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Thinking)/Meditation2019. 1. 28. 1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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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15:1-12 내게 정해주신 구역으로 돌아가자.

가장 먼저 유다지파의 이름이 나오고 그들에게 배분된 땅의 이름이 나온다. 왜냐하면 12지파 중에서 이제 유다가 장자 지파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유다는 장자가 아니었다. 유다는 야곱의 넷째 아들이었다. 하지만 형들의 실수들로(?) 유다는 이제 장자지파의 권한을 가지게 되었고, 땅의 분배도 가장 먼저 그에게 이뤄진다. 

그들의 땅의 동서남북 경계에 대해서 오늘 본문은 다룬다. 하나님은 정확하게 유다지파가 차지해야 할 땅에 대해서 말씀하셨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조금이라도 덜 가져서도 안되고, 더 가져서도 안된다. 왜냐하면 그들이 차지해서 살아갈 땅은 12지파가 함께 살아가며, 가나안 외부의 땅은 하나님께서 지금 이스라엘에게 허락하신 땅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주신 경계가 있기 때문이다.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말씀을 정확히 그 의미대로 지키는 것 또한 매우 중요한 일이다. 특별히 유다 지파의 남쪽 경계는 에돔과 경계를 맞닿았다 (1절). 에돔(에서의 후손)은 이스라엘의 형제였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들의 땅은 허락하지 않으셨다. 그들과는 경계를 지어주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이렇게 명확하게 말씀해주시는 경우도 있고, 때로는 우리가 그 의미를 반추하고, 묵상하지 않으면 정확히 알지 못하는 때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말씀의 진정한 의미 그대로 지킬 수 있도록 노력을 해야만 한다. 내게 어떠한 것이 유익이 되는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정말로 말씀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그게 하나님을 알아가는 과정이다. 

시편 16:6에서 내게 줄로 재어준 구역이 아름다운 곳에 있음이여 나의 기업이 실로 아름답도다 라고 고백하는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경계 안에서 그의 말씀이 정말로 의미하는 것을 깨달아 그것대로 살아가는 것이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살아가는 방법이라고 생각된다. 오늘 나에게 주시는 경계는 무엇이고? 그 의미는 무엇일까? 

단기팀이 돌아가고 나서 몸도 마음도 힘들다. 한바탕 홍역을 앓고 난 아이처럼 행복한 기억들과 그들이 다 돌아간 그 빈자리 사이에 서 있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 아빠로써 요엘이와의 인내의 자리로 돌아가고, 선교사로써 다시 태국어 언어공부의 자리로 돌아가고, 남편으로써 아내의 언어 공부를 서포트 해줘야 한다. 오늘 나에게 주시는 경계는 아마도 다시 내 자리로 돌아가는 것일 것이다. 일 주일 간의 정신없었던 그러나 행복했던 기억에서 나와서 다시 선교사로써, 남편으로써, 그리고 아빠로써의 오늘을 지키는 것일 것이다. 애매함의 자리에서 믿음으로 내 자리를 지키는 것일 것이다.

오늘은 특별히 생일을 맞이했다. 사실 정신없던 시간을 보내던 터라 잊고 있다가 어제 아내가 이야기 해줘서 알았고, 오늘 벌써 많은 축하들을 받았다. 내가 태어난 것이 모두에게 감사가 될 수 있도록 내 자리(경계)를 잘 지키자. 그리고 축하해주신 모든 분들 감사합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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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19. 1. 23. 1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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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12:7-24 가짜 왕들이 아니라 진짜 왕과 동행하기

여호수아가 물리친 왕들의 명단이다. 7절에서 요단 이편 곧 서쪽 레바논 골짜기의 바알갓에서부터 세일로 올라가는 곳 할락 산까지 라고 설명된 이 곳의 왕의 명단은 총 31명 이었다 (24절). 대충 지도로 봐도 그리 넓지 않은 곳인데 이 곳에 자칭, 타칭 왕이 31명이나 되었다. 

무슨 왕이 이렇게 많은가 생각하다 보니, 멀리 있는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 모두는 늘 왕이 되려고 한다. 진정한 왕이신 하나님이 계시지 않으면 일어나는 너무 쉬운 이야기이다. 자칭 왕이 되려고 하는 시도… 

지금 람빵지역에서 아웃리치를 돌면서 느끼는 마음과 비슷하다. 우리가 만나는 선생님들, 학생들 모두 자신만의 왕이 있다. 그래서 그들은 진정한 왕이신 하나님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우리를 보며 한국에서 온 멋진 언니 오빠 정도로만 여기고, 우리에게 얻고자 하는 것은 성전 미문에 앉은 거지가 베드로와 요한을 보듯 자신에게 유익한 그 무엇인가를 얻으려고 한다. 

내가 오늘도 그들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베드로와 같이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가 내게 있는 것을 네게 주노라’라는 말 뿐이다. 하지만 점검하고 싶은 것은 정말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계신가에 대한 질문이다. 정말 내 안에 있는 것을 줘야 할텐데… 나 또한 내 안에 수 많은 왕들로 인해서, 내가 내 삶의 주권을 붙잡고자 하는 나라는 왕으로 인해서 정말 내 안에 있는 그리스도를 그들에게 줄 수 있을지 두렵기만 하다.

내가 먼저 하나님을 깊이 붙들기 원한다. 잠깐 만나는 아이들에게 예수님이 전해지기 위해서는 내 안에 예수가 충만해야 한다. 성령충만함을 위해 기도했고, 또 기도했다. 오늘 하루 정말로 내 안에 있는 것들이 아이들에게 전해지기 원한다. 내 안에 가짜 왕들이 아니라 진짜 왕 예수 그리스도께서만 사시기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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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19. 1. 22. 0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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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12:1-6 더 중요한 순종의 전쟁

모세가 정복한 왕들에 대해서 본문은 기술하고 있다. 모세는 가나안 땅을 밟지 못했지만 그와 함께 이스라엘 백성들은 요단 동편의 땅을 차지하였다. 그래서 본문 위에 타이틀도 ‘모세가 정복한 왕들’이라고 나온다. 세상의 권력들이 세상 나라들의 왕들이 미디얀 광야에서 40년 양을 쳤던 양치기 시골 노인들과 이집트에서 노예생활을 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무너진다.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김을 결정하는 것은 '지금 우리가 (이스라엘 백성들) 누구의 편에 서 있느냐'였다. 순종은 승리를 가져오고, 불순종은 망하는 길로 가는 것인데,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은 순종했다. 눈에 보이는 전쟁보다 더 큰 싸움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 순종하느냐 불순종하느냐의 문제이고, 이 문제가 해결되고 나면 나머지 문제들은 오히려 쉽게 해결되고 만다.

물론 실제로는 피가 튀는 전쟁이다. 누군가는 다치고, 누군가는 죽게 되는 싸움이다. 하지만 그렇게 피가 튀고, 누군가가 죽게 되는 전쟁에서 가장 큰 공포는 지는 것이다. 지게 되면 나만 죽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하는 모든 이가 죽게 된다. 하지만 순종의 문제가 해결되고 나면 우리는 이미 이긴 전쟁을 위해 싸우는 자들에 불과하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면 아니 내가 하나님 편에 서 있으려고 하는 싸움에서 승리하게 된다면 우리는 이미 이길 것이 정해져 있는 싸움을 싸우는 것이다.

태국 북부 람빵에 예수향남교회 중등부와 집사, 권사님들과 함께 와 있다. 오늘부터 오전, 오후로 학교로 방문해서 전도하고, 준비한 것들을 나누게 된다. 오늘 말씀처럼 이미 순종하였기 때문에 이미 승리한 길을 우리는 걷는 것이다. 이미 승리한 전쟁에 우리는 가게 된다. 더 깊은 사랑과 미소, 그들을 존중하는 태도로 이 승리한 전쟁을 치루는 하루가 되기 원한다. 하지만 이미 이겼다고 자만하거나, 대충 치루지 않는… 이미와 아직 사이의 그 긴장 속을 기쁘게 걷는 하루가 되기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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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19. 1. 18. 1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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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10:1-15 하나님의 성품에 합당하게 살아가는 삶

기브온 족속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속였다. 그들에게 적들의 연합군들이 쳐들어 왔을 때 이스라엘은 그 속았음의 쓴 뿌리로 인해 돕지 않을 수도 있었다. 왜냐하면 기브온 족속들의 속임수로 인해 속은 것도 있었지만, 하나님께 묻지 않은 잘못도 있었기 때문이다. 얼마든지 돕지 않을 이유를 찾을 수 있는 싸움이었다. 그런데 7절을 보면 ‘여호수아가 모든 군사와 용사와 더불어 길갈에서 올라가니라’ 라고 이야기 하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속았든, 그들이 자만했던 맺은 약속에 대해서 어기지 않는 길을 택한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도 이 싸움을 지지하신다. 8절에 ‘그 때에’로 시작하는데, 그들이 싸우러 길갈에서 올라간 그 때에 여호수아에게 나타나셔서 그들 모두를 여호수아의 손에 넘겨 주셨음을 말씀해주신다. 약속에 신신할 자들에게 약속에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도우심을 보여준다. 하나님은 믿는 백성들에게 하나님을 닮은 믿는 자의 향기가 나타나는 것을 기뻐하신다. 비록 속았을지라도, 비록 그들이 하나님께 묻지 않았을지라도, 수 많은 이유를 대며 그들을 돕지 않을 수 있었음에도, 그들을 돕기로 결정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기브온 족속에게 보여준 이스라엘을 도우신다. 

하나님께서 원하셨던 구약의 선교의 가장 합당한 모습이었다. 여호와의 명성, 그 분의 아름다우심이 온 땅 가운데 전해지며, 그들을 주님께로 불러 오는 것이다. 물론 요나와 같이 직접 가는 선지자들도 있었지만 구약의 선교는 하나님의 명성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하나님이 기브온을 돕는 이스라엘 가운데 함께 하심은 아주 당연하게 보여진다. 그들이 이방인들 사회에 보여준 약속의 신실함과 또 그들을 도우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충분히 드러났음에 틀림없다. 

나에게도 기브온과 같은 사람들이 있다. 뒤통수를 치는 것 같은… 때로는 나도 기브온과 같은 자로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상하게 한 적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이 때에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저께 예준이가 나에게 자기는 이제 요엘이를 하루에 일곱 번만 용서하겠다고 했다. 마태복음 18:22을 읽고 한 적용이었을 것이다. 요엘이의 짜증과 소리 지르는 것을 가장 옆에서 다 받아내면서, 그리고 그로 인해 엄마와 아빠가 힘들어 하고, 화를 내는 모습을 중간에서 중재하려고 애쓰는 예준이의 참 기특한 모습이었다. 물론 예준이에게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번임을 이야기 해줬지만, 하루에 일곱 번이나 용서하겠다는 이 결심은 얼마나 귀한 것인가? 나는 예준이보다도 못한 아빠이다. 요엘이를 기다려주는 것도 너무 힘들고, 기브온과 같이 나를 속이고, 뒤통수를 치는 것 같은 사람들에게도 용서 보다는 짜증과 화가 날 때가 훨씬 더 많다. 

하지만 오늘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이 어린 예준이의 모습과 오버랩되며, 나는 정말 내 삶으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보여주고 있는지를 다시 한번 돌아보게 된다. 내 삶의 모습에서 하나님이 드러나시는지, 하나님의 아름다움과 신실하심이 내 삶에서 더 드러나고 있는지를 돌아보게 된다. 나는 나와 얽혀 있는 사람들에 하루에 한 사람을 일곱 번 이라도 용서할 수 있는가? 나와 전혀 관계 없는 사람들에게 웃으며 인사하고, 그들에게 친절로 대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묻어난 대화와 삶을 보여주는가? 

일상의 삶에서 좀 더 예수님이 묻어난 대화, 행동, 용서, 사랑이 나타나길… 내가 용서 받은 사람임을 잊지 말고, 용서하고 용납하길… 
내일 분쟁이 일어난 B교회를 방문하여 회의를 하게 되는데, 이 가운데 나만 옳은 자로 서지 않고 양쪽을 모두 품고 사랑할 수 있기를… 
그리고 오늘 내가 묵상한 말씀과 내 삶이 일치하게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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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19. 1. 17.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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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9:16-27 죽기 살기로… 살기

자신의 부족들의 목숨을 걸고 속임수를 벌인 기브온 족속을 어떻게 할 것인가? 오늘 여호수아는 그들을 살릴 수 밖에 없음을 이야기 하고 있다 (20절). 왜냐하면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로 맹세(19절) 하였기 때문이다. 

기브온 족속의 행동은 운이 좋으면 살 수 있을 거라는 마음이 아니라 이것이 아니면 죽을 수 밖에 없는 간절함이 있었다. 그러한 간절함이 하나님에 대해서, 이스라엘에 대해서 알게 하였고, 그들은 살 수 있게 되었다.

하나님은 자신을 찾는 자들의 그 간절함을 보시고 그들을 살려 주신다. 그것이 하나님의 원래의 마음인 '가나안 백성들의 진멸’과 다를 지라도.. 그 하나님의 성품에 비추어서 살려 주신다. 중요한 것은 그 간절한 마음이다. 수로보니게 여인처럼 예수님께 간절해야 한다. 살려주시면 좋고, 죽어도 좋다고 생각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정말로 살고 싶은데, 정말로 살고 싶다면 전심으로 예수님을 붙잡아야 하는 것이다.

기브온 족속은 그들이 이전에 악했을지라도 돌이키고 살기 위해 나아왔다. 니느웨 백성들도 돌이킬 때 하나님이 살려 주셨고, 아합왕도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은 이후 돌이켰을 때 하나님이 살려 주시지 않았는가? 결국은 하나님 외에 다른 길이 없음을 깨닫고 돌아서야만 사는 것이다.

그에 비해 나의 신앙은 미적지근해 보인다. 여호수아도 되돌릴 수 없었고, 하나님도 어찌할 수 없었던 기브온 주민들의 마음이 부러워지는 하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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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19. 1. 16. 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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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9:1-15 상황과 환경이 다 열린다고 해도 말씀을 놓치면 안된다. 

모든 왕들이 이 일을 듣고 모여서 일심으로 이스라엘 백성들과 맞서서 싸우려고 하던 그 때에 (1-2절), 모든 가나안 백성들이 의기투합하여 이제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다는 것을 알고 고양이 앞에 생쥐와 같이 물려고 일어난 때에 기브온 백성들이 찾아왔다. 

충분히 멀리서 온 듯한 복장, 음식, 그리고 모든 가나안 사람들의 적대적인 분위기 속에서 조약을 맺자는 매우 좋은 분위기… 그냥 조약도 아니고 종이 되겠다고 하는 이스라엘에게 유리한 조약, 그리고 애굽을 나오는 일 때부터 가나안에서 하나님께서 하신 일들에 대해서 들었다고 하면서 살살 꼬득이고 있다. 

나였다면? 이정도 했는데 안넘어 갔을 수 있을까? 사실 질문이 무의미하다. 넘어갔을 것이다. 

순적한 상황, 모든게 문제 없이 다 열리는 것 같은 상황에서 하나님의 명령을 기억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게 넘겨 네게 치게 하시리니 그 때에 너는 그들을 진멸할 것이라 그들과 어떤 언약도 하지 말 것이요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도 말 것이며 신명기 7:2”

상황보다도 항상 더 앞서야 할 것은 하나님의 말씀인데 말씀을 붙들고 있지 않으면 순간의 상황이 이끄는데로 가게 되어 있다.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명하신 것처럼 ‘주야로 묵상하지 않으면’ 달콤한 꾀에 넘어갈 수 밖에 없다. 결국 하나님과의 친밀함, 말씀과의 동행함이 없으면 우리는 이러한 유혹에서 이길 수 없다. 

그런데 더 신기한 것은 속아서 맺은 언약도 하나님이 무시하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불순종, 묻지 않음으로 시작된 조약이었지만 하나님은 그 조약을 지키셔서 기브온 족속들을 살려 주신다. 하나님은 이렇게 공평하고 정의로우신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만의 하나님이 분명히 아니시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의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늘 여호수아와 같이 실수한다. 말씀을 붙들고 있는 듯 하지만 어느새 환경과 상황에 속고 넘어진다. 더욱 더 말씀을 붙들자. 내 생각과 내 판단과 내 마음을 쫓아 가면 안된다는 것을 항상 명심하자. 주야로 묵상하자. 그래야 산다. 시편말씀처럼 우리가 비록 넘어지더라도 아주 엎드려지지 않을 것이다. 여호수아에게 주신 말씀처럼 말씀만을 붙드는 사람, 그 사람이 내가 되기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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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Thinking)/Meditation2019. 1. 15. 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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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8:30-35 소유가 아닌 말씀을 기준으로 순종하는 삶

오늘 여호수아가 아이성의 승리 이후에 제단을 쌓아 예배를 드리고 (30절), 그 이후에 율법책을 다른 돌판에 기록하고 (31절), 그 말씀을 낭독 했다 (34절).  어쩌면 매우 상징적인 행위로 볼 수 있다. 하나님께 먼저 감사의 예배를 드리고, 그 이후에 한 것은 이제 우리가 이 땅에서 무엇을 붙들고 살아갈지에 대해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마음을 결정하는 자리에 섰다. 그리고 그들의 기준은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여호수아서 1장에서 하나님이 형통의 방법을 여호수아에게 이미 말씀해 주셨다. 

1:8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

여호수아가 오늘 이 자리에서 율법을 돌판에 기록하고, 그 모든 말씀을 낭독한 것은 아마도 자신 뿐만 아니라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우리가 형통할 수 있는 길이 이 것 뿐임을 알려주는 행위라고 여겨진다. 이스라엘 백성의 절반을 축복과 저주의 상징인 그리심 산과 에발 산 앞에 세워놓고 낭독한 것도 마찬가지이다. 이 율법에 순종하면 축복받을 것이고, 이 율법에 불순종하면 저주 받을 것이다. 이 행위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달콤한 축복만을 약속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 길은 길게 보면 반드시 우리에게 복을 주시는 길이며, 그 길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복을 누린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순종을 요구하신다. 어제 밤 늦게까지 아내와 비자여행과 2월 NIBCM 선교사 컨퍼런스 참석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사실 5명이 움직이려면 항상 재정이 많이 든다. 비자여행은 반드시 가야 한다. 그럼에도 어제 깨달은 것은 내가 이 일을 결정할 때 지금 가용 재정이 얼마나 있는가를 의지하면서 결정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 묻거나, 기도 하는 것 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우리에게 쓸 수 있는 재정이 얼마가 있느냐이고, 그것에 따라 결정하게 된다. 이러한 방식은 절대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방식이 아니다. 

내게 얼마가 있느냐, 함께 갈 수 있는 재정이 있느냐를 보고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주시는 마음에 따라 결정해야 하는 것이다. 결정의 순서가 틀렸다.

말씀에 순종하자는 큐티를 하면서도 내가 가진 것을 붙들고 있는 나를 다시 보게 되는 것은 참으로 부끄럽고 민망한 일이다. 하지만 다시 마음을 붙든다. 나를 흔드는 것은 상황이지만, 말씀을 기준으로 결정하기 원한다. 내 귀에 들려지는 말씀, 그 말씀이 내 삶의 기준이 되기 원하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하루가, 그리고 이번 결정이 되기 원한다. 그리심 산과 에발 산 앞에 선 이스라엘 백성들 처럼 진지하게 듣고, 진지하게 순종하기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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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19. 1. 14. 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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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8:18-29 순종을 통해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드러내기

이스라엘 백성들의 여호와 앞의 불순종, 아간의 죄악을 제거한 후에 이제 아이성은 이제 여호수아에게 넘겨진다 (18절). 이번에는 일말의 불순종도 없이 모두 순종하였다. 그런데 27절을 보면 

“오직 그 성읍의 가축과 노략한 것은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명령하신 대로 이스라엘이 탈취하였더라” 
라고 말씀하고 있다. 이 약속은 8장 2절에 먼저 등장하는데 

“너는 여리고와 그 왕에게 행한 것  같이 아이와 그 왕에게 행하되 오직 거기서 탈취한 물건과 가축은 스스로 가지라” 라고 말씀하셨다.

아간을 비롯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욕심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아이성의 물건을 가지도록 허락하셨다고 생각이 되지는 않는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여리고에서는 먼저 그들의 순종을 보시길 원했고, 아이성의 것들을 그들이 가지도록 허락하시려고 준비하셨다고 보여진다. 다만 급했던, 하나님이 주시려는 좋은 것을 보지 못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조급함이 하나님이 준비하신 좋은 것을 다 누리지 못하도록 만든 것이다.

이해되지 않아도 먼저 순종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이 가장 최고, 최우선적인 분이심을 삶을 통해 증명하는 것이다. 그 분만이 내 삶의 주인이시고, 인도자시라는 고백이다. 우리 눈에 좋아보이고, 아름다워 보이고, 그럴듯해 보이는 것을 먼저 취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에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그 분이 하나님이심을 드러내는 것이 순종인 것이다. 하나님은 늘 우리를 위해 좋은 계획들을 준비하고 계신다. 물론 그 좋다는 것이 꼭 내 마음에 드는, 내가 좋아하는 방식으로의 좋은 것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하지만 우리 삶에 다 이해하지 못해도 순종하는 마음이 있다면 그 분이 주시는 아름다운 것들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교회가 재산으로 인해 분쟁에 빠져 있는 B 교회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내가 개척한 것도 아니고 내가 사역하지도 않지만 우리 선교부 소속의 교회다. 하지만 너무 마음이 답답하고 속상하다. 하나님의 교회가 재산문제로 인해 현지인들끼리 두 그룹으로 나눠져서 대립중인 것을 보는 것이 마음이 쉽지 않다. 내가 이 문제에 과연 개입해서 해결할 수 있을지도 물음표이다. 하지만 주님께서 이 문제 안으로 나를 이끄셨으니 순종한다. 다 이해하지 못해도 순종함으로 마음을 나누고, 복음을 이야기 하기 원한다. 그래서 그 분의 아름다움을 이야기 하기 원한다. 

오늘 옥한흠 목사님 아들, 옥성호 교수님의 페북 글을 보면서 많이 놀랬다. 옥한흠 목사님의 설교와 자신의 설교의 차이점은 자신은 성경본문을 앞에 두고 ‘여기서 끄집어낼 교훈이 무엇인가?’를 고민했지만 그의 아버지 옥한흠 목사님은 ‘이 본문이 내 삶과 얼마나 일치하는가?’를 평생 고민했다고 했다. 

오늘 본문을 통해 보면서 나는 나를 위한 교훈을 끄집어 내었다. 순종… 기다림… 순종을 통해 내 삶의 가장 중요한 분이 하나님이심을 드러내는 것… 그런데 이러한 질문도 던지고 싶다. 이러한 것들을 포함한 이 본문이 내 삶과 얼마나 일치하고 있는가? 설교하기가 말씀 보기가 점점 두려워진다. 하지만 한 편으로는 감사하다. 이제부터라도 더 치열하게 본문과 내 삶이 일치하게 하기 위한 삶의 여정이 시작될 것이기에… 텍스트가 아닌 삶으로 전하는 선교사가 되기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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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19. 1. 12. 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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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8:1-17 나의 시선이 머무는 곳, 그 대상이 곧 나를 규정한다.

아간이 취한 것은 시날 산의 아름다운 외투 한벌, 은 이백 세겔 (약 2.3kg), 금 오십 세겔 (약 570g) 이었다. 아마도 첫 번째 여리고 성 전투를 보며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에 대해서 미리 기대했던 것이 틀림이 없다. 저렇게 난공불략의 여리고 성도 이렇게 쉽게(?) 무너뜨렸는데 이제 우리가 이 땅을 차지하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이제 가나안 사람들을 몰아내고 나면 그 땅에서 정착해서 부를 쌓고, 멋진 옷을 입고 살고 싶은 욕구를 그는 미리 취했다. 아간이 취한 것들은 당장 지금 전쟁중에 쓸 수 있는 물건들이 아니었다. 그의 마음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시간을 앞서 나갔다. 가나안 정착민들이 가지고 있었던 화려함에 마음을 빼았겼고, 그래서 오늘 당장 직면해야 할 전쟁에서 하나님에 대한 시선을 놓치고 말았다. 

그들의 전쟁은 여호와 하나님만 따라가며, 그 분께 시선을 고정해야 승리하는 전쟁이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리고 성을 돌 때, 언약궤가 앞서 가고, 언약궤만 보며 따라갔다. 하나님의 임재로 대표되는 언약궤로  온전하게 시선을 고정해야 열에서 이탈하지 않을 수 있고, 여리고를 제대로 돌 수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실제로 그렇게 해서 승리 했다. 하지만 승리로 인한 자만심은 현재에 대한 감각을 잊어버리고, 또 하나님에 대한 그러한 시선을 놓치게 되고, 그 결국은 하나님 대신 가나안 백성들을 쳐다보게 되니 탐심이 생긴 것이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지금 우리의 시선이 어디를 보고 있는지이다. 하나님인가? 세상으로 대표되는 가나안인가? 혹은 애굽인가? 
죄를 이길 수 있는 방법은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다. 눈이 부신 하나님의 아름다우심을 바라보며 이 땅의 덜 아름다운 것들에 대해 우리의 시선을 놓는 것이다. 
내가 아간과 같지 않다고 말할 수 있을까? 

하나님에 대한 시선을 놓치지 않는 자가 되기 원한다. 이 땅의 화려함에 나의 마음을 빼앗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름다우심을 보며 오늘을 살아가는 그런 나그네의 삶을 살아가기 원한다. 소유가 아니라 존재의 인생이 되기 원한다. 가진 것으로 나의 존재를 규정하는 자가 되지 않고, 나의 존재로 내가 바라보는 나의 시선이 머문 그 대상으로 내가 규정되기 원한다. 

시 27:4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
One thing have I asked of the Lord, that will I seek after: that I may dwell in the house of the Lord all the days of my life, to gaze upon the beauty of the Lord and to enquire in his temp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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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19. 1. 11. 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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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7:1-15 홀로 산으로 떠나야 한다. 

여리고성의 대 승리 뒤에 교만은 찾아왔다. 여호수아는 더이상 두려워하지 않았고, 너무 강하고 담대하여져서 하나님께 묻지 않고 병력을 아이성으로 보내게 된다 (2-4절). 그리고 이스라엘 자손들은 승리에 도취되어 하나님께 온전히 받쳐진 물건들을 취하였다 (1절). 공동체가 한 마음으로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승리를 얻었었지만, 이 이스라엘 공동체는 개개인의 교만과 탐심으로 무너지게 된다.  

승리 뒤에 찾아오는 (스스로에게서 나오든, 타인에게서 오든) 인정감은 우리를 흔드는 가장 큰 유혹인 것 같다. 여호수아의 태도를 보면 하나님이 도우셔서 승리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자신들의 힘으로 아이성을 점령하려는 태도를 보인다. 스스로를 인정하고, 백성들로부터도 인정받은 그는 이 일이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린다. 그 결과는 대 패배였다.

큰 성공 뒤에 언제나 더 스스로를 살피고 교만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는 것이다. 내가 한 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 일임을 고백하고 그 분의 은혜를 더 구하는 것이 우리의 할 일이다. 

예수님은 오병이어 사건 이후에 사람들이 자신을 왕으로 삼으려고 함을 보셨다. 오병이어 사건.. 정말 엄청난 기적과 역사 아닌가? 모든 사람들이 이 분이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메시아)임을 고백하고 있다. 하지만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는가?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이 와서 자기를 억지로 붙들어 임금으로 삼으려는 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 가시니라” 요 6:15

홀로 산으로, 아무도 없는 곳으로, 하나님의 인정 밖에는 없는, 아무도 인정해줄 사람이 없는 곳으로 떠나 가셨다. 사람들과 함께 있는 자리, 승리의 흔적이 남아 있는 자리에서 머물면서 자신을 지키기란 어려운 일이다. 예수님은 그렇기에 아무도 없는, 홀로 하나님과 교제하실 수 있는 산으로 가신 것이다. 

어제 밤에 아내와 몇 가지 일들을 나누면서 서로 감사의 고백들을 나누었다. 우리 태국의 형제들과의 있었던 지난 몇 가지 일들로 인해 감사했고, 또한 요엘이가 아주 조금이지만 덜 짜증을 내는 모습을 보며 감사하고, 서로를 격려하는 시간을 가졌다. 하지만 오늘 아침에 나에게 주시는 말씀은 이 작은 승리, 작은 은혜에 도취되지 말고 예수님과 같이 혼자 더 깊은 하나님과의 교제의 자리로 나가라는 것이다.  

사람의 시선, 사람들의 인정에서 자유롭지만, 오직 하나님의 시선과 하나님의 인정이 있는 그 곳, 그 산에서 하나님과의 시간을 통해 교만하지 않고, 욕심내지 않고 다시 한번 하나님께서 주실 은혜를 구하는 시간을 가지고 싶다. 나는 인정의 욕구가 유독 강한 사람이다.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인정을 구하고 싶다. 

요즈음 늘 고백하는 말이지만 느리더라도 바른 길로, 빨리 가지 못해도 함께 가는 삶이 되기 원한다. 
오늘은 좀 더 예수님이 홀로 가신 그 산, 하나님이 계셨던 그 산에 더 거하는 하루가 되길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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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