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Thinking)/Meditation2019. 6. 15. 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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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30:18-26 주와 같이 길 가는 것 즐거운 일 아닌가? 

 

하나님은 그를 기다리는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며, 긍휼히 여기신다 (18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우리를 기다리시는 이 하나님을 기다리는 것이다. 주님 보다 앞서서 가거나 혹은 뒷쳐져서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기다리고 그 분이 말씀하실 때 움직이며, 혹시 아직 말씀하시지 아니하셨다면 그 분이 말씀하실때까지 기다리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그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분별할 수 있을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스승을 숨기지 아니하시기 때문이다.

 

20 주께서 너희에게 환난의 떡과 고생의 물을 주시나 네 스승은 다시는 숨기지 아니하시리니 네 눈이 네 스승을 볼 것이며

 

우리의 삶에 일어나는 환난과 고생을 감하여 주시는 것은 아니다. 예수를 믿어도 여전히 인생에 어려움과 힘든 일들은 반복해서 일어나게 된다.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길을 잃고 방황하지는 않게 된다. 왜냐하면 그 스승을 통해서 우리 뒤에서 바른 길을 말씀해주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제 그 분의 인도하심을 쫓아 걸어갈 수 있게 된 인생이 된 것이다. 이 선생은 말씀되시는 예수님이시며,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이시다.

 

21 너희가 오른쪽으로 치우치든지 왼쪽으로 치우치든지 네 뒤에서 말소리가 네 귀에 들려 이르기를 이것이 바른 길이니 너희는 이리로 가라 할 것이며

 

지금 나에게 가장 필요한 말씀일 것이다. 어떤 길로 가야 할지, 어떤 모습으로 섬겨야 할지 아직 확실하지 않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 선생의 인도하심을 따라 걸어가기 위해서 몸부림 치면서 이 말씀의 인도하심을 쫓아 지금 이 자리 까지 왔다는 것이다. 두려워하지 말자. 인도하시는대로 간다면 주님이 하실 것이다. 그리고 온전하신 일곱의 일곱의 은혜가 임할 것이다.

 

26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의 상처를 싸매시며 그들의 맞은 자리를 고치시는 날에는 달빛은 햇빛 같겠고 햇빛은 일곱배가 되어 일곱 날의 빛과 같으리라

 

우리를 끝까지 기다리실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이 스승을 숨기지 아니하시고 우리의 삶을 인도하시는 선하신 하나님을 찬양한다. 지금은 두렵고, 지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더라도 하나님이 광야에 길을 내시고, 사막에 강을 내실 것을 기대한다. 그때까지 이 스승을 열심히 쫓아가기 원한다. 그리고 19절의 말씀처럼 부르짖는 소리라 주님을 찾는 자가 되기를 원한다. ‘그가 네 부르짖는 소리로 말미암아 네게 은혜를 베푸시되 그가 들으실 때에 네게 응답하시리라’

 

두려워 하지 말고 주시는 말씀따라 신나게 따라가자. 우리의 인도자 되시는 그 분과 함께 가는 이 길이 어찌 즐겁지 않으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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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Thinking)/Meditation2019. 6. 13. 0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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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29:15-24 하나님께 맡기는 걸음 

 

15절은 '자기의 계획을 여호와께 깊이 숨기려 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로 시작하고 있다. 우리는 아무도 우리의 계획을 하나님으로부터 숨길 수 없다. 왜냐하면 그 분은 완전하시며,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사도바울은 고전 1:25에서 이렇게 고백한다.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무엇인가를 숨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자체가 우리가 하나님 보다 뛰어나다 혹은 하나님과 동등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바로 아담이 했던 것 처럼 말이다. 아담은 뱀의 꼬임에 넘어가 선악과를 먹고 그들의 벗은 것을 알게 되어 여호와를 피해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다 (창 3:8). 하나님은 아담을 부르신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에 있느냐’ 

 

하나님께서는 아담이 어디에 있는지 몰라서 찾기 위해서 부르신 것이 결코 아니다. 하지만 아담은 자신이 하나님과 같은 존재이기 때문에 숨으면 그 분의 눈에서 자신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마치 오늘 본문에서 자신의 계획을 숨기고, 하나님을 무시하고 토기장이에 대해 대적하는 사람처럼 말이다. 

 

이렇기에 하나님께 우리의 계획을 내어놓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아 걸어가는 삶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잠 19:21 ‘사람의 마음에는 많은 계획이 있어도 오직 여호와의 뜻만이 완전히 서리라’

 

오늘도 주님께 묻는다. 큰 걸음 뿐만 아니라 세세한 걸음까지 묻기 원한다. 물을 때 듣게 되고, 듣게 될 때 순종하게 되기를 원한다. 

하나님께 내 계획을 내어놓고, 오히려 놀랍도록 인도하시는 여호와의 지혜를 경험하게 되기를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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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Thinking)/Meditation2019. 6. 12. 1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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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29:1-14 사랑한다면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입술이 아니라 마음으로 해야 하는 것이다. 
13 주께서 이르시되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 하며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나 그들의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

중요한 것은 입술도 아니고, 계명을 지키는 것도 아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내 마음이 어디에 있는가? 의 문제이다. 지금 내 마음이 어디에 있는가? 

한국에 돌아와서 몇 일 지내다 보니 이 일상적인 상황들이 참 감사하게 느껴졌다. 아이들이 할머니와 함께 티비를 보는 일, 아버지 항암 치료를 받으러 입원하신 병원에 가서 아이들과 재잘재잘 이야기하며 손을 잡아 드리는 일, 편의점에 들어가서 너무나 많은 한국 식품들과 과자들, 그리고 싼 가격 (태국은 한국 제품이 비싸다)에 놀라게 되고… 아이들은 한국이 너무 좋다고 계속 이야기 하고… 한국말로 나오는 티비, 한국말로 편하게 의사소통이 가능한 모든 장소… 한국이 참 좋은 곳임을 다시 느낀다. 

하지만 우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한국이 아니라 태국에서 지내기로 결정한 선교사다. 지금 내 마음은 어디에 있는가? 
이 일상적인 편안함에 있는가? 아니면 영혼들에 가 있는가? 
선교사로써 이런 일상의 기쁨을 누리면 안된다는 것도 아니고, 이 감사한 일들이 필요하지 않다는 이야기도 아니다. 
다만 더 중요한 것은 이러한 상황과 관계없이 내 마음이 지금 어디에 있느냐에 관한 것이다.

주님이 주신 이 좋은 기회들에 감사하고, 입술로만 선교사의 모습이 아니라 내 마음이 그 곳의 영혼들에 가 있는 선교사가 되기를 원한다. 
사랑한다는 것은 입술로만 할 수 없는 것이다. 사랑한다는 것은 마음으로 하는 것이다. 
입으로만 하나님 사랑하고, 입으로만 선교사의 삶을 살아내는 자가 되지 말자. 

오늘도 한국에서 태국의 영혼들을 위해 기도하며, 태국어 성경을 읽으며 그 곳을 기억하는 하루가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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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27:2-13 누가 내 삶의 포도나무이고, 누가 내 삶의 포도원지기인가?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포도원지기가 되신다. 그 분께서 포도원을 우리를 위해 경영하신다. 물을 주고, 밤낮으로 간수하며 아무든지 이를 해치지 못하게 하신다 (3절). 예수님께서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고 말씀하신 말씀보다 더 확실하다. 우리는 예수라는 포도나무의 접붙임 받은 가지이다. 예수라는 포도나무가 뿌리를 내려있는 포도원을 경영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내가 내 힘으로 자라는 것도 아니고, 우리는 그저 접붙임 받아 있으면 되는 것이다. 예수께 딱 붙어 있으면 되는 것이다. 포도원 주인은 하나님, 우리가 붙어 있는 나무는 예수 그리스도… 

이 사실 만으로도 충분하다...

 

이 사실이 우리가 우리의 인생을 살아감에 있어서, 또 주의 일을 함에 있어서 두려워 할 필요도 없고, 우리가 염려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일이고, 하나님의 일하심이고, 하나님께서 하는 일에 우리는 가지로, 아주 작은 포션으로 참여하는 자들인 것이다. 오늘 오전에 오랫동안 주 안에서 교제하던 한 누나를 만나며 나눈 내용도 그렇다. 하나님이 아버지이시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우리는 그냥 뒤를 따라 가면 되는 것이다. 

 

가지는 뿌리로 부터 모든 영양분을 받는다. 가지 스스로 하는 일이 없다. 나무에서 꺾여 나가면 죽는다. 그런데 그 나무는 예수님이다. 

그리고 그 나무를 아껴주고, 물을 주고, 간수하는 하나님이 그 나무를 키우신다. 그런데 무엇이 두려우라? 

 

내가 한다는 생각, 내가 돕는다는 생각, 내가 변화시킨다는 생각만 버리면 된다. 

내가 접붙임 받아 있는 나무가 누구인지 (예수 그리스도), 이 나무를 키우는 분이 누구이신지 (하나님)를 알면 충분하다. 

한국에 와서 해야 할 일들이 많다. 만나야 할 사람, 나눠야 할 것들, 앞으로 해야 할 일들, 요엘이 상담과 치료, 아버지의 항암치료 및 양쪽 가정 방문 등…

하나 하나 생각하면 쉽지 않다. 

 

하지만 내가 하는 일이 없다. 포도나무 되신 그리스도께서, 그 포도원을 경영하는 주님께서 인도하심을 신뢰한다. 

두려워하지 않고, 그 분이 일하심을 보기 원한다.

누가 포도나무인지, 누가 포도원지기인지 확실하게 보는, 경험하는 오늘이 되기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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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24:14-23 선지자의 마음,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

 

심판을 당하는 자, 그리고 그 심판을 피하게 된 자의 모습이 극명하게 드러난다. 심판을 당하는 자들은 그들의 삶에서 하나님을 무시하고, 그들 자신을 의지했던 자들 이었지만 심판을 면한 자들은 그들의 삶에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사랑했던 자들이었을 것이다. 물론 이 조차도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우리가 어찌 하나님을 붙들 수 있었겠는가? 우리의 힘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분만 의지했다고 어찌 말하겠는가 만은…

 

두 가지 모습이 보인다. 

그 남은 자들의 찬송 속에서 자신에게 화가 있다고 말하는 선지자 이사야의 모습과…

땅의 왕들을 벌하시는 그 자체가 하나님의 영광이 된다고 말하는 선지자 이사야의 모습…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동시에 드러나는 구절처럼 보인다. 믿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사랑치 못하여 그들의 죄로 인해 결국에는 심판을 당하는 그들을 보며 자신에게 화를 돌리는 선지자 이사야의 모습 속에서 예수님의 모습이 보인다.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반역에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 그 모든 죄를 자신에게 돌려 십자가에 죽으신 그 모습이 오버랩 되었다. 자신을 죽기까지 낮추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예수의 그 모습이 오늘 이사야의 모습에서 보인다. 

 

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빌립보서 2:5-11)

 

하나님께서 그 분의 온전한 공의를 드러내시며, 온 세상의 왕으로 좌정하시는 그 모습 안에서 하나님의 끝없는 사랑과 온전하신 공의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만나는 그 지점이 보인다. 오늘 나는 이사야와 같은 삶의 자세를 가지고 있는가? 그들의 죄악을 슬퍼하며 회개하고 있는가? 그리고 하나님의 공의와 영광을 기뻐하고 있는가? 이사야를 보면서 선지자가 어떠한 태도를 가져야 하는지, 그리고 동일하진 않겠지만 선교사가 어떠한 태도를 가져야 하는지를 생각해보게 된다. 

 

우리 형제, 자매들을 먼저 사랑해야 한다. 더욱 더 뜨겁게 사랑해야 한다. 낮추어 보거나 비하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그들의 연약함을 보듬어 주되, 그들의 잘못에 대해서는 이야기 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선교사의 자세를 잊지 말자. 

 

특별히 오늘 밤 한국으로 돌아간다. 양가 부모님의 병환 등 좋은 일들 때문에 돌아가는 것은 아니기에 마음에 부담도 크고 여러가지 생각들이 머리 속에 많다. 하지만 선교지를 잠시 떠나 있어도 영혼들을 사랑하는 이 마음을 잊지 말고, 이들을 위해서 기도해야겠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행하신 모든 일들을 잊지 않고, 더 사랑할 수 있는 마음과 준비가 되어서 곧 돌아오게 되기를 원한다. 한국에서의 시간들이 이사야 선지자의 이 마음을 더 깊이 헤아리고 내가 그런 모습으로 설 수 있는 시간이 되기를 간절히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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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24:1-13 끝까지 남을 것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면 그 날에는 우리가 가진 그 모든 것이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될 것이다. 우리가 가진 지위도, 재물도 그 어떤 것도 그 심판을 피할 수 있는 도움이 될 수 없다. 2절은 그것을 설명한다.

‘백성과 제사장이 같을 것이며 종과 상전이 같을 것이며 여종과 여주인이 같을 것이며 사는 자와 파는 자가 같을 것이며 빌려 주는 자와 비리는 자가 같을 것이며 이자를 받는 자와 이자를 내는 자가 같을 것이라’

 

우리가 붙들고 있는 모든 것이 헛된 것이 된다. 마지막 날에는 하나님 외에는 그 어떤 것도 남지 않는다. 그런데 지금 무엇을 붙들고 있는가? 

아마도 우리의 마지막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모든 사람은 그 마지막을 만나게 된다. 그 때에는 재물도, 지위도, 그 무엇도 우리를 하나님 곁으로 인도할 수 없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밖에는 우리가 의지할 것이 없는 그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지금 내 삶은 그 마지막의 모습과는 다르게 많은 것을 붙들려고 하고 있다. 마지막에 남을 것만 붙드는 것이 아니라 마지막에도 남지 않을 썩을 것들을 붙들 때가 참 많다. 나는 마지막을 붙들고 가는 사람이다. 그 마지막이 어떤지를 알기에 지금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말하는 사람이다. 그런 내가 다른 것들을 붙들고 있으면서 하나님만 붙들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가능이나 한가? 

 

예수만 붙든다. 예수만이 힘이다. 예수만이 능력이다. 예수만이 소망이다.

다른데 한 눈 팔지 않고, 오직 그 분만 붙든다. 오직 그 분만 전한다. 

하나님의 최후 심판이 다가와서 모든 것이 불타 없어진대도 여전히 남아 있을 그 예수님만 사랑하기 원한다. 

내 삶이 오늘 그렇게 살아갈 수 있기를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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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 23:1-18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하신다. 

 

두로는 하나님의 경고를 받았고, 두로는 황폐화되게 된다 (1-6절). 그런데 이 일은 여호와께서 정하신 일이라 반드시 이루어진다 (9절).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두로를 다시 회복시킬 것을 말씀하신다 (17절). 하나님께서 ‘두로를 돌아보시시리’ 라고 17절에서 말씀하고 있다. 그들 자신의 죄악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경고를 받았고, 실제로 심판이 임하게 되는데, 하나님은 또한 그들을 돌아보신다. 

 

하나님의 사랑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끝이 없다. 늘 그 자리에서 우리를 돌아보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런데 두로는 변하지 않는다. 두로는 여전히 악을 행한다. 17절 하반부에 ‘그가 다시 값을 받고 지면에 있는 열방과 음란을 행할 것이며’라고 말씀하고 있다. 심판받았고, 회복받았지만 두로의 삶은 변하지 않는다. 다 아시면서도 회복시키신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제 그들의 무역의 소산물을 그냥 두시지 않으신다. 18절을 ESV 번역으로 보면 그들의 무역품들과 그들의 임금이 여호와께 거룩해 질 것을 말씀하고 있고, 그들의 무역품들이 하나님 안에 거하는 자들에게 풍부한 음식과 좋은 옷을 공급하게 될 것을 말씀하고 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자신만을 위해 범죄하며 살아가게 되는데 결국은 하나님 안에 거하는 자들을 위한 수고와 애씀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위해 살아도 그것을 통해 하나님을 위해,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을 위해 쓰실 수 있는 분이시다. 두로가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의 심판을 통해 하나님께로 돌아왔어야 하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무엇을 통해서든 누구를 통해서든 하나님의 일을 하실 것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하실 것이다. 우리가 어떠하든 간에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사람들을 먹이시고 입히실 것이다. 하지만 두로처럼 악을 저지르고, 회개하지 않고, 돌아오지 않으면서 하나님의 일에 동참할 것인가? 아니면 회개함으로 하나님께 전심으로 쓰임받을 것인가? 이 부분은 나의 선택의 몫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하나님의 때에 이루어 가실 것이다. 그 일에 동참하기 원한다. 가능하면 나의 실수나 범죄함이 아니라 온전한 헌신과 사랑으로 동참하기 원한다. 

 

하나님께서 보여주시고, 들려주시는 일들에 대해 깊이 기도해보자. 그리고 듣자. 그리고 순종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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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Thinking)/Meditation2019. 5. 30. 1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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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20:1-6 누구를 위한 불편함인가?

 

우리가 의지하고 있는 것은 그것이 구스든 애굽이든 무엇이든지 간에 결국은 사라지게 되어 있다 (5절).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이 없다는 것은 모르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한 때, 강성해 보이고, 잘나가 보이는 그 어떠한 것들도 결국에는 사라지고 없어지는 것이 세상이다. 우리의 생명도 마찬가지이다. 지금은 어리고 건강하고, 지금은 아무 문제 없지만 이제 얼마 지나지 않아서 쇠하여지고, 약해질 때가 온다. 오늘 이사야에게 하신 하나님의 말씀, 옷과 신을 벗고 벗은 몸으로 다니라고 하신 이 말씀은 (2절) 결국 우리가 지금 입고 있는 가짜들을(우상들을) 벗어 버리라는 말씀으로 들린다.  

 

지금 당장 우리를 보호해 줄 것 같고, 우리를 좀 더 멋져 보이는, 있어 보이는 사람으로 만들 수 있는 그 옷, 그 신발을 벗으란 것이다. 그것이 좋아보이는 것이든, 있어 보이는 것이든 그것이 무엇이든지간에 벗으란 것이다. 사라져 버릴 것이고, 영원할 수 없는 그것을 버리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아닌 것은 다 벗어버리라는 것이다. 이는 이스라엘을 향한 징조와 예표였다 (3절). 

 

어제는 무엇을 위한 불편함인지를 묵상했었다. 하지만 오늘 이사야 입장에서는 이 징조와 예표는 누구를 위한 불편함인지를 생각해보게 되었다. 하나님이 벗으라 하셨다. 좋다. 벗고 다닌다. 그런데 누구를 위해 3년을 벗은 몸으로 다녀야만 하는가? 이 부끄러움과 불편함은 누구의 몫인가? 분명코 이 행동은 이사야 자신이 원해서 한 자신을 위한 행동은 아니었다. 그 부끄러움과 불편함의 이유는 하나님 때문이었다. 하나님 때문에 불편한 행동을 할 수 있었고, 하나님 때문에 부끄러움을 견딜 수 있었다. 

 

태국에서의 불편함은 결국 하나님 때문이다. 하나님 탓을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 때문 임을 안다면, 그 분의 사랑 때문인 것을 안다면 이 불편함을 좀 더 기쁨으로 견딜 수 있지 않을까? 이사야도 그렇게 3년을 견뎌내지 않았을까? 이사야는 3년동안 하나님 탓을 한적도 하나님께 불평한 적도 없다. 그는 그저 이 일이 하나님으로부터 왔음을 알았기에 견뎌낼 수 있었던 것이다. 벗고 지내라는 뭔가 비합리적인 하나님의 말씀에도 순종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시작하신 일이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일이었기 때문이다. 

 

시간이 가면 갈 수록 더 불편해질 것이다. 익숙하지 않은 길을 걸어야 하고, 해보지 않은 것들을 점점 더 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불편함이 하나님을 위한 것이라면 기쁨으로 감수하기를 원한다. 보이지 않는 이 믿음의 길을 내가 주를 위해, 태국의 영혼들을 위해서 할 수 있다면 감사함으로 기쁨으로 가길 원한다. (하지만 진심으로 벗고 다니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

 

불편함이 나를 향한 것이 아니라 영혼들을 향한 것이 되기를 원하며, 기쁨으로 이 길을 걷는 내가 되기를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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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Thinking)/Meditation2019. 5. 29. 1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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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19:16-25 무엇을 향한 불편함인가?

 

나름 그 당시 최고의 권력과 힘을 가졌다는 애굽도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다 (16절). 그들은 흔들리고 떨며 두려워한다. 하지만 그렇게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에게 반역하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괴롭혔던 애굽에 대해서도 하나님은 은혜를 베푸신다. 19절을 보면 애굽 땅 중앙에 여호와를 위한 제단과 기둥이 있을 것임을 말한다. 그리고 그들에게 한 구원자를 보내셔서 그들을 건지실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20절). 21절에는 여호와를 알게 하실 것이고 22절에서는 그들의 죄악으로 인해서 치시지만 그들의 간구함을 들으시고 고쳐 주실 것임을 말씀하시고 있다. 

 

하나님의 사랑은 언제나 이런 식이다. 언제나 은혜를 베푸시고, 또 다시 기회를 주시고, 또 다시 기회를 주신다. 그것이 하나님의 성품이시기 때문이다. 인자하시며 노하시기를 더디하시는 그 분이 우리의 하나님이시다. 그 어떤 사람도 하나님께 끝까지 악인일 수 없다. 하나님은 계속해서 그들을 돌보시고,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기 때문이시다. 내가 뭐라고 그 사랑을 제한할 수 있겠는가? 내가 뭐라고 하나님의 사랑을 보며 요나와 같이 그것이 불공평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나도 그 사랑을 받은 자이거늘… 

 

이 번 주의 계획이 이래저래 다 틀어져 버렸다. 기존에 참석하려고 참가비를 내었던 세미나도 참석하지 못하게 되었고, 오히려 비자와 워크퍼밋 등 기타 서류로 인해 더 바쁜 한 주를 보내고 있다. 하루종일 노동국과 이민국에서 대기중이다. 그러면서 오전 내내 드는 마음은 '이 곳은 왜 이렇게 불편하지?' '이 곳은 왜 이렇게 외국인들을 힘들게 하지?’ 란 마음이었다. 기존에 하지 않아도 되던 일을 갑자기 엄격하게 적용 하면서 오히려 벌금을 물리는 그러한 태도들에 대해서 불평과 불만이 가득했다. 그리고 벌금도 많았다 ㅜㅜ. 왜 이러한 불편함들을 견뎌야 하는지, 왜 이러한 불합리함을 계속해서 경험하도록 하는지에 대해서 마음속으로 은근히 계속 짜증이 솟아왔다.

 

노동청에서 이민국으로 차를 몰고 오면서 여러가지 생각을 하는데, 오늘 본문의 말씀이 생각이 났다. 오늘 말씀처럼 이게 다 애굽 때문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래 이게 다 태국 때문이었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태국 때문이었다. 

우리는 나그네이다. 나그네의 삶은 안정적이지 못하고 늘 뭔가 불편하다. 불편한건 당연한데.. 도대체 무엇을 위해 불편한가?의 문제란 생각이 들었다. 나는 무엇을 위해 지금 불편을 감수하고 있는가? 바로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태국 때문이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태국 때문에 나는 이 불편함을 감수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고치시고 치료하실 태국 때문에 나는 지금 이 불편함 속에 있는 것이다. 

 

무엇을 위한 불편함인지를 생각하고 나니, 마음이 편해졌다. 애굽을 고치실 주님께서 태국도 고치실 것을 믿음으로 감사하게 되었다. 불편함보다 더 크신 사랑을 이해하고 나니 나의 불편함도 하나님께서 사용하실거란 생각에 감사하게 되었다. 항상 내가 문제이다. 불평하고, 불만을 가진 내가 항상 문제이다. 무엇을 위한 불편함인가? 주를 위한 불편함이다. 

 

그 불편함 가운데 감사함으로 오늘도 살아가자. 

하나님께서 태국을 사랑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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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19. 5. 24. 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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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15:1-9 부르심을 알고 바로 따라가는 삶

하나님이 모압에 대해 심판을 말씀하신다. 하나님이 하시면 하룻밤에 (1절) 모든 도시가 황폐화될 것이다. 그들의 죄는 그렇게 하루에 멸망하는게 마땅할 정도였고, 하나님은 이제 그렇게 하실 계획이시다. 

그런데도 선지자 이사야의 목소리는 참으로 안타까운 목소리로 이들을 위해 부르짖는다.
“내 마음이 모압을 위하여 부르짖는도다” (5절 상반부)

이사야는 하나님의 심판이 확정되어 이제 하룻밤에 망하게 될 그 성읍과 모압을 위해서 부르짖고 있는 것이다. 선지자의 사명이자, 선지자가 그 멸망해 가는 백성들을 향해 해야 할 슬프지만, 힘들지만 당연히 해야 할 일이다. 

이사야의 이러한 태도를 보면서 나의 태도를 돌아보게 된다. 내가 기도하고, 중보하고, 사랑해야 할 대상으로 태국 사람들을 바라볼 때도 있지만, 때로는 그들을 비즈니스 파트너 같이 생각할 때도 있는 것 같다. 그들이 잘 하면, 잘 도와주면, 잘 따라와주면 좋고, 그렇지 않으면 불평하고 마음이 어려워지는 시간들의 반복 말이다. 

그들이 멸망하기 직전까지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며 부르짖던 이사야의 모습이 나의 모습과 상당히 다름을 보면서 내가 어떠한 눈과 어떠한 마음으로 우리 형제, 자매들을 바라봐야 하는지를 깨닫게 하신다. 하나님이 나를 이 땅으로 왜 부르셨는지를 잊지 말고, 내 사명에 맞는 태도와 마음을 가져야겠다. 

나에게 이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과 하나님의 탄식이 없다면 내가 여기에 있을 이유가 무엇인가? 다시 한번 깨닫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이사야와 같이 탄식하며 중보하는 하루가 되기를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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