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Thinking)/Meditation2020. 1. 27. 11:40
728x90
반응형

눅 5:12-26 주님이 원하셔서 시작하고 영광돌림으로 마치고..

1. 나병 들린 사람이 주님께 치료를 해주시기를 구하고 있다. 그런데 그의 표현은 “제가 너무 힘들어요 고쳐주세요”가 아니라 “주여 원하시면” 으로 시작한다. 내 소망보다 내 갈망보다 더 큰 것은 주님의 뜻이어야 한다 (12절). 

2. 중등부와 몇 일을 함께 람빵에서 사역을 하고 마쳤다. 이 사역의 시작이 ‘내가 원해서’ 시작 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질문이 ‘주여 원하시면’으로 시작된 사역으로 믿는다. 그간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한 고비 한 고비를 넘어 왔던 것 같다. 

3. 오늘 본문을 보면 그 사역의 마지막 마침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끝나야 함을 안다. 고침을 받았던 병자도, 그 고침을 받는 병자를 본 사람들도 그들이 한 유일한 일은 동일하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24, 25절). 

4. 선교란 단어를 쓰는 어떤 일도 (장기 사역이든 단기 사역이든)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하는 것으로 시작해서 그 일을 행하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로 마쳐져야 한다. 그래야 그 일이 온전히 하나님의 일, 선교가 되는 것이다. 

5. 우리의 뒤에 있었던 일로 우쭐할 필요도, 또 낙심할 필요도 없다. 주님이 원하셔서 시작되었고, 주님이 영광 받으심으로 마치게 되기 때문이다. 

6. 주님이 영광 받으신다는 것, 주님께 영광 돌린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우리가 무익한 종임을 깨닫는 것이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해냈다는 자부심이 아니라 해야 할 당연한 일을 했을 뿐이라는 ‘무익한 종’의 자세가 우리에게 필요하다. 

7. 눅 17:10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니라 할지니라

8. (사실) 단기팀과 아이들이 준비해와서 했지 내가 별로 한게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와 같은 무익한 종의 고백을 하고 있는가? 해야할 일을 한 당연한 것임을 잊지 않고 있는가? 내가 영광을, 내가 높임을 받으려는 그 마음을 내려놓고 하나님께만 영광 돌리고 있는가? 

9. 삶의 단순한 진리이다. 주님께서 원하셔서 시작하고, 마치고 주님께 영광을 돌리고… 오늘 본문처럼 내 삶도 그렇게 단순하게 또 주님께만 헌신되게 살아가기 원한다.

10. 오늘도 샬롬

728x90
반응형
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20. 1. 27. 11:39
728x90
반응형

눅 5:1-11 복음이 먼저 찾아온 자의 삶의 변화

1. 하나님이신 그리스도께서 베드로에게 찾아가셨다. 평생을 어부로만 산 베드로는 마침 그 날 물고기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4절)

2. 보통 사람의 생각은 “어 뭐야? 누군데 나한테 뭐라고 하는거야?” 라고 반응하는게 정상일 것이다. 근데 베드로는 예수님께 무엇인가 느낀 것 같다. 그의 대답은 내가 열심히 다 해봤는데 그래도 안되었는데, 그냥 말씀대로 해보겠습니다 라는 대답이었다.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5절)

3. 그런데 일어난 일은 자신의 예상과 다른 일이었다. 그물이 찢어질 만큼 물고기가 잡혔다. 너무 많이 잡혀 자신의 배에, 그리고 친구의 배에 가득 채우는데 배가 잠기었다. 

4. 우리에게 일어난 구원이 이런 것이다. 우리 힘으로 이것도 해보고, 저것도 해보고, 다 해보는데 잡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직 말씀이 말하는데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순종해야만 우리는 구원 받을 수 있다. 

5. 베드로의 생각의 변화가 바로 구원의 여정이다. 내가 아무리 해봐도 내가 아무리 열심히 해도 안된다는 것을 발견하는 것이다. 내가 구원받기 위해서 내가 내 힘으로 안된다는 것을 발견하는 것이다. 이 땅에서 또한 죽어서 우리가 구원받기 위해서는 내가 가진 환경, 경험, 배경과 다를지라도 말씀에 따라 순종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는 것으로 구원 받을 수 있다. 

6. 복음을 들은 자의 반응은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8절) 이다. 이게 정상이다. 우리는 죄인이다. 뼛속까지, 마음 깊은 곳 까지 죄인이다. 사랑하고 싶지 않고 용서하고 싶지 않은 죄인이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수 없는 죄인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오늘 본문처럼 베드로에게 먼저 찾아오셨다. 거룩하신 하나님이신 예수께서 죄인인 베드로를 인간인 우리를 먼저 찾아오셨다. 우리가 죽어달라고 하지 않았는데, 우리를 위해 먼저 죽어주셨다. 이것이 복음이다. 

7. 그리고 예수님의 반응은 베드로를 부르신다.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10절) 이제 우리의 삶은 더 이상 나만을 위해 사는 사람의 삶이 아니다. 이제 우리는 복음을 전하는 자의 삶을 살아야 한다. 그 복음이 우리에게 찾아오셨고, 우리를 구원하셨기 때문에 이 후로 우리의 정체성은 예준, 예수님의 재림을 준비하는 사람이 되어야만 한다. 

8. 용서받은 죄인, 사랑받는 죄인의 모습이 바로 우리이다. 오늘도 베드로와 같이 내가 죄인임을, 내가 할 수 없음을 깨닫고 복음 앞으로 나아가는 내가 되기 원한다. 복음만이 모든 것을 변화시킨다.

9. 오늘도 샬롬

728x90
반응형
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20. 1. 16. 09:49
728x90
반응형

눅 4:31-44 어려워도 부르심의 길로 가자

1. 예수님이 병을 고치시고, 귀신을 쫓으시니 그들은 예수님이 너무 좋았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과 머물지 않으시고 한적한 곳으로 가셨다. 

2. 얼마나 깊이 숨으셨냐면 그들이 찾다가 겨우 만날 정도였다 (43절). 그들이 예수님을 찾았던 이유는 예수님이 자신들을 떠나지 못하고 자기들과 함께 계속 있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43절).

3.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다른 동네에서도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여야 하리니 나는 이 일을 위해 보내심을 받았노라 하시고” (44절)

4. 보내심을 받은 자는 자신의 유익을 위해 살아가지 않는다. 자신을 보내신 분의 뜻을 위해 살아가는 자이다. 편하고 익숙하고 자신을 환영해주는 사람들과 계속 같이 지내는 것이 예수님이 보내심을 받은 이유가 아니었다. 예수님이 해야 할 일은 계속해서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해야 하는 것이 사명이셨다. 

5. 살면서 ‘나를 좋아하는 사람들과 지내는 일’ 혹은 ‘우리에게 호의를 가진 사람들만 만나기’가 얼마나 편한가? 때로는 이것이 우리의 소명보다 보내심을 받은 이유보다 더 쉽기 때문에 이러한 쉬운 길을 선택할 때가 얼마나 많은가? 나를 환호해주는 사람들을 뿌리치고 그들이 찾을 수 없는 곳으로 가는 일은 또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6. 그것을 할 수 있는 이유는 내가 왜 ‘보내심’을 받았는지가 확실해야 한다. 나를 보내신 분을 확실히 알아야 한다. 내가 ‘보내심’을 받은 사명과 이유가 확실해야 어려운 길로, 나를 알지 못하는 곳으로 우리는 나아갈 수 있다. 

7. 나는 무슨 부르심을 받고 지금 ‘태국’에서 선교사로 살아가고 있는가? 강명식 씨의 ‘승리’라는 찬양 가사 중에 “승리가 무엇인줄 아는가? 더 좋고 편한 가능성의 유혹을 절연히 잘라버리고, 오직 주님만 따라 가는 것 바로 승리라네” 라는 가사가 있다. 부르심을 받은 자의 삶이 이래야 하지 않을까? 쉬운 길 보다, 편한 길 보다 부르심에 합당한 길을 걸어가는 것.. 이것이 바로 승리이고 부르심을 받은 자의 삶이다. 

8. 중등부 아이들과 선교 4일째다. 피곤하고 힘드니 쉬운 길을 찾고 싶다. 더 자고 싶고, 더 쉬고 싶다. 덜 움직이고 싶다. 하지만 쉬운 길이 아니라 부르심의 길로 가길 원한다. 환호의 길이 아니라 부르심의 길로 가길 원한다. 나를 보내신 분이 이 앞에 계시기에 앞으로만 걸어가기 원한다. 오늘도 내 삶에 ‘승리’가 있길 원한다.

9. 오늘도 샬롬

728x90
반응형
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20. 1. 15. 09:10
728x90
반응형

눅 4:14-30 나의 것들을 내려놓아야 비로소 선명하게 보이는 예수님

1. 예수님은 이사야의 말씀을 뽑으셨고, 그 분의 사역은 주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시고, 포로된 자에게 자유와 눈먼 자를 보게 하는, 주의 은혜를 전파하는 사역이었다 (18-19절)

2. 그리고 나서 만난 예수님의 고향의 사람들… 그 사람들의 반응은 전통이나 자신의 아는 것에 같혀 있었다.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22절)

3. 우리가 우리의 지식이나 생각, 우리가 가진 선입견에 갖히면 예수를 메시아로 볼 수 없고, 예수를 구원자로 만날 수 없다. 

4. 내가 가진 선입견 중에는 “나는 그래도 괜찮은 사람이야” 라는 생각이 큰 오해 중에 하나일 것이다. 이러한 오해는 내가 나의 구원에 기여할 만한 선한 것이 내 안에 있다고 믿게 만들고, 구원의 선물을 거절하고 내가 만든 하나님, 내가 만든 우상을 쫓아 살게 만든다.

5. 이스라엘 백성들도 그들이 기대하는 메시아, 그들이 기대한 메시아에 대한 선입견이 있었고, 그 선입견은 예수님을 거절하는데까지 이르게 하였다.  

6. 오늘 나는 람빵지역 사역 3일차를 맞으며 어떤 선입견을 가지고 시작하는가? '어제 이랬으니까 오늘 이럴꺼야..' 혹은 '어제 이렇게 했을 때, 이렇게 되었으니까 오늘은 이렇게 해봐야지..' 라는 내 스스로의 생각과 경험이 나의 선입견을 이루어 하나님이 내 삶에 일하실 것들을 제한하지는 않을까? 

7. 내 선입견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그 순간 순간을 쫓아가기 원한다. ‘이럴꺼야’ 혹은 ‘당연히 이렇게 될거야’라는 생각이 아니라 오직 성령의 도우심과 은혜를 구한다. 

8. 오늘도 새로운 영혼들을 만난다. 두 곳의 지역학교로 들어가 전도를 한다. 사람들은 그러한 일회성 사역이 무슨 의미가 있냐고 묻기도 하고, 불편해 하기도 한다. 이러한 생각의 선입견도 내려 놓는다. 일하시는 분은 성령 하나님이시니까.. 

9. 내 생각, 내 선입견, 내 경험 다 내려놓고 예수님이 주인되시는 오늘 하루를 기대한다. 

10. 오늘도 샬롬

728x90
반응형
Posted by 신애친구™
728x90
반응형

눅 2:36-40 여전히 하나님이 일하신다

1. 안나는 결혼한 후 칠년 만에 과부가 되었다. 몇 살에 결혼한지 나오지 않지만 그는 꽤 오랜 세월을 과부로 홀로 지냈던 것 같다. 왜냐하면 그녀의 지금 나이가 84세가 되었기 때문이다.

2. 과부로 지내면서 그녀는 성전을 떠나지 않고 주야로 금식하고 기도함으로 섬겼다 (37절). 그러한 그녀가 아기 예수를 보고 “마침 이 때에” (38절) 그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3. 과부로 살아가면서 그녀의 소망은 성전을 섬기고, 메시아를 기다리는 것이었다. 남편도 아이도 없이 홀로 되어 과부로써 생계가 막막했던 그녀에게 유일한 소망은 하나님이었다. 그런데 그녀가 그렇게 소망하고 기다렸던 ‘그’를 만나게 된 것이다. 

4. 아마도 그녀는 ‘그’를 만난 기쁨을 가지고 시간이 흘러 죽었을 것이다. 그녀의 나이로 보아 ‘그’가 어떠한 삶을 살게 될지, ‘그’가 어떠한 죽음을 맞게 될지 그녀는 보지 못했을 것이다. 단지 그저 아기였던 ‘그’를 보았을 뿐이다. 

5. 이 짧은 찰나를 위해 그녀는 그녀의 인생을 걸어 기도하며 금식했던 것일까? 이처럼 우리의 삶에는 이해되지 않은 신비들이 있다. 때로는 낭비 같고, 때로는 효율적이지 못한 것 같은 순간들이 있다. 지금 다 이해되지 않고, 깨닫게 되지 못하더라도 하나님의 때가 있고, 하나님의 시기와 방법이 있다. 

6. ‘내게’ 합리적이지 않더라도, ‘내가’ 이해되지 않더라도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이뤄가신다. 때로는 내 삶이 안나와 같을까봐 두렵기도 하다. 뭔가가 이뤄지지도 못하고, 뭔가 제대로 시작도 못하고 허무하게 끝나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있다. 홀로 태국교회와의 협력을 위해 애쓰고 있는 내 삶에 열매가 없을까봐 두렵기도 하다. 이렇게 가다가 이게 틀어지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도 있다. 

7. 안나를 보며 나의 태도가 틀렸음을 발견한다. 나는 하나님이 이뤄가시는 일에 안나와 같이 동참하는 사람이다. 내가 무엇을 해서 하나님께 도움이 되는 그러한 인생이 아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참여함이 기쁨이 되어야지 내가 나의 일에 하나님을 참여 시켜서는 안된다.  

8. 내가 무엇인가를 하려는 욕심을 버려야 한다. 지금 내 삶이 효율성으로 가득 차야만 할 것 같은 욕심을 내려 놓아야 한다. 안나와 같이 내가 ‘찰나의 순간’에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일일지라도 내가 하나님의 일에 참여할 수 있음에 감사함으로 받아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지 내가 생각하는 효율성이나 낭비라고 여겨지는 것이 더 중요한 실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9. 오늘 내가 안나와 같은 삶이더라도 감사하고 기뻐하자. 하나님은 여전히 일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10. 오늘도 샬롬 

728x90
반응형
Posted by 신애친구™
728x90
반응형

눅 2:21-35 예수, “여호와가 구원하신다"

1. 요셉과 마리아는 태어난 아이의 이름을 ‘예수’라 지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천사를 통해 그렇게 하기를 지시하셨기 때문이다 (21절). 그리고 그 이름의 뜻은 ‘여호와가 구원하신다’이다.

2. 하지만 아기 예수를 위해 예언되는 내용은 결코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다렸던 정치적인 왕인 메시아가 아니었다. 그는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되기 위하여 세움을 받았다” (34절). 예수님은 처음부터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오신 인생이었다. 예수님은 죽기 위해 이 땅에 오셨고, 그의 죽으심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에 대해 살게 하셨다.

3. 예수님의 죽음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은 위로를 받고 (25절), 평안을 경험하게 (28절) 된다. 이 일은 온 세상을 구원하는 일이지만 엄마인 마리아에게는 자신에게 있어서 온 세상과 다름 없는 아이를 잃게 되는 것이다.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니(35절)의 표현은 그 마리아의 마음을 어떨지를 표현해주고 있다. 

4. 예수님을 이 땅에서 죽게 하시기 위해서 보내심은 우리 모두에게 복음이고, 기쁨의 소식이고,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이었다. 하지만 엄마인 마리아에게는 기쁨이지만, 또한 극심한 슬픔과 고통이었다. 

5. 마리아 뿐만 아니라 하나님 자신에게도 그러했을 것이다.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죄인들 모두에게 기쁜 소식을 전해주시기 위해서 아들(자기 자신)이 오셨지만 이 아들은 온 세상의 시작 이후 처음으로 하나님과의 분리를 경험하게 된다. 하나님이신 분이 우리를 위해 죽으셔야만 했다. 하나님 입장에서도 마리아와 같이 영혼들을 구원하는 기쁨이자 또한 극심한 슬픔과 고통이었을 것이다. 

6. 우리에게 복음은 너무나도 기쁜 소식이지만, 복음은 또한 무척이나 무겁고 힘든 소식이다. 참 왕이신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죽으신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복음이 기쁜 소식인 이유는 이 죽음이 끝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제 더 이상 극심한 슬픔과 고통은 없기 때문이다. 고전 15:53에는 “이 썩을 것이 반드시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라고 이야기 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에게 이제 썩지도 죽지도 않을 새로운 몸을 주시고 또한 새로운 하늘과 땅을 열어 주셨기 때문이다. 

7. 절대적으로 무능한 우리에게 복음은 먼저 찾아오셨다. 우리가 한 것이 없는데, 그 분이 와서 죽으셨다. 우리가 요청하지도 않았고, 해달라고 하지도 않았다. 그저 사랑이 오셨다. 극심한 슬픔과 고통만이 가득한 이 세상에 하나님 자신이 대속 제물이 되기 위해 오셨다. 그래서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오직 그 복음을 내 삶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8. 예수님의 이름과 같이 우리의 기여나 공로가 들어갈 자리는 없다. 오직 “여호와가 구원하신다” 나도 오직 그 복음을 믿는 것, 나를 위해 예수님이 오셔서 죽으셨다는 그 사실을 믿는 것 외에는 아무런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오늘도 삶에서 그 복음이 회복되기 원한다.

9. 입술로만, 머리로만 안다고 하지 않고, 그 복음에 내 삶의 실제가 되기를 원한다. “여호와가 구원하신다” 예수, 예수, 예수… 하나님의 그 고통이 오늘 나를 살리셨다. 그 사랑을, 그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내 삶으로 더 깊이 받아들이기 원한다. 

10. 오늘도 샬롬

728x90
반응형
Posted by 신애친구™
728x90
반응형

눅 1:67-80 '예수님의 재림을 준비하는 사람'이 나의 정체성이다. 

1. 무엇인가를 혹은 누군가를 위해 준비하는 일은 참으로 쉽지 않다. 아무런 스포트라이트도, 아무런 주목도 받지 못하고, 빈 들에 있는 느낌을 받아야 하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79절). 그리고 내가 결코 주인공도 아니기 때문이다. 

2. 사람이 가진 '자기 중심성'은 모든 것이 모든 일이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야만 하는데, 무엇인가를 혹은 누군가를 준비하는 일은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일이 아니라 그 일을, 혹은 그 사람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일에 내가 포함된 일이기 때문에 또한 마음이 쉽지 않을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이 일이, 혹은 그 사람이 등장하고 나면 나는 사라져야만 한다. 

3. 이러한 일에 세례 요한은 부르심을 받았다. 그의 역할은 ‘준비'이고,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나시면 ‘퇴장'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의 일은 반드시 필요한 일이었다. 그를 통해서 그리스도가 오셔야만 하기 때문이다. 

4. (나에게는) 서운하지만 혹은 (다른 사람들은) 그렇지 않을수도 있지만 모든 일이 나를 중심으로 돌아갈 필요는 없다. 모든 일에 내가 주인공일 필요도 없다. 이 모든 것은 ‘자기 중심성’ 즉 죄성의 결과일 뿐이다. 세상은 내가 아니라 하나님 중심으로 돌아갈 뿐 아니라 하나님이 주인공이시다. 

5. 세례 요한은 그것을 알았던 것 같다. 그는 아무런 불평없이 빈들에서 자신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나타날 때를 기다린다 (80절).

6. 하나님이 주인공이란 사실을 알고, 나는 그 분과 함께 걸어가는 피조물임을 깨달을 때 ‘자기 중심성’은 깨어질 수 있다. 세례 요한과 같이 빈 들에 있을 수도 있고, 그 분이 나타나시면 나는 퇴장할 수도 있다. 얼마나 많은 순간 하나님이 아니라 내가 주인공이 되려고 하는가? 내가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내가 주목을 받고 싶어 하는가? 우리는 모두 주의 다시오실 길을 예비하는 자들이 아닌가? 

7. 큰 아들 예준이의 이름을 지으면서 참 많은 고민을 했다. 이 아이의 인생이 어떻게 되었으면 하는 바램을 담고 싶었고, 이 아이가 정말로 그런 사람이 되기 원해서 예준이라고 지었다 (짓고 나니 무척이나 흔한 이름이 되어버렸지만 같은 뜻을 가진 이름은 아직 보지 못했다). “(예)수님의 재림을 (준)비하는 사람” 즉 두 번째 세례 요한이 되라고 지은 이름이다. 

8. 이 이름이 예준이에게만 적용되어야 하는 이름이 아님을 오늘 본문을 통해 다시 생각하게 된다. 나 또한 ‘예준’이가 되어야 한다. 나 또한 예수님의 자리에 앉는 자가 아니라 두 번째 세례 요한이 되어야 한다. 선교사로 살아가면서 얼마나 많은 순간 ‘예준’이 아니라 ‘예수’가 되려고 하는가? 얼마나 많은 순간 주인공이 되고자 하는가? 나는 아니다. 나를 버려야 한다. 배운데로 살아야 한다. Not I, but Christ. 

9. 예준이의 이름이 Not I, but Christ의 의미를 가진 것 처럼, 세례요한이 주인공을 소개하고 퇴장한 것 처럼… 오늘 내 이름도 Not I, but Christ가 되며, 나 또한 주인공의 나타나심을 준비하고 퇴장하는 이가 되는 삶을 살고 싶다. 

10. 끝없는 ‘자기 중심성’을 비워내고, 예수님을 사랑하는 자가 되고 싶다. ‘준비’하는 자로 ‘퇴장’하는 자로 내 정체성을 세워가고 싶다. 잘 안되지만…

11. 오늘도 샬롬

728x90
반응형
Posted by 신애친구™
728x90
반응형

눅 1:39-56 믿음은 하나님의 역사를 일으키는 촉매제

1. 39절은 “이 때에 마리아가 일어나 빨리 산골로 가서 유대 한 동네에 이르러” 로 시작되고 있다. 아마도 천사가 엘리사벳이 임신하지 못하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임신했다는 이야기를 한 것을 확인하고 싶어서 였을 것이다. 정말로 하나님의 말씀인지, 그 말씀대로 정말로 수태하지 못한 여인이 수태하게 된 것인지 매우 궁금했을 것이다. 

2. 마리아는 좀전에 막 천사를 만났고 성령으로 임신하게 될 것 이라고 들었다. 아직 마리아의 자궁에 예수님이 계신지 안계신지도 확실하지 않은 때였다. 하지만 엘리사벳과 뱃속의 아이 (세례 요한)는 격력하게 예수님의 어머니를 환영했다.  

3. 마리아는 이미 천사와의 만남을 통해서 자신이 예수님, 하나님의 아들의 어머니가 될 것임을 믿음으로 취한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이미 42절에 엘리사벳은 “여자 중에 네가 복이 있으며 네 태중의 아이도 복이 있도다” 라고 선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4. 어떻게 이런 일이 이루어졌는지 알 수 없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그녀의 믿음이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했다는 것이다. 엘리사벳은 마리아에 대해 이렇게 축복한다. “주께서 하신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지리라고 믿은 그 여자에게 복이 있도다” (45절). 

5. 믿음이 하나님의 일을 가능하게 한다. 원리도, 이유도, 상황도 잘 모르겠지만 하나님이 하신 말씀이니 이뤄질 것을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한다. 그녀는 정말 그에게 임한 말씀 (하나님의 약속)이 이뤄질 것을 믿었고, 그리고 그 믿음은 현실이 되었다. 

6. 말씀(약속)이 현실이 되게 하는 것은 나의 능력도 아니고, 나의 간절함도 아니다. 나의 어떠함이 아니라 오직 믿음이 약속이 현실이 되게 한다. 하나님의 약속과 말씀은 매일 우리에게 임한다. 묵상을 통해서, 설교를 통해서 매일 나의 마음에 약속이 임한다. 

7. 말씀은 이미 임했으니, 이 말씀이 현실이 되게 하는 능력은 오직 ‘믿음’에서만 나온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믿는 믿음, 하나님께서 (내 눈에 불가능해 보여도)이 일을 하실 수 있는 전능한 분이심을 믿는 믿음,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질 것을 믿는 믿음을 통해서 말이다. 

8.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고 싶지만 ‘믿음은 약한’ 나를 보게 된다. '무조건 믿습니다’가 아니라 하나님을 정확하게 알고, 그 분이 내 삶에 역사하실 수 있도록 나의 힘을 빼고, 그 분께 나의 삶의 주인의 자리를 내어 드리는 것이 믿음이다. 

9. 마리아의 믿음은 하나님이 역사하실 수 있도록, 하나님의 약속이 현실이 될 수 있도록 촉매제가 되었다. 나의 믿음은 어디에 있는가? 믿음보다 현실의 두려움을 더 붙들고 있지는 않은가? 하나님을 더 깊이 알고, 그 분만 더 깊이 신뢰하는 오늘 하루가 되자.

10. 오늘도 샬롬

728x90
반응형
Posted by 신애친구™
728x90
반응형

눅 1:26-38 터닝포인트는 상황의 변화가 아니라 임재다.  

1. 마리아는 남자를 알지 못했고, 그 시절에 처녀가 아이를 베는 것은 죽음에 이르는 일이었다. 그런데도 하나님의 천사는 그에게 나타나 이르기를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라고 말씀하고 있다. 

2. 은혜를 입었으면 오히려 문제가 해결되고, 어려운 일들이 해결되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래야 평안이 임하는 것은 아닐까? 그런데도 천사는 마리아에게 평안하라고 이야기 한다. 곧 죽을지도 모르는 처녀에게 평안하라고 말한다 (28절). 

3. 그녀가 평안할 수 있는 이유는 그녀에게 하나님의 아들이 잉태됨이 아니었다. 그녀의 문제가 해결됨도 아니었다. 그녀가 평안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그 다음에 나오는 파트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이기 때문이다 (28절). 

4. 상황이 나를 평안하게 하는 것이 아니다. 아무 문제가 없어서, 문제가 해결되어서 평안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평안할 수 있는 가장 큰 이유는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 

5. 임마누엘의 하나님이 함께 하시니 그제서야 우리는 평안할 수 있다. 임마누엘의 하나님이 함께 하시니 아무런 상황이 변하지 않았음에도 우리는 평안할 수 있다. 임마누엘의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에 ‘본래 임신하지 못한다고 알려진’ 엘리사벳도 아이를 가질 수 있다 (36절).

6. 결국은 상황이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느냐 하시지 않느냐의 문제이다. 결국은 내가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느냐 아니면 이미 임재하신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하느냐의 문제이다. 상황이 변하고 변하지 않고는 아무런 능력이 없다. 

7. 지난 송구영신 예배를 가정예배로 드릴 때 하나님께서 나와 우리 가족에게 주신 약속이 ‘임마누엘’의 하나님이었다. 하나님의 약속은 변하지 않는다. 약속은 신실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상황은 변하지 않는다. 오히려 악화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내가 붙잡아야 할 것은 오직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그 약속이다. 

8. 마리아는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경험했다. 더이상 처녀가 아이를 가지는 것은 그녀에게 두려움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녀는 마지막에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라고 고백한다. 인생의 변화는 상황의 변화가 아니다. 임재다. 임마누엘이다. 

9.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겠다고 한 그 약속을 붙든다. 그 임마누엘로 인해 오늘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내 상황 가운데서 평안을 누릴 수 있게 되길 원한다.  

10. 임마누엘, 오늘도 샬롬 

728x90
반응형
Posted by 신애친구™
728x90
반응형

눅 1:18-25 좋은 소식이 믿음의 영역의 삶으로 나타나기를… 

1. 좋은 소식이 임했다. 아이가 없던 가정에 그것도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을 가진 아이가 태어나기로 약속을 주셨다. 그런데 사가랴는 불신앙의 반응을 했다. “내가 이것을 어떻게 알리요 내가 늙고 아내도 나이가 많으니이다"

2. 그의 반응은 지극히 당연해 보였다. 누가 봐도 당연한 반응이지만 하나님은 그에게 믿음의 반응을 기대하셨던 것 같다. 그의 불신앙은 그에게 말을 하지 못하는 시간을 갖게 만들었다. 믿지 않는 그가 말을 하면 괜한 오해와 어려움이 생길 수 있으니까..

3. 나는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사람이라고 스스로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사가랴의 반응은 충분히 이해가 된다. 하지만 때로는 나의 반응이 사가랴와 같으면 안되고 나의 합리성과 이성을 뛰어 넘어 믿음의 영역으로 들어가야 하는 때가 분명히 있다. 

4. 복음이 바로 그렇다. 상식적이지 않고, 합리적이지 않고, 이성적이지 않다. 나의 본능은 다시금 자꾸 율법으로, 행위로 돌아가려고 한다. 

5. 예수님이 모든 것을 하셨고, 나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인데 자주 복음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은혜로 여기기 보다는 내가 쟁취해야 할 그 어떠한 것으로 여길 때가 많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나를 받아 주셨다는 사실을 잊고, 자꾸만 내가 무엇인가를 하려는 시도를 통해 하나님의 용납을 얻어내려고 하다 보니 그러한 태도들이 아이들에게도 흘러간다. 

6. 그들은 내 아이이기 때문에 언제나 용납받고, 사랑받을 수 있는 아이들인데, 나는 자꾸만 그들에게도 무엇인가 착한 행동, 부모의 말에 순종을 강요하며 (물론 가르쳐야 한다) 너희들이 이것들을 해야 아빠가 사랑할거야 라고 말하고 있는 듯 하다. 

7. 복음은 내 삶으로 흘러 들었는데, 나의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반응으로 아이들을 오히려 비복음적인 삶을 가르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좋은 소식이 아이들에게도 좋은 소식으로 전해져야 하는 것은 아닐까? 가정예배때 설교와 아빠의 양육방식이 다른 것을 아이들은 어떻게 이해하고 있을까? 

8. 결국은 내가 나의 합리성과 이성을 뛰어넘어 믿음의 영역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셔서 행하신 그 모든 은혜를 나도 은혜로 받아 들여야 한다. 치열하게 그 분에 대해 연구해야 하지만 또한 가장 값없는 은혜를 나 스스로에게 적용해야 한다. 

9. 나에게 임한 좋은 소식이 내 삶으로도 아이들에게 흘러가기를… 우리 형제들에게도 흘러가기를… 율법이 아니라 사랑을 강조하기를… 의무가 아니라 기쁨으로 섬길 수 있기를… 그 사랑이 감사해서 율법이 내게 의미를 가지게 되기를…

10. 오늘도 샬롬

728x90
반응형
Posted by 신애친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