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Thinking)/Meditation2019. 9. 30. 1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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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 4:10-23 내 삶의 주인이 되기를 내려놓을 때 찾아오는 평안

1. 말씀을 묵상하기 위함은 순종하기 위함이다. 그렇게 전제를 두고 시작하는데도 말씀이 다가오면 아플 때가 있다. 그 말씀 때문에 짜증이 솓구칠 때가 있다. 바로 오늘이 그러하다. 첫 번째 말씀을 읽는 순간에 확 짜증이 올라왔다. 태국에서 중고로 산 차에 문제가 생겨서 일반 수리점에 갔더니 여기서 안된다고 정식 수리점에 가라고 하였고, 정식 수리점에 가서 맡기니 일단 4시에 어디가 문제인지 알려주겠다고 하며 센서 문제일 경우 비용이 많이 들것이라고 말을 한 것이다. 

2. 애써 태연한 척 하며 집으로 돌아와 말씀을 피니 바로 이 말씀이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빌4:11-12” 

3. 너무 잘 아는 말씀이라 더 짜증이 났다. '주님.. 차가 고장이 안 나게 하셨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요? 굳이 차는 고장이 나서 맡기고 나니 저에게 자족하라는 말씀을 주는 것이 도대체 왜 인가요?' 라는 질문과 불만이 터져나왔다. 여전히 나는 19절에 사도 바울의 고백이 내 고백이 아니었다.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하나님이 나의 인생에 그토록 자주 (선교사의 삶은 사실 매달 채우심이 없으면 살 수 없다) 필요한 것을 아시고 채우셨음에도 이번의 나의 반응은 분냄이었다. 

4. 여전히 그 분을 나를 사랑하시는 나의 아버지라고 믿는 믿음보다 내가 바라는대로 상황이 전개되지 않는 것에 대한 분노 즉, 내가 내 삶의 주인이 되어 내가 원하는 대로, 내가 원하는 타이밍에, 내가 원하는 일이 안되는 것에 대한 분노가 더 크게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5. 사도 바울의 인생을 보라. 그가 나 처럼 매달 누군가로부터 후원을 받으며, 그 후원이 국제송금이 되어 오는 그런 시스템 안에 살고 있었던가? 그렇지 않다. 그 시절은 편지만 보내도 도착에만 몇 달이 걸릴지 알 수 없는 시대였다. 그러한 시대의 바울도 여전히 하나님께서 그 풍성한대로 채우실 것을 고백하고 있다. 

6. 중요한 것은 시스템이 아니라, 상황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을 어떤 아버지로 믿고 신뢰하고 있는가의 여부이다. 하나님 자리에 내가 앉아서 결코 누릴 수 없는 것은 바로 ‘자족을 배우는 일’이다. 이 자족을 배워야 13절 말씀처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라고 고백하게 되는 것이다. 

7. 13절 말씀에서 더 중요한 것은 후반부의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고백이 아니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란 고백이다. 그 ‘안에서’만 우리는 할 수 있다. 반대로 이야기 하면 하나님 밖에서는 우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8. 하나님이 내 삶을 이끌어 가시는게 가장 BEST 임을 고백하면서도 동시에 분냄을 낼 수 있는 나는 도대체 어떠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인가? 오늘도 나의 믿음의 연약함을 깨닫는다. 내 맘대로 되지 않는 일 속에서 누가 참된 하나님이신지에 대해서도 배운다. 깨달음과 배움을 통해서 조금이라도 성숙한 믿음을 가질 수 있게 되기 원한다. 

9. 큐티를 하고 나니 마음이 가볍다. 이따가 비용을 들었을 때에도 이 마음이 유지될 수 있으면 좋겠다. 평안이 있기를 원한다. 어차피 하나님이 하실 일이시다. 하나님이 주인이시다.

10.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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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19. 9. 29.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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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 4:1-9 기도해야 지킬 수 있다.

 

1. 빌립보서의 말씀은 어느 한 개인에게 주는 것이 아니라 빌립보 교회의 모든 공동체에게 주는 말씀이었다. 공동체에 대한 권면은 '같이 주 안에 서라 (1절)' 이고, 특별히 유오디아와 순두게에게는 특별한 메시지를 주는데 그것은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 (2절)' 였다.

 

2. 그들 사이에 어떠한 갈등이 있었음에 분명하고, 바울은 그에 대한 해결책으로 두 사람의 잘잘못을 가리는 것이 아니라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로'라는 해결책을 주었다. 

 

3. 그리스도 안에서 같은 마음을 우리가 무엇을 가질 수 있을까? 아마도 예수님께서 가르치시신 가장 큰 계명일 수 있겠다. 

 

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막 12:29-31

 

5.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의 계명을 우리가 같이 품어야 서로를 사랑하고, 이해하고, 문제에서 해결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쉽지 않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도 참으로 어렵다. 그런데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도 또한 참으로 어렵다. 이웃이 아니라 소리지르며 짜증내는 내 자식도 사랑하기가 어렵다. 우리는 어떻게 사랑할 수 있을까?

 

6. 사도 바울은 이 해답을 6-7절에서 주고 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7. 우리가 사랑할 수 없음을 염려하지 않고 기도하라는 것이다. 기도할 때 그 평강이, 그 은혜가 위에서 임해서 나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게 되는 것이다. 내 힘으로 내 마음과 생각을 지킬 수 없다. 순식간에 무너지고, 순식간에 넘어지는게 내 마음과 생각이다. 오직 내가 기도함으로 하나님께 속해 있을 때에만 내 마음과 생각을 지킬 수 있는 것이다.

 

8. 결국 기도해야 한다. 결국 주 안에서 서려거든 혹은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려거든, 다른 사람을 사랑하려거든... 내 힘으로 안 된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기도로 주님 앞에 나아가야 한다. 우리의 기도를 통해서 주님이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킬 수 있도록 도우실 것이다. 

 

9. 하나님의 평강이 오늘도 내 삶에, 내 마음과 생각에 임하시도록... 기도하자.

 

10.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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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Thinking)/Meditation2019. 9. 27. 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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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 3:1-14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계속해서 달려가는 삶

1. 사도 바울 그는 율법으로는 거의 완벽한 사람이었다. 그 스스로의 고백이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였다고 고백한다 (5-6절). 하지만 그에게 있는 그 모든 고상하고 아름다워 보였던 그 모든 것들을 그는 배설물로 여기기로 결정했다 (7-8절)

2. 왜냐하면 더 고상하고 더 값진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마치 밭에서 보물을 찾은 사람이 그 보물을 얻기 위해 자신의 모든 가진 것을 팔아 그 밭을 산 것 처럼 말이다. 

3. 그는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기 위해서 (7-8절) 이전에 자신에게 가장 중요했던 율법, 이스라엘 백성이라는 정체성 그 모든 것을 버리기로 결정하였다. 

4. 그가 그렇게 버릴 수 있었던 이유는 그리스도가 그 어떤 것 보다도 더 값진 것임을 알았기 때문이고, 또 자신의 의가 율법을 완벽하게 지키는 그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서 나기 때문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5. 가장 귀한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발견한 사람, 자신이 행한 의로 결코 의롭게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만이 다른 것들을 포기할 수 있다. 이 땅에서 귀해 보이는 너무나도 필수적으로 필요한 것들로 보여지는 돈, 시간, 일, 하고 싶은 일, 갖고 싶은 것 들을 포기할 수 있다. 

6. 그러면 나는 그것이 발견되었고, 내가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사실을 진정으로 마음깊이 이해하고 있는가? Yes 라고 대답하기 쉽지 않다. 여전히 내 안에서 포기하지 못하고, 놓지 못하는 것들이 너무 많다는 것을 스스로 잘 알기 때문이다. 이런 나를 보면 참 한심하기도 하고, 선교사로 살아가는 사람이 이래도 되는가? 에 대한 질문이 스스로에게 들기도 한다. 

7. 하지만 이것이 단회적인 결단이 아니라 평생을 싸우고, 붙들어야 할 진리임을 또한 사도 바울의 고백을 통해 위로를 얻는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사도 바울 그도 평생을 그렇게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갔다. 

8. 물론 그의 삶을 나의 삶에 일대일로 매칭시키는 그런 무모한 짓은 하지 않으련다. 하지만 그 또한 끝까지 자신의 푯대를 향해 쉬지 않고 부르심의 상을 위해 달려갔다는 것을 본문을 통해 알 수 있다 (14절). 그래서 나도 오늘도 부족하지만 그 푯대를 위해 달린다. 오늘 아침 잠시 결단하고 눈물 한 움큼 쏟아내고 은혜 받았다고 만족하는 그런 삶이 아니라 끝나는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계속해서 달려가기 원한다. 그 길의 마지막에는 우리 주님이 계시기에 힘들고 외로워도 계속 달리기 원한다. 

9. 계속 달릴 수 있는 추진력은 결국 복음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계속해서 새롭게 내 안에서 발견해야, 그리고 그 분의 마음과 생각이 내 안에서 살아 움직여야, 그리고 가장 추악한 나를 그저 받아주신 그 분의 사랑이 내 안에 충만해야 달려갈 수 있다. 그리고 내 옆에 있는 사람들을 또한 일으켜 세울 수 있다. 

10. 결국 복음이고, 결국 예수 그리스도이다. 오늘도 내 안에 이 진리가 충만하길..

11.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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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Thinking)/Meditation2019. 9. 26. 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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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 2:12-30 좋은 사람이 되려는 욕구를 내려놓기 

1.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 아주 상식적인 말이다. 다른 사람과 굳이 원망과 시비가 생길 정도로 문제를 일으킬 필요가 없다. 특히나 우리 믿는 자라면 말이다. 그들이 우리의 행동과 말을 보고 있기에 더욱 더 그렇게 해야 한다. 하지만 이것이 원망과 시비를 받지 않게 하기 위해 옳은 것, 거룩한 것을 포기하라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2. 왜냐하면 15절에서 이를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라고 말씀하고 있다. 우리의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는 것은 결국 세상 가운데 흠 없는 하나님의 자녀의 빛을 드러내기 위함이다. 

3. 어떻게 사는 것이 흠이 없고, 순전한 것이고, 어떻게 사는 것이 원망과 시비가 없는 것일까? 살아보니 사람들과의 관계는 항상 상대적이고, 각자 그 사람의 사정이 있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 사람의 태도나 이야기에 실컷 분노하고 나서 들어보면 그 사람은 그 사람의 사정이 (내 입장에서는 다 이해가 되지 않더라도) 있더란 것이다.

4. 우리는 사람의 상대성에 맞춰줄 수 없다. 그 사람들의 상황에 맞출 수도 없다. 우리는 오직 빛의 자녀로 살아가는 것에 우리의 삶의 기준을 맞춰야 한다. 

5.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는 말을 나는 사도 바울의 의도와 조금 다르게 들은 것이 아닌가? 원망과 시비가 없다는 말을 다른 사람에게 “욕먹지 않아야 한다, 혹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싫은 소리를 듣지 말아야 한다” 정도로 내가 이해한 것은 아닌가? 내가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이라고 이해한 것은 아닌가? 

6. 그리스도의 가치관, 빛의 자녀의 가치관으로 살지 않는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려면 우리가 욕먹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들은 수시로 말을 바꾸고, 수시로 우리에 대해 비방하고, 수시로 우리에 대해 원망과 시비를 건다. 내가 생각하는 좋은 사람이 나는 못될 수도 있다. 

7. 오히려 사도 바울의 저 말은 우리가 ‘욕 먹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원망과 시비가 생길 때 욕을 먹을 지라도 빛의 자녀답게 행동하라는 것'이 아닐까? 거룩을 포기하지 말고, 옳은 일을 포기 하지 말고, 빛의 자녀로써 그 빛을 드러내기 위해 합당하게 살라는 것이 아닐까? 

8. 욕먹는 것을 두려워하는 내 마음 뒤에는 내가 좋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욕구가 있다. 내가 좋은 사람이라는 칭찬을 타인들로부터 받고자 하는 나의 욕구가 옳은 일, 거룩한 일을 하는 것을 두렵게 만든다. 원망과 시비가 없다는 것은 욕먹지 않는 것이 아님을 잊지 말고, 빛의 자녀로 그 빛을 드러내는 것에 나의 삶의 기준을 맞추자.

9. 두렵다. 좋은 사람이 되고 싶은 욕구를 포기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하나님 나라를 욕망하자.

10.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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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Thinking)/Meditation2019. 9. 25. 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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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 2:5-11 하나님만 쳐다보며 하나님만 의지하기

1.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할 수 없는 것을 하라고 권하고 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2. 하루에도 수만번 마음이 왔다 갔다 하는 것을 느낀다. 아이들에게도 좋은 아빠가 되고자 수없이 다짐하고 결심하지만 내 결심은 그리 오래가지 못한다. 사실 예수의 마음이 상상조차도 안된다. 어떻게 그러실 수 있었을까? 어떻게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할 수 있으셨을까?

3. 아무리 생각하고 헤아려 보려고 해도 잘 헤아려지지 않는다. 신비의 영역이다. 하나님의 겸손과 하나님의 낮아지심… 결코 그러실 필요가 없는 분의 자기 비움… 그것의 마지막은 십자가의 죽으심…

4. 그 분이 사랑 그 자체이심을 이해하기 전까지는 그 사랑 자체라는 것이 얼마나 크고 위대한 하나님의 성품인지를 이해하기 전까지는 여전히 어렵고 이해하기 힘들다. 하나님이 사랑이시기 때문에… 그 사랑이 우리에게 오셨기 때문에… 우리는 사랑이 뭔지 알게 된 것이다. 

5. 결국은 사랑이다. 그 사랑을 내 마음에 품어야 한다. 그 사랑 자체이신 분이 내 안에 충만해야 한다. 그 사랑이 내 안에 충만하여 흘러 넘칠 때에야만 낮아지고, 겸손해질 수 있다. 결국은 그 분과의 동행이다. 

6. 사랑과의 동행.. 내가 그 안에 있고, 그가 내 안에 있을 때에야만 우리 자신이 죽기까지 복종할 수 있는 것이다. 

7. 하지만 답답한 것은 묵상해도 잘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순간 순간 내 혈기가 내 생각이 치고 올라온다. 사랑이 가득차기 보다는 내 생각이, 충동적인 분노가 차오른다. 묵상을 하다가 답답한 마음이 가득찬다. 내가 어찌 이 마음을 품을 수 있을까? 사도 바울은 왜 불가능한 것을 하라고 할까? 

8. 그래 인정하자.  나는 못한다. 나는 불가능하다. 하지만 하나님만 가능케 하신다“예수께서 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나라 마 19:26” 

9. 내 힘으로 하려는 노력을 멈추고, 다시 하나님 앞으로만 나아간다. 답답한 마음을 내려놓고 하나님만 의지한다. 그리고 기도한다. 아직은 품을 수 없지만… 언젠가는 내 삶에서 그 마음이 드러나기를 원한다. 

10.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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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Thinking)/Meditation2019. 9. 24.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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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 1:27-2:4 복음에 합당한 삶, 협력과 겸손한 마음

1.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라고 27절에서 권하고 있다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27절, 28절에는 이것을 풀어서 설명하는데 크게 ‘복음의 신앙을 위해 협력하는 것’과 대적하는 자들에게 ‘두려워 하지 않는 일’이다. 

2. 그리고 크게 설명한 두 가지에 대해서 그 이후부터 설명하고 있는데, ‘협력'에 대한 것은 2:2절의 한 마음, 3절의 겸손한 마음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두려워하지 않는 담대함'에 대해서는 29절에서 고난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있다. 

3. 여기까지 묵상하고 하루를 지냈는데, 오늘 한 선교사님으로부터 사역에 관해서 새로운 제안을 받았다. 그런데 그 제안은 바로 협력에 관한 것이었다. 

4. 복음에 합당한 삶이란 “한 마음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 (27절)이라고 오늘 본문은 이야기 하고 있는데, 협력에 관해 제안을 받은 것이다. 제안을 아내와 나누면서 다시 생각한 것은 협력이란 것이 정말 쉽지 않다는 것이다. 

5. 나 혼자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한 마음으로 함께 같이 서야만 가능한 것이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그게 복음에 합당한 삶이라고 이야기 하고 있다. 협력하여 함께 사역하기 위해 들어갔던 교회에서 사임한 나에게 또 다른 협력의 이야기는 결코 쉬운 이야기가 아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은 그렇게 하는 것이 복음에 합당한 것임을 이야기 하고 있다. 

6. 아직 이 제안에 대해서 깊이 기도해보거나 깊이 묵상해 보지 못했기 때문에 제안은 제안일 뿐이다. 하지만 현지 형제, 자매들과 그리고 다른 선교사님들과 어떠한 모습으로든지 협력하고 서로 돕는 모습은 나 조차도 가장 바라는 바이다.

7. 앞으로의 나의 사역의 모양이 어떻게 될지는 모르지만 오늘 본문처럼 “한 마음을 품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그렇게 태국의 영혼들을 섬길 수 있게 되기를 원한다.

8. 혹시 내 삶에 복음에 합당하지 않게 살려고 하는 ‘나 잘난 맛에 살려고 하는 마음’이나 ‘독선적인 마음’, ‘교만한 마음’이 있다면 내려놓기 원한다. 내가 잘나서 이러한 제안을 받은 것도 아님을 잊지 말고, 주님이 주시는 리듬에 나를 맡겨서 가장 합당한 길로 걸어가기 원한다.

9. 오늘도 늦었지만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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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Thinking)/Meditation2019. 9. 23. 1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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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 1:12-26 심판자의 자리에 앉지 말고 복음 전파자의 자리에서 서자.

1.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는 것이 자신에게 가장 큰 기쁨임을 이야기 한다. 18절에서 “그러면 무엇이냐 겉치레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나는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그런데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2. 자신을 위해 복음을 이용하는 사람이 많지 않은가? 15절 말씀처럼 투기와 분쟁으로 혹은 착한 뜻으로, 17절에 다툼으로 복음을 전하기도 한다. 가끔 그런 장면을 경험하거나 보면 나는 화가 난다. 저렇게 할 바에는 차라리 안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이런 것 조차도 기뻐하고 또한 기뻐한다고 말하고 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3. 사도 바울은 자신의 심판자의 자리에 앉지 않았다. 반면 나는 내가 심판자의 자리에 앉아서 그들을 나름 내가 가진 기준으로 심판하고 있다. ‘이건 아니지 않은가?’ ‘저렇게 하면 안되지 않는가?’ 등등으로 그들의 의도와 동기, 결과에 대해서 말하며 그들은 틀렸고, 나는 맞다의 논리를 전개해 나간다.

4. 하지만 사도 바울은 그러지 않았다. 어떤 모습이든, 어떠한 모양이든 전파되는 것이 그리스도면 그는 만족했다. 이것이 진정 복음을 전하는 자의 모습이다. 우리의 연약함은 늘 존재하지만 그 연약함을 통해서라도 복음이 전해지면 그것이 감사이고 기쁨이 되는 삶… 나로써는 잘 상상이 되지 않는다. 

5. 어제 영광교회에서 마지막 설교를 하고 교회를 사임하였다. 하기 전에도 마음이 어려웠지만, 설교를 마치고 나서는 수많은 마음들이 교차하고 있다. 아쉬움, 두려움, 그리움, 염려, 후회… 등등의 마음이 교차해서 마음이 힘들다. 

6. 하지만 이러한 모든 일이 역시 ‘복음 전파의 진전 (12절)’ 되기를 원한다. 지금은 아프지만, 지금은 힘들지만 하나님께서 이 모든 일들을 사용하셔서 복음이 태국 땅에서 더 전해지는 통로로 사용하여 주시길 원한다. 

7. 심판자의 자리에 앉지 말고 복음 전파자의 자리에서 늘 달려가자.

8.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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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19. 9. 20. 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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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5:1-11 입은 닫고 마음은 열자 예수께서 하신 것 처럼

1. 야고보 사도는 우리에게 "주께서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라고 7절에서 이야기 하고 있다. 언제나 참아야 하는 것과, 다른 이들과 화평하고자 하는 것은 힘들다. 왜 내가 참아야 하는가? 저쪽에서 좀 참으면 안될까? 언제나 나 중심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2. 야고보 사도는 우리에게 ‘왜 그래? 니가 참아야지.. 그게 믿음이야' 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그 앞에 6절에서 “너희는 의인을 정죄하고 죽였으나 그는 너희에게 대항하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므로” 너희도 참으라 라고 이야기 하고 있다. 

3. 복음은 항상 그렇다. 내 힘으로 참고 내 힘으로 견디고 내 힘으로 화평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그렇게 해주셨고, 예수께서 우리에게 그 큰 사랑을 보여주셨기 때문에 우리도 그렇게 하는 것이다. 

4. 복음의 사랑과 복음의 수용성보다도 나는 내 억울함, 내 화남, 내 생각이 앞선다. 그렇기에 복음의 가치로 생각하고, 내가 용납받고 사랑받았다는 생각보다도 더 ‘내(가 한 일이) 생각'이 나는 것이다. 내가 어떻게 했는데.. 내가 어떻게 말했는데.. 내가.. 내가.. 내가…

5. 내가 용납하고, 내가 사랑해주고, 내가 그들과 화평하면 도대체 내 억울함은 어디로 가는지? 하나님은 내 억울함은 알기나 하시는지? 갖은 생각들이 든다. 하나님은 다 아신다. 9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 보라 심판주가 문 밖에 서 계시니라” 공평한 저울추를 들고 계신 심판하실 주님께서 다 알고 계신다. 11절 후반부에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이시니라"

6. 주님이 아신다. 주님이 알고, 나에게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신다. 그리고 주님이 그도 아신다. 그에게도 자비하시고, 긍휼이 여기신다.

7. 그래서 오늘도 견뎌야 한다. 오늘도 사랑해야 한다. 오늘도 입은 닫고, 마음은 열어야 한다. 왜? 예수께서 나에게 그렇게 해주셨기 때문이다. 나에게 이렇게 하지 않으면, 내 말을 듣지 않으면 너는 지옥에 간다고 하시지 않으셨다. 그저 사랑하셨고, 그저 받아주셨다. 많은 말을 하시지 않았고, 그저 사랑하셨다. 

8. 진짜 어렵지만 그러기에 나도 입을 닫고 마음은 열자. 참고, 사랑하자.

9.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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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19. 9. 19. 1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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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4:11-17 오늘 사랑하고, 오늘 선을 행하자. 

1. 우리는 내일 일을 알지 못한다. 너무 당연한 이야기라서 굳이 할 필요도 없지만 그게 사실이다. 14절은 이를 매우 강조해서 이야기 하고 있다.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2. 우리의 인생이 안개와 같다는 것을 아는 것이 지혜이다. 우리가 안개와 같이 순식간에 없어질 존재임을 아는 것이 지혜이다. 마치 영원히 살 것 처럼, 마치 영원히 이 땅에서 누릴 것 처럼 생각하는 것이 문제이다. 

3. 15절에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이나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어늘” 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순식간에 없어질 존재들이 마치 영원히 살 것 처럼 주님의 뜻을 이야기 하고, 무엇을 하겠다고 계획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4.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어떤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머물며 장사하며 이익을 보리라” 라고 알지도 못하는 주의 뜻을 말하기 전에 먼저 '선을 행하는 것' (17절)이다.

5. 주의 계획은 쉬이 알기 어려워도 우리는 우리가 무엇을 해야 선인지 무엇을 행하면 악인지를 이미 분별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그 선을 행해야 한다.

6. 내일 하겠다, 나중에 하겠다, 짬나면 하겠다, 시간이 나면 하겠다…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다. 

7. 선을 행함에 있어서 사랑을 행함에 있어서 망설이지 말자. 오늘 하자. 

8. 안개와 같은 우리의 존재가 내일 어떻게 될지 우리는 아무도 모른다. 오늘 하자. 

9. 오늘 사랑하고, 오늘 섬기고, 오늘 대화하고, 오늘 시간을 보내자. 오늘 하자. 오늘 하자. 내일은 늦으리…

10.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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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19. 9. 18. 1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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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4:1-10 정욕의 소리(상향성)가 아니라 말씀의 소리(하향성)를 듣자

1. 다툼은 정욕으로부터 난다 (1절). 욕심과 정욕 때문에 우리는 다투고 싸운다 (2절). 우리가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다 (3절). 

2. 결국 위로부터 오는 지혜가 아니라 땅으로부터 나오는 정욕이 우리의 삶을 망친다. 그것은 ‘죄’라고도 부른다. 죄는 우리를 세상과 벗이 되도록 부추긴다. 이 땅이 전부인 것 처럼, 이 땅에서 누릴 수 있는 것이 가장 중요하고, 그것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어떠한 것도 해도 괜찮다는 식으로 우리를 부추긴다. 심지어 그것이 '하나님의 자리’에 앉는 것일지라도…

3. 아담이 그것에 넘어갔다. 그는 ‘하나님의 자리’에 앉기를 원했고, 그의 이 정욕은 그를 죄와 벗하게 만들었다. 하나님이 금하신 열매를 따먹음으로써 그는 하나님의 자리에 자신이 앉았다. 그 결과는 4절의 말씀처럼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됨’이 되었다. 그는 정욕의 목소리를 들음으로써 죄의 목소리를 들음으로써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다.

4. 7절은 말한다.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복종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우리는 우리의 정욕의 소리를 듣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하고, 또 그것에 복종해야만 한다. 그래야 우리는 하나님의 벗이 될 수 있으며 하나님의 자리에 앉지 않을 수 있다. 

5. 세상의 소리는 상향성의 소리이다. 올라가야 하고, 높아져야 하고, 뛰어나야 한다. 하지만 하나님의 음성도 상향성이다. 하지만 상향성이 적용되는 방법은 그 반대이다. 9절, 10절이 그것을 말씀하고 있다.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지어다 너희 웃음을 애통으로, 너희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꿀지어다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

6. 세상의 소리는 나 스스로가 나를 높여야 한다고 말한다. 너무나도 당연해 보이고, 그렇게 해야만 내가 올라갈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그 반대이다. 내가 할일은 나 자신을 낮추는 것이다. 나 자신을 낮추면 하나님께서 나를 높이시겠다고 말씀하신다. 

7. 억울하고, 힘들고, 속상하고, 원통해도 내 자신을 스스로 높이려고 해서는 안된다. 내 정욕이 나에게 말하도록 해서는 안된다. 내가 하나님의 자리에 앉으려고 해서는 절대로 안된다.

8. 내가 할 일은 낮아지는 것이다. 내가 할 일은 슬퍼하며 애통하며 우는 것이다. 내가 할 일은 주 앞에서 낮아지는 것이다. 세례요한이 “그는 흥하여야 하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라고 말하며 낮은 자의 길을 택하였을 때, 예수님은 그를 여자가 낳은 자 중에서 가장 큰 자라고 높여 주셨다. 

9. 오늘도 낮아지기 원한다. 오늘도 나는 쇠하기를 원한다. 나를 높이려고 하는 내 정욕의 목소리가 아니라 낮아져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기를 원한다. 내 본성과 다른 길이기에 쉽지 않지만 그럼에도 순종하기 원한다. 내가 할 수 없다고 나는 못한다고 말하기 원한다. 세상의 벗이 아니라 하나님의 벗이 되기를 원한다. 하향성의 삶이 내 안에 자리잡기 원한다. 

10.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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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