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Thinking)/Meditation2018. 12. 21. 0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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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상 18:30-46 물이 아니라 불이 필요합니다. 

엘리야는 진짜를 가지고 있다는 자신감에 가득 싸여 있다. 그가 가진 마음은 교만함이 아니라 진짜를 소유하는데서 온 평안함이요, 충만함이었다. 진짜가 무엇인지를 아는 자만 가질 수 있는 자부심이었다. 두려울 것도 없고 염려할 것도 없었다. 왜냐면 그가 알고 있는 하나님만이 진짜시니까..

가뭄이 창궐한 시대에 물 네 통을 제물 위에 부으라고 했다 (33절). 그들의 육체가 얼마나 간절했던 물인가? 영의 갈급함을 모르는 그들을 위해 육의 갈급함을 채울 수 있는 물을 허비했다. 그것을 세 번이나 반복했다. 진짜가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상황으로 몰아간다. 하지만 그들이 진정으로 필요했던 것은 불이 아니라 물이었다. 그런데 진짜 불이 임하자 물은 따라오게 된다 (45절). 

나는 진짜 불이신 하나님이 필요한데도 얼마나 많은 순간 물만 구하고 있는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리석다고 본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이 나의 모습이다. 내 영혼의 필요와 갈급함보다도 더 많이 더 자주 육신의 필요와 갈급함을 구하며 살아가고 있다. 하나님만이 우리의 모든 필요를 채우실 수 있는데도 얼마나 자주 그 분으로부터 오는 물만을 구하고 있는지 부끄럽지 않을 수 없다. 

진짜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데도 여전히 불이 아니라 물만 구하고 있는 내 모습이 오버랩되어 마음이 불편해진다. 진짜를 가진 자의 자부심도 평안함도 없이 가짜를 가진 자와 같이 조마조마해 하며 불안해 하고 있음을 발견한다. 말씀은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하셨고, 우리의 짐을 주님께 맡기라 하셨다. 진짜 불이신 하나님을 만나며 삶의 두려움을 내려놓기를 원한다. 

요엘이의 상황으로 인해 두려운 마음이 생긴다. 진짜 하나님을 가졌음에도 여전히 가짜를 소유한 자들과 같이 두려워하고 있다. 조급한 마음 때문이다. 내가 진짜로 필요한 것은 물이 아니라 불이다. 요엘이에게 최선을 다하지만 바라보아야 할 것은 물이 아니라 불이신 하나님이시다. 진짜를 가진 자로써 오늘을 살아가자. 진짜를 가진 자로써 두려워하지 말자. 물이 아니라 불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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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Thinking)/Meditation2018. 12. 19. 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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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상 18:16-29 숫자의 문제가 아니라 진리의 문제

성경 본문 중 가장 재미있는 본문 중 한 부분으로 생각된다. 응답할 수 없는 바알이라는 가짜 신 앞에서 하루종일 펼쳐지는 퍼포먼스를 생각하면 실소아니 썩소가 아니 나올 수 없다. 바알은 응답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응답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이 가짜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진짜가 아닌 가짜 앞에서 하는 행동들은 모두 우리를 웃기는 꼴로 만들게 된다. 아무 응답이 없는 것이 정상이다. 몸을 상하게 하고, 피가 흐르게 해도 아무런 응답이 없는게 정상이다. 상식이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이 21절에서 나오는 엘리야의 도발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지니라’에 그들은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않는다.

아마도 일 대 사백오십이란 숫자의 압박 때문이었을까? 다수결이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 많은 사람이 따라간다고 해서 그 길이 진리라는 보장은 없다. 많은 사람들이 따라가는 길이 아니라 진리를 따라가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전히 머뭇거린다. 여전히 누가 진짜 하나님인지 테스트 하고 그 이후에나 믿겠다는(사실 믿지 않을 가능성이 더 많지만..) 태도로 보인다. 나는 무엇을 따라가고 있는가? 진리인가? 다수인가? 

내가 가장 자주 흔들리는 것은 이 다수들이 보여주는 결과 때문이다. '다들 이렇게 하는데 뭐…’ 무슨 말인가? 다들 이렇게 하니까 나도 이렇게 하는 것이 괜찮을 것이라고 합리화 시키는 것이다. 여전히 진리를 쫓기 보다는 다수결, 혹은 다자가 쫓아가는 길이 옳아 보이고, 괜찮아 보이는 타협의 접점을 찾고 있는 것이 나의 신앙이다. 이러한 나의 모습들이 바알 앞에서 하루종일 응답을 구하며 춤추고 노래하고 그들의 신을 부르는 바알의 선지자들의 모습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머뭇머뭇하면 안된다. 하나님을 쫓아야 한다. 사람들의 평판이나 다른 사람들이 쫓고 있는 가치들이 아니라 하나님만 쫓아야 한다. 일 대 사백오십이 아니라 더 많은 사람들이 주를 부인한다고 해도 나는 주님을 쫓아야 하는 것이다. 숫자의 문제가 아니다. 진리의 문제이다. 가짜 앞에서 쇼를 하며 살 것인가? 진짜 앞에서 예배를 드리며 살 것인가? 

태국 땅에는 이 가짜 앞에서 쇼를 하는 사람들이 무려 99.5%가 넘는다. 1%가 기독교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인구 센서스 상에는 0.5% 정도이고 이 안에는 카톨릭과 기독교 이단들도 포함이다. 이 곳에서 내가 진짜 하나님을 만나고 진짜 하나님을 그들에게 보여줘서 거의 1:100의 싸움을 해야 하는 곳이다. 1:100이면 어떤가? 진짜 하나님이 여기에 계시는데, 내가 하는 것은 쇼가 아니라 예배인데 무엇인 두려운가? 지금 주태한인선교사 수련회 기간이다. 이 99.5%의 영혼들을 위해 함께 땀흘리고 수고하시는 분들과 함께 모임을 하고 있다. 더 깊은 교제와 동역을 통해서 진짜 하나님을 태국 땅에 어떻게 전할지를 더 고민하고 묵상하는 시간들이 되기를 원한다. 

그리고 아이들에게도 내가 진짜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 복음에 합당한 훈육을 하기 원한다. 아이들이 예민해지면 예민해질수록 나도 덩달아 예민해진다. 복음적인 가치관 때문이 아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피혜를 주면 안된다는 마음, 그리고 그 안에는 우리 아이들이 이 정도라는 과시하고 싶은 마음의 동기가 움직이고 있기 때문에 더 아이들을 통제하려고 하고 더 예민하게 행동한다. 그런데 아빠의 가짜의 마음은 아이들을 더 힘들게 더 멍들게 한다. 계속해서 머뭇머뭇 하지 말고, 진짜 하나님 앞으로만, 그 분이 우리에게 주신 유일한 길은 복음으로만 내 삶이 더욱 더 변화되기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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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Thinking)/Meditation2018. 12. 17. 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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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앙라이로 결혼식을 금요일, 토요일에 다녀왔습니다. 너무 좋은 시간이었고, 운전을 왕복 약 20시간 정도하며 다녀왔습니다. 말씀묵상을 여행의 일정 속에서 쉬었습니다. 이게 한 번 쉬니까 계속 쉬게 되는 관성의 법칙으로 어제도 역시 쉬었습니다. 오늘 다시금 마음을 다잡고 앉았습니다. 좋은 습관을 세우는건 어렵지만 그것을 허무는 것은 매우 쉬운 일임을 깨닫습니다. 여러분과 함께 말씀을 나눌 수 있음에 참 감사합니다. 샬롬 


왕상 17:8-24 절망은 내가 주인이 되려고 하는 시점에서 찾아오지만, 소망은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 과부를 보고 있으면 꼭 나의 모습과 같아 보인다. 
그녀는 이제 더 이상 먹을 것이 없어서 (통에 가루 한 움큼과 병에 기름 조금 (12절)) 이제 이걸로 음식을 만들어 먹고 죽겠다고 엘리야에게 말했다. 정말 그는 죽을 수 밖에 없을 것 같아 보인다. 더 이상 먹을 것이 없고, 먹을 것이 나올 곳도 없다. 

그런데 그런 그녀가 하나님의 사람 엘리아를 만나서 자신의 모든 것으로 떡을 만들어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에게 대접하라는 엘리야의 말에 순종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드렸고, 결국 통의 가루와 기름이 없어지지 않는 기적을 맛 보았다 (16절). 그런데 아들이 병들어 갑자기 죽게 되었다 (17절). 그러자 엘리야를 원망하기 시작한다. 엘리야에 대한 원망이었지만 또한 하나님에 대한 원망이었다. 어차피 죽으려고 했었지 않은가? 죽을걸 살려줬는데, 굶어 죽은게 아니라 병들어 죽었으니 그게 하나님에 대한 원망이 되는가? 그런데 그렇게 되더라… 하나님이 늘 좋은 것, 내가 원하는 것, 내가 바라는 것들을 주시지 않으면 그게 원망이 되고 상한 마음이 되더라. 그런 원망 가운데 엘리야가 기도를 통해 아이를 살린다. 과부의 고백이 ‘내가 이제야 당신은 하나님의 사람이시요 당신에 입에 있는 여호와의 말씀이 진실한 줄 아노라’ 가루와 기름이 떨어지지 않을 때에는 몰랐단 말인가? 보고도 몰랐고, 먹어도 몰랐단 말인가? 그런데 정말 몰랐다. 

한 번 말씀 따라 크게 순종도 해봤고,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놀라운 이적도 맛보았지만 여전히 하나님이 누구신지, 그 말씀이 어떠한 것인지 잘 모르고 내가 원하는 것만 바라고 있기 때문이다. 이미 내가 원하는 것, 내가 원하는 시점, 내가 원하는 방법이 머리 속에 가득하기 때문이다. 이전에 엘리야에게 순종할 때에는 이미 하나님이 그 순종의 댓가로 어떤 것을 주실지 미리 말씀하셨고 그대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원망할 필요가 없었지만, 아들의 죽음은 아무런 약속도 기약도 없는 자신의 힘으로 컨트롤 할 수 없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내 삶도 그렇다. 매일 만나를 먹고 있고, 매달 은혜로 살아가고 있으면서도 지금 발생하는 문제들에 대해서 여전히 원망하고, 하나님께 전적으로 맡기지 못하고 있다. 

나의 무력함 속에서 만나는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이다. 여전히 내게 힘이 남아 있고, 내가 할 수 있는 선택의 방법들이 있고, 포기할 수 있는 것들이 남아 있을 때 만난 하나님은 자꾸 잊어버리게 된다. 마지막 까지 가서야 이제야.. 라고 고백하게 되는 것이다. 자꾸만 그 하나님의 자리에 내가 앉으려 하기 때문이다. 내가 내 삶의 주인이 되고 싶은 유혹이 결국 관계를 그르친다. 

요즈음 하루에도 몇 번씩 절망과 소망의 롤러 코스터를 타고 있다. 아빠가 선교사로 나오는 바람에 더 예민하고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는 우리 둘째 요엘이 때문이다. 내 머리 속에 기대가 여전히 있다. 내가 이렇게 하면, 내가 좀 더 양보하면, 내가 좀 더 사랑해주면, 내가 좀 더, 좀 더, 좀 더.. 내가. 내가. 내가… 이렇게 하면 아이가 이렇게 좋아질 거라는 그 마음 속에서 서 있기 때문이다. 예준이의 힘든 시간에 붙잡아 주신 것처럼 요엘이도 그렇게 해주실 것을 믿으며 보고 있는데, 자꾸만 내가 기간을 정한다. 시간을 정하고, 상황을 정해서 이정도면 달라져야지… 이정도면 좋아져야지.. 이정도면 바뀌겠지? 사르밧의 과부처럼 여전히 나의 옵션과 나의 생각을 의지하고 있다. 내가 정한 시간 안에서 조금 좋은 것 같으면 기분이 좋다가도 그렇지 않으면 못 견디고 화가 솟아 오르는 것을 느낀다. 

아빠로써의 자격 미달이고, 사랑을 주는 자로써의 자격 미달이다. 아내는 좀 더 긴 시간을 바라보고 아이를 대하는데, 나는 너무나도 나 중심적이고, 근시안적이다. 하나님께 기도하면서도 결국은 내가 행하려고 하는 어리석은 사람이다. 그러니 오늘 과부를 보니 꼭 나의 모습과 같아 보인다. 사랑의 물탱크에 물이 차서 넘칠 때 까지 충분히 부어 주는 아빠가 되고 싶다. 내가 정한 시간, 내가 정한 한계로 아이를 판단하고 정죄하는 모습이 아니라 충분히 기다려주고, 충분히 참아주고, 충분히 사랑해주는 아빠가 되기 원한다. 이미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충분히 맛보기 때문에 기다려줄 수 있는 부모가 되고 싶다. 내가 하나님이 되려고 조급함을 쫓아 움직이지 않기를 원한다. 왜냐하면 절망은 내가 주인이 되려고 하는 시점에서만 찾아오지만 소망은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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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Thinking)/Meditation2018. 12. 13. 1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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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상 15:25-32 현실이 아니라 미래를, 마지막을 바라보면서 오늘을 사는 삶

악을 행하고 죄를 짓는 것의 마지막은 언제나 허망하다. 그 마지막은 심판이고, 그 마지막은 돌이킬 수 없는 절망이다. 아버지 여로보암을 보면서도 나답은 그 마지막을 보지 못했다. 마지막을 보지 못하기에 지금 당장을 보고, 지금(현실) 안에서 행복과 즐거움을 찾았다. 그래서 그는 가장 허망한 마지막으로 가게 된다. 

혹시나 나답이 마지막을 볼 수 있었다면.. 그의 인생의 끝을 알 수 있었다면 그의 삶이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는 그의 인생의 마지막을 확연하게 깨달았다면 그는 다른 삶을 살지 않았을까? 

이 현재라는 시간에 갇혀서 미래를, 마지막을 바라보지 못하고 사는 삶은 지금 당장만 바라보게 되고, 당장 눈에 좋은 것, 당장 행복해 보이는 것, 당장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는 것을 추구하게 된다. 나답이 그랬고, 여로보암이 그랬다. 그런데 우리가 바라보아야 하는 것은 지금이 아니라 영원이다. 우리의 죽음을 우리의 미래를 바라보지 못하고 사는 삶은 나답이 여로보암이 했던 것과 마찬가지의 삶으로 우리를 초대하게 된다. 

아내와 요엘이에 대해서 중요한 이야기를 하고 있고, 결정해야 한다. 요엘이가 감정적으로 정서적으로 많이 힘들어 한다. 너무 많이 달라진 삶과, 환경, 언어, 학교로 인해서 몸도 마음도 많이 힘들다. 어떤 결정을 내리든 부모로써 아이에게 최선을 다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만 한다. 이런 오늘 주님께서 주시는 말씀은 우리의 죽음을, 우리의 미래를, 우리의 영원을 보라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이 다가 아니라는 말씀이다. 지혜를 주시길 간구한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자녀들에게 가장 좋은 길을 간구한다. 나답의 길이 아니라, 여로보암의 길이 아니라, 솔로몬의 길이 아니라 그의 아버지 다윗의 길을 걷는 이 순간이 되기 원한다. 

묵상을 읽으시면서 요엘이를 위해 한 번씩만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저희 부부가 요엘이에게 가장 선한 길을 찾아서 함께 갈 수 있도록 기도부탁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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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Thinking)/Meditation2018. 12. 12.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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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상 15:9-24 하나님이 먼저가 될 때, 온전해질 수 있다. 

아사가 아비얌의 뒤를 이어서 유다의 왕이 되었다. 그는 종교적으로 개혁을 하였다. 남창들을 쫓아내고, 조상들이 지은 모든 우상을 없애고 (12절), 어머니가 만든 아세라상을 찍어 불살랐고, 어머니의 태후의 위를 폐하였다 (13절). 그리고 그의 마음이 일평생 여호와 앞에서 온전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14절). 하나님으로부터 그가 받는 평가는 매우 좋았다.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우리에게 중요한 문제는 결국 우리의 마음이 어디에 있느냐의 문제이다. 그는 어머니보다도 하나님을 더 중요하게 여겼다. 그게 그의 온전한 마음이었다. 그래서 어머니가 우상을 가져오려고 하자 어머니를 태후에서 폐하기 까지 하였다. 더 이상 영향을 미치지 못하게 하려는 조치였다. 이것은 아사왕의 마음이 어디에 있느냐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였다. 아사는 무엇이 더 중요한 것인지를 확실히 알았다.

하지만 그의 인생의 후반부는 좋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 대신 아람 왕 벤하닷을 의지해서 이스라엘과 전쟁을 하였고, 인생의 마지막에 발에 병이 났을 때에도 의사들을 의지하였다. 그 마음에 중심이 더 이상 하나님 안에 있지 않았고, 그는 사람들을 의지하기 시작했다. 모든 문제의 시작은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을 의지할 때 시작된다. 지금 나는 누구를 의지하고 있는가? 

비자 문제에서, 사역의 고민 속에서 솔직하게 당장 더 의지가 되는 것은 하나님의 손이 아니라 사람의 손이다. 매일 아침 묵상을 하면서도 여전히 하나님께 깊이 묻기보다는 여전히 사람을 의지하고 있다. 하나님은 멀고 사람은 가깝게 느껴지는 것 같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 당장 나에게 도움을 주거나 좋은 말을 해주는 사람이 더 중요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아사왕과 같이 시작은 좋았지만 갈수록 사람을 의지하는 자가 나도 되어가고 있다. 

다시 한번 마음을 정리한다. 모든 것이 사람사이의 문제처럼 보이지만 결코 사람과의 문제가 아니다. 누군가 나를 도울 수 있을 것 같은 문제여도, 사람을 의지하는 것은 순서가 잘 못된 것이다. 사람을 의지해서 그 사람이 나를 돕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기 때문에 나의 도움이 하나님께서 오고,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사용하는 것이다. 순서를 바꾸지 말자. 사람이 먼저가 아니다. 하나님이 먼저이시다. 하나님이 온전하게 의지되어질 때, 그제서야 사람의 도움도 보이게 되는 것이다. 

오늘은 하나님을 먼저 붙들자. 잘 안보이는 두려움의 환경 속에서 하나님을 더 깊이 붙들자. 하나님 붙들면서 내 마음이 하나님 앞에서 온전하여지길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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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Thinking)/Meditation2018. 12. 11. 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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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상 15:1-8 복음은 내 삶의 모든 것이 예수님 때문임을 깨닫는 것

조상 덕을 본 한 인물이 등장하는데 남유다의 두 번째 왕인 아비얌 왕이었다. 그는 여로보암 왕이 행한 모든 죄를 행하였고, 온전하지도 못했지만 하나님께서 다윗을 위하여(4절) 그에게 등불을 주셨고, 예루살렘을 견고하게 하셨다. 옛 우리말에 ‘잘 되면 내 탓, 못 되면 조상 탓’ 이란 말이 있는데, 이 케이스는 정반대였다. 다윗의 순종과 다윗의 온전함이 그들의 자손들까지 건져주시는 은혜를 누리게 되었다. 하나님이 다윗에게 하신 약속에 신실하셨기 때문이다.

결국은 ‘잘 되면 내 탓, 못 되면 조상 탓’이 아니라 '잘 되어도 하나님 때문, 못 되어도 하나님 때문인 것'이 우리의 삶이다. 이것이 복음이다. 우리가 잘해서, 뛰어나서, 거룩해서 예수그리스도의 신부가 되는 것이 아니다. 못해도, 죄지어도, 불경건해도 우리는 신부가 되는 것이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때문에… 결국 자랑할 것도, 교만할 것도 없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이고, 우리가 한 것은 그저 믿은 것 외에는 없다. 믿음도 선물이다. 도대체 내가 기여한게 없는데 만 왕의 왕의 신부가 되는 것이 복음이다. 

본문을 읽으며 아비얌이 너무했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이내 그 생각은 나도 다르지 않다는 생각으로 바뀌었다. 나도 예수 그리스도 덕으로 지금 이 자리에 감히 선교사라고 서 있는 것이지 뭐가 다르겠는가? 내 속에 선한 것이 없다는 것은 내가 더 잘 알지 않는가? 내가 조금, 아주 조금 더 앞에 있다고 뒷 쪽에 있는 사람들을 정죄의 눈으로 바라보면 안됨을 배운다. ‘예수님 덕’을 보고 있음을 한 순간도 잊지 말아야겠다. 이것을 잊으면 바로 들어오는 생각은 교만함과 정죄함의 마음이다. 내가 뭐라고…

요엘이를 키우면서 정말 힘들 때가 많다. 정말 이해가 되면서도, 정말 힘들다. 도대체 이 아이의 끝은 어디일까?를 수없이 생각해 본다. 오늘 아침에도 차를 타러가는 10분내내 짜증을 내면서 갔다. 두 마음이 공존한다. 이해가 되는 마음도 있지만 또한 이해하기 보다는 화가 나고 짜증이 샘솟는다. 하지만 기억하자. 지금의 나는 나의 이러한 모습들을 받아준 많은 사람들 때문에 어른이 된 것임을…  부모님 덕, 선생님 덕, 친구들 덕을 보며 여기까지 온 것임을… 그리고 예수님께서 부어주시는 사랑과 복음이 내 삶을 겨우 여기까지 오게 했음을 잊지 말자. 복음을 기억하고 요엘이에게 꼰대 아빠가 되지 말자. 

어느 선배 페이스 북에서 이런 글을 본적이 있다. 꼰대가 되지 말자. 꼰대가 되지 말자. 꼰대가 되지 말자. 복음을 아는 자가 절대로 되지 말아야 할 것이 꼰대다. 아니 될 수도 없는 것이다. 오늘도 꼰대가 아니라 은혜를 아는 자가 되자. 나의 나 된 것이 오로지 주의 은혜임을 알고, 요엘이를 더 사랑으로 안아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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