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Thinking)/Meditation2021. 1. 27. 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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딤전 1:1-11 사랑하는 일이 율법의 완성이다.

1. 예수님은 본인이 율법을 없게 하기 위해 오시지 않았다고 말씀하신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마 5:17)

2. 오늘 사도 바울도 그러한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이야기 하고 있다. 율법은 오히려 각종 더러운 죄 가운데 거하는 자들을 (9-11절) 위한 것이다. 그들로 하여금 자신의 죄를 깨닫게 하기 때문이다. 

3. 하지만 율법의 궁극적인 목적은 정죄나 판단이 아니라 오히려 사랑이다. “이 교훈의 목적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이거늘” (5절) 이 사랑은 예수님께서 요약하신 두 가지일 것이다.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

4. 그리고 이 사랑은 예수님의 말씀처럼 예수님 안에서 완전하게 되어지고, 예수님으로 인해 다른 사람들에게 나눠지고 베풀어져야 하는 것이다. 율법의 완성은 사랑하는 것이다.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롬 13:8)

5. 선교사로써, 부모로써, 성도로써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일은 '사랑하는 일'일 것이다. 예수님이 하신 것 처럼 나 자신을 내어주고, 그들의 필요를 채우는 것일 것이다. 어제 저녁에는 사실 몸이 너무 힘들었다. 지난주부터 감사했던 분들, 또 교회 성도들을 거의 매일 초청해서 식사하고, 또 심방하는 일이 길어지면서 힘들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6. 같이 식사하고 교제하고 늦게까지 설겆이 및 뒷정리를 마치고 하다보니 힘들고, 나도 모르게 “그만 할까?”란 생각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오늘 본문을 보면서 다시 한번 사랑으로 섬길 수 있음을 감사하게 된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우리의 시간과 재정으로 섬기는 식탁의 교제가 참으로 귀하단 생각이 들었다. 

7. 그리고 불평하지 않고, 힘들다고 말하지 않고 계속해서 섬길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다시 하게 되었다. 복음을 위해서 더 사랑할 수 있게 되기를 원한다. 복음을 위해서 더 내어줄 수 있기를 원한다. 

8. 어제 묵상의 글귀처럼 살아가고 싶다. “소유에서 오는 풍성함이 아니라 믿음으로 변화된 존재에서 오는 풍성함으로 살아가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 율법이 아니라 복음 안에서, 사랑 안에서 내가 더욱 더 변화되기 원한다. 일이나 사역이 아니라 사랑하는 일에 더 많은 시간을 쏟기 원한다.

9.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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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21. 1. 26. 1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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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8:21-30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인해 변화된 존재로 살아가는 삶

1. 예수님의 말씀에 유대인들은 발끈한다. “다시 이르시되 내가 가리니 너희가 나를 찾다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겠고 내가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 (21절). 유대인들은 기본적으로 자신들은 선택받은 민족이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로 갈 거라고 생각했다.

2. 그래서 예수님이 서로 다시 만나지 못한다고 했을 때, 자신들은 당연히 천국에 갈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예수님이 자결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22절).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확실히 말씀하신다. 

3. “너희는 아래에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하였노라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23-24절) 

4. 모든 사람은 아래에서 났고, 세상에 속해서 살아간다. 그렇기 때문에 유대인이라고 해서 혹은 누구라고 해서 자동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죄 가운데서 죽을 수 밖에 없는 존재들이다. 하지만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 우리는 더 이상 죄 가운데서 죽지 않을 수 있는 은혜가 생기게 된다. 

5. 그래서 예수님만이 우리의 소망이 되시는 이유이다. 단지 죄 가운데서 죽지 않을 뿐 아니라 우리를 새롭게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시키기 때문이다. 

6. 하지만 우리가 아래에서 났고, 세상에 속했다는 사실 즉, 우리가 죄인임을 깨닫지 못하면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보고도 그 분이 우리와 다른 길을 갈 것이라고 쉽게 추측할 수 밖에 없는 것이 우리이다. 세상에 당연한 것은 없다. 우리가 당연히 구원 받아야만할 존재일 수 없다. 

7. 팀 켈러의 말은 이를 정확히 진단한다. “나는 내가 감히 생각했던 것 보다 훨씬 더한 죄인이고 허물 많은 존재입니다. 하지만 내가 감히 바랐던 것 보다 더 많은 사랑을 받고 용납되었습니다” 나는 죄인이지만 하나님으로부터 사랑받고 용납받았다. 바로 예수님 때문이다. 

8. 망가지고 무너진 내 삶이 그리스도로 인해 새롭게 되었다는 사실을 깊이 깨달을 때, 그리스도의 복음만이 내 삶을 움직여 나갈 때 겸손과 자신감이 균형잡힌 삶을 살아갈 수 있다.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고후 6:10)”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아무것도 없는 자 같이 보여도 우리는 모든 것 (그리스도)를 가진 자가 되는 것이다.

9. 그 비밀을 가진 자로 살아가기 원한다. 소유에서 오는 풍성함이 아니라 (믿음으로 시작된) 존재에서 오는 풍성함으로 살아가는 아들이 되고 싶다. 

10.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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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21. 1. 25. 1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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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8:12-20 어두움에 빛을…

1. 예수님은 자신이 세상이 빛이라고 12절에서 선언하신다.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이 빛이니…” 자신을 세상의 빛으로 선언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두 가지가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2. 첫 번째는 세상이 어둠이어야 한다. 세상이 죄와 그로 파생된 악함들이 세상에 가득해야 한다. 이 것은 부인할만한 이유를 찾지 못하겠다. 세상은 점점 더 어두움에 가득 차는 것 같다. 빈곤의 문제, 정의의 문제… 세상이 언제 한번 공평하고, 공정했던 적이 있는가? 두 번째는 자신이 정말 그 세상을 밝힐만큼 밝고, 거룩한 분이셔야 한다. 그 분께는 어두움이 결코 없어야 한다.  

3. “우리가 그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은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는 것이니라” 요1 1:5 예수님은 빛이셨다. 왜냐하면 한 본체이신 하나님께서 빛이셨기 때문이다. 

4. 예수님은 빛이시기에 그 분을 따르는 자들에게도 빛의 모습이 나타나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빛을 반사하여 어두운 곳을 밝혀야 한다. 그런데 이것이 정말 쉬운 일이 아니다. 어떤 식으로 세상을 밝힐 수 있을까? 내가 서 있는 이 자리, 태국 땅을 어떻게 밝힐 수 있을까? 

5. 우리교회 이름을 굳이 한글로 쓰자면 수쿰빗 언약교회이다. 하지만 한 목사님이 제안해주셨다. 수쿰’빛’ 언약교회로 쓰면 어떻겠냐고? 외국어의 한글표기이니 어떻게 쓰든 상관이 없다. 하지만 그 의미적인 차원에서는 매우 다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을 드러내는 그런 교회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 이제 그렇게 쓰기로 했다. 

6. 하지만 여전히 이 어두움이 가득한 태국 땅을 어떻게 밝힐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지난 교회 리더쉽 미팅에서도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아직 어떠한 분야와 파트를 새로 세워진 우리 교회가 감당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7. 먼저는 나를 비롯해 모든 성도들이 빛 되신 예수님을 깊이 알아야겠다. 12절 하반부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우리 교회가 먼저 생명의 빛을 얻을 수 있게 되기를 원한다. 

8. 그리고 하나님께서 보여주시고, 열어주신다면 우리가 서 있는 에까마이에서도 단순히 복음을 전하는 일 뿐만 아니라 지역과 사회를 섬길 수 있게 되기를 원한다. 내실을 다지되, 문이 열리면 분별할 수 있고, 주저하지 말자.

9. 빛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겸손히 따라가며.. 나도 우리 교회도 부족하나마 그 빛을 비출 수 있게 되기를 원한다. 

10.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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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21. 1. 22. 1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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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7:25-36 하나님께 물으며 대답하는 방식으로 걸어가는 한 해

1. 우리는 사실 모든 것을 알 수 없다. 이 세상이 어떻게 지어졌는지, 도대체 왜 그렇게 이 우주가 큰지.. 그저 추론과 추측으로만 이 세상을 바라볼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2. 안다고 생각할 때, 우리는 우리가 넘어지는 길로 가는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 오늘 본문에서 예루살렘 사람들은 예수를 믿지 않았다. 그 이유는 27절에서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사람이 어디서 왔는지 아노라” 그들은 예수께서 요셉과 마리아의 아들, 갈릴리 출생임을 알았다.

3. 그들이 안다고 생각했을 때, 그들은 영원하신 하나님의 이 땅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했다. 실제로는 모르는데 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들이 아는 것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아는 것은 단편적이었다. 예수를 진정으로 보내신 분이 누구이신지 몰랐다. 하지만 29절을 보면 예수께서는 아셨다. “나는 아노니 이는 내가 그에게서 났고 그가 나를 보내셨음이라 하시니”

4. 진정으로 하나님을 알 때 우리는 자유롭다. 하지만 하나님을 아는 척 하는 동안에는 진리를 분별할 수 있는 기회조차도 잃어버리게 된다. 나는 지금 하나님을 알고 있는가? 아니면 하나님을 아는척 하고 있는가? 모르면 모른다고 해야 한다. 

5. 요한복음 4장에서 예수님이 만났던 사마리아 여인을 생각해보면 그녀는 예수님이 누구인지, 어디서 예배해야 하는지 계속해서 물었다. 그녀는 결코 고상한척 아는척 하지 않았고, 그녀는 겸손하게 물었다.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에 그녀는 대답했고, 그녀는 영원한 생수를 찾게 되었다. 

6.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아버지께로와서 아버지께로 돌아감을 알고 계셨다 (33절). 모든 것을 아시는 예수님 앞으로 겸손하게 나아가야 한다. 모든 것의 시작과 끝을 아시는 그 분께 물어봐야 한다. 그래야 우리는 길을 잃어버리지 않는다.

7. 지난 3일간 수쿰빛 언약교회 목회팀 미팅이 있었다. 우리 교회가 어떻게 한 해를 보내야 할지, 어떻게 양육해야 할지, 어떤 말씀을 어떤 주제로 가르쳐야 할지, 어떤 설교를 해야할지 다방면에 걸쳐서 의견을 나누고 기도하고 주님의 뜻을 구했다. 하지만 모른다고 묻기만 해서는 안된다. 또한 삶으로 대답해야 한다. 

8. 이런 생각이 들자 파송교회 담임목사님이신 정갑신 목사님께서 이야기하신 ‘계획보다 대답하는 목회’에 대해서 더욱 더 생각해보게 되었다. 교회의 공동리더로 세워져 있지만 정말로 올해를 어떻게 가야 할지 모르겠다. 코로나 상황도 그렇고, 우리 교회의 상황도 그렇고 정말 모르겠다. 내가 모른다는 것을 확실히 이해하게 되니 오히려 그 분의 음성을 듣고 그 음성에 대답하는 삶을 살아가고 싶다. 

9. 사마리아 여인처럼 나의 무지함을 깨닫고, 또 나에게 말씀하시는 나를 이끌어 가시는 주님께 물으며 하나님께 대답하는 방식으로 올해를 살아가고, 우리 교회가 그렇게 걸어가게 되기를 원한다. 그렇게 살아가고 싶다.

10.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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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21. 1. 20. 1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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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1-13 말씀을 지킴으로 예수님을 전할  있게 되기를

 

1. 1절은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다니시고 유대에서 다니려 아니하심은 유대인이 죽이려 함이러라”라고 시작하고 있다. 유대인들은 예수를 죽이려고 했다. 하지만  당황스러운 것은 가족들의 반응이다. 

 

2. 3절을 보면 그 형제들이 예수께 이르되 당신이 행하는 일을 제자들도 보게 여기를 떠나 유대로 가소서 유대인들이죽이려고 하는 것을 피해 고향에 계시던 예수님을 유대로 가라고 등을  밀고 있다.  이유는 가족들도 예수를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5). 

 

3. 예수를 믿지 못하는 예수님의 가족들은 자신들의 안전과 평화를 지키기 위해 자신들 모두를 위해 죽으러 오신 예수님을 죽음으로 몰아가고 있다. 7절에 예수님은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지 아니하되 나를 미워하나니 이는 내가 세상의 일들을 악하다고 증언함이라 말씀하신다. 믿지 않는 세상이 예수님을 싫어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4. 하지만 요즈음은 세상이 예수님이 아니라 믿는 자들을 싫어한다. 사람들은 ‘믿는 자들이 예수님을 닮지 않아서 싫어한다’ 고 말한다. 세상은 예수님을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살아내지 못하는 믿는 자들을 미워하고 있는 것이다. 

 

5. 우리의 삶이 예수님을 전할  있는 기회를 깎아 먹고 있는  시대에 믿는 자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고민하게 한다. 결국은 복음으로 우리가 거듭나지 못하면 안된다. 우리가 말씀대로 살기 때문에 우리는 세상의 미움을 받아야 한다. 타협하지 않고, 말씀을 중심으로 살아야 한다. 

 

6.  삶에도 드러나지 않게 혹은 드러나게 타협하여 살아가는 것들이 있다. 아니 많을 것이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그들의 입장에 서는 것과 (상황화) 복음과 상관없이 내가 편하기 위해서 타협하는 것은 너무나도 다른 일일 것이다. 

 

7. 오늘 삶의 어떤 영역에서는 상황화를 해야하고, 삶의 어떤 영역에서는 타협하지 말아야 하는가? 세상이 믿는 자들에게 바라는 것은 우리가 최소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계명을 지키며 살아가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살라는 것일 것이다. 

 

8. 초대교회 성도들이 이 예수께서 주신 계명을 지키며 한 마음으로 살아갈 때, 믿는 자들이 더했다. 그들이 따로 전도하고 한 것도 아니었다. 그들은 그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했을 뿐이다. 그런데 믿는 자들이 더했다. 이 모습은 우리 믿는 자들에게 주시는 중요한 메시지가 될 것이다. 

 

9.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들을  몸과 같이 사랑하는 선교사가   있기를.. 아니 그런 성도가   있기를...

 

10.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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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21. 1. 19. 1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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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6:60-71 어떤 예수님을 믿고 있는가?

1. 예수께서 영생을 위해 자신의 살과 피를 먹어야 한다고 말했을 때 예수님의 많은 제자들은 이해하기 어렵다고 했다 (60절).  이해하기 어려운 이유는 그들의 관심이 영이 아니라 육에 있었기 때문이다. 

2. 예수님께서 먹이시는 오병이어와 놀라운 기적에 관심이 있었지, 그들 자신의 영생에는 관심이 없었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그만큼 영적으로 둔감해진 사람들이었다는 것이다. 

3. 마치 이 시대에 살고 있는 사람들처럼 느껴진다. 예수님에 대해서 듣고, 알지만 좋은 충고자로써, 어떠한 선생으로는 좋지만 우리의 구원자로써는 그 분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4. 66절은 참 슬픈 구절이다. “그 때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마치 코로나가 끝나고 나면 어쩌면 우리가 보게 될 지도 모르는 광경처럼 느껴진다. 

5. 최근에 교회와 믿는 자들에게 실망했고, 그래서 교회를 나가지 않겠다고 글을 올리는 사람들을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보게 된다. 교회의 비판에 열을 올리는 사람들도 보게 된다. 원인 제공은 물론 우리가 했다. 한국교회의 편향된 신학과 코로나 사태 속에서의 교회의 반응은 비판받을만 하다. 

6.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만물을 회복케 하실 구원자이신 예수를 떠나가겠다고 쉽게 말하는 모습은 예수를 따랐던 제자들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의 삶이 복음이 되지 못함에 대해서 실망감은 이해하지만 그들이 정말 교회에서 무엇을 기대했을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대목이다. 

7. 사람들이 떠나가는 그 때에 예수께서 물으실 것 같다. “너희도 가려느냐?” (67절) 시몬 베드로가 가지 않겠다고 대답한다. 하지만 제자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혔을 때에 다 도망가고 그 누구도 없었다. 우리는 언제든 그렇게 등을 돌릴 수 있는 사람이다. 나는 아니라고 자신할 수 없다. 그저 주님께 은혜를 구해야만 한다.

8. 내가 예수를 믿는 것은 단순히 죽어서 천국가는 것 때문이어서는 안된다. 내 삶이 그로 인해 새롭게 회복되어 하나님의 통치 속에서 그 분의 자녀로 살아가기 위함이다. 이것은 물질적인 것만도 아니고 영적인 것만도 아니다. 삶의 전 영역이다. 하지만 나도 예수를 믿으면서도 육적인 것에만 관심을 가지고 살고 있지는 않은가? 를 되돌아보게 된다.

9. 나는 오늘 예수님께 어떤 소망과 기대를 가지고 있는가? 언제든지 나의 기대와 소망이 만족되지 못하여 예수님께 실망하면 그 분께 등을 돌릴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예수님을 왕으로 생각하고 있는지, 아니면 나의 램프의 지니로 생각하고 있는지? 

10. 예수님을 온전히 예수님으로 알고 믿고 그 분으로 만족하며 살아가기 원한다.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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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21. 1. 18. 1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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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6:41-59 주님 말씀하소서

1. 먹지 않고는 누구도 살 수 없다. 음식은 우리 모두에게 너무나도 중요한 것이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늘 먹을 것을 갈망한다. 하지만 그 갈망하는 먹을 것은 우리를 잠시만 살게 할 뿐이다. 잠시 잠간 오늘을 살게 하고, 내일을 살게할 수 있지만 그것이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줄 수는 없다. 

2. 예수께서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 (51절) 인 자신을 먹으면 영생하겠다고 하셨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54절). 

3. 영생할 수 있는 이유는 예수께서 그 떡을 먹은 자를 다시 살리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 떡과 피를 마시는 자는 그가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한다’ (57절)라고 말씀하신다. 

4.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 생명의 떡을 먹기로 결정하는 것이다. 육의 양식처럼 매일 그를 먹기로 결정하는 것이다. 그 이후에는 우리 안에 살아계신 예수께서 우리로 하여금 영원히 살게 하실 것이다. 내 안에 아무런 능력이 없음을 배우게 된다. 

5. 하지만 부활의 능력뿐 아니라 단지 오늘을 사는 능력도 내게는 없음을 배우게 된다. 육의 양식을 먹는 것 처럼 그저 생명의 양식이신 그 분을 먹고, 또 먹어야 그 분으로 인해 오늘을 살 수 있는 것이다. 

6. 아침에 예준이를 온라인 수업을 위해 친구네 집으로 데려다 주고 도로로 나오다가 오토바이와 사고가 났다. 감사하게도 서로 크게 다치거나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오토바이를 탄 사람이 못봐서 부딪쳤다고 해놓고, 보험사가 오자 말을 바꾸기 시작했다. 자기는 잘못이 없고, 내가 잘못했다고 말했다. 차량에 블랙박스가 없고, 그 오토바이와 함께 왔던.. 증인이 되어줄 만한 사람도 찾을 수가 없다. 내가 잘못한게 되어 버렸다.

7. 억울하고 속상하지만 현지인들과 다투지 않고 해결하기 위해 보험으로 처리하기로 했다. 마음이 왔다갔다 한다. 뭔가 항변하고 싶고, 내가 그렇게 잘못한게 아니란걸 말하고 싶다. 그런데 오늘 말씀 앞에 앉으면서 오늘의 말씀을 먹으면서 그런 생각이 잠잠해졌다. 오늘을 빵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야 하는 자의 모습이 어때야 하는지를 생각해보게 된다.

8. 억울하고 속상한 마음.. 이로 인해 추가적인 비용이 발생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은 당연하다. 하지만 그 당연한 것들을 멈추고, 하나님께서 오늘 이 일로 무엇을 말씀하고 싶어하시는지 듣기 원한다. 분명 하시는 말씀이 있을 것이다. 영원 속에서 오늘을 살아낼 수 있는 바로 그 말씀을 듣기 원한다. 

9. 늘 말씀을 먹을 수 있는 그 자리에 앉는 자가 되기 원한다.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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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21. 1. 15. 1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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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6:1-15 결핍된 세상에서 충만함을 누리기

1.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있었다. 그 분께는 부족한 것이 없다. 그 분은 가장 완전하고, 가장 충만하신 분이시다. 그런데 제자들은 그 안에서 결핍을 경험한다. 큰 무리들을 먹여야하는데 (2절), 그들에게 줄 떡이 없다. 

2. 문제는 떡만 없는 것이 아니다. 돈도 없다. 그리고 그정도의 무리가 한꺼번에 먹을 수 있는 양의 떡을 파는 곳도 없다. 여기는 시내 한 가운데가 아니다. 디베랴 바다 건너편의 광야 혹은 낮은 언덕이었을 것이다.

3. 모든 것이 완벽하신 분과 함께 있으면서도 느끼는 결핍.. 그들만의 문제는 아니다. 실제로 지금 그들에게 준비되어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실제로도 내 삶에서 자주 경험되는 문제이다.

4. 교회개척을 시작할 때에도 그랬다. 아무것도 없었기에 완벽한 예수님이 인도해주셨고, 완벽하신 예수님이 함께 걸어가시는데도 두려웠고 어떻게 해야 할지를 염려했다. 결핍은 언제나 그 분과는 상관없는 문제이다.

5. 결핍은 언제나 나의 믿음의 분량과 나의 시선과 관계있는 것이다. 나의 믿음이 커지면, 나의 시선이 예수님을 온전히 바라보게 되면 해결되는 문제이다. 예수님은 언제나 내 옆에 계시기 때문이다. 

6. 결국 제자들도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았고, 나도 교회가 시작되는 기적을 보았다. 하나님은 믿음이 없는 제자들도, 나도 사용해 주신다. 우리가 그 분 옆에 붙어 있을 때 늘 우리를 사용해 주신다. 

7. 하지만 언제까지 우리도 결핍 속에서만 살 것인가? 가장 완전하시며 충만하신 그 분과 함께 걸어가면서도 늘 그 분의 인도하심을 경험하면서도 이렇게 결핍만 바라볼 것인가? 오히려 더 예수 그리스도의 충만한과 아름다우심을 바라보기 원한다. 

8. 충만하심이 꼭 물질이나 빵에 관계된 것 만은 아니다. 그 분의 충만함은 모든 것에 있는 모든 것이다. 삶의 작은 부분에서도 큰 일에 까지..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해주신 것들을 잊지 말고 그 분을 더 깊이 바라보자. 그 분을 향한 충분한 믿음을 가질 때, 결핍된 세상 속에서도 오히려 충만함을 경험할 것이다. 

9.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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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21. 1. 14.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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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5:30-47 말씀이 나를 이끌어가시도록

1. 나무를 보고 숲을 보지 못하면 숲에서는 길을 잃기 쉽다. 너무 세세한 것에 집중하다가 보면 큰 방향을 잃어버리기 쉽상이란 것이다. 유대인들이 성경을 연구했던 방법이 아마도 그랬을 것이다. 

2. “너희는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39절)”  그들은 성경을 끊임없이 암송하고 외우고 연구했다. 성경의 율법을 연구하고 문자 그대로 지키려고 애썼다.

3. 그러다가 그들은 그 성경 전체가 증언하고 있는 그리스도를 눈 앞에서 보고 있으면서도 놓치게 되었다. 각각 매우 중요한 것들을 연구하느라 오히려 그 모든 것이 가르치고 있는 그리스도를 놓치게 된 것이다.

4.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성경을 읽으면서 우리는 늘 그리스도를 찾아야 한다. 하지만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놓친 것은 단순히 성경 때문 만은 아니었다. 그들은 그들의 생각을 가지고 성경을 읽었다. 

5.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 (40절)" 그들의 생각으로는 예수님과 같은 그리스도가 아니라 왕으로 오셔서 자신들을 로마의 압제로부터 구원해주실 메시아를 기다린 것이다. 그러기에 예수님을 거부하고 그 분에게 나아가 영생을 얻고자 하지 않았다. 

6. 내 마음에 어떠한 생각과 지향하는 부분을 가지고 성경을 읽게 되면 성경을 성경으로 이해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성경으로 내 생각을 뒷받침 하게 된다. 성경이 나를 이끌어 가는 것이 아니라 내 생각을 뒷받침 하는 재료로 성경을 쓰게 된다. 주객이 전도되는 것이다. 

7. 나는 성경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 설교를 어떻게 하고 있는가?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말하고 있는가? 아니면 내 생각을 뒷받침 하기 위해 성경을 인용하고 있는가? 최근 한 선교단체가 백신을 맞으면 조종당한다 등의 이해하기 힘든 이야기를 설교 중에 하며 코로나 검사도 거부하는 등의 모습을 보여 물의를 일으키고 있다. 자세한 내막은 다 알 수 없지만 가뜩이나 교회에 대한 실망감이 큰 한국 사회에 큰 충격을 주고 있는 것 같다. 

8. 그 분이 한 설교 전체를 들어보지 못했지만 분명히 어느 성경구절을 가지고 했으리라.. 설교니까.. 하지만 말씀이 나를 이끌어 가야지 내 생각이 말씀을 사용하면 안된다. 그러면 유대인들이 십자가에 하나님의 아들을 매달았듯이 지금의 우리도 예수님의 가르침과 정신, 복음을 십자가에 매달게 된다. 

9. 십자가를 져야 할 사람은 그리고 내가 부인해야 할 것은 언제나 ‘나 자신’이다.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눅 9:23 내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만 전하는 이번 주 설교가 되기 원한다.  

10.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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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Thinking)/Meditation2021. 1. 12. 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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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5:1-18 형식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의미이다

1.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서른여덟 해 된 병자를 고치셨다. 누구든지 베데스다 연못이 움직이면 가장 먼저 들어가는 사람이 낫게 되는 약간은 신화적인 내용이다. 

2.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중증환자는 나을 길이 없다. 물이 움직일 때 가장 먼저 들어가는 사람은 아무래도 경증이든지, 빨리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 아니겠는가? 

3. 예수님은 그에게 낫고자 하느냐? 라고 물으신다. 도대체 누가 낫고 싶지 않겠는가? 심지어 자신의 병이 38년이나 되었다면 말이다.. 내가 43살인데.. 기억이 있는 내 인생의 전부가 아팠을텐데.. 어찌 낫고 싶지 않겠는가?

4. 하지만 사람들의 관심은 병자에 있지 않았다. 안식일을 지키는지 안지키는지 그것만 보고 있었다. 안식일에 무엇을 해야 하는지 형식만 알고 그 의미는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마치 요즈음의 상황 같다. 

5. 우리가 왜 예배를 드리는지 의미는 알지 못하고, 오직 대면예배만 주장하는 그런 느낌이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다음 계명을 이웃을 내 몸 같이 사랑하라고 하셨는데.. 이웃의 건강과 고민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 예배만 소리높여 외치는 그런 느낌이다. 왜 대면예배가 소중하지 않겠는가? 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마치 안식일 논쟁과 같이 의미와 내용은 사라지고 형식만 남은 느낌이다. 

6. 유대인들은 그렇게 안식일을 만드신 하나님을 죽이고자 하였다 (18절). 모든 일에서 형식에 얽매이면 의미가 보이지 않는다. 형식은 중요하다. 사람은 겉을 보기 때문이다. 하지만 언제나 더 중요한 것은 형식이 아니라 내용이다. 

7. 안식일의 의미는 무엇인가? 하나님은 왜 안식일을 만드셨을까? 고민하지 않고 형식에만 얽매이면 유대인들과 같이 하나님의 아들조차도 죽일 수 있게 된다. 내가 지금 붙들고 있는 것은 의미인가? 형식인가? 

8. 살리기 위한 형식인가? 죽이기 위한 형식인가? 살리기 위한 의미인가? 죽이기 위한 의미인가? 고민없이 전통에 얽매여 넘어지지 않기 원한다. 특별히 아이들에게.. 교회에게.. 눈에 보이는 형식을 중요하게 여기지만 더 중요한 의미와 내용에 집중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 원한다. 

9.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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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