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Thinking)/Meditation2019. 1. 16. 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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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9:1-15 상황과 환경이 다 열린다고 해도 말씀을 놓치면 안된다. 

모든 왕들이 이 일을 듣고 모여서 일심으로 이스라엘 백성들과 맞서서 싸우려고 하던 그 때에 (1-2절), 모든 가나안 백성들이 의기투합하여 이제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다는 것을 알고 고양이 앞에 생쥐와 같이 물려고 일어난 때에 기브온 백성들이 찾아왔다. 

충분히 멀리서 온 듯한 복장, 음식, 그리고 모든 가나안 사람들의 적대적인 분위기 속에서 조약을 맺자는 매우 좋은 분위기… 그냥 조약도 아니고 종이 되겠다고 하는 이스라엘에게 유리한 조약, 그리고 애굽을 나오는 일 때부터 가나안에서 하나님께서 하신 일들에 대해서 들었다고 하면서 살살 꼬득이고 있다. 

나였다면? 이정도 했는데 안넘어 갔을 수 있을까? 사실 질문이 무의미하다. 넘어갔을 것이다. 

순적한 상황, 모든게 문제 없이 다 열리는 것 같은 상황에서 하나님의 명령을 기억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게 넘겨 네게 치게 하시리니 그 때에 너는 그들을 진멸할 것이라 그들과 어떤 언약도 하지 말 것이요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도 말 것이며 신명기 7:2”

상황보다도 항상 더 앞서야 할 것은 하나님의 말씀인데 말씀을 붙들고 있지 않으면 순간의 상황이 이끄는데로 가게 되어 있다.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명하신 것처럼 ‘주야로 묵상하지 않으면’ 달콤한 꾀에 넘어갈 수 밖에 없다. 결국 하나님과의 친밀함, 말씀과의 동행함이 없으면 우리는 이러한 유혹에서 이길 수 없다. 

그런데 더 신기한 것은 속아서 맺은 언약도 하나님이 무시하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불순종, 묻지 않음으로 시작된 조약이었지만 하나님은 그 조약을 지키셔서 기브온 족속들을 살려 주신다. 하나님은 이렇게 공평하고 정의로우신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만의 하나님이 분명히 아니시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의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늘 여호수아와 같이 실수한다. 말씀을 붙들고 있는 듯 하지만 어느새 환경과 상황에 속고 넘어진다. 더욱 더 말씀을 붙들자. 내 생각과 내 판단과 내 마음을 쫓아 가면 안된다는 것을 항상 명심하자. 주야로 묵상하자. 그래야 산다. 시편말씀처럼 우리가 비록 넘어지더라도 아주 엎드려지지 않을 것이다. 여호수아에게 주신 말씀처럼 말씀만을 붙드는 사람, 그 사람이 내가 되기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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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19. 1. 15. 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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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8:30-35 소유가 아닌 말씀을 기준으로 순종하는 삶

오늘 여호수아가 아이성의 승리 이후에 제단을 쌓아 예배를 드리고 (30절), 그 이후에 율법책을 다른 돌판에 기록하고 (31절), 그 말씀을 낭독 했다 (34절).  어쩌면 매우 상징적인 행위로 볼 수 있다. 하나님께 먼저 감사의 예배를 드리고, 그 이후에 한 것은 이제 우리가 이 땅에서 무엇을 붙들고 살아갈지에 대해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마음을 결정하는 자리에 섰다. 그리고 그들의 기준은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여호수아서 1장에서 하나님이 형통의 방법을 여호수아에게 이미 말씀해 주셨다. 

1:8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

여호수아가 오늘 이 자리에서 율법을 돌판에 기록하고, 그 모든 말씀을 낭독한 것은 아마도 자신 뿐만 아니라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우리가 형통할 수 있는 길이 이 것 뿐임을 알려주는 행위라고 여겨진다. 이스라엘 백성의 절반을 축복과 저주의 상징인 그리심 산과 에발 산 앞에 세워놓고 낭독한 것도 마찬가지이다. 이 율법에 순종하면 축복받을 것이고, 이 율법에 불순종하면 저주 받을 것이다. 이 행위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달콤한 축복만을 약속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 길은 길게 보면 반드시 우리에게 복을 주시는 길이며, 그 길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복을 누린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순종을 요구하신다. 어제 밤 늦게까지 아내와 비자여행과 2월 NIBCM 선교사 컨퍼런스 참석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사실 5명이 움직이려면 항상 재정이 많이 든다. 비자여행은 반드시 가야 한다. 그럼에도 어제 깨달은 것은 내가 이 일을 결정할 때 지금 가용 재정이 얼마나 있는가를 의지하면서 결정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 묻거나, 기도 하는 것 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우리에게 쓸 수 있는 재정이 얼마가 있느냐이고, 그것에 따라 결정하게 된다. 이러한 방식은 절대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방식이 아니다. 

내게 얼마가 있느냐, 함께 갈 수 있는 재정이 있느냐를 보고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주시는 마음에 따라 결정해야 하는 것이다. 결정의 순서가 틀렸다.

말씀에 순종하자는 큐티를 하면서도 내가 가진 것을 붙들고 있는 나를 다시 보게 되는 것은 참으로 부끄럽고 민망한 일이다. 하지만 다시 마음을 붙든다. 나를 흔드는 것은 상황이지만, 말씀을 기준으로 결정하기 원한다. 내 귀에 들려지는 말씀, 그 말씀이 내 삶의 기준이 되기 원하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하루가, 그리고 이번 결정이 되기 원한다. 그리심 산과 에발 산 앞에 선 이스라엘 백성들 처럼 진지하게 듣고, 진지하게 순종하기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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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19. 1. 14. 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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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8:18-29 순종을 통해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드러내기

이스라엘 백성들의 여호와 앞의 불순종, 아간의 죄악을 제거한 후에 이제 아이성은 이제 여호수아에게 넘겨진다 (18절). 이번에는 일말의 불순종도 없이 모두 순종하였다. 그런데 27절을 보면 

“오직 그 성읍의 가축과 노략한 것은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명령하신 대로 이스라엘이 탈취하였더라” 
라고 말씀하고 있다. 이 약속은 8장 2절에 먼저 등장하는데 

“너는 여리고와 그 왕에게 행한 것  같이 아이와 그 왕에게 행하되 오직 거기서 탈취한 물건과 가축은 스스로 가지라” 라고 말씀하셨다.

아간을 비롯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욕심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아이성의 물건을 가지도록 허락하셨다고 생각이 되지는 않는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여리고에서는 먼저 그들의 순종을 보시길 원했고, 아이성의 것들을 그들이 가지도록 허락하시려고 준비하셨다고 보여진다. 다만 급했던, 하나님이 주시려는 좋은 것을 보지 못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조급함이 하나님이 준비하신 좋은 것을 다 누리지 못하도록 만든 것이다.

이해되지 않아도 먼저 순종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이 가장 최고, 최우선적인 분이심을 삶을 통해 증명하는 것이다. 그 분만이 내 삶의 주인이시고, 인도자시라는 고백이다. 우리 눈에 좋아보이고, 아름다워 보이고, 그럴듯해 보이는 것을 먼저 취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에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그 분이 하나님이심을 드러내는 것이 순종인 것이다. 하나님은 늘 우리를 위해 좋은 계획들을 준비하고 계신다. 물론 그 좋다는 것이 꼭 내 마음에 드는, 내가 좋아하는 방식으로의 좋은 것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하지만 우리 삶에 다 이해하지 못해도 순종하는 마음이 있다면 그 분이 주시는 아름다운 것들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교회가 재산으로 인해 분쟁에 빠져 있는 B 교회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내가 개척한 것도 아니고 내가 사역하지도 않지만 우리 선교부 소속의 교회다. 하지만 너무 마음이 답답하고 속상하다. 하나님의 교회가 재산문제로 인해 현지인들끼리 두 그룹으로 나눠져서 대립중인 것을 보는 것이 마음이 쉽지 않다. 내가 이 문제에 과연 개입해서 해결할 수 있을지도 물음표이다. 하지만 주님께서 이 문제 안으로 나를 이끄셨으니 순종한다. 다 이해하지 못해도 순종함으로 마음을 나누고, 복음을 이야기 하기 원한다. 그래서 그 분의 아름다움을 이야기 하기 원한다. 

오늘 옥한흠 목사님 아들, 옥성호 교수님의 페북 글을 보면서 많이 놀랬다. 옥한흠 목사님의 설교와 자신의 설교의 차이점은 자신은 성경본문을 앞에 두고 ‘여기서 끄집어낼 교훈이 무엇인가?’를 고민했지만 그의 아버지 옥한흠 목사님은 ‘이 본문이 내 삶과 얼마나 일치하는가?’를 평생 고민했다고 했다. 

오늘 본문을 통해 보면서 나는 나를 위한 교훈을 끄집어 내었다. 순종… 기다림… 순종을 통해 내 삶의 가장 중요한 분이 하나님이심을 드러내는 것… 그런데 이러한 질문도 던지고 싶다. 이러한 것들을 포함한 이 본문이 내 삶과 얼마나 일치하고 있는가? 설교하기가 말씀 보기가 점점 두려워진다. 하지만 한 편으로는 감사하다. 이제부터라도 더 치열하게 본문과 내 삶이 일치하게 하기 위한 삶의 여정이 시작될 것이기에… 텍스트가 아닌 삶으로 전하는 선교사가 되기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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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Thinking)/Meditation2019. 1. 12. 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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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8:1-17 나의 시선이 머무는 곳, 그 대상이 곧 나를 규정한다.

아간이 취한 것은 시날 산의 아름다운 외투 한벌, 은 이백 세겔 (약 2.3kg), 금 오십 세겔 (약 570g) 이었다. 아마도 첫 번째 여리고 성 전투를 보며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에 대해서 미리 기대했던 것이 틀림이 없다. 저렇게 난공불략의 여리고 성도 이렇게 쉽게(?) 무너뜨렸는데 이제 우리가 이 땅을 차지하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이제 가나안 사람들을 몰아내고 나면 그 땅에서 정착해서 부를 쌓고, 멋진 옷을 입고 살고 싶은 욕구를 그는 미리 취했다. 아간이 취한 것들은 당장 지금 전쟁중에 쓸 수 있는 물건들이 아니었다. 그의 마음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시간을 앞서 나갔다. 가나안 정착민들이 가지고 있었던 화려함에 마음을 빼았겼고, 그래서 오늘 당장 직면해야 할 전쟁에서 하나님에 대한 시선을 놓치고 말았다. 

그들의 전쟁은 여호와 하나님만 따라가며, 그 분께 시선을 고정해야 승리하는 전쟁이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리고 성을 돌 때, 언약궤가 앞서 가고, 언약궤만 보며 따라갔다. 하나님의 임재로 대표되는 언약궤로  온전하게 시선을 고정해야 열에서 이탈하지 않을 수 있고, 여리고를 제대로 돌 수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실제로 그렇게 해서 승리 했다. 하지만 승리로 인한 자만심은 현재에 대한 감각을 잊어버리고, 또 하나님에 대한 그러한 시선을 놓치게 되고, 그 결국은 하나님 대신 가나안 백성들을 쳐다보게 되니 탐심이 생긴 것이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지금 우리의 시선이 어디를 보고 있는지이다. 하나님인가? 세상으로 대표되는 가나안인가? 혹은 애굽인가? 
죄를 이길 수 있는 방법은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다. 눈이 부신 하나님의 아름다우심을 바라보며 이 땅의 덜 아름다운 것들에 대해 우리의 시선을 놓는 것이다. 
내가 아간과 같지 않다고 말할 수 있을까? 

하나님에 대한 시선을 놓치지 않는 자가 되기 원한다. 이 땅의 화려함에 나의 마음을 빼앗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름다우심을 보며 오늘을 살아가는 그런 나그네의 삶을 살아가기 원한다. 소유가 아니라 존재의 인생이 되기 원한다. 가진 것으로 나의 존재를 규정하는 자가 되지 않고, 나의 존재로 내가 바라보는 나의 시선이 머문 그 대상으로 내가 규정되기 원한다. 

시 27:4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
One thing have I asked of the Lord, that will I seek after: that I may dwell in the house of the Lord all the days of my life, to gaze upon the beauty of the Lord and to enquire in his temp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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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19. 1. 11. 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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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7:1-15 홀로 산으로 떠나야 한다. 

여리고성의 대 승리 뒤에 교만은 찾아왔다. 여호수아는 더이상 두려워하지 않았고, 너무 강하고 담대하여져서 하나님께 묻지 않고 병력을 아이성으로 보내게 된다 (2-4절). 그리고 이스라엘 자손들은 승리에 도취되어 하나님께 온전히 받쳐진 물건들을 취하였다 (1절). 공동체가 한 마음으로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승리를 얻었었지만, 이 이스라엘 공동체는 개개인의 교만과 탐심으로 무너지게 된다.  

승리 뒤에 찾아오는 (스스로에게서 나오든, 타인에게서 오든) 인정감은 우리를 흔드는 가장 큰 유혹인 것 같다. 여호수아의 태도를 보면 하나님이 도우셔서 승리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자신들의 힘으로 아이성을 점령하려는 태도를 보인다. 스스로를 인정하고, 백성들로부터도 인정받은 그는 이 일이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린다. 그 결과는 대 패배였다.

큰 성공 뒤에 언제나 더 스스로를 살피고 교만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는 것이다. 내가 한 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 일임을 고백하고 그 분의 은혜를 더 구하는 것이 우리의 할 일이다. 

예수님은 오병이어 사건 이후에 사람들이 자신을 왕으로 삼으려고 함을 보셨다. 오병이어 사건.. 정말 엄청난 기적과 역사 아닌가? 모든 사람들이 이 분이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메시아)임을 고백하고 있다. 하지만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는가?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이 와서 자기를 억지로 붙들어 임금으로 삼으려는 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 가시니라” 요 6:15

홀로 산으로, 아무도 없는 곳으로, 하나님의 인정 밖에는 없는, 아무도 인정해줄 사람이 없는 곳으로 떠나 가셨다. 사람들과 함께 있는 자리, 승리의 흔적이 남아 있는 자리에서 머물면서 자신을 지키기란 어려운 일이다. 예수님은 그렇기에 아무도 없는, 홀로 하나님과 교제하실 수 있는 산으로 가신 것이다. 

어제 밤에 아내와 몇 가지 일들을 나누면서 서로 감사의 고백들을 나누었다. 우리 태국의 형제들과의 있었던 지난 몇 가지 일들로 인해 감사했고, 또한 요엘이가 아주 조금이지만 덜 짜증을 내는 모습을 보며 감사하고, 서로를 격려하는 시간을 가졌다. 하지만 오늘 아침에 나에게 주시는 말씀은 이 작은 승리, 작은 은혜에 도취되지 말고 예수님과 같이 혼자 더 깊은 하나님과의 교제의 자리로 나가라는 것이다.  

사람의 시선, 사람들의 인정에서 자유롭지만, 오직 하나님의 시선과 하나님의 인정이 있는 그 곳, 그 산에서 하나님과의 시간을 통해 교만하지 않고, 욕심내지 않고 다시 한번 하나님께서 주실 은혜를 구하는 시간을 가지고 싶다. 나는 인정의 욕구가 유독 강한 사람이다.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인정을 구하고 싶다. 

요즈음 늘 고백하는 말이지만 느리더라도 바른 길로, 빨리 가지 못해도 함께 가는 삶이 되기 원한다. 
오늘은 좀 더 예수님이 홀로 가신 그 산, 하나님이 계셨던 그 산에 더 거하는 하루가 되길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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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19. 1. 10. 1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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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6:8-27 공동체라 함께 무너뜨리는 난공불략의 성

여리고가 무너졌다. 어려서부터 너무나도 많이 들은 이야기이다. 여리고는 소리로 무너졌다. 하지만 이상한 점은 하나님께서 칠일 째 소리를 지르는 그 시점을 제외하고는 그들에게 아무런 소리도 내지 못하게 하신 것이다. 그러다가 한 번에 소리를 질러 성벽을 무너뜨리셨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한 두 사람도 아니었고, 아주 많은, 다양한 사람들이 있었을텐데 그들은 어떻게 아무도 소리를 내지 않았을 수 있었을까? 어떻게 모든 사람들이 그저 그 말씀에 순종할 수 있었을까? 왜 어디든 항상 그런 사람이 있지 않은가? 약간 삐딱한… (내가 그럴수도 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떠한 누구도 여호수아의 말에 순종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손을 잡고 강강수월래를 하는 중이다. 그들은 한 하나님을 경험했고, 한 하나님을 만났고, 한 공동체가 된 것이다. 

그들이 참아냈던 그 시간이… 성을 무너뜨렸고, 그들은 이제 여리고 안으로 진격한다. 난공불략의 성으로 보였고, 정말로 이스라엘이 무너뜨릴 수 없을 것 같던 성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한 마음의 순종으로 무너졌다. 결국은 공동체가 함께 일어설 때 난공불략의 성도 무너뜨릴 수 있다. 여리고가 무너진 것은 여호수아 때문도 아니고 온 이스라엘 공동체의 순종을 통해 일어났다. 

손 잡고 함께 걸어가는 것… 이것이 동역자이고, 이것이 동역이고, 이 것이 한 공동체, 한 몸이다. 굳이 태국선교라는 거창한 주제를 이야기 하지 않아도, 함께 손 붙들고 가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들이 너무나도 많다. 머리 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모두가 함께 협력하고 각 기능을 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역사를 볼 수 있는 것이다. 

롬 12:5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함께 공동체를 이뤄갈 수 있는 영광교회 형제, 자매들이 있어서 너무 감사하다. 
우리 가정과 태국의 사역을 위해서 함께 묵상을 나누고, 계속해서 기도를 해주시고, 교제해주시는 분들이 계서서 너무 감사하다. 함께 손잡고 걸어갈 때, 난공불략, 여리고 성 처럼 보이는 태국선교와 주님의 나라의 확장이 이뤄지길 원한다. 

우리 가정에게 그렇게 공동체가 되어 주셔서 손 잡아 주신 것 처럼 우리도 태국 형제, 자매들에게 함께 손 잡고 걸어갈 수 있기를 원한다. 빨리 가지 못해도, 함께 가기 원한다. 

*저희 가정과 공동체가 되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희도 여러분들 가정에 공동체가 되고 싶습니다. 기도제목이 있으시면 나눠주세요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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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만에 공주 드레스 입고

*마라의 모든 옷은 수애이모가 보내주는 것이다. 수애이모가 옷을 보내줄 마다 너무 행복해 한다. 덕분에 취향이 하연이 언니와 수애이모와 같아져버렸다. 아내는 절대 마라를 핑크공주로 키우려고 하였으나마라는 결국 핑크공주가 되어 버렸다. 수애이모 감사해요

#아빠의덕질 #마라 #핑크공주 #막내딸 

#수애이모 #하연이 #감사해요 

#딸스타그램 #이젠제법포즈도취해줌

#그런데자연스러운게더이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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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5:13-6:7 공동체가 함께 강강수월래 하는 기쁨을 맛보기 원합니다.

1절은 이스라엘 자손들로 말미암아 여리고는 굳게 닫혔고 출입하는 자가 없더라 로 시작한다. 그럴 수 밖에 없지 않겠는가? 마음도 녹고 정신도 잃었는데 제정신이라면 문 열어놓고 오라고 하겠는가? 그런데 그 단단한 성벽 앞에 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이야기 하신 방법은 정말로 당황스럽기 그지 없다. 잘아는 것처럼 여호수아 혼자서도 아니고 모든 백성들이 여리고 성 주위로 강강수월래 하라는 것이었다.

  1. 너희 모든 군사는 그 성을 둘러 성 주위를 매일 한 번씩 돌되 엿새 동안을 그리하라

하나님의 기적으로 요단강을 건넜고, 싸움을 시작하기 전에 할례를 통해 새롭게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었고, 조금 전에는 여호와의 군대 장관도 만났다. 그래서 순종할 수 있게 되었다. 하나님과의 지속적인 관계가 당황스러운 말씀에도 순종할 수 있는 힘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각 사람과의 하나님과의 관계는 그들의 모든 공동체가 함께 이 당황스러운 말씀에 순종할 수 있게 하였다. 모두가 갈라진 요단을 건너며 하나님을 만나지 않았는가? 공동체로 하여금 하나님을 경험하게 하였기 때문에 그들은 한번에 순종할 수 있었다. 내가 속한 공동체가 하나님을 만나야 함께 이 하나님의 (당황스러운 말씀에 순종하는) 기적에 함께 참여할 수 있는 것이다.

어떻게 공동체가 하나님을 함께 만나게 할 수 있을까? 우리 가족 공동체에게, 그리고 우리 영광교회 공동체에게.. 사실 내가 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 올해부터 영광교회에서 함께 말씀을 전하게 되었다. 정말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정말로 기대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준비해서 말씀 속에서 정말 하나님이 우리 형제, 자매들을 만나주시기를 원한다. 한 주에 두 번 드리는 가정예배에도 대충 준비하지 말고, 아이들의 눈높이와 수준에 맞게 준비해서 그들에게 말씀을 전해야겠다. 

공동체가 함께 하나님을 만나는 것… 
정말로 그렇게 되고 싶다. 설령 우리에게 하나님의 당황스러운 말씀이 임하더라도 함께 강강수월래를 하며 성을 돌 수 있는 그런 공동체가 되기를 원한다. 결국은 하나님과의 관계, 형제들과의 관계… 이 두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삶 (마 22:40)
그런 오늘을 살아내고 싶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마 22:3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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