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Thinking)/Meditation2020. 4. 17. 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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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31:1-9 나의 도움은 하나님께로부터 온다

1. 이스라엘 백성들은 도움을 구하러 애굽으로 내려간다. 왜냐하면 그 곳에는 눈에 보이는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는 말, 눈에 보이는 병거의 많음, 눈에 보이는 마병의 강함이 있기 때문이다 (1절). 

2.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진정한 도움이 될 수 없음을 말씀하신다. 왜냐하면 애굽은 사람이고, 신이 아니기 때문이다 (3절). 그들의 말은 육체이고 영이 아니기 때문이다 (3절). 

3.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은 낯설지 않다. 눈에 보이는 것을 의지하기는 참으로 쉽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자동이다. 자동으로 강해 보이는 것에는 우리의 마음이 간다. 그리고 나도 알게 모르게 그것들을 의지하고 있다. 

4. 선교사로 살아가는 나에게는 그것이 재정일 때가 많다. 어제 한동대학교회에서 이메일이 왔다. 코로나 사태 및 온라인 수업으로 인해 한동대학교회의 재정이 심각한 수준이라 모든 예산을 50%로 감축하기로 했고, 그래서 매달 오는 선교비도 50%만 보내겠다고 연락이 왔다 (물론 상황이 회복되면 선교비도 원래 보내던데로 보내겠다고 하셨다). 한동대학교회에서 매달 100불 정도의 재정이 오고 있는데, 반으로 줄어든 것이다. 그 때 처음으로 들었던 내 마음은 한동대학교회를 위해서 기도하는 마음이 아니었다. 가장 먼저 들었던 마음은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이구나… 그동안 몇 곳에서 이런 일들이 있었지만 이제는 점점 많은 곳에서 이렇게 될텐데… 어떻하지?’ 라는 염려였다. 

5. 교회 재정의 어려움의 소식을 들으며 기도하고 위로하는 것이 나의 첫 모습이 아니라는 것이 참으로 스스로에게 안타까웠다. 선교사로 살아가며 재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을 의지한다고 그렇게 말하고 기도했는데도, 여전히 내 마음은 하나님의 손이 아니라 사람의 손을 의지하고 있다는 것을 오늘 본문을 통해 깨닫게 된다. 

6. 우리 가정을 위해 헌금해주시는 교회들도, 개인들도 모두 하나님의 감동으로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 마음은 상황에 따라 요동하고 철렁 내려앉고 쉬이 두려움에 사로잡힌다. 이러한 나에게 하나님은 오늘 본문을 통해 계속 말씀하신다. ‘나 만군의 여호와가 강림하여 시온 산과 그 언억에서 싸울 것이라 (4절)’ 애굽의 말, 병거, 기병보다 더 강한 여호와 하나님께서 나를 대신해서 싸울 것이라 하신다.

7. 5절은 “새가 날개 치며 그 새끼를 보호함 같이 나 만군의 여호와가 예루살렘을 보호할 것이라 그것을 호위하며 건지며 뛰어넘어 구원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나님이 대신 싸우시는 것 뿐만 아니라 보호하고, 구원하실 것이라 말씀하신다. 

8. 내 삶의 참된 평안과 안식은 오직 여호와를 의지할 때 나타나게 된다. 재정이 우리를 보호하고 지키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우리를 보호하고 지키는게 아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호하고 지키고, 구원하실 뿐이다. 그 분께 도움을 구하러 가야 한다. 그 분의 손만 의지해야 한다. 그리고 그 분이 지금도 나를 그 분의 날개 아래 보호하고 계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9. 내 눈을 의지하지 말자. 내 눈은 허탄한 것을 사랑하고, 있어 보이는 것, 좋아 보이는 것을 보느라 하나님을 보지 못할 때가 많다. 오히려 오늘도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자. 그 분이 나를 지금 보호하고 지키고, 구원하고 계신다. 

10.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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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20. 4. 16. 1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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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 24:44-53 은혜 없으면…

1.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기록된 모든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에 대해 이야기 하고 계심을 말씀하셨다.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 (구약 전체)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2. 구약 성경의 모든 부분은 한 분, 여자의 후손인 예수를 가르치고 있다. 그런데 이 성경을 깨달으려면 한 가지가 필요한데, 그것은 마음을 여는 것이다. 

3. 마음은 단순히 우리의 내적인 어떠한 한 부분이 아니라, 우리의 이성, 감성, 지성 모두를 포괄하는 우리의 삶의 핵심이 되는, ‘나’로 지칭되는 그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다. 조나단 에드워드는 이를 ‘Affection’이라는 단어로 설명하기도 했다. 여튼 ‘마음'이라는 단어의 정의는 모두가 다를 수 밖에 없지만, 정확하게 정의하지 못하더라도 우리는 우리 마음 가운데 그 ‘마음’이란는게 분명히 있다는 것을 안다. 

4. 오늘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깨닫게 하실 때에 ‘그들의 마음을 열어’주셨다. 즉 우리의 이성, 선입관, 내가 생각하기에 옳다고 믿는 것, 내가 느끼는 감정을 넘어 성경이 말하고 있는 것을 볼 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예수께서 그리스도임을 깨달을 수 있는 것이다. 

5. 한 마디로 요약하면 은혜로 깨닫는 것이다. 내 힘으로 어떻게 이성, 선입관, 옳다고 믿는 것, 내가 느끼는 감정을 뛰어 넘을 수 있겠는가? 못한다. 그러니까 은혜이다. 

6. 예수께서 우리를 찾아오셨다. 왕이신 하나님이 어린양의 모습으로 오셔서 우리를 대신해 유월절 어린양이 되셨다. 왜? 우리의 이성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 내 감정도 그 사실에 대해 쉬이 동의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것은 사실이고,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먼저 오셔서 죽으셨다. 

7. 말씀을 읽으며 마음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낀다. 하지만 같은 말씀을 읽어도 어떤 때에는 그렇지 않다. 복음을 들어도 어떤 때에는 감격하고, 눈물이 흐르지만 어떤 때는 그저 덤덤하다. 역시 은혜다. 

8. 그래서 오늘도 은혜 주시기를 구한다. 물론 구한다고 내가 원하는 시점, 내가 원하는 방법으로 은혜가 임하지는 않는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주권으로 거저 주시는 은혜이다. 그 은혜를 구한다. 그리하여 내가 그리스도를 더 깊이 깨달을 수 있게 되길 원한다.

9. 찬양의 가사처럼 은혜 없으면 나 서지 못한다. 은혜 없으면 깨닫지 못한다. 은혜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은혜 없으면.. 은혜 없으면…

10.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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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20. 4. 15. 1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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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 24:36-43 샬롬, 샬롬 

1. 예수님께서 다시 제자들 사이에 나타나셨다. 놀라고 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 예수께서는 ‘평강’을 전하셨다 (36절). 이 평강이라는 단어는 헬라어 ‘에이레네’라는 단어이고, 구약에서의 이 단어는 잘 알고 있는 ‘샬롬’이다. 

2. 샬롬은 모든 것이 제 자리에 있을 때에 나타나는 평화, 평안을 의미한다. 부활하신 예수께서 오셔서 무서워하고 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 그 평화를 이야기 하고 계신 것이다. 왜냐하면 그 동안 있었던 십자가의 사건, 우주 모든 만물을 회복시키기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이 부활을 통해 모두 마쳐졌기 때문이다.

3. 그리스도의 사역으로 인해 이제 다시 모든 것은 다시 제자리로 돌아갈 수 있는 문이 열렸다. 죄인들이 하나님과 관계를 맺으며 그 분 앞에 언제든지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마치 에덴동산에서의 하나님과의 관계처럼 말이다. 모든 것이 제 자리로 갈 수 있는 문이 열렸다. 

4. 부활이 모든 것을 바꾸었다. 의심하는 이들에게 예수께서는 그 손과 발을 보이셨고, 구운 생선을 드시며 자신이 ‘몸’으로 부활 하셨음을 보이셨다. 부활은 진짜이며, 실제이다. 팀 켈러가 어제 페이스북에 쓴 글이 생각난다. 정확한 워딩은 아니지만 '부활은 크리스마스가 진짜 사실임을 보여준다’.

5.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몸으로 오셨고, 마지막에 몸으로 부활하신 것은 진짜이다. 그 진짜 사실이 우리에게 이제 모든 것이 제 자리로 돌아갈 수 있는 샬롬의 길을 열어 주셨다. 물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대는 이미 열린 길과 아직 완성되지 못한 already, not yet의 긴장 속에 살고 있다. 

6. 이미 열려 있는 샬롬 안으로 예수님을 통해서 들어가야만 한다. 부활하신 주님을 통해 우리는 이 땅에 샬롬을 전해야 한다. 완벽하지 못하고, 아직 완성되지 못하였더라도 이 세상에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샬롬을 전해야만 한다.

7. 오늘은 대한민국 선거날이다. 코로나로, 여러가지 어려운 상황으로 샬롬이 없는 곳에 우리는 샬롬을 전해야 한다. 오늘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오늘은 소중한 우리의 한 표를 행사해야만 한다. 귀찮고 싫어도 나의 권리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샬롬이 이 땅 가운데 나타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8. 그리고 또 무엇을 할 수 있을가? 그리스도의 샬롬을 아직 알지 못하는 가족에게 이웃에게 계속 전해야 한다. 이미 열려 있는 샬롬을 전해야 한다. 아직 이 땅이 고통 중에 있는 이유가 이 샬롬이 아직 완성되지 못하였기 때문임을 말해주어야 한다. 왜냐하면 크리스마스도, 부활도 다 사실이기 때문이다. 

9.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이 샬롬을 외치며 걸어갈 수 있는 오늘 하루 되기를 원한다. 오늘도 진정한 샬롬이 함께 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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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20. 4. 14. 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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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 24:28-35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비추고 있다

1.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걸어갔고, 한 곳에 유숙하러 들어갔다 (29절). 그런데도 영의 눈이 어두워 함께 걸어오고, 유숙하러 들어온 사람이 누구인지 깨닫지 못한다. 

2. 함께 음식을 잡수실 때에 (30절) 떡을 가지사 축사하실 때 그들은 깨닫게 된다. 이 모습은 성찬식의 모습과 유사한데, 다시 한번 주님께서 그들에게 자신의 몸을 상징하는 떡을 떼어 주신다. 그러자 그들의 눈이 밝아진다. 

3. 예수 그리스도의 빛이 들어오기 전의 우리의 모습은 항상 어두움이다. 그 어두움이 너무 심각해서 빛으로 오신 그 분을 깨닫지 못한다. 우리의 깨달음은 항상 우리 안에서 시작되지 않는다. 이 깨달음은 항상 밖으로 부터 오는 은혜로 시작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먼저 나를 찾아와 내 마음을 두드렸다. 내가 먼저 그리스도를 붙들지 않았따. 

4. 예수 그리스도의 빛이 들어오자 이제 말씀이 깨달아지기 시작한다. 나 중심적으로 해석하고 있던 말씀들이, 그리스도 중심으로 꿰어지기 시작한다. 말씀은 언제나 그리스도를 깨닫도록 인도하는 것인데, 나는 너무나도 자주 나를 위한 말씀으로 해석할 때가 많다. 물론 하나님은 이 말씀을 통해 나에게 오늘도 말씀하신다. 하지만 더 중요하게 깨달아야 할 것은 이 말씀이 언제나 그리스도를 가르치고 있다는 것이다. 

5. 말씀에 비춰주시는 성령의 조명을 따라 우리는 이 말씀이 말하고 있는 그리스도의 모습에 대해 깨달아야 하고, 또 그것을 설교 중에 나눠야 한다. 말씀은 단순히 내가 오늘 살아갈 말씀을 주시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게 작은 말씀이 아니다. 

6. 제자들의 모습도 마찬가지이다. 그들 또한 자신들을 향한 말씀에서 그리스도를 향한 말씀으로 깨닫게 되면서 그들의 삶도 증인으로 변하게 되었다. 말씀의 능력은 이 말씀을 내 삶으로, 나의 것으로 한정시키는 대신에 오히려 나로 하여금 그 부활의 증인이 되도록 한다 (33-35절). 

7. 내가 증인의 삶을 사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문제는 내가 성경을 나를 위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보느냐 아니면 성경을 예수님을 우리로 하여금 깨닫게 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보느냐의 차이이다. 나는 오늘 이 말씀을 어떠한 관점으로 보고 있는가? 

8. 성경 말씀을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보며, 나 또한 증인의 삶을 살아가기 원한다. 코로나로 인해 밖으로 나가서 증인이 되지는 못하지만 아내에게 또 아이들에게도 증인이 되기 원한다. 

9.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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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Thinking)/Meditation2020. 4. 14. 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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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 24:13-27 자세히 설명하기 위해 자세히 알아야 한다.

 

  1. 제자들은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나서 멘붕에 빠졌던 것 같다. 여자들이 찾아와 무덤이 비었고 예수께서 살아나셨다고 말하는 것에도 그들은 그 말을 허탄한 것으로 여겼다. 

  2. 그리고 그들은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슬픈 빛을 띠며 엠마오라는 마을로 가고 있었다. 그들은 눈도 가려졌다 (16절). 예수님께서 바로 그 옆에 계셨음에도 그들은 깨닫지 못한다. 

  3. 제자들은 여전히 예수님을 선지자로 (19절) 설명하고 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라고 고백했던 베드로의 고백이 무색하게 느껴지는 순간이다. 다만 그때에도 예수님께서 분명히 이것을 네가 안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알게 하셨음을 말씀하셨다. 

  4. 눈이 가리워진 제자들에게 예수께서는 말씀을 설명하기 시작하신다 (27절).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이 성경은 구약성경이었을 것이고, 구약성경에서 자신에 대해 예언한 구절들을 통해 자신이 예언된 메시아임을 드러내셨다. 

  5. 말씀이 없으면, 말씀을 모르면 그 분이 메시아로 보이지 않는다. 선한 분이고, 좋은 분이지만 선지자 중의 한 분 정도로만 볼 수 밖에 없다. 성경을 부지런히 묵상하고, 배우고 알아야 그 분이 예언된 메시아임을 깨달을 수 있다. 

  6. 아이들에게 묵상의 습관을 세워주고 싶은데 잘 안된다. 말씀을 부지런히 읽게 하고 싶은데 잘 안된다. 아이들이 예수님을 성경에서 만나야 하는데 그것을 옆에서 돕는 것이 쉽지가 않다. 

  7. 아이들이 예수님이 우리의 유일하신 구원자이심을 깨달을 수 있도록 자세히 설명하는 아빠가 되고 싶다. 그리고 태국의 영혼들에게도...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잘 준비 되어야 한다. 아이들에게 묵상하라. 성경 읽으라 시키는 부모의 모습이 아니라 묵상하고 성경을 읽는 모습을 늘 보여주고, 그들에게 친절하게 설명해줘야 한다. 

  8. 내가 자세히 알아야 또한 자세히 설명할 수 있다. 코로나로 인해 집에 있는 시간이 대부분인데, 좀 더 부지런히 성경을 연구하고, 말씀을 보고, 태국어를 공부하자. 이 시간이 교회를 개척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준비의 때임을 알고 시간을 아끼고, 가족들과 좋은 시간을 보내며 지내길 원한다. 

  9. 함께 있는 시간이 길면 이것이 오히려 쉽지 않다는 것을 느낀다. 하지만 이 시간이 분명 소중하게 느껴질 때가 올 것이다. 지금을 가장 충성되이 보내자.

  10.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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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Thinking)/Meditation2020. 4. 10. 1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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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 23:44-49 복음을 통해 하나님 앞으로 계속 나아가기

1.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셨고, 제 육시에는 해가 빛을 잃고 온 땅에 어둠이 임하고, 제 구시에는 성소의 휘장이 한 가운데가 찢어졌다. 오늘 본문에 나오지 않지만 다른 본문을 보면 성소의 휘장은 위에서 아래로 찢어졌다 (마 27:51).  

2. 성소의 휘장이 쳐져 있다는 것은 정해진 사람, 대표로 대제사장이 1년에 한 번, 대 속죄일에만 들어갈 수 있는 것을 의미하지만, 이것이 위로부터 아래로 찢어졌다. 사람이 찢은게 아니라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찢으셨다. 이제 우리는 어느 때나 휘장이 벗겨진 성소로, 지성소로 하나님을 언제든지 만날 수 있게 되었다.

3. 성소가 쳐져 있었던 것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었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죄악된 우리의 모습으로 만날 수가 없었다. 그 분의 거룩함으로 인해 우리가 죽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1년에 한 번 하나님을 뵐 수 있도록 한 지성소의 모형도 결국은 우리를 위함이었다. 

4. 가장 거룩하게, 우리의 죄를 씻을 수 있을만큼 씻고 나서, 그리고도 가장 구별된 대제사장 한 사람만이 들어갈 수 있었던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그 곳으로 이제 우리는 어느 때나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바로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다 속죄하셨기 때문이다. 

5. 아름답지 않았던 우리를 아름답게 하려고, 거룩하지 않았던 우리를 거룩하게 하려고, 하나님과 동행할 수 없는 우리를 하나님과 동행하게 하려하시려고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셨고, 우리를 위해 하나님의 통치를 선포하셨다. 

6. 그렇기에 우리는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 그 분이 우리를 위해 오셨고, 죽으셨고, 부활하셔서 다시 오신다는 그 복음을 믿어야 한다. 그리고 그 복음으로 인해 우리의 삶이 달라지고 변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의 죄로 인해 이제까지 할 수 없었던 하나님과의 관계를 예수님의 행하심을 통해 직접, 매일, 순간 순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7. 오늘 내 삶이 변하지 않는 이유는 하나님을 우리의 죄로 인해 만날 수 없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가 벗겨 놓으신 휘장을 내가 스스로 다시 치고 있지는 않은가? 매순간 나아갈 수 있는 그 길을 내가 다시 휘장이 쳐 있는 때와 같이 1년에 한 번 하나님을 만나려고 하고 있지는 않은가? 

8. 성금요일이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이 2000년 전 오늘과 같은 금요일이었다. 그 분이 삶으로 보여주신 복음을 내 삶으로 받아들이고, 하나님 앞으로 계속해서 나아가자. 휘장이 벗겨진 것을 다시 닫으려고 하지 말자. 자꾸만 자꾸만 그 분 앞으로 더욱 더 나아가자. 하나님을 만나야 수시로 만나야 내 삶이 변한다. 

9.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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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 23:26-33 예수님을 몸으로 아는 삶, NIBC

1. 예수님이 골고다로 올라 가신다. 가는 길에 우연히 구레네 사람 시몬을 만나게 되고, 그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강제로 대신 지게 된다. 시몬의 입장에서 이게 무슨 날벼락인가?

2. 그가 예수님을 멀찍이서 알았을 거라 생각한다. 예수님이 그 때에 이스라엘에서 행하신 일들이나, 헤롯도 예수님을 기대했던 것을 보면 구레네 사람 시몬도 예수님에 대해 좋든 싫든 어떠한 지식을 가지고 알고 있었으리라.

3. 하지만 멀찍이서 예수님을 아는 것과 혹은 그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한 것과 그가 죽으러 가는 골고다 언덕에 십자가를 대신 지는 것은 매우 다른 일이다. 이제 구레네 사람 시몬은 예수를 머리로 아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알았을 것이다. 

4. 내가 예수님을 만나는 일이 바로 이럴 것이다. 멀찍이서 그가 어떤 분인지, 그는 무슨 말을 하는지를 들으면서 그는 그고, 나는 나다 라는 생각으로 머리로만 이해하려고 해서는 그를 절대로 이해할 수 없고, 그의 삶이 나의 삶이 될 수 없다. 

5. 오직 그 분의 십자가를 지며, 그 분을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몸으로 만나야만 그제서야 그의 삶이 그의 말이 그의 죽음이 그의 부활이 이해가 되는 것이다. 구레네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로 바로 하나님을 몸으로 삶으로 만났다. 

6. 마가복음 15:21절에서는 같은 본문을 이와 같이 기록하고 있다. “마침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인 구레네 사람 시몬이…” 그리고 로마서 16장 13절에서 바울은 안부를 전하며 “주 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루포와 그의 어머니에게 문안하라 그의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니라"

7.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그의 아내로 부터 시작되었는지, 남편이 구레네 사람 시몬으로 부터 시작되었는지 알 수는 없다. 하지만 구레네 사람 시몬은 머리가 아니라 몸으로 가슴으로, 그의 십자가의 무게를 느끼는 그의 삶의 행동으로 예수님을 만났고, 그의 가정은 그렇게 예수님께 헌신된 가정이 되었고 사도 바울이 친 어머니라고 부를 정도로 사도 바울의 전도 사역을 위해 힘써 도왔다. 

8. 머리로 그리스도를 아는 것, 물론 모르는 것 보다는 낫다. 하지만 몸으로, 가슴으로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면 우리의 삶은 변하지 않는다. 몸으로 가슴으로 예수님을 만나는 내가 되고 싶다. 그리스도의 통치하심이 내 삶에서 몸으로 가슴으로 느껴지면 좋겠다. 구레네 사람 시몬과 같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같이 지고 싶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마 16:24

9. 구레네 사람 시몬은 이 말씀을 문자 그대로 실천했다. 예수님이 다시 이 십자가를 지실 필요가 없기에 나는 아마도 이 문자 그대로 실천할 일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해야 할 일은 ‘나를 부인하는 것, not I’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는 것 but Christ’ 일 것이다. 오늘도 NIBC Not i, bur Christ가 내 삶에서 실천되고, 경험되어지고, 그리스도의 그 사랑이 그 은혜가 나를 움직이는 하루가 되기를 원한다. 오늘도 교회개척 준비 모임이 줌(Zoom)을 통해서 2번을 하게 된다. 겸손하지만 뜨거운 사랑으로 그들을 더 섬기자. 

10.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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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 23:13-25 누구의 인정을 받기 원하는가? 

1. 예수님은 이스라엘 대제사장들과 관리들과 백성들의 고소와 참소를 통해 빌라도에게서 헤롯에게로, 또 헤롯에게서 빌라도에게로 옮겨진다. 

2. 모인 무리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기를 원했고, 예수가 죄가 없음을 이야기하는 빌라도의 3번의 변호에도 여전히 그들은 강경했다. 죽일 죄가 없는데도 (22절) 군중들의 큰 소리가 죄 없는 예수를 집어 삼켰다 (23절).

3. 그리고 빌라도는 ‘그들이 구하는 대로 하기를 언도하고’ (26절) 라고 본문은 기록하고 있다. 그는 3번의 변호에도 여전히 강경한 이스라엘 백성들과 대제사장들을 설득할 자신이 없었기에 죄가 없는 것을 알았지만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기로 했다. 

4. 다른 사람들의 시선, 인정을 구하는 빌라도의 연약한 모습이었다. 이스라엘 지역의 총독의 자리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폭동이 일어나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5. 때로 옳지 않은 일에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보거나, 혹은 인정을 받기 위해 빌라도와 같은 행동을 할 때가 있다. 다른 사람의 인정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의 평판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삶의 ‘인정의 우상’이다. 빌라도는 하나님을 몰랐기에 그가 하나님의 아들을 눈 앞에서 보면서도 ‘인정’이라는 우상을 섬겼다. 

6. 하나님을 아는 나의 모습은 어때야만 하는가? 누구의 인정이 중요한가? 사람인가? 하나님인가? 사도 바울도 같은 고백을 한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7. 나는 스스로 잘 알듯이 ‘인정의 욕구’가 충만한 사람이다. 그러기에 빌라도의 오늘 행동이 아주 잘 이해가 된다. 오늘 나는 누구를 기쁘게 하기 위해서 살고, 행동하고 있는가? 빌라도 처럼 군중들인가? 나를 인정해 줄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인가? 아니면 사도 바울과 같이 하나님 한 분인가? 

8. 사람들의 인정은 늘 변한다. 내가 무엇을 하느냐에 따라 내가 하는 것이 그들의 필요에 부합하느냐에 따라 변한다. 맞추기가 어렵다. 하지만 하나님의 인정은 나의 행동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인정은 나의 존재로 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내가 그의 자녀이기에, 내가 그의 아들이기에 그 분은 오늘도 나를 인정해 주신다. 행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다 (엡 2:8). 

9. 하나님은 이미 나를 인정하신다. 사랑하신다. 그래서 죽기까지 나를 사랑하셨고,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주셨다. 더 이상 빌라도와 같이 사람의 인정을 구하며 살지 말자. 오직 나를 이미 인정해주신 하나님만 붙들자. 그 복음만 붙들고, 그 복음이 내 삶에 현실이 되도록 살아가자.

10. 코로나로 인해 모든 형태의 사역의 멈췄다. 하지만 감사하게도 교회 개척 준비가 줌 (온라인 화상회의)으로 진행이 되고 있다. 사람의 인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교회 개척이 되기를 원한다. 복음이 충만한 교회가 개척될 수 있도록 함께 준비를 잘 할 수 있게 되기를 원한다. 그리하여 이 복음이 우리 태국의 형제, 자매들에게 잘 흘러갈 수 있기를 간절히 기대한다.   

11.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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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 23:1-12 나는 예수를 어떻게 보고 있는가? 

1. 예수님은 고발 당하셨고, 빌라도에게 보내진다. 빌라도는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서 그를 헤롯에게로 보낸다.

2. 8절은 "헤롯이 예수를 보고 매우 기뻐하니 이는 그의 소문을 들었으므로 보고자 한 지 오래였고 또한 무엇이나 이적 행하심을 볼까 바랐던 연고러라” 라고 말씀하고 있다. 

3. 헤롯은 소문으로만 들었던 예수가 너무 궁금했고, 그에게서 어떠한 기적이나 그의 소문이 사실인지 아닌지를 알아보고 싶었다. 예수를 보고 기뻐했는데 예수를 구원자로써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어떠한 즐거움의 도구로 보고 있다.

4. 예수께서 그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9절), 그의 호기심 혹은 즐거움을 충족시키지 못하자 그는 예수를 업신여기며 다시 자신과 원수지간 이였던 빌라도에게 예수님을 보낸다 (12절).

5. 예수를 보는 시선은 참 다양한 것 같다. 예수를 우리의 구원자로 보는 시선이 있는가 하면, 어떤 이는 그를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의 한 사람으로, 어떤 이는 그를 허언증이 걸린 사람으로.. 또 어떤 이는 그를 세계 4대 성인 중의 한 사람으로 본다.

6. 예수를 우리의 구원자, 하나님으로 보지 못하는 여러 시선들은 오늘 헤롯의 시선과 같다. 예수를 자신의 구원자가 아니라 자신의 어떠한 필요를 채우는 존재로 보기 때문이다. 내가 세워놓은 기준, 생각을 예수님이 채워주시지 않으면 그는 그저 나의 만족도 채우지 못하는 연약한 무엇무엇이 되는 것이다.

7. 나의 시선을 점검해 본다. 나는 예수를 어떠한 존재로 보고 있는가? 구원자라고 말하면서, 하나님이라고 말하면서도 쉬이 그 분을 나의 필요와 만족을 채우는 존재로 격하시켜서 믿고 있지는 않은가? 헤롯과 같이 예수에 대한 관심이 단순히 나의 궁금증과 즐거움의 도구로 보고 있지는 않은가? 

8. 모든 것을 온전케 하실 예수를 보고 있는가? 아니면 나의 욕망이 투사된 예수를 보고 있는가? 예수가 나의 구원자라고 말하면서도 예수 그 자체보다 그에게서 나오는 꿀만 빨려고 하고 있지는 않은가? 그는 우리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내어 주셨는데, 나는 나의 생명을 내어주기 보다는 예수를 믿음으로 인해서 얻을 수 있는 그 좋은 것들만 취하려고 하고 있지는 않은가? 

9. 고난주간이다.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의미,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속죄하신 의미, 그 분이 승천하셔서 하나님 오른편에 앉아서 지금도 이 모든 세계를 다스리고 계시는 의미, 그리고 다시 오셔서 이 모든 우주 만물을 회복시키실 그 의미가 더 선명해지는 한 주가 되기를 원한다. 그리고 오늘 내가 예수를 헤롯의 눈이 아니라 믿음의 눈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기를 원한다. 그 분의 십지가의 사랑이, 그 분의 부활하심의 은혜가 나를 충만하게 덮기를 원한다.

10.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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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 22:47-53 내가 그 치료받은 대제사장의 종입니다

1. 예수님 께서는 자신의 십자가의 길을 기도로 정하셨고, 곧 배신자와 군인들이 그를 잡으러 왔다. 칼로 예수를 잡으러 온 무리들을 향하여 제자 중의 한 사람, 베드로가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베었다. 여차하면 칼로 저항하겠다는 의지였을 것이다. 예수님은 그에게 ‘이것까지 참으라 하시고 그 귀를 만져 낫게 하시더라” 라고 51절은 기록하고 있다. 

2. 수치와 칼을 참고 그 종을 치료까지 해주셨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예수님의 편에 서 있는 사람들만 구원하러 오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분은 그 분과 반대의 자리에 서서 그 분을 거역하고, 그 분을 미워하고, 그 분을 죽이려고 한 그들을 위해서 역시 오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3. 나와 다른 자들을 품는 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가? 생각이 다르고, 리듬이 다르고, 생활 방식이 다르고, 정치색이 다른 사람들을 품는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가? 지금 한국은 같은 신앙을 가졌음에도 정치적인 다름으로 인해 얼마나 나뉘어 있는가? 

4. 그런데 예수님은 품으셨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조차도 사랑하셨다. 그것이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사랑의 모습이었다. 

5. 내가 예수님의 편에 서 있다고 착각하지 말자. 나도 예수님의 반대편에 서 있었던 사람이었다. 교회 옆 집에 살면서도 예수를 알려고 하지 않았고, 예수를 믿는 것에 관심도 없던 사람이었다. 이런 나도 예수님께서 특별한 은혜로 불러주셔서 지금 선교사로 살고 있지 않은가?

6. 그러면 나의 일상은 항상 예수님 편에 서 있는가? 아니다. 그렇지 않다. 예수님 편이 아니라 예수님의 이름을 이용하는 경우도 있고, 믿음을 가진 부모로써, 남편으로써, 선교사로써 부끄러울 때가 얼마나 많은가? 이런 나도 예수님은 품어주셨다. 

7. 예수님께서는 ‘이것까지 참으시면서’ 나를 오늘도 사랑하고 계신다. 이것이 복음이다. 내가 그 죄인이고, 내가 그 예수님과 대척점에 서 있는 사람이고, 내가 예수님과 상관없이 반대 쪽에 서 있었는데, 그 분께서 이것까지 참으면서 나를 살려주신 것이 복음이다. 

8. 내가 믿음이 있다고, 내가 기독교인이라고 내가 예수님 편에 서 있는 사람이라고 착각하지 말자.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나는 죄인이고, 나는 예수님이 필요한 사람이다. 오늘도 나에겐 그리스도의 복음이 필요하다. 

9. 아이들과 24시간 지내는 것이 쉽지가 않다. 기억하자. 난 복음이 필요한 사람이다. 나는 예수님이 필요한 사람이다. 그 복음을 깊이 깨달아 예수님이 하신 것과 같이 ‘이것 까지 참을 수 있는’ 아이들과 있다 보면 그 이것이 참 다양하지만.. 그런 오늘 하루를 보내기 원한다. 아이들에게 화를 내지 말고, 작은 소리로 이야기 하자. 

10.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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