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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 5:21-34 사랑이 삶을 움직이는 힘이 되어야 한다.
본문 전체를 읽어야 하는데, 5:21절을 읽으며 충격을 받아 뒤로 쉬이 읽어 나갈 수 없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어제 돼지의 가치와 함께 고민했던 그 귀신들린 한 영혼을 위해 일부러, 의도적으로 그 곳으로 가셨다.그리고 그 영혼을 고치시고 나서는 바로 다시 돌아오셨다.
‘예수께서 배를 타시고 다시 맞은편으로 건너가시니’ (5:21)
예수께서는 그 영혼을 고치시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시간을 내신 것이다. 지금과 같이 교통이 좋은 때도 아니고 적어도 몇 일을 걷고, 배를 타고 하셔야 했을텐데.. 예수께서는 3년이라는 정해진 공생애 중에서 아마도 몇 일 시간을 내셔서 다녀 오셨을 것이다. 이 3년의 공생애 시간이 얼마나 중요한 시간인가? 성경의 모든 것을 이뤄야 하는 그런 중요한 시간이 아니었던가?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그 시간을 그 한 영혼을 위해 쓰셨다.
예수님의 마음이 느껴진다. 예수님을 움직인 것은 효율성이 아니라 사랑이었다.'현대인은 효율성의 노예가 되어 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라는 어느 글에서 본 글귀가 생각이 난다. 나 또한 효율성이 매우 중요하다. 물론 선교사의 시간과 재정은 소중하다.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이 많은 사람의 기도와 후원을 통해 나에게 지금 소유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선교사의 시간과 재정을 효율성으로만 보기 시작하면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나의 사역은 비즈니스가 결코 아니다. 투입된 대로 혹은 투입된 이상으로 이익을 남겨야 하는 사업이 아니다. 나는 기업도 아니다. 나는 효율성이 아니라 반드시 사랑으로 움직여야 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잊으면 안된다. 나의 시간과 재정의 사용이 효율성으로 우선순위가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사랑으로 정해져야 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 처럼 말이다.
하지만 사랑으로 움직이신 예수님은 실제로 결코 시간을 낭비하지 않으셨다.사랑으로 움직이셨지만 그 분이 이 땅에 오신 목적에 맞게 움직이셨다. 돌아오자 마자 회당장 야이로를 만나셨고, 그 딸을 고치기 위해서 움직이셨다. 그리고 가는 도중에 혈루병 걸린 여인을 고치신다. 물론 이 여인을 예수님께서 고치셨다기 보다는 그의 믿음을 통해 고침을 받았다. 예수님께서 사랑으로 움직이시는 그 시간에 그 자리에서 예수님을 만짐을 통해 고침을 받았다. 변두리에 있었던 그 여자조차도 예수님은 그녀의 믿음을 사용하셔서 구원해주셨다.
나의 삶을 돌아본다. 오늘 나를 움직이는 이유는 사랑인가? 한 영혼인가? 아니면 효율성인가?
예수님처럼 사랑이 나를 움직였으면 좋겠다. 하나님을 그리고 이웃을 사랑하는 그 사랑이 나의 삶에 드라이브를 거는 동력이 되었으면 좋겠다. 때로는 효율적이지 못해도,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해도, 느리고 천천히 가는 것 같이 보여지더라도 사랑으로 움직이는 나이기를 원한다. 하지만 사랑이라는 이유를 대며 나태함을 피우지 않기도 원한다. 나를 이 땅으로 보내신 그 목적을 잊지 않고, 청년들을 세우는 일, 복음을 전하는 그 일에 나태하지 않기를 원한다.
오늘도 효율성이 아닌 사랑으로 움직이며, 사랑으로 내어주며, 사랑으로 섬기는 하루가 되기를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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