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Thinking)/Meditation2019. 2. 26. 1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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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115:1-18 여호와께서 우리를 생각하사(기억하사)

시편 115편의 구조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눠진다. 1-8절까지는 우상의 허망함과 우상을 섬기는 자들의 의지의 허망함을 나타내고, 9-18절 까지는 우리가 우상이 아니라 하나님 한 분만을 섬기고 의지하며 그 분만 찬양해야 함을 말하고 있다. 

우상은 눈, 코, 입 모든 것을 갖추고 있는 듯 하지만 그것 에게는 생명이 없다. 숨도 못 쉬고, 그 모든 것들이 기능하지도 못한다. 그 이유는 사람이 만들어 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어떠하신가? 그 분은 우상이 아니다. 창조된 존재도 아니다. 그 분은 스스로 있는 자시다. 살아계신 하나님이시다. 그렇기 때문에 그 분은 우리를 생각하실 수 있다 (12절). 

이 생각하신다는 원어 ‘자카르'는 구약에서 매우 중요하고, 또 구약을 이끌어가는 원동력이 되는 단어 중 하나이다. 이 단어의 뜻은 ‘remember, 기억하다’란 뜻으로, 하나님께서 인간과 언약을 맺으시고, 그 언약을 기억하시고 우리의 인생에 계속해서 개입하시고, 우리 인간을 인도해 나가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기억하시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고, 지금도 일하시는 것이다.

그 분은 살아계신 하나님이시기에, 약속에 신실하신 하나님이시기에 여전히 악하고, 여전히 문제 많고, 여전히 하나님을 배반하는 우리도 기억하신다. 그리고 지금 오늘 이 순간에도 여전히 우리를 기억하고 계신다.

오늘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나 또한 그 분을 기억하는 것이다. 그 분이 내 삶 가운데서 어떠한 놀라운 일을 행하셨는지, 나를 얼마나 극심한 사망 가운데서 구하셨는지, 나를 얼마나 사랑하셔서 그 아들을 보내주셨는지, 새 생명을 주심 뿐만 아니라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살아가게 하셨는지, 그 것들을 잊지 말고 기억하는 것이다. 

기억하는 것 뿐만 아니라 부르신 그 모습대로 살아내는 것이 결국 내가 그 분께 드리는 찬양과 송축이다 (17-18절). 하나님께서 나를 기억하심으로 나를 우상의 허망한 것들에서 불러주셨다. 그리고 하나님을 만나게 하시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허망함 속에 살아가고 있는 태국의 영혼들을 위해 전할 수 있도록  불러 주셨다. 앞의 일들을 두려워 말자. 하나님이 나를 기억하신다. 그리고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내자. 

주일 설교를 준비하고 있다. 많은 부담과 고민들이 있다. 어떠한 형태로 전하는 것이 좋을지, 어떻게 내용을 전개하면 좋을지… 태국어는 잘 할 수 있을지...고민은 꼬리를 물고, 시간은 빨리 지나가기만 한다. 하지만 하나님이 나를 기억하신다는 사실을,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기억하신다는 사실을 전하는 시간이 되기를 원한다. 오늘도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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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19. 2. 26. 1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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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114:1-7 주님께서 부르신 곳으로 가자.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왔다는 의미는 단순히 그들의 힘든 노예의 삶이 해방된 사실만을 말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왜냐하면 2절에서 유다는 여호와의 성소가 되고라고 설명하고 있는데, 성소는 하나님이 거하시는 전이기 때문이다. 이제 정말 그들은 ‘내(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이다. 정말로 출애굽 할 때 그들이 바로에게 설명한 것 처럼 ‘광야에서 절기를 지키기’ 위해서 애굽을 나가는 것이다.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 움직일 때, 바다가 도망하고, 요단이 물러갔다 (3절). 땅도 떨고 (7절), 반석을 쳐서 샘물이 난다 (8절). 하나님께 예배하려 나가는 이스라엘 백성들, 하나님과의 그 언약을 맺어 자신의 백성들이 된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돌보시고 인도하시는지에 대한 기록이다. 결국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이러한 놀라운 일들을 행하신다는 믿음이 없는 사람은,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은 이렇게 안전해 보이는 애굽을 떠나 아무것도 없어 보이는, 모든게 부족해 보이는 광야로 나가지 못한다. 

광야는 모든 것이 부족하지만, 모든 것이 완벽하신 하나님께서 부르신 곳이다. 
광야는 위험해 보이지만 모든 물과 산을 움직이시는 분께서 인도하시는 곳이다.
반면에 애굽은 모든 것이 풍성해 보이고, 모든 것이 있어 보이고, 안전해 보이지만, 그 곳에는 모든 것 되시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곳이다. 대신에 거짓 신이 존재하는 곳이다. 모든 것(Everything) 되신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곳은, 아무 것도 없는 곳(Nothing)인 것 과 마찬가지이다. 

광야로 나아가자. 그 곳이 광야이든 어디든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곳으로 나아가자.
모든 것 되시는 하나님께서 께서 계시는 곳으로 가자. 
하나님께서 변화시킬 것이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움직이실 것이다. 
내가 할 일은 하나님과 함께 가는 것이다. 그 곳이 광야이든,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이든 (시23)…
주와 함께 가는 길이다. 두려워 말자. 

계 14:4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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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Thinking)/Meditation2019. 2. 22. 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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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111:1-10 여호와를 경외함

결국 모든 키를 쥐고 있는 것은 여호와를 경외함이다. 
111:10 여호와를 경외함이 지혜의 근본이라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다 훌륭한 지각을 가진 자이니 여호와를 찬양함이 영원히 계속되리로다

우리의 삶을 움직이는 그 무엇인가가 때로는 필요한 재정, 때로는 유력한 누군가의 말, 때로는 우리를 움직이는 내 안의 어떠한 동력(우상)일 때가 많지만, 오늘 시편 본문을 보면서 느끼는 것은 결국 그 모든 것을 넘어 이 모든 것에 역사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2절에 여호와께서 행하시는 일들이 크시오니라고 말하고 있으며, 7절에서는 그의 손이 하는 일은 진실과 정의이며 그의 법도는 확실하니라고 언급하고 있다. 하나님은 실수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은 공의로우시며, 하나님은 영원토록 그의 언약을 세우시며, 그는 거룩하신 분이시다 (8절). 

따라서 우리가 할 일은 지혜를 가지는 것이고, 지혜를 가지는 키는 바로 '여호와를 경외함'이다. 유력한 그 무엇인가를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만 경외해야 하는 것이다. 경외한다는 것이 무엇일까? 여러가지로 표현할 수 있겠지만 아마도 지금 내 삶에서 일어나는 일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인정하는 것, 참새 한 마리도 그냥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 (마 10:29), 하나님께서 지금도 내 삶에 역사하시고, 내 삶을 다스리신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 그것이 지금 오늘 내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방법이다. 

이미 임하신 하나님 나라 안에서 살아가며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며,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경외함이다. 그 어느 것도 모르겠고, 한치 앞도 잘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부르신 이 자리에서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바로 오늘을 살아가는 것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다. 

내가 하려고 하지 말자. 재정을, 말을, 유력한 누군가를, 내 안에 우상들을 의지하지 말자.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 경외하자. 
오직 하나님만… 오직 하나님만…
그래서 그 분 안에 흘러넘치는 지혜를 누리는 하루가 되자. 지혜는 경외함으로만 얻을 수 있다. 
지혜를 얻는 자가 되자. 그래서 지금 이 상황에서 나에게 가장 적절한 지혜를 구하자. 주님 나를 도우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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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Thinking)/Meditation2019. 2. 21. 1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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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110:1-7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의 모습 not I but Christ

시편 110편은 기본적으로 메시아에 대한 예언의 시이다. 누가 하나님 오른편에 앉으며, 다윗의 주라 부를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그리고 누가 멜기세덱의 서열을 따라 영원한 제사장에 되겠는가? 이 모든 시는 메시아에 대해서 말하고 있으며 메시아에 대한 열망을 보여주고 있다. 

메시아가 이스라엘에 필요했던 이유는? 지금 오늘 나에게 필요한 이유는? 단순히 내가 천국간다는 그 믿음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다. 메시아는 진정한 샬롬을 주기 위해서 오셨고, 진정한 샬롬은 내 개인의 구원은 시작에 불과하고, 이 사회에 이 땅 전체에, 그리고 온 우주에 그 샬롬이, 그 평화가 드러나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죽어서 가는 하나님 나라가 아니라 주기도문의 말씀처럼 이 땅으로 하나님 나라가 임해야 하는 것이다 (나라이 임하옵시며). 내가 구원받아야 하기 때문에 예수님이 오셨지만 내 개인의 구원만을 위해 예수님이 오신 것이 결코 아님을 알아야 한다. 

이 땅의 불의와 거짓 가운데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왕이 되셔야 한다. 하지만 그 시작은 ‘나’이다. 진정한 샬롬이 이 땅 가운데 드러나기 위해서 먼저 내 삶으로 하나님 나라가 임해야 한다. 내 삶에 진정한 샬롬이 나타나야 하고, 내가 하나님의 다스림과 통치 안에 거해야 한다. 결국은 내가 먼저 죽어야 하고, 내가 먼저 변화되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가 임한다는 것은 그 시작은 Not I but Christ에서부터 시작된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라는 이 말씀이 삶으로 나타나야 내 안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고, 그 분의 통치가 내 삶에 드러난다. 

여전히 내 자아가 죽는 것은 어렵고, 때로는 두렵다. 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고 (1절), 뭇 나라를 심판하실 것이며 (6절), 우리는 승리할 것이란 것이다. 지금 이미 시작되었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은 하나님의 나라가 결국은 승리할 것이란 것이다. 

오늘도 이미 임한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써 나를 내어주며 오늘도 내 자아를 내려놓고, 죽는 길을 선택하는 삶을 살아낼 수 있기를 원한다. 사실 가장 작은 일에서 나를 내려놓는 것이 가장 어렵다. 아이들의 쉬운 부탁들.. 물 떠달라, 안아달라, 씻겨달라… 가장 일상적이고, 가장 작은 일에서부터 나를 내려놓고 (Not I), 하나님의 형상인 그들을 섬기기 원한다 (but Chr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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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Thinking)/Meditation2019. 2. 20. 1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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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220 시 109:1-31 나는 기도할 뿐이라

오늘 시편은 다윗의 시편이다. 다윗의 인생을 생각해볼 때 다윗이 이렇게 저주할 만한 사람이 도대체 누굴일까 궁금할 정도로 깊은 저주와 속상함이 나타난다. 6-20절에서 진심으로 화가나서 고백하는 것이 느껴진다. 그 사람에 대한 분노가 그의 아내와 자녀들까지 저주하게 만들고 있다. 다윗이 왜 이럴까 하는 마음은 4절에서 해결된다.

‘나는 사랑하나 그들은 도리어 나를 대적하니 나는 기도할 뿐이라’

다윗의 이 모든 저주는 성냄은 화냄은 그의 기도안에서 하나님께 아뢰고 있는 내용일 뿐이다. 정말로 그를 찾아가서, 그의 가정에 대해서 저주하고, 성내는 것이 아니라 주 안에서 말하는 것이다. 그의 분노와 화냄과 성냄을 하나님 안에서 기도로 풀어내고 있는 것이다. 그는 ‘기도할 뿐이었다’

이것이 다윗의 위대함으로 느껴진다. 살아가다 보니, 여러가지 일에 얽히다 보니 분노하고 화가 나고, 그 화가 여전히 내 안에서 소화되지 않고 가지고 살아갈 때가 있다. 그래서 때로는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기도 하고, 때로는 속상함을 토로 하기도 한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서 내가 다윗에게 배우는 것은 ‘기도할 뿐이다’ 라는 것이다. 

이 위까지 묵상을 하고 비행기를 탔고, 방콕에 내렸다. 
이제 집에 가겠다는 기쁜 마음으로 이민국을 통과하려는데 이민국 직원이 나를 잡았다. 내가 정식 비자가 없는데, 여러번 비자 연장을 위해 해외로 다녀온 것을 빌미로 삼는 듯 했고, 여권과 내가 비자를 받기 위해 종교국에 제출한 서류를 달라고 하더니 나를 한 구석으로 데려갔다. 앉아서 한참을 조사하고 기다리게 했고, 형제교단 비자 담당하는 자매와 통화하며 최근에 종교국에서 나온 허가 서류를 라인으로 받았고, 그 서류를 보여줬다. 설명이 안 통하는 느낌이었지만 방금 받아 보여준 서류가 적절했는지 이민국 프로그램에 그 서류에 기재된 모든 것을 기록하는 듯 하더니 대략 한 시간만에 보내줬다. 

그 한 시간 동안 수 많은 마음이 교차했다. 비자서류가 진행중이라고 설명하고, 증거로 복사된 서류를 제출했는데도 왜 이것을 인정하지 않고 이렇게 붙잡아 두고, 잘못을 저지른 사람처럼 취급하는걸까? 나는 나 스스로를 태국사람이라고 생각하는데, 결정적인 순간에 이 사람들은 나를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구나…(사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선교사로 이 곳에 있는 것이 저들에게 어떤 의미일까? 별 생각이 다 들었다. 그러면서 내 안에서 쓴 마음이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나를 거부하면 나도 여기 안 있는다. 다른데 가야되나 보다. 나도 오라는데 많다.’ 등등의 근거와 상관없이 쓴 마음에서 올라오는 별 생각이 다 들었었다. 집에 돌아와서 다시 묵상을 하기위해 말씀을 펴며 비행기 타기전까지 보았던 다윗의 고백이 기억났다. ‘나는 사랑하나 그들은 도리어 나를 대적하니 나는 기도할 뿐이라’

정말 오늘을 위한 말씀을 아침에 받았음에도 그 순간 다윗과 같이 기도하기 보다는 분노와 쓴 마음들이 나를 사로잡고 있음을 보며 회개했다. 나는 이 영혼들을 위해 온 선교사인데, 조그마한 거절과 내가 원치않는 상황이 발생하면서 그 속에서 그들에게 분노와 쓴 마음들을 가지는 연약함을 보면서 내가 아직 멀었다는 생각을 다시 하게 되었다 (사실 자주 하는 생각이다). 정말 내가 사랑하는 것이 내가 인정받고, 내가 환영받는 그 상황과 나를 환영하는 그 사람들인건지… 복음을 거부하는 것 뿐 아니라 나를 거부하는 듯한 하지만 끝까지 사랑해야 하는 그들인건지… 예수님도 예수님을 거절하고 거부하는 모든 사람들을 품으셨지 않는가?

오늘 정말 '나는 기도할 뿐이라'이 말씀이 내 삶 속에서 고백이 아니라 삶으로 드러나길 원한다. 그들을 위해 기도한다. 그들이 나를 거부하고 힘들게 하더라도 여전히 나는 그들을 사랑하며 기도하길 원한다. 내가 이 자리에 와 있는 것이 거절 당하고, 거절 당하면서도 그들을 사랑하는 자리임을, 그리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자리임을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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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19. 2. 18. 0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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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218 시 107:33-43 상황이 아니라 하나님만 붙드는 믿음

너무나도 풍족한 강과 샘이 변화되어 황무지, 마른 땅이 된다 (33절).
반대로 너무나도 황무한 황무지, 마른 땅이 변화되어 못과 샘물이 된다 (35절). 

풍족함에서 마른 곳으로, 황무지에서 샘물로 변화시키시는건 오직 주님이시다. 오늘 본문에서 보면 하나님은 상황과 환경을 변화시킨다.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다. 그에게는 불가능이란, 어려움이란 없으시다. 그 분만이 하나님이시며 온 땅과 온 우주의 주님이시다. 

그런데 그 주님이 악인에게는 보응하시고 (33-34절), 궁핍한 자와 정직한 자들을 구원하여 주신다 (35-42절). 특별히 오늘 본문에서는 실제로 인생에서 살아가는 물과 가축에 대해 이야기 하시며, 그 가족들을 또한 지켜 주심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 오늘 시편에서 느끼는 결론은 하나님께서 선인과 악인에 대해서 잘 알고 계시며 그들의 인생을 하나님께서 이 땅에서도 판단하고, 심판하시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있다. 

바로 이 것이 여호와의 인자하심(43절)이다. 그 분의 인자하심은 단순히 우리에게 보이지 않는 형태로만 나타나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믿음의 영역에서만, 혹은 구원의 영역에서만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항상은 아니더라도) 우리의 삶에 그 분께서 간섭하시고 개입하시는 것이다. 

지금 처해 있는 환경이 황무지, 마른 땅 같다고 해서 낙심할 필요도 없다. 지금 처해 있는 환경이 강과 샘이라고 해서 교만할 필요도 없다. 오직 하나님께서 필요에 따라 바꾸실 것이다. 중요한 것은 온 우주의 주님이시고, 나의 아버지이신 그 하나님과 내가 지금 이 순간 동행하느냐의 문제이다.상황은 언제든지 변한다. 하지만 언제나 변화하는 상황 속에 내가 누구를 의지하고, 누구를 붙잡고 있느냐는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그래야만 우리는 상황에 상관없이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우리의 삶에서 깨달을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신 분이시다. 단순하게 지금 상황을 보고 염려하거나, 교만하거나 하지 말자. 오직 내가 그 분과 동행하며, 그 분의 뜻을 묻고 있는지를 항상 점검하자. 그 인자하심과 성실하심이 우리의 삶을 인도하실 것이다. 상황이 어렵다면 그 상황을 바꾸실 것이다. '내 앞에 바다가 갈라지지 않는다면 주님께서 나를 바다 위로 걷게 하리 ('나는 믿네' 찬양 가사 중).’

NIBCM 안에 조직적으로 엄청난 변화들이 생겼다. 참 감사한 일이다. 감사한 이 상황 속에서도 내가 할 것은 오직 그 분과 동행하며 그 분의 뜻을 묻는 것이다. 상황과 환경에 요동하지 않고 오직 그 분의 뜻을 붙잡고 그 분의 인도하심대로 가는 것이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아는 자의 삶이다. 오늘 하루도 그렇게 살기 원한다. 하나님이 변화시키시면 환경은 언제나 변한다. 상황이 아니라 하나님을 붙잡는 믿음의 사람으로 오늘 하루를 살아가자. 작은 일에 낙심말며, 큰 일에도 두려워말며 오직 하나님만 붙들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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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Thinking)/Meditation2019. 2. 18. 0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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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107:1-9 사모하는 영혼으로 살아가자.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생들에게 속량(redemption)을 행하신다 (2절). 
하나님이 근심 중에 부르짖는 자를 그들의 고통에서 건지시고, 바른 길로 인도하사 거주할 성에 이르게 하신다 (6-7절)
기적을 행하신다 (8절)
사모하는 영혼에게 만족함을 주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신다 (9절)

짧은 시편이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행하시는 놀라운 일들을 노래하고 있다. 모든 시편의 구절들이 좋았지만 특별히 더 마음에 와 닿았던 구절은 7절에서 ‘또 바른 길로 인도하사 거주할 성읍에 이르게 하셨도다’ 였다. 하나님은 우리의 목마름과 영혼의 피곤함을 아신다 (5절). 아시는 것 뿐만 아니라 바른 길로 인도하시는 분이시다. 원어를 보니 바른이란 단어는 ‘야샤르’라는 히브리어로 ‘똑바르다 (straight)' 의 의미와 ‘의롭다 (righteousness)’의 뜻을 모두 가지고 있는 단어이다. 하나님께서 우리 목마르고, 영혼의 피곤함이 있는 자들에게 아마도 물을 먹을 수 있는 아주 똑바른 길과 영혼의 연약함을 하나님의 의로움으로 채우신다는 의미로 여겨진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언제나 이렇게 해주실 준비가 되어 있으시다.

하지만 9절을 보면 그렇게 채우실 것의 전제 조건(?)은 그렇게 채우시기로 한 대상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사모하는 영혼’이다. 이것은 은혜 받을만 한 자에게만 은혜를 주시고, 하나님께 우리가 사랑을 드렸으니까 하나님께서 채우신다는 행위적인 의미가 아니라, 정말로 하나님을 기대하고 사모하는 영혼이란 뜻으로 여겨진다. 심령이 가난하고, 마음이 겸손하여 하나님을 바라는 자들을 아마도 사모하는 영혼이라고 표현하게 되는 것 같다. 그러한 자들을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만족함과 채워짐을 주신다. 

어제 밤에 아내랑 많은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묵상을 하며 어제 나눔을 생각하면서 정말로 감사했던 것은 아내도, 나도 지금 사모하는 영혼으로 서 있는 것 같다는 것이다. 상황과 환경, 그리고 우리의 소원함 속에서 우리는 계속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빚어가고 계심을 느끼게 된다. 지금 당장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만족과 좋은 것이 다 보이지 않지만 우리는 그 바른 길로 인도하시는 하나님만 바라보며 이 길을 걸어가고 있다. 두렵기도 하고, 앞이 보이지 않아 답답하기도 하고, 우리의 기질과 생각이 성숙하지 못해 속상한 일도 많지만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을 신뢰하며 한 걸음 씩 내딛고 있다.

정말로 우리의 영혼이 계속해서 사모하는 영혼이 되기를 원한다. 삶에 기적이 일어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하나님을 버리고 이방신들에게로 간 이스라엘 백성과 같지 아니하고, 날마다 날마다 주님을 더 사모하는 영혼이 되기를 원한다. 당장 해야 할 일들이 잘 보이는 반면에 아직 큰 그림이 잘 보이지 않아 답답하기도 하다. 하지만 기쁨으로 아내와 이 길을 갈 수 있어서 너무 감사하다. 계속해서 하나님을 사모하는 영혼으로 살아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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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Thinking)/Meditation2019. 2. 15.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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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24:19-33 (좋은)결과라는 우상이 아니라 하나님과 동행함을 선택하는 삶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수아의 권면을 통해 여호와 하나님만 섬기기로 결정을 했다 (21절). 그리고 그들 스스로가 그들의 결정과 믿음의 주인이 되었다 (22절). 그 이후 여호수아가 요청한 것은 ‘그러면 이제 너희 중에 있는 이방 신들을 치워 버리고’(23절) 였다. 그들이 이미 어떤 형태로든 우상을 가지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그것이 눈에 보이는 어떤 것이든, 혹은 눈에 보이지 않는 그 어떤 것이든… 우리의 삶과 마음에 가득 차 있는 것들을 먼저 없애버릴 것을 여호수아는 요청한다. 

그리고 나서의 여호수아의 가장 먼저의 요청은 ‘너희의 마음을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로 향하라’였다. 삶에, 마음에 있는 것들을 다 없애 버리고 나서 요청되는 것은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돌리는 것이었다. 우리의 신앙은 항상 이 마음의 전쟁이다. 무엇이 내 삶에 가득한가? 무엇이 내 마음에 가득한가? 이것이 지금 내가 무엇을 믿고 있느냐에 대한 진정한 지표가 된다. 

내 마음을 돌아보면서 알게 되는 것은 내 마음에 가득한 것이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늘도 내가 죽는 것을 목적으로 살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이 전부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그것이 그다지 놀랍지 않다는 것이다. 무뎌지고, 무뎌져 버렸다. 

처음에 본문을 보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도대체 시간이 얼마나 흘렀다고 우상들을 가지고 있어서 여호수아가 저렇게 말하도록 했는지를 답답해 하며 보고 있었는데, 그들의 모습이 바로 나의 모습이었다. 

올 한 해의 목표가 ‘느리더라도 바른 길로 가자, 빨리 가지 못해도 함께 가자’이다. 그러나 어느새 또 조급해지는 나를 보게 된다. 머리속에는 하나님과 함께 가는 이 시간이 너무도 소중한 시간인데, 자꾸만 언어를 잘 하는 선교사, 사역을 잘 하는 선교사가 되고 싶은 마음이 들어온다. 보여주고 싶고, 드러내고 싶고, 사람들의 인정을 구하는 모양이 되어 가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이 하나님이 전부가 되지 못한 삶의 열매들을 맺어 내고 있다. 이것들이 내 삶에 우상들이 되어가고 있다. 

오늘도 다시 한번 내 마음을 하나님께로 향하게 하기를 원한다 (23절). 주님과 함께 걸어가는 이 시간들을 가장 귀하게 여기고, 그 주님과 함께 약간은 우직하게 걸어가기 원한다. 결과가 좋으면 좋겠지만 반드시 결과로 모든 것을 말해야 한다는 그 가치관에서 조금은 나를 비워내고 싶다. 

지금 내가 주님과 동행하고 있는가?  지금 이 순간 하나님을 기억하고 있는가? 지금 이 순간 복음으로 살아내고 있는가? 이러한 것들이 (좋은)결과라는 우상보다 더 내 마음을 채우고 내 삶에 가득해지길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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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Thinking)/Meditation2019. 2. 14. 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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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24:1-18 오늘 하루를 동행할 때 내 삶의 변화가 생긴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정리해주고 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선택하셨고, 이삭과 야곱을 선택하셔서 어떻게 애굽으로 들어가 살게 되었는지를 말하고, 하나님이 어떻게 애굽에서 이끌어 내셔서 지금 이 곳 까지 안전하게 올 수 있게 하셨는지를 이야기 한다. 

14절부터는 ‘그러므로’로 시작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정말로 하고 싶은 말로 결론을 내고 있다. 그런데 여호수아는 그들에게 하나님을 믿을 것을 결코 강요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지금까지 이렇게 우리를 신실하게 인도해오셨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희들이 강 건너 애굽의 신이 더 좋아 보이거든 그들을 섬기라고 아주 쿨하게 말하고 있다. 믿음을 강요하지도 구걸하지도 않는다. 그저 그들이 선택하도록 만든다 (15절). 

하지만 자신들의 선택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이야기 한다.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15절 하반부)’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떠한 선택을 하든지 상관없이 이미 자신과 자신의 가정의 마음은 결정되어 있다. 세상이 어떻게 가든, 세상이 뭐라고 하든, 세상이 우리에게 어떠한 유혹을 하든 관계없이 이미 마음을 결정한 것이다. 

시 57:7 하나님이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리이다

믿음의 자리에 서 있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보면서도 많은 순간 내가 세상에 한 발, 하나님께 한 발을 걸치고 살아가고 있는지를 나 스스로가 잘 알고 있다. 여호수아와 같이 저렇게 마음을 확정하지 못한 까닭이다. 세상과 다른 방향으로 갈 용기가 없는 까닭이다. 세상에 여전히 미련이 있기 때문이다. 

여호수아가 인생의 마지막에서 모든 사람들과 상관없이 저런 결단을 할 수 있게 된 것은 그의 생에에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끊임없이 해주신 말씀이 있었다. 바로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고 놀라지 말라, 나는 너의 하나님이다’ 라는 말씀이었다. 반대로 이야기 하면 여호수아도 하나님의 끊임없는 말씀을 듣지 않고서는 두려워할 수 밖에 없는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평생을 그렇게 듣고, 하나님의 율법책을 늘 가까이 하며 말씀을 대한 여호수아의 마지막은 그 누구도 감당할 수 없는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된 것이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할 때에 나는 세상을 두려워 하지 않을 수 있다. 왜냐하면 그 때라야 비로소 세상보다 하나님이 더 크심을 분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호수아의 인생의 마지막 결정, 결단은 그의 인생 전체를 함께 하신 하나님과 보냈던 시간(과정)의 결과였다. 과정없이 결과를 얻을 수 없다. 하나님과 보내는 시간없이 세상을 넘어서는 결정을 할 수 없다. 그래서 오늘, 하루를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아내는 것이 중요하다. 지금은 내 결정이 연약하고, 부족해도 이 시간들을 거치며 나타나는 결과는 지금과는 다를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도 더 말씀을 대하며, 연구하며, 읽고, 묵상하기 원한다. 시간이 없다 핑계대지 않기 원한다. 세상의 소리보다도 더 하나님의 소리를 듣기 원한다. 내 안에 잡음과 시끄러운 소리들을 꺼버리고 오직 하나님께 귀 기울이기 원한다. 지금 당장 여호수아와 같이 결단하지 못하여도, 오늘도 이 하루를 주님과 동행하는 과정을 걸어내기 원한다. 나도 이 하루 내 마음을 더 확정하기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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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19. 2. 13. 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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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23:1-16 나의 인격과 삶에서 드러나는 복음 

여호수아의 고별설교이다. 그는 마지막까지 충성하였고, 이제 나이가 많아졌다 (1절). 23:3을 보면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장 남기고 싶어 하는 유산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다. 
23:3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이 모든 나라에 행하신 일을 너희가 다 보았거니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 그는 너희를 위하여 싸우신 이시니라

여호수아가 가장 남기고 싶어했던 유산은 바로 하나님께서 너희의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3절에서 계속 반복되는 단어는 ‘너희’이다. 하나님도 ‘너희의' 하나님이고, 그 하나님께서 ‘너희를' 위하셨고, ‘너희의’ 하나님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신 분임을 계속 강조하고 있다. 

하나님이 늙어버린, 지금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해 온 여호수아의, 여호수아를 위한 하나님일 뿐 아니라 그 하나님이 너희 모든 사람들의 하나님이시고, 너희를 위해 싸우셨음을 마지막으로 남기고 싶었던 것이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실 뿐만 아니라 이제 오늘을 살아가는 너희 모두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자녀들들에게 형제, 자매들에게 가르쳐야 하는 것이 바로 이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멀리 계시고, 아빠, 엄마의 하나님, 혹은 선교사의 하나님이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들이 직접 하나님을 경험해야 하고, 하나님을 만나야 하고,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 나의 하나님이 이제 그들의 하나님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기적을 보았고, 기적을 경험했다. 하지만 그것이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되게 하지는 못했다. 기적이 아니라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야 한다. 하나님을 강제로 만나게 할 수는 없지만,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 우리의 삶으로 보여줄 수는 있다. 결국 나의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 되게 하기 위해서는 나의 삶, 나의 인격, 내 삶에서 하나님의 모습이 드러나야 한다. 결국은 내가 나의 하나님을 더 깊이 만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하고, 내가 하나님을 만난 것이 삶에서 드러나야 한다. 

지난 주 주일예배 후 식사를 마치고 함께 설겆이를 했다. 몇 번 같이 하긴 했었지만 자주 하지는 못했었다 (그룹이 짜여져 있다). 그런데 함께 설겆이를 하는 우리 대학생 형제, 자매들이 뭔가 낯설어 함과 동시에 뭔가 좋아하는 것을 느낀 것 같다. 아차 싶은 마음도 들었고, 무엇을 해야할지도 더 알게 되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섬김의 본의 모습을 보여주셨다. 옷을 걷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다. 나도 더 옷을 걷고, 설겆이에, 섬김에 동참해야겠다. 복음은 말에서 나오지만, 삶에서도 더 크게 나타나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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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