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Thinking)/Meditation2022. 2. 28. 08:45
728x90
반응형

막 9:38-50 가장 중요한 것을 위해 덜 중요한 것은 포기하라

1. 예수님은 우리에게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방해되는 그 모든 것들을 아까워하지 말고 버리라고 말씀하신다. “또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들 중 하나라도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맷돌이 그 목에 매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나으리라" (42절)

2. 손이 우리를 범죄하게 하면 손을 잘라버리고 (43절), 발이 우리를 범죄하게 하면 발을 잘라버리고 (45절), 눈이 범죄하게 하면 눈을 뽑아 버리라 말씀하신다 (47절). 이것은 그 만큼 다른 이들을 실족하게 하고 나 자신을 실족하게 하는 것이 무서운 것임을 강조하시는 것이다.

3. 하지만 이것이 결코 우리 몸의 일부분을 정말로 잘라 버리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구원에 방해가 되는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 우리 삶에 우선순위를 두게 해서는 안된다. 

4.  나를 범죄하게 하는 것이 무엇인가? 나로 하여금 넘어지게 하는 것이 무엇인가? 혹은 다른 사람을 넘어지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가? 그러한 것이 있다면 잘라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내 삶에서 자리를 차지하게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5. 가장 중요한 것을 위해 좀 덜 중요한 것은 아낌없이 포기하고 버리라는 것이 오늘 예수님의 가르침이다. 무엇이 중요한가? 무엇이 인생에 있어서 우선순위인가? 그것을 결정하고 나머지는 아깝더라도 아쉽더라도 포기하라는 말씀이시다. 

6. 나에게는 무엇이 중요한가? 무엇이 우선순위인가? 무엇이 나로 하여금 움직이게 하는가? 그것이 언제나 예수님이시길 바라지만 실제로 나의 삶을 움직이는 것은 예수님이 아니라 ‘일 혹은 사역'인 것 같다 .

7. 물론 일과 사역은 내가 천국에 가는 것을 방해하는 정도의 나쁜 것들은 아니다. 하지만 그것이 하나님과의 관계에 영향을 주고, 하나님 보다 더 나를 움직이게 하는 요소라면 그 역시 우선순위의 재조정이 필요하다. 내가 하나님 보다 더 사랑하는 모든 것은 우상일 뿐이다.

8. 오늘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시는 마음은 더 중요한 것을 붙들도 더 중요한 것을 하라는 것이다. 주님 오늘 저에게 말씀하여 주시길 원합니다. 중요하지 않은 것들을 더 중요한 것들 보다 사랑하지 않게 하소서. 짐 엘리엇이 한 말이 생각이 난다. 여러가지 번역이 있지만 “영원한 것을 위해 영원하지 않은 것을 버리는 사람은 결코 바보가 아니다"

9. 영원한 것을 위해 영원하지 않은 것을 아까워하지 않고 포기할 수 있는 나의 삶이 되기를 원한다. 일보다도 주님과의 사귐이 더 우선순위가 되고, 사역보다도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더 우선순위가 되어서 내가 주님 안에, 주님이 내 안에 거하시는 것을 가장 소중히 여기며 살아가는 내가 될 수 있기를 원한다. 일도, 사역도 하나님 보다 중요할 수 없다. 내가 누구를 위해 일하고 있는지를 잊지 말자.

10. 오늘도 샬롬

728x90
반응형
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22. 2. 24. 11:27
728x90
반응형

막 8:27-9:1 나의 얄팍함을 안고 예수께 더 가까이 나아가기

1. 예수님의 진리는 언제나 역설의 진리이다. 하지만 그 역설은 언제나 사실이다. 그래서 이해하기가 어렵고 그래서 예수님을 따라간다는 것이 더 어렵게 느껴진다. 

2. 34절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무엇을 따라 가려면, 혹은 먼 길을 나서려면 최대한 몸이 가벼워야 한다. 그리고 따라가는 것에 집중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에게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라고 하신다. 

3. 자기를 부인하느라 예수님이 어디에 계신지 모를 것 같고, 그 십자가의 무게가 우리로 하여금 예수를 따르기 더 어렵게 만들텐데도 예수님은 우리에게 그러라고 말씀하신다. 왜냐하면 예수를 따르는 것은 물리적으로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 부인과 자기 십자가를 지는 그 과정 자체, 내 존재가 변화되는 그 과정 자체가 예수를 따르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4. 즉,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어떤 물리적 상태가 아니라 우리의 존재적 변화를 의미한다. 예수를 따르는 자는 그의 존재가 변해야 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기에 35절에 나오는 것 처럼 살려고 하면 죽는 것이고 죽으려고 하면 사는 것이다. 

5. 나의 존재가 죽으면 (Not i) 예수께서 내 안에 사시면서 (but Christ) 나의 전 존재가 변화되는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죽으려고 하지 않으면 내 혈기, 내 기질, 내 안에 악함이 계속 살아서 나를 주장하게 되는 것이다. 

6.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변화된 존재가 되라고 가르치신다. 나의 존재는 어떠한지를 생각해보게 된다. 나는 예수님을 만나서 믿은지 거의 30년이 된 것 같다. 그래서 나의 존재는 변했는가? 그래서 나는 예수의 뒤를 쫓고 있는가? 그 질문에 무엇인가 자신있게 대답하지 못하겠다. 

7. 왜냐하면 여전히 나는 살려고 하고, 여전히 나를 내세우려고 하고, 여전히 십자가를 지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예수를 따른다고 말하면서도 예수의 말씀대로 살아가기를 원치 않는다. 내가 드러나는 방법, 내가 올라가는 방법, 내가 사는 방법을 늘 찾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8. 어떻게 나의 이렇게 얄팍한 존재가 변화될 수 있는가? 아이러니는 계속 이어진다. 그 말씀대로 살아가지 못하고 여전히 죽지 못하면서도 내가 예수 안에 머물러 있을 때 나의 존재는 변하게 된다. 여전히 살려고 하고, 여전히 그 십자가를 밀어내면서도 예수 안에 머물러 있을 때에만 나의 존재가 변화를 받게 된다. 나의 존재의 변화는 나의 어떠함이 아니라 나와 예수와의 관계의 거리에 달려 있다. 나의 연약함을 안고 그 분께 가까이 머물 때, 그 분께 가까이 다가갈 때에만 나의 존재는 변하게 된다. 

9. 더욱 더 그리스도를 알아가고, 더욱 더 그 분을 닮아가고 싶다. 그러기 위해 나의 얄팍함을 안고 예수께 또 나아간다. 복음을 더 깊이 알아가기 원한다. 그래서 결국에는 그 마지막에는 더욱 더 주님을 사랑하는 존재로 살아가고 싶다.

10. 오늘도 샬롬

728x90
반응형
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22. 2. 23. 17:26
728x90
반응형

막 8:14-26 떡 하나가 누구의 손에 있는가? 

1. 예수님이 칠병이어의 기적을 통해서 제자들에게 가르치시기 원하셨던 것은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의존이었다. 육신의 양식 또한 우리 힘으로 얻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2. 14-15절에서 나오는 바리새인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은 자기중심적인 자기 의존에 대한 비유적인 묘사라고 ESV Study Bible에서는 설명하고 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원하신 것은 모든 삶의 부분에서의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의존이었다. 

3. 떡이 하나가 있든 다섯 개가 있든 일곱 개가 있든 몇 개냐 라는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 떡이 누구에게 있는냐가 중요한 것이다. 제자들은 오병이어, 칠병이어의 기적을 보고도 떡 하나가 있음에  수군거리기 시작한 것이다. 

4. 오늘 나도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떡이 하나 있음에 수군거리며 염려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얼마 전에 치과에 가서 스케일링을 하는데 그간 좀 불편한 이빨이 있어서 체크를 했더니 신경치료 후 크라운을 씌워야 한다고 했다.

5. 그런데 보험이 안되서 가격이 엄청났다. 거의 한국 왕복 비행기 값에 한국 치료비를 포함해도 될 정도의 가격이었다 (알고 보니 그 치과가 좀 더 비싸기도 했다). 그래서 한국에 가게 되면 치료를 하기로 하고 버텼는데 갑자기 잇몸이 부어 올랐고, 정보를 찾아보니 이는 그냥 이빨이 아픈거 보다 더 위험한 상태라고 했다.

6. 급하게 교인들의 도움으로 여러군데 치과를 수소문 했고, 그래도 싼 곳을 찾아서 예약을 하여 어제 첫 치료를 하였다. 여전히 비싸지만 첫 번째 치과정도는 아니었다. 잇몸에 염증이 많아서 2차 신경치료를 2주 후에 보자고 하였다. 

7. 몇 주간 마음이 너무 무거웠다. 재정적인 부담도 있었고, 심리적인 부담도 컸다. 하지만 오늘 본문을 보면서 내가 제자들과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나 또한 내가 누구와 있는지, 내 떡이 누구의 손에 있는지를 생각하지 아니하고 내 손에 떡이 몇 개가 있는지를 염려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8. 예수님은 예수님 만을 전적으로 의존하기를 가르치시고, 내 손에 있는 떡을 예수님께 드리고 그 분이 일하심을 기대하도록 가르치시지만 나는 여전히 내 손에 있는 떡을 더 의지하고 그 떡에 나의 안정감을 두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바리새인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해야만 한다. 선교사로 10년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 주님께서 늘 가르치시는 것이지만 나는 어찌도 믿음이 약한 것인가? 

9.  기억하자. 내 손에 떡이 몇개가 있는지가 아니라 그 떡이 지금 누구의 손에 있는지를 말이다. 단 한 개의 떡이라도 그리스도의 손에 있으면 그로인해 많은 사람들이 넘치도록 먹을 수 있는 것이다. 나의 떡을 그리스도의 손에 올려드리며, 세상과 다른 가치관으로 오늘을 살아가자. 예수님만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삶을 살아가기로 다시 한 번 결정한다.

10. 오늘도 샬롬

728x90
반응형
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22. 2. 22. 16:46
728x90
반응형

막 8:1-13 믿음이 없이는

1. 예수님께서 표적을 보여 주셨다. 칠병이어를 통해서 사천 명을 먹이셨다. 심지어 얼마 전에는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셨다. 충분한 기적을 봤다고 말할 수 있을 순간일 것이다.

2. 그런데도 바리새인들은 표적을 요구한다. “바리새인들이 나와서 예수를 힐난하며 그를 시험하여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하거늘" (11절)

3. 오병이어, 칠병이어 사건이 하늘로 부터 온 표적이 아니라면 과연 그것은 무엇이겠는가? 믿지 않으려는 마음을 가진 사람은 믿지 않게 된다. 표적이 우리로 하여금 믿게 하는게 아니라 우리가 가지고 있는 믿음이 우리로 하여금 믿도록 만든다. 

4. 예전에 타블로라는 연예인 사건이 있었다. 그가 미국의 유명한 대학을 조기 졸업했다고 말을 하였는데, 그를 의심하는 부류의 사람들이 그에게 졸업의 증거를 요구하였다. 타블로는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증거를 내밀었다. 졸업증, 친구들과의 사진, 친구들의 증언…

5. 하지마 믿지 않기로 결정한 사람들은 어떤 증거가 나와도 조작이라고 말하고 어떤 증거를 내밀어도 믿지 않았다. 오늘 바리새인들처럼 말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표적이 아니라 믿음일 것이다. 표적은 우리를 조금도 변화시킬 수 없고, 표적은 우리로 하여금 조금도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살아갈 수 있게 하는 힘이 없다. 

6. 오직 보이지 않는 우리의 존재적 결정인 믿음만이 우리로 하여금 믿게 하고 변화하게 한다. 최근에 이런저런 일로 마음이 어수선하지만 교회에서 두 명의 새신자를 통해서 큰 위로와 격려를 얻는다. 얼마전에 기도를 부탁한 무슬림 백그라운드의 프레쉬 형제와 작년 12월 마지막 주에 영접한 옴 형제이다.

7. 이 두 형제는 믿음을 진지하게 탐구하고 있다. 프레쉬 형제는 2주전 주일예배 때 영접기도를 통해 자신의 신앙을 공식적으로 선포하였고, 옴 형제는 진지하게 성경을 읽으며 많은 질문들을 하고 있다. 옴 형제가 어제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쫓는 것’이 무엇인지 물었다. 

8. 이 두 형제의 삶에 어떠한 표적이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그저 그들의 삶을 두드린 교회의 형제, 자매들을 통해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고, 그들의 삶에 터닝 포인트를 맞이하고 있는 것이다. 이 두 형제는 믿음을 존재적으로 결정하였고, 그 결정을 매순간 지켜가고 있을 뿐이다. 

9. 결국은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믿음만이 우리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그 분의 사랑을 확증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만이 우리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바리새인들과 같이 마음이 강팍하고, 믿지 않기로 작정한다면 어떤 기적이 일어나도 어떤 표적이 보여도 믿지 않을 수 밖에 없다.

10. 믿음을 두 형제에게 또 나에게 더하여 주시기를 원한다. 두 형제가 이 믿음의 여정을 잘 지나서 그리스도의 진정한 제자로 자랄 수 있기를 소원한다. 오늘도 샬롬


*프레쉬 형제와 옴 형제 모두가 하나님을 진정으로 만나고, 잘 양육되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계속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저에게도 그들의 질문에 성경적인 대답으로 잘 가르칠 수 있도록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사진은 지지난주 프레쉬 형제의 영접기도 순간입니다.

728x90
반응형
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22. 2. 17. 11:53
728x90
반응형

막 6:30-44 불쌍히 여기사…

1. 예수께서는 사람들을 보실 때 우리 사람들이 가진 기준으로 보지 않으셨다. 그 사람이 어떤 능력이 있는지, 얼마나 재력이 있는지, 그 사람이 예수님의 사역에 필요하신지를 보시지 않았다.

2. 예수님이 보신 것은 그들의 영적 상태였고, 이는 34절에서 잘 드러난다.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으로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

3. 예수님은 그들을 보시면서 목자 없는 양 같다고 생각하셨다. 그들을 영적, 육적으로 돌볼 목자가 없었다. 그래서 먼저 가르치셨다. 영적인 필요를 먼저 채우셨다. 그리고 35-43절에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이셨다. 육적인 필요도 채워주셨다.

4. 그러한 영적, 육적인 돌봄의 시작은 그들을 그 존재 자체로 보는 것, 사람을 필요로 보지 않고 존재로 보는 것에서 시작되었다. 이 시대가 사람들을 보는 눈과는 매우 다른 눈이었다. 이 시대는 사람을 평가할 때 그 사람의 외모나 가진 것, 능력으로 평가한다.

5. 예수님의 눈을 가져야 한다. 그 어떤 사람도 자신의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거저 받은 것 (외모, 능력, 소유 등)으로 판단되어서는 안된다. 나는 사람들을 어떠한 눈으로 보고 있는가? 이 시대의 눈인가? 예수님의 눈인가?

6. 사람을 사람 그대로 본다는 것은 어떨 때는 쉬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어릴 때 부터 그런 눈으로 타자들이 나를 바라보았고, 나도 타자들을 그 시선으로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수님을 믿는 다는 것은 내 안에 혁명이 일어나는 것이다.

7. 더 이상 그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거저 받은 것으로 그 사람을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를 존귀하게 창조하셨고, 그를 위하여 가장 귀하신 그 분을 아낌없이 주셨다는 그 존재 자체로 바라볼 때에 그때부터 바른 관계가, 사랑이 시작될 것이다. 

8. 아이들을 바라볼 때, 내 말을 잘 듣고 안 듣고가 그 아이들을 판단하는 어떤 기준이 되지 않기 원한다. 이 아이들을 하나님께서 우리 가정에게 주셨을 때, 또 병원에서 처음 만났던 날 얼마나 기뻤었던가? 그 존재만으로도 행복하고 감사하지 않았던가? 다시 그 눈과 마음을 회복하기 원한다. 

9. 비단 아이들 뿐이겠는가? 태국 사람들을 볼 때에도 그러한 눈을 가지기 원한다. 교회에 잘 나오고 열심히 섬기기 때문이 아니라 이미 그 존재 자체로 하나님께 사랑받은 자임을 전할 수 있는 내가 되기 원한다. 예수님처럼 불쌍히 여기고 긍휼히 여기는 마음으로 우리 수쿰빛 언약교회 성도들을 바라보기 원한다. 예수님의 마음을 가지기 원한다. 

10. 오늘도 샬롬 

728x90
반응형
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22. 2. 10. 12:28
728x90
반응형

막 4:21-34 내 안에 겨자씨가 더 자라나게 하자 

1.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를 비유로 설명하신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비교하며 또 무슨 비유로 나타낼까” (30절)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겨자씨 한 알에 비유하신다. “겨자씨 한 알과 같으니 땅에 심길 때에는 땅 위의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심긴 후에는 자라서 모든 풀보다 커지며 큰 가지를 내나니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만큼 되느니라" (31-32절)

2. 예수님의 오심을 통해 지금 도래한 하나님의 나라는 지금은 너무나도 작다. 제자들도 그것이 무엇인지 잘 알지 못하고, 유대인들은 그 하나님의 나라를 자신들의 생각과 다르다는 이유로 배척하고 있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는 겨자씨 한 알과 같다. 

3. 지금은 땅 위의 모든 씨보다 작지만 땅에 (우리의 마음에) 심겨질 때에 자라서 모든 풀 보다 커지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과소평가한다. 왜냐하면 작고 보잘 것 없기 때문이다. 또 들어보니 너무 쉽기 때문이다. 그래서 복음을 무시하든지 경시하든지 혹은 배척한다. 

4. 하지만 예수님 이래로 그 복음이 마음에 심기워져 그들의 인생이 변하고 주변을 변화시키고, 세상을 섬겼던 사람들이 역사속에 얼마나 많은가? 하나님 나라는 작지만 일단 그 마음에 심기워지면 그것이 얼마나 커지는지는 우리가 잘 알고 있지 않은가?

5. 그렇기에 해야 할 일은 복음을 심어야 하는 것이다. 지금은 별거 아닌거 같아 보이고, 지금은 변화가 없는 것 같아도 복음을 심어야 한다. 복음을 심어야 인생이 변하고 그 사람의 주변이 변하게 된다. 복음만이 모든 것을 변화시키기 때문이다. 

6. 예준이, 요엘이, 마라가 복음을 더 들어야 한다. 그리고 나도 복음을 더 들어야 한다. 우리 교회 사람들도 복음을 더 들어야 한다.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파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롬 10:15

7. 아내가 아이들에게 말씀 암송을 하겠다고 하였다. 가정 예배가 일주일에 한 번은 부족한 것 같다. 하루 더 날을 잡아서 예배를 드려야겠다. 수쿰빛 언약교회 성도들에게도 심방을 가서 복음을 전해야겠다. 그들도 하나님의 나라에 참여하게 되기를 원한다.

8. 내 안에 심겨진 이 겨자씨 같은 복음이 먼저 자라나기 원한다. 쉽게 분노하고, 쉽게 마음이 상하고, 쉽게 낙심하지 말고 이 복음이 나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본받아 오늘 하루를 살아갈 수 있게 되기를 원한다. 그리고 복음은 내 스스로 해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기대는 것이다. 정말로 하나님께 기대는 자가 되기를 원한다. 

9. 오늘도 샬롬 

728x90
반응형
Posted by 신애친구™
728x90
반응형

막 4:1-20 말씀을 심고, 또 심고, 또 심는 것은 나의 일이다. 

1. 네 가지 밭과 좋은 땅에 대한 비유이다. 열매를 맺는 것은 씨앗과 땅 모두가 중요하다. 그런데 본문에서 보면 열매를 맺는 것은 땅에만 달려 있다. 즉 씨앗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완전하다는 것을 먼저 인정해야 한다.

2. 하나님의 말씀이 온전한 하나님의 말씀임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땅이 무슨 문제가 되겠는가? 새싹이 날지 안날지도 모르는 죽은 씨앗이라면 아무리 좋은 땅에 심은들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3.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그렇지 않다. 어느 땅에 심어도 새싹이 자라난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는 우리의 마음 밭의 문제가 되는 것이다. 

4. 네 가지 땅이 있다. 길 가, 돌밭, 가시떨기, 좋은 땅… 길 가, 돌밭, 가시떨기에는 방해물들이 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라기 원하지만 그것을 방해하는 방해물들이 있다. 그 방해물들은 때로는 우리의 외부에서 때로는 우리의 내부에서 나타난다.

5. 결실을 맺기 위해서는 이러한 내적, 외적 방해물들을 제거해야만 한다. 말씀의 뿌리가 깊이 내릴 수 있도록 내 마음을 계속 점검해야 한다. 하지만 그 이전에 내 안에 말씀이 얼마나 뿌려지는지를 점검해야 한다. 말씀이 뿌려지지 않는다면 내 안에 내적, 외적 장애물들이 있다는 것 조차도 모르게 된다.

6.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와야 내 자신을 정확하게 바로 볼 수 있게 되고,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와야 내 안에 모나고 죄악된 모습이 보여지게 된다. 모든 것의 기준이 되시는 하나님 말씀이 들어와야 내가 어떤 땅인지를 알게 되고, 하나님 말씀이 들어와야만 무엇이 문제인지를 깨닫게 된다. 

7. 그러므로 어떤 땅이냐를 고민하기 이전에 내 안에 얼마나 말씀이 뿌려지는지를 더 먼저 고민해봐야 한다. 나는 얼마나 말씀을 대하고, 얼마나 말씀을 듣고, 얼마나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가? 시편 1편에서 “(복있는자는)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2절) 이라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이 뿌려지는 인생이 얼마나 복된 인생인가? 

8.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연구하고, 설교하는 것으로는 불충분하다. 아이들에게도 이 말씀을 뿌려야 한다. 아이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대하도록 계속해서 함께하고 격려해야 한다. 그저 알아서 하겠지, 시켰으니까 읽었겠지 하는 것으로는 불충분하다. 지금 이 때 하나님의 말씀이 이들 안에 심겨지지 않으면 나중에 어떻게 하도록 하겠는가? 아이들의 마음 밭을 생각하기 전에 부모가 할 일은 충분히 하나님의 말씀을 뿌리는 일이다. 

9. 교회의 성도들에게도 마찬가지이다. 계속해서 말씀을 뿌려야 한다. 우리의 마음은 언제 바뀔지 모르기 때문이다. 마음 밭은 하나님께 달려 있기 때문이다. 내가 뿌리고 뿌리다 보면 언젠가는 열매맺게 될 것이다. 지금 내가 할 일은 아이들에게도, 성도들에게도 말씀을 계속해서 뿌리는 일이다. 매일 밤 라인그룹에서 성경읽기를 하는 것이 때로는 너무 시간이 늦기도 하고 피곤하기도 하여 힘들기도 하다. 하지만 그것이 내가 할 일이기에 더욱 더 열심을 내어 뿌려야겠다. 뿌리는 것은 나의 일이고, 그들의 마음 밭과 열매맺게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내가 해야 할 일에 더 열심을 내자.

10. 오늘도 샬롬 

728x90
반응형
Posted by 신애친구™
728x90
반응형

마 3:20-35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 위해서는 물어야 한다

1. 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쌓여 계셨던 예수님은 식사할 겨를도 없으셨다 (20절). 그런데 예수님을 붙들고 나오던 사람은 종교 지도자들이 아니라 예수의 친족들이었다. “예수의 친족들이 듣고 그를 붙들러 나오니 이는 그가 미쳤다 함일러라" (21절)

2. 예수님의 능력과 권능을 본 친족들이 그를 미쳤다고 생각한 것이다. 어찌보면 예수님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던 그들의 반응은 정상적이다. 왜냐하면 가족들조차도 예수님을 제대로 못 알아보았기 때문이다. 

3. 31절을 보면 “그 때에 예수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와서 밖에 서서 사람을 보내어 예수를 부르니" 친족들이 불러서 해결하지 못하니 가족들까지 온 것으로 생각된다. 혹은 종교지도자들로부터 동원되었는지도 모르겠다. 

4. 하지만 예수님의 대답은 참으로 간결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35절) 지금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고 행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들이 내 혈육의 가족이라 할지라도 미안하지만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내 형제도, 자매도, 어머니도 아니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다. 

5. 조건은 단 하나이다.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알고 계셨다. 병든자를 고치시고 귀신을 내쫓으시는 일 모두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하는 일이었다.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신호였다. 하지만 예수님의 친족들도, 가족들도 지금은 아무도 깨닫지 못했다. 그 누구도 예수께 묻지 않았기 때문이다. 

6. 우리의 삶에서 먼저 해야 할 일을 예수님께서는 말씀해주셨다.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항상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살아가는 것이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때로는 주변 사람들이 다 이해하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내가 구해야 할 것은 그 사람들의 동의나 인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다. 물론 예의는 잃지 말아야 한다. 

7. 먼저 해야할 일을 먼저 하자.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더하실 것이다. 예수님은 그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하셨다.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셨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먼저 해야 할 일, 내가 구해야 하는 그 나라와 그 의를 먼저 잘 알아야 한다. 예수님은 그 모든 것을 잘 아셨다. 나는 어떻게 그 뜻을 알 수 있는가? 

8. 매일을 살아가면서 계속해서 하나님의 뜻을 물어야 한다. 물어야 알 수 있다. 모든 것에 선한 계획을 가지고 계신 분께 물어야 알 수 있다. 왜냐하면 그 분은 우리를 친구라 하셨고,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이제부터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 요 15:15

9. 물어야 듣고, 물어야 이해할 수 있다. 묻지 않으면 아버지의 뜻대로 살아갈 수 없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알려주신다 하셨다. 우리를 친구라 하셨다. 그 주님께 물어야 한다. 다윗이 가장 잘 한 것이 물은 것이었다. 오늘도 묻는 자로 살아가기 원한다. 아는 척, 잘난 척, 이해한 척 하지 말고 겸손하게 묻는 하루가 되자. 말씀하실 것이다.

10. 오늘도 샬롬 

728x90
반응형
Posted by 신애친구™
728x90
반응형

막 2:1-12 예수님이시라면…

1. 예수님께서 다시 가버나움으로 오셔서 집에 계시다는 소문이 들렸다 (1절).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문 앞까지도 들어설 자리가 없게 되었다 (2절). 그런데 예수님이 나타나셨다. 그리고 말씀을 시작하셨다.

2. 그 때 사람들이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워 가지고 예수께 나타난다 (3절). 그들은 문 앞까지 들어선 무리로 인해 예수께 가까이 갈 수 없었다. 그러자 그들은 그 집의 지붕으로 올라가서 지붕을 뜯고 구멍을 내어 예수께 중풍병자가 누운 상을 달아 내렸다 (4절). 

3. 도대체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이렇게 과격한 행동을 하게 하였는가? 5절을 보면 예수께서 보신 것은 그들의 믿음이었다.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그들이 가진 믿음은 아마도 “예수님이시라면…” 이라는 믿음이었을 것이다. “예수님이시라면 고치실 수 있을거야" “예수님이라면 해내실 수 있을꺼야” 라는 믿음이었을 것이다. 

4. 성경에는 이 집이 누구의 집인지 그리고 뜯어낸 지붕을 어떻게 처리했는지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그들은 많은 것을 걸었음에 틀림없다. 예수님이 오셨다는 소문을 듣고 거동이 불편한 중풍병자를 업고, 안고 이 곳까지 왔고 지붕으로 올라갔고, 지붕을 뜯어서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를 상에 올려 달아 내렸다. 

5. 중풍병자를 데리고 온 그들의 생각에도 지붕을 뜯고 나면 복구라든지 여러가지 문제들이 걸렸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이 아픈 자를 고쳐야겠다는 일념하나로 많은 것을 희생하였다. 그리고 “예수님이시라면…” 분명히 이 문제를 해결하실 거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6. 그 결과는 죄 사함을 받았고, 일어나서 자신이 누웠던 상을 들고 걸어가게 되었다. 이 과격한(radical) 믿음은 예수님을 전적으로 신뢰함에서 나왔고, 중풍병자를 진정으로 사랑함에서 나왔다. 친구인지 가족인지 알 수 없지만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았다면 그 많은 수고를 감수하고 데려오고, 지붕으로 올라가서 지붕을 뜯어서 내리지 않았을 것이다. 

7. 그들은 ‘하나님 사랑, 이웃사랑’을 실천한 사람들임에 틀림이 없었다. 예수님이 보신 믿음은 낫기를 원하는 중풍병자의 믿음이 아니었다. 그 중풍병자를 데리고 지붕까지 뜯은 그 주변 사람들의 믿음을 보신 것이었다. 최근에 요엘이에게 일어난 많은 일들을 생각하면서 오늘 본문을 보게 된다.

8. 나는 정말로 요엘이가 괜찮아질 것을 믿고 있는가? 나는 정말로 요엘이를 깊이 사랑하고 있는가? 내가 요엘이를 위해서 뜯어야 할 지붕은 무엇일까? 나는 정말 ‘예수님이시라면…’이라는 믿음이 있는 사람인가? 중풍병자는 자신의 믿음이 아니라 돕는 자들의 믿음으로 죄사함과 나음을 입었다. 나는 요엘이에게 그런 믿음이 있는 부모인가? 여러가지 생각들이 든다. 내가 뜯어야 할 지붕이 있다면 그 뒤의 상황을 두려워하지 않고 뜯을 수 있기를 원한다. ‘예수님이시라면…’이란 믿음을 가진 내가 되기를 원한다. 정말 그렇게 살아가기를 원한다.

9. 오늘도 샬롬

728x90
반응형
Posted by 신애친구™
728x90
반응형

막 1:21-34 오직 말씀으로

1. 오늘 본문에서는 계속 예수님의 권위를 강조하고 있다. 예수님이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시는 것에서도 그 분의 권위를 강조한다 “뭇 사람이 그의 교훈에 놀라니 이는 그가 가르치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22절)

2. 예수님께서는 도덕적인 삶이나 율법의 자잘한 해석보다는 분명히 하나님 나라의 복음에 대해서 이야기 하셨을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율법도 도덕적인 삶도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율법과 도덕적인 삶도 하나님 나라의 복음에 포함되어 있긴 하다.

3. 그리고 예수님께서 귀신을 내쫓으실 때에도 동일한 반응이 나타난다. “다 놀라 서로 물어 이르되 이는 어찜이냐 권위 있는 새 교훈이로다" (27절 중) 귀신을 내쫓으셨기 때문에 나타나 반응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예수님의 가르침이 분명히 달랐다는 것이다.

4. 율법으로, 천국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사용하여 장사하고 자신들의 이익을 채우는 서기관들이나 종교 지도자들과 다르게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이야기 하셨기 때문에 이런 다른 반응들이 나온 것일 것이다. 

5. 지금 우리 시대에도 종교 장사꾼이 많은 것 같다. 유튜브에는 수많은 음모론과 성경적 근거도 없는 말도 안되게 자극적인 종말론과 성경해석으로 사람들을 선동하는 사람들이 있다. 교회나 선교지에도 입으로는 하나님을 이야기 하면서도 그들의 마지막은 자신의 이익인 경우도 보게 된다. 

6. 오늘 말씀을 보면서 다른 사람을 판단하기 이전에 나는 그런 종교 장사꾼이 아닌지를 돌아보게 된다. 복음을 이야기 하고 하나님을 이야기 하면서도 그것의 결국이 내 이익을 추구하기 위한 것은 아닌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과는 다르게 나만 사랑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보게 된다. 아마도 내가 종교 장사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과 그렇게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7. 과연 내가 전하는 말씀은 권위가 있는 말씀인가? 말씀의 권위는 먼저는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에서 나오며 그 다음으로는 나의 삶의 거룩에서 나올텐데.. 난 어떠한 사람인가? 이번주 설교를 준비하면서 다시 한번 회개하며 예수님 앞으로 나아온다. 

8. 종교 장사꾼이 되고 싶지 않다. 그저 하나님을 즐거이 따라가는 자가 되고 싶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이 아니라 성경이 말하는 것을, 율법과 도덕이 아니라 복음과 사랑을 전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태국의 영혼들을 세우고 그들을 사랑하며 함께 하나님 나라를 위해 충성하는 자이고 싶다. 그렇게 살아가기 위해서 오늘도 더욱 더 말씀을 붙든다. 

9. 주님의 말씀만이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의 빛이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만이 옳고 완전하시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만이 내 심령과 골수를 쪼개어 종교 장사꾼으로 살아가지 않을 수 있도록 도우시기 때문이다. 그렇게 말씀에 붙들려 하루씩 살아가고 싶다. 

10. 오늘도 샬롬 

728x90
반응형
Posted by 신애친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