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Thinking)/Meditation2020. 10. 12. 1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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겔 21:18-32 하나님이 여전히 다스리신다

1. 느부갓네살 왕은 자신을 배신한 두로와 암몬, 유다를 공격하고자 군사를 일으키고, 첫 전쟁을 누구와 할지를 점을 쳐서 물었다 (21절). 바벨론은 그들의 신(?)에게 그들의 방법인 점으로 물었고, 그들에게 주어진 대답은 예루살렘을 치는 것이었다 (22절).

2. 그러나 바벨론이 그들의 방법으로 그들의 신에게 묻고 있는 그 방법 조차도 하나님의 손 안에 있고, 하나님이 예정하신 방법으로 가고 있다. 왜냐하면 이 땅에서의 모든 일은 하나님께서 다스리고 계시기 때문이다. 

3.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 아버지께서 허락하시지 않으면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 (마 10:29). 우리의 인생은 우리가 인지하든지 인지하지 못하든지, 우리가 알고 걸어가든지, 그렇지 못하든지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

4. 오늘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왜 칼의 심판을 받아야 하는지 알았을 것이다. 아니면 알았지만 무시했을 수도 있다. 에스겔은 그가 예언해야 하는 이유를 확실히 알았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 인생이 언제 그렇게 확실한 것들만 가득했던가?

5. 오히려 불확실하고, 도대체 왜 이 일이 내 삶에 일어나는지 모르는… 그러한 상황이 훨씬 더 많고, 그러한 상황 속에서 마음이 어렵고, 힘든 상황이 훨씬 더 많지 않은가? 하지만 그러한 불확실성과 두려움 속에서도 우리가 붙잡아야 할 것은 여전히 ‘하나님께서 다스리고 계신다’는 사실이다. 

6. 우리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분, 가장 확실하신 그 한 분이 여전히 우리의 삶을 다스리고 계신다는 것이다. 내가 이해하기 때문에 그 분의 다스리심을 아는 것이 아니다. 그 분이 다스리시기 때문에 내 삶은 내가 이해하고, 하지 못하고가 중요하지 않다. 

7. 왜냐하면 그 분이 내 길을 가장 잘 아시고, 이 불확실한 상황 가운데서 가장 확실하시며, 가득한 두려움을 가장 확실한 평안으로 인도하실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 분은 바벨론의 우상숭배도 사용하시고, 바벨론의 점도 사용하신다. 가장 하나님과 반대쪽에 있는 것 같은 그러한 것들도 사용하신다.

8. 오직 하나님께서 온 우주를 다스리시고 운행하시기 때문이다. 내가 해야 하는 일은 이해하려고 애쓰는 것이 아니다. 이해 되지 않다고 그저 그 분의 인도하심을 따라 가는 것이다. 사람들의 환호와 갈채를 따라가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의 동의와 인정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다. 

9. 그저 그 분이 보여주시는 그 길을 순종함으로 걷는 것이고, 그저 그 길을 여전히 그 분이 다스리심을 믿고 이해되지 않더라도 오늘도 한 걸음 씩 내딛는 것이다. 언젠가 그 분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질 것이다. 그거면 됐다. 그거면 괜찮다. 

10. 교회개척 팀의 첫 번째 공식 모임이 시작된다. 전체 팀원들이 함께 침묵 속에서 더 주님의 음성을 듣고자 함께 1박 2일로 리트릿을 간다. 주님이 모든 것을 다스리심이 드러나고, 모든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깨닫게 하시길 간구하고.. 나 또한 오늘도 묵묵히 걷기 원한다. 

11. 팀의 리트릿을 위해 기도부탁드립니다.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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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20. 10. 8. 1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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겔 20:10-26 누구의 이름을 위해 살고 있는가? 

1. 오늘 본문을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눈다면 10-16절은 조상들의 반역에 대한 부분이고, 18-22절은 자손들의 반역에 대한 부분일 것이다. 이스라엘은 한결같이 하나님께 반역했다. 그들의 조상 때에도, 그리고 지금 그들의 자손의 때에도...

2. 하나님은 언제나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서 일하셨다. 그들을 아끼셨고 (17절), 그들을 구별하기 위해 율법과 규레를 주시고 안식일을 허락하셨다 (19-20절). 하지만 이 모든 것을 이스라엘이, 그리고 이방 민족들이 하나님이 여호와인줄 알게 하려 하셨음이다 (25절). 

3. 솔직히 하나님의 이름이 뭐가 그리 중요한 것일까? 라고 쉽게 생각할 수 있다. 하나님의 이름이 뭐가 그리 중요해서 그것을 알리셔야만 하는가? 왜냐하면 그 분이 온 세상의 창조주이시고, 온 세상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4. 있어도 그만이고, 없어도 그만인 이름이 아니라 그 이름을 통해 구원 받게 되고, 그 이름을 통해서 영광의 하나님과 친밀하게 교제할 수 있는 이름이기 때문이다. 그저 이름으로 치부하기에는 하나님은 너무나도 크고 위대하신 분이시다. 

5. 하나님을 얼마나 크게 보느냐에 따라 혹은 그 이름과 어떠한 관계를 맺고 있느냐에 따라 그 이름을 대수롭지 않게 여길수도 있고, 그 이름만 들어도 두려워 떨 수도 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그 이름을 멸시하였고,  온 세상의 하나님보다도 자신들의 평안과 유익을 더 크게 여겼다. 

6.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보다 그들의 생각과 판단을 더 신뢰하였고, 하나님의 안타까운 사랑의 외침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결국은 망하는 길로 가버렸다. 그들의 잘못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은 것이 출발이 아니라 하나님을 너무 작게, 하나님을 너무 멀리 있는 분으로 여기는 마음에서 시작이 되었다.

7. 오늘 나는 그 분의 이름을 어떻게 여기는가? 하나님을 얼마나 크신 분으로 보고 있는가? 하나님이 지금 내 안에 계신 분으로 여기고 있는가? 그렇지 않으면 나도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이 하나님을 그저 작은 존재로, 내 생각 안에 가둬서 나의 만족과 유익을 얻게 하는 작은 신으로 섬기고 있는 것은 아닌가? 

8. 두렵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와 망한 것을 보면서도 여전한 나의 모습이… 여전히 크신 하나님이 아니라 작디 작은 내가 만든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 나의 모습이 부끄럽다. 하나님의 이름이 아니라 내 이름을 위해 살고 있는 내 삶… 은밀하고도 교묘한 나의 삶 돌이키기 원한다. 

9.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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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20. 10. 5. 1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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겔 18:19-32 자신의 믿음으로만 구원 받는다

1. 아버지의 죄를 아들이 담당할 필요가 없다 (19절). 자신의 죄악은 자신이 담당한다. 성경은 연좌죄를 금지하고 있다. 

2.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악인이 돌이켜 돌아오길 원하시고, 만약 그가 돌아온다면 그 범죄한 것을 하나도 기억하지 않으신다 (22절). 언제든지 우리가 그 분께 돌아가면 그 분은 우리를 받아주실 준비가 되어 있다. 

3. 하지만 반대로 의인이 자신의 삶을 돌이켜 악을 행하면 그 역시 그가 범한 허물과 그 지은 죄로 죽을 것임을 말씀하신다 (24절). 즉 그 누구도 평생 의인이든지, 평생 악인이든지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오직 우리는 우리가 한 행위가 우리의 삶을 결정하는 삶을 살아가게 된다. 

4. 어제 의인이었다가 오늘 악인이 될 수도 있고, 어제 악인이었다가 오늘 의인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가 돌아오길 원하신다. 32절을 보면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죽을 자가 죽는 것도 내가 기뻐하지 아니하노니 너희는 스스로 돌이키고 살지니라” 라고 말씀하신다. 

5. 하나님께서는 죽을 자가 죽는 것도 기뻐하시지 않는다고 하신다. 모든 사람이 그 놈은 잘 죽었다 말할만한 자에게도 하나님은 그것은 기뻐하시지 않고 그가 돌아오기를 바라신다는 것이다. 정말로 큰 사랑이다. 

6. 사실 하나님의 이 크신 사랑 때문에 우리가 오늘을 살 수 있는 것 아닌가? 그 놈은 잘 죽었다고 말하는 그 자 보다는 그래도 내가 낫다는 생각이 나에게는 깔려 있지만.. 그 놈이나.. 나나 하나님의 거룩 앞에선 사실 별 차이 없지 않은가? 

7. 우리는 언제나 은혜로, 믿음으로만 구원받는 것이지 내가 그 놈 보다 조금 낫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님을 명심해야 한다. 그리고 고만 고만인 우리 모두가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시고, 우리 모두가 하나님께로 돌아오길 원하신다. 이것이 가장 큰 하나님의 사랑이다. 

8. 구원의 문은 우리에게 지금 활짝 열려 있다. 나의 행위를 의지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가면 된다. 우리의 죄가 무거울지라도, 우리가 연약할지라도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를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신다. 그저 그리스도께 나아가고, 그저 그리스도께 우리의 삶을 의탁하면 된다. 그 믿음만으로 가능하다. 그런데 그 믿음은 누구의 믿음이 아니라 자신의 믿음이어야 한다.

9. 그래서 오늘도 나의 믿음을 점검한다. 그리고 또한 텀 브레이크를 맞아 집에서 있는 아이들의 믿음을 생각해본다. 부모의 믿음이 아이들을 구원할 수 없으며, 아이들이 믿음의 반대로 부모를 구원할 수 없다. 우리에게는 각자가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이 있어야 한다. 

10. 부모로써 아이들에게 해줄 수 있는 최고는 믿음을 가르치고, 믿음을 배우게 하는 것이 아닐까?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해 구원의 문을 활짝 열어놓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 아이들이 구원받을 수 있는 믿음을 가질 수 있도록 내가 해야 하는 일들을 소홀히 하지 않기를 원한다. 가졍예배를 다시 붙들기 원한다. 

11.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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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20. 10. 2.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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겔 17:1-10 비정상에서 정상으로

1. 오늘 말씀은 수수께끼와 비유로 말하고 있다. 그렇기에 주석을 찾아서 읽기 전까지는 무슨 말인지 도무지 알기 어려웠다. 첫 번째 큰 독수리는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을 상징하고, 두 번째 독수리는 ‘애굽’을 상징한다. 

2. 이스라엘은 포도나무인데, 이 포도나무의 가지가 햇빛을 향해서도 아니고 색깔이 화려하고 날개가 크고 깃이 길고 털이 숱한 큰 독수리 (3절)를 향해서 자라고 있다. 그리고 그 뿌리도  물을 향해서가 아니라 독수리 아래에 있다 (6절). 자연의 법칙을 깨뜨린 일이다.

3. 식물은 보통 햇빛을 향해 가지가 뻗어가고, 뿌리는 물을 향해서 뻗어 나가는 것이 정상이고, 바람직한 일이다. 그런데 이 포도나무는 어떻게 된 일인지 큰 독수리를 향해 자라간다. 그리고 이 가지는 갑자기 날개가 크고 털이 많은 큰 독수리 (7절)를 향해서 자라가고 있다. 

4. 이것이 비유인데 (그래서 이해하기 쉽지 않은데), 이스라엘이 생명의 물이 되시는 하나님, 생명의 원천이 되시는 빛 되신 하나님을 버리고 큰 독수리 바벨론, 두 번째 독수리 애굽을 의지하고 있다는 상징적 표현이다. 

5. 생명이 생명을 낳으려면 꼭 필요한 것은 햇빛과 물이다. 햇빛과 물이 없으면 그 어떤 생물도 생존할 수 없다. 우리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생명의 빛과 물이 되시는 하나님과의 교제가 없다면 살아 있지만 죽은 것과 다름이 없다. 그런데도 이스라엘은 꾸역꾸역 독수리들에게서 물과 햇빛을 찾는 포도나무와 같이 살았던 것이다. 

6. 10절은 그 마지막을 이야기 하고 있다. “볼지어다 그것이 심어졌으나 번성하겠느냐 동풍에 부딪힐 때에 아주 마르지 아니하겠느냐 그 자라던 두둑에서 마르리라 하셨다 하라” 완전 망한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그렇게 생수와 빛이 되시는 하나님을 거절하고 말도 안되게 독수리로부터 그것을 찾다가 망했다. 

7. 나라고 뭐가 다르랴? 별반 다르지 않다. 주님의 몸인 교회를 세우려고 하면서도 하나님 한 분을 의지하기 보다는 교회개척 헌금이 얼마나 들어왔는지를 의지한다.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공급이라고 말하면서도 내 중심은 교회의 시작의 준비는 하나님이 아니라 돈이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8. 삶은 어떤가? 하나님이 생명의 빛이시고, 물이라고 하면서도 묵상도, 말씀읽기도, 기도도 소홀하게 하며 내가 해야만 하는 것에 치여서 정작 더 중요한 하나님과의 교제를 놓칠 때가 얼마나 많은가? 내가 독수리를 의지하고 있지 않다고 얼마나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가? 없다!!

9. 다시 한번 비정상에서 정상에서 돌아가기 원한다. 독수리가 아니라 생명의 물과 빛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더 붙잡기 원한다. 10월이다. 올해는 코로나의 여파인지 시간이 참으로 빨리 지나간다.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를 점검하며 새로운 한 달을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기 원한다. 

10.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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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20. 9. 30.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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겔 16:44-52 나의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

1. 이스라엘은 항상 사마리아를 무시했다. 그 이유는 사마리아는 혈통이 섞였기 때문이다. 즉 순전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신약에 보면 그래서 그들을 개에 비유하기도 하였다. 

2. 이스라엘에 있어서 혈통은 항상 중요했다. 어느 지파인지, 누구의 자손인지.. 그들이 그들의 조상으로 이야기 하는 아브라함, 그들은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그리고 그것을 자랑했다.

3. 하지만 오늘 본문에서는 하나님께서 그들의 혈통을 정면으로 반박하신다. “네 어머니는 헷 사람이요 네 아버지는 아모리 사람이며” (45절) 12지파도, 아브라함의 자손도 아니라 너희들이 그렇게 싫어하고 무시하고 저주하는 이방인들의 혈통이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4. 그리고 47절부터는 이스라엘 백성들 너희들의 죄가 소돔 보다도, 사마리아 보다도 더 악하다고 말씀하고 있다. 이스라엘이 그렇게 자랑했던 혈통의 우위가 무엇이었는가? 하나님께서 그들을 아셨고, 그들에게 자신을 계시하셨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주셨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자신들은 제사장 나라이고, 거룩한 백성들이라는 사실이었다.

5. 하지만 오늘 하나님께서는 아니다!! 라고 말씀하신다. “사마리아는 네 죄의 절반도 범하지 아니하였느니라 네가 그들보다 가증한 일을 심히 행하였으므로 네 모든 가증한 행위로 네 형과 아우를 의롭게 하였느니라” (51절) 너의 죄가 그들의 배나 넘고, 네가 너무 악하므로 오히려 그들이 의롭다고 말씀하신다. 

6. 혈통을 중요하게 여기지만 오히려 더 중요한 것은 혈통이 아니라 지금 나의 모습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인생을 아버지와 어머니를 통해서 판단치 않으신다. 지금 오늘 나의 모습이어야 한다. 지금, 그리고 여기의 (here and  now)의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7. 왜냐하면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 자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막 12:27).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이셨지만, 오늘은 곧 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나는 무엇을 자랑하고 있는가? 아내가 말하길 내가 묘하게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부분이 있다고 한다. 물론 그게 아내가 말한 그 부분 하나만 이겠는가? 

8. 하지만 자랑할 것이 아무리 많다고 해도,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자랑할 것은 오직 우리의 약함 뿐이다.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내가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 (고후 11:30) 왜냐하면 그래야 하나님의 강하심이, 하나님의 위대하심이, 하나님의 전능하심이 내 삶을 통해서 드러날 수 있기 때문이다. 

9.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 앞에서 오늘을 살아내지 못하고 혈통을 자랑하다가 망했다. 나는 오늘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그리고 내가 자랑할만한 그 눈꼽만한 것들을 자랑할 것인가? 아니면 사도바울과 같이 나의 연약함을 자랑하고, 하나님만을 자랑할 것인가? 예수를 자랑하는 오늘 하루, 내가 되자. 

10.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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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20. 9. 25. 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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겔 14:12-23 죽어서 마땅한 자들을 살리신 한 의

1.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게 되면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다. 그것이 설령 하나님이 인정 하셨던 의인들이 그 곳에 있다고 할지라도 막을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세 사람을 예로 들고 있다. 노아, 다니엘, 욥 (14절). 

2. 이 세 사람은 진정 의인이었다. 하나님께서 직접 노아와 욥은 의인이라고 말씀해주셨다. 다니엘은 그의 인생을 하나님 앞에 드리며 철저히 자신을 구별되어 드리며 살았다. 하지만 그들이 설령 있더라도 자신의 생명 이외에는 건지지 못한다고 말씀하셨다. 

3. 노아는 자신의 의로움으로 자신의 가족들의 목숨을 방주로 태워서 구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지금은 그 노아가 있을지라도 자신의 생명 밖에 구할 수 없다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엄중한 분노하심이 느껴진다. 그들에게 내려지는 벌은 4가지였다.

4. 칼, 기근, 사나운 짐승, 전염병… 우리는 지금 코로나 19의 전염병 단 하나 안에 살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지금의 상황이 어떤가? 그런데 그 하나가 아니라 전쟁과 기근, 그리고 사람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자연재해까지 겹쳐서 내려진다면.. 마치 얼마전 한국에 몰아친 태풍들에다가 전쟁과 기근이 함께 몰아친다면… 

5. 상상도 하기 힘들지만 이것이 하나님의 심판이다. 과연 누가 살아남을 수 있을까 싶을 정도의 극렬한 심판이 몰아치게 되고, 우리는 이 모든 심판을 받아 마땅한 사람들이었다. 이스라엘 백성들만 그랬을까? 아니다. 지금의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이다. 노아도, 다니엘도, 욥도 아무도 자신의 생명 이외에 구할 수 없는 시대에 우리도 살고 있다. 

6. 심지어 이 시대에 노아나 다니엘, 욥과 같은 의인이 있기는 한 것일까? 라는 의심이 들기도 한 시대이다. 우리는 정말 심판을 피할 수 없고, 가끔 마음 속에 우리가 지금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있는게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다 (하지만 정말 그렇지 않다!!)

7.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노아, 다니엘, 욥과 같은 정도의 의인이 아니라 의 그 자체를 우리에게 보내주셨다. 바로 하나님 자신이 우리에게 오신 것이다. 죄가 없으시고, 아무런 잘못도 없으신 그 하나님 자신이 우리를 위해 채찍을 맞으셨고,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셨고, 죽으셨다. 의인이 죄인을 위해서 대신 죽은 것이다. 

8. 그리하여 칼, 기근, 사나운 짐승(자연재해), 전염병 등등으로 우리에게 임한 그 심판이 멈추어졌다. 죽어야 할 자가 죽지 않게 되었고, 썩어야 할 몸이 썩지 않게 되었다. 우리는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꿈꿀 수 있게 되었고, 영원한 죽음에서 건짐을 받게 되었다. 노아, 다니엘, 욥보다 더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 때문이다.

9. 오늘도 내 안에 아무런 의로움이 없음을 보게 된다. 무정하고, 나를 드러내려고 하고, 인정받고 싶고, 편하고 좋은 것을 추구하는 내 자신을 보게 된다. 절망적이다. 노아, 다니엘, 욥에게도 전혀 미치지 못한다. 그럼에도 감사한 것은 이런 엉망인 나를 그리스도께서 받아주셨다는 것이다. 구원해 주셨다. 

10. 오늘 하루를 살아낼 수 있는 힘은 나에게서 나오지 않는다. 오직 우리를 받아주시고, 건져주신 그리스도의 사랑과 은혜 때문이다. 교만하지 말고, 자고하지 말고, 우리에게 주신 은혜를 쫓아 살아가자. 아이들에게, 우리 태국의 형제, 자매들에게 사랑을 말하고, 그들에게 감사를 표현할 수 있는 하루가 되자.

11.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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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Thinking)/Meditation2020. 9. 24. 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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겔 14:1-11 바보로 살지 말자

1. 오늘 본문에서는 세 부류의 우상숭배를 하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첫 번째 부류는 이스라엘의 장로들이다 (1절). 그들은 이스라엘의 장로였고, 리더였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섬기기를 택한다. 

2. 두 번째 부류는 이스라엘 가운데 거하는 외국인들이다. 이들은 외국인이라고 쉽게 치부해버리기 보다는 아마도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서 함께 살아가던, 함께 삶의 방식과 신앙을 공유하던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유대인은 아니었지만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로써 이스라엘 회중 가운데 거하는 자들이었다. 그들도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택한다.

3. 마지막 부류는 거짓 선지자들이다. 하나님께 들은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하는 사람들이다. 이 사람들은 아주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버리고 자신만 하나님을 떠난 것이 아니라 다른 이스라엘 백성들까지 하나님을 떠나게 만든 사람들이다. 하나님은 이 세 그룹에게 심판과 회개를 요청하고 계시다 (6, 8, 11절).

4. 우상을 섬기는 자들이 왜 하나님을 버렸을까? 아마도 그 이유는 자신의 삶의 이익이 이유였을 것이다. 지금 당장 자신에게 이익을 줄 수 있는 신을 선택한 것이었을 것이다. 눈 앞의 이익이 그들의 영원한 삶과 영원한 하나님과의 교제도 모두 잘라 먹은 셈이다. 

5. 그것도 긴 호흡에서의 유익도 아니었다. 지금 당장 눈 앞의 이익.. 지금 당장 나에게 필요한 것.. 그것이 영원하신 하나님을 팽개치고 버릴 수 있는 이유였다. 그런데 지금 이 시대에 신을 믿는 이유가 이러한 이익 때문이 아니라고 누가 말할 수 있겠는가? 

6. 늘 존경하고 따르기를 원하는 선교사 짐 엘리엇의 그 한 마디가 귓가에 들리는 듯 하다. “He is no fool who gives what he cannot keep to gain that which he cannot lose.” 보통 한국어는 이렇게 번역되어 있다. “영원한 것을 얻기 위해 영원하지 않은 것을 버리는 자는 결코 어리석은 자가 아니다"

7. 우상을 선택한 자들은 바로 짐 엘리엇과 반대되는 삶을 살아간 것이다. 짐 엘리엇이 영원한 하나님을 얻기 위해 그의 삶을 아우카 부족을 위해 아낌없이 드렸다면 오늘 본문의 그들은 영원하지 않은 것들 (삶의 어떠한 유익)을 누리고 붙들기 위해 영원한 생수되신 하나님을 포기하고 버린 자들이다. 이것이 우상숭배이고, 이것이 우리의 인생을 무너뜨리는 결정이다.

8. 무엇을 위해 살 것인가? 누구를 위해 살 것인가? 무엇을 얻기 위해 살 것인가? 영원하신 하나님과 그의 나라인가? 아니면 지금 당장 얻을 수 있는 삶의 어떠한 유익인가? 나에게 수많은 질문들이 던져진다. 언제나 내일이 올 것 처럼 확신하며 살아가는 삶 속에서 주님과의 교제를, 주님을 섬기는 일을 뒤로 미루고 있지는 않은가? 

9. 주님을 얻기 원한다. 주님 그 한 분이 내 삶의 만족이며, 이유가 되기를 원한다. 오늘을 그렇게 그렇게 살기를 원한다. 바보가 되지 말자. 

10. 오늘도 샬롬 


jaiwoo.tistory.com/676

 

내일의 당연함

내일의 당연함 방콕에서 사역하시던 SFC 홍정훈 선교사님이 어제 그토록 사랑하던 주님 곁으로 가셨다. 홍정훈 선교사님을 마지막으로 만난건 딱 한 달 전이었다. 몇 번을 만나려고 약속을 잡았�

jaiwoo.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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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20. 9. 23. 1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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겔 13:17-23 믿는 자의 정체성에 맞는 단어들

1. 하나님께서 오늘 거짓 선지자들에 대해서 심판을 말씀하신다. 사실 예언자는 자신의 말을 전하는 사람이 아니라 들은 것을 전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17절에서 그들을 설명하는 문구에서 이미 틀렸다. ‘자기 마음대로’ ‘예언하는’ (17절) 이미 자기 마음대로 예언한다는 것에서 틀린 것이다. 

2. 상충되는 두 단어가 그들의 정체성이 이미 틀렸음을 선언하고 있고, 정체성이 틀렸으니 당연히 그들의 마지막도 하나님의 심판일 수 밖에 없다. 그런데 저 예언하는 뒤에 그 무엇을 가져다 붙여도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3. ‘자기 마음대로’ ‘사역하는 선교사’ 이상하다.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는 크리스챤’ 역시 이상하다. ‘자기 마음대로’ 무엇을 하더라도 우리는 틀릴 수 밖에 없고, 어울리지 않을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 마음대로 사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4. 자기 마음대로는 무엇을 하든지 이상하고, 어울리지 않게 된다. 하지만 ‘하나님의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대로’라는 단어를 붙이면 우리 크리스챤의 삶에서는 모든 것이 어울리고 맞는 말이 된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내가 어떻게 지금 살아가고 있는가?’의 문제이다.

5. 나는 ‘내 마음대로’ 살아가고 있는가? 아니면 ‘하나님의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고 있는가? 이것이 내가 거짓 선지자, 혹은 거짓 선교사인지 아닌지를 판단할 수 있는 중요한 지점이다. 나는 오늘을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 

6. 어제 매우 슬픈 소식이 있었다. 방콕에서 사역하시던 한 선교사님이 옥상의 누수를 확인하러 가셨다가 감전으로 하나님 품으로 안기셨다. 예전부터 멀리서 알고 지낸 사이였는데, 딱 한 달 전에 우연히 까페에서 만나서 1시간 정도를 교제했었고, 그 분의 사역과 대학생 양육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들었었다. 참 좋으신 분이었고, 영혼에 대해 열정적인 분이셨다. 그런데 그 분이 정말 갑자기 주님 품으로 가셨다.

7. 너무 황망한 마음에 어떤 말도 나오지 않았고, 어떤 말도 생각나지 않았다. 가족들과 교회와 사역들을 생각하며 참 마음이 답답했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하나님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요?’라고 질문하고 있었다. 내가 그 선교사님의 삶을 다 알 수는 없지만 그래도 참 신실한 선교사님이셨다.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는 분이 아니라 ‘주님의 뜻대로’ 사역하는 분이셨다. 

8. 슬픔과 황망함이 다 가시지 않는다. 다 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나도 그렇게 내 정체성에 어울리게 살아가야겠다는 생각을 다시 하게 된다. 누구의 마음대로 살아갈 것인가? 누구의 뜻대로 살아갈 것인가? ‘나’ 인가? 아니면 ‘하나님’인가? 나는 누구의 말을 전하는 사람인가? ‘나’ 인가? ‘하나님’인가? 

9. 남은 자의 삶은 언제나 더 무겁다. 하지만 남은 자로써 앞서 간 분들의 본을 받아 그렇게 살아가고 싶다. 내 마음이 아니라 주님의 마음으로 살아가고, 내 말이 아니라 내가 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말하는 그런 선교사가 되고 싶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유가족들을 진심으로 만져주시길 기도한다.

10.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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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Thinking)/Meditation2020. 9. 21. 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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겔 12:17-28 심판의 약속 뿐만 아니라 새 하늘과 새 땅의 약속도 성취된다

1. 에스겔을 비롯한 많은 선지자들의 회개와 심판에 관한 예언들… 하지만 이스라엘에는 이상한 속담이 있었다. “날이 더디고 모든 묵시가 사라지리라” (22절) 그게 전통적이었는지, 에스겔의 시대에만 있던 것이었는지 알 수는 없다. 

2. 하지만 내용인즉슨 지금 선포되고 있는 회개와 심판에 대한 예언들에 대한 성취가 더딜 것이고, 언젠가는 성취되지 않고 사라져 버릴 것이다 라는 것이다.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는 속담(?)이다. 

3. 하지만 하나님은 이에 대해 말씀하신다. “사람이 다시는 이스라엘 가운데 이 속담을 사용하지 못하리라”, “날과 모든 묵시의 응함이 가까우니” (23절) 하나님의 말씀은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것도 지체하지 않고 말이다. 

4. 마치 지금의 시대와 같이 느껴진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은 없다고 말하고, 2000년을 넘게 기다린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 없는 것을 보니 재림은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신다. 

5. “그러므로 너는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말이 하나도 다시 더디지 아니할지니 내가 한 말이 이루어지리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셨다 하라” (28절). 하나님의 말씀은 분명히 이루어진다. 상황이 그럴 것 같아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6. 하나님께서 신실하신 하나님이시기에, 하나님께서 완전하신 하나님이시기에 하나님의 말씀은 없어지지도 실패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 말씀은 하나님의 때에 속히 이루어질 것이다. 그것이 당장 우리에게 아픈 심판과 멸망이라도 말이다. 

7.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그게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지금 당장의 심판과 멸망의 예언이 있지만, 우리에게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언약도 여전히 유효하다. 새 하늘과 새 땅도 여전히 유효하다. 그렇기에 지금 심판과 멸망의 말씀은 우리를 영원히 멸망시키기 위함이 아니라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이끌어 가시기 위한 과정이다. 

8. 우리의 연약함으로 인한 말씀이 반드시 성취된다. 하지만 감사한 것은 그 뿐 아니라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언약도 성취된다는 사실이다. 말씀의 성취가 두렵지만 그것이 단순한 두려움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성취를 기대하자. 그 언약이 속히 성취되기를!! 아멘

9.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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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Thinking)/Meditation2020. 9. 18. 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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겔 11:1-13 칼을 두려워하면 칼로 망한다

1.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불의를 품고 악한 꾀를 꾸미던 자들이었다 (2절). 어떤 불의와 악한 꾀인지는 알 수 없지만 같은 이스라엘을 향한 것이었든지, 혹은 주변 백성들을 위한 것이었든지, 그것도 아니면 하나님을 향한 것이었든지… 그것들은 하나님이 기뻐하실 수 없는 것들이다.

2. 하지만 그들이 칼을 두려워한다고 말하는 8절을 본다면 아마도 주변 나라들을 향한 악한 생각이 아니었나 추측해 볼 수 있겠다. 이스라엘의 두려움은 다른 나라로부터 정복당하거나 침략을 당할거라는 두려움이었을 것 같다. 

3. 하지만 성경은 우리에게 우리가 두려워하고 경외해야 할 한 분이 오직 하나님 한 분이심을 이야기 하고 있다.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으면 우리는 다른 무엇인가를 두려워할 수 밖에 없다. 

4. 그것이 우리 삶의 우상이고, 그것이 우리의 삶의 올무로 작용한다. 두려워할 분을 두려워하고, 경외할 분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이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께서는 그 우상이 가짜이고, 오직 여호와 하나님께서만 하나님이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그 우상으로 우리를 망하게 하실 것이다. 

5.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가 칼을 두려워하니 내가 칼로 너희에게 이르게 하고” (8절) “너희가 칼에 엎드러질 것이라 내가 이스라엘 변경에서 너희를 심판하리니 너희는 내가 여호와인 줄을 알리라” (10절)

6. 본문을 보며 나는 무엇을 두려워하는지를 생각해보게 된다. 하나님인가? 아니면 어떠한 종류의 칼인가? 온 세상을 다스리시고 역사하시는 하나님인가? 아니면 칼을 향한 두려움인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살기 원하지만 실은 나도 칼을 두려워하며 살고 있다.

7. 특별히 요즈음 나에게 칼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들과 아이들 문제, 그리고 교회개척인 것 같다. 이 문제들을 대할 때 때로는 하나님이 역사하지 않으실 것 처럼 하고 있다. 하나님이 일하실 여지, 공간을 두지 않고 내가 붙잡으려고 하고, 내가 바꾸려고 한다. 그리고 좌절한다. 그리고 또 다시 해보려고 하고, 또 좌절하고의 반복이다. 

8. 내가 두려워야 할 대상이 오직 하나님 한 분이심을 기억한다. 내가 내 삶의 한 치도 바꿀 수 없음을 다시 한번 기억한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칼을 두려워하여 칼에 망하게 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거울 삼아 다시 한번 마음을 다 잡는다. 하나님만 경외해야 한다. 하나님만 두려워해야 한다. 

9. 삶의 우상도, 올무도 아닌 하나님을 경외하고 두려워하는 오늘 하루가 되자. 붙들고 있었던 문제들도 다시 한번 하나님께 올려 드리자. 내가 하는 것 보다 그 분이 하시는 것이 당연히… 맞다. 어떤 문제도 그 분께는 문제가 아니다. 

10.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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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