는 스승이 제자들을 섬겨 발을 씻기는 곳이 하나님 나라이기 때문이다. 하나님 나라는 거꾸로의 왕국(Upside-down Kingdom) 이다.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아무도 타보지 않은 나귀를 타신 일 처럼 세상을 구하는 일, 세상을 변화시키는 일은 이와 같이 사람들의 생각과 눈에 어색하고 이상하게 보이는 일 일지도 모른다. 높은 곳으로 높은 곳으로 올라가려는 모습이 아니라 낮은 곳으로 낮은 곳으로 내려오려는 모습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어 가는 것이다.

제자들이 예수님이 왜 아무도 타지 않은 나귀를 풀어 오라고 하였고 (2절), 또 누군가 물었을 때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지를 알려주셨을 때 그들은 순종했다 (3-4절). 제자들이 얼마전까지 어떤 태도였는지를 안다면 이 사건은 당연하 일은 아니다. 그들은 예수께서 십자가를 져야 함을 이야기 하셨을 때 누가 더 높으냐를 두고 싸웠던 자들이 아닌가? 여전히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다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들은 순종했고, 그들의 순종을 통해서 예수님은 구약 말씀을 성취하셨다. 

결국 중요한 것은 우리의 이해의 여부가 아니라 우리가 말씀에 순종하였는가? 아니면 순종하지 않았는가? 의 문제이다. 왜냐하면 하나님 나라의 확장과 하나님의 일이 우리에게 속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주님께서 하시는 일이기 때문이다. 마태복음 28장의 대사명을 보면 '하늘과 땅의 권세를 내게(예수 그리스도에게) 주셨으니' 라고 말씀하고 있다. 우리가 할 일은 순종하는 일이다. 이 순종이라는 것이 때로는 나귀를 풀어 오는 것과 같이 쉽고 하찮아 보이는 일 일수도 있다. 때로는 우리의 한계와 생각을 넘어선 큰 일 일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이든, 주님께서 말씀하시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순종하는 것이다. 

여전히 이해가 되지 않는 순종은 어렵다. 자꾸만 주님께 물어보게 된다. 물어보는 것이 결코 잘못된 일이 아니다. 하지만 순종을 내 이해의 한계로 좁혀서 내가 이해되는 것만 순종하고, 이해되지 않는 것은 순종하지 않는 그런 자가 되지 않기를 원한다.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기 때문에 온전히 순종할 수 있는 내가 되기를 원한다. 그것이 내가 왕이라고 생각하는 예수께서 작은 나귀새끼를 불러오는 것과 같은 하찮아 보이는 일, 혹은 뭔가 어울리지 않고, 이상한 일이라도 할지라도 순종하기 원한다. 

오늘 내가 순종해야만 하는 나귀새끼를 불러오는 것 같은 일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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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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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 10:46-52 예수를 따르는 자

 

구원받은 자의 삶이 어때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본문이라고 생각이 된다. 바디매오라는 맹인 거지가 나사렛 예수께서 오신다는 이야기를 듣고 사력을 다해 예수를 부른다. 그의 부름은 걸어가시는 예수를 멈추어 세웠다 (46-48절).

 

예수께서 자신을 부르신다는 소리를 듣자 마자 그는 겉옷을 내버리고 뛰어 예수 앞으로 나아갔다 (49-50절). 그에게 예수께서 자신을 부르시는 소리보다 더 귀한 것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예수 앞으로 나아가면 고침 받을 수 있을거란 확신이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자신이 보는 것에 비해 하찮은 겉옷은 버리고 갔다. 팔레스타인의 기후에서 겉옷이란 밤의 추위를 막아줄 수 있는 것으로 옷이 없을 경우 밤에 얼어죽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바디매오는 그런 것에도 연연하지 않았다. 지금 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그가 고침을 받아 낫게 되는 것이었다. 

 

그의 간절함이 예수님을 멈추시게 하였고, 예수님으로부터 구원받게 하였다. 맹인이 보게 되는 것을 구원이라 말하고 있다 (52절). 예수께서는 영혼의 구원을 말씀하지시 않았지만 그가 보게 되는 것이 구원임을 분명히 말씀하셨다. 영혼의 구원 뿐만 아니라 삶의 모든 영역에서 놓임을 받는 것, 회복되는 것, 그리스도 안에서 새 몸을 입는 것, 새 하늘과 새 땅이 회복되는 것, 이 모든 것이 마찬가지로 중요하다.

 

그는 구원받고 예수를 길에서 따르게 된다. 다르게 표현하면 구원받자 마자 예수를 그 길로 따라 가게 되었다. 그는 전직 거지였다. 맹인인 그가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그는 예수를 따르게 된다. 예수의 제자로 살아가게 된 것이다. 그것도 즉시로 말이다. 때때로 나의 삶에 이렇게 예수를 따르는 급진적인 믿음이 필요할 때가 있다. 예수를 만나고도 주춤 주춤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읽으면서도 ‘나는 아니야’ 라는 생각으로 예수를 쫓아가기를 두려워 하고, 부인할 때가 얼마나 많은가? 구원받은 자의 삶은 반드시 예수를 따라가야 하는 삶이다. 바디매오는 그것을 보여준다. 

 

물론 얼마나 다른가? 그의 삶을 심플 그 자체였을 것이다. 가족도 없고, 돈도 없고, 가진 것도 없고... 예수를 따르는데 별로 걸리는 것이 없었을 것이다. 그의 래디컬한 헌신과 나의 복잡 다단한 삶을 비교하다보면 답이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내가 지금 예수님을 따라가고 있다는 것이다.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일시적인 결단이 아니다. 아마도 평생의 삶의 방향이고, 평생의 삶의 모습이고, 나의 삶 자체를 말하는 것일 것이다. 복잡 다단하더라도 중요한 것은 오늘도 그 분을 따라가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믿는 자의 삶에 표징이기 때문이다. 내 삶이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그 분을 따라가지 않는 삶을 사는 이중적인 모습의 삶이 아니길 원한다.

 

구원받은 자는 당연한 전도, 선교해야 한다는 말에 나는 선교사로 헌신했다. 그리고 지금 태국에서 선교사로 사역중이다. 마찬가지로 구원받은 자의 삶이 예수를 따라가는 것 또한 당연한 것이기에 오늘도 예수를 따라가기 원한다. 선교라는 것이 아마도 일에 관련된 내용이라면(물론 삶을 가르치는 용어이기도 하다)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우리의 삶의 모습을 표현하는 용어일 것이다. 오늘도 이 바디매오와 같이 예수를 따르는 자가 되기를 원한다. 복잡 다단한 인생 속에서 내 삶의 방향을 확실하게 정하기 원한다.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은 자의 삶이 아니라 예수를 따라가도 되고, 힘들면 안따라가도 되는 그러한 삶이 아니라, 예수를 위해 내 삶을 기꺼이 내어 드리는 그러한 믿음의 따름이 내 삶에 있기를 원한다. 

 

두려워 말자. 예수가 나의 힘이다. 

예수가 나의 힘이다.

예수가 나의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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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