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Thinking)/Meditation2020. 5. 19. 0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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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57:1-21 그가 계신 곳에 나도

 

  1.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는가?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신다. 그 분은 어디에나 계시며 언제나 계신다. 그런데 그 하나님께서 자신이 오늘 어디에 계신지를 말씀해주신다.

  2. 15절을 보면 그 분은 높고 거룩한 곳에 계신다. 어찌보면 당연해 보인다. 하나님께서는 ‘지극히 존귀하며 영원히 거하시며 거룩하신 분’이시기에 (15절 전반부) 그가 계신 곳은 죄인인 인간이 닿을 수 없는 높고 거룩한 곳일 것이다.

  3. 하나님께서 자신이 계신 곳을 한 곳 더 말씀해 주고 계신데 매우 의미심장하게 느껴진다. 15절에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있나니’ 지극히 존귀하고 거룩하신 하나님께서는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하신다. 

  4. ‘통회하다’는 국어 사전을 찾아보니 ‘몹시 뉘우치다’, ‘자기가 지은 죄를 뉘우치고 다시는 죄를 짓지 아니하겠다고 결심하다’ 정도의 뜻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은 이렇게 통회하는 자와 함께 하신다. 또 다른 사람은 바로 겸손한 자이다. 하나님은 마음이 교만한 자를 미워하신다.
     

  5. 하나님이 계신 곳에 나도 있는가? 혹은 내가 지금 서 있는 곳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가? 중요한 질문이다. 나는 지금 통회하고 자복하며 겸손한가? 죄의 문제는 끊임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늘 이 통회하는 마음이 없이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수 없다

  6. 하나님께서 이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하시는이유는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생시키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생시키려 함이라’ 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이렇게 겸손하고, 자신을 낮추는 자들의 영혼을 살리시기 위해서 그들과 함께 하신다. 

  7. 내가 살았다고, 내가 잘한다고, 내가 문제가 없다고 말하는 자들은 살릴 거리가 없다. 그들은 살리려는 하나님 또한 거절할 자들이다. 왜냐하면 지금 아무런 문제가 없으니까… 오늘 나는 어떠한 자세로 어느 자리에 서 있는가? 어떠한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8. 내가 통회함으로 그 분 앞으로 나아갈 때에 그 분이 나를 고치시고, 위로하시고 (18절), 평강을 주실 것이다 (19절). 내가 지금 통회하는지, 겸손한지를 점검하고, 그렇지 못하다면 다시 복음 앞에 서자. 복음 앞에서 설 때에야 나의 죄가 보이며, 내가 한 일이 없음을 깨닫게 될 때에야 겸손할 수 있다. 

  9.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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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20. 5. 16. 1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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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55:1-13 값 없지만, 값 비싼 복음

 

  1.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어떤 대가를 요구하지 않고, 그저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오길 바라신다.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1절)

  2. 돈 없이, 값 없이 우리가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게 되었다. 레위기를 읽고 있는데 사실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엄청난 대가가 필요했다. 흠없는 양과 염소의 제물이 필요했고, 제사장의 수고가 필요했고, 제물을 각을 뜨고, 지방을 꺼내고, 피를 뿌리고, 태우고 해야 한다. 

  3. 그런데 이것이 어떻게 공짜가 되었는가? 바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제물로 단번에 죽으셨기 때문이다. 히 10:10 ‘이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히 10:12절 전반부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4. 공짜 같은데, 값 없는 것 같은데 사실은 엄청난 값이 이미 지불되었다. 바로 그리스도의 생명의 값이 우리를 대신해서 지불된 것이다. 내가 공짜라고 여기는 그 모든 것들이 사실은 그리스도의 생명의 대가이다. 그러니 결코 공짜일 수는 없다.

  5. 하지만 나의 입장에서는 어쨌든 공짜이다. 내가 지불한 것이 없으니 말이다. 하나님은 누구든 주님 앞에 나와서 이 생수를 마시고, 구원을 받으라고 이 구원의 문을 여신 것이다. 

  6.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이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 (7절) 누구든지 오면 된다. 누구든지 주님을 영접하면 된다. 그러면 우리는 긍휼히 여김을 받게 되고, 용서함을 받게 된다. 

  7. 하지만 이 은혜를 결코 '값싼 은혜'로 만들고 싶지는 않다. 내가 지불한 것이 없으니, 내가 한 것이 없으니 얼마나 자주 이 은혜를 쉬운 것으로 여기는가? 필요하면 회개하고, 필요하면 주님을 외면하고, 필요하면 기도하고, 필요하면 또 돌아서고를 얼마나 반복하는가? 

  8. 나를 위해 지불된 값,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일, 복음을 깨닫지 못하면 ‘값싼 은혜, 값싼 긍휼, 값싼 용서’만 가득하여 세상 사람들의 조롱을 받게 된다. 이 복음이 얼마나 큰 대가를 치뤘는지, 그리스도의 생명이 바로 우리의 생명임을 깨닫지 못하고서는 오늘도 값싼 은혜만을 찾게 되고 믿음의 진지함은 사라지게 된다. 

  9. 지금 기독교가 조롱받는 대부분의 이유는 이 믿음의 진지함이 사라지고, 복음은 공짜라는 인식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나도 거기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함을 느낀다.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의 신앙이 아니라 복음으로 새롭게 되는, 그리스도의 생명을 살아가는 자가 되고 싶다.  

  10.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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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20. 5. 14. 1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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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52:13-53:12 참 복음의 길로 걸어가는 하나님의 종

1. 이스라엘이 기대했던 왕은 종의 모습, 연약한 모습의 왕이 아니었다. 그들이 기대했던 것은 왕, 선지자, 제사장의 역할을 하는 영광의 왕의 모습이었다. 자신들을 압제국으로부터 구해줄 그런 왕이었다. 

2. 그런데 이사야가 예언했던 메시아의 모습은 그런 모습과는 매우 큰 차이가 있다. 그는 ‘우리가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2절). 그리고 그는 ‘찔리고’ ‘상하고’ ‘징계를 받고’ ‘채찍에 맞는다’ (4-5절). 

3. 왜냐하면 영광의 왕이 오셔도 우리의 죄 문제의 해결 없이는 우리는 영광의 왕과 함께 있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회복도 없고, 거룩하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도 없다. 

4. 본문을 읽으면서 궁금했던 것은 이스라엘 랍비들은 이 본문을 어떻게 해석할지였다. 이 종을 누구라 하며, 예수 그리스도 외에 어떤 사람이 이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할까? 

5. 왕, 제사장, 선지자의 역할을 동시에 해야만 하는 왕이 가장 먼저 감당해야 할 부분이 오히려 죄 문제의 해결, 하나님과의 분리의 해결이라는 것은 정말로 죄의 문제가 인류에게 있어서 가장 심각한 문제라는 것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6. 하나님의 통치를 이 땅에 선포하고 우리 인류의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오셨다. 그의 오심은 이제 우리가 더 이상 죄의 노예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의 선포이다. 그의 오심은 우리가 더 이상 죽고 썩어버릴 존재가 아니라 영원한 생명, 부활을 경험할 존재라는 것이다. 

7. 예수께서는 자신의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셨다 (12절). 그 결과 우리는 생명을 누리게 되었다. 하지만 순간 순간 이를 기억하기 보다는 까맣게 잊어버리고 내 마음대로 살아간다. 또 내 마음대로 예수님을 정의해서 그 분이 내가 흠모할 어떤 존재로 만들어갈 때도 많다. 이것이 우상이고, 이것이 거짓 복음이다. 

8.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은 낮아짐의 본이다. 죽어짐의 본이다. 내가 흠모할 만한 어떤 영광의 존재로 살아가는 삶이 아니었다. 죽으심이었고, 대속이었고, 매맞음이었고, 찔림이었고, 그것을 통해 많은 생명을 살리는 본이었다. 이 본을 따라가야 한다. 높아지려고 하고, 영광을 받으려고 하고, 올라가려고 하는 것은 거짓 복음이다. 

9. 거짓 복음이 아니라 예수님의 복음의 본을 쫓아가고 싶다. 마음만 가득하고 실제의 삶은 따라가지 못한다. 아니 때로는 마음도 없을 때도 많다. 주님 이런 나를 도우소서.. 그리스도의 참 복음의 길을 함께 걸어가는 자가 되게 하소서. 

10.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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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20. 5. 13. 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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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51:17-52:12 주께서 다스리신다

1. 복음은 좋은 소식이다. Good News라고 하며, 우리는 이 복음을 보통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이 땅에 오셔서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하셔서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다시오실 그 구원의 역사를 말한다. 

2. 오늘 본문에서도 좋은 소식을 말하고 있다. 52:7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좋은 소식을 전하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3. 좋은 소식은 “하나님께서 통치하신다”라는 것이다. 이 세상을 통치하고 있는 것이 세상의 주관자도 아니고 능력 있는 자도 아니고, 재력이 넘치는 자도 아니고 바로 정의와 공의로 옷을 입으신 우리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4. 하나님께서 통치하시기에 우리는 안심할 수 있다. 그 분은 언제나 정의로우시고 언제나 공의로우시고 가난한 자들과 고아와 과부를 돌보시며 공중 나는 작은 새도 돌보시는 분이시다. 그 분은 온 세상을 창조하셨으며 우주의 모든 별들을 정확한 궤도를 그리며 움직이게 하시는 분이시다. 

5. 그 분이 내 삶을 이 우주를 통치하신다는 것이 바로 복음이다. 사람이 만든 우상도 아니고, 사람이 의미를 부여한 어떤 대상도 아니고 홀로 살아계시고, 홀로 영원하신 그 분께서 공의와 사랑으로 다스리신다는 것이 복음이다. 

6. 그리고 이 하나님의 통치가 가장 선명하게 나타난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통치가 세상의 왕이나 권세 가진 자 처럼 찍어 누르거나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우리를 섬기고 계심을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음을 보여주셨다. 온 우주의 왕께서 사랑으로 공의로 우리를 다스리고 계시기에 우리는 오늘의 슬픔이나 억울함도 이겨낼 수 있는 것이다. 

7. 때로는 내 눈에 보이지 않을지라도 혹은 내가 느끼지 못할지라도 하나님은 온 우주를 여전히 공의와 사랑으로 다스리고 계신다. 내가 할 일은 그 기쁜 소식을 이 땅에 전하는 것이다. 우리가 신이라고 여기는 모든 것들이 헛된 우상이며, 오직 하나님께서만 만군의 하나님이시고, 그 분이 다스리고 계심을 태국의 영혼들이 듣도록 계속해서 전해야 한다. 

8. 교회 개척 모임이 계속 진행중이다. 온라인 모임 뿐만 아니라 오프라인으로도 개척 코어 팀이 계속 만나고 있다. 태국, 미국, 한국 세 나라의 세 가정이 함께 교회 개척을 준비해 가는 과정이 참 즐겁고도 행복하다. 물론 서로 참 많이 다르다. 일의 진행하는 방식도, 생각도. 나라별 문화의 차이 뿐만 아니라 개인의 성향도 참 많이 다르다. 하지만 우리가 외치는 복음은 같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원과 하나님께서 다스리고 계심을 선포하는 복음은 같다. 

9. 준비가 잘 진행되어서 태국의 영혼들이 하나님께서 다스리고 계신다는 이 복음을 교회를 통해 계속해서 들을 수 있게 되기를 원한다. 이를 위해서 계속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10.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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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20. 5. 12. 1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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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51:1-16 나 곧 나, 가장 위대하신 하나님을 만나야 해결된다 

1. 이사야는 계속해서 헛된 우상들을 의지하고 참 하나님을 거절한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해서 경고를 계속해서 하고 있다. 

2. 그러면서 하는 이야기는 12절 상반절에 ‘이르시되 너희를 위로하는 자는 나 곧 나이니라’ 라고 말씀하고 있다. 

3. '나 곧 나이니라’ 이 구절은 출애굽기에서 모세를 만나 자신의 이름을 계시하신 하나님의 모습이 떠 오른다. 그 어떤 걸로도 자신을 설명할 수 없는 오직 하나님 자신으로만 하나님 자신을 설명할 수 있는 (I am who I am) 바로 그 분이다. 

4. 그 하나님께서 오직 나를 위로하시는 분이심을 본문은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12절 하반부는 이제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 ‘너는 어떠한 자이기에 죽을 사람을 두려워하며 풀 같이 될 사람의 아들을 두려워하느냐'

5. '나는 나 자신으로만 설명할 수 있는 창조주 하나님인데, 너는 누구냐?' 라고 물으신다. '너는 누구길래 그 하나님 앞에서 죽을 사람들, 사람의 아들들을 두려워하느냐?' 라고 물으시고 계신다.

6. 자신으로만 자신을 설명할 수 있는 위대한 하나님 앞에 서서 나는 여전히 사람을 두려워하고, 염려한다. 이 얼마나 큰 아이러니인가? 모든걸 창조하시고, 모든걸 움직이시며 우주 만물을 지탱하고 계시는 분 앞에서 우리는 먼지만도 못한 존재를 두려워하고 있다. 

7. 그런데 그게 바로 내 모습이다. 그 위대하신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삶의 작은 어려움과 고통 속에서 아파하고 두려워한다. 어른들과의 관계, 요엘이의 양육, 교회의 개척 등등의 문제들을 위로하시는 하나님 앞에 꺼내어 놓고 위로받고 힘을 얻어야 하는데, 오히려 그 하나님께 꺼내어 놓지 못하고 내가 붙들고 안절부절 못하고 있다. 

8. '나, 곧 나이니라’고 말씀하시는 크고 놀라우신 하나님이 바로 나의 하나님인데 왜 나는 아직도 내 문제들을 붙들고 두려워하고 염려하고 있는가? 그 분께 맡겨야 한다. 그리고 그 분을 더 알고 나를 더 알아야 더 맡길 수 있다. 그 분은 ‘나 곧 나'의 하나님’이시고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잊지 말자. 

9. 오늘도 염려와 두려움을 스스로 계신 자에게 맡긴다. 마음을 내려놓고, 기도로 아뢴다. 내 마음이 어떠함이 나의 문제의 해결이 아니라 하나님의 위대하심이 나의 문제의 해결의 원천임을 잊지 말자.

10.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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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20. 5. 11. 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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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50:1-11 내 힘으로 되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1. 내 인생에 내 힘으로 가는 것은 아무 것도 없는 것 같다. 내가 하고 있는 줄로 알았던 것도 상당수 나의 힘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2. 4절은 ‘주 여호와께서 학자들의 혀를 내게 주사 나로 곤고한 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 줄 줄을 알게 하시고 아침마다 깨우치시되 나의 귀를 깨우치사 학자들 같이 알아듣게 하시도다'라고 말씀하고 있다. 

3. 아침마다 묵상하는 말씀도 내 힘으로 깨닫는게 아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깨우치시고, 알아듣게 하시는 것이다. 바꿔 말하면 주님께서 나를 깨닫게 하시지 않으면 나는 깨달을 수 없다는 것이다. 내가 스스로 하고 있는 것으로 여겼던 그 모든 것들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생각해야 한다.

4. 하나님은 나를 로보트처럼 어느 일에나 자동으로 순종하도록 만드시지 않으셨다. 오히려 나에게 자유를 주며, 결정할 수 있도록 만드셨다. 하지만 자유가 있다는 것이 모든 것을 할만한 충 분한 능력이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결정할 수 있지만 또한 하나님의 도움이 항상 필요한 연약한 자들이다. 

5. 내 삶에 어떠한 도움이 필요한지 생각해 보았다. 사실 모든 면에서 모든 상황에서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하다. 그런데 한 가지 발견한 것은 대부분의 부분에서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기 보다는 내 힘을 의지해서 하려고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6. 능력이 없는데, 힘이 없는데 꾸역 꾸역 하려다가 좌절하고 있는 일들이 많다. 요엘이와의 관계도 그렇다. 내 힘으로 참다 참다 결국은 어떤 모양으로든 터진다. 후회하고, 다시 터지고, 후회하고 악순환이 반복된다. 화가 나는 순간에, 욱 올라오는 순간에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다. 그 순간 하나님을 붙들어야 하는데 여전히 내가 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버티고 버틴다. 

7. 바보다. 도대체 왜 이러나 싶다. 아침마다 깨우치시는 하나님 (4절), 나의 귀를 여시는 하나님(5절) 앞에 순간 순간의 나의 혈기와 생각을 드린다. 그리고 주님께서 그 순간 순간을 도와주시길 맡겨 드린다. 

8. 비단 요엘이와의 관계 뿐만 아니다. 내가 주님을 의지해야 하는 것이 매일의 습관이 되어야 한다. 습관적으로 나를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습관적으로 주님을 의지해야 한다. 주님 나를 도우소서. 내가 주님만 의지하도록 나를 도우소서. 

9.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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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48:1-11 그 분이 그 분의 영광과 그 분의 이름을 위해 하신다

 

  1. 하나님을 나(만)의 하나님으로 축소해서 생각할 때가 있다. 그 분이 마치 나(만)를 위해 일하기를 바랄 때가 있다. 하나님이 모든 만물과 모든 우주의 하나님이시기 보다는 나의 하나님이 되시기를 바란다. 

  2. 그래서 하나님을 작게, 더 작게 축소해서 나의 머리의 한계 안에서 이해할 수 있는 하나님으로 만들어 버린다. 하지만 그 분이 정말 내 생각만큼 작은 분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3. 하나님은 온 우주 보다도 더 크신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온 우주의 하나님이시다. 그 분은 그 분의 이름과 그 분의 영광을 위해 모든 일을 행하신다. 단순히 나를 위해서가 일하는 램프의 지니가 결코 아니다. 

  4. 오늘 본문에서도 (8절-11절) 하나님께서는 여러번 말씀하신다. 9절에 ‘내 이름을 위하여’, ‘내 영광을 위하여’ 11절에 ‘나를 위하며 나를 위하여’라고 계속 말씀하고 계시다. 이 모든 것이 나를 위함도 누구를 위함도 아니라 오직 하나님을 위한 일이다. 

  5. 그렇다고 그것이 하나님이 이기적이시다거나 하나님이 우리에 대해 아무것도 신경쓰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놀라운 영광, 그 이름을 위해서 우리를 그 분의 도구로 사용하고 계시다는 것이다. 

  6. 지금 나에게 물어야 하는 질문은 ‘교회 개척’이라는 사역은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가? 라는 것이다. 나를 위한 사역인가? 태국인을 위한 사역인가? 물론 그렇다. 아닐 수는 없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질문한다면 이 교회는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다.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기 위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 하나님께서 직접 하시는 사역이다. 

  7. 내가 이 교회가 세워지는 일에 아무것도 더하거나 뺄 수 없다. 오직 하나님께서 세우시고, 하나님께서 이 교회를 통해 영광받으시는 것이다. 우리는 그 분의 도구일 뿐이다. 절대로 나의 교회가 될수도 없고, 절대로 나의 영광이 되어서도 안된다. 

  8. 하나님이 하신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한결 가볍다. 모든 것이 그분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면 내가 조금 더 잘하고, 내가 조금 더 못하고는 별 의미 없는 것이 아닌가? 그저 그 분의 뜻을 구하고, 그 분께 순종하고, 그 분이 영광받으시도록 하면 되는거 아닌가? 하나님의 이름과 영광을 생각하니 이제서야 내가 졌다고 생각한 짐을 그 분께 드릴 수 있게 된다. 

  9.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마 11:28-30

  10. 하나님께서 이 모든 일을 그 분의 영광을 위해 하신다는 것을 깨달을 때에, 나는 쉼을 얻고, 내 짐은 가벼워진다. 주께서 그 분을 위해 일하신다. 교만하지 말고, 그 분을 작게 만들지 말자. 

  11.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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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47:1-15 질그릇의 반란.. 싹부터 자르자

1. 이스라엘의 하나님 앞에서의 패역함은 공의의 하나님께서 그들을 심판해야만 했다. 6절에 ‘전에 내가 내 백성에게 노하여 내 기업을 욕되게 하여’라고 말씀하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악이 그들의 멸망을 불러왔다. 

2. 하나님께서는 바벨론이란 심판의 도구를 사용하셨다. 바벨론이 의로워서도 아니었고, 바벨론이 거룩해서도 아니었다. 그저 하나님의 이 땅을 통치하심의 도구였을 뿐이었다. 하지만 바벨론은 이를 알지 못하고 자고하였다. 

3. 그들은 높아졌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공의로 대하지 아니하였고, 긍휼히 여기지도 않았다. 그 결과로 오늘 본문에서는 바벨론에게도 하나님의 심판이 임한다. 한날 과부가 되고 자녀를 잃는 일이 동시에 일어나게 된 것이다 (9절). 

4. 때때로 하나님께서 내 삶에 역사하심이, 혹은 나를 그 분의 일에 사용해 주시는 것이 그 분의 통치의 결과가 아니라 내가 어때서.. 내가 잘나서, 내가 거룩해서, 혹은 내가 할만 한 사람이어서 라는 착각을 할 때가 있다. 

5. 정말 말 그대로의 착각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도구일 뿐이다. 하나님 그 분의 거룩하심과 아름다우심을 드러내는 도구일 뿐이다. 내가 어떤 그릇이든, 그릇을 만든 분이 영광을 받는 것이지 그릇 자체가 영광을 받을 필요가 없다. 

6. 개척 코어 멤버 팀 모임을 어제도 가졌다. 태국, 미국, 한국 세 가정이 모여서 하나님의 교회를 세워가기 위해 여러가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모든 막힌 담을 허무신 것 처럼 우리가 먼저 세 나라의 언어, 문화의 벽을 허물며 그리스도가 영광받으시면 이것 자체가 교회라는 마음을 나누었다. 

7. 너무 감사하고, 좋은 시간이었다. 하지만 내 마음에 은근히 그런 마음도 들었다. '나 니까.. 내 상황이니까.. 우리 가정이 그간 여러 상황을 겪으면서 주님을 좇았으니까.. 이런 모습으로 갈 수 있는 것이 아닌가?' 라는 마음이 아주 조금이지만 내 마음 구석에 자리잡은 것을 오늘 말씀을 통해 깨닫는다. 

8.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이걸 잊어버리면 망한다. 분명히 지금까지 고백했던 것 처럼 내가 한 일이 없다. 주님께서 일하고 계시고, 모든 영광, 모든 높임은 주님이 받으셔야 한다. 내 마음 속에 있는 ‘나 니까…’ 이런 마음은 싹을 잘라야 한다. 작은 교만이 싹트면 큰 교만을 낳을 수 밖에 없다. 

9. 정말로 주님이 통치하시고, 주님이 일하셨다. 작은 교만도 그 분 앞에서 부끄러운 것이다. 그 분은 공의로우시고, 그 분의 이름의 영광을 위해 나를 그 분의 도구로 사용하시는 가장 높으신 하나님이시다. 나는 그 질그릇일 따름이다. 질그릇의 반란의 싹을 잘라 버리자.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고후 4:7

10.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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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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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46:1-13 헛된 일에 인생을 낭비하지 말자

1. 살다가 허무한 순간들이 있다. 뭔가 오래 공들여 해왔는데 그것이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일이었다든지.. 시험 범위를 잘못 알고 공부해서 노력은 했는데 시험을 망쳤다든지 하는 등의 일 말이다. 

2. 우상이라는 존재가 그렇다. 1절에 보면 '벨은 엎드려졌고 느보는 구부러졌도다’ 라고 말하고 있다. 그들이 섬겨왔던 신으로 여겼던 것들이 길바닥에 나딩굴고 있다. 신이 아니고 가치없는 것들이니 그것들을 메고 다니던 짐승들에게는 ‘피곤함'으로 또 '무거운 짐'이 되었다 (1절)

3. 그것들은 어깨에 매어 무겁게 집으로 가져와도 움직이지도 못하고, 기도에 응답하지도 못하며 우리를 고난에서 구해내지도 못한다. 정말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정도 뿐만 아니라 자리 차지하고, 짐만 되는 쓰레기이다. 

4. 그러한 우상을 물고, 빨고, 사랑했다니… 얼마나 헛된가? 얼마나 짜증나고 얼마나 열 받는 일인가? 그 우상에게 무엇인가를 간구하고, 응답을 위해 조마조마해 했다니…. 에잇!!

5. 참 하나님이신 우리 하나님께서 그런 우상들과 비교 당한다는 그 자체가 자존심 상하는 일이다. 우상들은 창조되었으나, 하나님은 창조하셨고, 우상들은 생명이 없으나 하나님은 모든 만물에 생명을 주셨고, 우상들은 사랑하지 못하나 하나님은 모두를 사랑하셔서 자신을 주시기까지 사랑하셨다. 

6. 그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를 위해 구원을 베푸시며, 지체하지 않으신다 (13절). 그런데 나는 무엇을 사랑하며, 무엇을 의지하며, 무엇을 바라볼 것인가? 헛된 것에 시간을 쏟기에는 내 인생이 너무 짧다. 벌써 인생의 반을 살았다. 내 인생의 반은 갖가지 우상들이 가득했다. 

7. 그런데 정말로 하나님은 나를 위해 구원을 베푸셨고 지체하지 않으셨다. 내 안에 가득한 우상들을 보여주시기도 하고, 무너뜨리기도 하시면서 나를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갈 수 있도록 계속 인도하셨다.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고전 15:10 전반부

8. 그럼에도 여전히 내 삶에는 여러가지 우상들이 자리잡고 있다. 물리적인 우상은 없다. 분명히 바알과 아세라의 모습을 한 우상은 없다. 하지만 더 은밀하게 교묘하게 자리잡은 우상들이 있다. 하나님의 이름을 말하면서도 그 우상들은 여전히 내 안에서 움직인다. ‘인정에 대한 욕구’, ‘내 삶을 내 마음대로 하려는 삶의 태도’, ‘하나님보다 재정을 의지하는 마음’ 등등등 너무 많다. 오늘도 이러한 우상들을 주님 앞에 내려놓는다. 

9. 아니 우상들을 내려놓으려는 마음 보다는 주님을 더 확실히 붙든다. 진짜를 더 굳게 붙들면 가짜는 사라지게 되어 있다. 

10.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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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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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42:1-25 하나님의 정의가 이 땅 위에  

1. 하나님이 붙드는 종, 하나님 마음에 기뻐하는 자, 하나님이 택한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영이 부어진다 (1절). 그리고 그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정의’인 것 같다.

2. 왜냐하면 1절 ‘그가 이방에 정의를 베풀리라', 3절 ‘진실로 정의를 시행할 것이며', 4절 ‘세상에 정의를 세우기에 이르리니’라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이 택하신 그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정의와 관련된 일인 셈이다. 

3. 이 세상의 정의는 어그러져 있다. 비단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노예로 살고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 출애굽을 통해 그들의 삶의 정의를 회복시켜주시지 않았던가? 더 이상 억압받는 노예가 아니라 자유인이 되었다. 

4. 또한 이스라엘의 율법은 계속해서 가난한 자와 억압받는 자의 권리를 보장해준다. 고아와 과부에 대한 관심, 희년을 통해 빼앗겼던 땅의 회복 등 하나님의 관심은 단순히 우리가 죽어서 가는 천국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이 땅도 아주 많이 있다. 

5. 이 땅에서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가 회복되어야 한다. 우리의 죄를 용서받고, 우리가 천국에 가는 것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택한 종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 세상에 악함과 망가진 것들이 회복되어야 한다. 

6. 교회는 복음을 전해야 하지만 복음만 전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가난한 자에게 먹을 것을 줘야 하고, 그들이 공부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하며, 그들이 기본적인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방법을 찾아 함께 도와야 한다. 

7. 국가에서 정의롭지 않은 일이 벌어질 때는 목소리를 내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 또한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신 이유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 지는 것, 하나님의 정의, 하나님의 공의가 이 땅에 이뤄지는 것, 이 땅이 결국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성취되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다스리는 하나님 나라라면 하나님의 성품을 따라 당연히 정의롭고 공의롭지 않겠는가? 

8. 태국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도록 하기 위해서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솔직히 아직은 잘 모르겠다. 미혼모들과 그 아이들에 대해 관심은 가지고 있지만 교회가 세워져가는 것을 보며 더 고민해야 할 것 같다. 교회가 어디에 세워지는지에 따라서 그리고 그 지역에 어떤 사람이 살아가고 있는지에 대해 좀 더 연구하게 되기를 원한다.

9. 그리고 사실 정의는 멀리 있지 않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정의가 임하게 하기 위해서 자신을 십자가로 내어주시지 않았는가? 나를 내어주면 되는 것이다. 그들에게 나의 작은 삶을 내어준다면 작은 의미에서의 정의가 시작될 것이다. 큐티를 마치지만 더 큰 숙제가 주어진 것 같다. 

10.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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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