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Thinking)/Meditation2021. 12. 21. 1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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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 22:6-12 한 영혼이라도 더

1. 요한 계시록이 다 마쳐져 간다.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내용들, 생명나무에 대한 내용들을 보면서 그저 드는 마음은 감사이다. 모든 역사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으로 가득 차 있다. 

2. 오늘 말씀을 읽고 또 읽으면서 마음에 와 닿은 구절은 바로 7절이었다.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답답하고 두렵고 어려운 세상 속에 살아갈 때 가장 소망이 되는 말씀이 바로 이 말씀이 아닐까?

3. 세상에서 가장 쎈 우리 아빠가 와서 다 해결해 주실거라는 것이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죄인들 가운데로 오신다는 소식은 가장 기쁜 소식이고, 복음이다. 그런데 복음은 그것이 한번이 아니라 두 번이라고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그 사랑이 2000년 전에 아기 예수님으로 오신 것 뿐만 아니라 다시 오신다는 것이다.

4. 그리고 그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속히 오실거라고 말씀하신다. 말씀을 읽는데 마음이 울컥해졌다. 왜냐하면 우리가 스스로 어쩔 수 없는 이 상황들을 해결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오셨고, 이제 다시 오실 때에는 모든 것이 완성될 것이기 때문이다.

5. 내가 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된다. 예수님의 초림도, 재림도 내가 무엇을 더하고 뺄 수 있겠는가? 하지만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 사이에 나에게 맡겨주신 사명은 확실히 안다. 그 분이 속히 오시기 전에 한 영혼에게라도 더 주님을 전해야 한다. 

6. 19일 주일은 성탄절 예배로 드렸다. 이 땅에 오신 가장 겸손한 왕 아기 예수님을 경배하고 예배하였다. 이 날에 3명의 영혼들이 친구들의 초청을 통해 주님께 나아왔다. 성탄절 설교를 통해 복음을 전했다.

7. 이름은 드림, 붐, 시와컨이다. 이 세 명의 영혼들이 정말로 하나님을 만나면 좋겠다. 정말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좋겠다. 정말로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면 좋겠다. 수쿰빛 언약교회를 통해 예수님의 재림이 더 빨라질 수 있기를 소원한다. 

8.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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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21. 12. 21. 1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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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 22:1-5 소망과 은혜

1. 창세기가 역사의 처음 시작을 보여준다면 계시록은 역사의 마지막을 보여 준다. 창세기에서 인간이 타락한 후 그 상태로 영원히 살게 될 까봐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을 에덴동산에서 쫓아내셨다.

2. 그런데 계시록에서 그 생명나무가 당시 등장하게 된다. 이 곳은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로부터 나온 생명수가 흐르는 곳이다 (1절).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곳이다.

3. 그리고 이 곳에는 다시 생명나무가 회복되어 있다 (2절).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영적인 죽음에서 벗어난 우리는 이제 생명나무로 인해 우리는 영원이란 시간으로 향하게 된다. 

4. 그리고 그 곳에는 다시는 저주가 없다 (3절). 다시 밤도 없다 (5절). 악한 것이 전혀 없다. 그 이유는 빛 되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비치시기 때문이다 (5절). 그리고 이제 영적, 육적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은 우리는 세세토록 왕 노릇 하게 된다 (5절). 

5. 우리는 마지막에 있을 이 소망을 가지고 지금 어려운 오늘을 살아가는 것이다. 지금 당장은 어렵고 힘들더라도, 죄의 저주가 있고, 어둠이 있을지라도 이 마지막을 소망하며 오늘을 감내해 내는 것이다. 

6. 이 마지막은 멀어 보이기만 하고 지금의 현실은 어렵고 힘이 든다. 하지만 이 오늘 조차도 우리 힘으로 홀로 살아 가도록 두시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분의 이름은 임마누엘 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 이기 때문이다. 

7. 내 힘으로 얻어냈다고 생각했던 모든 것들,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모든 것들이 과연 나로부터 나온 것일까? 임마누엘의 하나님이 한 순간이라도 도우시지 않았다면 우리는 지금 어떠한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을까? 

8. 이 마지막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지만 지금 오늘은 임마누엘 하나님 안에 거하며 이 땅의 고단함을 이겨내야 한다. 억울하고 힘든 것들, 우리를 어렵게 하고 두렵게 하는 모든 것들을 임마누엘 하나님 안에 거하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입어야 한다. 이미 마지막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있지만 오늘의 고난과 어려움을 주님과 동행함으로 견디어 내는 것 그것이 바로 성도의 삶이다. 

9. 지난 1년을 돌아볼 때, 하나님께서는 늘 함께 해주셨다. 수쿰빛 언약교회 안에도 큰 은혜가 있었다. 마지막의 소망과 함께 계속해서 붙들어야 할 것은 바로 오늘의 임마누엘의 은혜이다. 그 소망과 은혜로 2022년도 주님과 함께 헤쳐나가길 원한다. 

10.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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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Thinking)/Meditation2021. 12. 13. 1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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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 18:1-8 거기서 나오라

1. 바벨론은 인간들의 모든 욕심과 추구하는 욕망들이 가득찬 곳을 상징한다. 2절을 보면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이 모이는 곳과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들이 모이는 곳이 되었도다" 하고 묘사하고 있다.

2. 3절을 보면 “그 음행의 진노의 포도주로 말미암아 만국이 무너졌으며 또 땅의 왕들이 그와 더불어 음행하였으며 땅의 상인들도 그 사치의 세력으로 치부하였도다"라고 묘사한다. 한 마디로 인간들이 추구하는 가짜 영광과 욕망들의 끝판왕의 모습이다.

3. 이러한 바빌론의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여하지 말고 그가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 (4절). 하나님은 계속해서 자신의 백성들을 불러 내신다. 

4.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들을 똑같이 인간들이 추구하는 욕망의 도시였던 애굽에서 불러내셨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애굽에서 나왔지만 애굽을 그리워하고, 애굽에서 먹던 음식을 그리워한다. 그래서 애굽이 아닌 새로운 바벨론이 등장하였을 때 또 욕망에 휩쓸린다. 

5. 하나님께서는 자꾸만 우리를 죄악으로 부터 불러 내시는데 우리는 하나님이 아닌 욕망을 자꾸만 쫓아간다. 계시록 18장은 이제 정말 마지막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장인데도 여전히 사람들은 하나님이 아니라 욕망에 끌리고 있다.

6. 이것은 어리석은 그 누군가의 모습이 아니라 바로 나의 모습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셨다고 말하면서도, 하나님께서 나를 죄에서 건저주셨다고 말하면서도 여전히 나의 욕망에 이끌려 간다.

7. 때로는 ‘사역’이라는 욕망에, 때로는 ‘소유’라는 욕망에, 때로는 ‘자녀’라는 욕망에, 때로는 ‘나를 증명하려는 욕망’에 사로잡혀서 그 욕망들을 하나님보다 더 크게 여기고 그 욕망들을 성취하기 위해서 따라가고 있다. 

8. 욕망을 쫓는 나에게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여하지 말고 그가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 (4절). 우리가 따라가야 할 것은 우리의 욕망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다. 욕망으로 하여금 나를 움직이게 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여금 나의 삶을 움직이도록 하자. 

9. 사역, 아이들 양육 모든 부분에서 고민과 생각이 많은 지금이다. 이럴 때에 더더욱 나의 욕망을 따라가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가며 악한 욕망들에서부터 나올 수 있는 내가 되기를 바란다. 

10.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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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Thinking)/Meditation2021. 12. 7. 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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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 14:1-13 거룩한 십사만 사천명? 믿음을 가진 자들

1. 모 단체를 통해서 유명해진 십사만 사천명이 나오는 본문이다. 그들의 해석처럼 이 십사만 사천명은 특별한 사람들이다. 왜냐하면 이들에 대해서 3절에서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속량함을 받은 십사만 사천 밖에는 능히 이 노래를 배울자가 없더라"

2. 하지만 이 사람들에 대한 설명은 이들이 특별히 선택된 거룩한 자들이 아니라 자신을 세상으로부터, 악으로부터 지키려고 하는 사람들임을 알 수 있다. 4-5절에서 자세하게 설명한다.

3. “이 사람들은 여자와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순결한 자라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사람 가운데에서 속량함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속한 자들이니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이더라"

4. 이 사람들인 자신들의 거룩한 행위로 구원받은 자들이 아니다. 오히려 세상이 가려고 하는 악의 길을 쫓지 아니하고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을 여전히 쫓아가고 있는 사람들인 것이다. 사도 바울의 표현처럼 이미 거룩함을 이뤄낸 사람들이 아니었다. 우리는 그 누구도 거룩함을 이룬 자일 수 없다. 

5. 오히려 그들은 부르심의 상을 위해 달려가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빌 3:13-14)

6. 12절도 그렇게 표현하고 있다.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에 대한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 십사만 사천명도 우리도 그 누구도 거룩한 자일 수 없다. 우리는 그저 끝까지 우리의 믿음을 지키며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자들일 뿐이다. 

7. 내 존재를 정확히 아는 것이 믿음의 시작이다. 내 안에 선한 것이 없고,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오늘도 죄와 싸우며 살아가는 것이 나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 지혜이다.  그래야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함을 알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능력과 노력으로 결코 거룩해질 수 없다.

8.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도, 그 입에 거짓말도 흠도 없는 자는 내가 아니다. 하지만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하여금 그런 자로 인정해주셨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 그 믿음을 우리의 의로 간주하신다 하셨다.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을 더욱 더 붙들자.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아니고서는 그 누구도 우리의 믿음을 지킬 수 없고, 의롭다 할 수 없다. 예수를 더욱 더 깊이 바라보자. 

9.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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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Thinking)/Meditation2021. 12. 6. 1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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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13:11-18 본질적인 차이를 깨달아야 한다

1. 그리스도를 모방한 존재가 나타났다. 비슷한 점이 한 둘이 아니다. 일단 “어린 양 같이 두 뿔이 있고" (11절) 어린양이신 예수님과 외면적으로 유사했다.

2. 그리고 많은 이적을 행하였다 (12-14절). 하늘로부터 불이 땅으로 내려오게 하고, 이적들을 통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미혹되게 한다 (14절). 그리고 그 짐승의 수는 완전수 777에서 모자란 666이다 (18절). 

3. 이적을 행하고 하는 것을 보면 뭔가 비슷한 것 같지만 결코 하나님이 아니다 모든 면에서 뭔가 아쉽다. 왜냐하면 창조물이 창조자가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4. 어느정도 흉내는 낼 수 있지만 창조자와 피조물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짐승이 아무리 이적을 행하고, 능력을 보여줘도 그는 피조물일 뿐이다. 

5. 나의 삶도 마찬가지이다. 내가 무엇인가를 하는 것 같아 보이는 그 순간에도 피조물인 내가 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이다. 나는 그저 그 분의 도구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이다. 그 사람에게서 어떤 능력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이다.

6. 그렇기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자리에 앉으려고 하는 태도가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을 경외하는 태도이다. 하나님의 도움으로 뭔가 하고 있다고 해서 그것이 나의 자부심이 되거나 영광이 되어서는 결코 안된다. 

7. 하나님 외에 그 모든 것은 다 가짜일 뿐이다. 사람들에게 속지 말고, 스스로에게 속지 말자. 우리가 의지하고 사랑해야 할 대상은 오직 하나님 한 분이시다. 다른 것을 의지하거나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에서 능력이 나온다고 생각하는 순간 넘어지고, 망가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8. 두려워하지 말고 쫄지 말자. 그 무엇도 하나님을 대신할 수 없고, 그 무엇도 하나님의 자리에 앉을 수 없다. 아무리 비슷하다고 하여도 그 본질은 완벽하게 다르다. 사역에서 두려워하지 말자. 사람도, 이뤄놓은 업적도 두려워하지 말자. 그리고 내 자신에 대해서도 늘 주의하자. 나는 아무것도 아님을 결코 잊지 말고, 하나님께서만 말씀하시고 일하시도록 하자. 내 안에 살고 있는 교만이라는 짐승에게 먹이를 주지 말자.

9.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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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Thinking)/Meditation2021. 11. 30. 1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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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 9:12-21 살리는 말을 하자

1. 여섯번째 나팔 재앙이 시작된다. 2억명의 군사들이 와서 사람 삼분의 일을 죽이게 된다 (15-16절). 

2. 그런데 본문에서 독특하게 보이는 것은 18절이다. “이 세 재앙 곧 자기들의 입에서 나오는 불과 연기와 유황으로 말미암아 사람 삼분의 일이 죽임을 당하니라"

3. 무기로 죽이는 것도 아니고, 전쟁을 통해 죽이는 것도 아니다. 사단은 자신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로 사람들을 죽게 만든다. 

4.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소생케 하고, 일어나게 하고, 회복되게 하고, 시험을 이기게 하지만, 사단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우리로 하여금 넘어지게 하고, 무너지게 하고, 결국은 우리를 죽음까지 이르게 만든다.

5. 내 입에는 무엇이 있는가? 하나님의 말씀인가? 아니면 사단의 말인가? 때로는 엄격해보이고, 심장과 폐부를 찌르는 것 같을지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살아난다. 반대로 아무리 좋고, 위로의 말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하나님이 말씀이 아니라면 그 마지막은 사망이다. 

6. 선교사로써, 목사로써 말을 해야 할 일이 많다. 권면도 해야하고, 위로도 해야 한다. 지금 내 입에 있는 말이 누구의 말인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면 그 입을 다물자. 하나님으로 하여금 내 입을 통해 말하시게 하자.

7. 내 말에 독이 묻어 있지는 않았는지 돌아보게 된다. 가족들을 향해서 한 말들 중에서 성도들을 향해 한 말들 중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것들이 많았을 것이다. 회개하자. 

8. 생명을 살리고 더 풍성하게 하는 사람으로 가정에, 태국에 있는 것을 결코 잊지 말고, 조금 덜 말하고, 말할 때 더 깊이 생각하고 말하자. 살리는 말을 하는 사람이 되자. 살리는 말을 하려면 내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충만해야 한다. 마음에 가득찬 것이 입으로 나오기 때문이다. 더 주의 말씀을 깊이, 오래 대하자. 

9.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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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Thinking)/Meditation2021. 11. 23.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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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 3:14-22 믿음만큼 중요한 행함

1. 성도라면 누구나 들어봤을만한 라오디게아 교회이다. 이 교회에게 예수님께서 책망하신 것은 미지근함이다. 차든지 뜨겁든지 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보통은 믿음의 양 극단으로 이해해왔다. 

2. 하지만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차가우라고 (열정없음) 말씀하실 이유는 없다. 미지근함이라도 차가움 보다는 낫지 않겠는가? 주석을 확인해보니 이것이 라오디게아 지역의 특징이었다.

3. “히에라볼리의 뜨거운 물에는 치유 효과가 있었고, 골로새의 차가운 물은 순수하고 마실만하며 생기를 복돋아 주는 효과가 있었다. 하지만 라오디게아 지역은 미지근한 물만을 공급받았다는 증거가 있다. 그 물은 맛이 없는 데다 구토를 유발했다. 사실 라오디게아는 그 위치가 상업에 유리하여 도시로 성장 했지만, 좋은 물을 공급 받는 곳으로 부터는 멀리 떨어져 있었다. 물을 공급 받기 위해 수도관을 놓으려고 해도 미지근하고 구토가 나는 물만 얻을 뿐이었다. 그리스도를 향한 그들의 행동의 결과가 그들이 가진 물과 같았다" NIGCT 요한계시록에서 발췌

4. 결국은 그들의 믿음이 미지근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행위가 아멘이고,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고,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그리스도께 합당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의 가식적인 행동에 예수님은 토해버리고 싶으셨던 것이다. 

5. 치유 효과가 있는 뜨거운 물처럼 살아가든지 아니면 순수하고 마실만하여 생기를 복돋을 수 있는 차가운 물처럼 살아가라는 것이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가식적인 삶은 예수님께서 싫어하신다는 것이다. 

6. 이신칭의는 너무나도 중요한 교리이다.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다 칭함을 받는다. 하지만 너무나도 많은 순간 믿음만을 강조하여 우리의 행위는 그리스도께서 토해버리고 싶으실만한 삶을 살아가면서도 믿음을 가졌다는 것으로 스스로를 자위하지 않는가? 

7. 뜨거운 믿음만 가지면 되는가? 스스로 뜨거운 믿음을 가졌다고 자부 하면서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계명을 무시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기독교를 무시당하게 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땅에 떨어지게 한 것이 아닌가? 

8. 세상 사람들이 관심도 없는 교리의 옳고 그름을 싸우느라 세상 사람들이 예수님을 보게 되는 통로인 우리의 삶은 미지근하지 않았는가? 오늘 나의 삶의 모습은 어떠한가? 치유효과가 있는 뜨거운 물과 같은가? 생기를 복돋아 주는 시원한 물과 같은가? 아니면 미지근하여 먹고 나면 구토가 나는 물과 같은 삶인가? 

9. 수쿰빛 언약교회에서, 가르치는 랏끄라방 감리교 신학교, 또 믿지 않는 사람들과 어울려 살아가는 방콕에서 나는 어떠한 존재인가? 뜨거운 물인가? 차가운 물인가? 아니면 미지근하여 토할것 같은 물인가? 믿음이 중요하지만 그 믿음만큼 삶이 또한 중요함을 잊지 말자. 야고보서의 말씀을 기억하자.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니라" 약 2:22

10.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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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21. 11. 19. 1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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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 2:12-17 사소한 타협은 사소하지 않다. 

1. 버가모 교회에 보내는 편지이다. 버가모 교회는 황제의 다스림 가운데 살고 있었다. 13절을 보면 이를 ‘사단의 권좌'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들은 황제에게 죽임을 당할지라도 믿음을 저버리지 않은 믿음의 사람들이었다 (13절). 충성스러운 사람들이었고, 주를 향해 자신의 생명도 버릴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2. 하지만 그들에게는 니골라 당의 교훈이 있었는데, 이 니골라 당의 교훈은 바로 세상의 것들과 신앙의 순수성을 타협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들은 죽음까지도 감수하면서 신앙을 지켰던 사람들이었는데 무엇을 타협한 것일까?

3. 이들이 타협했던 것은 사람들과의 갈등을 피하고자 우상에게 드려진 제물을 먹는 것이었다.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목숨까지도 아깝게 여기지 않았던 그들이었는데, 그들이 타협한 내용은 아주 작게 느껴지는 것이었다. 

4. 나의 삶에서도 이러한 모습들은 쉬이 나타난다. 정말로 중요한 문제라고 여겨지는 부분에서는 타협하지 않고, 목소리를 내지만 사소한 문제에서는 이정도 쯤이야 하고 넘어갈 때가 있다. 

5. 그런데 그러한 작은 타협의 시작은 결국 균열을 만들어내어 믿음을 넘어지게 만들고, 신앙의 순수성을 넘어지게 하고, 결국은 더 큰 것까지 타협하도록 만든다. 

6. 깨진 유리창의 법칙이란게 있다. 깨진 유리창 하나를 방치해 두면, 그 지점을 중심으로 범죄가 확산되기 시작한다는 이론으로, 사소한 무질서를 방치하면 큰 문제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을 잘 설명하는 것 같다. 

7. 내가 지금 타협하고 있는 작은 것은 무엇인가? 내가 지금 방치하고 있는 깨진 작은 유리창 하나는 무엇인가? 아마도 ‘바쁨'인 것 같다. 그 바쁨에 눌리면 큐티도 말씀읽기도 뒤로 밀린다. 하나님과의 교제의 시간도 후순위가 된다. 강의준비, 설교준비, 사역 등등에 밀려 더 중요한 하나님과 보내야 하는 시간을 빼앗기게 된다. 

8. 만약 ‘주일을 빠져야 한다’ 라는 큰 일(?)이라면 버가모 교회 사람들처럼 목숨을 걸고 지킬 것 같지만 바쁨이라는 작은 유혹(?)에는 생명을 걸고 싸우지 못하고 은근슬쩍 타협하며 우선순위를 놓치게 된다. 이렇게 타협하다보면 순식간이다. 

9. 깨진 유리창을 방치하지 않기 원한다. 작은 일에 더 생명을 걸고 우선순위를 지키기 원한다. 예전에 정갑신 목사님이 해주신 이야기가 기억에 남는다. 설교 준비를 하다보면 설교를 더 잘하고 싶어서 시간 확보를 위해 큐티를 빼먹고 싶은 마음이 들 때가 있다고 한다. 하지만 결정하시길 설교 준비를 위해 절대 큐티를 빼먹지 않기로 하셨고 지금도 지키고 계시다고 한다. 작은 일일 수록 더 타협하지 말자. 이러한 결정이 내 삶에 있기를 원한다. 

10. 오늘도 샬롬


* 몇 일간 카톡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큐티도 보내지 못했습니다. 정말로 답답한 사람은 제가 아니라 저와 연락을 해야 하는 다른 분들이었습니다. 기도생활을 되돌아보게 되었습니다. 기도가 멈춰지면 정말로 답답한 사람은 나일까? 하나님일까?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과의 소통이 막히지 않는 여러분들이 되시길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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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21. 11. 19. 1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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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 1:9-20 너무나도 진실된 요한의 정체성

1. 9절에서 계시록의 저자 요한은 자신을 소개하고 있다. 그런데 그 소개가 너무 멋있다. 뒷 부분에서 그리스도의 영광과 요한의 사명을 소개하고 있지만 이 소개가 너무 마음을 끌어 당긴다.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9절 상반부)

2. 그는 자신을 높게 취급하지 않았다. 그저 이 편지를 받을 사람들의 형제일 뿐이었다. 선교지에 있다 보면 ‘내가 누군데?’ 라는 말을 하시는 분도 있고, 말을 하진 않지만 그것을 행동으로 보여주시는 분도 있다. 태국 형제, 자매들에게 나는 누구인가? 나도 그들에게 목사나 선교사가 아니라 형제이길 원한다.

3. 그 다음 소개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라고 자신을 소개하고 있다. 그가 동참하는 것은 뭔가 있어 보이고, 좋아보이고, 권력과 부를 움켜쥐는 것이 아니었다. 그가 동참하는 것은 오히려 환난과 참음이었고, 예수의 나라였다. 

4. 요한이 동참하고 있는 것은 사실 우리가 걸어가야 하는 길이고 우리가 동참해야 하는 길이다. 하지만 그 첫 마음은 어디가고 내가 동참하고 싶은 것은 예수님으로 인한 떡고물에 점점 더 관심이 많아지는 것 같다.

5. 주님의 몸된 교회를 이야기 하면서도 더 많은 성도, 더 많은 성과 등의 크리스텐덤적 (기독교 제국주의)인 사고를 계속 하고 있다. 주님의 환난과 참음을 이야기 하지만 환난보다는 영광을 생각하고, 나는 나의 자녀들에게도 그렇게 오래참고 싶지 않다. 

6. 그런데 요한은 밧모섬에 갖힌 상태에서 편지를 쓰면서도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의 그 정체성을 그대로 붙들고 있었다. 요한의 자기 정체성이 나의 정체성이 되어 나도 어딘가 가면 그렇게 소개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 원한다.

7. 그렇다면 나는 어떤 사람인가? 나는 어떤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가? 나는 그리스도의 제자이자 형제인가? 그리스도의 환난과 참음과 나라에 동참하는 자인가? 어떤 부분에서는 분명히 그렇고, 어떤 부분에서는 또 분명히 아니다. 나의 정체성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분명히 세울 수 있게 되기를 원한다.

8. 잊지 말자. 나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이고, 모두의 형제일 뿐이다. 높아지려고 하지말고, 잘나가려고 하지 말고 오늘을 살아내자. 바쁜 사역과 사역의 준비 속에서도 나의 정체성을 잊지 말자. 

9. 오늘도 샬롬

*내일 랏끄라방 감리교 신학교에서 선교학 2번째 강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고 계신 선교에 대해서 잘 나눌 수 있도록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늘 감사합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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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21. 11. 11. 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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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26:1-12 나의 존재를 무엇 위에 세울 것인가? 

1. 다윗은 그 누구보다 더 많은 인정을 구해야만 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부모가 인정하지 않았던 막내아들이었고, 사울의 딸인 아내 미갈로부터도 늘 무시를 당했다. 사람이라면 다른 사람들의 인정을 구하지 않을 수 없다. 

2. 하지만 다윗의 장점은 그러한 자신의 삶의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고 그 분의 인정을 구하였다. “내가 나의 완전함에 행하였사오며 흔들리지 아니하고 여호와를 의지하였사오니 여호와여 나를 판단하소서" (1절)

3. 그리고 다윗은 하나님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그 곳을 사모하였다. “여호와여 주께서 계신 집과 주의 영광이 머무는 곳을 사랑하오니” (8절) 하나님을 얼마나 사랑했으면 하나님의 임재하신 곳 또한 그렇게 사랑한 것일까? 

4. 그의 존재의 기반 자체가 하나님이였기에 그는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었고, 하나님의 인정만 있으면 다른 사람으로부터 오는 인정은 필요하지 않았던 것 같다. 나의 존재를 하나님으로 세우는 과정이 없이는 바람의 흩날리는 갈대와 같은 인생이 될 수 밖에 없다. 

5. 나는 오늘 무엇 위에 나의 존재를 세우고 있는가? 하나님인가? 아니면 내가 하고 있는 어떤 사역인가? 내가 섬기고 있는 교회인가? 아니면 내가 잘 하는 어떤 것인가? 이 모든 것들은 사람의 눈에 보기에 잘 될어갈 때도 있겠지만 잘 안되어 갈 때도 분명히 있다.

6. 나의 존재를 변하는 그 무엇인가에 둔다면 그것이 변하면, 쇠퇴하면 나의 존재 자체도 변화하고 쇠퇴하게 된다. 결국 영원한 하나님께 나의 존재를 두어야만 흔들리지 않게 된다. 

7. 오늘도 나의 존재를 영원하신 하나님 위에 세우기 원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남님 앞으로 계속해서 나아가야 한다. 하나님 앞에서 시간을 보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어야 하고, 묵상해야 하고, 들어야 한다. 

8. 어느 분의 글에서 봤다. 만약 칼빈이 지금 태어났다면 20세에 기독교 강요를 쓰지 못했을거라고.. 유혹이 너무 많다. 재미있는 것들, 유튜브, 넷플릭스 등등등 우리의 시간을 빼앗아가고, 하나님 앞에서 시간을 보내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너무나도 많다. 그런 것들 보다 더 주님 앞에 서 있는 시간이 더 달았으면… 오늘도 의지적으로 더 그 분 앞에 서 있는 내가 되길..

9. 오늘도 샬롬


*이번 학기에 랏끄라방 감리교 신학교에서 선교학을 강의하게 되었습니다. 어제가 첫 강의였는데 감사하게도 잘 마쳤고, 12주 동안 매주 수요일에 9-12시까지 강의를 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선교가 더 나눠지고, 저는 지식적인 준비 뿐만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며 준비할 수 있도록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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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