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Thinking)/Meditation2020. 7. 22. 1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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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하 9:14-26 참 평안이 나의 삶에 임하도록…

1. 예후는 이제 요람을 향해 가고 있다. 그의 인생은 자신의 사명을 따라가는 직진 그 자체이다. 성 안에서는 상황을 모르기 때문에 두 번이나 사신을 보낸다.

2. 사신에 예후에게 와서 묻는 말은 '평안하냐?' 이고, 히브리어 표현으로는 '하샬롬'으로 '평화인가? 모든 것이 순조로운가?' 의 표현이다. 왜냐하면 성 안에 있는 자들이 기대했던 것은 성 안에 있는 자신들의 평화였기 때문이다. 

3. '샬롬'은 모든 것이 있어야 할 그 자리에 있을 때 오는 평화를 의미한다. 하나님 대신 우상을 섬기는 요람에게 어떠한 평안이 있겠는가? 자신의 안위를 지키는 그들에게 어떠한 평안이 있겠는가?

4. 하지만 그들은 예후에게 와서 평안을 묻는다. 예후의 대답은 '평안이 네게 상관이 있느냐?' (18, 19절) 라고 물을 수 밖에 없다. 모든 것이 제 자리에 있지 않은데 어떤 평안이 그들에게 있을 수 있겠는가?

5. 평안이 있다면 그것은 거짓 평안이고, 자신에 입맛에만 맞는 평안이다. 마지막으로 이스라엘 왕 요람과 유다 왕 아하시야가 각각 예후를 만나러 갔을 때, 그는 자신에게 평안이 없을 수 밖에 없는 이유를 말하게 된다.

6. "네 어머니 이세벨의 음행과 술수가 이렇게 많으니 어찌 평안이 있으랴?" (22절) 하나님이 하나님의 자리에 앉으셔야만 평안이 있다. 그렇지 않다면 내가 하려고 하는 모든 일, 내가 생각했던 옳은 일 모두가 때로는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평안을 잃게 만들 수도 있다. 

7. 자신들만의 평안을 추구했던 요람은 결국 슬픈 결말을 맞이한다. 그는 그가 돌아갈 티끌의 자리로 돌아가게 되고, 그의 영혼은 그를 지으신 하나님 앞으로 돌아가게 된다. 그가 원했던 평안은 결코 아닐 것이다. 하지만 모든 것은 하나님의 평안 안으로 돌아가게 된다.  

8. 오늘 나는 진정으로 평안한가? 내가 추구하는 평안이 나만의 평안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평안인가? 나의 평안을 추구하여 다른 자들의 평안을 잃게 만들고 있지는 않은가? 나 자신을 돌아본다. 교회개척 준비팀 안에서도 진정한 하나님의 평안이 임하길 원한다. 

9. 내 욕심과 내 생각이 만들어내는 나만의 평안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만 주실 수 있는 참 평안을 따라가는 오늘 하루가 되기를 원한다. 

10.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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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20. 7. 21. 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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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하 9:1-13 주께서 내 삶을 다스리신다.  

1. 성경이 우리에게 모든 것들을 다 말해주고 있지는 않지만 예후의 삶은 혼란의 연속이었을 거란 생각이 든다. 어느날 갑자기 엘리사의 제자가 와서 자신의 머리에 기름을 붓고 (6절), 아합 왕의 집을 치라고 했다 (7절). 

2. 그리고 피의 전쟁이 일어날 것을 이야기 하였다 (7-10절). 하지만 이 모든 것을 예후는 담담하게 받아들인다. 하나님께서 미리 예후에게 나타나 왕이 될 것임을 미리 이야기 했는지 그렇지 않은지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 수가 없다. 

3. 하지만 예후는 마치 준비가 된 듯이 기름부음을 받았고, 왕이 된다 (13절). 

4. 때로는 나의 삶에 일어나는 일들이 마치 예후가 겪은 것과 같은 일들이 있다. 예상하지 못했는데 내 삶에서 훅 치고 들어오는 일들… 그래서 너무나도 당황하게 되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는 그런 일들 말이다. 

5. 예후는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다스리고 계심을 확실하게 믿는 사람처럼 보인다. 그는 예상하지 못했을지라도 하나님은 이미 이 일을 준비하고 계셨기 때문에 자신에게 일어난 이 당황스럽고 놀라운 일들을 그저 받아들인다.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한 신뢰가 없이는 이렇게 하지 못할 것이다. 

6. 내 삶이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고 이해하고, 단순한 이해차원이 아니라 그렇게 살아가는 삶이 필요하다. 또한 그것이 말씀이 이뤄지는 삶이다. 내가 준비하고 계획한 것만 일어나고, 그것이 성취된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끌어 가시는 삶이 아니라 내가 계획하고 내가 준비하고 내가 성취한 삶일 뿐이다.

7. 삶에서 일어나는 다채로운 일들에 당황하지 말자.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인도해나가고 있다고 믿는다면 그저 담담히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일하심을 구하는 것이 더 맞는 자세일 것이다. 하나님께서 내 삶의 왕이라면 왕께서 이끌어가시는 삶의 흐름에 나를 맡기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그것이 내가 기대한 바나 바라던 바가 아닐지라도…

8. 예후와 같이 담담하게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인정하고, 내 삶을 통한 그 분의 일하심을 기대하며 오늘을 살아가자. 내 생각과 다르고, 내가 미쳐 생각하지도 못한 일일지라도.. 겸손하게 그 분의 인도하심을 구하자.

9.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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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Thinking)/Meditation2020. 7. 20. 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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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하 8:25-29 정체성과 사명이 결정하는 삶으로..

1. 사람은 끼리 끼리 모이는 것 같다. 끼리 끼리라고 말하면 안 좋은 뉘앙스를 풍기지만 비슷한 사람들, 공통된 관심사를 가진 사람들끼리 모인다고 표현하는게 더 적절하겠다.

2. 친한 사람들은 이유가 있는 것이다. 그것이 공통점이든, 혹은 관심사이든 뭐든… 아하시야는 엄마가 이스라엘 왕 오므리의 손녀였고 (26절), 그러한 배경에서 자란 그는 결국 또한 아합의 집의 사위가 된다 (27절).  가풍을 벗어나지 못했던 것 같고 그들의 공통점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다'는 것이다 (27절). 

3. 자신들이 악인일 거라고 생각했을까? 아마도 그렇지 않았거나 생각도 안했을 것 같다. 하지만 그들이 하고 있던 일은 하나님 앞에서 악한 일이었고, 악한 일을 한 것 뿐만 아니라 비슷한 사람들의 악함을 만나며 그 악함은 더 커져가고 있었다. 

4. 그런데 문제는 아합이 아니었다. 아하시아가 문제였다. 그는 유다의 왕이었고,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정통성을 인정받은 메시아의 족보에 기록될 사람이었는데, 그가 아합과 손을 잡았다는 것이 문제이다. 

5. 아하시아 왕은 아합과 공통점을 가지며 어울려야 할 사람이 아니라 정의와 공평으로 유다를 통치해야 할 왕이었던 것이다. '내가 누구인지'를 잊는 순간 마음대로 살게 된다. 이스라엘 왕의 딸이었던 엄마가 그에게 그러한 정체성을 심어주지 못했다고 보여진다. 부모의 역할은 얼마나 중요한가? 

6.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부르셨는지, 하나님께서 나를 하나님의 역사에서 어떤 모습으로 사용하실지에 대해 놓치게 되면 마음대로 살게 된다. 욕망을 따라 살게 되고, 본능을 따라 살게 된다. 하나님의 빅픽쳐를 이해하고 내가 어디에 서 있는지를 알아야 '내가 누구인지', '왜 지금 이 자리에서 살아가야 하는지'를 바르게 알 수 있다. 

7. 이 정체성과 사명을 잃으면 욕망이 삶을 지배하는 괴물이 탄생한다. 그리고 정체성과 사명을 잃은 그 괴물은 누구나 될 수 있다. 바로 내가 될 수 도 있다.  

8. 다시 한번 나의 정체성과 사명을 기억하고, 확인하는 하루가 되기를 원한다. 욕망이 나를 지배하는 삶이 아니라, 나의 악함이 내 옆에 악함과 만나서 더 큰 악을 구축하는 삶이 아니라 사명과 사명이 만나, 그리스도 안에서의 선한 정체성이 다른 이의 정체성과 만나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는 삶이 되기를 원한다. 

9. 나는 누구인가? 왜 지금 이 태국에서 살아가고 있는가? 나의 사명은 무엇인가? 오늘도 가슴에 새기며 하루를 보내기 원한다.

10.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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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Thinking)/Meditation2020. 7. 16. 1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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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하 7:3-20 합리적이라고 믿는 내 생각은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클 수 없다

1. 1절에서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였다. 하나님의 말씀은 틀림없다. 우리의 한계나 생각에 제한되지 않는다. 선포된 말씀은 그대로 이루어진다. 

2. 아람 군대가 그들을 에워쌓을 때, 그들은 두려워 하였고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의 말을 믿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 본문을 보면 엘리사가 예언한 그대로 이루어졌다. 엘리사가 그들을 위해 무엇인가를 한 것이 아니다.

3.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행하였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서는 그 누구도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고 그것을 믿지 않았던 것 같다.

4. 나병환자들은 죽지 않기 위해 아람 군대에게 갔다가 하나님의 역사를 보았고 (4절), 이스라엘 왕과 백성들은 그들이 매복작전을 펴고 있는 것이라 여전히 두려워하였다 (12절). 이스라엘에 있는 그 누구도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지 않았고, 말씀이 임하였음에도 신뢰하고 듣지를 않으니 계속해서 두려움 속에 있을 수 밖에 없었다. 

5.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불신과 두려움에 상관없이 성취되었다. 이러한 모습이 나의 삶이라고 생각된다. 말씀이 임하였으나 여전히 두려워하는 삶…

6.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무엇이 문제였을까? 왜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지 못하였을까? 아람 군대가 진치고 있는 모습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 더 커 보였음이 분명하다. 눈에 보이는 군대의 모습이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보다도 더 힘이 있어 보였음이 분명하다.

7. 결국은 내 작은 머리로 내린 합리적인 판단이 우주보다 더 크신 하나님보다도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며, 내가 하나님 자리에 앉으려고 하고 있는 것이며 하나님을 심각하게 제한하고 있는 것이다. 

8. 내가 믿든, 믿지 못하든 말씀은 결국 이루어진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렇게 크고 능력있으신 진짜 하나님이시기 때문이고, 하나님은 약속에 신실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오늘 나는 결정해야 한다. 스스로 합리적이라고 믿는 내 생각을 믿든지, 아니면 내 상식과 생각을 뛰어넘는 하나님을 믿든지… 

9. 나는 잘 알고 있다. 나는 별로 신뢰할 수 없는 존재이고, 합리적이지도 않으며 지혜도 없다는 것을… 다시 한번 하나님만 신뢰한다. 불가능을 가능케 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 분께만 기도한다.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마 6:10절)

10. 오늘도 샬롬

* 방콕 도심쪽에 계속 교회 예배공간을 찾아보고 있었는데, 너무 비싼 렌트비에 엄두가 나지 않았고 주눅이 들었었습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처럼 내가 가진 합리적이라고 믿는 나의 생각, ‘우리가 가진 예산으로는 절대 방콕 도심에서 공간을 구할 수 없어’ 라는 생각을 넘어 하나님께서 예비하셨다고 생각할 수 밖에 없는 예배할 수 있는 공간을 찾게 해주셨습니다. 오늘 본문과 같이 말씀을 더 붙들며 내 생각을 더 내려놓는 그런 선교사가 되며, 또 그런 교회가 되기를 기도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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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Thinking)/Meditation2020. 7. 14. 1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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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하 6:15-23 어떤 눈을 뜨고 어떤 눈으로 보고 있는가?

1. 엘리사의 사환은 아람의 군사와 말과 병거가 성읍을 에워싼 모습을 보고 두려웠다 (15절). 그 이유는 그의 영적인 눈이 아직 열리지 않아서였다. 영적인 눈이 감기워진 그는 물질적인 세계만을 볼 수 있었고, 물질적인 세계는 그에게 두려움을 주었다.

2. 엘리사를 통해 영적인 눈이 열리자 그가 본 것은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러싸고 있는 것’이었다. 그는 그제서야 하나님의 도우심과 보호하심을 보게 되었다. 

3. 우리의 눈은 우리의 세상에만 집중하여 보고 있을 때가 많다. 눈을 들어 하늘을 보는 것이 아니라 (시 121:1) 많은 순간 영적인 눈은 감고 육신의 눈만으로 이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  

4. 육신의 눈으로 볼 때 꽉 막힌 담과 답답한 상황이 얼마나 많이 펼쳐지는가? 그 때 육신의 눈으로 보고 답답해 하거나 혹은 두려워하지 않는가? 그럴 때 영의 눈을 뜨게 해주시기를 기도하는가? 

5. 반면에 오늘 본문에는 육신의 눈이 어두워진 아람 군대도 있다. 엘리사를 잡으러 왔고, 엘리사와 만나서 이야기 하고 그를 직접 보고 있으나 그의 눈이 어두워진 탓에 오히려 엘리아에게 이끌리어 사마리아로 나가게 된다. 

6. 그냥 보아도 이해되지 않는 영적인 세계를 어두워진 눈으로 보니 이해가 될 까닭이 있겠는가? 지금 나는 어떤 상황에 쳐해 있는가? 그저 육신의 눈으로 보고 있는가? 아니면 그 눈조차도 어두워져 있어서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가? 아니면 하나님께서 나의 영적인 눈을 열어 주의 기이한 것을 보게 하고 계시는가? 시 119:18 “내 눈을 열어서 주의 율법에서 놀라운 것을 보게 하소서” 

7. 여전히 내 육신의 눈만 믿고 내가 상황을 이해하고 있다고 믿으며 절망하는 것은 내 눈을 주님보다 더 신뢰하고 있다는 것이고 이것은 내 삶의 하나님 보다 높아진 우상이다. 

8. 골로새서 3:1-2절도 우리에게 권고하고 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영적인 눈으로 본다는 것은 위의 것을 바라고 위의 것을 보는 삶이다.

9. 나는 오늘 어떤 눈을 뜨고 있는가? 눈을 떴다고 다 뜬 것이 아니고 내가 본다고 다 보는 것이 아니다. 오직 주님께서 나의 영적인 눈을 뜨게 하셔서 주의 율법의 기이한 것들을 내게 보이시기를 간구한다.

10.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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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Thinking)/Meditation2020. 7. 11. 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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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하 5:1-14 긍휼함을 입은 자

1. 나아만 장군의 이야기이다. 그는 왕 앞에서 크고 존귀한 자였다 (1절). 하지만 그러한 그도 나병을 피해갈 수 없었다. 인생의 고난은 늘 우리 주변에 있다.

2. 그는 먼저 그의 여종으로부터 긍휼함을 얻었다. "그의 여주인에게 이르되 우리 주인이 사마리아에 계신 선지자 앞에 계셨으면 좋겠나이다 그가 그 나병을 고치리이다 하는지라" (3절)

3. 그리고 그는 아람 왕으로부터 긍휼함을 얻었다. "아람 왕이 이르되 갈지어다 이제 내가 이스라엘 왕에게 글을 보내니라 하더라" (5절 상반부). 그 어느 왕이 자신의 가장 귀한 장수를 적국에 보내겠는가? 

4. 이런 긍휼함을 얻은 그였기에 엘리사의 대우는 그를 화나게 했을 것이다. 자신보다 높은 왕도 자신에게 긍휼을 베풀어 가게 하였거늘, 어디 이스라엘의 작은 선지자가 얼굴도 보지 않고 사자를 보내 그에게 명령하는가? 

5. 하지만 그렇게 화가 났던 그도 다시 한번 그 종들에게 긍휼함을 얻었다. "그의 종들이 나아와서 말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여 선지자가 당신에게 큰 일을 행하라 말하였더면 행하지 아니하였으리이까 하물며 당신에게 이르기를 씻어 깨끗하게 하라 함이리이까 하니" (13절).

6. 나아만이 낫기 까지 많은 사람들의 긍휼함을 입었다. 기다려주고, 참아주는 그들이 있어 그는 깨끗하게 되었다 (14절). 이스라엘에서 사로잡혀 온 여자아이가 적국의 장수인 나아만에게 저런 조언을 한다는 것이 가당키나 한가? 하지만 나아만 장군을 보며 느끼는 것은 나의 삶 또한 이런 가당치 않은 긍휼함들이 계속해서 일어났다는 것이다. 나 또한 많은 사람들의 긍휼함을 입어 여기까지 왔다. 

7. 내가 잘나서, 내가 뛰어나서 여기에 서 있는 것이 아니다. 많은 사람의 긍휼함.. 부모님과 아내 친구들, 그리고 특별히 나를 가장 사랑하셔서 죽으신 그리스도의 긍휼함을 입었기에 지금 나는 이 자리에 서 있을 수 있다. 

8. 자신의 재정에서 일부를 떼어 보내주시는 분들, 자신의 기도 시간에서 우리 가정을 위해 시간을 떼어 기도해주시는 분들의 긍휼함이 또한 나를 이 태국에서 살아갈 수 있게 한다. 그 소중한 긍휼함들을 잊지 말자. 그리고 또한 그 긍휼함들을 다른 사람들에게 베풀자.

9.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알았다면 그 복음이 나로 하여금 말하게 하고, 행동하게 하자. 그것이 긍휼함이 될 것이다. 긍휼함을 배웠다면 긍휼함을 베푸는 자가 되자. 사랑함을 입었다면 사랑함을 베푸는 자가 되자. 그것이 복음이고, 그것이 복음의 생명력이다. 그렇게 오늘을 살아가자.

10.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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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Thinking)/Meditation2020. 7. 10.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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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하 4:38-44 고난의 상황 속에서도 나의 것을 아까워하지 않고 겸손하게 드리기 

1. 엘리야의 갑절의 성령의 능력을 가진 엘리사가 있어도 그 땅의 흉년은 막지 못한다 (38절). 그 하나님의 사람이 함께 있어도 국에 독이 든 들호박(?)을 넣을 수도 있다. 그것 때문에 무리가 다 죽게 되었다 (40절).

2. 우리 삶의 고난의 문제는 늘 이렇다. 누구와 함께 있더라도, 어디서 어떻게 있더라도 우리를 결코 피해가지 않는다. 마치 코로나 바이러스가 하나님의 교회 가운데서도 창궐하는 요즈음 같다. 

3.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믿는다고 우리 삶에 고난이 없어지지 않는다. 예수님을 믿어도 여전히 고난은 우리 가운데 있고, 여전히 슬픔과 눈물은 마르지 않는다. 여전히 내 곁에서는 누군가가 암에 걸리고, 누군가가 사고가 나고, 누군가는 죽고 있다. 

4. 하지만 그 슬프고 고난이 가득한 내 인생에도 여전히 빛은 있다. 42절을 보면 '한 사람'이 그 흉년 와중에도 '처음 만든 떡 곧 보리떡 이십 개와 또 자루에 담은 채소'를 하나님의 사람에게 드렸다. 그렇게 고난 중이고, 흉년이 찾아와도 자신의 것을 나누는 그 한 사람이 있고, 하나님은 그 한 사람의 드린 것을 사용하신다. 

5. 그것을 백 명의 무리가 먹었고, 심지어 먹고 남았다. 고난이 다가 왔을 때, 어려움이 찾아 왔을 때, 나의 것을 움켜쥐면 결국 나 또한 죽게 된다. 하지만 내가 그것을 나누게 되면 그것을 하나님은 사용하신다. 

6. 코로나 사태로 인해 다들 긴축재정이다. 많은 분들의 선교헌금으로 살아가는 우리 가정도 역시 쉬운 상황은 아니다. 하지만 얼마 전 베트남에서 우리를 후원하는 한 형제 가정이 우리에게 나눴던 고백이 바로 오늘 본문의 적용과 같았다. 

7. "가정이 기도하면서 코로나로 힘드실 선교사님들에 대한 마음을 받아서 이번달부터 3개월간 기존 후원금에서 추가 후원금을 더해 드리기로 했어요" 남들이 다 어렵다고 위축되고, 내가 살려고 할 때 이 가정은 오히려 오늘 본문의 '한 사람'과 같이 오히려 자신의 것을 더 드리기로 했다. 고난과 어려움 중에도 하나님께 자신의 것을 아낌없이 내어 드리는 이 가정의 모습에 참으로 감동했었다.

8. 그리고 돌아보게 되었다. 나는 어떤 자인가? 나는 지금의 상황에서 인색하지 않은가? 나는 지금의 상황에서 아까워하지 않는가? 다음을 생각하며 머뭇머뭇 거리지는 않는가? 예수님을 믿지만 고난이 여전히 우리의 삶에 있을 때 나는 어떠한 자세를 선택하게 되는가? 먹고 죽는 선택인가? 아니면 인색하지 않게 나의 것을 더 베푸는 선택인가? 

9. 이전에 섬기던 교회의 사역자 가정이 오늘 제왕절개로 출산을 했다. 축하의 마음으로 헌금을 보내기로 하였다. 내가 생각한 것 보다 더 사랑의 마음으로 넉넉하게 보내야겠다. 그리고 언제 끝날지 모르는 이 코로나의 상황 속에서도 인색하지 말고, 하나님께 내가 가진 것들을 아낌없이 내어 드리는 내가 되길 원한다.

10.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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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하 4:18-37 Good이 아니라 The Best를 추구하는 삶

1. 엘리사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수넴 여인에게 주신 아들이 죽었다 (20절). 당연한 반응으로 수넴여인은 갈멜산으로 엘리사에게 즉시 달려간다. 

2. 그녀는 엘리사를 붙들고 늘어진다. 엘리사는 그 시종 게하시에게 자신의 지팡이를 들고 가서 아이 얼굴에 놓으라고 말한다 (29절). 

3. 수넴 여인은 그런데 그것에 만족하지 못한다. “아이의 어머니가 이르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과 당신의 영혼이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당신을 떠나지 아니하리이다 엘리사가 이에 일어나 여인을 따라가니라” (30절).

4. 여인은 엘리사의 지팡이와 그의 시종 게하시가 가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그녀는 엘리사의 지팡이와 그의 종 게하시가 오는 좋은 것 (good) 보다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가 오는 (the best)를 선택하였다. 

5. 31절을 보면 게하시와 엘리사의 지팡이로는 아이가 살아나지 못했다.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가 와서 그 아이를 살릴 수 있었다. 그녀가 선택한 것은 맞았다. 

6. 우리 역시 좋은 것이 아니라 최상의 것을 선택해야만 한다. 가장 좋은 것은 언제나 하나님이다. 오직 그로부터 모든 좋은 것들이 나온다.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7. 그런데 얼마나 많은 순간 엘리사의 지팡이와 게하시가 오는 것에 그저 만족하며 살아가고 있는가? 그저 좋은 것에 만족하여 가장 궁극적이고 절대적인 하나님은 구하지 못하고 그저 좋은 것들에만 머물러 '여기가 좋사오니'하며 만족하며 살고 있는 나의 삶이 얼마나 안타까운가? 

8.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실 수 있는 하나님만을 구하는 삶을 살아가고 싶다. 내 삶에 있는 좋은 것들에 만족하여 가장 좋으신 하나님을 구하지 못하고 그저 살아가는 안타까운 삶이 되지 않기를 원한다. 수넴여인과 같이 끝까지 가장 좋은 것, 하나님을 구하기 원한다. 

9. 절대적인 것을 보아야, 가장 좋은 것을 보아야 그저 좋은 것에 만족하지 않을 수 있다. 기억하자. 가장 좋은 것은 하나님 한 분이시며, 그 분이 더 필요하다. Greater things have yet to come. 

10.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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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하 4:8-17 하나님으로부터만 받을 것을 하나님께만 구하는 삶

1. 엘리사가 수넴에 이르렀을 때 부하고 지위가 높은 한 여인의 귀한 접대를 받게 된다. 엘리야는 그 곳을 지날 때 마다 그 집에서 먹고 유숙하게 된다 (8절). 그 여인은 지극히 엘리사를 섬겼다. 그 이유는 엘리사가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2. 그녀는 심지어 엘리사를 위해 작은 방을 만들었고, 필요한 것들을 공급하였다 (10절). 그녀의 환대는 너무나 적극적이고 필요한 것이어서 엘리사는 큰 감동을 받았다. 

3. 엘리사는 그녀에게 자신이 해줄 수 있는 무엇인가를 해주려고 하였다 (13절). 당시에 가장 권세 있었던 왕이나 사령관에 이야기 해서 그녀가 원하는 것을 해주려고 할 정도였다. 하지만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그러한 문제가 아니었다. 

4. 오직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아들을 가지는 것’이었다. 생명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는다. 가장 권세 있는 왕도, 모든 힘을 가진 사령관도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직 하나님이 하실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께만 구해야 한다. 

5. 수넴 여인이 잘 한 것은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을 잘 섬긴 것 뿐만이 아니었다. 그녀가 잘 한 것은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생명을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에게 정확하게 구한 것이었다.  

6. 하지만 수넴 여인과 다르게 나는 많은 순간 하나님께 구해야 할 것을 다른 대상에게 구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 삶에 오직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위로와 사랑을 다른 존재들로 부터 얻기를 구한다. 친구로 부터 구하고, 아내나 아이들로 부터 구하고, 돈으로 부터 구하고, 나의 여가시간으로 부터 구하고, 때로는 나의 사역으로 부터 구하기도 한다. 

7. 지금 나에게 필요한 것들은 누가 줄 수 있는 것인가?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하나님이 주실 수 있는 것을 다른 것들로 부터 구하지 않아야만 한다. 위로도, 격려도, 이해도, 사랑도 오직 하나님께 구하고 하나님께로부터만 받아야 한다. 

8. 수넴 여인과 같이 최선을 다해 내가 해야 할 일을 하면서 하나님께만 구해야 한다. 세상의 위정자도 힘을 가진 자도 내가 구할 존재가 아니다. 오직 주님께만 구하고, 주님만을 의지하며, 그 주님으로부터만 받아야 한다. 이것이 나의 오늘이며, 나의 삶이어야 한다. 그렇게 오늘을 살아가기 원한다.

9.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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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하 3:13-27 좋으신 하나님

1. 여호와께 어려운 일은 없다. 그에게 능치 못할 일은 없다. 그 분이 창조자이시고, 그 분이 이 우주를 다스리고 계시는 왕이시기 때문이다. 

2. 이스라엘 왕이 엘리사에게 와서 도움을 청한다 (13-14절). 엘리사는 그들을 돕는다. 그리고 그들에게 전한 여호와의 말씀은 “골짜기에 개천을 많이 파라”였다. 

3. 왜냐하면 3장 9절을 보면 그들에게 가장 당면한 문제는 적과 싸워서 이기는 것이 아니라 당장에 먹을 물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왕과 유다 왕과 에돔 왕이 가더니 길을 둘러 간 지 칠 일에 군사와 따라가는 가축을 먹일 물이 없는지라” 3장 9절

4.  하나님의 도움을 구한 그들에게 가장 먼저 주신 은혜는 당면한 과제, 즉 물을 주시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 뿐만이 아니었다. “이것은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작은 일이라 여호와께서 모압 사람도 당신의 손에 넘기시리니” (18절) 

5. 당면한 과제 뿐만 아니라 그들이 해결하기 위해서 엘리사를 찾아온 그 이유도 해결해 주신다.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에 우리의 궁극적인 문제, 그리고 지금의 가장 급한 문제 모두 해결해주신다. 

6. 하나님은 이렇게 좋은 분이시다. 그런데 가끔은 내 삶에서 하나님을 ‘뒷 방 영감'으로 만들 때가 있다. (할아버지를 비하하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뭔가 쪼잔하고, 준 것을 계산하고 있는 것 같고, 내가 구하면 그것만 주고, 나머지는 또 구할 때 까지 아끼고 있다가 주지 않으시는 그런 쫌생한 하나님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7. 정말로 좋으신 하나님을 만나고, 그 분 만을 찾아야 하는데 나의 선입견 혹은 이전의 어떠한 경험이 그 분의 선하심을 가리우고, 그 분을 쫌생이 영감으로 만들려고 하고 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정말로 내가 틀렸음을 안다. 그런 하나님을 누리면서도 내 안에 가지고 있는 이 선입관들과 하나님에 대한 오해들.. 그리고 믿지 않으려고 하는 고집들…

8. 그런데 틀렸다. 하나님은 정말 선하시고,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시다. 시 100:5 “여호와는 선하시니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고 그의 성실하심이 대대에 이르리로다” 말씀이 증언하는 것과 같이 하나님이 그런 분이 아니신 것이 아니라 내가 틀린 것이다. 내가 오해한 것이다. 

9. 그 좋으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간다. 아들까지 주시어 나를 사랑하신 그 분, 그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나에게 주신 그 분, 그 분을 나도 사랑하기 원한다. 그 분만을 나도 더 알아가기 원한다. 가장 좋으신 하나님, 그 한 분만을 예배하기를 원한다. 오해는 풀리고, 그의 사랑만 남을지어다.

10.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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