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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 22:39-46 기도는 하는 (Doing) 것이다. 

1. 예수님의 기도는 뭐가 달라도 우리와 달라야 하지 않을까? 그래도 하나님의 아들이고, 하나님의 본체이시니까..

2. 그런데 인간의 모습으로 오신 예수님의 기도는 특별할게 없었다. 우리와 같은 성정의 사람으로 오셨기에 특별할게 없었다. 오히려 지극히 인간적인 모습으로 기도하셨다. 

3. 예수님 또한 습관을 쫓아 기도하러 가셨고, 예수님 또한 자신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쫓아 따라가게 해달라고 기도하셨다. 

4. 기도는 나도, 하나님의 아들도 똑같이 습관을 쫓는 노력 없이는, 자신을 비워냄이 없이는 어려운 것임을 깨닫는다. 

5. 기도에 있어서 더 중요한 것은 내가 누구인가 보다도 (나인가? 하나님의 아들인가?) 기도의 자리에 앉으려고 하는 습관과 나를 비워내고 하나님을 내 삶에 채우려고 하는 나의 태도가 더 중요함을 깨닫는다. 

6. 또한 기도에 중요한 것은 43절을 보니 위로부터의 도우심, 즉 성령의 도우심이다. 내 힘으로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위로부터 오는 능력, 성령의 충만함으로 기도해야 한다. 예수님도 천사가 하늘에서 나타나 그 기도를 도왔다. 나 역시도 기도를 내 힘으로 하려는 태도를 버려야 한다. 성령의 도움 없이는 기도할 수 없다. 

7. 예수님도 인간의 몸으로 오셨기에 나와 같이 기도하는게 힘들었다(?)고 생각하니 위로가 된다. 하지만 예수님은 나와는 다르게 습관을 쫓아 기도하셨고, 자신을 비워내시기까지 순종하셨다. 

8. 하지만 결국 기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기도를 진짜로 하는 것이다. 기도에 대한 책을 많이 읽는게 중요한게 아니고, 기도가 어떤 것임을 아는 것이 중요한게 아니라 기도는 정말로 해야 하는 것이다. 나도 지난번에 교회개척 집중과정에서 배운 기도의 방법들이 있었지만, 요 몇일은 그것을 열어보지도 못했다. 오늘은 기도하자. 그리고 이 것을 나의 습관으로 만들어가자. 기도는 해야 하는 것이다.

9.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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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 22:24-38 나도 짜장면!!

1. 예수님은 성찬식을 통해서 자신이 죽을 것과 제자 중 한 사람이 자신을 배신할 것을 어제 본문을 통해 말씀하셨다. 그런데 24절의 시작은 그들 사이에 '누가 크냐’ 라는 다툼이 일어났다. 

2. 그러면서 그들에게 설명하시길 ‘앉아서 먹는 자가 크냐 섬기는 자가 크냐?’ 라고 28절에서 물으신다. 그리고 대답하시길 ‘앉아서 먹는 자가 아니냐?’ 라고 대답하신다. 예수님도 세상의 법칙과 방법에 대해서는 잘 아신다. 그런데 그 다음이 중요하다.

3. ‘그러나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 라고 대답하신다. 마치 영화에서 조폭 두목이 중국집에 가서 여기서 너희 먹고 싶은거 다 먹어 라고 말 한 이후에 ‘난 짜장면’ 이라고 말 한 것과 동일한 느낌이다. 

4. 세상은 당연히 앉아서 먹는 사람이 크고, 나도 너희도 잘 알고 있지만, 스승인 나는 서서 섬기는 자리에 있겠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제자들이 얼마나 부끄러웠을까? 그들의 '누가 더 크냐'의 논쟁이 얼마나 부질 없는 짓인가? 

5. 마 20:28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예수님은 말로만 섬기겠다고 하신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명을 주시기 까지 우리를 섬기셨다. 어떠한 갈등이나 어려움이 닥쳤을 때 기억해야 할 부분이다. 

6. 높아지려고 하지 않고, 대접 받으려고 하지 않고 오히려 먼저 움직이고, 먼저 일어나고, 먼저 섬기면 되는 것이다. 어느 순간에든 ‘나는 짜장면’을 외치신 예수님을 생각하며 그 분이 걸어가신 길을 가면 된다. 

7. 코로나 사태로 인해 아이들과 함께 24시간을 함께 하고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나는 짜장면’을 외치신 예수님만 기억하고 싶다. 내 시간을 포기하고 싶지 않고, 내 공부, 내 사역을 포기하고 싶어하지 않은 나를 넘어서 ‘나도 짜장면’을 외치며 그 뒤를 따라가고 싶다. 

8. 나는 섬기는 자이다. 나는 준비하는 자이다. 그리스도께서 섬김의 본을 보이신대로 살아가는 자이다. 높은 자리에 앉으려 하지 말고, 편한 자리에 앉으려 하지 말고, 쉬운 자리에 앉으려 하지 말자. ‘나는 짜장면’을 외치신 그 분의 뒤를 쫓아 ‘나도 짜장면’을 외치며 오늘도 엉덩이가 가벼운 자가 되자. 아이들을 위해 아내를 위해, 그리고 그의 나라를 위해!!

9. ‘나도 짜장면’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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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Thinking)/Meditation2020. 3. 31. 1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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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 22:14-23 남은 자의 결정

1. 성경은 항상 죄에 대해서 피의 제사를 요구한다. 즉 그 죄를 사하기 위해서는 희생제물이 필요한 것이다.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세운 언약이다. 그래서 예수님도 유월절 어린양으로 오셔서 이제 유월절 절기에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하시고 본인의 피로 새 언약을 세우신다 (20절). 새 언약의 내용은 예수님의 피를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2. 예수님이 이제 하나님께 완전한, 단번에 드려지는 희생제물이 되시겠다는 표현이셨다. 그리고 그 분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자신의 피로 해결하시고, 우리 모두가 하나님께 나아갈 산 길을 열어 주셨다. 

3. 예수님은 어떤 상황이 있든 묵묵히 그 길을 걸어가셨고, 하나님의 진노의 잔을 마시는 어린 양이 되기로 하셨다. 예수님은 본인이 이 땅에 오셔서 해야 할 모든 사명을 완수하시기 위한 마지막 걸음을 걸어 가신다. 

4. 우리 가정이 태국에 선교를 시작하면서 부터 사랑해 주셨던 온누리 선교회의 회장님 백문도 장로님의 부고 소식을 오늘 아침에 들었다. 일을 하시다가 추락사 하셨다고 한다. 소식을 듣고, 마음이 참 아프고 무거웠다. 언제나 온유하시고, 선교사들을 참으로 아껴주시고, 늘 사랑으로 대해주셨던 분이셨다. 마지막으로 뵈었던 것이 지난 3월 초 아버지 빈소에서 였다. 

5. 그런데 갑자기 하나님께서 데려가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왜’라는 질문이 계속 들었다. ‘왜’ 좋은 분들을, 아직 이 땅에서 할 일이 많으신 분을 하나님께서 데려가셨을까? 참 슬프고 아픈 일이다. 그리고 멍해지면서 내가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6. 예수님도 본인의 사명인 새 언약을 세우셨고, 그리고 이미 작정된대로 (22절) 자신이 지셔야 할 십자가로 가신다. 그리고 그 이후는 남은 자 들의 몫이다. 예수님은 작정대로 가셔야 했지만, 가롯 유다는 여전히 선택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여전히 예수님을 배신할 수도, 예수님을 팔지 않을 수도 있었다. 하나님께서 주신 자유 의지를 통해서 어떤 일도 할 수 있었다. 

7.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사용하셨던 수 많은 사람들은 다 주님께로 돌아갔다. 그리고 남은 것은 그 남은 자들의 몫이다. 평생을 태국을 비롯해 동남아시아, 방글라데시의 한센인 선교를 위해 애쓰시다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백문도 장로님의 삶을 보면서 남은 자인 내 삶이 어때야 할지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나도 어떤 일이든 선택할 수 있다. 백문도 장로님의 삶을 보았으면서도 그 분의 삶과는 상관없는 어떤 것도 선택할 수 있다. 

8. 하지만 남은 자로써 그 분이 한 평생 사랑했던 태국의 영혼들을 더 생각하는 자리로 나아가게 된다. 늘 선교사들을 먼저 생각하시고, 선교사들을 사랑하시며, 본인의 모든 것을 선교를 위해 아낌없이 드리셨던 장로님의 삶이 파노라마처럼 생각이 나며, 내가 이런 분들의 사랑과 헌신으로 이 자리에 서 있음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9. 그리고 남은 자로써 어떻게 이 땅에서 살아갈지를 다시 한번 결정하게 된다. “장로님 이제 그렇게 사랑하시던 하나님 곁에서 편히 쉬세요.. 저희가 장로님의 마음을 이어 받아 이 땅을 섬기겠습니다."

10. 저희 가정에게 이런 사랑과 헌신을 보여주시는 사랑하는 동역자 분들 참 감사합니다. 선교사로써 부끄럽지 않게 태국의 영혼들을 섬기며 살아가겠습니다.

11.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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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Thinking)/Meditation2020. 3. 30.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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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 22:1-13 하나님만 사랑하고, 하나님으로만 채우자

1. 자신을 위해 예수님을 배척한 두 무리의 사람이 보인다. 첫 번째는 대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다. 그들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권력과 그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을 사수하기 위해서 예수를 죽이기로 결정한다. 

2. 성경을 연구하고 안다고 했지만 성경이 증언하고 있는 그 한 사람, 예수를 직접 보고도 알아보지 못했다. 그들의 권력과 욕심과 그들이 옳다는 생각이 그들 자신에게 숨겨진 우상이었다. 그 우상을 사수하느라 하나님의 아들을 죽일 궁리를 했다.

3. 두 번째는 가롯 유다였다. 그는 혁명당원이었고, 유대나라의 회복을 꿈꿨던 사람이었다. 예수를 만났지만 그가 원하는 메시아가 아니었다. 로마를 무력으로 무너뜨리고 이스라엘을 회복시킬 그 메시아가 아니란 사실을 알자 그는 배신했다. 그에게 있는 이스라엘 국가의 회복이라는 우상을 사수하기 위해 하나님의 아들을 대제사장들과 서시관들에게 팔았다. 

4. 이러한 두 무리들을 뒤로하고 예수님은 유월절의 어린양이 되실 준비를 하고 계신다. 그것도 기꺼이 준비하고 계신다. 예수님은 말씀대로 유월절 어린양으로 죽기 위해 이땅에 오신 그 사명을 감당하려 하신다. 

5. 우상을 섬기는 두 무리의 사람들과 하나님만 섬기는 예수님이 대조된다. 우상을 섬기는 무리들은 그들의 우상을 지키기 위해서 무엇이든지 한다. 움켜쥐고 온갖 궁리와 방법들을 통해 그 우상을 붙들려고 한다. 

6. 반면에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하나님만 섬기는 예수님은 그 사명을 이루시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시고, 심지어 자신이 유월절 어린양으로 죽기 위해 준비하고 계신다. 얼마나 그 삶이 다른가?

7. 어제 한 교회에서 설교를 부탁받아 설교를 하고 왔다. 오랫만에 태국 사람들에게 설교할 기회가 생겨서 그런지 준비는 힘이 들었지만 참으로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모든 것이 위축되었다. 사역도, 생활도 모든 것이 다… 집에 있는 시간이 늘어났고, 아이들과 있는 시간이 늘어났다. 그런데 나의 모습이 예수님과 같이 내 시간과 삶을 아이들에게 내어주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우상을 붙들기 위해 아둥바둥 거리는 앞의 두 부류와 같은 모습이 더 많았던 것 같다.

8. 내가 지키려고 하는 나만의 우상은 무엇인가? 준비하고 있는 사역? 시간? 태국어 공부? 신학 공부? 정확하게 알지는 못하지만 분명히 좋은 것들이다. 하지만 이것이 절대적인 것이 되어서 내 삶을 주무른다면… 이것들을 사수하기 위해 다른 것들을 밀어내거나 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내 삶을 지배하는 우상이 되는 것이다. 예수님처럼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그 분이 주신 사명을 쫓아가기 위해 자신을 내어주는 삶을 살아야 하는데.. 내 모습은 그것과는 얼마나 다른가?

9. 하나님이, 그 사명이 내 삶을 움직이기를 원한다. 우상이 내 삶을 좌지우지 하지 않도록 주의하자. 숨겨진 우상들, 마음 속의 근원적인 동기들을 찾아내고, 그것들을 주님으로 채우자. 그래야 예수님처럼 움켜쥐지 않고 나를 기꺼이 내어줄 수 있다.

10.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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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Thinking)/Meditation2020. 3. 27. 1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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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 21:5-19 지금 욕먹는건 아니다

1. 예수님께서 무너질 성전에 대해 예언하고 계신다. 혹자는 이 부분을 단순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를 예언했다고 하고, 혹자는 예루살렘의 성전과 더불어 마지막 때를 예언했다고 말하기도 한다. 

2. 어떤 것을 예언한 것이든 신학적인 접근 보다는 본문을 집중해보면 사람들은 그 때를 분별하기 위해서 예수님께 그 일이 일어날 때의 징조에 대해서 묻는다 (7절). 

3. 적그리스도가 나타나고, 전쟁이 일어나고, 지진과 기근과 전.염.병. 이 있을 것에 대해서 말씀하시고,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들로부터 미움을 받을 것을 말씀하신다. 

4. 지금의 코로나 사태를 보면서 가장 먼저 들어오는 단어는 다름아닌 전염병이다. 자신을 신격화 한 이만희와 신천지도 생각이 난다. 그리고 여러가지 일을 통해 사람들로 부터 욕을 먹고 있는 기독교와 교회 생각도 난다. 지금의 상황과 어찌 이렇게 딱 맞는지… (그렇다고 지금을 마지막 때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만들어낸 상황도 있다고 보여지기 때문이다.)

5. 하지만 이런 우리에게 17절은 강하게 증거한다. “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인해 때로는 아니 자주 미움받을 용기도 필요하다. 

6. 난리와 소문, 미움과 혐오가 가득한 세상이다. 이러한 세상에서 ‘너희도 나와 같은 죄인이다’라고 말하는 우리에게 미움이 오는 것은 당연하다. 자기 스스로가 신이 되어 사는 사람들에게 '너희가 지금 우상숭배를 하고 있고, 너희에게는 진짜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하다' 라고 말하면 당연히 세상 사람들은 우리를 미워할 것이다.

7. 지혜가 필요하다. 내가 진리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진리를 어떻게 다른 이들에게 설득력있게 말할 것인지 지혜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들과의 사랑의 관계가 우선시 되어야 한다. 

8. 지금 기독교가 욕먹고 있는 이유 중에 하나는 욕하는 자들과 인격적인 사랑의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살아가는, 말하는 지혜가 없기 때문이다. 그저 멀리서 우리는 맞고, 너희들은 틀렸다고 말하니 그들로부터 욕을 먹는 것이다. 그들과의 사랑의 관계 안에서 그들이 들릴 수 있는 말로 복음을 전달할 수 있도록 그들 안으로 들어가야 하고 그들의 문화로 말해야 한다. 

9. 어쩌면 지금 이시간이 준비할 수 있는 시간이 아닐까? 이 상황이 끝나면 요이 땅 하고 달려가야 하니… 준비할 시간을 주신 것이 아닐까? 하나님의 절묘한 타이밍에 감사한다. 잘 준비되자!!!

10. 오늘도 샬롬

* 오늘 교회개척을 준비하는 중요한 모임을 가질 예정이었으나, 태국정부의 비상조치로 인해 한국 시간으로 7시에 온라인으로 첫 미팅을 가지기로 했습니다. 이를 위해서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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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20. 3. 25. 1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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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 20:27-40 살아도 내 하나님, 죽어도 내 하나님

1.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개인이 찾아와서 어려워 보이는 질문을 던진다. 그들은 형수취사제를 예를 들며 부활 이후 누가 누구의 아내가 될지를 궁금해 한다. 그래서 가능성이 아주 희박한 사례를 들며 죽은 자의 부활 이후를 묻는다. 

2. 예수님의 대답은 그들이 생각한 부활의 모습에 대한 전제가 틀렸음을 말한다. 부활의 삶은 지금 이 땅의 삶과는 완전히 다르다. 육을 입은 모습이 아니라 천사와 같이 영을 입은 모습으로 변할 것을 말씀하시고, 부활 이후의 삶은 죽음도 없음을 말씀하신다.

3. 그리고 38절에서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 자의 하나님이심을 선포하신다. 아브라함도 이삭도 야곱도 모두 죽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그들의 하나님이시다. 왜냐하면 그들도 주 안에서 마지막 때에 부활할 자들이기 때문이다.

4. 믿음의 조상들이 살았을 때에도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이셨고, 이미 죽어서 마지막 부활을 기다리는 지금도 그들의 하나님이셨다. 마찬가지로 이 땅에서 살아가는 동안에도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시고,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같이 죽고 나서도 부활의 주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신다는 사실이다. 

5. 내가 어디에 있든지, 내가 죽든지 살든지, 하나님만이 오직 나의 하나님이시다. 이 사실은 결코 변하지 않는다. 우리는 장차 부활하겠지만 부활하지 않고 살아가는 이 땅에서의 삶도 역시 주 안에 있는 자들이라는 사실이다. 

6. 지금 내가 생명을 가지고 살아가는 이 순간 가장 사랑해야 하는 분이 하나님이시고, 내가 생명을 가지고 살아가는 이 순간 내 삶을 이끌어 가시는 분도 바로 육신을 입고 이 땅으로 오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리고 그것은 죽어서도 마찬가지이다.

7. 지금 태국이 무척 어려운 상황에 서 있다. 정부가 내일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한다고 예고했다. 태국이 어떤 모습으로 어떻게 돌아갈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가장 과격한 안은 허가 받지 않은 모든 사람들을 집에 자가격리하여 주거지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하고, 마트나 모든 상점들이 폐쇄될 것이란 이야기도 나온다. 좀 더 유연한 안은 저녁부터 새벽까지 통금 금지를 하고, 종교집회를 비롯한 모든 집회 금지로 모임 자체를 금하여 코로나 사태를 통제 할 것으로 보여진다. 

8. 이로 인해 요 몇일 참 몸과 마음이 힘들었다. 저렇게 먹어대는 아이들을 어떻게 계속해서 데리고 있을 것인지.. 집 밖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상황 속에서 아이들을 어떻게 돌볼 것인지.. 정보가 부족하고, 외국인으로써 이 땅에서 어떻게 견디어 낼 것인지.. 아무래도 가장이다 보니 상황의 무게가 더 크게 느껴졌던 것 같다. 하지만 오늘 본문을 읽으면서 다시 한번 내 삶의 무게를 주님 앞에 내어놓게 된다.

9. 내가 살든지 죽든지 오직 하나님만이 내 하나님이시고, 나도, 아내도 아이들도, 이 태국 사람들도 다 주 안에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산 자의 하나님께서 산 자들을 어찌 돌보지 않으시랴? 산 자의 하나님께서 몸을 입고 있는 자들의 기도를 어찌 듣지 않으시랴? 산 자의 하나님께서 어찌 그들의 백성들을 불쌍히 여기지 않으시랴…

10. 너무 무거운 짐은 주님 앞에 내려놓자. 어차피 내가 한치도 상황을 바꿀 수 없지 않은가? 그저 산 자의 하나님 되시는 그 분 안에 거하자. 그것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다. 산 자의 하나님을 더욱 더 배울 수 있는 시간이 되길.. 그 분의 사랑 안에, 그 분의 안식 안에 거하는 시간 되길..

11.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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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20. 3. 24. 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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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 20:19-26 모든 것이 주님의 것

1. 22절에 “우리가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않으니이까 하니” 라고 그들은 예수님을 곤란에 빠뜨릴  목적으로 질문했다. 그리고 혹시나 혹시나 정말로 궁금했을 수도 있다. 

2. 이스라엘은 로마의 속국 이었지만, 그들은 그 모습대로 살기 원치 않았고 계속해서 독립을 하려고 했었다. 그러니 로마 정부에게 세금을 바치기 싫었던 그들에게 세금을 바쳐야 하는지 하지 않는지는 그들에게 중요한 이슈였다.

3. 예수님의 말씀은 25절에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라고 말씀하셨다. 우문현답이었다.

4. 그렇다면 이제 중요한 것은 어느 것이 가이사의 것이고, 어느 것이 하나님의 것인가? 를 구분하는 일일 것이다. 그것을 구분해야 옳게 드릴 수 있게 되니까… 가이사는 이제 없으니 나 스스로에게는 조금 다른 질문을 던져야 할 것 같다. 내 삶에서 어느 것이 나의 것이고, 어느 것이 하나님의 것인가? 이것이 나의 질문이다. 

5. 생각해보면 십일조를 드리는 일도, 이 모든 것이 주님의 것임을 고백하기 위해 1/10을 주님께 다시 드리는 것이고, 나는 주께로 왔고, 아이들도 주께로 왔고, 내 사역도 주님이 인도하고 계시고, 내가 한 것이 없다고 늘 고백하지 않는가? 

6. 내 삶을 곰곰히 곱씹어 봐도 내 것이라고 구분하여 주장할 것이 없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롬 11:36 말씀처럼 나의 존재 뿐만 아니라 모든 만물이 그 분으로 부터 시작되었고, 그 분이 움직이고 계신다.

7. 그렇다면 나는 누구의 것인가? 내 삶은 누구의 것인가? 나의 모든 말과 행동은 누구에게 드려져야 하는가? 바로 우리 주님께 드려져야 한다. 나는 그 분께 드리고 있는가? 아니면 이 질문을 했던 사람들처럼 요리조리 빠져나갈 궁리만 찾고 있는가?

8. 모든 것이 불확실한 시간이다. 그 어느 누구도 이 사태가 언제 종식될지, 언제 어떤 모습으로 해결될지 알지 못한다. 오직 주님만 아신다. 그 주님께 내 삶과 시간과 말과 행동과 생각과 그 모든 것을 드려야 한다. 그것이 오늘 말씀에 합당한 삶이다. 

9. 오늘도 그 말씀에 합당하게 하루를 살아가기 원한다. 주님의 것을 내 것이라 주장하지 않으며, 주님께 드리는 삶을 살기 원한다.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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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Thinking)/Meditation2020. 3. 23. 2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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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 20:9-18 반복되는 죄의 역사를 끊으려면...

1. 포도원 농부들은 악한 자들이었다. 원래 자신의 것이 아닌 것들에 대해서 자신의 것으로 하기 위해서는 정당한 댓가가 요구되었지만 그들은 그러한 댓가를 지불하지 않기를 원했다.

2. 그 결과 그들은 정당한 권리를 가진 주인의 종들을 몹시 때리고 능욕하고, 상하게 했다. 욕심이 죄를 부른 것이다. 

3. 이에 반해 포도원 주인은 이러한 악한 농부들에 대해서도 선으로 대한다. 종들을 세 번이나 보내고, 그리고 마지막에는 그의 아들을 보낸다. 물론 농부들은 그의 아들이라고 해서 다르게 대하지 않고 오히려 죽여서 유산을 차지하려고 한다. 

4. 이스라엘의 역사의 요약이다. 원래 우리의 것이 아닌 하나님의 것을 탐했던 아담으로 인해 모든 인류는 죄 안으로 떨어졌고, 하나님은 이런 우리에게 수 없는 선지자들을 보내셨다 (세 번 종을 보낸 것은 이스라엘이 3을 특별한 완전 수로 취급하는 것으로 이해하자).

5. 그리고 마지막으로 결국 아들을 보내셨고, 그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우리는 아니라고 하고 싶지만, 우리의 죄는 그 아들을 십자가에 매달아 죽게 만들었다. 

6. 역사는 반복된다. 이제 더 이상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보내지시 않지만 우리는 매우 자주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십자가에 매단다. 내 욕심과 나의 유익을 위해서 그리스도를 부인하거나 이용하거나 거부한다. 

7. 16절 마지막 부분에 보면 “사람들이 듣고 이르되 그렇게 되지 말지어다” 라고 대답한다. 맞다. 그렇게 되면 안된다. 그런데 이 죄의 역사는 계속해서 반복된다. 

8. 지금 내 삶에서도 계속 반복된다. 이유는 단순하다. 욕심이다. 내 것이 아닌 하나님의 것을 내 것 처럼 사용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 삶에 악이 생기고, 시험에 들고 넘어진다. 

9.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돌려 드리면 해결되는 문제 아닌가? 오늘 내 삶에 하나님의 것인데 내가 붙들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특별히 나는그리스도의 은혜 가운데 진정으로 거하고 있는지를 고민해 본다. 은혜가 없으면 죄의 역사는 반복된다. 

10.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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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Thinking)/Meditation2020. 3. 20. 1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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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 19:11-27 지혜로운 종이 되자

1. 예수님은 이미 임하였으나 아직 완전히 임하지 않은 하나님 나라를(11절) 살아가는 백성들의 삶이 어떠야 하는지를 오늘 비유를 통해 말씀하고 계신다. 

2. 귀인이 왕위를 받아 오려고 먼길을 간 동안 그 귀인이 왕됨을 원치 않은 세상에서 장사하는 종으로 우리를 비유하고 계신다 (12-14절). 우리는 왕이 되려는 귀인의 종이고, 세상은 그 귀인을 싫어하기에 당연히 우리도 싫어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를 싫어하는 그 세상에서 장사를 해서 이윤을 남겨야 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3. 우리를, 우리의 주인을 싫어하는 세상에서 우리가 장사를 해서 남기려면 어때야 할까? 아마도 상품이 좋아야 할 것이고, 가격 경쟁력도 있어야 할 것이다. 주인이나 내가 그 주인의 종과 상관없이 그들의 구매욕을 자극할 만한 매력이 있어야 그들이 우리의 물건에 관심을 가지고 사게 될 것이다. 

4. 그리고 우리가 어떻게 장사하였는지는 바로 우리의 열매의 풍성함으로 알게 되고, 주인은 마지막 날에 우리가 남긴 열매의 풍성함을 통해 우리를 심판하신다.

5. 우리는 이 땅에 사는 동안 얼마나 지혜롭게 물건을 팔지를 계속 고민해야만 한다. 그래야 풍성하게 이윤을 남길 수 있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악한 종은 그러지 않았다. 그는 주인을 두렵게 여겨 장사를 하지 않고 자신의 가진 것을 수건에 싸서 보관해 둔다. 주인을 싫어하는 세상 사람들처럼 자신도 주인을 두려워하여 장사를 포기하고야 말았다. 

6. 완전하게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 까지 우리의 삶은 지혜로와야 한다.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싫어할지라도 지혜롭게 그들이 원하는 것들과 기호를 조사해서 그들이 우리의 것을 사도록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그들이 싫어하는 주인을 우리도 싫어하고 두려워하고 할 수 없이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주인을 가장 사랑해야 한다. 

7. 지금 코로나 사태에서 교회들의 대응이 믿는 자들의 대응이 바로 이 종들과 같아야 하지 않을까? 본질이 아닌 것에는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들에게 우리 왕을 소개하기 위해서 한 걸음 물러섰어야 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물론 각 교회의 상황과 사정이 다르기에 뭐라고 할 수 만은 없다. 

8.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이제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이다. 코로나 사태에 대해 너무 낙관적이어서도 안되고, 또 너무 이로 인해 위축되어서도 안된다. 지혜로운 종들과 같이 이 사태를 넘어 그 이후를 고민해야 하고, 앞으로 어떻게 사역을 해야 할지, 그들에게 나의 왕을 어떻게 소개할지를 계속해서 고민해야 한다. 

9. 나는 그들에게 매력적인가? 그들에게 필요한 것을 주고 있는가? 그들이 정말 내가 가진 물건, 그리스도를 필요로 하게 느끼도록 그들의 죄성을 말하고 그들의 문화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가 이해되도록 말하고 있는가? 

10. 악하고 게으른 종이 되지 말자. 시간을 아끼고, 지금 이 시간을 정성껏 살아가자. 

11.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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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Thinking)/Meditation2020. 3. 19. 1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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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 19:1-10 진정한 회개

1. 익숙한 삭개오 이야기이다. 삭개오는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나무로 올라갔고, 예수님은 그러한 그를 만나 주셨다. 별다를게 없는 은혜가 넘치는 이야기이다. 

2. 그런데 예수님께서 삭개오에게 구원을 선포한 시점이 마음에 남는다. 그것은 그가 예수님을 만난 그 순간이 아니라 그가 진정으로 회개한 그 순간이었다. 

3. 8절은 그의 회개를 보여준다.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4. 그 시대의 세리의 삶을 보면 그가 다른 사람들의 것을 속이지 않았을리 없다. 그는 로마에서 정한 세금 이상의 세금을 거둬야만 그것이 자기 수당이 되었기 때문이다. 

5.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고, 속여 빼앗인 일이 있으면(필히 있는데) 그것을 네 갑절이나 갚겠다고 말한다. 한 마디로 이제 거지로 돌아가겠다는 말과 다름없다. 그는 자신의 악행을 진정으로 회개하고 돌이켰다. 바로 그 때 예수님은 그에게 구원을 선포하신다. 

6. 우리는 분명히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받는다. 그 사실은 절대로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의 삶 또한 분명히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인해 변화해야 한다. 

7. 회개는 입술로만 하는 것이 아니다. 회개는 삶이 변하는 것으로 그것이 진정한 회개인지 아닌지를 평가할 수 있다.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나는 오늘 진정으로 회개했는가? 나는 진정으로 주님 앞에서 내 삶을 돌이켰는가? 예수를 만남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분으로 인해 내 삶이 변해가고 있는가?

8. 입술로만 회개한 것을 회개한다. 삶의 변화 없이 예수님 곁에 있다는 것 만으로 만족하고 살아가는 삶을 회개한다. 내 삶에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인해 삭개오와 같은 진정한 변화가 생겨나길 원한다. 물론 회개조차도 내 삶의 작은 변화조차도 내힘으로 할 수 없다. 

9. 진정한 복음을 만나고, 진정한 용서를 경험하고, 진정한 사랑이신 그리스도를 깊이 만날 때라야 가능하다. 오늘도 그리스도 안에 거하자. 그리하여 내 삶의 참된 변화가 시작되길 원한다. 

10.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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