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Thinking)/Meditation2020. 8. 31. 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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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하 25:22-30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약속을 성취하신다

1. 나라는 망하고 왕은 사로잡혀 가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아무런 희망도 남지 않은 것 같아 보인다. 절망적이다. 그 모습이 마치 바람 앞의 등불 같아 보이는 한국교회 같아 보이기도 한다. 

2. 세상의 소망이 되어야 할 교회가 많은 사람들의 조롱과 비난의 대상이 되었고, 오히려 사회의 염려의 대상이 되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런 절망적인 이스라엘의 상황 가운데서 여전히 그 분의 약속을 성취해 가신다.

3. 아브라함의 자손, 다윗의 자손인 여호야긴 왕이 그 잡혀간 바베론의 감옥에서 나오게 된다 (27절). 그 뿐만 아니라 그의 지위를 높이시고 (28절) 그 죄수의 의복을 벗게 하셨고, 왕의 앞에서 식사를 하게 하셨고 (29절) 그가 쓸 모든 것을 왕에게서 받도록 하셨다 (30절). 

4. 그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상황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하신 약속을 기억하시어 다윗의 자손을 회복시키시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잘하고 못하고와 상관없이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이스라엘을 이끌어 가고 계신 것이다. 

5. 그 절망적인 이스라엘도, (내가 말할 자격도 없는) 한국교회도, 그리고 내가 가장 잘 아는 절망적인 내 삶도 내가 잘해서, 혹은 내가 신실해서 그 약속의 길로 가고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절망 속에서도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우리를 이끌어가고 계신 것이다. 그것이 기쁜 소식이고, 그것이 복음이다. 

6. 복음이란 나의 절망을 아는 것과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동시에 아는 것이다. 절망이 없다면 우리는 하나님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고, 절망만 있다면 우리 삶을 지속할 힘이 없을 것이다. 우리는 절망하지만 그 안에서 기뻐할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결코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7. 어제 태국 프라까루나 교회에서 설교하였는데, 내가 나누었던 말씀이 바로 이 내용이었다. 우리의 절망스러움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우리를 구원으로 이끄신다는 내용이었다. 오늘 다시 한번 묵상하면서 내 삶에도 더 깊이 적용되기 원한다. 

8. 그저 머리로만 이해되는 복음이 아니라 내 삶에 뿌리박힌 복음, 내 삶을 이끌어가는 복음이 되기를 원한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여호야긴을 살려주셨고, 그 계보를 따라 약속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것과 같이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계속해서 나를 이끄실 것이다. 그 신실하심을 따라가자.

9.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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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20. 8. 28. 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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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하 24:8-17 영원히 변치 않을 것만 붙드는 삶 

1. 결국 말씀은 이루어졌다. 히스기야가 모든 성전의 보물을 바벨론의 사신에게 보여준 그 때 하나님께서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 하신 말씀이었다 (왕하 20장). 

2. 이사야의 대언대로 모든 왕궁보물이 그들에게 빼았겼으며 (13절), 왕과 왕의 어머니와 왕의 아내들과 내시들과 나라의 권세 있는 자들이 사로잡혀 갔다 (15절). 한 마디로 나라가 초토화가 되었다. 정상적인 나라 운영이 불가능한 지경에 이르렀다.

3. 이 일의 시작은 여호야긴이 하지 않았다. 시작은 히스기야의 교만함에서 나왔다. 자기 시대만 아니면 된다는 히스기야의 안일함에서 나왔다. 그리고 히스기야의 잘못된 자녀양육에서 나왔다. 그런데 그 피해는 이스라엘 전 백성들이 함께 짊어져야 했다. 

4. 히스기야가 잘못했다. 끝까지 남는 것은 말씀이고, 끝까지 이뤄지는 것도 말씀이다. 예수께서도 말씀하시길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마 5:18) 라고 말씀하셨다. 말씀은 결국 성취될텐데, 자기 때만 지나가면 된다는 히스기야의 생각은 오늘을 만든 것이다. 

5.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 영원히 흔들리지 아니할 말씀만 붙들어야 한다. 나만 괜찮으면 된다는 생각, 혹은 내 때만 아니라면 된다는 히스기야가 했던 것과 같은 생각이 말씀보다 더 확고하면 망하게 된다. 말씀이상으로 확고해야 할 것은 없다. 

6. 내 생각도 내 신념도 내 감정도 어느 때가 되면 변할 때가 있다. 이전에 너무나도 확실하게 붙들고 있는 생각과 신념도 얼마든지 변할 수 있다. 하지만 말씀은 결코 변하지 않는다. 내가 말씀만 붙들어야 할 이유이다. 하지만 한 가지 조심해야 할 것은 이 말씀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의 문제이다. 

7. 말씀을 붙드는 것이 너무나도 중요하지만, 잘 못 해석되거나 이해된 말씀을 굳게 붙드는 일은 오히려 더 위험하다. 말씀을 더 깊이 연구하고 묵상해야 하는 이유이다. 나는 혹시 히스기야와 같이 단지 지금을 벗어나려고 말씀보다 더 의지하고 있는 것은 없는가? 혹은 안일한 생각으로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가? 

8. 지금이 아니라 영원을 소망하며 살아가고 싶다. 당장 오늘을 위한 무엇인가를 붙드는 삶이 아니라 영원을 아우르는 말씀을 붙들어 매일을 살아가고 싶다. 히스기야와 같은 마음이 아니라 늘 다음 세대를 생각하며 살아가고 싶다. 

9. 우리가 세워가는 교회가, 교회를 세워가는 우리가 이렇게 살아가기 원한다. 영원한 말씀만을 붙들며, 영원을 붙잡고 살아가며, 다음 세대를 키워내게 되기를 원한다. 여기가 좋사오니, 우리만 좋사오니 혹은 우리의 신념만 붙들지 않기를 원한다. 

10. 히스기야의 마지막을 주의하자.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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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20. 8. 26. 1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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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하 23:31-37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기

1. 여호아하스가 왕이 되었다. 그는 전후무후한 좋은 평가를 받았던 아버지 요시야 왕과는 달리 단지 석 달을 왕위에 있었을 뿐인데도 그에 대한 평가는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다 (32절)’ 였다. 

2. 그리고 그의 인생은 애굽 왕의 간섭으로 망가졌다. 애굽으로 끌려갔고, 거기서 인생을 마치게 된다. 그리고 그의 형 여호야김이 왕이 되었다 그는 여호아하스의 형이었고, 그 역시 악을 행하였다 (37절). 

3. 자신의 아버지 요시야 왕도 애굽 왕과의 전쟁에서 죽었고, 자신의 동생도 끌려갔고.. 여호야김이 자신의 동생이 애굽으로 끌려가는 것을 보면서 어떤 것을 느꼈을까? '역시 세상은 힘이다’라고 느꼈을까? 아니면 ‘애굽 왕을 잘 못 건드렸다가는 나도 동생 꼴 나겠구나” 라고 느꼈을까?

4. 아마도 그 속에서 여호야김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 눈에 보이는 힘있는 자를 신뢰하게 된 것 같다. 그 결과는 결국 애굽왕이 요구한데로 은금을 징수해서 바치고 (35절) 자신 또한 애굽을 의지하면서 그의 인생을 보내게 된다. 

5. 그의 상황을 보면 충분히 이해가 된다. 아버지도, 동생도 애굽 왕으로부터 해를 당하는 것을 보며 세상에 하나님 보다 더 강하고 힘센 것이 지금 내 옆에 있는 애굽 왕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사실 그의 그런 생각은 사실이 아니다. 

6. 비슷한 상황이 늘 나에게도 있다. 때로는 하나님 보다 어느 사람의 말이 더 힘이 있게 느껴질 때가 있다. 하나님께 기도를 하면서도 그 유력한 한 사람의 말을 더 영향력 있게 받아드릴 때가 있다. 보이는 것에 집착하게 되면 보이지 않는 것을 경시하게 된다. 

7. 보이는 사람에게 집착하게 되면 보이지 않는 하나님에 대해 경시하게 된다.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고, 내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것 만이 전부가 아니다. 상황이 아무리 어렵고 힘들어도 끝까지 의지해야 할 것은 눈에 보이는 그 무엇인가도 아니고 유력해 보이는 그 누구인가도 아니다. 

8. 개척을 준비하고 재정의 필요를 느끼면서 나 역시 비슷한 마음이 든다. 눈에 보이는 그 어떤 것, 내가 생각하기에 유력한 그 누군가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얼마나 많은 순간 보이는 사람, 물질을 의지하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은 의지하지 않고 있는가?

9. 내 영혼아 깨어라!! 내 영혼아 오직 여호와만 의지하라. 그가 우리의 모든 것 되신다.

10.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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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Thinking)/Meditation2020. 8. 25. 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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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하 23:24-30 예수 그리스도, 세상의 소망

1. 요시야 왕은 산당과 신상만 제거한 것이 아니라 신접한 자와 점쟁이와 드라빔과 우상과 모든 가증한 것을 다 제거하였다 (24절). 그렇게 말씀을 따라 행한 요시야 왕에 대한 평가는 엄청났다.

2. “요시야와 같이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며 힘을 다하여 모세의 모든 율법을 따라 여호와께로 돌이킨 왕은 요시야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그와 같은 자가 없었더라” (25절). 그는 전후무후하게 모세의 율법을 따라 순종한 왕이었다.

3. 하지만 그의 인생도 완전무결하지는 않았다. 그는 하나님께 묻지 않고 쓸데없는 전쟁, 에굽과 앗수르 사이의 전쟁에 나갔다가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29절). 왜 그가 굳이 남유다가 관계되지도 않은 전쟁에 참전하였는지 내부적인 이유는 모르겠다. 

4. 하지만 성경의 저자에게 ‘전후무후한 율법의 순종’ 이라는 엄청나게 후한 평가를 받았던 요시야 왕의 행실도 하나님의 진노를 되돌리지는 못했다 (26절). 26절에서는 그 이유를 “므낫세가 여호와를 격노하게 한 그 모든 격노 때문이라” 라고 이야기 하고 있지만 저기에는 그 누구의 이름을 쓰더라도 틀리지 않을 곳이다. 

5. 인간의 죄악됨과 죄로 가득찬 인생에 대한 거룩하신 하나님의 진노이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불완전하지만 하나님을 쫓았던 요시야 왕의 행동도 결국은 하나님의 진노를 되돌리지는 못했다. 이스라엘은 멸망할 것이고, 예루살렘 성전은 파괴될 것이다 (27절).

6. 이 절망적이고, 망하는 상황이 우리의 상황이었다. 므낫세의 이름대신 내 이름이 들어가더라도 별 차이가 없는 악의 충만함.. 그게 우리 인간의 인생이다. 이 절망 속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고, 그의 아들을 보내셨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불완전했던 요시야와 같은 모습이 아니라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완전하신 하나님의 본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심을 통해서 우리에게 새로운 참 길을 열어 주셨다. 

7. 유다는 멸망했다. 예루살렘 성전은 파괴되었다. 하지만 성전이신 예수의 몸은 살아나셨고, 그리스도를 통해 새 하늘과 새 땅, 새 예루살렘이 임할 것이다. 절망 속에서 우리는 새로운 희망을 가지게 된 것이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그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8. 요즈음 교회가 세상 사람들의 놀림거리가 되었다. 교회가 일정부분 그 비아냥에 기여를 한 부분이 있다. 하지만 교회가 놀림감이 되더라도 예수 그리스도만이 세상의 소망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이 사태가 지나고 나면 복음을 전하는 것이 더 힘들어질 것 같다.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이 비상식적이고, 무지성주의자와 같이 보여지게 한 부분들 때문일 것이다. 주님 우리에게 지혜를 주소서. 

9. 방콕에서 교회가 개척되어가고 있다. 아직 장소로서의 교회는 준비중이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부분에서, 우리의 영성과 공동체 속에서 정말 예수 그리스도 만이 세상의 소망이라는 그 소식이 증거될 수 있기를 간절히 원한다. 특별히 200여년을 잠자고 있는 이 태국의 영혼들에게 그들의 귀에 들리는 소리로 복음을 전하는 교회가 되기를 원한다.

10.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의 소망이다.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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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20. 8. 24. 1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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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하 23:15-23 무엇을 듣고, 무엇에 순종하는가? 

1. 요시아가 한 일은 엄청난 일이었다. 여로보암 왕이 세운 제단과 산당을 헐고, 아세라 목상을 불살랐다 (15절). 사회적으로 종교적으로 엄청난 개혁을 일으킨 것이다. 하지만 요시아가 한 큰 일은 아주 작은 일에서 시작 되었다.

2. 그것은 그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그의 삶은 “하나님의 사람이 전한 여호와의 말씀대로 된 것이다” (16절). 그의 삶은 말씀이 이루어지는 삶이었다. 작은 순종에서 시작하였지만 말씀이 이뤄질 때 큰 개혁이 일어났다. 

3. 그리고 그는 사사시대 이후 유월절을 지킨 첫 왕이 되었다 (22절). 사사 이후의 왕이 누구였나를 생각해보면 모든 선한 왕의 기준이었던 다윗도, 모든 지혜를 가졌던 솔로몬도 요시아와 같이 유월절을 지키지 못했다는 것이다. 

4. 그러고 보면 중요한 것은 능력도 지혜도 아니라 말씀을 지키기 위한 단순한 순종임을 깨닫게 된다. 요시아는 어린 나이에 왕이 되었고, 그는 어떻게 나라를 다스려야할지 어떻게 하나님을 섬겨야 할지 지식이 없었다. 그는 우연히 (혹은 필연적으로) 발견된 율법책을 읽고 (왕하 22:10) 그 말씀에 기록된 대로 단순히 순종한 사람이었다. 

5. 하지만 아마도 더 중요한 것은 무엇에 순종하느냐에 대한 것일 것이다. 요시아는 오직 말씀에 순종하였다. 그 어떤 다른 누구의 말도 아니었다. 선지자의 말도, 목사의 말도, 선생의 말도 아니었다. 오직 말씀에 순종하였다. 

6. 이런 저런 이야기들이 많다. 여러가지 소리들이 들린다. 이런 다양한 소리들은 오히려 우리를 혼란스럽게 만든다. 하지만 요시아와 같이 스스로 말씀을 읽고, 읽은 그 말씀을 내 삶에 적용하고, 그 말씀대로 순종하려는 삶의 모습이 필요하다. 

7. 말씀을 읽고 있는가? 묵상하고 적용하고 있는가? 그 말씀에 순종하고 있는가? 아니면 다른 페이스북의 글과 유튜브의 어느 사람의 말이 더 내 삶에 영향력을 미치고 있지 않은가? 최근의 상황을 보니 말씀을 직접 읽으며 내 삶에 말씀하시는 것을 듣고 적용하는 사람들보다 페이스북이나 유튜브의 어떤 사람의 말을 듣는 사람이 더 많은 것 같다.

8. 나라고 뭐 크게 다르겠는가? 그렇지 않다. 나도 똑같은 사람이다. 하지만 오늘은 요시아와 같이 내 삶을 좀 다시 정돈해보기 원한다. 말씀을 기준으로.. 자의적인 해석이 아니라 정말 그 말씀이 말하는 그 것을 깨닫고 배우고 사랑하는 하루가 되기 원한다. 그리고 작은 순종이 삶에서 나타나기 원한다. 

9. 코로나가 다시 강력해지고 있습니다. 교회가 죄송하고, 목사로서 선교사로서 사과드립니다. 여러분의 건강과 안전, 빠른 사태의 수습을 위해서 기도드립니다. 

10.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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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Thinking)/Meditation2020. 8. 21. 0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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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하 21:19-26 죄는 죄를 낳고, 은혜는 은혜를 낳는다. 

1. 파송교회 담임목사님이 설교 중에 하셨던 말씀 중에 기억에 남는 몇 개가 있는데 정확한 워딩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 중에 한 가지가 “자녀들은 부모의 말을 통해 배우는 것이 아니라 부모의 등을 보고 배운다”였다. 오늘 아몬은 그의 아버지 므낫세의 등을 보고 배웠다. 물론 아버지 므낫세가 악한 왕이었기에 그에게 무슨 좋은 말로 가르쳤을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자녀에게 나쁜 것을 주고자 하는 부모가 누가 있으랴?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몬은 그의 아버지의 등을 보고 배우며 자랐다. 

2. 그의 결국은 말씀이 증거하고 있다. ‘그의 아버지가 행한 모든 길로 행하여 그의 아버지가 섬기던 우상을 섬겨 그것들에게 경배하고 그의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버리고 그 길로 행하지 아니하더니’ (21-22절) 그는 아버지가 하는 것들을 보며 우상숭배를 배웠고, 아버지가 하던대로 하나님을 버렸다. 

3. 죄는 죄를 낳는다. 내가 죄인이면 아들도 죄인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 죄인인 아버지의 등을 보고 자랐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담 이후의 모든 사람이 죄인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죄의 순환되는 사슬을 끊으려면 죄인이 아닌 자가 외부에서 도와주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 스스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4. 요엘이를 키우면서 나의 어린 시절을 돌아보고 되었다. 과거이기에 많이 미화되긴 했지만 나도 나의 어린시절이 다 까발려진다면 과연 얼굴 들고 살 수 있을까? 싶은 일도 많고.. 요엘이처럼 드러나게 다른 사람들에게 화를 내고 소리지르진 않았지만 내 안에 얼마나 많은 시기와 분노가 있었는가? 

5. 요엘이가 누구를 보고 자랐겠는가? 바로 나의 등이다. 아무리 다른 사람들에게 나이스한 척 하고, 목사로 선교사로 거룩함을 좇아 살아가려고 해도 내가 알고 있지 않은가? 요엘이의 지금의 어려움이 결국은 내 등에서 나온 것이 아닌가?

6. 결국은 내 등이 변해야 한다. 내 등이 변해야 요엘이도 지금의 어려운 시간들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죄의 순환되는 사슬을 끊으실 거룩한 이, 예수 그리스도를 내가 더 깊이 만나고, 더 깊이 경험하고, 더 깊이 사랑하며 내 등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 나타나야만 우리 요엘이도 이 시간들을 이겨낼 수 있을 것이다.

7. 매일의 삶 속에서 정말 어렵다. 요엘이가 밑도 끝도 없이 화를 내고 소리를 지를 때 참아주는 것도, 견디어 내는 것도…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나의 어린시절 나의 그런 밑도 끝도 없는 분노와 열등감, 좌절을 옆에서 함께 견뎌 주시지 않으셨는가? 그리고 그 분이 나를 만나주셔서 지금의 내가 있지 않은가? 

8. 므낫세와 아몬을 보면서 두렵다. 영혼을 살리기 위해 선교사로 이 땅에 있으면서도 정작 내 아이의 영혼은 돌보지 못하고 있는게 아닌가 염려가 된다. 아침에는 회개하고, 오후에 아이들이 돌아오면 또 어제와 똑같이 아이들을 대하는 내 모습에도 정말 좌절스럽기도 하다. 하지만 그 죄의 사슬을 끊으실 수 있는 유일한 죄 없으신 분, 끝까지 신실하게 참아주시고 사랑해주시는 분, 예수 그리스도가 함께 하시기에 오늘도 좌절을 딛고 일어서기 원한다.

9. 은혜의 순환 서클이 오늘 내 삶에서 생겨나기 원한다.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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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20. 8. 19. 1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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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하 21:10-18 나와 므낫세의 유일하게 다른 점

1. 끝이 없을 것 같던 므낫세 왕의 폭정도 막을 내렸다. 왜냐하면 그도 사람이기에 죽기 때문이다. 그 누구도 영원히 살 수는 없다. 므낫세도 그래서 죽었다 (18절). 하지만 그의 악행은 유다의 심판을 불러왔다.12절은 ‘그러므로’라고 시작하고 있으면서 유다에 재앙이 내릴 것을 말씀하고 있는데, 이는 므낫세의 악행과 심판이 직접적인 영향이 있음을 보여준다.

2. 므낫세의 죽음으로 그는 사라져버릴 것만 같지만 그의 악행은 모두 기록되었다. “므낫세의 남은 사적과 그가 행한 모든 일과 범한 죄는 유다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잘 한 것도 잘 못한 것도 다 기록되었다.

3. 어렸을 때 들은 이야기가 생각난다. 천국에 가면 내가 한 모든 일이 다 기록된 책이 있다고… 이 이야기는 업그레이드가 되어서 대학생 무렵에는 천국에는 내가 한 모든 행동이 녹화된 비디오 테잎이 있다고 들은 것 같다. 여튼.. 므낫세의 악행도 한낱 책에 다 기록되어 후세가 모두 알게 하거늘.. 우리의 이 땅에서의 행동도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이 다 아시며 기억하고 계신다. 그것이 책이든 비디오든… 우리가 한 행동들이 하나님이 다 아신다는 것이다.

4. 물론 우리의 악행의 대가도 므낫세와 같을 것이다. 바로 ‘심판’과 ‘재앙’이다. 물론 므낫세는 아주 악한 왕이었기에 우리의 삶과 비교했을 때 우리가 좀 더 나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결과는 같다. 므낫세도 죄인, 나도 죄인, 우리 모두 심판, 재앙을 받아야만 한다.

5. 므낫세와 우리가 다른 점이 있다면 죄의 경중이 아니라 우리에게는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다는 것이다. 죽을 수 밖에 없고, 재앙을 받을 수 밖에 없는 우리에게 예수님이 오셔서 우리가 받아야 할 진노와 재앙을 모두 받으셨다. 그래서 우리는 므낫세와 같이 우리가 행한 모든 것이 기록된 책이 있더라도 심판받지 아니하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게 된 자들이다. 

6. 우리의 앞 날도 므낫세와 같이 뻔했는데, 그 뻔한 사망의 길을 예수님께서 다르게 만드셨다. 그것이 우리가 예수를 믿어야 하는 이유이다. 말하기 조심스럽지만 요 몇 일의 일로 한국교회가 반지성적이고, 제멋대로인 곳으로 보여지고 있다. 사람들의 비판은 교회과 기업과 같으며, 돈만을 취하며, 자신들 밖에 모르는 집단이라고 비판한다. 작금의 상황을 보면 그들의 비판이 어느정도 수긍이 되는 부분도 있다.

7. 하지만 교회는 결코 그런 곳이 아니며, 우리는 므낫세와 같은 우리를 살려주신 그 예수님께 감사하고 경배하기 위해 가는 곳이다. 만약 세상 사람들의 비판이 사실이 아니고 우리가 정말 예수로 인해 사는 것이라면 그들의 비판 또한 겸허히 받아 들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가 잘나서 모인 곳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은 사람이 모인 곳이고, 은혜를 받았다면 나만 받은 은혜로 잘 사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도 이 은혜를 나눠야 할 책임이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8. 그들과 우리를 구분할 필요는 없다. 그들도 죄인, 나도 죄인, 우리 모두는 므낫세의 길을 가고 있는 사람들임이 공통점이다. 그저 차이점이 있다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믿는 사람들이다. 그들의 비판에 아프게 귀를 기울이고, 교회가 더욱 더 예수님만 의지해야 한다. 교회는 세상 밖에 있는 곳이 아니고 세상 속에 속한 곳이기 때문이다. 

9. 내가 므낫세와 같은 자임을 깨달아야 한다. 그래야 용서를 구할 수 있고, 미안하다고 말할 수 있다. 교만하지 말고, 자고하지 말고 가장 겸손하셨던 예수님만 따라가자. 구원 받음이 나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로부터만 난 것임을 잊지 말자.

10.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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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20. 8. 18. 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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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하 21:1-9 가르치는 것에 앞서서 사랑하자

1. 므낫세가 왕이 되었다. 므낫세가 왕이 됨을 기록하면서 그의 어머니의 이름을 함께 기록하였다. 그의 어머니의 이름은 헵시바였다 (1절). 

2. 어머니의 이름을 기록한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아버지가 유다의 역사에서 가장 주목할만한 선한 왕이었음에도 그 아들이 기록할만한 가장 악한 왕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굳이 어머니의 이름을 기록한 이유는 그녀의 문제가 분명히 있었기 때문이다.

3. 므낫세는 십이세에 왕이 되었다. 자료들을 찾아보니 어머니가 어린 아들과 함께 섭정을 했고, 그의 어머니가 므낫세에게 악한 영향을 미쳤을거란 분석이 많다. 그녀의 이름이 굳이 기록된 이유일 것이다. 

4. 자녀들을 키우는 부모의 입장에서 심히 두렵기 그지 없다. 므낫세는 히스기야가 15년의 생명연장을 받고 난 이후에 태어난 아이다. 히스기야도 하나님 앞에서 살았던 인생의 전반부와는 달리 후반부 15년은 정말 같은 사람이 맞을까? 라고 생각되는 인생을 살았다. 

5. 아버지 히스기야 왕의 망가진 말년, 어머니 헵시바의 악행이 므낫세라는 괴물을 키워낸 것이다. 그리고 그의 악행은 그의 백성들을 꾀어 악한 길로 들어가게 하였다 (9절)

6. 부모의 잘못된 교육은 자신의 아이만 망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가정 뿐만 아니라 그 민족 모두를 망칠수도 있는 것이다. 자녀를 어떻게 키워야 할지에 대해 고민이 된다. 특히나 요엘이가 태국에 다시 돌아오면서 부터 감정 컨트롤이 잘 안되고 소리를 지르고 하는 정서적인 문제를 경험하고 있기 때문에 마음이 더욱 쉽지 않다. 

7. 부모로써 좀 더 책임감을 가져야 하겠다. 다시 한번 요엘이를 비롯해 아이들을 대하는 나의 태도를 점검한다. 사랑으로 대하고 있는지? 들어주고 있는지? 표정은 이미 짜증이 나지 않았는지.. 사실 오늘 아침에 이미 아내에게 한 마디 들었다. “오빠는 이미 표정이 이야기 할 수 없는 표정이야"

8. 예수님께서 내가 아이들을 대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나를 대하지 않으셨다. 사랑의 눈빛으로, 사랑의 마음으로 나를 대하셨다. 조금만 더 들어주고, 조금만 더 기다려주자. 조금만 더 웃어주고, 조금 더 많이 사랑한다고 말해주자. 하나님께서 맡기신 부모의 역할을 잊지 말자. 가르치는 것에 앞서서 사랑하는 것이다. 아이들의 행동을 교정하는 것에 앞서서 사랑하는 것이다.

9. 그렇게 오늘도 집에 있는 아이들을 사랑하자. 오늘도 샬롬

10. (세 아이가 기침이 나서 학교에 가지 못하고 집에 있습니다. 빠른 회복을 위해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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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Thinking)/Meditation2020. 8. 17. 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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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하 20:12-21 겸손은 하나님 앞에 서는 것

1. 히스기야는 기도로 이스라엘을 앗수르의 손에서 구했고, 자신의 죽을 병도 나았다. 물론 하나님께서 구해주시고 낫게 해주신 것이지 히스기야의 기도 덕분은 아니다. 하지만 히스기야의 입장에서는 충분히 자신의 기도의 능력을 과신할만한 상황이었다.

2. 강대국인 바빌론이 자신의 병이 들었다 함을 듣고 편지와 예물을 그에게 보냈고, 이는 히스기야에게 강대국 왕으로부터 인정받는다는 느낌을 충분히 가지게 만들었다 (12절). 그래서 오늘 본문을 보면 자신의 창고의 모든 것을 바벨론의 사신에게 보여준다 (13절). 

3. 히스기야의 실수를 보면서 결국 모든 실수의 뿌리는 자기 과시욕, 혹은 교만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보게 된다. 하나님으로부터 충만하지 않으면 사람의 인정, 혹은 나의 어떠한 행위에서 오는 자존감으로 나를 채우려고 할 수 밖에 없음을 히스기야를 통해서 보게 된다. 

4. 하나님 한 분 만의 인정이면 충분하다. 그런데 실제로 그것은 잘 안되고 어렵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 한 분 만의 인정 보다는 지금 내 눈에 보이고, 내 옆에 있는 사람들의 인정이 더 마음 깊이 다가오지 않는가? 하지만 그러한 조급증(?), 혹은 인정의 욕구는 그의 자녀세대가 바벨론에게 모두 잡혀가도록 만들었다. 

5. 나는 히스기야와 같은 기도의 능력은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안심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히스기야와는 다른 내용들이 다른 모습으로 내 삶에서 수없이 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말하기도 부끄럽지만 내 안에 남들보다 이러한 부분들은 내가 조금 더 낫다고 생각하든지 혹은 이러한 부분들은 남들과 다르다고 생각하는 부분들이 있다. 

6. 이러한 내용들은 결국 나를 높게 생각하고 다른 이들을 낮게 생각할 여지를 만들고, 하나님 한 분으로 부터의 인정이 아니라 사람으로 부터 인정받고 싶어하는 마음을 가지게 만든다. 결국 교만하게 만들고, 그 교만은 나를 넘어지게 하는 올무가 될 수 밖에 없다. 

7. 히스기야의 실수를 보면서 다시 한번 ‘겸손’을 생각하게 된다. 겸손이란 하나님 앞에 설 때에만 가능하다. 가장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내가 얼마나 죄인인지, 내가 얼마나 무능한지, 내가 얼마나 쓸모없는지를 깨닫게 될 때에야 다른 사람보다 아주 아주 조금 나은 나를 보며 자고하지 않게 된다. 

8. 히스기야가 만약 저 때 그의 주특기(?)를 살려 기도했었더라면… 하나님의 아름다우심과 그 분의 영광을 보았더라면 오늘 본문과 같이 죄를 짓지 않았을텐데.. 하는 생각이 든다. 결국 겸손은 나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다. 내가 겸손하고자 결정한다고 해서 가능한 것도 아니다. 영원하신 하나님, 광대하신 하나님, 그 한 분 앞에 내가 설 때에만 겸손을 배우고 겸손하게 하루를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9. 말씀 앞에 서는 것,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예수님 앞에 서는 것, 그것이 나를 겸손으로 이끄는 지름길이다. 오늘도 하나님 앞에 서기 원한다. 팀 켈러의 말 처럼 “나는 내가 감히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한 죄인이고 허물 많은 존재입니다. 그리고 나는 내가 감히 바랐던 것보다 더 많은 사랑을 받고 용납되었습니다” 이 사실을 깨달아야 겸손할 수 있다. 

10. 말씀 앞에, 하나님 앞에 서는 하루가 되자.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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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Thinking)/Meditation2020. 8. 15. 1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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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하 19:20-28 복음이 가장 필요한 모습으로 흘러가길

1. 히스기야는 앗수르 왕의 편지를 여호와 앞에 펴놓고 기도했다. 왜 기도했는가? 그에게 다른 어떠한 피할 방법도 없었기 때문이다. 전혀 방법이 없어서이기도 했지만 또한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기 때문에 기도했을 것이다. 

2. 그런 그에게 하나님의 응답이 이사야를 통해 임했다 (20절).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히스기야에게 보내 이르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네가 앗수르 왕 산헤립 때문에 내게 기도하는 것을 내가 들었노라 하셨나이다"

3. 하나님만 의지하였기에 기도하였는데, 그 하나님께서 내 기도를 들으셨다고 하신다. 그것 보다 더 큰 기쁨과 감사가 어디에 있었을까? 정말 좋은 소식, 복음 그 자체였을 것이다. 

4. 하나님이 우리의 절망의 기도를 들으신다. 앞도, 뒤도, 위도, 아래도 다 막힌 기분이 드는 그 순간의 우리의 기도의 목소리를 들으신다. 그리고 그 좋은 소식을 들려 주신다. "내가 너의 기도를 들었다"

5. 우리 모든 사람의 상태가 그랬다. 안그런척 하지만 괜찮은척 하지만 우리는 죄로 인해서 사방이 막혀 있었고, 정말 그 답답함을 넘어설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그 어떤 방법으로도 이 죄의 문제를 극복할 수 없었다. 그 때 이 복음이 들려왔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다.

6. 히스기야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절망 속의 기도를 들으신다는 복음을 들었다. 먼저 나는 오늘 어떤 복음을 듣고 있는가? 아내는 나로부터 어떤 복음을 듣고 있는가? 나의 아이들은? 우리 교회개척팀은 나로부터 어떤 복음을 듣고 있는가?

7. 물론 다른 복음은 없다. 오직 복음은 그리스도 밖에 없다. 하지만 나에게 전해진 그리스도의 그 복음이 아내에게, 아이들에게, 우리 교회 개척팀에게 태국 사람들에게 어떻게 적절하게 전해지고 있는가? 얼마나 그들의 상황에 맞게 내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보여주고 있는가? 

8. 복음은 하나이다. 하지만 그 복음이 드러나고 보여지는 모습은 다양하고, 그들에게 적절해야 한다. 히스기야에게 나타난 복음은 ‘하나님께서 들으신다’였다. 하나님은 그에게 가장 필요한 모습으로 만나주셨다. 내 삶에 내가 들은 복음이 나의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 그리고 태국의 영혼들에게 가장 필요한 모습으로 흘러갈 수 있게 되기를 원한다.

9. 멍 때리고 살지 말고, 그들의 복음의 필요를 돌아보고 복음을 여러형태로 나눌 수 있게 되는 하루가 되기를..

10.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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