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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 1:26-38 터닝포인트는 상황의 변화가 아니라 임재다.  

1. 마리아는 남자를 알지 못했고, 그 시절에 처녀가 아이를 베는 것은 죽음에 이르는 일이었다. 그런데도 하나님의 천사는 그에게 나타나 이르기를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라고 말씀하고 있다. 

2. 은혜를 입었으면 오히려 문제가 해결되고, 어려운 일들이 해결되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래야 평안이 임하는 것은 아닐까? 그런데도 천사는 마리아에게 평안하라고 이야기 한다. 곧 죽을지도 모르는 처녀에게 평안하라고 말한다 (28절). 

3. 그녀가 평안할 수 있는 이유는 그녀에게 하나님의 아들이 잉태됨이 아니었다. 그녀의 문제가 해결됨도 아니었다. 그녀가 평안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그 다음에 나오는 파트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이기 때문이다 (28절). 

4. 상황이 나를 평안하게 하는 것이 아니다. 아무 문제가 없어서, 문제가 해결되어서 평안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평안할 수 있는 가장 큰 이유는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 

5. 임마누엘의 하나님이 함께 하시니 그제서야 우리는 평안할 수 있다. 임마누엘의 하나님이 함께 하시니 아무런 상황이 변하지 않았음에도 우리는 평안할 수 있다. 임마누엘의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에 ‘본래 임신하지 못한다고 알려진’ 엘리사벳도 아이를 가질 수 있다 (36절).

6. 결국은 상황이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느냐 하시지 않느냐의 문제이다. 결국은 내가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느냐 아니면 이미 임재하신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하느냐의 문제이다. 상황이 변하고 변하지 않고는 아무런 능력이 없다. 

7. 지난 송구영신 예배를 가정예배로 드릴 때 하나님께서 나와 우리 가족에게 주신 약속이 ‘임마누엘’의 하나님이었다. 하나님의 약속은 변하지 않는다. 약속은 신실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상황은 변하지 않는다. 오히려 악화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내가 붙잡아야 할 것은 오직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그 약속이다. 

8. 마리아는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경험했다. 더이상 처녀가 아이를 가지는 것은 그녀에게 두려움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녀는 마지막에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라고 고백한다. 인생의 변화는 상황의 변화가 아니다. 임재다. 임마누엘이다. 

9.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겠다고 한 그 약속을 붙든다. 그 임마누엘로 인해 오늘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내 상황 가운데서 평안을 누릴 수 있게 되길 원한다.  

10. 임마누엘,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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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 1:18-25 좋은 소식이 믿음의 영역의 삶으로 나타나기를… 

1. 좋은 소식이 임했다. 아이가 없던 가정에 그것도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을 가진 아이가 태어나기로 약속을 주셨다. 그런데 사가랴는 불신앙의 반응을 했다. “내가 이것을 어떻게 알리요 내가 늙고 아내도 나이가 많으니이다"

2. 그의 반응은 지극히 당연해 보였다. 누가 봐도 당연한 반응이지만 하나님은 그에게 믿음의 반응을 기대하셨던 것 같다. 그의 불신앙은 그에게 말을 하지 못하는 시간을 갖게 만들었다. 믿지 않는 그가 말을 하면 괜한 오해와 어려움이 생길 수 있으니까..

3. 나는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사람이라고 스스로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사가랴의 반응은 충분히 이해가 된다. 하지만 때로는 나의 반응이 사가랴와 같으면 안되고 나의 합리성과 이성을 뛰어 넘어 믿음의 영역으로 들어가야 하는 때가 분명히 있다. 

4. 복음이 바로 그렇다. 상식적이지 않고, 합리적이지 않고, 이성적이지 않다. 나의 본능은 다시금 자꾸 율법으로, 행위로 돌아가려고 한다. 

5. 예수님이 모든 것을 하셨고, 나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인데 자주 복음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은혜로 여기기 보다는 내가 쟁취해야 할 그 어떠한 것으로 여길 때가 많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나를 받아 주셨다는 사실을 잊고, 자꾸만 내가 무엇인가를 하려는 시도를 통해 하나님의 용납을 얻어내려고 하다 보니 그러한 태도들이 아이들에게도 흘러간다. 

6. 그들은 내 아이이기 때문에 언제나 용납받고, 사랑받을 수 있는 아이들인데, 나는 자꾸만 그들에게도 무엇인가 착한 행동, 부모의 말에 순종을 강요하며 (물론 가르쳐야 한다) 너희들이 이것들을 해야 아빠가 사랑할거야 라고 말하고 있는 듯 하다. 

7. 복음은 내 삶으로 흘러 들었는데, 나의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반응으로 아이들을 오히려 비복음적인 삶을 가르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좋은 소식이 아이들에게도 좋은 소식으로 전해져야 하는 것은 아닐까? 가정예배때 설교와 아빠의 양육방식이 다른 것을 아이들은 어떻게 이해하고 있을까? 

8. 결국은 내가 나의 합리성과 이성을 뛰어넘어 믿음의 영역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셔서 행하신 그 모든 은혜를 나도 은혜로 받아 들여야 한다. 치열하게 그 분에 대해 연구해야 하지만 또한 가장 값없는 은혜를 나 스스로에게 적용해야 한다. 

9. 나에게 임한 좋은 소식이 내 삶으로도 아이들에게 흘러가기를… 우리 형제들에게도 흘러가기를… 율법이 아니라 사랑을 강조하기를… 의무가 아니라 기쁨으로 섬길 수 있기를… 그 사랑이 감사해서 율법이 내게 의미를 가지게 되기를…

10.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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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 1:1-17 누가의 말씀 연구의 태도

1. 믿음은 덮어놓고 믿어야 한다고 배웠던 것 같다. 이해가 안되도 믿어야 한다고… 그래도 믿는 자가 복 받는다고… 누군가의 가르침이었는지 혹은 분위기였는지…

2. 오늘 누가는 그가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복음에 대해 아주 자세히 살폈다고 말하고 있다.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나도… (3절)"

3. 그는 덮어놓고 믿지 않았다. 그는 그리스도의 생애에 대해서 아주 자세히 살폈다. 연구했다. 그것을 처음부터 자세히 살펴서 어떻게 된 것인지, 예수 그리스도 그는 누구인지를 자세히 살피고 그는 믿음을 가졌다. 그리고 그가 안 바를 전했다.

4. 전승되어 오는 여러가지 이야기들, 그리고 사람들의 입과 입을 통해서 구술되어 온 이야기들을 연구했고, 그리하여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은 쓰여졌다. 

5. 덮어놓고 믿는 믿음도 좋다. 하지만 그것보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철저히 연구하고, 그 분에 대해 배워가고, 알아가는 모습도 좋다. 그리고 그러한 일들이 다른 자 (오늘 본문에서는 데오빌로스)의 믿음을 세우는 데 도움을 주었다. 

6. 하나님을 알아가려는 마음, 그 분을 배워 가려는 열정, 그 분의 말씀을 연구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저 덮어놓고 믿으라고 말하는 것은 지금의 세대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7. 2020년이 밝았다. 나에게 이러한 누가의 열정이 있기를 원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고, 그것을 좀 더 쉽게 아이들에게 가족들에게 태국의 영혼들에게 전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 원한다. 좀 더 시간을 내고, 좀 더 열정을 가지자.

8. 말씀 묵상도 더욱 더 깊이 말씀 안으로 들어가자. 해치우는 느낌으로의 말씀 묵상이 아니라, 정말로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고, 성경의 큰 틀에서 본문을 이해하는 묵상으로 들어가길 원한다.

9.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는 것에 게으르지 말자. 2020년은 더욱 더 열정을 내어 하나님의 말씀을 향해 태국의 영혼들을 향해 나를 드릴 수 있게 되기를 원한다. 

10. 새로운 한해 하나님의 은혜가 있으시길.. 그리고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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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142:1-7 오직 그 분과 걸어가는 2020년이 되길…

1. 오늘 다윗은 굴에 있다. 시편의 표제가 이를 설명하고 있다. 아마도 그가 사울 왕을 피해 아둘람 굴에 있을 때로 생각할 수 있겠다. 충성스러웠던 신하인 다윗, 그가 사울왕의 시기와 질투로 인해 역적이 되었고, 쫓겨 쫓겨 아둘람 굴까지 갔다.

2. 그의 인생에 무엇이 기쁘고 무슨 선함이이 보였겠는가? 오늘 본문처럼 원통하고, 답답했을 것이다. 언제 올지 모르는 사울의 추격과 다른 사람들의 밀고의 두려움에 사로잡혔을 것이다. 

3. 그런 다윗은 여전히 하나님께 부르짖고 있다. “주는 나의 피난처시요 살아 있는 사람들의 땅에서 나의 분깃이시라 (5절)” 끝도 없는 절망 속에서도 의지할 것은 하나님 한 분이시다.

4. 내 인생이 내 마음대로 되지 않고, 내가 원하는 것들이 보이지 않더라도 내가 의지할 것은 하나님 한 분이다. 나는 비천하여도 (6절) 완전하신 하나님께 나를 의탁하는 것이 믿음이고, 신앙이다.

5. 2019년을 돌아볼 때, 내 마음대로 된 것이 정말 거의 없었다는 생각이 든다. 요엘이의 상황, 아버지의 암의 전이, 사역의 방향 등등 무엇 하나도 내가 컨트롤 할 수 없고, 내 힘으로, 내 마음으로 불가능하고 답답한 일들 뿐이었다. 

6. 하지만 2019년을 마무리 하는 지금 내가 경험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선하신 하나님을 의지 하였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일을 하셨고, 여전히 우리 가정은 그 분의 손 안에서 그 분의 길로 걸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7. 우리의 할 일은 그 분을 신뢰하고, 그 분 안에 거하고, 그 분께 부르짖는 일 뿐이다. 왜냐하면 그 분이 나를 7절 말씀처럼 “주께서 나에게 갚아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8. 2019년은 인내의 해였다. 2020년은 또 어떤 한 해로 우리에게 다가올지 알 수 없다. 하지만 한 해의 마지막 순간에 서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감사와 하나님이 하셨다는 고백 말고는 할 수 있는게 없음을 배우며, 2020년에도 또한 두렵지만 그 분과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가기 원한다. 

9. 하나님은 나와 함께 하신다. 하나님은 내 기도를 들으신다. 하나님은 여전히 하나님의 일을 하신다. 하나님과 함께 걸어온 2019년 처럼 함께 걸어가는 2020년이 되자. 

10. 한 해 동안 하나님이 저희 가정과 걸어주신 것 처럼 저희 가정과 함께 걸어 주셔서 정말로 감사했습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2020년이 하나님과의 더 깊은 동행이 있는 한 해가 되길 기도합니다.

11.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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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Thinking)/Meditation2019. 12. 24. 1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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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삼 1:9-15 디오드레베 같은 나도…

1. 으뜸이 되기를 좋아하는 디오드레베 (9절), 사람으로부터 진리로부터 증거를 받은 데메드리오 (12절). 누가 봐도 데메드리오가 옳다. 데메드리오 같은 사람이 필요하다. 데메드리오 같이 다른 사람들로부터 증거를 받는 자가 되어야 한다.

2. 2019년 한 해를 돌아보면서 내 삶은 어떠했을지를 돌아보니 나는 아마도 데메드리오 같은 자가 아니라 오히려 디오드레베 같은 사람이 아니었을까? 라는 생각이 더 깊이 든다. 

3. 내 안에 아닌척 하며, 겸손한척 하며, 성실한척 하며 으뜸이 되고 싶어했던 나를 발견하게 되니 부끄럽고, 또 부끄럽다. 입술로는 글로는 보이는 자리에서는 얼마든지 데메드리오 같이 살았지만, 행동으로는 말로는 보이지 않는 자리에서는 디오드레베 같은 자였던 사람이 나였다. (지금도 마음 속에서는 부인하고 싶다.)

4. 복음은 언제나 우리의 연약함을 드러낸다. 그 연약함을 드러내는 것은 수치를 주기 위함이 아니고, 우리를 정죄하기 위함도 아니다. 우리에게 어떻게 살아야 한다고 이것은 맞고 이것은 틀렸다고 말하지도 않는다 (물론 율법은 어느정도 그런 기능을 한다).

5. 복음이 말하는 것은 우리가 디오드레베 같은 자 라는 것이다. 우리는 선에 무능하고, 악에 유능한 자다. 하나님보다 언제나 내가 더 으뜸이 되기를 원하는 자다. 하지만, 그러한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우리가 용납 받았음을 말한다.   

6. 한 해를 돌아보며 내 삶이 디오드레베 같음을 깨닫고 다시 은혜 앞으로 나아간다. 나의 교만한 마음과 완악한 마음이 그리스도의 용납하심 앞에 다시 열리길..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다시 회복되길 원한다. 

7. 내가 결정한다고, 내가 결심한다고 디오드레베가 데메드리오가 될 수가 없다. 오직 은혜가 필요하다. 팀 켈러 센터처치 99페이지에 나오는 내용이다. “복음의 능력은 두 가지로 다가온다. 첫째, “나는 내가 감히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한 죄인이고 허물 많은 존재입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이다. 둘째, “나는 내가 감히 바랐던 것보다 더 많은 사랑을 받고 용납되었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8. 내가 죄인인 것이 더 깊이 깨달아지는 (사실 다른 어떤 사람과 비교하며 아니라고 생각하고 싶을 때가 많다) 그리고 내가 훨씬 더 큰 사랑과 용납을 받았음을 깨닫고, 더 그 사랑 앞에서 겸손하게 서서 2020년을 돌아보며 내가 데메드리오 같은 삶을 살았음을 고백하고 싶다. (가능할까 싶지만.. 희망사항이니..)

9. 복음을 더 알고, 더 배우고, 더 느끼고, 복음으로 진정 삶을 살아가고 싶다. 선교사역도 이 복음이 기초가 되어 그들에게 사랑과 용납을 선포하고 싶다.

10.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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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Thinking)/Meditation2019. 12. 20. 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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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일 5:1-12 복음을 통해 세상을 이기자

1. 믿음이 정말 세상을 이길 수 있을까? 오늘 본문은 자신있게 선포한다.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2. 그런데 자신이 쉽게 생기지 않는 것은 왜일까? 믿음이 부족해서일까? 아니면 내가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서일까? 

3. 그 어느 것이든 나의 착각임을 알게 되었다. 내 믿음의 부족이든, 내가 세상을 보는 눈의 부족이든… 나는 자꾸만 내 자신을 보고 있다. 내 자신을 보고 있으니 당연히 자신이 없고, 당연히 불가능해 보인다.

4. 세상은 내가 내 힘으로, 내 믿음으로, 내 생각으로 이기는 것이 아니다. 세상은 예수님이 이기셨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그 악의 권세를 밟아 이기셨고, 사망을 이기셨다. 

5. 예수님이 이기시는 것이지, 내가 이기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이 승리하신 것이지, 내가 승리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나의 믿음과 생각을 나에게서 온전히 주님께로, 예수님께로 옮겨야만 한다. 그것이 승리의 비결이다. 

6. 내 시선을 생각을 예수님께로 옮기는 것은 매우 어렵다. ‘나 중심성’을 무너뜨려야 하기 때문이다. 복음은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내가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니라 2,000년 전에 예수님께서 이미 하신 일을 믿는 것이 복음이라고.. 이미 내 삶에 일어난 일을 믿는 것, 이미 능력으로 나타난 일을 믿는 것이 내가 할 일이지, 내 힘으로 승리하려고 아둥바둥 하는 것이 내가 할 일이 아니다.

7. 예수님이 승리하셨다. 그것도 가장 연약하고, 가장 고통스러운 십자가의 방법으로… 하나님이신 그 분이 죽음을 경험하시면서까지 승리하셨다. 

8. 내가 할 일은 믿는 것, 그 승리하신 주님께 기대어 주님의 일하심을 내 삶에서 보는 것,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를 내 삶에서 경험하는 것이다. 내가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not I, but Christ). 자꾸만 다시 나에게도 돌아오는 시선을 물리치고, 오직 이미 승리하신 주님만 바라봄으로 오늘도 세상을 이기기 원한다. 예수께서 이미 이기셨다.

9.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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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Thinking)/Meditation2019. 12. 19. 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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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일 4:11-21 복음과 삶의 괴리감

1. 사랑에서 사랑이 흘러 나온다. 사랑이 없었다면 사랑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사랑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살았을 것이다. 엄마가 아이를 잉태하자 마자 느끼게 되는 그 모성애도 없었을 것이다. 사랑이신 하나님이 먼저 존재하셨다. 그리고 그 사랑이 우리에게 먼저 흘러왔다.

2. 사랑을 받아야 사랑을 할 수 있다. 사랑이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해 주셨지만 우리의 사랑은 언제나 불완전하고, 타인을 사랑하기 보다는 주로 나 자신을 사랑하게 된다. 하지만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11절

3. 그저 사랑 받았으니 사랑하라고 조언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사랑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고 마땅한 일이다. 사랑하지 않으면 오히려 이상한 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4. 우리의 삶을 힘들게 만드는 감정 중 한 가지는 ‘두려움’일 것이다. 무엇을 하든 어디로 가든 항상 이 두려움에 휩싸인다. 이 길이 맞는지 두렵고, 잘 가고 있는지 두렵고… 

5. 오늘 본문에서는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18절) 라고 말씀하고 있다. 사랑이 우리에게 찾아오셨는데 그 사랑안에 우리가 거하게 되면 두려움이 없다. 우리를 늘 힘들고 어렵게 만드는 그 두려움을 우리는 이겨낼 수 있게 된다. 우리가 그 사랑 안에 거한다면…

6. 결국 내가 하는게 뭐가 있나 싶을정도로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은 언제나 일방적이고, 그 분이 하셨다. 사랑이 나타나셨고, 그 사랑이 우리에게 왔고, 우리는 그 사랑을 받았고, 우리가 그 사랑 안에서 두려움을 내어 쫓을 수 있다. 

7.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받은 사랑으로 그 분을 사랑하는 것, 받은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게 참 힘들다. 하고 싶지 않다. 나도 똑같은 사람이면서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평가하고 정죄한다. 

8. 내가 진정한 사랑 안에 거하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진정한 사랑을 받았지만 그 사랑을 누리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여전히 나는 복음과는 멀리 떨어져 내가 원하는 방식과 내가 원하는 수준으로 살고 있기 때문이다.

9. 복음의 수준으로 내 삶이 올라가기 원한다. 그 사랑이 나에게 오셨는데 나는 그 사랑과 관계 없이 살아가지 않기를 원한다. 최근 여러가지 일을 경험하면서 남을 사랑한다는 것이 정말 쉽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다. 특별히 나에게 뭔가 호의적으로 대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말이다. 그런데 복음을 받은 자의 삶은 그게 아니다. 

10. 아직도 머리로는 알겠는데 마음으로는 잘 안된다. 그렇게 오늘도 하루를 머리와 마음이 갈등하며 하루를 시작한다. 시간이 지나고 나면 점점 더 머리와 마음이 일치되기를… 더 복음이 머리에서 마음으로 내려오기를…

11.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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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19. 12. 18. 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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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일 4:1-10 사랑이 나타나셨다.

1.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8절). 그 사랑은 홀로 있지 않으셨고, 완벽한 삼위간의 사랑이었다. 결코 우리가 필요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 사랑이 우리에게 나타나셨다 (9절).

2. 그 사랑이 나타남은 그 삼위의 하나님 중 아들 하나님으로 나타나셨다. 그 완벽한 사랑의 삼위간의 사랑의 고리를 깨뜨려 이 땅에 오실만큼 우리를 사랑하셨다. 우리를 살리기 위해… (9절)

3. 하나님 입장에서 그 사랑의 뜨거운 관계보다 우리가 더 중요한 어떤 이유가 있었을까? 아무것도 없었을 것이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시 8:4

4. 사랑 그 자체이신 분이 사랑이 없고, 죄로 가득찬 우리의 삶으로 오셨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았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다 (10절). 그리하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해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다 (10절).

5. 세상에 자신의 아들을 제물로 보낼 사람이 누가 있는가? 없다. 내가 아는 정상적인 부모라면 절대로 그럴 수 없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하셨다. 가장 큰 사랑이었다. 

6. 그 사랑이 나에게 나타나셨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셔서 아무런 유익도 얻을 수 없는 나에게… 무엇인가를 얻기 위함이 아니라 진짜 사랑으로 나타나셨다. 

7. 이렇게 큰 사랑을 받은 나는 어떠한 사랑을 하고 있는가? 사랑은 하고 있는가? 아내를 아이들을 사랑하고 있는가? 태국의 우리 형제, 자매들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는가? 사랑은 내게 오셨는데, 내 안에 그 사랑이 충만한가? 

8. 복음이 먼저 내게로 오셨다. 내가 복음을 받은 자로써 사랑을 받은 자로써 사랑하지 않는다면 세상은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 (8절). 사랑은 힘들다. 사랑은 아프다. 사랑은 때로는 자신의 아들을 내어주어야 하는 것 처럼 나 자신을 포기하고, 그들의 입장에 서야 한다. 사랑하지 않는 것이 더 쉬울 때가 많다. 그렇지만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복음을 들은 자의 의무이다. 

9. 오늘도 사랑을 품는다. 내 기준, 내 생각 보다 내게 온 복음으로 나의 행동이 결정되기 원한다.

10. 사랑합니다.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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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19. 12. 16. 1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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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일 2:28-3:10 The Gospel changes everything

1.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 우리가 그러하도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라” 요일 2:1

2. 받은 사랑이 얼마나 큰 사랑인지를 알아야 한다.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시기 위해서 얼마나 큰 댓가를 치루셨는지 알아야 한다. 하나님이 치루신 대가, 그 처절한 대가를 우리는 ‘복음’이라 부른다. 우리 입장에서는 ‘복음’이지만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그리 좋은 소식이 아니다.

3. 하지만 하나님은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셨고, 크기를 가늠할 수 없는 사랑 그 자체이신 하나님께서 오셨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제 다른 관점으로 세상을 살아갈 수 있게 된다.

4. 1절 후반부에 보면 세상은 우리를 모른다. 우리는 세상에서 무명한 자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이름을 알아주시고, 우리를 살리기 위해 자신의 전부를 내어 놓으신 하나님의 사랑으로 주 안에서 유명한 자가 되었다.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하는 것은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 큰 사랑으로 주 안에서 유명한 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5. 고후 6:8-10절까지 요즈음 가장 많이 듣는 찬양 중 한 곡의 가사와 오늘 본문이 매치가 된다.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자로다"

6. 하나님의 그 큰 사랑은 우리의 인생을 바꾸었다. 세상이 보기에 별 볼일 없고, 중요하지 않고, 없어 보이고, 무능해 보이고, 죽은 것 같은 우리들이 복음으로 인해 살아났고, 우리는 유명한 자가 되었고, 살아있고, 기뻐하고, 부요하고, 모든 것(그리스도)을 가진 자가 되었다. 

7. 참으로 복음 안에 있는 자의 모습이고, 참 성도의 모습이다. 이 모든 것은 우리가 복음을 듣고, 복음을 깨닫고 복음 안에 거할 때 가능하다. 결국 복음이 우리의 삶과 생각을 바꾸는 것이다. (The Gospel changes everything)

8. 오늘도 내 안에 하나님이 치루신 이 큰 댓가에 대해 깊은 감사와 사랑이 있어야겠다. 그리하여 내가 복음에 합당한 삶, 성도에 합당한 삶을 살아내고 싶다. 세상적으로 있어 보이고, 멋있어 보이고, 가진 것 같아 보이고, 잘 나가 보이는 그런 삶이 아니라 근심하나 기뻐하고, 가난하나 다른 이들을 부요케 하는 그런 삶 말이다. 더욱 더 그 사랑과 그 복음이 내 안에서 체화되어지기 원한다. 그 사랑과 그 은혜가 내 삶을 변화시켜나가길 원한다. 작은 말에서 생각에서도 복음이 나타나기 원한다.

9.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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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Thinking)/Meditation2019. 12. 12. 0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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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34:1-12 지금 그리고 여기 (Here and Now)

1. 한 세대는 가고 새로운 세대가 온다. 모세는 이제 광야에서 죽었고 (1-6절), 새로운 지도자 여호수아가 세워졌다 (7-9절). 사람은 죽고, 사람은 떠나가지만 그 자리에 남는 것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약속이었다.

2. 모세는 모세의 역할이 있었고, 여호수아는 여호수아의 역할이 있다. 그것을 굳이 비교하거나 우열을 정할 필요가 없다.

3. 모세는 모세의 역할을 마치고 가는 것이고, 여호수아는 여호수아의 역할을 마치고 가는 것이다. 모든 것을 다할 필요도 없고, 모든 것을 다 할 수도 없다. 내게 맡겨진 일을 하고, 내게 주어진 소명을 따라 살다가 죽는 것이 우리의 인간의 인생이다. 

4. 그렇지만 그 자리에 남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약속은 계속해서 이어진다.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그리고 이방인이었던 우리에게 그리고 아직도 복음을 거절하거나 듣지 않고 있는 사람들에게 계속해서 흘러간다. 

5. 나에게 주어지는 질문은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결국은 오늘이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거나 우열을 가릴게 아니라 나에게 주어진 역할과 소명에 오늘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내가 만나야 할 사람들, 내가 전해야 할 사람들, 내가 관계를 쌓아야 할 사람들에 대해 나의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이다. 

6. 어차피 내가 다 하는 것이 아니기에, 하나님의 일이기에, 나는 왔다가 가는 자이기에 주시는 은혜 안에서 그저 오늘을 살아가는 것이다.

7. 오늘 위대했던 한 사람,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불렸던 모세가 그의 인생을 마무리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갔다. 그리고 또 새로운 하나님의 사람 여호수아가 세워졌다. 하나님의 일은 계속 된다. 하나님은 멈추지 않으신다. 내가 아니라도 다른 사람을 세워서 얼마든지 하나님의 일을 하실 수 있는 분이시다. 그 분이 부족하디 부족한 나를 동역자로 불러주셨다. 

8. 그래서 오늘을 다시 말씀 앞에, 하나님 앞에 선다. 시간과 세월을 낭비 하지 않으며 오늘 이 순간 (here and now) 을 주어진 역할과 소명안에서 살아가기 원한다. 

9.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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