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Thinking)/Meditation2020. 8. 15. 1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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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하 19:20-28 복음이 가장 필요한 모습으로 흘러가길

1. 히스기야는 앗수르 왕의 편지를 여호와 앞에 펴놓고 기도했다. 왜 기도했는가? 그에게 다른 어떠한 피할 방법도 없었기 때문이다. 전혀 방법이 없어서이기도 했지만 또한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기 때문에 기도했을 것이다. 

2. 그런 그에게 하나님의 응답이 이사야를 통해 임했다 (20절).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히스기야에게 보내 이르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네가 앗수르 왕 산헤립 때문에 내게 기도하는 것을 내가 들었노라 하셨나이다"

3. 하나님만 의지하였기에 기도하였는데, 그 하나님께서 내 기도를 들으셨다고 하신다. 그것 보다 더 큰 기쁨과 감사가 어디에 있었을까? 정말 좋은 소식, 복음 그 자체였을 것이다. 

4. 하나님이 우리의 절망의 기도를 들으신다. 앞도, 뒤도, 위도, 아래도 다 막힌 기분이 드는 그 순간의 우리의 기도의 목소리를 들으신다. 그리고 그 좋은 소식을 들려 주신다. "내가 너의 기도를 들었다"

5. 우리 모든 사람의 상태가 그랬다. 안그런척 하지만 괜찮은척 하지만 우리는 죄로 인해서 사방이 막혀 있었고, 정말 그 답답함을 넘어설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그 어떤 방법으로도 이 죄의 문제를 극복할 수 없었다. 그 때 이 복음이 들려왔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다.

6. 히스기야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절망 속의 기도를 들으신다는 복음을 들었다. 먼저 나는 오늘 어떤 복음을 듣고 있는가? 아내는 나로부터 어떤 복음을 듣고 있는가? 나의 아이들은? 우리 교회개척팀은 나로부터 어떤 복음을 듣고 있는가?

7. 물론 다른 복음은 없다. 오직 복음은 그리스도 밖에 없다. 하지만 나에게 전해진 그리스도의 그 복음이 아내에게, 아이들에게, 우리 교회 개척팀에게 태국 사람들에게 어떻게 적절하게 전해지고 있는가? 얼마나 그들의 상황에 맞게 내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보여주고 있는가? 

8. 복음은 하나이다. 하지만 그 복음이 드러나고 보여지는 모습은 다양하고, 그들에게 적절해야 한다. 히스기야에게 나타난 복음은 ‘하나님께서 들으신다’였다. 하나님은 그에게 가장 필요한 모습으로 만나주셨다. 내 삶에 내가 들은 복음이 나의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 그리고 태국의 영혼들에게 가장 필요한 모습으로 흘러갈 수 있게 되기를 원한다.

9. 멍 때리고 살지 말고, 그들의 복음의 필요를 돌아보고 복음을 여러형태로 나눌 수 있게 되는 하루가 되기를..

10.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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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20. 8. 11. 0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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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하 18:13-37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의 겸손과 침묵

1. 오늘 본문은 아마도 자신의 병력과 말의 힘을 의지하는 자와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의 모습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자신의 병력과 말의 힘을 의지하는 앗수르의 왕 산헤립과 그의 장군 랍사게가 이스라엘을 조롱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가진 병력으로 인해서 교만하였다. 먼저 그들은 이스라엘에게 엄청난 금과 은을 요구한다 (14절). 아마도 이스라엘이 내지 못할 거라고 생각한 금액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성전 문과 기둥의 금까지 다 벗겨서 이를 지불하였다 (16절).

2. 그리고 나서 랍사게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신이 이스라엘을 멸절하러 왔다고 말한다 (25절). 먼저 이스라엘 백성들을 능욕한 후에 이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믿고 있는 하나님을 능욕하기 시작한다. "민족의 신들 중에 어는 한 신이 그의 땅을 앗수르 왕의 손에서 건진 자가 있느냐?" (33절)

3. 그들의 교만함과 방자함은 하늘을 찔렀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백성들 뿐만 아니라 하나님까지 모욕하고 멸시하였다. 하지만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인 히스기야 왕의 태도는 그들과 달랐다.

4. 하나님을 의지하는 히스기야 왕은 겸손하게 말하였고, 그들이 원했던 금과 은을 주었다. "내가 범죄하였나이다 나를 떠나 돌아가소서 왕이 내게 지우시는 것을 내가 당하리이다" (14절 중반부)

5. 그리고 어떠한 말로 자신들을 모욕하든지 그것에 대해 아무런 말도 하지 않도록 백성들에게 미리 당부를 하였다 (36절). 자존심이 상하고 모욕을 당하는 상황 속에서도 그는 자존심이 상하고 모욕을 당하는 것을 선택하지 않았다. 그는 그 모든 것을 그들이 믿고 의지하고 있는 여호와 하나님께 맡겼다. 그래서 그들은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6. 하지만 나는 누군가의 모욕에 누군가의 자존심 상하게 하는 말에 얼마나 급히 반응하고, 얼마나 분이 나고, 또 얼마나 갚아 주고 싶었는가? 오늘 본문을 보면서 이러한 모습은 오히려 자신의 힘과 능력을 의지하던 앗수르 장수의 모습임을 본다. 자신의 가진 것에 대한 자부심, 자신이 지금 할 수 있는 것에 대한 자부심이 너무 커서 교만하고 오만하여 모욕과 자존심 상하는 말을 툭툭 던진다. 

7. 그리고 반대로 그러한 말을 들었을 때에는 그 모욕감으로 인해 부들부들 떠는 것이 자신을 의지하는 사람의 모습이다. 이와 반대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은 침묵한다 (36절).

8. 왜냐하면 모든 능력이 나로부터 나오지 않았음을 알고, 그것으로 인해 교만할 것도 없고 자부심을 가질 것도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믿음을 통해 은혜로 (by Grace, through Faith)구원을 받은 죄인일 뿐인 것이다.  

9. 겸손함을 가장한 나의 태도에서 나를 의지하고, 나의 능력을 의지하는 모습은 없는지 돌아보게 된다. 입으로는 하나님을 의지하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는 '나'라는 우상을 섬기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리하여 앗수르의 장수 랍사게와 같이 다른 사람을 모욕하고 조롱하는 부분은 없는지? 혹은 다른 사람의 말에 지나치게 반응하고 있지는 않은지? 좀 더 점검하기 원한다. 

10. 그리고 가능하다면 많은 순간 관계 속에서 겸손과 침묵을 선택하기 원한다.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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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Thinking)/Meditation2020. 8. 10. 1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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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하 18:1-12 그리스도가 아니면 설명될 수 없는 하루 하루를 살아내는 삶

1. 오늘은 히스기야 왕의 이야기이다. 히스기야의 마지막을 알기에 그에 대한 편견이 있을 수 있지만, 그는 매우 진실하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율법을 지켰던 왕이었다. 

2. 6절이 그를 잘 설명하고 있다. "곧 그가 여호와께 연합하여 그에게서 떠나지 아니하고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계명을 지켰더라" 그는 하나님을 굳게 붙들고 그와 동행하며 계명을 지켰다. 이것을 성경은 그가 '다윗의 모든 행위와 같이'라고 (3절) 말하고 있다. 

3. 붙들고, 동행하고, 계명을 지킨다. 이것을 다윗의 모든 행위라고 설명하고 있다. 다윗의 인생을 하나님 없이 설명할 수 없는 것 처럼, 히스기야 역시 자신의 인생을 하나님 없이 설명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그것은 그의 형통으로 나타났다 (7절).

4. 이러한 하나님이 아니고서는 설명할 수 없는 인생, 그리고 그로 인한 형통은 성경의 많은 인물들에게서 찾을 수 있다. 물론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고 해서, 혹은 우리가 하나님을 따라간다고 해서 항상 만사형통의 삶이 되는 것은 분명히 아니다. 요셉은 어떠했는가? 하나님이 아니고서는 그의 꿈과 그의 인생을 설명할 수 있는가? 

5. 형통의 문제를 말하기 이전에 이 모든 인물들의 삶이 가지는 공통점에 더 집중하기 원한다. 그들은 모두 하나님을 굳게 붙들고, 하나님과 동행하려 하고,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기 위해 애를 썼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는 삶은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이 아니고서는 그들의 인생을 어떤 방법으로도 설명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 

6. 내 인생이 이러했으면 좋겠다. 하나님이 아니고서는 지금 왜 이 곳에 서 있는지, 왜 이 곳에 살고 있는지 설명할 수 없는 그런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주님을 더 깊이 붙들고, 주님과 더 깊이 동행하고, 주님의 말씀에 더 깊이 순종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면 좋겠다. 바램과 달리 이러한 삶은 불가능하다. 다윗도, 요셉도, 오늘 본문의 히스기야도 다 실수하고 넘어졌다. 

7. 아무리 노력해도 안되는 이러한 삶은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하다. 하나님을 가장 깊이 붙들었던 분.. 아니 동행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과 한 몸이신 오직 그 한 분, 하나님의 말씀이신 그 분, 말씀을 단순히 순종하시는 것이 아니라 완성하고 성취하신 분… 그 분을 믿는 믿음 안에서만 가능하다.

8. 내가 그리스도 안에,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실 때에 가능하다. 더욱 더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할 때에라야 내 인생이 그리스도가 아니고서는 설명할 수 없는 인생이 될 것이다. 정말 그렇게 살아가고 싶다. 형통이 이유가 아니라 하나님이 이유가 되는 그런 삶… 

9. 교회 개척의 준비도 바로 하나님이 되신다. 내가 선교사로서 태국에서 교회를 왜 팀으로 함께 개척하는가? 내가 왜 굳이 방콕 시내에 교회를 개척해야 하는가? 그 모든 이유가 하나님이 되시기 원한다. 이제 교회 개척을 위해 필요한 부분들도 준비해야 한다. 그렇다면 필요한 부분들이 채워질 이유는? 내가 잘 준비해서가 아니라, 내가 모두를 설득할 수 있는 이유를 제시해서가 아니라.. 그 이유 또한 하나님이 되시기 원한다. 

10. 그리스도가 아니면 설명될 수 없는 하루 하루를 살아내는 삶…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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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Thinking)/Meditation2020. 8. 10. 1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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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하 17:1-6 여호와께 피함이…

1. 호세아가 사마리아에서 북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다 (1절). 그는 여호와 앞에서 악을 행하였으나 이전 왕들과는 같지 아니하였다 (2절). 

2. 이러한 호세아는 앗수르의 지배 하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꿈이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는 과감하게 앗수르 대신 애굽을 의지하려고 한다. 

3. 앗수르에게 주던 조공을 멈추고 애굽의 왕에게 사자들을 보내었다 (4절). 하지만 그 결과는 앗수르 왕이 올라와서 사마리아를 점령하고 이스라엘 사람들을 끌어가는 일이 발생하였다 (6절).

4. 호세아 왕은 북이스라엘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에는 민족주의자였을 것이다. 자신들을 압제하고 지배하던 앗수르를 벗어나려고 애쓰는 애국자였을 것이다. 이전 왕과 같지 아니한 그래도 좋은 사람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앗수르를 벗어나기 위해 애굽을 의지하는 잘못을 범하고 만다. 

5. 하나님을 의지하여야 하는 순간에 자신의 지혜를, 특별히 세상의 힘이 돌아가는 것을 보며 그것을 분석한 자신의 지혜를 의지하고야 말았고, 그 결과는 이스라엘의 고난이 닥치게 된다. 좋은 사람이었지만 좋으신 하나님이 아니라 좋아 보이는 자신을 그리고 좋아 보이는 타국을 의지한 것이다. 

6. 이사야 31:3에는 "애굽은 사람이요 신이 아니며 그들의 말들은 육체요 영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그의 손을 펴시면 돕는 자도 넘어지며 도움을 받는 자도 엎드러져서 다 함께 멸망하리라" 라고 기록하고 있다. 애굽을 의지해서는 안된다. 강해 보이는 애굽을 믿는 것, 앗수르를 몰아낼 수 있을 것 같은 애굽을 믿는 것은 모두 눈과 생각의 우상이다. 

7. 하지만 성경은 우리에게 여호와께 피하라고 말씀하고 있다. "여호와께 피하는 것이 사람을 신뢰하는 것보다 나으며 여호와께 피하는 것이 고관들을 신뢰하는 것보다 낫도다" 시 118:8-9  애굽도 아니요, 앗수르도 아니요… 그 어떤 강해 보이는 그 무엇도 결코 아니다. 우리는 오직 여호와께만 피해야 한다. 

8. 오직 하나님만이 지금의 이 상황에서 벗어나게 하실 수 있는 분이다. 그 어느 누구보다 능력 있으시며, 온 우주를 창조하셨으며, 지치지 않으시는 유일하신 하나님이시다. 이러한 하나님을 두고 나의 얄팍한 지혜와 생각을 믿는 것은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우리를 사랑하셔서 그 품에 피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두고 다른 것에 나의 몸과 영혼을 맡기는 일은 얼마나 어리석은가? 하지만 또 얼마나 자주 그러한 일이 발생하는가? 

9. 호세아의 이러한 선택은 북이스라엘이 결국 앗수르에게 멸망하게 되는 단서를 제시하였다. 하나님이 아닌 것을 의지하는 것은 망하는 길이다. 나도 마찬가이다. 많은 순간 내 잔머리와 내 생각을 의지하고 그것을 붙들고 살아가지 않는가? 여호와께 피하자. 여호와께 피하자.

10.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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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하 15:32-38 연약함과 불순종이 흘러갈 때...

 

  1. 본문은 북이스라엘에서 남유다로 넘어왔다. 유다 왕 웃시야의 아들 요담이 왕이 되었고 (32절), 그는 웃시야의 모든 행위대로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다 (34절). 

  2. 하지만 모든 것을 하나님 앞에서 잘 했던 그가 하지 않은 유일한 것은 "산당을 제거하기 않은 것" (35절) 이었다. 그가 순종하지 않은 것은 단 한 가지였지만, 이 한 가지 불순종은 그의 백성들로 하여금 여전히 '산당에서 제사를 드리며 분향하게' 만들었다 (35절).

  3. 예루살렘의 하나님의 성전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에 따라 예배 드리도록 한 것이 아니라 각자가 원하는 산당에서 각자가 원하는 방법으로 예배 드리도록 방치한 것이다. 

  4. 리더에게 주어지는 무게가 더 크게 느껴진다. 단 하나의 불순종이었지만 리더의 불순종은 백성들로 하여금 다른 길로 가게 만드는 추진력이 된 것이다. 

  5. 자주 두렵게 느껴진다. 선교사로써, 아빠로써, 남편으로써 내가 서 있는 자리가 무겁게 느껴진다. 나의 연약함이 나의 불순종이 단순히 나의 연약함과 불순종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공동체에게, 가족들에게 영향이 흘러 가는 것을 자주 보게 되기 때문이다. 

  6. 내가 스스로 하나님께서 주신 계명을 잘 지키겠다고, 리더의 자리에서 더 순종하겠다고 내가 결정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얼마나 많은 실패를 맛보았는가? 내 결정으로 내 의지로 할 수 있다면 리더의 자리도 뭐가 두렵겠는가? 

  7.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마 5:17 결국 모든 율법을 완전하게 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피해야만 한다. 그 분 안으로 피하고, 그 분이 성취하신 것들을 내가 보며, 그 분의 뒤를 따라 갈 때에만 더 이상 무거운 짐은 내게 남지 않게 되는 것이다. 

  8.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마 11:29 내 힘으로 하려고 아둥바둥 하며 그 무게에 못 견뎌 넘어지는 삶이 아니라 모든 율법을 완전하게 하시고, 우리에게 참 쉼을 주시는 그 분께 가야만 쉼을 얻을 수 있고, 그 분을 신뢰함으로 순종할 수 있다. 

  9. 오늘도 더 그 분 안에 거하고, 그 분께 배우며, 그 분을 신뢰함으로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겸손하게 그 분을 더 따라갈 수 있는 하루가 되기 원한다. 내가 율법을 완전하게 할 수 없다. 완전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율법뿐만 아니라 연약한 내 삶을 더욱 더 온전하게 하실 것이다.

  10.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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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하 15:23-31 죄와 반역, 복수의 사슬을 끊으려면...

 

  1. 어제 살룸 왕을 한 달 만에 반역하고 왕이 되었던 므나헴이 죽게 되었는지 그 뒤를 이어 그의 아들 브가히야가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다 (23절). 하지만 그 나라는 굳게 서지 못하였다. 

  2. 왜냐하면 그아들 브가히야 역시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다.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이스라엘로 범죄하게 한 느바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에서 떠나지 아니한지라" (24절)

  3. 죄는 죄를 낳고, 반역은 반역을 부르고, 복수는 또 다른 복수를 낳는다. 끝도 없는 악의 악순환이 이스라엘 왕국에서 벌어졌다. 결국 이 죄의 악순환을 의의 선순환으로 바꾸기 위해서는 악을 악으로 죄를 죄로 갚는 것이 아니라 악을 그대로 모두 받아주되 다시 갚지 않고, 죄를 그대로 받아주되 다시 갚지 않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는 것이 필요하다. 

  4. 이스라엘에는 그럴 수 있는 왕이 혹은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지금도 없다. 나에게 무엇인가 해꼬지를 하면 그래도 갚아 주고 싶고, 욕하고 싶은 것이 나의 모습이다. 

  5. 오늘 태국에서 면허증 갱신을 하러 갔다. 좀 말도 안되는 트집을 잡으면서 딴지를 걸었다. 화가 나기 시작했다. 잘 풀리지 않았다. 이스라엘 왕가처럼 죽이고 배신하고 하는 정도의 일이 아닌 그저 이해가 되지 않는 행정 처리에도 분이 쌓이는게 나의 모습이다. 

  6. 그래서 내 힘으로 끊을 수 없는게 죄의 사슬이고, 악순환의 고리이다. 이스라엘 왕가와 같았던 내 삶에 그 고리를 끊으실 수 있는 분이 이미 오셨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7. 그는 "상한 갈대를 꺽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실로 정의를 시행할 것이며" (이사야 42:2)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가 나음을 받았도다" 사 53:5

  8. 그 분께 기대야 한다. 그 분 안에서만 악순환의 고리, 죄의 사슬이 끊어질 수 있다. 그 분만이 다시 갚아주시지 않으시고 온전히 우리의 모든 죄를 담당하셨기 때문이다. 풀리지 않는 마음도 상한 마음도 그 분 안에 드려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고서는 누구도 해결할 수 없는 문제이기에 오늘도 상한 마음과 문제를 가지고 그 분 앞에 나아간다. 

  9. 그 분을 더욱 더 신뢰하며, 사랑하며, 그 분 안에서 죄의 사슬을 끊고 사랑의 사슬, 의의 사슬 안으로 들어가게 되길...

  10.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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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하 15:13-22 그리스도로 인해 의인의 자리에서 서게 된 나

1. 살룸이 사마리아의 왕이 되었다. 그가 왕으로 지낸 시간은 한 달이었다. 13절에 시작은 '유다 왕 웃시야 제 삼십구년'으로 시작된다. 유다와 이스라엘이 너무 대비된다. 

2. 웃시야는 39년째 다스리고 있는데, 살룸은 왕이 되자 말자 1달 만에 반역으로 죽게 된다. 마치 의인의 삶과 악인의 삶이 대비되는 것 처럼 말이다. 

3. 물론 악한 왕도 오래 살 수 있고, 선한 왕도 반면에 짧게 살 수도 있다. 단순히 오래 사는 것에 관한 것이 아니라 하루 하루 살아가는 삶에 관한 것이다. 살룸이 왕이 되고 나서 얼마나 불안했을까? 자기 목숨을 노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을지 잘 알고 있지 않았을까? 그가 편하게 잠이나 잘 수 있었을까? 절대 그러지 못했을 것이다. 모든 것이 두렵고 염려가 되었을 것이다.  

4. 반면에 웃시야 왕은 어떠했는가? (물론 웃시야 왕도 강성하여지매 교만해진다) 그는 편안하게 잤을 것이다. 그의 목숨을 노리는 사람이 없으니 편하게 자고 편하게 일어났을 것이다. 시편은 이러한 모습을 보기라도 한 듯 이렇게 말하고 있다. 

5.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 (시 127:2) 우리가 살아가는 삶은 우리의 노력이 모든 것을 결정하지 않는다. 내가 열심히 노력한다고 해서 모든 것이 잘 되는 것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어느 편에 서 있느냐의 문제이다.

6. 하나님 편에 서 있는가? 아니면 하나님 반대 편에 서 있는가?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의 자리에 내가 서 있는가? 아니면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자를 바라보며 시기하며 질투하는 자의 자리에 서 있는가? 

7. 어느 자리에 서 있느냐가 두려움으로 하루 하루가 지옥같을 수도 있고, 매일 매일을 꿀잠을 잘 수도 있다. 나는 지금 어디에 서 있는가? 의인의 자리인가? 악인의 자리인가? 

8. 내가 꿀잠을 잘 수 있는 이유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 나같은 악인의 자리에 서 있는 자를 조건 없이 불러 주셨다. 조건 없이 사랑해주셨다. 두려워 잠들 수 없는 자를 불러 잠을 주셨다. 샬룸 같은 자였지만 웃시야 같이 살 수 있게 하셨다. 이 모든 것이 그리스도의 은혜이다. 

9. 내가 서 있는 자리를 기억하자.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그리고 은혜로 말미암아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음 (요 5:24)을 또한 기억하자. 불안이 아니라 평안 안에 거할 수 있도록 하신 그리스도만 붙드는 하루가 되기를 원한다. 

10.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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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20. 7. 29. 1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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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하 13:1-13 말하기 보다는 거하기!!

1. 북 이스라엘에서 여호아하스가 왕이 되었다. 다윗의 자손으로의 모든 정통성은 남 유다에게 있었지만 하나님께서는 북 이스라엘도 사랑하셨고, 하나님의 눈은 그들에게 가 있었다. 

2. 하지만 여호아하스 왕이 한 일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다 (2절). 하나님은 이런 그들을 아람 왕 하사엘의 손과 그의 아들 벤하닷의 손에 넘기셨다 (3절). 그들의 손에 넘기셨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학대함을 보셨고, 또한 여호아하스 왕의 기도를 들으셨다 (4절).

3. 그리고 기도만 들으신게 아니라 ‘구원자’를 보내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람 사람의 손에서 벗어나 전과 같이 자기 장막에 거하게 하셨다 (5절).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풍성하게 자신의 백성들을 돌보신다. 그들이 악한 길에 있었더라도 부르짖기만 하면 그들의 기도를 들으신다. 그게 우리 하나님이시다. 

4. 하지만 그런 하나님과 달리 여호아하스 왕은 다윗의 길이 아니라 여로보암 집의 죄에서 떠나지 아니하고, 그 안에서 따라 행하며, 아세라 목상을 그냥 두었다 (6절). 그 결과는 아람 왕이 백성을 멸절하였다 (7절). 

5. 만약 여호아하스가 다시 간구하였더라면 어떤 일이 있었을까?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이 멸절되는 것을 그대로 두고 보셨을까? 그랬을거라 생각되지는 않는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시선을 두시는 좋으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6. 악한 길을 간 것도 문제이지만 간구함을 멈춘 것이 더 문제였다. 하나님에 대한 이해의 부족이었든지, 자신들의 악함에 대한 부끄러움이었든지… 그것이 무엇이든 우리의 기도를 멈추게 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끊임없이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한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7. 그런데 우리가 간구를 쉬지 않고 할 수 있는 존재들은 아니다. 우리의 기도는 언제나 멈출 수 있고 그 때마다 우리는 넘어진다. 우리는 우리를 위해 계속해서 중보해주시는 분이 필요하다. 그 분이 바로 예수님이시다.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 계셔서 그들을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히 7:25

8. 우리를 위해 항상 살아계셔서 간구하시는 예수님만을 의지해야 하고, 그 분만을 믿고 신뢰해야 한다. 그 분이 우리의 연약함을 담당하셨고, 우리를 위애 기도하고 계신다. 

9. 나의 삶에 얼마나 많은 연약함이 있는가? 나의 삶에 얼마나 많은 부족함들이 있는가? 그 분이 우리를 위해 대신 이 모든 것을 감당하셨다. 내가 하여야 할 것은 내가 싸워서 이기고, 나의 옳음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그 분 안에 있는 것이다. 나를 위해 늘 간구하시는 예수님께서 일하시고, 예수님께서 나를 돌보고 계시다는 것을 믿고 오늘을 담담히 묵묵히 걸어가는 것이다. 

10. 말하기 보다는 거하기!!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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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20. 7. 28. 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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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하 12:1-21 주님께 뜨거운 자, 묻고 동행하는 자

1. 한 사람의 인생을 쉽게 정의할 수는 없다. 이해할 수 없는 다양한 요인들이 인생에는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열왕기하 12장에 나오는 요아스 왕의 인생을 보며 그가 다윗과 같은 방향을 가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2. 즉 굳이 그의 인생을 정의하자면 계시록에서 편지를 보낸 라오디게아 교회와 같아 보인다. 계 3:15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3. 그는 제사장 여호야다가 그를 교훈하던 시절에는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했으나 (2절) 우상숭배를 하는 산당은 제거하지 못했다 (3절). 성전수리를 함에 있어서도 제사장들에게 강하게 요구하지 못했다 (5절). 

4. 그리고 아람 왕 하사엘이 예루살렘을 향해 올 때, 그는 성물과 왕궁의 금을 보내 (18절) 화친을 청하였다. 그 어디에도 하나님께 묻는 다윗의 모습은 없다. 열심히 살았고, 때로는 좋은 일도 했으나 하나님께 묻지는 않았다. 

5. '다윗의 길로 갔느냐 그렇지 않으냐'는 왕들의 삶을 평가하는 중요한 기준이었다. 다윗은 부지런히 물었다. 다윗은 부지런히 하나님과 함께 걸어가려고 애썼다. 

6. 요아스 왕과 같이 때로는 좋은 일도 하고, 착하게 살고, 또 열심히도 살지만 하나님께 묻지 않고 하나님과 동행하지 않는 삶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 삶임을 배운다. 미지근한 그의 삶을 보며 미지근한 것이 어디에도 좋지 않음을 또한 배운다. "하나님께 뜨겁게 살아야 한다."

7. 내 삶에도 이러한 미지근함이 얼마나 많은가? 때로는 좋은 일도 하고, 착하게도 살고, 열심히도 살지만 나는 지금 하나님께 뜨거운가? 하나님께 묻고, 하나님과 동행하고 있는가? 나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게 된다. 그리고 오늘도 정말 뜨겁게 살기 원한다. 

8. 미지근하게 살아가기에는 삶은 짧다. 미지근하게 살아가기에는 시간은 화살같이 날아간다. 마지막에 주님 앞에 섰을 때, 나의 인생에 대한 평가가 요아스와 같지 않기를 원한다. 그저 착하고, 성실하고, 애쓰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께 성실하게 묻고, 하나님과 성실하게 동행하는 자가 되기 원한다. 

9. 교회 개척을 준비하며 외적 내적으로 많은 일들이 있는데, 더 주님께 물으며 더 주님과 동행하는 내가 되기 원한다. 미지근한 자가 아니라 주님께 뜨거운 자가 되기 원한다. 

10.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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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Thinking)/Meditation2020. 7. 23. 1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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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하 9:27-37 말씀의 성취가 나에게 주는 두려움을 넘어…

1. 예언은 성취되었다. 유다의 왕 아하시야도 죽었고 (27절), 이세벨도 죽는다. 이세벨을 장사 지내려고 하니 이세벨의 몸통이 보이지 않는다 (35절).

2. 그 이유는 말씀이 성취되었기 때문이다. 엘리야가 예언한대로 이스르엘의 토지에서 개들이 먹고 있기 때문이다 (36절). 이렇게 하든 저렇게 하든 예언된 말씀이 성취된다. 

3. 말씀이 성취된다는 것은 기쁨과 동시에 두려움이다. 우리가 연약하기 때문인데 주님 안에 있을 때에는 말씀 성취에 대해 깊은 갈망과 감사를 가지고 있지만 우리의 삶이 우리가 생각하기에도 악하며 주님의 길 가운데로 가고 있지 않을 때는 두려움이 생기게 된다. 

4. 하나님께서 예언하신 말씀을 성취하지 않으시고 바꾸시는 경우가 있었다. 요나가 심판을 전한 니느웨가 회개하였을 때 하나님은 그 마음을 돌리시어 예언된 말씀을 이루지 않으셨다. 우리가 회개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말씀이 성취된다. 

5. 우리의 연약함 때문에 말씀이 성취되는 것이 두려울 때가 있다. 하지만 결코 두려워할 이유는 없다. 우리의 잘함이나 잘못함과 상관없이 말씀을 성취해주신 분이 계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연약함 안에 죄 안에 거하기 때문에 언제든지 두려워하고 언제든지 바뀔 수 있는 사람이지만 그 모든 말씀이 한 분 안에서 성취되었기 때문에 (마 5:17-18) 우리는 더 이상 두렵지 않다. 

6. 우리의 잘잘못을 따져서 말씀이 적용되지 않는다. 우리가 말씀을 성취하신 그 한 분,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 있느냐, 그 분 안에 그리고 그 분이 내 안에 있어 열매를 맺어 가느냐가 중요한 것이지 더 이상 우리에게는 정죄함이 없다 (롬 8:1).

7. 악인들의 최후와 말씀의 성취 속에서 마음이 편하지만은 않다. 왜냐하면 내가 의인이라고 자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내가 의로우며, 주님만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8. 하지만 그런 나를 위해 이 땅에 오셔서 모든 율법의 계명을 성취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기에 나는 안심할 수 있다. 내가 의롭든지, 죄인이든지 내가 그 분을 신뢰하고, 그 분 안에 거하면 되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더 깊이 알아가고, 더 깊이 만나고 더 깊이 사랑하기 원한다.

9.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만 하나님의 말씀이 내 삶 속에 더욱 더 성취되기 원한다. 

10.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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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