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Thinking)/Meditation2021. 3. 11. 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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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11:45-57 그들이 아니라 내가 한 일… 

1. 기적을 보고도 사람들의 반응은 크게 두 가지로 갈라진다. 기적을 행한 그를 믿을 것인냐? 혹은 그를 죽일 것이냐? 45절에 많은 유대인들은 그를 믿었다. 하지만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의 공회는 다른 사람들이 예수를 믿을까봐 두려워한다. (48절)

2. 그런데 그들의 논리가 참으로 신박하다. “이 사람이 많은 표적을 행하니 우리가 어떻게 하겠느냐 만일 그를 이대로 두면 모든 사람이 그를 믿을 것이요 그리고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 땅과 민족을 빼앗아 가리라 하니” (47-48절)

3. 아마도 그들이 생각했던 것은 예수께서 많은 표적을 일으키고,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따르게 되면 민란이 일어나거나 해서 로마인들이 그 민란을 제압하면서 자신들의 기득권을 빼앗아가게 되는 것으로 이해한 것일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지 못했다.

4.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마 16:24)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자기를 부인하지 못했고, 자기 십자가를 지지 못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을 눈 앞에 보고도, 그가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도 예수를 믿기는 커녕 오히려 예수를 죽이려고 든다.

5. 자기를 부인하지 못하는 자의 모습은 예수를 직접 보고, 예수를 직접 만나도 그를 믿지 않는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 나를 부인하고 있는가? NIBC(Not I, but Chirst)로 살아가고 있는가? 때로는 그렇게, 또 더 많은 순간 그렇지 못하게 살아가고 있는 것 같다. 

6. 예수님을 사랑하고, 그 분의 뒤를 따라가기 원하지만 많은 순간 그 뒤를 따라가기 보다는 내 유익이 생각날 때가 많다. 선교사로 살아가면서도 예수보다 내 유익이 중요할 때가 더 많은 사람이다. 아직 자기 부인이 덜 된 제자의 모습이다. 그러니 예수의 뒤를 따라가지 못할 수 밖에… 

7. 처음에 의아했던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의 모습이 다른 사람이 먼 이야기가 아니다. 바로 나의 이야기이다. 주님이 나를 불쌍히 여겨주시기를 오늘 간구한다. 여전히 내 욕심과 생각을 쫓아가고, 여전히 내가 죽기 보다는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죽어주신 것만 생각하며 그걸로 족하다고 생각하는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시길 원한다. 

8. 내가 그리스도를 죽이려고 모의한 자임을, 내가 그리스도를 판 자임을.. 그리고 내가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은 그 사람임을 잊지 말자. 하지만 자기 부인이 내 힘으로 결코 되지 않는다. 주님의 도우심과 은혜가 필요하다. 결국은 하나님 앞으로, 십자가 앞으로 더 나아가는 수 밖에 없다. 오늘도 예수의 복음이 나를 움직이고, 내가 그 복음으로 새롭게 되는 하루가 되기 원한다. 

9.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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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11:17-27 제한하지 않아야 쓰임받게 된다

1. 지금도 그렇지만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사람이 죽었다가 다시 사는 일은 흔한 일은 아니다. 우리 모두에게 있는 공감대는 사람이 죽으면 끝이고, 다시는 만날 수 없다는 것이다.

2. 나사로가 죽었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예수님이 오셨다는 소식을 듣고 예수님을 나가 맞이하지만 오빠가 죽은 슬픔을 예수님께 투영한다 (20-21절). 마르다는 예수님이 더 빨리 오셨더라면, 즉 오빠 나사로가 죽기 전에 오셨더라면 그 병을 고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예수께 말한다.

3.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그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충분이 이해가 된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이미 많은 병자들을 고치는 기적을 행하셨기 때문이다. 

4. 하지만 오늘 마르다는 예수님의 능력을 제한하고, 그 분께서 단순히 병을 고치는 정도의 분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예수께서 23절에서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라고 말하셔도 믿지 못한다. 믿지 못하는게 아니라 못 믿는게 당연한 일이다.

5. 하지만 25절에서 예수께서 하시는 말씀의 권위에 마르다는 압도된다. 그래서 그녀는 이제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게 된다.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6.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하고, 자기가 이해하는 수준으로 하나님을 끌어내리는 것을 늘 조심해야 한다. 기도를 하면서도 내가 미리 가지치기를 한다거나 이러한 일은 안될거야라고 내가 미리 선수치고 있지는 않은가? 

7. 선교지에서는 아픈 자를 위해 기도해야 할 일이 많다. 그런데 나는 머리 속에 ‘나는 치유의 은사가 없어’라고 생각하며 기도하고 있다. 하나님의 능력을 나의 은사 정도로 제한시켜서 작게 보는 모습인 것이다. 말씀을 전하거나 사역을 하면서도 내가 스스로 가지치기를 하거나 제한하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가? 

8. 하지만 하나님은 그런 작은 분이 아니시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25-26절) 하나님은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것이 흔하지 않다고 해서 그것을 못하시는 분이 아니다. 

9. 결국은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라 나의 생각과 태도의 문제이다. 하나님을 내 생각에 가두어서 작게 볼 것인가? 아니면 위대하신 하나님을 하나님 그 자체로 볼 것인가? 그 분을 제한할 것인가? 아니면 그 분의 능력을 가지고 살아갈 것인가? 내 생각, 내 머리로 제한하지 말고 오직 그 분께 쓰임받는 인생이 되자. 

10.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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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9:24-41 진리와 하나님에 대한 겸손함

1. 율법에 열심이 있었던 바리새인들은 맹인이 눈을 뜬 사건에 대해서 심히 당황한다. 왜냐하면 그들의 시각에서 자신들과 대척점에 서 계셨던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2. 내가 하나님 편에 있고, 저 사람은 나와 대척점에 서 있으니 저 사람은 당연히 하나님의 편이 아니라 사단의 편이라는 것이 그들의 논리였다. 하나님을 작게 보았고, 그들 자신을 너무나도 의롭게 보았다. 자신에 대한 정체성이 틀렸다.

3. 하지만 맹인은 그들과 다른 시각을 가질 수 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그는 그의 눈이 예수님으로 말미암이 떠졌기 때문이다. 25절에 “대답하되 그가 죄인인지 내가 알지 못하나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맹인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이니이다"

4. 그는 또 다시 바리새인들에게 말한다. 32-33절에 “창세 이후로 맹인으로 난 자의 눈을 뜨게 하였다 함을 듣지 못하였으니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리이다” 하나님으로부터 온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증거가 나타날 수 밖에 없다. 

5. 바리새인들의 자신에 대한 과대평가는 (자신들이 하나님의 편에 있다는…) 하나님의 역사와 증거를 보고도 예수님을 오해하게 만들었다. 예수님도 오늘 본문 마지막 절에서 정확하게 지적하신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

6. 차라리 몰랐다면, 차라리 겸손하였다면 괜찮을텐데.. 스스로 안다고 하고, 본다고 하니 그것이 죄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에 비춰본 나의 삶은 어떠한가? 나는 본다고 하는가? 안다고 하는가? 

7. 선교사로 살아가면서 태국 사람들이 나에게 신앙에 대해서 삶에 대해서 질문을 하고 내가 대답할 때가 많이 있다. 그리고 설교를 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도 많이 있다. 그 때의 나의 태도가 어떠했는가? 겸손하고 내가 다 알지 못한다는 태도로 그들을 대했는지 돌아보게 된다. 

8. 결국 의로우신 분은 하나님 한 분 이시요, 모든 것에서 풍요롭고 부요하신 분도 하나님 한 분이시다. 나는 잘 알지 못한다. 하나님의 신비와 놀라우신 능력, 그 아름다움에 대해서도 아주 조금 알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내가 어찌 선생이라고 하며 그들을 가르치겠는가? 

9. 결국은 진리에 대한 겸손함, 하나님에 대한 겸손함이 없이는 교만하여 질 수 밖에 없다. 교만하여 하나님의 증거를 보고도 배척할 수 밖에 없다. 거룩하시고 위대하신 하나님 앞에 서야만 겸손할 수 있다. 내 얄팍한 지식과 생각을 자랑하지 말고 항상 겸손함으로 모든 사람들 대하자. 그것이 주님이 원하시는 삶이다

10.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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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9:13-23 ‘자아’의 우상을 깨뜨리고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선교사의 삶으로.. 

1. 율법이 중요한 바리새인들과 사람이 중요한 예수님의 이야기이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이 중요했다. 맹인이었던 사람이 고쳐지는 것 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었다.

2. 바리새인들을 나쁘게 볼 수 있겠지만 그들 또한 하나님을 사랑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기 위해서 온갖 애를 다 쓴 것이다. 하지만 율법보다 더 중요한 것이 사람임을 알지 못했다. 

3. 바리새인들의 생각 속에서 충돌한 것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 아니었다. 자신들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가치와 이웃사랑의 개념이 충돌한 것이다.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그 생각이 이웃사랑 보다 더 컸기에 그들은 안식일에 눈을 뜬 사람을 향해 정죄를 이어가고, 예수님을 죽이려 든다. 

4. 우리 삶에서도 비슷한 일들이 일어난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난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이 충돌해서가 아니다. 바리새인들과 같이 이웃사랑과 자신들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가치가 충돌해서이다. 

5. 나의 가치는 사람에 있는가? 아니면 내가 소중히 여기는 그 무엇인가에 있는가? 팀 켈러는 이러한 것들을 우상이라고 표현한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사랑하는 것들이 당신이 누구인지를 말해준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지키는 자신을 사랑했다. 율법을 지키는 남들과 달라보이는 자신을 소중히 여겼다. 그래서 아프고, 이전에 앞을 보지 못한 사람들보다도 그들의 가치를 더 귀히 여겼다.

6. 지금 나는 무엇을 귀히 여기는가?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셨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그 아들의 생명을 우리에게 주시기까지 사랑하셨다. 나도 그렇게 영혼들을 생명들을 사랑하고 있는가? 아니면 나도 '좋은 사역자 처럼 보여지는 나’를 사랑하고 있는가? 

7. 영혼이 아니라 결국은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고 보여지는 나’를 소중히 여기고 있을까봐 두렵다. 내 안에 그런 모습들이 분명히 있다. 주님 앞에서는 그 어느 것도 숨길 수 없다. 다 드러날 것이다. 마음을 다시 한번 다 잡는다. 내가 인정받으려고 하고, 내가 드러나려고 하고, 내가 소중한 삶에서 영혼들과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삶으로 변화되고 싶다. 

8. 바리새인들의 모습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걸어가셨던 삶의 모습으로 살아가고 싶다. 먼저 ‘나’라는 우상을 주님 앞에 올려 드린다. ‘자아’라는 우상을 깨뜨리기 원한다. 그리하여 주님만 빛나시고, 생명이 살려지는 일들이 일어나기 원한다. 

9.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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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8:31-41 정확한 진단과 자유케 하는 진리

1. 자신이 어떤 상태인지 아는 것이 자신이 나아질 수 혹은 좋아질 수 있는 방법이다. 환자가 나으려면 병명이 가장 먼저 정확하게 진단되어야 하는 것 처럼 말이다.

2. 오늘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어떤 상태인지 전혀 알지 못한다. 예수님께서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거라고 32절에서 말씀하시지만 이들은 도저히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에 대해서 이해를 하지 못한다. 그리고 질문한다.

3. “그들이 대답하되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롭게 되리라 하느냐?” 그들이 스스로에게 한 진단은 틀렸다. 가깝게는 지금 그들은 로마의 압제 속에 있었고, 이전에는 그들은 이집트의 노예였었다. 감쪽같이 잊고 있지만 그들은 노예였다.

4. 그리고 그들은 지금 자신들의 영적인 상황을 파악하는 것 조차도 틀렸다. 죄 가운데 거하며 온갖 죄를 짓고 있으면서도 그들은 그러지 않은 척, 거룩한 척, 괜찮은 척 하고 있다. 진단이 틀리니 진리가 필요하지 않았다. 예수께서는 이들에게 다시 말씀하신다. 

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34절) 우리는 죄의 종일 수 밖에 없는 자들이다. 왜냐하면 죄를 범하지 않고 살 수 없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거룩한 척, 괜찮은 척이 아니라 우리가 선을 행할 수 없는 사람임을, 우리가 스스로를 전혀 어떻게 할 수 없는 사람임을 반드시 알아야 한다.

6. 그래야만 그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할 수 있다. 이 진리이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강제로 무엇인가를 행하지 않는다. 우리가 그 분이 필요하다고 고백해야 그제서야 일하시는 자비롭고 은혜로우신 분이시다. 그러기에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정확히 파악하는 것이 더 더욱 중요한 것이다.

7.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 (36절) 이제 진단도 나왔고, 약도 나왔다. 내가 죄인이라고 생각하고, 죄의 노예라고 생각된다면 이제 그 약, 진리를 먹어야 한다. 진리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만 우리는 자유롭게 될 것이다.

8. 예수가 그리스도이시다. 참으로 쉽고 간단한 진리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 진리를 거절한다. 그 이유는 대부분 자신 스스로에 대한 진단이 틀린 경우가 많다. 나는 오늘 나 스스로를 어떻게 진단하고 있는가? 나 스스로가 정말 죄인인가? 나 스스로가 정말 절망적인가? 그렇다면 그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필요하며, 그 분이 나를 자유케 할 것이다.

9. 오늘도 절망 속에서 참 진리를 만나기 원한다. 절망 속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오늘을 살아내기 원한다. 내 힘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힘으로… 

10.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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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Thinking)/Meditation2021. 2. 25. 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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엡 5:15-21 어떻게 세월을 아낄 것인가? 

1.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에게 오늘 '세월을 아끼라' 라고 이야기 하고 있다. 한 번 밖에 살 수 없는 인생이니 세월을 아껴야 하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하지만 사도바울은 그 세월을 아끼는 방법을 말하고 있다.

2. 15절에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지를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이 하지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라고 권고하고 있다. 우리가 무엇을 행할지를 자세히 주의하라고 말하고 있다. 좀 알려진 격언 중에 이런 격언이 있다.

3. ‘생각하는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대로 생각하게 된다.' 사도바울의 조언도 사실 동일한 말일 것이다. 자세히 주의하여 어떻게 행할지를 고민해야 한다. 남들이 한다고 따라하고, 남들이 말하면 그런줄 알고 살아가서는 안된다.

4. 우리는 지혜 있는 자가 되어야 한다. 이 지혜는 어디에서 오는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 (잠 9:10) 우리는 우리의 지혜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다. 우리는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지혜로 살아가는 자들이다. 

5. 요즈음 참 바쁘다. 시간 사용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세월을 아끼는 것은 중요하다. 하지만 내가 누구의 지혜로 세월을 아낄 것인가? 내가 시간을 관리하고, 시간표를 짜고, 스켸쥴 관리를 한다고 해서 세월이 아껴질 것인가?

6. 아니면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그 분께 기도함으로 그 분이 주시는 지혜로 이 모든 것을 해나갈 것인가? 능력은 내게 없더라도 선택은 내가 할 수 있다. 주님의 지혜를 의지할 때 10분을 해도 영감이 있고, 은혜가 있을 때에는 때로 1시간 이상의 효율성을 경험하는 일들이 자주 있지 않았는가? 

7.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를 자세히 주의하여 보고, 주님을 경외함에서 오는 지혜로 말미암아 오늘을 살아야 한다. 시간에 쫓기지 말고, 할 일에 쫓기지 말고 주님을 경외하자. 하지만 주님을 경외한다는 것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만은 결코 아닐 것이다. 

8. 주님이 주시는 지혜로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하며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것일 것이다. 오늘도 주님을 경외함으로 세월을 아끼고 싶다. 더 주님 앞에서 서며, 더 시간을 넘어 계신 하나님의 도우심을 의지하자. 결국 또 내 힘이 아니라 주님이다. 주님을 붙드는 세월을 아끼는 자가 되자.

9. 오늘도 샬롬 

*어제 기도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비자를 수월하게 잘 받게 되었고, 또 1년을 열심히 달려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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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Thinking)/Meditation2021. 2. 23. 1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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엡 4:25-32 용서 받고 사랑 받은 나이기에…

1. 어제 바울은 새 사람이 되라고 권고하였고, 오늘은 조금 더 그 새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실제적인 지침(?)을 주고 있다. 25절은 참된 것을 말하라 26절은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말라 라고 권고하고 있다. 바울은 분을 내는 것이 죄가 아니라 분으로 인해 죄를 짓는 것이 문제라고 말하고 있다. 

2. 하지만 분냄과 죄짓는 것을 구분할 순 있지만 실제의 삶에서는 분냄이 거의 즉시로 죄로 연결될 여지가 많으니 분냄조차도 주의 하는게 좋다는 생각이 든다. 28절에는 도둑질하지 말고 구제하라 29절에서는 더러운 말은 입 밖에 내지 말고 선한 말을 하라고 권고하고 있다. 

3. 새 사람의 삶은 어떤 완벽한 사람의 삶을 말하고 있지 않다. 새 사람의 삶은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사랑을 실천하는 삶이다. 내가 새 사람이 되었으니 무조건 착하게 살라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착하게 살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다만 바울은 더 큰 차원에서 이야기 하고 있다.

4. 32절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우리가 용서할 수 있는 이유는 우리가 그렇게 용서 받았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이유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았기 때문이다.

5. 내가 그리스도의 사랑과 용서를 받은 사람임을 깨닫는 것이 나의 삶의 변화의 첫 걸음이다. 가끔씩 아이들로 인해 분노하고 화를 내는 나 자신을 볼 때가 있다. 그 때 옆에서 보고 있던 아내는 거의 항상 나에게도 동일한 연약함이 있음을 이야기 해준다. 그렇다. 내 허물이 보이지 않을 때, 다른 사람을 이해하지 못하고, 용서하지 못하게 된다.

6. 내 허물이 보이기 시작하고, 내가 그리스도의 보혈로 인해 온전히 용서 받았음을 깨닫게 될 때에만 다른 이들을 너그러히 바라보게 되고, 다른 이들을 이해하게 된다. 오늘 나는 내가 그리스도의 보혈이 아니고서는 안될 만큼의 죄인임을 알고 있는가? 또한 더불어서 그 보혈로 인해 완전히 용서 받았음을 온전히 이해하고 있는가? 

7. 너그러움도, 배려도, 이해도, 사랑도 내 안에서 나올 수 없음을 잊지 말고 바울의 권고와 같이 항상 그리스도 앞으로 나아가자. 오직 그 분 앞에서만 나의 존재가 이해가 되고, 다른 사람들의 존재가 이해가 되기 때문이다. 오직 그 분 앞에서만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8. 바쁠지라도, 할 일이 많을 지라도 그리스도를 더 깊이 묵상하고, 그리스도와 더 깊이 동행하는 하루가 되기 원한다. 

9.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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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Thinking)/Meditation2021. 2. 22. 1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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엡 4:17-24 예수를 닮은 새 사람

1. ‘이방인 같이 행하지 말라’ 라는 말은 유대인에게 있어서 그렇게 어려운 내용은 아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유대인은 자신들이 분명히 이방인들과 다르다고 생각했고, 다를 수 밖에 없었다. 

2. 하지만 바울이 말하는 ‘이방인 같이’에 해당하는 내용은 율법적인 내용이 아니었다. ‘이제부터 너희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 같이 행하지 말라’ 라고 말하고 있다. 이방인들은 마음이 허망하다고, 그 허망함에서 삶의 나온다는 것이다.

3. 왜 이방인들은 허망한 것일까? 역사의 주관자이시요, 이유이신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 아닐까? 어디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에 믿지 않는 자들의 인생은 허망할 수 밖에 없다. 모든 것은 우연의 산물이고 지금 내 삶에 일어나는 어떠한 일도 다 우연이기 때문에.. 방향이 없다. 

4. 어떻게 살아야 할지도 알지 못한다. 그런데 에베소 교회의 어떤 형제, 자매들도 그렇게 방향성 없이 허망하게 살았나 보다. 방향이 없으니 그들은 자신을 방탕에 거하게 하고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게 되었다 (19절).

5. 이러한 교인들에게 바울은 22-23절에서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라고 권고하고 있다.

6. 옛 사람은 허망함에 속해 있고, 방탕함에 속해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새 사람은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의와 진리가 그 안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으로 부터 와서 하나님으로 부터 말미암고, 하나님께로 돌아감을 알기 때문이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롬 11:36

7.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는 주님이 계시기에 우리는 다르게 살 수 밖에 없다. 그 주님이 나를 보고 정죄하시기 때문이 아니다. 우리가 그 분으로 부터 왔고, 그 분으로 인해 살아가고, 그 분께 돌아갈 수 밖에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가 다르게 살 수 밖에 없는 것이다. 

8. 어떤 면에서 다르게 살 것인가? 어떤 면에서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다르다고 느끼게 할 것인가? 결국 우리의 성품과 나눔, 섬김, 즉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모범이 아닌가? 그리스도를 닮은 우리를 보며 세상은 우리로 하여금 다르다고 느낄 것이고, 이러한 삶이 바울이 말했던 새 사람일 것이다. 

9. 더 나누고, 더 섬기고, 더 온유하고, 더 겸손하고… 내 안에 그런 소망이 없다. 오직 나를 불러서 이 자리에게 있게 하시고, 나를 사랑하사 자기의 몸을 우리에게 주신 그리스도를 더 깊이 알아갈 때에만 그 분을 닮아갈 때에만 가능하다. 오늘도 더 그 분 앞에 잠잠히 거하며, 내 욕망과 내 생각을 내려놓고 그 분을 닮아가기 원한다.

10.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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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Thinking)/Meditation2021. 2. 19. 1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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엡 3:1-13 행복한 일꾼

1. 바울은 자신의 사명을 분명히 알았다. 자신을 1절에서 “그리스도 예수의 일로 너희 이방인을 위하여 갇힌 자 된 나 바울”이라고 자신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 

2. 그리고 그가 에베소서 편지를 기록하는 이유도 자신이 깨달은 그리스도의 비밀을 이 편지를 읽음을 통해서 깨달을 수 있을 것이라는 소망 때문이었다. “그것을 읽으면 내가 그리스도의 비밀을 깨달은 것을 너희가 알 수 있으리라” (4절)

3. 그는 오로지 자신을 부르신 하나님의 소명을 따라 그가 할 수 있는대로 최선을 다해 이방인들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전했다. 바울이 스스로를 일컫는 말 중에 7절은 특별히 “일꾼”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 복음을 위하여 그의 능력이 역사하시는대로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따라 내가 일꾼이 되었노라"

4. 우리의 신분은 분명히 자녀이다. 일꾼이 아니라 자녀이다. 바울도 이 사실을 분명히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우리의 신분은 자녀이더라도 우리에게 주신 소명에 그가 해야 할 일은 일꾼이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바울과 같이 우리를 분명히 자녀로 먼저 부르셨다. 하지만 자녀로 부르신 것이 끝이 아니고 우리를 또한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일에 참여하는 일꾼으로도 부르셨다. 바울은 이 사실을 알았기에 죽도록 충성하였다.

5. 결코 정체성과 사명을 혼동해서는 안된다. 나의 정체성이 그리스도 안에서 분명히 서야 한다. 하지만 정체성이 자녀라고 해서 나를 그리스도의 일에 일꾼으로 부르신 것을 잊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6. 하나님이 나를 태국의 영혼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자로 불러주셨다. 악하고 게으른 종이 되어서는 안된다. 불러주신 일에 사역에 힘을 다하여 참여하고, 죽도록 충성하여야 한다. 일 중독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그 일에 주신 달란트를 다 쏟아야 한다는 것이다. 

7. 최근 할 일들이 너무 많아져서 기쁜 외침을 내고 있다. 설교 말씀을 준비하고, 성경공부 자료를 준비해서 성경공부를 인도하고, 새신자를 양육하고, 모여서 기도하고, 연구하고, 공부하고… 또 이 모든 것을 태국어로 하자니 시간이 2-3배가 소요되다보니 너무 바쁘고 힘들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었다. 하지만 오늘 본문을 보며, 내가 정말 '충성된 하인'인지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되었다. 바울의 표현에 의하면 충성된 일꾼인가? 

8. 불러주신 자리에 힘을 다하여 참여하고 있는가? 정말로 힘을 다하고 있는가? 주신 달란트를 충성되이 사용하고 있는가? 기쁨과 감사로 하고 있는가? 열매를 맺고 있는가? 사랑으로 하고 있는가? 그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상속자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여하는 자가 (6절)" 되고 있는가?

9. 다시 한번 마음을 다지며 그리스도 안에서 오늘을 충성되이 살 것을 결정한다. 힘들고 어렵더라도 기쁨으로 감사함으로 맡겨주신 일들을 섬기며, 악하고 게으른 종이 아니라 충성된 하인으로 살아가고 싶다. 그렇게 하루 하루를 보내고 싶다. 주님 저를 도우소서.

10.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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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Thinking)/Meditation2021. 2. 17. 1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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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10 본질상 진노의 자녀

 

1. 1절은 선언적으로 시작하고 있다.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우리가 살아났다는 사실 만큼 중요한사실은 우리가 허물과 죄로 죽었다는 것일 것이다. 죄와 허물로 죽지 않았다면 살리실 필요도 없기 때문이다.

 

2. 죄와 허물이 가득할 뿐만 아니라 우리는  죄와 허물로 죽은 사람들이다. 내가 죽을  밖에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결코 잊어서는 안된다. 3절은 이러한 나의 상황을   극적인 언어로 표현하고 있다.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3. 우리의 본질이 우리의 진짜 모습이 그저 진노를 받을  밖에 없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원수의 아들(?) 같은 느낌이다. 절대로 하나님의 사랑을 입을  없는.. 공의로우신 하나님이 절대로 사랑할  없는 죄인...

 

4. 이러한 우리는 8절에 따르면 우리의 본질을 넘어 구원받게 되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본질상 받을  없는 구원을 선물로 받게 되었다.

 

5. 이것이 복음이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일에 기반한 하나님의 사랑이다. 내가 은혜로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잊어버리면 자꾸만 공로 사상이 삐집고 나온다. 내가 이렇게 했는데, 이렇게 살았는데, 이렇게 도와줬는데...

 

6. 나의 본질이 “진노의 자녀”임을 깨닫지 못한다면 내가 받은 구원이 나의 어떠한 행위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깨닫지 못한다면 자고해지고, 교만해지고, 불만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7. 아침에 아내가 어제부터  이리 툴툴거리냐고 물어봤다. 요엘이 숙제 도와주다가 살짝 기분이 삐끗한게 여전히 남아있었나보다. 요엘이 숙제를 봐주면서 글씨를  이쁘게 쓰라고 했더니 오히려 적반하장으로 화를 내기 시작했고, 그러면서 요엘이가 진짜 감사를 모른다는 생각에 기분이 나빠지기 시작했다.

 

8. 불만은 불만을 낳는다고 했는가? 그러면서 나도 감사를 잃어버리고, 사랑의 마음이 아니라 짜증난 마음을 나도 모르게 붙들고 있었나 보다. 아내의 말처럼 별일 아닌 일에 툴툴거리고 있었나 보다. 본질상 진노의 자녀가 맞는  같다. 

 

9. 오늘 말씀을 묵상하면서 다시 한번 내가 진노의 자녀임을, 그리고 은혜로, 사랑으로 주님의 자녀가 되었음을 기억하자. 감사의 반응을 하고, 사랑의 반응을 하고, 내 본질 속에서 다른 이를 사랑할 수 없음을 알고, 그들을 사랑할 수 있는 은혜를 주시도록 그리스도를 더욱 더 사랑하는 하루를 보내자. 

 

10.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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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