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Thinking)/Meditation2020. 9. 18. 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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겔 11:1-13 칼을 두려워하면 칼로 망한다

1.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불의를 품고 악한 꾀를 꾸미던 자들이었다 (2절). 어떤 불의와 악한 꾀인지는 알 수 없지만 같은 이스라엘을 향한 것이었든지, 혹은 주변 백성들을 위한 것이었든지, 그것도 아니면 하나님을 향한 것이었든지… 그것들은 하나님이 기뻐하실 수 없는 것들이다.

2. 하지만 그들이 칼을 두려워한다고 말하는 8절을 본다면 아마도 주변 나라들을 향한 악한 생각이 아니었나 추측해 볼 수 있겠다. 이스라엘의 두려움은 다른 나라로부터 정복당하거나 침략을 당할거라는 두려움이었을 것 같다. 

3. 하지만 성경은 우리에게 우리가 두려워하고 경외해야 할 한 분이 오직 하나님 한 분이심을 이야기 하고 있다.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으면 우리는 다른 무엇인가를 두려워할 수 밖에 없다. 

4. 그것이 우리 삶의 우상이고, 그것이 우리의 삶의 올무로 작용한다. 두려워할 분을 두려워하고, 경외할 분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이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께서는 그 우상이 가짜이고, 오직 여호와 하나님께서만 하나님이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그 우상으로 우리를 망하게 하실 것이다. 

5.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가 칼을 두려워하니 내가 칼로 너희에게 이르게 하고” (8절) “너희가 칼에 엎드러질 것이라 내가 이스라엘 변경에서 너희를 심판하리니 너희는 내가 여호와인 줄을 알리라” (10절)

6. 본문을 보며 나는 무엇을 두려워하는지를 생각해보게 된다. 하나님인가? 아니면 어떠한 종류의 칼인가? 온 세상을 다스리시고 역사하시는 하나님인가? 아니면 칼을 향한 두려움인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살기 원하지만 실은 나도 칼을 두려워하며 살고 있다.

7. 특별히 요즈음 나에게 칼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들과 아이들 문제, 그리고 교회개척인 것 같다. 이 문제들을 대할 때 때로는 하나님이 역사하지 않으실 것 처럼 하고 있다. 하나님이 일하실 여지, 공간을 두지 않고 내가 붙잡으려고 하고, 내가 바꾸려고 한다. 그리고 좌절한다. 그리고 또 다시 해보려고 하고, 또 좌절하고의 반복이다. 

8. 내가 두려워야 할 대상이 오직 하나님 한 분이심을 기억한다. 내가 내 삶의 한 치도 바꿀 수 없음을 다시 한번 기억한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칼을 두려워하여 칼에 망하게 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거울 삼아 다시 한번 마음을 다 잡는다. 하나님만 경외해야 한다. 하나님만 두려워해야 한다. 

9. 삶의 우상도, 올무도 아닌 하나님을 경외하고 두려워하는 오늘 하루가 되자. 붙들고 있었던 문제들도 다시 한번 하나님께 올려 드리자. 내가 하는 것 보다 그 분이 하시는 것이 당연히… 맞다. 어떤 문제도 그 분께는 문제가 아니다. 

10.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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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20. 9. 17. 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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겔 10:15-22 극약처방이 내려질 때에 내가 할 일

1. 하나님의 영광이 성전을 떠났다. 왜냐하면 그 성전은 이전에 본 것과 같이 악과 우상숭배로 가득했기 때문이다. 성전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이다. 온 우주에 충만하신 하나님께서 굳이 죄악된 인간의 한 장소에 자신을 제한하셔서 인간을 만나 주시겠다고 하신 곳이다. 하지만 이제 하나님이 그 자리에서 떠나가신다. 

2.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다. 하나님께서 계신 곳에 그 영광이 충만한 것인데, 이제 그 영광의 충만함이 성전 문지방을 떠나서 (18절) 성전 동문으로 움직여 갔다 (19절). 

3. 하나님의 영광이 떠난 이스라엘은 끝이다. 정말로 끝이다. 사실 하나님께서 경고하실 때 돌아왔어야만 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 결과는 하나님이 떠나고 계신다. 

4. 그런데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알듯이 이 떠남은 이스라엘을 포기하고 버리신 사건이 아니다. 이스라엘을 돌아오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극약처방과 같은 모습이었다. 절대로 듣지 않는 자들을 향한 절대로 들을 수 밖에 없도록 하는 하나님의 일하심이었다. 

5. 마치 너무나도 말을 안듣는 아이를 향해 너무나도 사랑하지만 때로는 매를 들어야 하는 것과 같은 일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언제나 흘러 넘치고, 하나님은 절대로 우리를 떠나지 않으신다. 그렇지만 하나님이 이렇게까지 하시도록 우리는 늘 죄를 쌓아가고, 죄를 지어가고 있는 자들이다.

6. 우리 아이들을 보면 엄마 아빠가 극약 처방을 해도 오히려 엄마, 아빠를 원망할 때가 많다. 왜냐하면 아직 아이들의 자신의 삶을 돌아보거나 자신들이 뭘 잘못했는지 보기 보다는 그저 엄마 아빠가 나한테 잘해줬느냐, 아니냐만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는 어떤 사람인가? 

7. 때로는 하나님의 극약처방이 내려질 때, 원망하는가? 나를 돌아보는가? 하나님의 극약처방의 이유가 나임을 깨닫는가? 아니면 나는 잘못 없는데 하나님께서 나를 선대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불평하는가? 

8. 역사는 반복된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나 개인의 삶에서 수없이 반복되고 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기 보다는 그저 나한테 좋은가 나쁜가가 선악의 판단 기준이 되어 때로는 하나님이 나한테 이렇게 하시는 것이 옳지 않다고 생각하거나 불공평하다고 생각할 때가 있다. 안된다. 안된다. 

9. 하나님은 언제나 선하시다. 하나님은 언제나 자비로우시며 은혜로우신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을 판단하려고 하지 말고, 내 삶을 돌아보자. 불평하지 말고, 내 안에 우상들과 죄악들을 제거하자. 하나님의 극약처방이 내려지기 전에 회개하고 돌이키자. 

10. 그 분의 성품을 믿고 의심하지 말고 오늘을 살아가자.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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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Thinking)/Meditation2020. 9. 15. 1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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겔 9:1-11 진노 중에서 여전히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

1. 그동안 계속해서 심판을 선포하셨던 것과 같이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였다. 긍휼의 시간은 끝이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사랑의 하나님이시지만 또한 공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다. 심판을 위해 죽이는 무기를 든 자 여섯이 나왔다 (1절).

2. 하지만 이 때에도 하나님은 긍휼을 잊지 아니하셨다. 무기를 든 자 여섯 외에도 서기관의 먹 그릇을 찬 사람이 함께 서 있었다. 그의 할 일은 심판이 아니라 긍휼이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예루살렘 성읍 중에 순행하여 그 가운데에서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로 말미암아 탄식하여 우는 자의 이마에 표를 그리라 하시고"

3. 마치 유월절에 문설주에 어린 양의 피를 바른 사건과도 같다. 심판하는 자들에게 말씀하신다. “이마에 표 있는 자들에게는 가까이 하지 말라” (6절). 유월절 사건에서도 동일하게 역사하셨다.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재앙을 내리려고 지나가실 때에 문 인방과 좌우 문설주의 피를 보시면 여호와께서 그 문을 넘으시고 멸하는 자에게 너희 집에 들어가서 너희를 치지 못하게 하실 것임이니라” 출 12:23

4. 그리고 정화작업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에서부터 시작되었다 (6절 후반부). 하지만 하나님은 하박국의 기도와 같이 그러한 심판 중에서도 긍휼을 잊지 아니하셨다 (합 3:2).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백성들을 죄악에 빠진 백성들과 함께 결코 심판하지 않으신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는 자체가 공의가 아니기 때문이다.

5. 하나님의 구원의 일을 어찌 내가 다 알 수 있을까? 믿지 않은 자들, 듣지 못한 자들에 대한 말씀은 성경이 증언하지 않고 있으니 어떻게 될지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구원의 방식은 언제나 동일하다. 이마에 표식이 있느냐? 유월절 어린양의 피가 발라져 있는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있는가? 

6. 세 가지 중에 내가 나를 구원에 이르게 하는 길은 내 스스로가 할 수 있는 일은 단 한 가지도 없다. 오늘 본문처럼 그저 이마에 표식을 새기든지, 유월절 어린양의 피를 바르든지,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든지… 우리는 그저 우리의 믿음을 통해 하나님의 일하심으로 구원받을 뿐이다. 비단 이스라엘 백성들 뿐이랴? 

7. 하나님은 진노 중에서 우리에게 긍휼을 베푸신다. 죽어서 마땅한 우리를 위해 아들을 죽게 하셨다. 사랑받을 수 없는 우리를 사랑하시려고 도저히 관계할 수 없는 우리와 관계하시려고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를 대신해서 죽게 하시고, 심판하셨다. 

8. 로드니 스타크라는 기독교인이 아닌 사회학자가 쓴 책 ‘기독교 승리의 발자취’란 책에서 왜 기독교가 세계 최대 종교가 되었는지를 분석했다. 그리고 그 결론은 너무나도 심플했다. ‘기독교는 전도를 통해 과거의 비기독교 지역이었던 곳에서 개종을 통해 급속한 성장을 나타내고 있다’ 

9. 그렇게 진노 중에서 죽어 마땅한 우리가 이제 할 일은 진노 중에 있는 자들에게 이 좋은 소식, 긍휼의 소식을 전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알지 못했던 자들에게, 듣지 못했던 자들에게 그저 이 놀라운 좋은 소식을 전하는 것 뿐이다. 지금이 아직도 하나님께서 진노 중에서도 여전히 긍휼을 베푸시는 시기이고, 반드시 심판은 오기 때문이다. 그들의 귀에 들리는 소리로 복음을 전하자. 더 연구하고, 더 사랑하자. 모든 것은 사랑에서 나온다. 

10.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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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Thinking)/Meditation2020. 9. 14.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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겔 8:1-18 점점 더 깊어지고 교묘해지는 우상숭배, 그게 바로 나

1. 8장의 시작부터 하나님은 에스겔을 성전 북문으로 이끄신다. 북문에는 질투의 우상이 있고 (5절), 성전 뜰 문으로 이끄시니 그 곳에는 곤충과 가증한 짐승들을 섬기고 있었다 (10절). 

2. 오늘 본문에서는 여호와의 전으로 들어가는 북문에서 담무스(수메르, 바벨론에서 섬기던 농경의 신)를 위해 애곡하는 것을 보게 하셨고 (14절), 마지막으로 성전 안뜰에서는 25명이 여호와의 성전을 등지고 태양에게 예배하는 것을 보게 하셨다 (16절).

3. 처음 본 성전 밖의 모습이 오히려 더 양반이다. 하나님이 계셔야 할 성소의 안으로 들어오면 들어올 수록 더 가관이다. 하나님의 성전이기에 외부에서는 그래도 외부의 시선이 의식되었는지 좀 약한(?) 우상숭배들이 자행되고 있었다면 더 깊이 들어오면 올 수록 더 깊고 교묘한 우상숭배가 자행되고 있었다.

4. 성전 안뜰의 25명은 24반열의 제사장들과 그들의 대표인 제사장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저 일반적인 사람들이 아니라 성전 안에서 하나님을 섬기도록 부름받은 사람들인 것이다. 그들은 성전을 등졌다. 부끄러움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태양신이 싫어한다고 느꼈기 때문일까? 아니면 하나님을 등진 그들의 상징적 표현이었을까?

5. 이스라엘의 이러한 모습은 외식하는 나의 모습같이 보여진다. 다른 사람들이 보고 있는 외모, 겉모습, 말투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선교사처럼 보이도록 만들어뒀지만 점점 내 안으로 깊이 들어갈수록 내 마음, 내 생각이 얼마나 더럽고 추악한가? 

6. 은밀하고 교묘하게 죄를 사랑하고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또 다른 것도 같이 사랑하고 있는 나의 모습이 오늘 이스라엘 백성들의 우상숭배가 성전 안으로 갈수록 더 교묘해지고 깊어지는 것을 보면서 떠올랐다. 이러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심판을 말씀하셨고 (18절) 나에게도 마찬가지 선고가 내려졌다. 

7. 18절에 ‘그들이 큰 소리로 내 귀에 부르짖을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 라고 말씀하셨다. 실제로 하나님은 그렇게 하셨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듣지 아니하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나의 하나님’이라고 십자가 위에서 부르짖으실 때 하나님은 듣지 아니하셨다. 그리하여 우리는 나음을 입은 것이다. 

8. 이 회칠한 무덤 같은 내 삶을 그리스도의 보혈이 덮으셨다. 회칠한 무덤 같은 내 삶은 여전하지만 그 의로운 보혈로 인해 하나님께서는 나를 의롭다 선언하셨고, 이제 더 이상 죄인의 삶이 아니라 의인으로 하나님과 함께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 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파괴되고 무너져야 마땅할 성전 (내 몸)이 그리스도의 피로 인해 새롭게 세워져 가는 성전이 된 것이다. 이것이 복음이고, 은혜이고, 그리스도와 함께 동행하는 삶이다. 새롭게 세워져 가는 그리스도의 몸… 

9. 오늘도 내가 얼마나 교묘하고 악하고, 더러운 것이 가득한 자인지를 깊이 깨닫자. 그리고 그러한 나를 그리스도께서 거절 당하심으로 하나님께서 나를 용납하셨음을 잊지 말고 더 타인에게 너그럽고, 나에게 엄격하여 그리스도의 몸이 계속 세워지도록 힘쓰자. 기억하자.

10.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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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20. 9. 11. 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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겔 7:1-13 역설의 삶

1. 에스겔서 오늘 본문만 본다면 그저 절망이다. 1-4절에서는 ‘이 땅 사방의 일이 끝났도다’ (2절) 라고 말하고 있고, 5-9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시고 우리의 행위대로 벌하시겠다고 하신다. 행위대로 우리를 벌한다면 우리의 끝은 자명하다. 

2. 행위대로만 우리를 심판하신다면 하나님이 굳이 수고롭게 천국을 만드시지 않으셔도 되셨을 것이다. 우리의 행위로 누가 하나님께서 정한 의에 도달하며, 누가 하나님으로부터 '완전한 자'라고 인정받겠는가?

3. 그리고 이 우리의 행위대로 받는 심판은 모든 무리에게 임한다 (12절). 빠질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러니까 절망 그 자체이다. 아무런 소망도 아무런 희망도 없다. 에스겔의 말씀이 선포될 때 사람들이 아마도 비슷한 절망감을 느꼈을 것 같다. 

4. 절망 속에서 선택할 수 있는 행동은 아마도 두 가지일 것이다. 첫 번째는 자포자기이다. 어차피 절망이니 될 대로 되라는 행위일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에는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 그 희망을 찾기 위해 애쓰게 될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5. 하나님께서 홍해를 갈라주셨고, 애굽에서 구해주셨고, 가나안 땅을 주셨음을 몸소 경험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능력과 말씀의 성취에 대해서 잘 알았기에 아마도 절망감에 몸서리 치지 않았을까? 혹은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기대어 어떠한 희망을 찾는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6. 우리에게도 마찬가지로 끝이 있고, 심판이 있고, 그 심판은 모두에게 동일하게 임한다. 우리의 인생도 끝으로, 절망으로 치닫고 있다. 우리가 외면해도 부인해도 우리는 늙어가고 있고, 몸의 기력이 쇠하여지고 있는 자들이고, 반드시 있을 끝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7. 하지만 하나님께서 에스겔의 시대에는 희미하게 보였던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주셨다. 그 완전한 절망 가운데 완전한 소망을 허락하신 것이다. 내 삶의 절망의 자리에서 새로운 소망이 시작되었다. 단순히 죽어서 가는 천국이 아니라 이 땅에서부터 하나님의 아들이 내 안에, 내가 하나님 안에 살 수 있게 되었다. 

8. 나의 행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보혈이 나의 삶에 대한 평가의 기준이 되었다. 나의 어떠함 (who I am)이 아니라 그 분의 어떠함 (who Jesus is) 만이 중요하게 되었다. 두려움의 마지막이 아니라 새로운 소망의 마지막이 되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이러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오늘의 삶에서 누리고 싶다. 나를 인정받기 위해 애쓰고 실패하고 후회하는 삶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행하신 일이, 그 분의 인격이, 그 분의 성실함이 내 삶을 이끌어가는 그런 삶 말이다. 

9. 그러기에 두렵지만 두렵지 않을 수 있고, 죽지만 죽지 않을 수 있는 역설의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속이는 사람 같으나 진실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고후 6:8 하반절부터 10절까지 

10. 그렇게 역설의 삶을 살아가는 내가 되길..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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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Thinking)/Meditation2020. 9. 10.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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겔 6:1-14 여호와가 하나님이시다

1. 하나님의 본질상 사랑이다. 하지만 그 본질이신 사랑과 더불어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께 매우 중요한 일로 성경에서 나타난다. 사실 하나님의 이름의 계시가 곧 그 분의 성품의 계시이기 때문이다. 

2. 이스라엘 백성들의 심판이 선포되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산에서 우상숭배하던 산당들이 멸하게 되고 (3절), 우상들이 깨어져 없어지며 분향제단들이 작살난다 (6절). 그런데 그 모든 것이 다 선포되고 나서의 마지막 말씀은 바로 ‘내가 여호와인줄을 너희가 알게 하려 함이라’ (7절)이다. 

3.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또한 열방에게 자신을 계시하고자 하신다. 왜냐하면 야훼 하나님만이 온 우주의 하나님이시고 역사의 주관자이시기 때문이다. 8절부터는 살아남은 자에 대한 예언을 하신다. 그리고 10절은 마찬가지로 마친다 ‘그 때에야 그들이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 

4. 죄를 짓는데도 망하지 않고, 우상을 숭배하는데도 오히려 승승장구한다면 공의와 정의의 하나님을 결코 알 수 없을 것이다. 하나님의 성품을 계시하신다. 공의로우시고, 정의로우신 그 하나님의 말이다. 온 우주가 질서를 가지고 움직이고, 그 우주에 가득한 정의와 공의의 하나님 말이다. 

5. 이스라엘 백성들은 결국 알았을 것이다. 자신들이 죄인임을, 그리고 자신들의 죄로 인한 징계임을… 그들은 누가 여호와 하나님인 줄을 알았을 것이다. 망하고 나서.. 포로로 잡혀가고 나서… 모든 것이 부서지고 나서 말이다. 

6. 하지만 모든 곳이 황량하고 황폐하고 나서 여호와가 하나님인줄을 깨닫게 된다면 참 안타까울 수 밖에 없다. 망하기 전에, 포로로 잡혀가기 전에, 모든 것이 부서지기 전에 하나님을 알고, 그 분의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 이것이 지혜이고, 은혜이다.

7. 오늘 내 삶에서 여호와가 하나님이심을 인정하고 있는가? 오늘 나의 삶의 모든 영역에서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이 인정되고 있는가? 나는 지혜있는 사람인가? 아니면 망하고, 넘어져봐야 아는가? 별반 이스라엘 백성들과 차이가 없어 보인다.

8. 일이 있으면 기도하고, 일이 없으면 기도 안하고.. 어려움이 생기면 하나님을 깊이 찾다가.. 그 일이 해결되고 나면 다시 내가 우선이 되고를 늘 반복하고 있다.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려고 결단하고 애쓴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내가 해야 할 수 있는 것은 주님께 나의 짐을 맡기는 일이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마 11:28-30

9.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만난 그 자리,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가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나의 짐을 그 분께 맡기고, 나의 멍에를 그 분께 드리고, 그 분 앞으로만 더, 더 나아가는 것이 내가 할 일이다. 예수를 더 깊이 만남을 통해서 여호와가 하나님이심이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이 내 삶에서 더욱 선포될 수 있기를 원한다. 

10.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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겔 5:1-17 사랑한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1. 이스라엘이 받을 벌의 이유는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을 저버렸기 때문이다. 약속만 저버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멸시하고 오히려 이방인들보다 더 악하게 살았기 때문이다. 7절에서 이를 표현하고 있다. “이방인들보다 더하여…"

2.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거룩함을 드러내야 하는 민족인데 그들이 오히려 주변의 이방인들보다 더 악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들을 결국 심판하신다. 하나님이 심판하신다고 해서 하나님이 그들을 사랑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3. 거의 400년 (정확히는 390년) 을 참으셨다. 그 기간 내내 선지자들을 보내셨다. 수많은 선지자들이 보내심을 받아서 그들을 통해 수많은 하나님의 약속과 사랑이 선포되었다. 하지만 결국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거역했다. 

4. 하나님의 사랑과 오래 참으심이 한계에 도달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끝이 없다. 하나님은 여전히 그들을 사랑하신다. 오히려 그들의 죄악이 하나님의 공의에 부딪친 것이다. 하나님의 공의에 부딪쳐서 그들의 죄를 그들이 감당해야만 하는 이 시점에도 하나님은 말하기를 멈추지 않으신다.

5. 하나님의 말씀이 사랑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계속해서 들려오는 것이 사랑이다. 심판하겠다고 말하는 것이 사랑이다. 왜냐하면 심판하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은 돌아오라는 것이다. 아직 말하는 동안 돌아올 수 있다는 것이다. 마치 아이들에게 한 번만 더 하면 이렇게 이렇게 혼날거라고 말해주는 것과 같다. 

6. 이렇게 하지 말라는 것이다. 혼나지 말라는 것이다. 죄짓는 것을 멈추라는 것이다. 사랑의 목소리이다.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때로는 이해 못하고, 때로는 화가 나게 들리지만 하나님께서 사랑한다고 하시는 말씀이다. 

7. 내 삶을 돌아볼 때, 매일 매일의 이 아침묵상의 시간이 정말로 '내 발의 등이고, 내 길의 빛'이었다. 앞이 보이지 않을 때에도, 오해로 인해 마음이 아프고 상해서 분노의 마음이 들 때에도, 아이들을 양육함에 있어서 끝없이 좌절에 빠질 때에도… 설명할 수 없는 많은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께서는 날마다 말씀을 통해 나에게 말씀해주셨다. 깨닫게 해주셨고, 생각하게 해주셨고, 돌아보게 해주셨고, 다시 일어나게 해주셨다. 

8. 때로는 아픈 말씀이지만, 여전히 나에게 ‘사랑한다 사랑한다 사랑한다’라고 말씀하심을 내가 안다. 오늘 본문에서 이스라엘에게도 심판을 이야기하시지만 그 말씀이 ‘사랑한다’로 들리는 이유이다. 이 ‘사랑한다’ 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태국의 젊은 영혼들에게 그들의 귀에 들리는 소리로 전하기 원한다. 

9. 교회가 11월 1일에 첫 예배를 기도하며 준비하고 있다. 내가 뭐 그리 어마어마한 것을 할 수 있겠는가마는… 소원하기는 이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의 귀에 들리도록 전하고 싶다. 그렇게 기도한다. 선교사가 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이 ‘하나님의 말씀을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문화와 맥락 안에서 정확히 전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내 귀에 들려진 그 사랑의 소리를 그들의 귀에도 들려줄 수 있는 우리 가정이 되기를 원한다.

10. 오늘도 샬롬 

# 저희 가정을 위해 파송교회에서 나눈 영상을 첨부합니다. 교회 개척 상황을 조금 더 이해하실 수 있을 것 같아서요.. 늘 기도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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겔 4:9-17 그리스도의 완벽한 속죄

1.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계속해서 이스라엘의 죄를 어떻게 담당해야 할지를 말씀하신다. 음식도, 물도 제한된다 (10, 11절). 그리고 떡을 만들어 먹을 때는 사람의 똥으로 불을 피워 먹으라고 한다. 그들의 죄가 얼마나 큰지, 얼마나 부정한지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있다. 

2. 에스겔은 그 때 하나님께 이렇게 부탁한다. “내가 말하되 아하 주 여호와여 나는 영혼을 더럽힌 일이 없었나이다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스스로 죽은 것이나 짐승에게 찢긴 것을 먹지 아니하였고 가증한 고기를 입에 넣지 아니하였나이다” (14절)

3. 그의 고백은 그가 하나님 앞에서 율법을 잘 지켜왔고, 그리하여 지금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이 순간에도 가능하면 율법을 어기지 않을 수 있도록 자신이 부정해지지 않도록 배려해 달라는 말로 들린다. 제사장으로써 할 수 있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4. 하지만 에스겔의 이 고백은 나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떠올리도록 만들었다. “우리에게 제단이 있는데 장막에서 섬기는 자들은 그 제단에서 먹을 권한이 없나니 이는 죄를 위한 짐승의 피는 대제사장이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고 그 육체는 영문 밖에서 불사름이라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그런즉 우리도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히 13:10-13) 

5. 영문 밖이란 곳은 성문 밖을 의미하며 이 곳은 온갖 부정함이 가득하던 곳으로 그 곳에서는 제물로 드려졌던 동물들을 모아 태우는 곳이 있었다. 그리고 그 곳에는 가장 부정한 똥을 태우는 곳이 있었다. 예수가 죽으셨던 갈보리도 성문 밖이었으며, 예수께서는 그 모든 부정함을 아낌없이 받으셨다. 에스겔과 같이 감하지도 않았고, 바꾸지도 않았다. 예수님께서는 똥 태우는 성 밖에서 우리의 모든 더러운 죄를 지고 우리의 모든 죄악을 담당하셨다. 

6. 에스겔의 대속함도 대단하다. 그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였다. 하지만 그의 속죄함은 예수 그리스도의 것과 같은 완전한 것이 아니었고, 단번에 모든 것을 속죄할 수도 없었다. 대단했지만 부족했고, 완전하지 못했다. 

7.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는 완벽했다. ‘다 이루었다’라고 말씀하실 정도로 우리의 모든 죄를 감당하셨고, 우리의 모든 부정함을 그 몸에 모두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그리고 부활하셨다.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영원한 속죄를 하신 것이다. 

8. 어제 예준이에게 좀 화를 심하게 냈다. 오해도 있었고, 내 감정이 미리 상한 것도 있었다. 하지만 예수께서 영원한 속죄를 하셨다는 묵상 속에서 예준이와 아내에게 더 큰 미안함이 든다. 예수께서 다 감당하셨는데, 내가 뭘 그리 화를 내며 그 화가 안 풀려서 그랬는지… 예수께서 나와 그의 모든 부정함을 다 몸에 짊어 지셨는데 난 뭐라고 그리 내 감정만 붙들었는지… 부끄럽다. 

9. 부끄러움 속에서 덜 부끄러운 삶으로 나의 내면이 조금씩 더 자라갔으면 좋겠다. 

10. 부끄럽지만..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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겔 4:1-8 너도 죄인, 나도 죄인

1. 이스라엘의 죄악은 심히 심각했다. 에스겔에게 하나님께서 그들의 죄를 담당하는 상징적인 행위를 하도록 말씀하신다. 그것은 죄악의 날수대로 한 방향으로만 누워서 지내라는 것이었다.

2. “너는 또 왼쪽으로 누워 이스라엘 족속의 죄악을 짊어지되 네가 눕는 날수대로 그 죄악을 담당할지니라” (4절) 좀 우습게 느껴지는 모습이다. 한 방향으로 계속 누워만 있으라니…

3. 하지만 인간의 신체구조상 단순한 한 동작을 반복하는 것은 매우 힘이 든다. 그것이 심지어 누워있는 것이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환자분들이 몸을 돌리지 못하고 계속 누워만 있으면 몸에 욕창이 생기고 하지 않는가? 

4. 그런데 그 날이 길다. 하나님께서 일년을 하루로 쳐주신다고 하셨는데도 이스라엘의 죄악의 날은 390일이고, 유다의 날은 40일이었다. 왼쪽으로만 390일 오른쪽으로만 40일을 누워있어야만 한다. 1년을 하루로 치더라도 그들의 죄악의 역사는 길었다. 

5. 그러나 죄악의 역사가 과연 그들 뿐이었으랴? 에스겔이 했던 것과 같이 죄를 대속해야 하는 민족이 이스라엘 뿐이었으랴? 아니다. 그들도, 우리도 모두 다같은 죄인일 뿐이고, 이렇게 상징적으로 죄를 감해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우리를 위해 오셨어야만 하는 죄인이었다. 

6. '너도 죄인, 나도 죄인’ 어떤 상징적인 문구나 양비론을 펼치기 위한 이야기가 아니다. 그저 사실일 따름이다. 이 문구가 다른 사람을 향한 칼이 아니라 다른 이들을 이해하고 사랑하기 위한 첫 단추가 되기를 원한다. 

7. 그리스도는 우리 모두를 위해 오셨다. 내가 사랑하고 아끼는 누군가 만을 위해 오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포괄적인데, 나의 사랑은 참으로 선택적인 것 같다. 그리고 그 선택의 기준은 언제나 ‘나’이다. 

8. 좀 더 다양하고, 다른 것들을 품을 수 있는 내가 되기를 기도해본다. 모든 사람을 품었던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 더 많은 사람을 품을 수 있는 선교사가 되기를 기도한다. 하지만 실제의 나의 삶은 때로는 아내도, 아이들도 품어주기에 좁은 사람일 뿐이다. 더욱 더 그리스도를 배워야 한다. 알아야 한다. 그 분을 더욱 더 닮아가야 한다. 

9. 내 안에서 나올 수 있는 은혜가 아니다. 모든 것이 풍성하신 시냇가에 심은 나무와 같으신 그 분으로부터 흘러나오는 풍성함을 내가 누려야 넒은 사람이 될 수 있다. 오늘도 그리스도께 붙는다. 떨어지고 넘어지지만 또 붙는다. 그렇게 풍성함을 누리는 하루가 되길

10.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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겔 3:1-11 듣든지 아니 듣든지,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1. 에스겔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두루마리를 받아서 먹는다. 그 두루마리는 매우 달았다.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이 때 먹으라는 말은 단순히 먹어서 뱃속에 채우라는 말이 아니다. ESV 주석을 보면 먹으라는 말은 '가서 말해야 할 사명과 결합된다.'고 말하고 있다.

2. 먹어서 나만 즐겁고, 먹어서 나만 단 말씀이 아니라 가서 전해야 하는 말씀인 것이다. 우리에게 먼저 말씀이 전해진 이유, 우리가 먼저 말씀을 소유할 수 있는 이유는 가서 전하라는 사명과 결부된다. 마태복음 28장의 대사명과도 결부되는 말이다. 

3. 하지만 가서 전하지만 전하는 언어보다는 듣는 자의 마음이 참으로 중요하다. 6절에 보면 "너를 언어가 다르거나 말이 어려워 네가 그들의 말을 알아 듣지 못할 나라들에게 보내는 것이 아니니라 내가 너를 그들에게 보냈다면 그들은 정녕 네 말을 들었으리라" 

4. 하나님의 말씀이 귀에 들리워도 그 말을 듣고자 아니하고 마음을 굳게 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있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다시 한 번 마음을 굳게 하라고 말씀하신다. "네 이마를 화석보다 굳은 금강석 같이 하였으니…"

5.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될 때에 마음이 열려 그렇게 쉽게 받아들인 민족들이 누가 있었던가? 우리 한국도 초기에 얼마나 많은 선교사들을 죽였고, 얼마나 많이 복음을 핍박하였는가? 창 3장에서 죄를 지은 이후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은 인간의 디폴트 값인 것 같다. 

6. 하지만 말씀을 받아 전하는 자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굳은 마음인 것 같다. 11절 말씀처럼 "그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그들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이 이러하시다" 하고 말할 뿐이다. 같은 말씀이 디모데후서 4:2절에서도 발견된다.

7.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먼저 말씀을 받아 뱃속에서 단 자들의 삶의 모습이어야 한다. 그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 인간의 디폴트는 거역이고, 거절이다. 

8. 190년을 선교사들이 외쳐도 여전히 거역하고 있는 태국이다. 이러한 땅에 교회가 곧 개척이 된다. 그들의 귀에 들리는 소리로, 그들의 문화에 이해되는 목소리로 복음이 전해져야 한다. 듣고, 안듣고는 내가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결정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의 귀에 들리는 소리로 전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섬기는 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9.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를, 우리 개척 팀의 마음을 굳게 해주시길 원한다. 그리하여 힘을 내어 복음을 전하는 것으로 우리의 마음을 결정할 수 있게 되기를 원한다. 듣고 아니듣고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때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말씀을 전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10.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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