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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Photo Essay2018. 11. 12. 1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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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하게 웃을 수 있다는 것은 아무런 근심이 없다는 것이다. 마라는 사실 별로 근심이 없다. 고민할 것도, 특별한 힘든 것도 없다.

좀 더 맛있는 것을 많이 먹을 수 있으면 좋겠다는게 유일한 근심이랄까? 바람이라까?

어린아이와 같아야 하늘나라에 들어올 수 있다고 하신 예수님 말씀이 이런 것일까?

주 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디나 하늘나라... 찬양의 가사처럼.. 

우리가 예수와 동행하기 때문에 저렇게 환하게 웃을 수 있어야 하는 것이 믿는 자들의 삶이 아닐까? 오늘도 많이 웃기 원한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을 웃게 해주기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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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18. 11. 12. 1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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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상 4:20-34 하나님께 ‘묻는 지혜’가 ‘듣는 마음’보다 낫다

솔로몬은 지혜를 얻었고, 그의 지혜와 명성은 높아졌다 (26-34절).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지혜를 구하러 올 정도였다. 그는 부도 얻었다. 하루에 먹는 음식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였다 (22-23절).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계속 불안한 암시들을 보내고 있다. 그의 왕국은 번영했지만 21절 후반부를 보면 '솔로몬이 사는 동안’ 이었다. 그의 왕국에는 평안이 있었지만 25절 초반부에 ‘솔로몬이 사는 동안’이었다. 제한적이고, 유한한 번영과 평화였다. 

그 이유는 30절, 34절에서 이야기 하고 있는 것 같다. '솔로몬의 지혜가,’ ‘솔로몬의 지혜를’ 이제 주어가 솔로몬이 되었다.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이고, 그는 그 지혜를 하나님의 나라와 백성을 위해 사용해야 하는 사람인데, 이제 그는 하나님이 주신 지혜를 그 자신의 지혜로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26절을 보면 그는 이제 자신이 가진 군사력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있다. 어제 본문에서 그는 분명히 우선순위가 예배, 말씀, 그리고 군대였는데, 이제 그는 그가 가진 군사력을 자랑하고 있다. 

너무 잘 나가고 있어서 연약함이 부족함이 보이지 않는 순간처럼 보인다. 그가 가진 부와 명예가 군사력을 의지하는 그의 마음을 가리게 한다. 아마도 자신도 모르는 방식으로 그는 조금씩 자신이 가진 것들을 의지하고 있나보다. 교만함이다. 하나님보다 내가 가진 것들이 우선되는 것, 하나님보다 내 자신을 의지하는 것 바로 교만이다. 그러한 그에게 하나님은 여전히 지혜와 총명을 부어주신다 (29절).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만 바라보았던 다윗과 다르게 솔로몬은 그 번영함 속에서 하나님을 잊어 버린다. 애굽 공주와 결혼을 통해서 나라를 강하게 하려고 하고, 군대의 힘을 자랑하며, 자신의 지혜로 명성을 얻는다. 대신 그가 살아 있는 동안이었다. 그의 뒤로 이스라엘은 분열되고, 망가지며, 우상숭배를 시작한다. 

다윗이 가졌던 하나님께 '묻는 지혜'가 솔로몬이 가졌던 '듣는 마음’보다 더 귀하게 느껴지는 순간이다. 물어야 한다. 물어야 안 망한다. 물어야 다음세대까지 살아남는다. 물어야 내가 주인이 아니고, 내가 결정자가 아니고, 내가 하나님이 아니란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물어야 들을 수 있다. 오늘도 주님게 묻는 은혜가 있기를 원한다. 내 맘대로, 내 뜻대로, 내 생각대로 사는 하루가 아니라 겸손하게 묻기 원한다. 물을 수 있는 것이 은혜이고, 물을 수 있는 것이 지혜이다. 

오늘도 묻자. 묻고 듣고 순종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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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18. 11. 12. 0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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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상 4:1-19 삶의 우선순위 셋팅하기 

오늘 본문은 잘 조직된 솔로몬의 이스라엘이 어떠한지를 보여준다. 1절에서 그가 왕이 되었고, 2절부터 그의 중앙정부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 그런데 순서를 보면 그가 무엇을 중요하게 여겼는지를 알 수 있다. 2절은 제사장, 3장은 서기관, 4절은 군사령관, 5절은 지방 관장, 6절은 노동 감독관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 솔로몬의 관심이 예배, 말씀, 그리고 그 이후가 군대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대 사회에서 군대는 나라의 운명을 결정하는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당연히 가장 중요하게 여겨도 충분할 수 있었지만, 솔로몬은 그러지 않았다. 첫째는 예배, 둘째는 말씀.. 그의 우선순위를 보며 이스라엘이 어떠한 나라인지를 알 수 있다. 하나님이 가장 중요한 분이시고, 그 분의 말씀을 가장 중요하게 여길 때에 살아갈 수 있는 나라가 이스라엘이었다. 군사력을 믿는다는 것은 자신의 힘을 믿는다는 것인데, 그 보다도 먼저 예배와 말씀을 붙잡는다는 것은 내 힘으로 살지 않겠다는 의미인 것이다.

하나님이 아니라 군사력을 믿고 살아갈 때가 얼마나 많은가? 내가 가진 은사들, 재정, 계획, 힘을 믿고  살아갈 때가 얼마나 많은가? 가진 것이 없을 때가 아니라 가진 것이 손 안에 있을 때 그것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솔로몬은 다 가졌는데, 적어도 오늘 본문에서는 그것들을 의지 하지 않았다. 나 또한 손에 쥔 것으로 살아가는 자가 되지 않기를 원한다. 있어 봤자 얼마나 있으며, 그것들이 얼마나 나를 도울 수 있는가? 내가 하나님보다 지혜로울 수 있는가? 모든 대답은 아니다. 내가 믿고 있는 군사력을 포기하고 하나님을 예배하고, 그 분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으로 내 삶을 다시 세팅해야 한다.

아웃리치가 끝나고 돌아왔다. 많이 보고, 듣고, 배웠다. 특별한 시간들이었다. 이제 더 중요한 것은 내 삶을 다시 원래대로 자리 잡도록 세팅하는 것일 것이다. 말씀으로부터 시작하고, 하나님으로 부터 힘을 공급받고, 내 힘과 계획을 의지하지 않도록 내 삶의 우선순위를 다시 세우는 것이다. 오늘도 말씀만 붙들자.

아웃리치 기간동안 기도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잘 다녀왔고, 많은 것들을 보고, 듣고, 경험하고 왔습니다. 매우 좋은 시간이었고, 우리 형제, 자매들과도 더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아웃리치 관련해서는 한번 정리해서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다시 한번 감사합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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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18. 11. 9. 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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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상 3:1-15 종교놀이 그만, 삶의 예배 시작

솔로몬은 1절에서 애굽왕 바로의 딸과 혼인을 한다. 나라의 유익을 위해 정략적인 결혼을 한다. 하지만 그는 3절에서 보면 여전히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의 아버지 다윗의 법도대로 행하는 자였다. 하지만 ‘산당에서 제사하며 분향하였다.’ 아버지의 모습을 계속 봐왔다면 산당에서 제사하지 않았으리라. 아버지의 모습을 계속 봐왔다면 바로의 딸과 결혼하지 않았으리라. 이 둘은 모두 솔로몬의 연약함이었고, 어쩌면 작은 타협이었다. 그가 옳다고 믿는대로 행동하고 원하는대로 그가 원하는 방식으로 하나님을 예배했다. 예배에 관해서도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잘 몰랐을 뿐이다. 모르는 것도 죄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호 6:3 상반부)'. 하지만 이 잘 모르는 행동을 통해서 그는 문제의 씨앗들을 남겼다. 훗날 이 것들은 우상숭배로 이어지게 된다. 이스라엘을 멸망으로 이끄는 시작점이 되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우리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법으로 예배해야 한다. 내가 생각하고 바라는 방식이 아니어야 한다. 어떤 예배의 순서나 절차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예배는 상한 심령의 예배이고, 삶의 예배 (롬12:1-3)이다.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는 하나님 앞에 우리의 연약함을 올려 드리고, 우리의 삶이 하나님 앞에 드려지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려져야 한다. 그래서 더 어렵게 느껴진다. 우리의 종교놀이를 그만두고 진짜 삶의 예배가 시작되어야 한다. 예수님은 그렇게 이스라엘의 종교놀이를 뒤엎으셨다. 그들에게 이해되지 않을 하나님의 나라를 이야기 하셨다. 결국 그들은 이해하지 못하는 하나님의 신비로 인해 예수 그리스도를 못 박았다. 

나의 삶도 종교놀이를 하던 이스라엘의 리더쉽들과 결코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예수를 빙자해서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지… 하나님이 원하시는 상한 심령의 예배와 삶의 예배를 드리지 못하고, 수요예배, 주일예배로 퉁 치려고 하는건 아닌지? 물론 이렇게 살아도 하나님이 은혜를 부어 주신다. 솔로몬에게 주신 지혜처럼… 솔로몬이 그렇게 살아도 하나님은 역사하시고, 돌보신다. 하지만 다윗이 세웠던 하나님의 나라의 모형인 이스라엘은 그렇게 조금씩 넘어지게 된다. 그러다가 결국은 멸망하게 된다. 

삶의 예배가 오늘도 드려지기 원한다. 순간 순간 내 영혼을 깨우기 원한다.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삶을 살아내고 싶다. 매 순간 좌절하지만 또 다시 일어서기 원한다. 오늘은 지역교회에서 아이들을 모아서 함께 놀이하고 예배 드리는 마지막 날이다. 더 깊은 삶의 예배, 아이들을 향한 중보, 그들을 향한 섬김이 내 안에서 나타나기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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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Thinking)/Meditation2018. 11. 8. 1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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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상 2:36-46 ‘익숙해져버림’이 가져온 죽음을 넘어서자

예루살렘에서는 집을 짓고 살아도 되지만 밖으로는 나가지 말라. 이것이 솔로몬의 시므이를 향한 명령이었다. 그에게 구역을 정해주고, 이 선을 넘어가면 죽는다고 말한 것이다. 시므이도 당장 죽지 않아도 되니 ‘이 말씀이 좋사오니’ 라고(38절) 대답했고, 실제로 시므이가 3년을 지켰다. 하지만 자신의 종이 도망가는 일이 발생했다. 그리고 시므이는 이 명령을 잊어버리고 예루살렘 밖으로 그들을 잡으러 쫓아갔다. 솔로몬의 말을 무시한 것인지? 아니면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은 것인지? 아니면 시간이 흘러 잊어 버렸는지?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그가 예루살렘 밖으로 나간 것은 결국 솔로몬의 귀에 들어가게 되었고, 시므이는 결국 죽게 된다. 시므이를 죽게 한 것은 3년의 시간으로 인한 ‘익숙해져버림’ 이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고, 뜨거운 마음으로 주님과 동행하기를 원하지만 어느새 그 마음은 식어 버리고, 주님과의 관계가 그렇게 심각한 것이 아니게 되어 버린다. 너무 익숙한 나머지 그 보다 더 중요해 보이는 것 (도망간 종을 잡아오는 일)에 우리의 마음을 쏟다가 하나님을 잊어버리게 된다. 기도가 익숙해지고, 예배가 익숙해지고, 말씀이 익숙해져 버린다. 그래서 덜 중요한 것이 전부인 것 처럼 되어 버린다. 시므이를 죽게 한 ‘익숙해져버림’이 나도 죽게 한다.

북부 치앙마이에서도 차로 2시간을 이동해야 하는 카렌족 마을로 왔다. 오늘 오후는 매해라는 곳으로 이동하게 된다. 이 곳에서 만나는 아이들, 그리스도인들, 우리 형제, 자매들에게서 그 ‘익숙해져버림’을 찾기는 힘들었다. 그들은 열정적이었고, 무엇을 하든 행복해 보인다. 너무 추운날씨(태국에서 12도 ㅜㅜ)로 인한 어려움도 그들에겐 중요하지 않다. 이 속에서 예수가 너무 익숙한 사람은 ‘나 한사람’ 밖에 없는 것 같다. ‘익숙해져버림’을 ‘신선한, 새로운 예수님과의 만남’으로 채우고 싶다. 

언어의 답답함을 느낀다. 정체되어 있는 것 같다. 이들에게 함께 사랑을 나누고 싶은데 언어의 한계가 너무 답답하다. 이 한계가 나에게 ‘익숙해져버림’을 깨고 ‘신선함, 새로움’으로 나를 채우기 원한다. 오늘도 매해라는 곳에서 새로운 아이들을 만나게 되는데, 기대된다. 그리고 예전에 양육했던 ‘위라시니’ 자매와 ‘렛’ 형제를 만나게 될 것 같은데 이것 또한 너무 기대된다. 예수 안에서의 새로움, 신선함으로 새 힘을 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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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Thinking)/Meditation2018. 11. 7. 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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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상 2:26-35 현실의 유력함 (두려움)을 붙잡은 자들의 최후

왕상 1장에서 시작된 반역이 이제 마침표를 찍는다. 반역에 가담했던 세 사람이 모두 마지막을 맞게 된다. 
아도니야는 그 마지막이 어떠한지 성경은 기록하지 않지만, 아비아달은 파면되었고, 요압은 성소에서 죽게 되었다. 여전히 회개하지 않은 사람들에 대한 심판들이다. 요압은 이미 많은 무죄한 자들의 피를 흘렸던 장군 아닌가? 우리는 우리가 잘못한 댓가를 분명히 치뤄야 하는 존재들이다. 

새로 임명받은 군대장관 브나야와 제사장 사독은 왕상 1장에서 유력해 보이는 왕자에게 가담하지 않았던 자들이다. 그 순간에 더디어 보이고, 유력해 보이지 않더라도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은 사람들이었다. 다윗의 대는 아도니야가 아니라 솔로몬이 잇게 된다는 것을 정말로 아도니야가 왕이 될 것 같은 그 순간까지도 믿고 있었던 자들이다. 그들에게 이제 영광의 관이 씌워진다. 이들은 현실이 아니라 약속을, 유력해 보이는 상황이 아니라 하나님을 선택했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에게 이렇게 하나님께서 상급을 주시는 것이 당연해 보인다. 

이들의 삶을 보면서 나의 삶을 반추하게 된다. 나는 무엇을 쫓아가고 있는가? 
반짝이고 빛나는 유력해 보이는 것들을 쫓고 있는 것은 아닌지? 약속보다는 현실을, 지금 당장 보이지 않는 하나님 보다는 유력해 보이는 상황을 선택하고 있지는 않은지?
약속을 붙들고 광야와 같은 메마른 땅을 걸어가기 보다는 순간 좋아보이는 것을 붙들고 좋은 길을 가려는 자는 아닌지? 반성하게 된다. 
내 안에 그러한 욕심들이 있다. 좋고 편한 가능성의 유혹들에 자주 휩싸인다. 어제는 내 안에 아도니야를 봤다면 오늘은 내 안에 아비아달과 요압을 보게 된다. 

현실아 아니라, 유력해 보이는 상황이 아니라 약속과 하나님을 택해야 한다. 그것이 믿는 자의 길이고, 하나님이 기뻐 하시는 길이다. 
아비아달과 같이 요압과 같이, 그리고 아도니야와 같이 살지 말자. 

이렇게 될 수 밖에 없을 것 같다는 그러한 내 안에 두려움을 해결하자. 두려움을 넘어서서 하나님을 믿자. 그래야만 아비아달, 요압, 아도니야와 같지 않을 수 있다. 결국은 믿음 싸움이다. 오늘부터 토요일까지는 치앙마이 매해 지역으로 전도여행을 간다. 이 시간들을 통해서 내 안에 약속과 하나님이 더 선명해지길 구해본다. 내가 할 수 없는 일들을 하나님이 하라고 하시지 않으셨다. 그저 주님 손 붙들고 같이 가면 되는 것이다. 두려워 말자. 두려워 하여 조급한 것을 붙들지 말고, 하나님을 붙잡자. 하나님의 약속을 붙드는 약속의 자녀가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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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Thinking)/Meditation2018. 11. 6. 1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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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상 2:13-25 내 안에 있는 아도니야 

아도니야는 자신의 입으로 아우 솔로몬이 왕이 된 것은 여호와로 말미암았다고 고백한다. 하지만 진정한 그의 고백은 아니었다. 그는 다윗을 섬겼던 수넴 여자 아비삭을 요구한다. 이것은 둘째 아들 압살롬이 아버지를 몰아내고 아버지의 후궁과 동침했던 것과 유사하게 자신이 왕위를 계승할 수 있는 정통자임을 주장하기 위해서였다. 잔머리를 굴린 사건이었다. 특별할 것이 없는 것 같았던 요구 속에 그의 욕망과 욕심이 꿈틀거린다. 그는 여호와로 말미암은 일을 자신의 생각과 행동을 통해 돌이킬 수 있다고 믿었던 것 같다. 

심히 큰 교만이다. 그 교만한 자의 마지막은 죽음 밖에 남지 않았다 (23절). 솔로몬이 주일 본문에서 악한 것이 보이면 죽을 것이라고 경고를 했는데, 그는 자신의 죽음을 자초하고 있다. 그의 교만한 모습을 보며 나에게도 동일한 교만이 있음을 보게 된다. 하나님의 일이라고 말하면서, 이 사역은 하나님의 것이라고 말하면서 얼마나 많은 내 생각을 더하고, 얼마나 많은 내 계략과 내 의견, 내 마음, 등등의 것들을 더하고 있는가? 내 것이 아닌데도, 내 것처럼 붙잡고 있는 것들이 수도 없이 있는 것을 발견한다. 그것도 아도니야처럼 간교한 모습으로.. 아닌 척 하면서.. 겸손하고, 공손한 태도로 말이다. 

언어 공부를 하면서도 내 안에 계속 꿈틀거리는 욕망들이 있다. 팀 켈러의 복음을 공부하면서 머리로는 복음을 이해하면서도, 여전히 삶에서는 복음이 아니라 나의 공로를 의지하고 있다. 내가 이렇게 하니까, 내가 이런 부분에서 이렇게 헌신 하니까, 내가 이렇게.. 내가 이렇게.. 내가 이렇게.. 내가, 내가, 내가.. 아도니야가 멀리 있지 않다. 바로 내 안에 아도니아가 있다. 복음이 아니라 공로로, 내 행위를, 내 생각을 의지하는 내가 내 안에 있다. 더욱 더 복음 앞에 내 자신을 내려놓는다. 은혜 아니면 설 수 없는 나 같은 사람을 하나님께서 선교사로 불러 주셨고, 은혜가 아니고서는 단 한 걸음도 내 딛을 수 없는 나를 선교사로 이 태국 땅까지 보내셨다. 더욱 더 복음 위에 서기 원한다. 내 존재와 내 세계관이 여전히 내 힘으로, 내 지혜로, 내 생각으로 하겠다는 마음이 아니라 오직 은혜로 내가 그 주님의 일에 참여하는 것임을 배울 수 있기를 원한다. 

어제 읽었던 팀 켈러의 ‘당신을 위한 갈라디아서’ 에서 두 구절 함께 나눕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생각하기를 구원은 복음으로 받지만 성장하려면 성경 원리들을 삶 전반에 적용해야 한다고 여긴다. 하지만 사실  우리는 복음으로 구원 받을 뿐 아니라 복음을 삶 전반에 적용하여 성장한다”

“우리가 순종하지 못하고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지 못함은 단지 의지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따라서 더 열심히 해서는 이런 실패를 해결할 수 없다. 더 열심히 하겠다는 결심은 어차피 자력으로 율법을 지키겠다는 결심에 불과하다. 그보다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게 있다. 모든 불순종의 뿌리는 행위를 통한 의로 자신의 삶을 통제하려는 우리의 고질적 습성에 있다.”

내 안에 아도나아를 뿌리뽑기 원한다. 교묘하게 복음이 아닌 것들로 내 삶을 채우려고 하는 시도들을 멈추고, 오직 하나님의 역사와 일하심만이 내 삶에 나타나기 원한다.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았고, 나는 그 분의 손 안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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