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Thinking)/Meditation2018. 10. 10. 12:03
728x90
반응형
애 4:11-22 묵상과 삶이 일치되는 삶이 되지 아니하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들의 죄는 여호와의 명령과 말씀에 불순종한 것이다. 13절에 보면 그들에게 말씀을 전해주던 의인들의 그들은 그들의 죄를 가리기 위해 죽였다. 그들이 받는 보응은 예루살렘의 멸망이다. 하지만 그들은 그들의 죄악을 직시하는 대신 헛된 도움을 그들을 구원할 수 없는 나라들을 통해 기대했다 (17절). 한마디로 죄는 자기들이 짓고, 원망은 하나님께 하며, 자신의 죄로 인한 결과를 위해 하나님이 아니라 주변의 나라들을 쳐다보는 아무런   소득없는 일들을 하고 있어 보인다. 그들이 했어야 하는 것은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이었고, 여호와의 말씀을 준행하며, 하나님을 자신의 왕으로 모시고 그 분을 위해 살아야만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핵심은 보지 못하고 곁다리만 긁고 있었다. 

나의 삶은 어떠한가? 나의 눈은 어디를 보고 있는가? 하나님을 본다고 하면서도 다른 의지할 것들을 늘 쳐다보고 있지는 않은가? 아침마다 묵상을 하면서도 하루종일 그 묵상의 내용을 마음에 품고 살아가기 보다는 자꾸만 다른 것을 찾는다. 헛된 곳들을 바라보며, 헛된 도움들을 찾는 것 같이 말이다. 말씀보다도 다른 책이나 다른 중요한 만남들을 의지하려고 하는 마음도 발견한다. 말씀을 붙드는 것 같기는 한데, 핵심은 온데간데 없고 다시 내가 주인이 되려고 하는 시도들을 계속 하고 있다. 묵상만 한다 뿐이지 삶의 열매가 없으면 멸망한 이스라엘 백성들과 무엇이 다른가? 그들도 자신들이 선택받은 민족들이고,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졌다고 자부하지 않았었던가? 

말씀이 묵상으로만 그치지 않고 삶의 변화로 넘어오길 원한다. 엊그제 아내가 내가 묵상한 것을 보면서 '오빠 오늘 묵상한 것과 다르게 살았네’라고 말하는데 마음에 분이 솟아 올랐다. 실제로 그렇게 살지 못했었기 때문에 오는 부끄러움과 민망함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면서 자기방어를 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런데 아내 말이 맞았다. 묵상과 삶이 일치되지 못하면 참 부질없는 삶이 되고 만다. 말씀을 가졌으되, 예수를 부인했던 그 시대의 유대인들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하나님 앞으로 돌아가고, 다시 그 분이 내 삶의 주인이 되시도록 내 삶을 내어 드리자. 

말씀이 오늘 내 삶 가운데 온 종일 나를 붙드시도록… 그리하여 내가 그 분을 사랑하고, 순종하고, 그 분이 내 삶의 주인되신다는 사실이 인정되는 하루가 되기 원한다. 요셉의 삶을 보면서 주변에서 모두가 하나님을 본 것 처럼… 물론 쉽지 않지만, 말씀에 나를 내어드린다. 목소리를 낮추고, 분을 낮추고, 기도하자. 주님 나를 도와주세요. 
728x90
반응형
Posted by 신애친구™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가족(Family) > 더불어 함께' 카테고리의 다른 글

놀이터에서...  (0) 2018.11.12
꽃받침한 마라  (0) 2018.10.26
한 엄마의 뱃속에서 태어났는데도 이리도 다른데...  (0) 2018.09.11
아 이뻐라..  (0) 2018.08.20
바닷가의 아이들  (0) 2017.09.18
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18. 10. 9. 14:00
728x90
반응형
애 4:1-10 내 백성을 사랑하시는 아버지 하나님

하나님의 백성은 몰락하였다. 더 이상 손 쓸 여지도 없이.. 그들은 몰락하였고, 인간 이하의 삶을 살아가게 된다. 오늘 본문에서 계속 반복되는 것은 그들의 궁핍과 쇠약, 그리고 멸망할 때 얼마나 비참했는지를 반복하고 있다. 하지만 오늘 화자(하나님)는 여전히 그들을 내 백성이라고 부른다. 그들이 죄를 행하였어도, 비참해졌어도, 더 이상 무엇인가 소망이 없는 상태에서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내 백성으로 부르신다. 

우리가 흔히 하는 말 중에서 사랑의 반대말은 미움이 아니라 ‘무관심’이라고 한다. 하나님의 자신의 백성에 대한 사랑은 우리가 어떠함과 상관없이 여전하다. 무관심이 아니라 여전히 사랑이다. 마치 아이들이 잘못을 해서 부모에게 혼을 나서 매를 맞은 상황과 비슷해 보인다. 자녀들이 매를 맞아서 아프고, 쓰라리고, 너무너무 슬프고 힘든 상황이더라도, 그 분께서 우리의 좋으신 아버지임은 변함이 없다. 마치 부모님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마음이 매를 대더라도 변함없는 것 처럼 말이다. 매는 사랑의 도구요, 징계를 통해 가르치기 위함이었다. 

오늘 본문에서 자녀를 혼낸 아버지 하나님을 만난다. 자녀들을 혼내고 난 아버지는 마음이 아프다. 가슴이 답답하다. 하지만 자녀들이 옳은 길로 가도록 때로는 그 감정을 넘어서서 가르쳐야만 한다. 하지만 그러한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자녀들을 내 백성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이 끝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녀를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이 여전히 진행중임을 의미한다. 나를 향한 사랑, 형제, 자매들을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이 우리의 어떠함과 관계없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아무 이유 없이 사랑하시는 것이다. 때로는 우리의 삶에 어려움과 두려움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과분한 사랑을 받으며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삶이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 더욱 가까이 나아가자. 고난과 두려움이 있을 때 의심하지 말자. 
그리고 자녀들에게도 그러한 아버지가 되어주자. 아이들이 아버지를 통해 하나님의 성품을 경험한다고 하는데, 참 큰일이다. 사랑받는 자로써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고, 이유없이 받은 사랑을 나눠줌에 있어서 다른 사람들에게 사랑할 이유를 찾지 않는 하루가 되기 원한다.  
728x90
반응형
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18. 10. 8. 11:51
728x90
반응형
애 3:55-66 내 삶에 남아 있는 그 분의 신실하심의 흔적

오늘 본문에서 애가의 화자의 고백은 단순하다. 55-58절까지는 여호와께서 들으셨다고 고백하고, 59-62절까지는 보셨다고 고백하고 있다. 모든 시제는 과거로 쓰여져 있다. 즉 하나님께서 그동안 자신에게 어떻게 했는지를 다시 돌아보고 있다. 그리고 63절부터는 이제 현재형으로 돌아온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던 것 처럼 이제 그들에게 보응해달라고 탄원한다. 시인은 역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구하고 있다. 언제나 변함없으신, 언제나 신실하신 그 분께서 지금껏 자신의 삶에 개입하신 것과 같이 지금 자신의 어려움과 고통 가운데 개입해달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나도 나의 삶을 돌아본다. 1993년 예수님을 믿으면서 선교사로 헌신하고, 2009년 선교사로 가기 위해 직장을 그만두고, 벌써 2018년이 되었다. 그간 하나님께서 보여주시고 인도해주신 내용들은 수도 없다. 그 분은 언제나 신실하셨고, 그 분은 언제나 한결같이 야곱과 같은 나를 선한 길로 이끄셨다. 내가 보통 기도하는 제목들이 이 애가의 화자와 별로 다를게 없어 보인다. '지금 위태하니, 지금 어려우니, 지금 답답하니 나를 좀 도와주세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늘 선한 계획으로 나의 삶을 그 분의 시기와 그 분의 타이밍에 인도해주셨다. 

오늘 애가의 화자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으로 그들을 멸절시켜 달라고 한다. 원수들이 얼마나 꼴보기 싫었을까? 하지만 지금 나에게 동일한 사건은 없다. 나에겐 저정도로 꼴보기 싫은 사람은 없다. 다만 오늘 내가 기억하고 싶은 것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이다. 얼마나 신실하게 인도하셨는지,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셔서 인도하시는지.. 그것들은 내 삶에 흔적으로 남아 있기 때문에 내 삶을 돌아볼 때, 어떠한 물건을 볼때, 상황을 볼때, 다 기억이 나기 마련이다. 어마어마한 출애굽을 보고도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했던 이스라엘 백성과 같이 되지 않기를 원한다. 오늘은 내 삶에 남아 있는 그 분의 흔적들을 보며 감사하고, 다시 한번 그 분과의 관계를 점검하기 원한다. 오늘도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일하시고 계심에 감사하며, 그 분과의 시간을 가지기 원한다.  
728x90
반응형
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18. 10. 7. 17:50
728x90
반응형
애 3:40-54 우리를 사랑하시는 아버지께 돌아가자. 

  1. 우리가 스스로 우리의 행위들을 조사하고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2. 우리의 마음과 손을 아울러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들자

우리는 돌아가야만 한다. 우리를 그 분의 형상으로 지으시고, 우리를 그 크신 사랑으로 사랑해 주시는 그 하나님께로 돌아가야만 한다. 우리가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본분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 분이 여호와 우리 하나님이시 때문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잘못들을 겸손하게 인정하고 (조사하고), 주님께 항복하는 것이 우리의 할 일이다. 손만 들어서는 안된다. 마음도 들어야만 한다. 

손만 드는 것도 어려운데 마음을 드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가? 하지만 우리의 마음을 주님께 들어야만 한다. 그래야 우리는 우리의 것들을 버리고 우리의 왕 되신 하나님께 돌아갈 수 있다. 오늘도 손만 들고 싶은 마음.. 때로는 손도 들고 싶지 않은 마음을 억누르고, 주님께 손과 마음을 든다. 항복한다. 나를 주님께 내어 드리고, 주님께서 나를 살려주시길, 고쳐주시길 원하는 마음에 나를 내어 드린다. 

내 마음대로 살고 싶고, 내 뜻대로 하고 싶은 내 마음을 내어 드린다. 내가 주인인 삶도 내어 드린다. 내어 드린다고 쓰고 있는 지금도 내어 드리는 것이 쉽지 않다. 그래도 다시  하나님께 이러한 연약한 마음도 올려 드린다. 주님 주님께로 돌아가니 불쌍히 여겨주소서. 
728x90
반응형
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18. 10. 6. 11:32
728x90
반응형
애 3:19-39 여호와가 나의 기업이시기에, Therefore I will hope in Him. 

내 마음에 고난과 슬픔을 담고 살아가지만 우리가 그것을 이겨낼 수 있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22-23절 때문이다.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다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 가장 깊은 고난 가운데서도 우리가 지금 오늘을 살아갈 힘이 생기는 것은 바로 그 분의 인자하심과 성실하심 때문이다. 

자신들의 죄악들로 인해 나라를 빼앗기고, 포로로 잡혀가고, 정말 그 어느 것 하나 선한 것이 없어 보이는 그 때에 그들이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자신들의 죄로 인해 징계를 주신 그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그것 이외에는 답이 없다. 지금의 상황에서는 징계를 받는 것이 맞다. 죄의 결과이니까… 하지만 죄로 인한 징계 혹은 우리가 겪고 있는 어떠한 어려움이 있더라도 그 분의 인자와 긍휼, 성실하심을 바라볼 때 우리는 다시 회복되고, 다시 하나님과의 은혜의 깊은 관계로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지금 당장 보이지 않아도, 지금 당장 갑갑하고 답답해도 그 분의 성품을 의지하며 기다리는 것이 정답이다.

이것을 25-26절에서 다시 이야기 하고 있다. ‘기다리는 자들에게나 구하는 영혼들에게 여호와는 선하시도다 사람이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림이 좋도다’ 
보이지 아니하는 막막함, 답답함, 때로는 우리의 연약함을 통해서 겪는 모든 고난과 고통,
그 속에서 우리가 참으로 의지할 것은 언제나 선하시고, 언제나 자비하시며, 우리의 어려움과 슬픔을 모두 체율하신 예수님 한 분을 바라보는 것이다. 
예수님이 나를 이해하신다. 예수님이 나를 도우신다. 예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이 나의 기업이 되시는 것이다 (24절). 한글성경에는 그래서 내가 그를 바라리라 라고 24절의 뒷부분을 번역하지만 ‘바라리라’라고 번역된 단어의 원뜻을 찾아보니 소망을 가지다, 기다리다 로 번역되어 있다. 그래서 ESV는 therefore I will hope in Him. 이라고 번역했다. 여호와가 나의 소망이 되시기 때문에 내가 오늘도 소망이 있는 것이고, 이 어려움과 고난과 슬픔 속에서도 기다릴 수 있는 것이다. 
근거 있는 소망과 근거 있는 기다림으로 오늘을 살아낼 수 있기를 원한다. 삶의 막막함과 답답함 속에서도 우리를 인도하시는 가장 선하시고, 가장 성실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업이 되어 주심에 오늘을 또 다시 살아갈 힘을 낸다. 

내 삶에서 더욱더 주를 바라보기 원한다. 내 시선이 주님께 고정되기 원한다. 오늘은 주님이 나의 기업이심이 좀 더 삶에서 드러나기를 원한다. 
Therefore I will hope in Him. 

728x90
반응형
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18. 10. 5. 19:57
728x90
반응형
애 3:1-18 NIBC, Not I but Christ

우리의 삶은 때로는 답답해 보이고 막막한 순간에 마주치게 된다. 오늘 시인의 모습이 그렇다. 사방에 우겨쌈을 당하고, 답답해서 더 이상 아무런 말을 할 수 없을 것만 같은 시점이다. 18절에는 그래서 ‘스스로 이르기를 나의 힘과 여호와께 대한 내 소망이 끊어졌다’고 까지 표현하고 있다. 시를 읽고 있는데도 답답한데 실제로 이 상황 속에 있어야만 했고, 이 상황을 견뎌야만 했다면 얼마나 답답하고 힘이 들었을까? 심지어 그는 1-6절에서 이 상황이 그에게 전적으로 닥친 고난이라고 인식하고 있었다. 

오늘 본문 예레미야 애가의 저자를 누구로 보느냐에 대한 의견은 여러가지가 있을 수 있다. 예레미야로 볼 경우 그가 얼마나 많은 순간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서 경고하고, 기도하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는가? ‘눈물의 선지자’가 그의 별명 아니었는가? 그런데도 닥친 재앙을 그 자신에게 돌리고 있다. 예레미야가 정말 무엇을 잘못 했는가? 잘못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지 않았는가? 이해가 되지 않지만 오늘 본문의 저자는 그 벌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니라 자신이 받고 있음을, 그 고난을 당하는 자가 ‘자신’임을 이야기 하고 있다 (1절). 

18절의 그가 고백한 그의 상황이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향해 외쳤던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와 매치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자신이 잘못 한 것이 없는데도, 묵묵히 이 상황을 받아내고, 감내해야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게 바로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복음인 것이다. 복음이란 누구에게 좋은 소식인가? 그리스도께도 좋은 소식인가? 아니었다. 그 분께는 땀이 피가 되도록 기도해야 되는 고난이고 고통이었다. 그럼 누구에게 좋은 소식인가? 바로 우리와 같은 죄인에게다. 

오늘 시인의 저자가 자신에게 그 모든 고난을 돌리는 까닭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그를 보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용서하시고, 회복시켜 주시길 바라는 ‘기쁜 소식(복음)'을 향한 부족한 표현이다. 물론 이것을 완성시키신 분은 예수님이시다. 오늘 시인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모형을 보여주는 그림자였다.  

그렇다면 선교사에게, 리더에게 복음은 어떠한 것인가? 우리에게도 마찬가지로 복음이란 어쩌면 예수님이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하신 것과 같은 고난의 시간이고, 해산의 시간일 것이다. 물론 우리도 복음을 먼저 거져 받지 않았는가? 우리가 그저 예수님의 공로로 용서받았고, 용납받았으니 우리도 예수님이 그 길을 걸어가신 것과 같이 그 고통을 감내하고, 억울함을 감내하고, 그들을 위해 땀방울이 핏방울 되도록 기도하며, 그들을 위해 수고하고 헌신하는 것이 우리가 가진 복음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일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땅에서 억울함을 수없이 만나게 되고, 내가 무슨 낙을 보려고 이 자리에 서 있는지를 수 없이 고민해야 되고, 손해봐야 하며, 때로는 답답하고 막막한 순간을 수도 없이 마주쳐야 하는 사람들이다. 

태국 사람들의 속이 보이지 않고, 때로는 우리를 이용하려고 해도 우리는 그들을 위해 기꺼이 고난을 감내해야 하는 사람들인 것이다. 이 묵상을 삶으로 살아내는 것이 이렇게 글로 쓰는 것처럼 쉽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것이 쉽지 않음을 너무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예수님처럼 땀방울이 핏방울 되도록 기도하며 자신을 내려놓는 길을 걸어가야 하는 것이다. 싸우면 지는 것이다. 소리 지르면 지는 것이다. 우리는 져야만 이기는 싸움에 참여한 이상한 왕을 쫓아가고 있는 이상한 사람들인 것이다. 

오늘도 기도한다. 내 힘으로 살지 않기를, 내 생각으로 판단하지 않기를 말이다. 
롬 8:5절에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라고 말씀하고 있다. 오늘도 무엇을 따르고 있는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가? 
골 3:1-2에서는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복음을 먼저 받은 우리가 복음을 위해 살아가는 방법은 희생과 자기부인이다. 져야만 이기는 이 싸움에 위의 것을 생각함으로 오늘도 겸손하게 이 길을 걸어가기 원한다. 
결국은 NIBC이다. Not I but Christ. 


728x90
반응형
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18. 10. 4. 23:46
728x90
반응형
애 2:11-22 답답함을 넘어 처절함으로 그들을 위해 기도하기

예레미야애가를 보고 있으면 마음이 답답하다. 그 자비로우신 하나님께서 이정도까지 그들에게 고개를 돌리셨다면 그들의 잘못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잘못인가? 분명 그들의 잘못임에도 불구하고 마음이 답답하다. 왜 구해주시지 않는지, 왜 자비를 베푸시지 않는지…
하지만 이 애가를 작성하고 있는 화자의 마음은 단순히 답답함을 넘어선다. 그는 정말로 슬퍼하고, 정말로 울부짖는다. 18-19절에서 외치는 그의 말은 단순한 텍스트로 들리지 않는다. 
  1. 그들의 마음이 주를 향하여 부르짖기를 딸 시온의 성벽아 너는 밤낮으로 눈물을 강처럼 흘릴지어다. 스스로 쉬지 말고 네 눈동자를 쉬지 말게 할지어다.
  2. 초저녁에 일어나 부르짖을지어다 네 마음을 주의 얼굴 앞에 물 쏟듯 할지어다 각 길 어귀에서 주려 기진한 네 어린 자녀들의 생명을 위하여 주를 향하여 손을 들지어다 하였도다

그들을 위해서 계속해서 부르짖고, 눈동자를 쉬지 않을 정도로 울라고 했다. 그리고 자녀들의 생명을 위해서 주를 향하여 손을 들지어다 라고 말하였다. 아마도 선지자와 자신들의 백성들의 죄를 안타까워하며 그 틈에 서라고 권유하고 있다. 아마도 선지자가,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역자가 해야 하는 모습일 것이다. 

지금 태국의 영적인 상황을 보며 나도 그 틈에 서서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울고 있는가? 
참 알면서도 안되는 힘든 일인 것 같다. 어쩌면 알지 못해서, 제대로 그렇게 느끼지 않고 있어서 그렇게 못하는 것은 아닌지? 게을러서인지? 아니면? 뭘까? 
애가를 보면서도 단순히 답답함만을 느끼는 것이 내가 영적으로 민감하게, 혹은 이 상황에 대해서 민감하게 반응하지 못함은 아닌지? 영혼들을 더 돌아보고, 사랑하며, 그들을 위해서 더 기도하는 선교사가 되어야겠다. 애가의 화자처럼 답답함을 넘어선 영적인 움직임이 내 삶에서 나타나기 원한다. 아직은 그게 뭔지 정확히 모르겠지만, 조금씩 더 보기 원한다. 

728x90
반응형
Posted by 신애친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