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Thinking)/Meditation2018. 12. 11. 10:24
728x90
반응형
왕상 15:1-8 복음은 내 삶의 모든 것이 예수님 때문임을 깨닫는 것

조상 덕을 본 한 인물이 등장하는데 남유다의 두 번째 왕인 아비얌 왕이었다. 그는 여로보암 왕이 행한 모든 죄를 행하였고, 온전하지도 못했지만 하나님께서 다윗을 위하여(4절) 그에게 등불을 주셨고, 예루살렘을 견고하게 하셨다. 옛 우리말에 ‘잘 되면 내 탓, 못 되면 조상 탓’ 이란 말이 있는데, 이 케이스는 정반대였다. 다윗의 순종과 다윗의 온전함이 그들의 자손들까지 건져주시는 은혜를 누리게 되었다. 하나님이 다윗에게 하신 약속에 신실하셨기 때문이다.

결국은 ‘잘 되면 내 탓, 못 되면 조상 탓’이 아니라 '잘 되어도 하나님 때문, 못 되어도 하나님 때문인 것'이 우리의 삶이다. 이것이 복음이다. 우리가 잘해서, 뛰어나서, 거룩해서 예수그리스도의 신부가 되는 것이 아니다. 못해도, 죄지어도, 불경건해도 우리는 신부가 되는 것이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때문에… 결국 자랑할 것도, 교만할 것도 없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이고, 우리가 한 것은 그저 믿은 것 외에는 없다. 믿음도 선물이다. 도대체 내가 기여한게 없는데 만 왕의 왕의 신부가 되는 것이 복음이다. 

본문을 읽으며 아비얌이 너무했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이내 그 생각은 나도 다르지 않다는 생각으로 바뀌었다. 나도 예수 그리스도 덕으로 지금 이 자리에 감히 선교사라고 서 있는 것이지 뭐가 다르겠는가? 내 속에 선한 것이 없다는 것은 내가 더 잘 알지 않는가? 내가 조금, 아주 조금 더 앞에 있다고 뒷 쪽에 있는 사람들을 정죄의 눈으로 바라보면 안됨을 배운다. ‘예수님 덕’을 보고 있음을 한 순간도 잊지 말아야겠다. 이것을 잊으면 바로 들어오는 생각은 교만함과 정죄함의 마음이다. 내가 뭐라고…

요엘이를 키우면서 정말 힘들 때가 많다. 정말 이해가 되면서도, 정말 힘들다. 도대체 이 아이의 끝은 어디일까?를 수없이 생각해 본다. 오늘 아침에도 차를 타러가는 10분내내 짜증을 내면서 갔다. 두 마음이 공존한다. 이해가 되는 마음도 있지만 또한 이해하기 보다는 화가 나고 짜증이 샘솟는다. 하지만 기억하자. 지금의 나는 나의 이러한 모습들을 받아준 많은 사람들 때문에 어른이 된 것임을…  부모님 덕, 선생님 덕, 친구들 덕을 보며 여기까지 온 것임을… 그리고 예수님께서 부어주시는 사랑과 복음이 내 삶을 겨우 여기까지 오게 했음을 잊지 말자. 복음을 기억하고 요엘이에게 꼰대 아빠가 되지 말자. 

어느 선배 페이스 북에서 이런 글을 본적이 있다. 꼰대가 되지 말자. 꼰대가 되지 말자. 꼰대가 되지 말자. 복음을 아는 자가 절대로 되지 말아야 할 것이 꼰대다. 아니 될 수도 없는 것이다. 오늘도 꼰대가 아니라 은혜를 아는 자가 되자. 나의 나 된 것이 오로지 주의 은혜임을 알고, 요엘이를 더 사랑으로 안아주자. 

728x90
반응형
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18. 12. 10. 21:47
728x90
반응형
왕상 14:21-31 복음으로 가득한 양육

어제까지는 북이스라엘 여로보암과 그의 집안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이야기 했었다면 오늘 본문은 남유다의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 왕으로 돌아온다. 그는 늙은 신하들의 지혜를 멀리하고 야망을 가진 젊은 친구들의 말을 들음으로써 이스라엘을 두 동강 냈다. 그런데 그러한 그를 오늘 본문에서는 매우 특이하고, 또 슬프게 묘사하고 있다. 22절에 ‘유다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되 그의 조상들이 행한 모든 일보다 뛰어나게 하여’ 그는 죄에 관해서 뛰어난 사람이었다. 하나님께서 그를 이렇게 불러주셨다는 것에 더욱 슬픈 마음이 든다. 

그런데 그 씨앗은 바로 그의 아버지 솔로몬이 뿌렸다. 바로 그의 어머니를 오늘 본문에서만 두 번 소개하는데, ‘그의 어머니의 이름은 나아마요 암몬 사람이더라 (21절, 31절)’ 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그의 어머니는 암몬 자손이었다. 솔로몬이 다른 나라의 공주들과 혼인을 통해 자신의 나라의 안정을 도모했는데, 바로 암몬 사람의 아들이 여로보암이었다. 이스라엘에 대해 들은 바로는 모계사회로, 유대인이라고 함은 아빠가 어떤 사람인가는 중요하지 않고, 엄마가 유대인이면 유대인으로 취급을 해줄 정도로 엄마의 교육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는 민족이었다. 그런데 세상적으로 안정을 도모하느라 하나님의 말씀을 경히 여기니, 죄에 관해서 뛰어난 아들이 나오게 된 것이다. 율법과 하나님의 말씀과 상관없는 아들이 나온 것이다. 

말씀과, 하나님을 삶과 분리하면 얼마든지 발생할 수 있는 이야기이다. 어머니의 교육은 삶과 신앙의 일치이다. 어머니는 모든 것을 말이 아니라 삶으로 보여주는 양육자이기 때문이다. 말씀 따로, 삶 따로의 삶으로 자녀를 양육하게 된다면 우리는 죄에 탁월한 자녀를 양육하게 되는 것이다. 세상의 안정, 세상의 성공을 도모하려고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을 경히 여기고, 하나님과 삶을 분리하기 시작하면 우리는 집에서는 교회에서는 하나님을 말하지만 세상 속에서는 하나님을 부끄러워 하는 존재가 되고 만다. 

나의 삶과 나의 신앙은 일치되어 가고 있는가? 나는 우리 형제들에게 그러한 삶으로 가르치고 있는가? 우리 아이들에게 그렇게 가르치고 있는가? 삶을 돌아보면 부끄러운 이야기이다. 형제들이, 아이들이 악한 일에 뛰어난 자가 되지 않기를 원한다. 그들의 삶은 사실 나의 책임이다. 그렇다면 먼저 내 삶이 복음으로 하나된 삶을 살아야만 한다. 내 삶을 인도하는 것이 말씀이고 복음이어야지 암몬 사람이 되면 절대로 안되는 것이다. 나는 유대인 어머니와 같은가? 아니면 암몬 자손의 어머니와 같은가? 복음으로 가득한 양육자가 되기 원한다. 복음으로 가득한 부모가 되기 원한다. 복음으로 가득한 선교사가 되기 원한다. 두려워 함으로 내 삶을 매일 돌아보자. 


728x90
반응형
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18. 12. 9. 16:24
728x90
반응형
왕상 14:1-20 누구와 함께 무엇을 위해 사는가?

여로보암은 자신에게 직접 주신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하였지만 자신의 아들 아비야가 아프자 다시 하나님이 생각이 난 것 같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 직접 나아가지 못하고 자신이 왕이 될 것을 예언했던 선지자에게 물으러 간다. 그것도 자신의 아내를 몰래 변장시켜서 가도록 한다. 찌질한 남편의 모습이고, 찌질한 왕의 모습이다. 

하나님은 그런 여로보암에게 주실 말씀을 먼저 예비하신다. 아내가 성읍으로 돌아가면 아이가 죽게 된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그 아들만 묘실에 들어가게 되는데 그 이유는 그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향하여 선한 뜻을 품었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신다. 아들은 정말 죽게 되었다. 그는 왕이 되지도 못했고, 그는 그렇게 짧게 살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되었고, 여로보암 왕은 그 이후로도 20년을 더 왕으로 살다가 죽게 되었다 (20절). 

하나님께서 내리신 아들 아비야와 여로보암 왕에 대한 평가는 극명하다. 한 사람은 짧은 인생에도 불구하고 여호와를 위해 선한 뜻을 품었다고 하셨지만 (13절), 여로보암 왕은 그의 죄 때문에 그의 집안을 쓸어버리고 죽으면 그 시체를 개와 새가 먹을 것이라 평가하고 계신다 (10, 11절). 얼마나 오래 사느냐 보다 더 중요한 것이 누구를 위해 어떻게 사느냐이다. 

캄보디아에 와서 정말 열정을 다해 비즈니스 미션을 하고 있는 형님 부부와 교제하며 느낀 마음과 같다. 충분히 자신을 위해 편하게 잘 살 수 있지만, 하나님께서 보내신 곳에서 영혼들을 위해 손해보며 살 수 있는 삶이 가장 귀하고 풍요로운 삶임을 더 깨닫는다. 나는 지금 누구를 위해 어떻게 살고 있는가? 하나님께서는 내 삶을 어떻게 평가하고 계실까? 

혹시 여로보암처럼 나를 위해 나의 영광을 위해 살고 있지는 않은지? 혹은 복음을 이야기 하면서도 그 복음으로 살아내지 못하고 있지는 않은지? 얼마나 오래 사느냐보다 얼마나 깊이있게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아가느냐 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나를 보고 평가하시는 기준임을 잊지말자. 하나님은 성취만을 평가하지 않으신다. 아비야가 한 것이 무엇이 있는가?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아비야가 가진 그 선한 뜻을 보셨고, 그것을 평가하셨다. 마치 아브라함이 가진 믿음을 의로 간주하신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오늘도 내가 이 곳에(방콕에) 있는 이유가 하나님과 동행하며 영혼들을 위해 기꺼이 손해를 감수하며 이 곳에서 살아가는 것임을 잊지말자. 하나님이 부르신 이 곳이 우리가 발을 딛고 소망하며 살아갈 바로 그 곳이다. 


728x90
반응형
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18. 12. 9. 16:24
728x90
반응형
왕상 13:20-34 말씀의 판단자의 자리에 앉지 않기

죽임을 당한 선지자는 거짓말에 속았다. 어떻게 보면 억울한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갔고, 그 말씀을 잘 전하고 나서 단지 늙은 선지자의 속이는 말에 속았을 뿐이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에게 내리는 평가는 21절에 보니 ‘여호와의 말씀을 어기며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내리신 명령을 지키지 아니하고’ 라고 말씀하셨다. 분별하지 못한 것이 그의 죄인 것이었다. 자신에게 임한 하나님의 말씀과 늙은 선지자가 이야기한 말씀이 다른데도 그것을 분별하지 못하고 그것을 분별없이 믿었다. 그것이 그가 죽은 이유였다. 

하나님은 여로보암에게 경고하시기 위해 하나님의 사람을 보내셨고, 하나님의 말씀을 임하게 하셨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람이라도 깨어있지 못하고 분별하지 못할 때 그 말씀이 오히려 자신에게 독이 되는 것을 보게 된다. 무엇을 하든지 어느 곳에 있든지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지는 말씀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 직접 하는 큐티 안에서, 일어나는 상황 속에서, 설교 말씀을 통해 들리는 말씀 속에서, 혹은 마음 가운데 주시는 말씀 속에서 우리는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 말씀을 우리의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해석할 수 있어야 분별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람이 속은 것이 단지 늙은 선지자의 거짓말 때문이었을까? 라는 생각이 든다. 단순히 분별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그는 그의 기준으로 말씀을 해석했다. 하나님은 분명히 그에게 가라고, 먹지도, 마시지도 말라고 직접 말씀 하셨다. 그런데 왜 이렇게 중요한 말씀을 바꾸시면서 그 자신에게 직접 말씀하시지 않고 다른 선지자들을 통해 말씀하실거라고 생까했을까? 가장 중요한 순간 그는 그 자신의 기준, 그의 잣대를 하나님의 말씀에 대었다. 스스로가 말씀의 판단자가 된 것이다. 가장 크리티컬한 순간에 그는 자신이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 버렸다. 그것이 그가 억울하게 속았을 뿐이지만 죽음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비자가 아직 나오지 않아 캄보디아 프놈펜으로 여행중이다. 재정도 많이 들고, 시간도 많이 쓰게 되고.. 사실 불만 투성이의 여행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상황 속에서 여전히 좋은 사람들과의 교제를 통해 조금 더 하나님의 뜻과 마음을 보여 주신다. 이 모든 여행 가운데 내가 판단자의 자리에 앉지 않을 때 비로소 예비하신 좋은 것들을 보게 됨을 배운다. 지난번 베트남 여행에서도 마찬가지였지만 선교사이기 때문에 분에 넘치는 사랑과 섬김을 받게 되고, 함께 하나님 나라를 위해 각기 다르지만 여러 모양으로 섬기는 동역자들을 통해 도전과 더 깊은 하나님의 계획을 보게 된다. 이 모든 것을 보지 못하면서 내가 내 삶에 판단자가 되어 하나님의 말씀과 인도하시는 손길을 얼마나 불평으로만 채웠는지 회개하게 된다. 

그리고 여전히 부족한 자의 말씀나눔을 받으시는 분들에게도 감사를 드린다. 여전히 좌충우돌하며 하나님의 마음과 계획을 발견하려고 애쓰는 저의 이 여정가운데 함께 기도해주시며, 여러가지 후원으로 함께 걸어가주시는 여러분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제가 저의 삶에서 판단자의 자리에 앉아 이 하나님의 사람과 같이 시작은 아름다웠지만 마지막은 불순종으로 끝나지 않게 계속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저희는 내일 아침에 다시 방콕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샬롬

728x90
반응형
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18. 12. 6. 13:51
728x90
반응형
왕상 13:1-10 은혜는 계속된다. 

하나님의 은혜는 계속된다. 여로보암이 자신의 두려움 때문에 자기 마음대로의 새로운 종교를 만들어 내어도 하나님은 그에게 하나님의 사람을 보내신다 (1절). 그리고, 여로보암에게 요시아라는 아들이 이 모든 것을 회복하실 것임을 예언한다. 그 뿐이 아니다. 하나님의 사람의 예언에 화가 나서 그를 잡으라고 손을 펴며 말했다가 그 손이 말랐는데 (4절), 하나님은 그것조차도 고쳐주신다 (6절). 하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고, 늘 우리를 돌보시고, 회복의 길로, 은혜의 길로 갈 수 있도록 우리를 그 사랑으로 인도하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의 사랑이 계속해서 우리 위에 있다. 하나님으로부터 은혜가 계속 흘러 온다. 내 삶을 봐도 은혜를 입을만한게 아무것도 없다. 그런데도 계속해서 은혜를 입혀 주신다. 하지만 잘못된 것은 계속해서 구별하신다. 이 하나님의 사람은 왕과 함께 있지 않고 돌아간다 (7-10절). 은혜의 하나님일 뿐만 아니라 공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은혜만 강조하는 것도 하나님의 실제의 모습과 다르며, 공의만 강조하는 것도 실제의 하나님의 모습과 다르다. 하나님은 그 두 가지를 모두 가지고 계시고, 실제로 그 두 가지의 상충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셨다. 

결국 예수 안에서 은혜는 계속 된다. 또한 예수 안에서 그 공의는 계속 된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다. 나의 연약함에 몰두한다면, 혹은 나의 잘하고 있는 어떠한 것에 몰두한다면 그것은 모두 잘못된 길로 가는 것이다. 나는 예수와 함께 있기를 구해야 하는 사람이다. 나의 연약함에 대해서는 말하기도 입아프다. 은혜를 주시는 분 앞에서 은혜를 구하는 하루가 되자. 다른 것 말고 예수를 구하는 사람이 되자. 예수를 먹고, 예수를 마시며, 예수와 동행하는 하루가 되자. 예수 안에 모든 은혜와 공의와 사랑이 있고, 예수 안에 우리의 구원도 있다. 비록 내가 여러보암과 같은 사람일지라도 하나님은 나에게 은혜를 계속해서 베푸시는 분이심을 잊지 말고, 오늘도 예수를 더 깊이 만나자. 예수를 더 깊이 알자. 

예수, 예수, 예수 라는 찬양이 떠오른다. 
‘주님을 사랑하는 그 기쁨을, 그 즐거움을 빼앗기지 않게 하소서…’ 
오늘 이 가사가 하루의 삶에서 실제가 되길 원한다. 




728x90
반응형
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18. 12. 5. 11:37
728x90
반응형
왕상 12:25-33 Fear men?? No, fear God!!

듣지 않는 왕 르호보암을 거절하고 왕이 된 여로보암은 두려움에 휩싸였다. 자신들의 백성, 이스라엘 백성 11지파가 예루살렘에 하나님께 예배하러 갔다가 그 마음도 르호보암에게 갈까봐 ‘스스로 (26절)’ 두려워지기 시작했다(25-27절). 그리하여 그는 ‘스스로’ 계획하여 금송아지 두 마리를 만들고, 이들이 ‘너희의 신들’이라고 말한다. 이스라엘 백성이라면 모두 외울 성경구절인 신명기 6:4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시니’ 라는 구절도 잊어버린다. 이스라엘은 항상 유일신이었는데, ‘신들'을 만들어버린다. 그리고 31절에 ‘그가’ 산당들을 짓고, 레위 자손이 아닌 보통 백성으로 제사장을 삼고, 이것도 모자라 33절에 ‘그가 자기 마음대로 정한 달’을 절기로 정하고 단을 쌓았다. 

괴물이 또 다른 괴물을 만들어 냈다. 여호와께 듣지 않는 왕 르호보암이 자기 마음대로 모든 것을 정하여 우상에게 예배하는 여로보암을 만들어냈다. 여로보암의 가장 근원적인 문제는 ‘두려움’이었다. ‘하나님을 경외함 (fear, awe)’이 아니라 '사람을 두려워함 (fear)’이 여로보암이라는 이단자를 만들어냈다. 그의 관심은 어떻게 하나님을 바르게 예배하는 것인지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자신의 나라를 지킬 수 있을지에 대한 것 뿐이었다. (사실 영어단어에서 fear라는 단어는 경외함으로도 염려함으로도 모두 번역 가능하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방법과 절차들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레위기를 통해서 말씀해주셨다. 그 계명을 지켜야 하나님을 예배한다고 규정하려는 것이 아니라 자의로 자신의 마음대로 자신들이 만들어낸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하나님께서 줄로 재어준 구역이었다. 그런데 그 줄로 재어준 구역을 나가기 시작하니 끝도 없는 우상숭배로 빠지게 된다.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으면 우리의 두려움을 예배하든지 (결국 나를 예배하는 것-내 자신이 내 마음대로 결정하고 행동하는 모습), 아니면 그 두려움을 이길 수 있게 해준다고 믿는 다른 신을 예배하든지 둘 중에 하나이다.  

여로보암을 보며 마음이 갑갑하다. 나는 무엇을 예배하고 있는가? 하나님인가? 두려움, 즉 나인가? 복음은 하나님을 예배하라고 하고, 나의 죄성은 나의 두려움과 나를 예배하라고 한다. 하나님이 주신 구역이 때로는 좁다고, 때로는 내 마음에 안 든다고 나가려고 한다. 그 구역의 밖을 오늘 보지 않았는가? 파멸이다. 오늘도 나를 예배하지 않기를 원한다. 오늘도 내 자의로, 내 생각으로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기를 원한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그 분과의 교제와 사귐이 어떤 것인지 누릴 수 있는 하루가 되기 원한다. 그리고 나 자신을 스스로 경계한다. 그는 흥하고, 나는 쇠하는 하루가 되자. 생각에서 먼저 시작되는 이 싸움을 오늘은 조금더 이기기 원한다. 
728x90
반응형
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18. 12. 4. 11:22
728x90
반응형
왕상 12:12-24 한 사람의 들음과 순종으로 말씀이 성취되다

12절은 ‘삼 일 만에’로 시작하고 있다. 르호보암 왕은 노인 원로들에게, 그리고 젊은이들에게 조언을 들은 후 삼일을 장고했다. 그러나 장고 끝에 악수를 두었다. 그의 악수는 하나님께 묻지 않았기 때문이었고, 자신의 통치 철학이 없었기 때문이었고, 말씀이 이뤄지기 위함이었다. 르호보암의 악수로 시작된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되는 일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으로 성취된다. 22절에 하나님의 사람 스미야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고, 24절에 그들이 여호와의 말씀을 듣고 라고 언급하는 것을 보니 나머지 백성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게 되었다. 

말씀을 이루는 것은 결국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것으로 성취된다. 어느 누구는 악수를 두지만, 어느 누구는 말씀을 듣고 순종하기 때문에 이 말씀은 성취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계속해서 어떠한 기적적인 방법만으로 하나님의 일을 행하시기 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사람들을 통해서 그 분의 말씀을 이루어 가신다. 22절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사람 스마야’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지 않았다면 엄청난 비극의 전쟁이 일어났을 것이다. 

많은 인물들이 등장하지만 가장 중요한 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한 그 한 사람이었다. 그로 인해 많은 생명이 구해졌고,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졌다. 오늘 듣고 있는가? 오늘 순종하고 있는가? 이것이 삼 일간 장고를 하느냐 혹은 조언을 듣느냐 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 듣는 것은 쉽지 않다. 듣는 자리에 나가는 것도 쉽지 않다. 하지만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안다면 그 길을 걸어야 한다. 매일 묵상을 해도 듣는 것은 어렵다. 내 생각이 너무 많다. 장고만 하고 있다. 오늘은 좀 더 간단명료해지기 원한다. 스마야와 같이 듣고 순종하는 하루가 되기 원한다. 
728x90
반응형
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18. 12. 3. 12:18
728x90
반응형
왕상 12:1-11 조언이 아니라 응답

솔로몬은 죽었고, 이제 그 다음 세대인 르호보암이 왕이 되었다. 그의 아버지 솔로몬은 무겁게 세금을 매기고, 부역을 시켜 성전과 그의 궁을 완성하였기에 백성들은 그 아들 르호보암에게 가서 멍에를 가볍게 해달라고 청한다 (4절). 르호보암 그에게는 묻는 지혜가 있었다. 그는 노인들과, 함께 자라난 소년들에게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할지를 묻는다. 노인들은 그들에게 좋은 말로 대답하여 주길 조언했고 (7절), 소년들은 더 멍에를 무겁게 하길 조언했다 (11절). 노인들의 지혜를 버리고, 소년들의 욕망에서 비롯된 아첨의 말을 따랐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의 아버지와 같이 자신의 지혜를 따라간다.

르호보암은 노인과 소년에게 묻는 지혜가 있었지만 하나님께 묻는 지혜가 없었다. 상충되는 두 가지의 조언이 나왔음에도 그는 묻지 않는다. 아버지와 같이 그가 가지고 있는 지식으로 결정을 내린다. 사람에게 묻고 조언을 구하는 것은 보통은 그저 내가 가고자 하는 길에 동의를 얻고자 함이다. 내가 스스로 용기가 없어 결정할 수 없음에 조언을 통해서 조금 더 용기를 가지려고 하는 행동이다. 하지만 참된 조언은, 참된 결정에 도움이 되는 모든 것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옴을 우리는 결코 잊어서는 안된다. 

르호보암은 할아버지 다윗의 길을 걷지 않았고, 아버지 솔로몬의 길을 시작부터 걷게 된다. 전설처럼 전해져 내려오는 할아버지 다윗의 길을 걷지 못했다. 사람들의 다양한 조언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사람의 조언이 아니라 하나님의 응답이다. 조언이 아니라 응답을 받아야 내가 옳은 길로, 정확한 길로, 틀리더라도 돌아가더라도 인도하시는 길로 갈 수 있다. 나는 조언을 사랑하는가? 아니면 응답을 사랑하는가?

묻는 은혜.. 요즈음 가장 많이 묵상하는 단어이지만, 가장 어려운 은혜 중에 하나이다. 물어야 한다. 물어야 살고, 물어야 듣고, 물어야 순종한다. 오늘도 묻는 하루가 되기 원한다. 조언이 아니라 응답을 구하는 하루가 되기 원한다.
728x90
반응형
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18. 12. 1. 10:46
728x90
반응형
왕상 11:14-25 내가 바라봐야 할 대상은 대적이 아니라 하나님이다. 

솔로몬에게 어제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어떤 일이 일어날지를 먼저 이야기 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솔로몬은 어떠한 선택도 하지 않았다. 이방여자들을 보낸다던가, 산당을 허문다던가 하지 않았다. 계속해서 죄를 쌓아가고 있다. 회개하고 돌이켜야 할 순간에 그러지 못했다. 하나님이 용서하시는 분임을 몰랐을리 없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기보다는 죄를 계속해서 쌓아가는 선택을 했다. 

그 결과는 오늘 본문에서 대적들이 일어난다. “여호와께서” 에돔 사람 하닷을 일으켜 솔로몬의 대적이 되게 하셨고 (14절), 23절에는 ‘하나님이’ 또 엘리아다의 아들 르손을 일으켜 솔로몬의 대적자가 되게 하시니 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역사를 주관하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선포하고 있다. 하나님이 열방에 하나님을 드러내시기 위해 친히 선택한 이스라엘이었지만, 그들의 회개하지 않는 죄는 하나님으로 하여금 그들에게 고난과 시련을 주는 대적들을 일으키게 한 것이다. 

평안과 평화는 우리가 가진 힘이 아니라, 우리가 가진 지혜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다. 솔로몬은 여전히 강하고, 여전히 부유하였지만 그의 평화는 그리 오래갈 수 없는 평화였다. 왜냐하면 이미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졌기 때문이다. 그 관계의 깨어짐은 단순한 하나님과의 평화와 평안만을 깨뜨리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어려움을 가져오게 된다. 사방에서 대적들이 일어나고, 그의 나라는 이제 위태롭게 된다. 

결국 여호와께 돌아가야만 한다. 회개하고 돌이켜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먼저 회복되어야 한다. 그런데 매우 많은 순간 하나님과의 깨뜨려진 관계가 보이기 보다는 대적들이 먼저 보인다. 대적들과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시간과 에너지를 쓴다. 결국 대적들과의 관계도 해결되지 않고, 하나님은 뒷전으로 밀리기 일쑤이다. 솔로몬은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아버지가 걸어갔던 길을 걸었어야만 했다. 

사역이든, 일이든, 가정이든, 관계이든 어느 곳에나 대적들은 있다. 그 대적들은 늘 우리를 힘들게 한다. 하지만 대적들을 바라보느라 하나님을 놓치는 우를 범하지 않기를 원한다. 먼저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고, 그 용서하시고 사랑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나를 돌이키자. 대적들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이다. 우리의 시선을 하나님으로부터 놓치게 되면 대적들만 보이게 되고, 그 이후부터는 대적들로 인해 그 시선을 다시 하나님으로 돌이키는게 쉽지 않아진다. 내 시선을 하나님 앞으로 고정시키고, 이 모든 일들을 인도하고 계시는 하나님만 신뢰하고 의지하자. 

내가 바라봐야 할 대상은 대적이 아니라 하나님이다. 
728x90
반응형
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18. 11. 30. 11:19
728x90
반응형
왕상 11:1-13 다윗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실하심

다윗은 정말 위대한 믿음의 사람이었다. 그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과 동행한 것은 이후 모든 왕들에게 기준이 된다. 다윗의 아들인 솔로몬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솔로몬이 여인들로 인해 여호와를 떠나게 되었다. 열왕기상의 저자는 이것은 4절에서 ‘왕의 마음이 그의 아버지 다윗의 마음과 같지 아니하여 그의 하나님 여호와 앞에 온전하지 못하였으니’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12절, 13절에서는 다윗으로 인해 나라를 솔로몬에게서 빼앗아서 신하에게 주는 일을 솔로몬의 세대에는 하지 않으실 것이라고 말하고, 그리고 다 빼앗지 아니하고 다윗과 택한 한 지파에게 일부를 주겠다고 말씀하신다. 다윗이 무엇이길래 하나님이 이토록 그를 사랑하시는가? 솔로몬의 시대임에도 그의 신앙적인 영향력은 여전하다. 하지만 솔로몬은 그러한 아버지의 뒤를 따라가지 않고, 여인들의 뒤를 따라갔다. 

그런데 사실 이렇게 되어야 하는 이유는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완전했기 때문이라기 보다는 오직 하나님의 신실하심 때문이다. 다윗의 씨를 통해 약속된 메시아를 오게 하시겠다고 하셨던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하기 위해서이다. 우리의 삶에 솔로몬처럼 마음을 빼앗겨 하나님을 멀리하게 혹은 드러나지 않게 교묘한 방법으로 멀리하도록 하는 것들이 많이 있다. 나에게는 그러한 것들이 때로는 사역이며, 때로는 인터넷이며, 때로는 운동이며, 때로는 아이들일때도 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나의 이러한 연약함들을 넘어 일하신다. 하나님이 약속하셨고, 하나님의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일하시며, 하나님께서 하나님 자신을 드러내신다. 

결국 모든 인생은 하나님의 이야기이다. 내가 의지해야 할 것은 나의 지혜도, 나의 재물도, 나의 능력도, 은사도 아니다. 하나님이 하시고 계시기 때문에 오직 하나님만 의지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솔로몬은 그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신의 연약함에서 온 여인들과 그들의 신을 의지하게 된다. 내 힘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으면 우리는 하나님을 찾기 보다는 내 힘을 의지하려고 한다. 나를 의지하려는 마음은 우리를 결국 다윗의 길이 아니라 솔로몬의 길로 이끌어가게 된다.

하나님이 주신 삶을 살아가면서 나의 가진 어떠한 것들을 의지하는 자가 되지 않기를 원한다. 모든 일에서 하나님만 의지하기 원한다. 내 연약함을 다시 한번 돌아본다. 교만하지만 또 얼마나 한없이 연약한게 나인가? 다시한번 다윗의 길을 걸어가길 다짐해본다. 나의 절망을 경험하며 하나님만 더 의지하기 원한다. 주님 나를 도와주소서. 
728x90
반응형
Posted by 신애친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