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Thinking)/Meditation2018. 10. 29. 1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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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106:1-12 In all I do, I honor You. 

우리가 구원받은 것, 즉 복음은 우리의 어떠함 때문이 결코 아니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잘해서도, 우리가 무엇인가 받을만해서도, 우리가 주님의 눈에 너무 꼭 드는 아름다운 존재여서도 아니다. 이 모든 것은 8절에 나오는 것처럼 ‘자기의 이름을 위하여’이다. 8절의 본문은 ‘그러나 여호와께서 자기의 이름을 위하여 그들을 구원하셨으니 그의 큰 권능을 만인이 알게 하려 하심이라’ 라고 기록되어 있다. 우리 스스로가, 혹은 내가 세상의 중심처럼 생각하면 안된다. 내가 주님의 눈에 가득 차 있는 사랑스러운 존재(어떻게 보면 맞지만)일 거라고 착각하며 살아가면 안된다. 

우주와 모든 만물들은 그 분의 영광을 외치며 지금도 운행하고 있다. 그런데 나라는 존재는 혼자 역으로 가고 있다.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 하는 척 하며 나의 성을 쌓아가는 존재이다. 어제 내가 태국어를 공부하면서 힘들어 하는 이유 중에 하나를 ‘나를 증명해 내고 싶은 마음’이라고 하였다. 누구에게 증명하고 싶은 것일까? 하나님에게? 결코 아닐 것이다. 나는 나를 다른 사람들에게 증명하기 원하는 것이다. 우리 가정과 관계 있는 후원자들과 교회들에게, 그들로 부터 태국어를 잘한다고, 오래 쉬었는데도 잘한다는 칭찬을 듣고 싶었고, 인정을 받고 싶었을 것이다. 결국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이름을 위해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힘든 것이고, 그러니까 스트레스를 받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을 위해 구원하신다. 그렇게 하시는 이유는 만인이 그것을 알게 하셔서 그들 역시 구원하기 위해서이다. 하나님은 모든 일을 자신의 영광과,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 하시는데, 나는 여전히 선교사로써 살아가면서도 나를 위해서, 나의 인정을 위해서, 나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서 한다. 모순이다. 
중고등학교때 기독교인 친구들과 ‘왜 공부하냐? 라고 물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공부한다’고 공식처럼 대답했었다. 정말이었을까? 순수하게 정말 그렇게 한 적도 없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순간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거들먹 거리며 내가 원하는 인정과, 내가 원하는 존재 증명을 한 것이었을 것 같다. 

오늘도 나에게 말씀해 주시는 하나님이 계심에 감사하다. 선교사로써 나를 증명하기 위해, 나의 존재를 드러내기 위해 무엇인가를 하지 않겠다. 다짐으로 된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마는… 그래서 오늘도 예수님을 붙든다. 철저히 낮아지시고, 하나님께 죽기까지 순종하심으로 우리의 구원자가 되신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기 원한다. 잘 안되어도 바라보고, 또 바라보고, 넘어져도 또 묵상하고 하면서 언젠가 내 안에 그 분이 진짜가 되는 삶을 기대하며 오늘 하루를 살아내련다. 

‘하나님의 영광’ 쉽지 않은 이야기이다. 성경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히브리서 1:3) 임을 증언하고 있다. 
예수님만 바라보고 예수님만 의지하자. 
In all I do, I honor Y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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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18. 10. 28. 2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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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105:24-45 나의 삶의 주어가 누구인가? 

시편기자는 출애굽 사건과 광야 시대를 회상하고 있다. 그런데 24절부터 42절까지의 모든 구절의 주어가 ‘여호와께서’ 혹은 ‘그’로 지칭되고 있다. 한마디로 출애굽도, 광야 시대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잘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할 수 있어서(그러할 능력이 있어서) 출애굽 한 것도 아니고, 그들이 출애굽 할 만한 무엇가를 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출애굽 시킨 것도 아니었다. 그저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었다. 인생의 주어가 누군인지를 알게 되면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순종이고, 찬양이다. 오늘 시편 105편의 마지막은 할렐루야로 끝나게 된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 찬양이 되는 것이다.  

오늘 시편을 보면서 나 또한 '나의 삶의 주어가 누구일까?' 라는 생각을 다시 해보게 된다. 내 삶에 대해서 소개하면서 나도 ‘하나님께서 하셨다,’ ‘예수님께서 일하셨습니다’ 라고 이야기 할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을 빙자해서 내가 한 것들을 드러내고 싶어할지, 그것도 아니면 그냥 당연하게 내가 한 일들에 대해서 이야기 하면서 내가 어떤 사람임을 드러내려고 할 것인지..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을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 신실하게 인도해가고 계신다. 하나님이 주체가 되어 모든 것을 이끌어 가신다. 약속을 하신 분도, 약속을 이루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다. 내 삶도 마찬가지이다. 내가 하려는 조급함 (약속을 기다리지 못하는 마음일 것이다), 내가 해내어 무엇인가를 보여주려고 하는, 즉 내 존재를 증명해내고 싶어 하는 마음들을 내려 놓는다. 특별히 태국어를 하고 있는 이 시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조금씩 조금씩 분명히 늘고 있을텐데 마음은 한없이 조급하기만 하다. 예전에는 이것보다 분명히 잘했을텐데… 그래도 내가 태국 선교사로 한 텀을 마친 사람인데.. 내가 왜 이렇게 말이 안되고, 내가 말하는 것들을 왜 이렇게 이해 못하지? 이러한 마음들 속에는 조급함과 나를 증명해내고 싶은 마음들이 가득해 보인다. 

요즈음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이유가 이러한 마음들 때문에 조급한 것 때문이 아닐까? 라는 생각도 든다. 하나님이 하실 수 있도록 조금만 더 내 조급함과 나를 증명해내고 싶은 마음들을 내려놓자. 하나님이 하실 일들을 조금 더 넉넉하고 여유로운 마음으로 지켜보자. ‘여호와께서’ 도우실 것이고, ‘여호와께서’ 행하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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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18. 10. 27. 1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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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105:1-23 현실이 아니라 약속을 보고 살아가는 삶

이스라엘 백성들은 나그네의 삶을 살았다 (12-23절). 하나님의 약속만 믿고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 가나안으로 갔다. 나그네로 살아간다는 것은 많은 것을 포기해야만 하는 삶이다. 모든 것을 가지고서는 나그네로 살 수가 없다. 언제든 떠날 수 있는 모습으로 사는 것이 나그네의 삶이다. 그러한 삶으로 하나님께서 부르셨을 때에 아브라함은 순종했다. 순종의 이유는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기반이 있는 삶의 자리를 포기하고, 힘든 곳으로 나가기를 결정한 이유는 아마도 자신이 가진 모든 것보다 하나님이 더 크시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일 것이다. 짐 엘리엇의 고백과 같이 영원한 것을 위해 결코 영원하지 않은 것을 포기하는 사람은 바보가 아니란 사실을 아브라함도 알고 결정한 것이다. 오늘 나에게는 무엇이 더 큰가? 하나님이신가? 약속인가? 아니면 현실인가? 

현실이 커 보이면 결코 아무것도 포기할 수 없다. 하나님이 커 보여야 한다. 실제로 하나님이 크시다. 하지만 내 시선을 하나님이 아니라 현실에 맞출 때 하나님이 작아보이고, 현실이 커 보이는 놀라운(?)일이 일어나는 것이다. 때로는 그 놀라운 일이 자주 일어난다. 그러니 약속보다는 자꾸만 현실을 바라보고 의지하게 된다. 아니다. 현실이 아니라 약속을 보아야 한다. 약속을 우리에게 주시고, 지키겠다고 약속하신 (8-11절) 그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하는 것이다. 

가나안으로 가는 여정은 순탄하지 않았다. 약속이 있지만 순탄함에 관한 약속은 아니다. 
오늘 시편에서는 요셉을 예로 든다. 요셉의 인생은 알고보면 정말 힘들었던 인생이다. 약속을 바라본다고 하나님을 바라본다고 순탄함과 평안함만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종으로 팔리고, 발에 차꼬를 차고 몸은 쇠사슬에 메일 수도 있다 (17-18절). 다만 이것은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 까지 만이다. 영원한 고통과 어려움을 말하지 않는다. 반드시 끝이날 것이다. 더 중요한 것은 결코 약속을 바라보는 것을 포기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요셉은 결코 약속을 포기 하지 않았다. 그가 애굽이 아니라 가나안으로 갈 것을 믿었고, 그는 출애굽 할 때 자신의 뼈를 가지고 나가라고 부탁하였고, 실제로 이루어졌다. 하나님은 그렇게 약속을 성실하게 성취하시는 분이시다. 우리가 약속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그 분은 그 분의 언약을 이루신다. 오늘도 현실을 보지 않고. 약속을 보기 원한다. 현실은 크고 약속은 작아보이는 놀라움(?) 속에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가장 커 보이는 진짜 놀라운 현실 속에 살아가기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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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Photo Essay2018. 10. 27. 1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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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으로 새가 날아올랐다

나도 함께 곳에서 비상하기 원한다

피곤함과 연약한 몸이 회복되기를


40:31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


#sunrise with a #bird. #eagle’s #wings 

#Isaiah4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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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18. 10. 26. 1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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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104:19-35 하나님이 디자인하신대로, 하나님이 있으라 하신 그 자리에서, 하나님이 명령하신대로

19절에 여호와가 달로 절기를 정하심이여 라고 상징된 구절은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운행하시고 계심을 그리고 모든 것을 제 자리에 두셔서 운행하고 있음을 이야기 해주고 있다. 동물들은 밤이 되면 들어가 자고, 낮에는 먹이를 구하고 (20-21절), 사람은 낮이 되면 나와서 일하고, 밤이 되면 들어가 쉬도록 만드셨다 (23절). 바다에는 바다 생물들이 거하도록 하셨고 (25-26절), 그들에게 필요한 모든 것들을 공급하신다 (28절). 그리고 주님이 그들의 호흡을 거두시면 원래의 모습대로 먼지로 돌아간다 (29절). 

우리의 세상, 우리의 삶 모두가 하나님이 디자인하신대로, 하나님이 있으라 하신 그 자리에서, 하나님이 명령하신대로 운행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먹는 음식, 우리가 만나는 사람, 우리가 하게 되는 일들 그 어느 곳에도 우연은 없다. 하나님의 계획하심과 인도하심이 그 어느 곳에나 충만하다. 우리는 우리를 불러주신 하나님께서 부르신대로 오늘 하루를 정성껏 살아가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다. 

어제 예준이와 요엘이와 우주와 지구 이야기를 나눴다. 우리가 이 큰 우주에서 얼마나 가치 없는 존재인지를… 그러나 그 작고 허망한 우리를 하나님이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이야기 해줬다. 그리고 또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누군가가 관리를 하지 않으면 망가지고, 부서지고, 죽어 없어지게 된다는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을 알려주면서 (잘난 척 좀 했다..) 이 어마어마하게 큰 우주를 누군가가 다스리지 않으면 이 우주가 망가지고 법칙들이 깨어지고, 그 어떤 것도 좋은 쪽으로 갈 수 없는 것을 설명해줬다. 오직 이 모든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그 모든 것을 붙들고 있어서 이 우주가 그 받은 사명대로 아름답게 유지되고 있음을 이야기 해줬다. 오늘 본문에 있는 이야기를 미리 해준 것 같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들을 제자리에 두지 않고, 모든 것들을 붙잡아 주시지 않으면 이 망망한 우주에 지구가 떠 있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 지구가 초당 465.11미터를 계속 정확하게 어떻게 자전할 수 있을까? 정확한 궤도를 공전하고, 정확한 속도로 돌아가고 있다. 스케일이 큰 지구, 자연이 문제가 아니라 내 몸의 심장만 봐도 그렇다. 이 조금만 녀석이 내가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쉬지 않고 뛰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디자인하신대로, 있으라 한 그 자리에서 하나님이 명령하신대로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오늘 나의 자리는 어디인가? 나의 역할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나를 가라하는 곳은 어디인가? 
하나님의 뜻과 마음을 알지 못하고 내 마음대로 살아가고 내 마음대로 움직이고, 내 마음대로 하고 있는 것은 없는가? 
오늘 내가 하나님이 나를 만드신 그대로, 보내신 그 자리에서, 맡겨주신 일들을 행하는 하루가 되고 싶다. Do right things in right time and right place. 
그 우주보다 크신 하나님께서 이렇게 작고 작은 우주에서 먼지 하나보다 못한 나를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시고 나와 생명의 관계를 누리고자 부르셨는데, 나는 그럼에도 그 초대에 응하기 보다는 내가 왕이 되려는 그러한 모습으로 살고 있지는 않은지? 

하나님께서 나와 가족들을 다시 불러주신 이 방콕에서 더 충성스럽게 살아가기 원한다. 더 많이 내어주고, 더 많이 사랑하고, 더 많이 누리는 내가 되고 싶다. 비록 매일 그렇게 살지 못할지라도, 하나님께 내 삶의 주권을 조금씩 더 내어 드리며 하나님만이 내 삶의 왕이심을 고백하는 하루가 되기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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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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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라야 

아토피가 너무나도 심했던 네가 이렇게 잘 커주는 것만 해도 너무 감사하다. ^^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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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Thinking)/Meditation2018. 10. 25. 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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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104:1-18 여호와의 나무




오늘 본문에서 특별히 16절이 가장 가슴에 와 닿았다. 여호와의 나무에는 물이 흡족함이여 곧 그가 심으신 레바논 백향목들이로다 (The trees of the Lord are watered aboundantly, the ceder of Lebanon that he planted. ESV). 이와 비슷하게 물이 흡족한 곳에 심겨진 나무의 아름다움과 넘쳐나는 는 시편 1:3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물이 흡족한 곳에 심겨진 나무는 철을 따라 열매를 내고, 잎사귀와 과실이 충만하게 열매를 맺는 나무이다. 그것이 바로 시냇가에 심은 나무요, 물이 흡족한 곳에 심겨진 여호와의 나무이다. 

오늘 본문과 연결되는 구절이 신약에서도 한 구절 생각이 났는데, 요 15:5이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I am the vine; yor are the branches. Whoever abieds in me and I in him, he it is that bears much fruit, for apart from me you can do nothing. ESV)” 결국 과실을 많이 맺는 시냇가에 심겨진 나무가 바로 포도나무이신 예수님께 붙어 있는 가지임을 알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나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라고 이야기 하고 계신다. 

결국 우리가 뿌리 내려야 할 곳에 있는 반드시 필요한 물은 예수님이다. 우리는 그 예수님 안에 뿌리 내리고 오늘도 살아야 하는 것이다. 
나에게 드는 질문은 첫 번째로는 '나는 여호와의 나무인가?' 그리고 그 다음은 '나는 예수님이신 그 물에 나를 담그고 있는가? 예수님은 내 안에 계시고, 나는 예수님 안에 계시는가?' 이다. 왜냐하면 입으로는, 큐티할 때에는 내가 예수님 안에 거하고 싶다고 이야기하고, 예수님이 내 안에 거하시길 이야기 하지만, 하루를 살아가면서 그 분을 놓칠 때가 너무도 많기 때문이다. 거하지 못하는 정도가 아니라 정말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살아갈 때도 많기 때문이다. 여호와의 나무가 되고 싶지만 물은 멀리하는 꼴이다. 그래서 성장이, 자람이 더딘 것 같다. 

그래도 감사한 것은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말씀해주신다는 것이다. 오늘은 더 나의 물이 어디에 있는지, 정말 내가 그 물을 흡수하고 있는지, 정말 내가 주님 안에, 주님이 내 안에 사시는 삶이 입으로만이 아니라 삶으로도 실천되기를 원한다. 그래서 내 안에서 성숙의 열매들이, 언어의 진보가, 사랑의 사귐이 열매로 나타나기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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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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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도 만나보지 못했지만 유진 피터슨으로 부터 받은 영감과 은혜를 생각하면 많은 빚을 진 것 같다. 보통 목회자의 마지막이 이전보다 더 아름다워야 많은 영향력이 또한 살아남은 자들에게 남겨지는데 그의 이 땅에서의 마지막 말 또한 너무 멋지다. "Let's go." 그는 죽음을 통해 아버지께로 간다. 살아남은 우리를 이 땅에 남겨두고 그는 더 아름다운 새로운 삶으로 출발한다. 그의 마지막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Among his final words were, ‘Let’s go.’ And his joy: my, oh my; the man remained joyful right up to his blessed end, smiling frequently. In such moments it’s best for all mortal flesh to keep silence. But if you have to say something say this: ‘Holy, Holy, Ho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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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