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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5:1-12 나의 무력함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전능함을 채우는 시간

오늘 본문은 요단과 가나안 왕들의 마음이 녹았고 정신을 잃었다는 것으로 시작한다 (1-3절). 요단강 물을 기적적으로 가르고 건넜으니 충분히 그럴만 하다. 나의 눈으로 볼 때 이 타이밍에 해야 할 것은 뭐? 공격이다. 마음이 녹았을 때, 그들이 우리를 무서워 할 때 가서 싸워서 이겨야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요구하신 것은 할례였고, 율법의 준수였다. 인간의 눈에 보이기에는 지금이 기회 같고, 지금이 달려야 할 때 같고, 지금이 적기인 것 같지만, 하나님께서 요구하신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였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율법의 준수였고, 가장 무력하고, 무능한 자리로 내려가는 것 이었다.

할례를 받는 다는 것은 최소 일주일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한 상태로 가는 것이다. 지금 당장 그들은 우리를 보고 겁을 먹었는데, 달려가서 싸워야 되는 이 타이밍에 하나님은 무력함을 요구하셨다. 왜냐하면 그것이 하나님과의 관계이고, 우리의 무력함을 통해서 하나님의 전능함이 발휘되는 시점이기 때문이다. 

뭔가 이루어지는 것 같은 주변 환경도, 떠들석한 상황이 나를 움직이는 것이 결코 아니다. 우리를 움직이는 힘은 하나님과의 관계, 나의 무력함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전능함을 채우는 그러한 시간에서 나오는 것이다. 골방이 열방을 움직인다는 그런 의미와 동일하다.

물론 지금 내 상황이 뭔가 이뤄지는 것 같은 주변환경이라는 말은 결코 아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시는 것은 하나님과의 친밀함이, 하나님과의 골방에서의 관계가, 나의 무력함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전능함을 내 삶에 채우는 이 시간이 더 중요하다고 말씀하시는 것 같다. 

나의 무력함을 인정하지 못하고서는 나중에 악하고 게으른 종이 된다. 모든 것이 내가 한 것 같고, 모든 것이 나의 힘과 지혜로 한 것 같이 느끼게 된다. 악하고 게으른 종이 되지 말자. 나의 무력함을 인정하자. 밖에서의 드러나는 시간 말고, 안에서 친밀함을 경험하는 시간을 보내자.

그 무력함과 순종, 친밀함의 시간들을 보낸 자들이 얻는 것은 가나안 땅의 소출을 먹게 되는 것이었다 (12절).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충분히 무력함 안에(그 분의 전능하심 안에) 거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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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4:15-24 하나님의 손을 구하지 말고,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가 되자. 

하나님께서 요단을 갈라지게 하는 기적을 일으키신 이유가 뭐였을까? 오늘 본문에서는 24절에서 두 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1. 이 땅의 모든 백성에게 여호와의 손이 강하신 것을 알게 하려고
  2.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항상 경외하게 하려고

기적을 보며 기적에 집중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기적을 보며 하나님께 집중하게 하려 하셨다. 우리 삶에 일어나는 하나님의 역사를 보며 우리가 더 해야 할 것은 ‘하나님을 더 경외함’이다. 

은혜가 임했는데, 하나님을 바라보기 보다는 은혜 자체를 바라보거나, 나를 바라보는 경우가 있다. 나에게서 어떠한 것도 나오지 않았지만 나를 바라보며 내가 한 것 처럼 생각하는 경우가 있다. 가짜다. 나에게서 선한 것이 절대로 나올 수 없다. 나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이다. 절대로 잊지 말아야 한다. 결국 모든 상황을 통해서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한 곳은 바로 하나님, 한 분이시다. 다른 곳을 바라보거나 다른 것들을 기대하면 망하는 길로 가는 것이다.

나는 지금 어디를 바라보고 있는가? 하나님, 한 분인가? 아니면 하나님 쪽으로 보며 다른 곳을 보고 있는가?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가? 아니면 하나님의 손을 구하는가? 손만 구하고 얼굴을 구하지 않는 우를 얼마나 많이 범하는가? 망하지 말자. 삶에서, 사역에서, 자녀양육에서, 언어공부에서 하나님의 손만 구하는 사람이 되지 말자. 이 모든 시간들을 통해서 하나님과 더 가까워지는 시간이 되어야지 하나님의 손만 구해서 돌만 세워놓고 사라지는 그러한 사람이 되지 않기를 원한다.

말씀을 읽으면서, 묵상을 하면서, 요엘이를 양육하면서, 우리 형제, 자매들과 함께 하는 시간 속에서… 하나님의 손만(도우심) 구하는 자가 되지 말고, 진실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가 되어서… 기적이, 삶에 일어나는 모든 일이 내가 하나님을 더 경외하는 일이 되도록 내 마음을 다잡자. 

하나님이 전부, 하나님이 진짜가 되는 삶 살아내기 원한다. 그러기에는 내가 너무 연약하다. 더욱 더 예수를 의지하는, 더욱 더 예수를 사랑하는 자가 되도록 성령께서 나를 도와주소서. 기적을 맛보지 않아도 일상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기적(?)이 일어나기를 간절히 간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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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참 오랫만에 (거의 4년 만에), 이전에 샬롬 하우스에서 양육했던 한 형제를 만났다. 이 형제는 그 당시에 공부와 여러가지 문제로 인해 참 많은 시간을 나와 함께 보냈던 형제였다. 내가 사용할 수 있는 시간의 많은 부분을 할애해서 만나고 대화하며 양육했던 형제였다. 하지만 그 문제가 해결이 되지 않으면서 결국 스스로가 샬롬 하우스를 나가겠다고 나에게 통보하였고, 그 당시 리더 회의를 통해서 조건부로 기숙사를 나가는 것을 승락해주었다. 조건은 꼭 누나에게 가서 함께 생활하며, 공부를 마치는 것이었다.

 

사실 그 형제가 나가는 것은 나에게 엄청난 충격이었다. 안되는 태국어로 정말 많은 시간과 노력을 쏟으며 양육했는데, 어느순간 나에게 샬롬하우스를 나가겠다고 통보하였고, 대화를 하였지만 그는 받아들이지 않았고, 결국 그가 나가기로 결정했던 리더 회의에서 나는 눈물을 펑펑 흘리며 울었다. 단 한번도 진심이 아니었던 순간이 없었는데, 그는 나의 진심을 전혀 모르는 것 같았고, 그는 결국 그가 원하는 길을 선택을 했다.

 

한국에서 본부 사역을 하며 공부하는 동안 들리는 소식은 다니던 학교를 자퇴하고 신학교에 입학을 했다고 들었다. 그리고 우리 가정이 태국에 돌아와서 우연히 백화점에서 한 번 만났고, 샬롬하우스 이전 멤버들이 모일 때 초청하였지만 사역으로 인해 오지 못했었는데, 오늘 만나자고 연락이 왔다. 참 궁금했다. 도대체 왜 만나자고 하는 것일지에 대해서... 오후에 만났는데, 그는 신학교를 졸업하고 전도사가 되었고, 한 태국교회에서 부교역자 생활을 하며 방콕에서 50km 정도 떨어진 지역에 교회를 개척했다고 하며 새해 인사 겸 온 것이다. 이전부터 사귀던 샬롬하우스 출신 여자친구와 같이 왔고, 선물을 가지고 왔다. 한참 이야기를 했고, 함께 식사를 하자고 했는데, 내가 산다고 하면 안가겠다고 하는 것이었다. 한국 문화는 형이 내는 거라고 내가 내겠다고 하는데도 자신들이 내겠다고 하는 바람에 한참 실랑이를 했다.

 

그들과 교제 하는 가운데, 참으로 감사하고, 참으로 많은 위로를 받았다. 샬롬하우스를 나간 이후에는 내가 해준 것이 없었는데도, 이 커플이 와서 감사를 전하고, 우리 가정의 섬김을 통해서 자신들의 삶이 변했음을 나눠주는데 참으로 많은 위로와 격려가 되었다. 다시 태국으로 돌아오기 전에 선임 선교사님이 첫 사역 때 어떠한 열매가 있었느냐고, 함께 동역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느냐고 물었을 때,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자신도 없었고, 실수도 많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형제가 나간 것은 나의 잘못이 컸다고 그간 계속 생각해왔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 일을 통해서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 것은 우리는 최선을 다할 뿐이고 결국 사람을 양육하고 성숙시키는 것은 하나님의 일이심을 깨닫게 되었다. 나의 작고 연약한 몸짓을 통해서도 하나님은 한 영혼을 양육하고 성숙시키고 계심을 깨닫게 되었다. 오늘 이 만남은 실제로 너무 많은 위로와 격려가 되었고, 사역에 있어 사람의 눈과 잣대로 성공과 실패를 말해서는 안되는 것임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언어가 통하지 않아도, 문화가 달라도 진심은 언제나 통한다는 것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었다. 늘 사람에게 두 마음없이 진심으로 대하는 순진함이 나의 장점이자 단점 아니었는가?

 

교회를 개척하여 이미 같은 걸음을 가고 있는 우리 형제와 자매 커플을 격려하고, 또한 내가 너무 많은 격려와 위로를 받았음을 나누었다. 앞으로 어떠한 모습으로 만남이 계속될지 알 수 없지만, 이 태국을 향한 하나님의 일들이 계속해서 형제 커플을 통해, 또 우리 가정을 통해 일어나길 기대한다. 결국 내가 하는 일이 아니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오늘도 삶에서 Not I but Christ를 실천하며, 한걸음 한걸음씩 믿음으로 걸어가는 것이다.

 

천천히 가도 옳은 길을 가자.

멀리 가지 못해도 함께 가자.

그렇게 올해를 또 살아가기 원한다.



<형제 커플과 함께 찍은 사진>




<새해 인사 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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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2:15-24 붉은 줄은 값싼 은혜가 아니다. 

오늘 이스라엘 백성은 라합의 도움으로 안전하게 돌아간다. 그리고 붉은 줄을 메어서 그 가정을 안전하게 보호할 것을 이야기 하고 있다. 붉은 줄이라는 메타포는 쉽게 유월절에 문설주에 발랐던 어린양의 피를 떠올리게 한다. 유월절에는 피를 바르면 살았고, 이 날에는 붉은 줄을 두르면 살았다. 라합의 가정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도왔기 때문에 사는 것이 아니다. 붉은 줄을 걸었기 때문에 사는 것이다. 도왔더라도 붉은 줄을 두르지 않았다면 죽었을 것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은 항상 우리의 행위와는 관계가 없다. 예수 그리스도를 내 삶의 주로 믿는 것 처럼 그저 피를 문설주에 바르고, 붉은 줄을 치는 것이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라고 하시면 그렇게 순종하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다. 

이처럼 구원은 쉽게 우리에게 다가온다. 하지만 이 구원을 쉽게 여기면 안되는 것이다. 구원이라는 것은 우리의 힘으로 절대 받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값없이 주신 것이다. 내가 용납받았다는 사실을 뼛속깊이 이해해야 다른 사람을 용납할 수 있는 것이다. 구원을 쉬운 것으로 생각하면 절대로 다른 사람을 용납할 수 없다. 

신학공부를 하면서 본 회퍼의 ‘값싼 은혜 cheap grace’에 대해서 접하였다. 라합의 구원은 단순히 문설주에 붉은 줄을 매단 것이 다가 아니다. 그 이전에 정탐꾼 두명의 생명, 그리고 어쩌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큰 위협이 될 수 있는 상황을 넘어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였다. 그런데 이 것을 우리가 쉽게 붉은 줄로만 치환해서 생각하면 매우 쉽고, 값싼 은혜를 양산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기 위해서 치루신 댓가를 생각해보자. 바로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었다. 

도저히 내가 낼 수 없는 값을 치뤄주신 것이 구원이다. 그런데도 나는 붉은 줄 둘렀으니... 피를 발랐으니… 정도로 가볍게, 쉽게 생각하고 있지는 않은가? 우리 주님이 하신 모든 구원을 주신 은혜와 사랑에 감사하며, 오늘도 주님의 뒤를 쫓는 제자가 되고 싶다. Cheap grace가 아니라 Costly grace 를 받은 자로써 오늘도 살아가기 원한다. 단순한 붉은 줄을 메는 삶이 아니라 십자가를 쫓아가는 삶이 되기 원한다. 

요엘이를 양육할 때, 아내와 관계할 때, 우리 형제들과 영어를 가르칠 때, 삶에 대해서 복음에 대해서 나눌 때, 결코 값싼 은혜로 대하지 않기를 원한다. 온 천하 보다도 사랑하셔서 자신의 생명을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그 귀한 사랑과 값비싼 은혜를 기억하며 그들에게 복음으로 대하기 원하며, 오늘 그런 하루가 되기 원한다. 

값싼 은혜는 우리가 우리 스스로에게 주는 은혜이다. 값싼 은혜는 회개를 요구하지 않으면서 용서에 대해 설교하는 것이고, 교회의 훈련이 없는 세례이고, 고백이 없는 성찬이다… 값싼 은혜는 제자도가 없는 은혜이고, 십자가가 없는 은혜이고, 예수 그리스도와 삶 그리고 성화가 없는 은혜이다. 

“Cheap grace is the grace we bestow on ourselves. Cheap grace is the preaching of forgiveness without requiring repentance, baptism without church discipline, Communion without confession...Cheap grace is grace without discipleship, grace without the cross, grace without Jesus Christ, living and incarnate.” Dietrich Bonhoeff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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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2:1-14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손을 신뢰하기

본문의 시작은 여호수아가 두 사람의 정탐꾼을 보내는 것으로 시작된다. 한국어 성경에는 secretly 란 단어가 없지만 ESV 영어 성경에는 sent two men secretly 로 표현되어 있다. 

아주 비밀스럽게 정탐꾼을 보낸 것이다. 그런데 비밀스럽게 보냈는데, 이해할 수 없게도 그들은 금방 걸린다. 조심했을텐데 왜 걸렸을까? 그들이 실수한 것일까? 아니라면 왜 하나님은 이들에게 이러한 어려운 상황을 허락하셨는가? 하나님이 보호하셨음 안 걸렸을텐데… 

본문을 계속 보고 있으면 그들이 걸린 이유는 단 한 가지로 생각할 수 있다. 아합이라는 한 여자의 구원을 위해서이다. 어쩌면 이스라엘 전체 백성의 위험을 초래할 수도 있는 일이었지만 그 일은 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지혜였다. 

우연인지, 필연인지(필연일테지만) 그들은 아합의 집으로 들어가 숨었고, 그들은 아합과 가족을 살려주기로 약속을 한다. 하나님의 일은 우리의 실수와 연약함을 통해서도 언제나 이루어진다. 

때로는 우리가 생각하기에 연약한 일들, 속상한 일들, 화가 나는 일들, 우리에게 일어나기를 바라지 않는 어떠한 상황과 일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역사는 일어난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 모든 상황 속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통해 선한 일들을 이뤄가실 것이라는 ‘신뢰’를 가지는 것이다. 

분이 날 때 분을 내지 않고, 억울 할 때 이겨낼 수 있고, 속이 상해도 여전히 하나님을 신뢰하기 원한다. 내가 무엇이길래 하나님이 내 삶의 연약함을 통해서도 일하기를 원하시는가? 여전히 죽지 않은 내 자아가 여전히 나를 힘들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신뢰한다. 내 삶의 모든 상황과 연약함을 통해서도 그 분께서 그 분의 선한 일들일 이뤄갈 것임을…

새해의 셋째 날이다. 벌써 다양한 일들이 생기고, 힘든 순간들을 맞이하게 된다. 여전히 신뢰하기 원한다. 여전히 내 삶에 일어나는 그 분의 손길을 신뢰하기 원한다. 보이지 않아도 날 위해 일하시는 그 분의 손을 신뢰하기 원한다. 내가 계획한대로, 내가 생각한 방향으로 가지 않더라도 그 뒤에서 나를 이끄시는 하나님의 손만 붙들기 원한다. 분내지 말고, 성내지 말고, 잠잠하게 신뢰하자. 하나님이 라합의 구원을 위해 이스라엘 정찰대의 우연을 가장한 필연을 사용하신 것과 나를 그 분의 뜻과 그 분의 은혜로 이끄실 것이다. ‘신뢰’하며 나아가는 하루, 2019년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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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1:10-18 너희는 그 말을 기억하라

여호수아가 백성들에게 한 말은 우리가 요단을 건널 것이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땅을 차지할 것이라는 것이다 (11절). 그리고 그가 한 말은 13절에서 '너희는 그 말을 기억하라’ 라는 것이다. 1차적으로 모세가 한 말을 기억하라는 의미였다. 하지만 모세가 했던 그 말은 바로 하나님 입에서 나온 말씀이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을 전달한 것 뿐이었다. 결국 여호수아가 한 말은 하나님께서 너희들에게 하신 약속을 기억하라는 말씀이었다. 

보이지 않는 약속이 우리 눈에 보이도록 활자화 된 것이 성경이다. 결국 약속을 기억하려면 이 말씀을 부지런히 가까이하고, 묵상해야 한다. 바로 어제 본문에 나온 것 처럼 말이다.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 (수1:8)’ 결국 말씀을 읽고 묵상한 여호수아는 하나님께서 어떠한 일을 하실지 어떠한 약속을 행하실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전히 잘 알지 못했고, 여호수아는 이를 기억하라고 말한 것이다. 말씀을 기억하고, 말씀대로 살아가자. 그래야 우리 삶에 변화가 생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셨던 일들을 기억하자. 그 분이 우리를 위해 늘 일하시고, 역사하셨다. 오늘은 어제와 단절된 새로운 하루가 아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으로 계속 일하고 계신다. 기억하고, 기대하자. 

2018년에 행하셨던 일들을 기억하고 2019년에 행하실 일들을 기대하자. 그리고 기억하려면 말씀을 붙들어야 함을 잊지 말자. 말씀 붙든 자가 기억해 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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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1:1-9 말씀을 쫓아 천천히 가더라도 바른 길로 갈 수 있는 한 해 

새해 첫 시작의 말씀이 여호수아 1장이다. 여호수아 1장을 읽으며 여호수아서의 주인공이 여호수아가 아니라 하나님이심을 다시 한번 보게 된다. 계속해서 ‘내가’라는 말이 반복되며, 하나님 본인이 하시겠다고 말씀하신다. 하나님 자신이 하시겠다고 하시면서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에게 3가지 약속을 하신다.

첫 번째 약속은 땅을 주겠다는 약속이다 (3-4절). 땅이 없이 머물 곳이 없이 돌아다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보다 더 큰 복음이 있었을까? 두 번째 약속은 형통할 것이다 라는 약속이다 (7-8절). 번영하고, 번성하겠다는 약속이다. 세 번째 약속은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이다 (9절). 온 세상의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약속보다 더 큰 약속이 어디에 있겠는가? 그런데 하나님 자신이 우리를 위해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시는 것이다. 임마누엘이다. 

하지만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또한 세 가지가 있다. 
  1. 강하고 담대하라 (6절)
  2. 율법을 다 지켜 행하라 (7절)
  3. 주야로 묵상하라 (8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결국 어떠한 계명을 지키라 말라의 문제라기 보다는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를 맺으라는 요구이다. 말씀을 묵상하고, 율법을 지키는 것은 그 분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는 것이다. 그 분을 더 알아가기 위해서 하는 것이다. 그것을 지키지 않으면 내 구원에 혹은 내 삶에 문제가 생길까봐 지키는 것이 결코 아니다. 

2019년을 시작하며 이 말씀이 요구하시는 그 한 가지 (세 가지이지만),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를 맺어 나가기 원한다. 율법을 지킨다는 것을 예수님이 두 가지로 요약하셨다. 첫 번째는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두 번째는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다. 이렇게 먼저 요구하시는 것들에 내가 반응하는 한 해가 되기를 원한다. 입으로만 사랑하지 않고, 삶으로, 마음으로, 내 몸과 같이 사랑하기 원한다. 

그리고 진정으로 임마누엘을 누리는 한 해가 되기를 원한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그 은혜가 내 안에 가장 충만하기 원한다. 그래야 내가 하나님을 이웃을 사랑할 수 있다. 말씀 안에서 진정으로 하나님을 누리는 한 해,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에 사람들의 시선이나 평판보다 하나님이 더 중요하게 여겨지는 한 해, 그렇기 때문에 말씀을 쫓아 천천히 가더라도 바른 길로 갈 수 있는 한 해가 되기를 원한다.

그 길 가운에 여러분들이 함께 걸어가주심이 감사하고, 저도 선교사로써 부끄럽지 않게 매일을 살아가겠습니다. 
2019년도 주를 향해 함께 동행하는 걸음이 되고 싶습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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