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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21:15-25 내 양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양이다 

1. 우리가 잘 아는 본문이다. 베드로는 3번 부인했고,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3번 사랑하는지 물어보신다. 그것은 예수님이 베드로의 3번 부인에 대한 3번 사랑의 확증이라고 말씀하신다.

2. 그리고 나서 하신 말씀들이 오늘 마음에 와 닿는다. 첫 번째는 '내 양을 먹이라’고 말씀하셨고, 두 번째는 ‘내 양을 치라’ 하셨고, 마지막에는 ‘내 양을 먹이라’고 하셨다. 본문을 읽으면서 본문의 핵심이 '먹이라, 치라, 먹이라' 라는 동사보다 양의 소유권에 둬야 하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3. 베드로를 회복시킨 주님이 베드로에게 맡긴 양은 결코 단 한번도 베드로의 양이 아니었다. “내 양” 즉, 주님의 양이었을 뿐이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세 번의 고백을 통해 맡기신 양은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의 양이었다. 

4. 나의 양이 아니다. 주님의 양이다. 내가 돌보고 있지만 그 양의 소유권은 단 한번도 내 것일 수 없다. 주님의 양이고, 주님께서 인도하시고, 주님께서 이끌어가실 양일 뿐이다. 우리는 그저 위임받은 종일 뿐이다.

5. 나는 그 양들을 먹이고, 치고, 먹이는 목동일 뿐이지, 그 양은 절대로 내 양일 수 없다. 교인들을 보면서, 제자훈련을 하면서 순간 순간 잘못 생각하는 부분이 바로 이 부분이 아닐가 싶다. 그 양을 나의 양이라 생각한다. 예수님께 그들을 이끌어 가기 원하지만 예수님의 말보다는 내 말을 들어야 한다고 생각할 때가 생각할 때가 있다.

6. 내가 권한을 행사하고, 내가 지시하는 방향으로 가야 하고, 내가 목자라고 착각할 때가 있다. 진정한 목자는 주님이시다. 우리는 그저 위임받은 양들을 먹이고, 칠 뿐이다. 주님의 양인 것을 잊어버리면 그 때부터 내가 드러나기 시작한다. 

7. 교회를 함께 세워가고 있다는 것은 목양팀의 각 사람들이 내 양이란 생각을 버려야 가능하다. 내 양이 아니라 주님의 양이며 우리는 그저 주님께 위임받은 연약한 사람일 뿐임을 이해할 때 우리는 겸손하게 그 양들을 주님께 올려드릴 수 있게 된다. 

8. 나는 우리 수쿰빛 언약교회 성도들을 누구의 양이라 생각하는가? 혹시 내가 양육하고 있는 사람들을 내가 좌지우지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은가? 보이지 않으시는 영원하신 하나님보다 혹시 내가 드러나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지는 않은가? 

9. 다시 한번 깨닫게 되는 하루가 되기 원한다. 내 양이 아니다. 그리스도 양일 뿐이다. 나는 무익한 종이다. 나는 내가 해야만 하는 일을 할 뿐인 무익한 종이다.

10.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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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20:19-31 표적이 아니라 임재가 더 중요하다. 

1. 예수께서 부활하셔서 나타나셨다. 도마를 제외한 제자들에게는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셨다 (20절). 그리하여 제자들은 주를 보고 기뻐하게 되었다 (20절). 문제는 도마였다. 그는 예수께서 오셨을 때 함께 있지 아니하였고, 예수께서 부활하셨음을 믿지 못하였다. 예수님은 그런 도마에게 다시 나타나주셨고, (26절) 그런 도마에게 말씀하셨다. 

2.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의 목적은 도마가 믿음 있는 자가 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3. 사도들 이후의 모든 세대는 예수님의 손과 옆구리를 보지 못했던 사람들이다. 도마는 그래도 예수님과 함께 있었던 경험이라도 있었지만 우리는 그것조차도 없는 연약한 사람들일 뿐이다. 

4. 하지만 여전히 도마와 같은 우리 세대에 예수님은 우리에게 계속해서 나타나서 말씀하여 주신다. 방법은 여러가지일 것이다. 기도 중에, 예배 중에, 묵상 중에 주님을 만난다. 주님은 우리로 하여금 믿는 자가 되기를 바라셨다. 

5. 오늘도 주님을 만나고 있는가? 오늘도 믿음 없는 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 주님을 만나고 있는가? 모든 방법을 뛰어넘는 하나님을 만나고 있는가? 만나지 않고서는 믿는 자가 될 수 없다. 만나지 않고서는 사랑할 수 없다. 

6. 늘 도마가 믿음이 없는 아이콘 같았다. 반면에 나는 그렇지 않은 것 같았고, 적어도 나는 예수를 믿는 사람 같았다. 하지만 도마가 했던 표적을 구하는 기도(?)는 나도 때로는 하는 기도 아닌가? 이렇게 해주시면 하나님 뜻으로 알겠습니다 혹은 저렇게 해주시면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알고 가겠습니다 등등 말이다.

7. 하나님은 늘 나에게 말씀하시고, 늘 내 옆에 계시고, 늘 나를 인도하시는데도 여전히 나는 표적을 구한다. 표적이 중요한게 아니라 임재가 중요한 것이다. 예수님의 임재를 경험한 도마는 그 옆구리와 손의 못 자국에 손가락을 넣지 않고서도 예수를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라고 고백하게 된다 (28절)

8. 오늘도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있는가? 그 임재 가운데서 믿음을 경험하고 있는가? 덮어놓고 믿는게 아니다. 경험해야 하고, 알아야 하고 이해해야 한다. 오늘 그 임재 가운데 들어가기 원한다. 일에 치이고, 시간에 쫓기고, 할 일에 쫓기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서 걸어가는 하루가 되기를 원한다. 

9. 거룩하신 하나님의 임재로 인해서 믿음이 변하고, 시선이 변하고, 생명을 얻는 하루가 되기 원한다. 그리고 더 깊은 임재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시간의 거룩한 낭비가 있는 하루가 되기를 원한다. 

10.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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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Thinking)/Meditation2021. 3. 30. 1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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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18:12-27 어떤 부인을 할 것인가?

1. 베드로의 부인의 모습은 사실 너무나도 잘 아는 모습이다. 그의 부인은 사실 새로운 것이 없다. 왜냐하면 날마다 매일의 삶에서 일어나는 모습이기 때문이다. 

2. 그가 예수를 부인할 때 했던 말은 17절을 보면 “나는 아니라” 였다. 이 말은 세례요한이 했던 말과 동일했다. 요 1:21 "또 묻되 그러면 누구냐 네가 엘리아냐 이르되 나는 아니라 또 묻되 네가 그 선지자냐 대답하되 아니라"

3. 동일한 말이지만 부인한 이유가 달랐고, 그 말 속의 의미도 달랐다. 세례요한의 부인이 not I, but Christ 였다면, 베드로의 부인은 not Christ, but me 였다. 세례요한은 자신을 추종하려는 세력들 앞에서 자신이 그리스도가 아님을 당당히 말하였다.

4. 베드로는 자신의 스승 그리스도를 잡은 자들이 자기도 잡으려고 하자 그것이 두려워 자신이 그 분의 제자가 아니라고 부인한 것이다. 이러한 태도가 얼마나 자주 내 삶에서 일어나는가? 세례요한과 같이 자기를 부인하고자 하지만 더 많은 순간 베드로와 같이 내가 그 분과 함께 자임을 부인하지는 않는가? 

5. 고난 주간에 베드로의 부인을 보면서 나의 연약함이 떠오른다. 내가 얼마나 약하고 부족한 사람인지를 생각하게 된다. 그리스도를 사랑하기 원하고, 그리스도를 따라가기 원하면서도 더 많은 순간 그 분을 부인하고, 내 자신의 유익을 쫓는 것이 나의 삶이 아닌가?

6. 하지만 베드로의 부인과는 다르게, 예수님은 당당하셨다. 대제사장 앞에서도 해야 할 이야기를 하셨다. 세례요한도 마찬가지로 당당했다. 왜냐하면 두 사람은 자신들이 본 것을, 자신들이 아는 것을, 자신들의 진실을 이야기 하고 있기 때문이다. 죽음으로도 가릴 수 없는 진실과 하나님의 영광이 그들의 삶에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7. 어떻게 살 것인가? 진실로 주님을 따르며 당당하게 살 것인가? 아니면 비굴하고, 목숨을 얻기 위해 거짓을 말하며 나를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부인할 것인가?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 요 12:25

8. 삶에서 베드로의 부인이 아니라 세례요한의 부인이 있기를 원한다. 나를 사랑하고, 나를 위하고, 나의 생명을 위한 길이 아니라 예수께서 걸어가신 길 처럼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 좁은 곳으로, 낮은 곳으로 가는 자가 되기 원한다. 지금은 그럴 힘과 능력이 없을지라도, 계속해서 그렇게 주님의 뒤를 따라가기 원한다.

9. 주님 베드로와 같은 저를 도우소서…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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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Thinking)/Meditation2021. 3. 30. 0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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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18:1-11 모두와 한 영혼

1. 예수께서는 자신을 잡으로 온 군병들 앞에서도 당당하셨다. 잘못한 것이 없으니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긴급한 상황 속에서도 예수께서는 자신과 함께 있는 사람들을 생각하셨다.

2. 8절을 보면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너희에게 내가 그니라 하였으니 나를 찾거든 이 사람들이 가는 것은 용납하라 하시니” 본인은 이제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야 하고, 고난을 받아야 하는데도 예수께서는 본인과 함께 있는 제자들, 곧 자신을 부인하고 떠나갈 그들을 배려하고 계셨다.

3. 그런데 그 이유도 결국은 9절 말씀 때문이다. “이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 중에서 하나도 잃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예수님께서는 단 한 사람도 잃을 수 없었다. 단순히 말로만 한 사람도 잃을 수 없었다 말씀하시는게 아니라 그 분은 결국 그 모든 사람들을 잃지 않으시려고 십자가로 가고 계신다. 

4. 예수님께서 하시던 일은 결국 그 한 사람을 잃지 않고 살리시는 일이었고, 그 한 사람, 한 사람이 모여 모두를 살리시는 일이셨다. 그 모두를 살리기 위해 십자가로 가시지만, 오늘은 또 그 몇 사람을 잃지 않기 위해 자신을 “내가 그니라”라고 소개하면서 까지 그들을 구원하신다. 

5. 한 영혼에 대한 이야기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하지만 때로는 모든 사람을 살리는 십자가를 위해 (큰 대의를 위해) 한 사람은 희생되거나 고려되지 못하는 순간도 있다.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6. 선교라는 대의(?)를 위해 가장 희생을 강요당하는 사람은 다름아닌 가족인 것 같다. 나의 사역이 많아지고, 넓어질수록 가족들은 원하든 원치않든 희생을 할 수 밖에 없다. 최근에도 작년에 남편 선교사님이 사고로 소천하신 교회에 설교자가 없다고 하여 아내와 아무런 상의도 없이 설교를 가겠다고 결정 하였다.

7. 아내도 그 교회와 상황에 대해서 알기 때문에 그것에 대해서 반대하지는 않지만 아내가 염려하는 부분은 내가 바빠지면 바빠질수록 좀 더 신경이 날카로워지고, 웃음기가 사라지고, 아이들에게 더 엄해진다고 한다. 물론 아내가 그렇게 이야기 할 때 그 순간은 그냥 아니라고 넘겼지만.. 사실 그럴 것이다. 

8. 선교라는 대의를 위해서 가족들에게 쉽게 희생과 헌신을 강조하는 것은 예수님이 원하시는 일도 아닐 것이고, 예수님도 결코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바쁘더라도, 정신이 없더라도 가족들에게 더 사랑으로, 더 넓은 마음으로 대해야 한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도 자신들에게 있는 한 영혼도 잃지 않으려고 하셨기 때문이다. 

9. 그리고 내가 다른 한 영혼을 얻기 위해 하는 수고와 노력이 우리 아이들에게도 동일하게 있어야 하겠다. 예수님을 바르게 알도록 함께 예배하고 가르치며, 바쁠수록 더 웃고, 더 시간을 내야겠다. 대의와 한 영혼에 대한 균형을 잘 잡는 사역자가 되고 싶다.

10.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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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Thinking)/Meditation2021. 3. 24. 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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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16:16-24 근심이 기쁨이 되려면…

1.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이제 조금 있으면 자신을 볼 수 없다고 하신 말씀을 이해하지 못한다. 예수님은 시선은 늘 자신의 대속의 죽음을 향해 있는데, 제자들은 예수님과 다른 방향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

2.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 (20절) 근심은 예수님을 바라보지 못할 때 나온다. 하지만 그 근심은 근심으로 끝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부활하실 것이고, 우리는 예수님을 다시 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3. 예수님에 대한 시선을 놓칠 때 우리는 근심하게 되고, 예수님 예수님을 바라보게 될 때 우리는 기뻐하게 될 것이다. 지금 어디를 보고 있는가? 시선이 어디를 향해 있느냐? 스스로에게 물어야 하는 질문이다.

4. 하지만 우리의 시선은 언제나 연약하다. 쉬이 예수님을 놓치게 된다. 이러한 연약한 우리들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으리라” (22절)

5. 우리가 예수님을 힘써 찾아보고, 우리의 시선을 회복하는 것이 아니다. 22절에서 “예수께서 우리를 다시 보신다”고 말씀하고 있다. 그 분은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내 힘으로 당신을 볼 수 없다는 것을 아시기 때문이다.

6. 예수를 바라봄에서 오는 기쁨도 결국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다. 주님을 아는 기쁨에도, 나의 구원에도 결국은 나의 아무런 공로도 없다는 것이다. 내가 가장 무능한 일에서 예수님께서 우리를 도우신다. 

7. 예수를 바라보아야 기쁨이 오는데, 이것 조차도 내 힘으로 할 수 없고, 주님이 먼저 우리를 먼저 돌아 보신다. 주님 앞에 나의 연약함을 고백하자. 내가 할 수 없다고, 내가 무능하다고, 그래서 나는 주님이 필요하다고…

8. 주님께 마음을 연 자마다, 주님께 우리의 연약함을 고백하는 자마다 기쁨이 충만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 예수님께서 우리를 그냥 두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의 약할 때, 그 때가 바로 강함이기 때문이다. 

9. 많은 사역속에 늘 부족한 시간, 준비와 섬김 속에서 발견하는 연약한 나의 모습.. 하지만 이러한 나의 모습을 주님께 올려 드리고, 주님께서 나를 붙드심을 믿고 나의 근심이 기쁨으로 바뀌는 은혜를 오늘도 체험하기 원한다. 

10. 오늘도 샬롬


#어제 다들 기도해주셔서 신학교에서 잘 나눌 수 있었습니다. 너무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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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Thinking)/Meditation2021. 3. 23. 1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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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16:1-15 하나님의 일을 스스로 정의하지 말자

1. 자주 사람들은 복음이 아니라 자신의 신념을 따라서 행하게 된다. 그러면서도 그 사실을 모르거나 자신은 그렇지 않을거라고 착각할 때가 있다. 모두가 반대하는 교회세습을 하면서도 하나님이 허락하셨다고 말하거나 정부와 대부분의 교회들이 온라인 예배를 드리는데도 하나님이 지켜주실거라며 큰 집회를 열어 많은 감염자가 나왔던 일 처럼 말이다. 오히려 자신의 무지와 신념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착각하는 경우도 있다. 

2. “사람들이 너희를 출교할 뿐 아니라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 하리라” (2절) 사람들을 출교시키고, 죽이면서도 그 일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이런 일들이 어떻게 일어나는 것일까? 예수님께서는 3절에서 이야기 하신다. “그들이 이런 일을 할 것은 아버지와 나를 알지 못함이라” (3절)

3.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제대로 알지 못하면 우리는 우리 생각에 옳은 일을 하게 된다. 그런데 우리 생각에 옳은 일이 결코 하나님의 일과 같다고 할 수 없다. 하나님의 뜻도 될 수 없다. 그런데도 내 뜻을 하나님의 뜻인 것 처럼 내 생각을 하나님께서 나에게만 주신 좋은 생각인 것 처럼 추종할 때가 있다. 

4. 먼저 하나님과 예수님을 힘써서 알아야 한다. 그런데 그게 다가 아니다. 13절을 보면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라고 말씀하고 있다. 성령의 충만함 속에서 우리는 다윗과 같이 늘 하나님의 뜻을 물어야 하는 것이다. 

5. 안다고 생각하면 넘어진다. 내가 맞다고 생각하면 들리지 않게 된다. 옳은 분은, 맞는 분은 하나님 한 분이시다. 결코 내가 맞을수도 내가 옳을수도 없다. 오직 주님께 물어야 하고, 진리의 영이신 성령 안에서 확증을 받아야 한다. 

6. 내 삶을 돌이켜 볼 때, 사사기 때 백성들과 같이 행할 때가 많다.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내가 옳아봤자 얼마나 옳겠는가? 내가 맞아봤자 얼마나 맞겠는가? 늘 완전하시고, 모든 것을 아시는 그 하나님께 맡기지 못한다면 그것은 나의 아집이 될 뿐이고, 하나님의 영광을 내 생각으로 가리게 될 뿐이다.

7. 오늘 지금 나는 진리의 영이신 성령으로 충만한가? 그리하여 내가 옳다고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께 묻고 있는가? 하나님이 나를 이끌어 나가시도록 나를 드리고 있는가? 아니면 내 생각과 내가 옳다고 여기는 것이 나를 이끌어 가도록 하고 있는가?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다고 자부하면서 다른 사람들을 죽이고 있지는 않은가? 

8. 내가 지금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다고 여기기에(사역자가 쉽게 범하는 오류이다) 아이들과 아내에게 일방적인 희생을 강요하지 않는가? 스스로를 돌아보며 내가 진리의 영 안에 거할 수 있게 되기를 원한다. 내 생각과 나를 따르지 않고, 온전히 우리를 새롭게 하시는 그리스도를 따르고, 그 분께 묻기 원한다.

9. 오늘도 샬롬


# 한국 시간으로 7시-8시 정도에 제가 오늘 침례교 신학교에서 다문화권 리더들이 함께 개척한 수쿰빛 언약교회에 대해서 1시간 정도 나눌 기회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첫 신학교 강의(?)라 긴장이 많이 됩니다.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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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Thinking)/Meditation2021. 3. 18. 1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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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14:1-14 믿음으로 이겨내는 염려

1. 아침에 일어나자 마자 아내가 애들 방 에어컨이 고장이 났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태국에서는 뭐가 참 잘 고장나고, 잘 망가진다. 그 이야기를 듣는데, 근심이 밀려왔다. 



2. 수리기사를 부르고, 고치고 하는 과정을 많이 해봐서 아는데 과정이 번거롭고, 불러도 오래 기다려야 하고... 또 그러면 그동안은 에어콘을 못 쓰고.. 하는 과정이 머리 속에 그려지면서 염려가 되기 시작했다.



3. 그런데 오늘 본문을 폈는데 1절이 이렇게 시작한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물론 예수님이 말씀하신 컨텍스트와 나의 컨텍스트가 일치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근심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는게 어찌나 큰 힘이 되는지...




4. 제자들도 지금 뭔가 의심과 두려움에 차 있는 순간이다. 예수님은 어디로 가신다고 하는데, 자신들은 어디로 가는지 모르겠고, 예수님은 이제 자기들과 함께 더 있지 못한다고 말씀하시기에 확신할 수 있도록 아버지를 보여 달라고 하고... 혼란의 대잔치이다.



5.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제자들에게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6절)이라고 말씀하시고, 아버지를 보여 달라는 제자들에게는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9절)이라고 그들에게 확신을 주신다. 



6. 우리는 약속을 붙들고 가는 사람이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우리에게 그 나라를 보여주시고, 약속들을 우리에게 주셨다. 예수님은 지금 계시지 않지만 그 분의 말씀과 그 분의 약속은 여전히 우리에게 있다. 그리고 그 약속의 정점은 성령님이시다. 



7. 약속대로 성령님께서 오셨고, 성령님께서 늘 우리와 함께 계신다. 눈에 보이지 않아도, 때로는 느껴지지 않아도 우리는 우리의 감정과 두려움을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약속을 믿고, 그 분을 따라가야 한다. 



8. 상황은 변하고, 염려의 제목들은 줄어들지 않는 것 처럼 보인다. 하지만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따라가며, 그 분의 약속의 말씀에 순종하다 보면... 우리의 상황이 변하지 않아도 상황을 보는 우리의 시선이 변하게 될 것이다. 1절의 말씀처럼 그 분을 믿기에 더 이상 근심하지 않을 수 있게 될 것이다.



9. 오늘도 두려움과 염려를 거절하기 원한다. 그 분을 믿기에 그 분의 약속을 가지고 있기에.. 오늘도 믿음으로 하루를 살아가기 원한다. 길이신, 진리이신, 생명이신 그 분과 함께 걷는 하루가 되기 원한다.

10.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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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21. 3. 17. 1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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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13:31-38 내 힘이 아닌 주님의 도우심으로

1.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새계명을 주신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34절) 그리고 35절에는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라고 말씀하신다. 

2. 예수님은 너희들이 그냥 스스로에게 힘을 끌어내어 사랑하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다. 애써서 사랑하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다. 우리가 사랑할 수 있는 이유는 언제나 우리가 먼저 사랑받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기 때문이다. 사랑이 우리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3. 예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았기에, 그 받은 사랑의 힘으로 사랑할 수 있는 것이다. 누구의 힘으로 사랑하려고 하고 있는가? 사랑을 하기 위해 애쓰는 것은 한계가 있다. 먼저 내게 주신 사랑을 알아야 하고, 그 사랑을 누려야 한다. 나는 오늘 누리고 있는가?

4. 베드로에게 말씀하신다. “시몬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 (36절) 그가 예수님을 지금 따라갈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인가? 

5. 그가 자신의 힘으로 예수를 사랑하려고 하고, 따라가려고 해도 그것으로는 안된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을 사랑하려는 것과 같은 모습이다. 아무리 애써도 우리 힘으로는 예수님을 사랑할 수도 따라갈 수도 없다. 우리가 받은 사랑 안에 거해야 하고, 성령의 능력이 우리를 이끌어주셔야 한다. 

6. 결국은 은혜요, 결국은 주님의 사랑이요, 결국은 성령의 능력이다. 자랑할 것이 없고, 내가 드러날 것이 전혀 없다. 그렇기에 더더욱 구해야 할 것도 주님의 도우심 뿐이다. 

7. 오늘 무엇을 의지하며 무엇을 생각하며 살아가는가? 내 힘인가? 내 능력인가? 나의 어떠한 것들인가? 아니면 성령의 도우심이고, 은혜이고, 주님의 사랑인가? 오늘을 주님의 도우심으로 살아가기 원한다. 할 일들이 많다. 성경공부 준비, 설교 준비, 강의 준비, 예배 준비 등등등… 그 분량과 무게와 태국어의 부족함이 나를 누르지만…

8. 주님의 은혜와 사랑, 성령의 능력을 의지하며 오늘을 보내기 원한다. 내가 받은 사랑을 기억하며 또한 사랑하기 원한다. 

9.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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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21. 3. 16. 1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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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13:21-30 가롯 유다와 같은 죄인이 바로 ‘나'

1. 유다는 예수님을 팔 준비를 이미 하고 있었고, 예수께서는 그 일을 이미 알고 계셨다. 유다를 보는 예수님의 마음과 예수님을 보는 유다의 마음이 어땠을까?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이 모든 일을 아셨으니 좀 더 이 일을 편하게 받아들이셨을까?

2. 유다는 어땠을까? 오늘 본문에는 유다가 거사를 치르기 전에 예수께서 그를 자신을 팔 사람으로 지칭하시는 장면이 나온다. 그가 꾸미고 있는 음모에 대해서 유다는 오늘 지적을 받는다. 26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떡 한 조각을 적셔다 주는 자가 그니라 하시고 곧 한 조각을 적셔서 가롯 시몬의 아들 유다에게 주시니"

3. 유다의 입장에서는 아차 싶었을 것이다. 얼마나 두근거렸을까? 얼마나 떨렸을까? 예수님께서 주신 기회였다. 분명히 이 때가 가롯 유다가 회개할 수 있는 기회였다. 하지만 분명히 마지막 기회는 아니었다. 아마도 그가 죽기 직전까지 수 없는 회개의 기회들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때마다 회개하지 않았고, 결국은 자신의 목숨을 스스로 끊는 죄를 또다시 범하고 말았다. 

4.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늘 우리에게 회개하고 돌아올 기회를 허락하여 주신다. 물론 우리의 힘으로 회개할 수 있다고 쉽게 생각하면 안된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회개의 결정을 존중하시고, 계속해서 우리에게 기회를 주신다. 

5. 신앙생활에서 가장 큰 오류는 내가 가롯유다 같은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할 때이다. 나는 이 정도면 괜찮고, 이 정도면 하나님 앞에 설 만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바로 그 때가 우리가 넘어지는 순간이다. 가롯 유다는 예수님을 자신의 기준으로 판단했고, 자신이 옳다고 믿었기에 예수님을 파는 잘못을 저지르고 회개하지 않았다. 

6. 나의 지금 정체성은 누구인가? 꽤 괜찮은 사람인가? 꽤 거룩한 사람이기에 남도 판단하고 하나님도 판단하며 내가 하나님보다 더 지혜롭다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은가? 아니면 내가 가롯유다와 같이 수없는 회개의 기회에도 회개하지 않으며 하나님을 거역하는 죄인인가? 나는 나를 누구로 생각하는가?

7. 자주 내 정체성을 오해한다. 꽤 괜찮은 사람으로.. 꽤 겸손한 사람으로 말이다. 하지만 결코 아니다. 막 10:1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예수님도 말씀하셨다. 나는 가롯 유다와 같은 사람으로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이다.

8. 착각하지 말자. 오해하지 말자. 나의 나 된 것은 오로지 주의 은혜이지, 나의 어떠함이 아니다. 주님이 계속해서 기회를 주신다. 여전히 생명을 갖게 하신다. 이 때에 회개하며 주님 앞에 더욱 더 나아가기 원한다. 더욱 더 내가 죄인임을 자각하고 주님 앞에 손 들고 나오는 사람이 되기를 원한다. 

9. 오늘도 그렇게 겸손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의지하며 복음이 나의 삶을 바꿔주셨음에 감사하며 그렇게 살아가기를 원한다. 

10.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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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21. 3. 15.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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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13:1-20 그리스도의 본을 따라 섬기는 자로 살아가는 삶

1.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신다. 예수님께서 본을 보이신 후에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은 서로 발을 씻어 주라고 하신다. 

2.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14절) 그 시대에는 발을 씻는 자는 낮은 자였다. 종이 주인의 발을 씻는 것이었다. 스승이시고, 주님이신 예수님께서 그들의 발을 씻으신 것은 내가 너희들을 섬기는 자라는 것을 보여준 사건이었다. 

3. 그리고 예수께서 보여주신 본 대로 너희들도 그렇게 서로에게 종이 되라고 말씀하신다. 발을 씻는 것은 상징적이다. 일회성에 끝날 수 있다. 하지만 종이 되는 것은 일회성일 수 없다. 그것은 우리의 삶에서 지속적이고 계속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는 일이다.

4. 예수님께서 오늘 본문에서 일회성으로 발을 씻겨주셨다 생각하지 않는다. 평소에는 대접받고, 스승으로써 누릴 것을 다 누리다가 마지막에 서로 섬겨야 한다면서 이벤트처럼 발을 씻겨주셨다 생각되지 않는다. 하나님이신 그 분은 인간이 되어 오셨고, 그 분의 인간됨은 모든 이를 종의 모습으로 섬기셨다. 

5. 이것이. 믿는 자로써 닮아야 할 그리스도의 본이고, 그리스도의 섬김이다. 군림하려고 하고, 권력을 누리려고 하고, 섬김을 받으려고 하는 사람은 누구도 그리스도의 제자가 될 수 없다. 하지만 순간 순간 우리는 알게 또는 모르게 섬김을 받기를 원한다. 

6. 충분한 대접을 받지 못하면 ‘내가 이런 대접을 받을 사람인가?’ 라고 질문하며 분노하게 된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섬김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셨던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섬기셨다. 그런데도 우리가 여전히 섬김을 받기를 고집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제자가 아님을 스스로 드러내는 것이다.

7. 예수님은 우리에게 서로 섬기라고 서로 발을 씻으라고 하셨다. 나는 오늘 어떤 사람인가? 엉덩이가 가벼운 사람인가? 엉덩이가 무거워서 섬김을 받기를 좋아하며, 안쪽 자리에 앉으며, 내 나이와 신분과 위치가 섬김을 받기에 합당하다고 생각하며 그것을 누리는가? 아니면 여전히 섬기는 자의 본을 보여주신 그리스도의 본을 받아 섬기려는 자리에 서 있는가? 

8. 나이가 들면 들수록 섬기는 일, 섬기는 자리에 서는 일은 더 어렵다. 수쿰빛 언약교회에서 혼자 목사이고, 나이도 제일 많은 내가 섬김의 자리에 있지 않다면 내가 입으로 전하는 그리스도가 무슨 소용이 있겠으며 그들에게 진짜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줄 수 있겠는가? 

9. 오늘도 더 섬기는 자리에 서기를 원한다. 오늘도 더 섬기는 자의 모습으로 살아가기 원한다.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것 처럼 서로의 발을 씻기는 자가 되기 원한다. 그렇게 주님의 본을 따르는 제자가 되기 원한다.

10.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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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