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Thinking)/Meditation2018. 11. 29. 1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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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상 10:14-29 묻고 있는가? 듣고 있는가? 바로 지금 내가 서 있는 이 자리에서?

솔로몬의 세입금이 금 육백육십육달란트라고 한다 (14절). 금 25톤 정도로 대략 1조원이 넘는 규모라고 한다. 너무 어마어마해서 사실 말이 안 나온다. 그 금으로 무엇을 했는가? 방패 만들었다 (16-17절). 금그릇을 만들었다 (21절). 그리고 그 재정으로 큰 군대를 만들었다 (26-29절). 하나님으로 부터 온 큰 지혜를 갖춘 그는 (23절) 더 이상 하나님께 묻지 않는다. 열왕기상을 묵상해오면서 솔로몬이 마지막으로 하나님께 물었던 것으로 기록된 것은 바로 그가 지혜를 하나님으로 부터 받을 때로 기억된다.

그의 아버지 다윗과는 매우 다른 행보였다. 그에게 뛰어난 지혜가 있어서였을까? 그의 지혜가 오히려 그에게 독이 되었다. 차라리 지혜가 없었다면… 차라리 그가 정말 구했던 것처럼 듣는 마음이 늘 있었다면… 듣는 마음이 있었으면 물었을텐데… 이제는 그는 그의 지혜를 의지하고, 그가 보기에 좋은데로, 그가 원하는데로 행하고 살아간다. 그리고 그것은 사실 옳은 선택이었다. 가장 뛰어난 지혜로 결정한 일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결국 그와 하나님을 멀어지게 하였다. 

더 이상 하나님께 묻지도 듣지도 않는다. 우리가 가진 어떤 것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멀게 하는 솔로몬의 지혜와 같은 것으로 작용할 수 있다. 혹은 그것이 가진 것이 아니라 갖지 못한 것이 그렇게 작용할 수도 있다. 가진 것이든 갖지 못한 것이든 하나님과의 만남과 교제를 방해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그것들을 결코 붙잡지 말아야 한다. 하지만 더 많이 가져야만, 혹은 더 많이 버려야만 주님을 만날 수 있는 것만은 아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묻는 은혜가 있어야 하고, 지금 이 자리에서 듣는 은혜가 있어야 한다. 물을 때, 들을 때, 우리가 가진 은사들, 혹은 우리가 아직 갖지 못한 것들일지라도 그것들을 통해 우리의 삶과 다른 사람들의 삶을 풍성하게 되는 것이다. 

묻고 있는가? 듣고 있는가? 
바로 지금 내가 서 있는 이 자리에서?

하나님께 묻고, 듣고 있지 않으면 결국 내가 하나님의 자리에 앉는 것이다.
하나님께 묻고, 듣지 있지 않으면 지금 내가 바벨탑을 쌓고 있는 것이다.
지금 내가 서 있는 이 자리에서 하나님께 묻는 은혜, 듣는 은혜가 있는 하루를 보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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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18. 11. 28. 1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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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상 10:1-14 높아지여야 하고, 드러나셔야 하는 하나님

스바의 여왕이 솔로몬을 찾아왔다. 그가 들은 것은 솔로몬의 명성이 아니라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미암은 솔로몬의 명성’을 듣고 찾아왔다. 그리고 솔로몬과의 모든 대화를 마치고 그녀는 솔로몬을 칭송하고 높인 것이 아니라 (살짝 칭찬하기는 했지만..) 9절에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할지로다’라고 하나님의 이름을 칭송하고 있다. 결국 우리에게 있는 은사가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 사람들로 부터 칭찬 받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가진 은사들이 발휘됨으로 인해서 하나님이 높아 지셔야 한다. 

내게 있는 것들이 나로부터 말미암은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하나님을 높일 수 있다. 내 것이 아닌데 어찌 나를 높일 수 있겠는가? 하지만 모든 것이 주로 왔고, 주로 말미암았음을 고백하기는 쉽지가 않다. 그런데 기억해야 할 것은 은사 뿐만이 아니라 심지어 우리의 호흡, 우리의 생명 까지도 하나님께서 주셨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오늘 하루가 우리에게 주신 선물이라는 것을 알아야 이 하루를 하나님을 높이며 살아갈 수 있게 된다. 하나님이 허락하시지 않으면 이 아침에 눈을 뜨는 것도 사실은 불가능한 것일 수 있다. 그렇게 주어진 귀한 하루를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 

지금 벌써 아이들 비자 때문에 이민국에 와 있다. 태국에 와서 가장 허무하게 시간을 보내는 것 처럼 느껴지는 날이다. 새벽 일찍부터 와서 기다리고, 계속해서 앉아서 기다리다가 우리 차례가 되면 일을 처리하는데, 사람이 너무 많아서 아마도 빨라야 오후 늦게?, 혹은 저녁이 되야 마칠 수도 있는 날이다. 이러한 날에 오늘을 선물로 주신 하나님을 위해 내가 어떠한 것들을 할 수 있겠는가? 어떻게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는 것이 우리로 인해 하나님이 높아지실 수 있는 것일까? 효율성이라는 것이 늘 내 삶에 중요한 가치가 되어 있어서 이러한 시간들을 보내는 것이 늘 힘이 든다. 하지만 오늘은 아이들과 좀 더 많이 이야기 하고, 아이들과 좀 더 친밀한 시간을 보낼 수 있기를 원한다. 

하나님이 주신 이 귀한 하루에 긴 기다림을 통해서 하나님을 깊이 만나기 원한다.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 높아 지셔야 함을,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 드러나셔야 함을 더 깊이 묵상하기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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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18. 11. 27.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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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상 9:10-28 내 삶을 움직이는 동기, ‘사랑'

오늘 솔로몬은 자신을 위해 유리해 보이는 모든 것들을 하고 있다. 성도 짓고, 역군도 일으키고, 바로의 딸과도 결혼하고… 그리고 그러면서도 그는 25절에서 ‘해마다 세 번씩 번제와 감사의 제물을 드리고 또 여호와 앞에 있는 제단에 분향하니라’ 내 마음대로 살고, 내 마음대로 행하면서 예배도 드린다.

오늘 솔로몬의 정치적 행적들의 근본 원인은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염려’였다. 성을 쌓는 이유는 항상 염려이다.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성을 쌓는 것이다. 정략결혼이 왜 존재하는가? 바로의 딸과 왜 결혼하는가? 애굽이란 강대국이 자신을 침범해서 자신의 왕의 자리를, 자신이 가지고 있는 부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염려 때문이다. 염려는 결국 하나님을 하나님의 자리에서 내리고, 나 자신을 하나님의 자리에 앉게 한다.

그가 예배한 이유도 아마도 ‘염려’ 때문이었을 것이다. 자신이 만난 하나님을 예배 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자신의 자리를 어떻게 하실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그를 예배의 자리로 꼬박 꼬박 나오게 하였다. 그의 예배의 이유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아니라 ‘두려움이었다. 그는 사랑 자체이신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고, 자신의 두려움을 예배하며 두려움이 자신에게 겁 주는대로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행하게 되었다. 

오늘 나를 움직이는 동기가 무엇인가? ‘사랑’인가? ‘두려움’인가? 요즈음 요엘이 때문에 여러가지 고민들을 하고 있는데, 나는 요엘이를 ‘사랑’때문에 요엘이를 위해 참고, 인내하고, 기다리고 있는가? 아니면 요엘이가 잘못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때문인가? 오늘 랑캄행 대학교 영어 시험반 대비 클래스를 시작하였는데, 그 동기가 ‘사랑’때문인가? 하나님을 예배하는 이유가 ‘사랑’때문인가? 아니면 ‘주일에 교회에 가야 하는 당연함’때문인가? 내 삶에도 ‘두려움, 염려’가 이유가 되어 움직여지는 일들이 분명히 많아 보인다. 하지만 내 삶이 솔로몬과 같아지기를 원치 않는다. 그의 삶을 반면교사를 삼아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내 삶의 모든 이유가 되기 원한다. 두려움을 쫓아가지 말자. 하나님을 쫓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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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Thinking)/Meditation2018. 11. 26. 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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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상 9:1-9 하나님의 신실하심(거룩하심) 안으로 더 깊이, 더 깊이

솔로몬이 왕국 건축을 마치고 기도한 내용에 대해서 하나님이 응답하신다. 1절 후반부에는 ‘자기가 이루기를 원하던 모든 것을 마친 때에’ 라고 설명한다. 하나님이 원하신 것이 결코 아니었다. 솔로몬의 야망이었을수도, 혹은 솔로몬의 욕망이었을수도 있었지만 하나님은 그런 것을 넘어 그의 기도에 응답해주신다. 그리고 이 성전을 그들의 소원대로 거룩하게 구별하시며, 하나님의 눈길과 마음을 항상 거기에 두시겠다고 하셨다 (3절). 

그렇다. 하나님은 우리의 연약함에도, 우리의 야망과 욕망에도 우리를 사용하셔서 그 분의 뜻을 이루시는 하나님이시다. 우리가 연약하다고 하여 하나님의 은혜가 하나님의 뜻이 멈춰서는 것은 아니다. 죄인을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일을 이루시는 분이 우리 하나님이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일은 내가 어떠함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실함에 달려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내가 연약하다고, 내가 욕망한다고 두려워 말자. 물론 욕망과 두려움을 합리화시키자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내가 이 땅에서 섬기며 살아갈 때 계속해서 의지해야 하는 것은 나의 어떠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어떠함, 곧 그 분의 신실하심이다. 

신실하신 그 하나님께서 관심을 가진 것은 화려한 성전이 아니었다. 하나님의 관심은 우리의 순종에 있었다. 순종의 내용은 한결같다. 4절에 ‘네가 만일 네 아버지 다윗이 행함같이 마음을 온전이 하고 바르게 하여 내 앞에서 행하며 내가 네게 명령한 대로 온갖 일에 순종하여 내 법도와 율레를 지키면’ 한 마디로 말하면 거룩하신 하나님께 합당하게 살라는 것이다. 율법이란 것이 무엇인가? 무엇이 거룩하고, 혹시 우리의 거룩을 잃으면 어떻게 다시 정결하게 하는지를 기록한 책이 아닌가? 온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얼마나 좋으신 분인지, 얼마나 거룩하신 분인지를 보여주신 책이 바로 이 율법책들(모세오경)이 아닌가? 결국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우리의 거룩함이고, 우리와의 동행이다. 즉 순종이라는 것은 거룩하신 하나님과 동행할 정도의 친밀함과 거룩함을 유지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과연 하나님께 합당한 존재들인가? 아니다. 우리가 어찌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겠는가? 불가능하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길을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열어 주셨다. 요 14: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라고 말씀하셨다. 결국 우리는 우리의 거룩함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 예수님 앞으로 나아가야만 하는 것이다. 예전 어느 책에서 봤는데(제목은 기억이…), 유대인의 율법에서 정결은 정결한 것이 부정한 것을 접촉하게 되면 부정해진다. 그런데 이 모든 율법을 바꾸신 분이 예수님이신데, 예수님께서는 부정한 것들을 만지심으로 치료하고, 낫게 하시고, 회복하시고, 온전하게 하셨다. 즉, 유일하게 정결한 것이 부정한 것과 접촉하였을때, 함께 깨끗하게 하시는 분이 예수님이시다. 그러면 우리가 거룩해질 수 있는 방법은 바로 예수님께 붙어야 하는 것이다. 예수님을 만져야 하고, 예수님께 닿아햐 하는 것이다. 

오늘도 그 예수님께 더 깊이 나아간다. 나의 어떠함이 아니라 그 분이 신실한 약속을 의지하여… 길이고, 진리이고, 생명이신 그 분께서 '내게로 오라 (마 11:28)’라고 이야기 하신다. 그 약속을 의지하여 그 분 앞으로 더 깊이 나아가고 싶다. 오직 나를 정결케 하실 수 있는 그 분께 더 깊이 나아가고 싶다. 묵상이 묵상으로 끝나지 않기를, 기도가 기도로 끝나지 않기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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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Thinking)/Meditation2018. 11. 24. 1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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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상 8:44-53 절망의 존재들임을 인식하는 것

오늘 솔로몬의 고백은 사도바울의 고백과 비슷하다. 46절에서 ‘범죄하지 아니하는 사람이 없사오니’로 시작한다. 그리고 솔로몬은 그럴때 스스로 깨닫고 돌이켜 기도한다면 (47절) 그들을 용서해달라고 했다. 왜냐하면 그들의 주께서 애굽에서 인도해내신 백성, 주의 소유이기 때문이다 (53절). 사도바울은 어떻게 고백했는가? 로마서 3:23 에서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며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4절에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라고 이야기 하고 있다. 

사람에 대한 인식은 똑같다. 우리는 연약하고, 우리는 죄인이고, 죄를 이겨낼 수 없는 존재들이란 것이다. 다만 그럴 때에 솔로몬의 고백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징계를 받고 ‘스스로’ 깨우쳐서 기도할 수 있는 존재들이라 생각하고, 사도바울은 우리가 ‘스스로 할 수 없는 존재들’이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속량이 필요하다고 말씀하고 있다. 아직 그리스도를 보지 못한 솔로몬의 관점과 그리스도를 본 바울의 관점의 차이이고, 이것은 매우 큰 차이점이다. 우리가 죄인이고,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우리가 주의 소유임에는 틀림없다. 하지만 죄인에서 주의 소유가 되는데 있어서 필요한 것이 구약에서는 희생제사였다면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 필요로 한 것이다. 

솔로몬도, 바울도 ‘내가 할 수 없는 절망의 존재’라는 것에 인식을 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해 보인다. ‘절망의 존재들’에게만 희망이 필요하고, ‘절망의 존재들’에게는 기도가 필요하고, ‘절망의 존재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심령이 가난한자가 천국이 그들의 것이라고 선포하신 산상수훈이 그런 의미에서도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매일 삶에서 내가 할 수 없다는 절망을 느낀다. 어느 순간은 어 괜찮네? 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찰나일 뿐, 더 많은 순간은 내가 할 수 없다는 생각들이 가득하다. 그 순간 순간 그 절망 속에서 오직 예수로만 새 힘을 얻기 원한다. '예수 그리스도 한 분으로 충분합니다'라는 고백이 내 삶에서 나타나기 원한다. 나를 주의 백성, 주의 소유 삼아주신 그 은혜를 내 삶에서 드러내기 원한다. 아이들에게 형제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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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18. 11. 23. 1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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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상 8:33-43 하나님을 램프의 지니로 만들지 말라

자신의 백성들에 대한 기도를 다 마친다음(33-40절) 솔로몬은 이제 다른 민족들을 위해 기도한다 (41-43절). 어제 말했던 타자의 하나님을 부른 것일까? 어떤 마음이었을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솔로몬은 이방인들을 위해서도 기도한다. 적극적인 하나님에 대한 증거가 아니라 그들이 혹시 소문을 듣고 온다면…(43절)의 전제가 있다. 선교학에서는 이것을 가는 선교, 오는 선교로 구본해서 설명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이방인에 대한 배려도 있다고 하니 그것만 해도 괜찮아 보인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솔로몬과 다니엘의 차이점이 보이는 구절이 있었다. 40절은 ‘그리하시면 그들이 주께서 우리 조상들에게 주신 땅에서 사는 동안에 항상 주를 경외하리이다’라고 기도하고 있다. 자신과 자신의 백성들의 모든 기도를 올려드리고, ‘그리하시면’ 주를 경외하겠다고 기도하는 것이다. 다니엘은 어떻게 기도했는가? 단 3:18 ‘그렇게 아니 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에게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라고 그들의 상황과 관계 없는 믿음을 이야기 했다. 

‘그리하시면’의 솔로몬과 ‘그리 아니하실지라도’의 다니엘이 계속 비교된다. 나는 어떻게 기도하고 있는지를 돌아보게 된다. 솔로몬처럼 이것 저것 해달라고 기도하고 ‘그리하시면’ 주님을 잘 섬기겠다고 기도하는가? 아니면 다니엘과 같이 내 삶에 어려움이 있고,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 순간에도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만 섬기겟다고 기도하는가? 나의 기도는 솔로몬과 같을 때가 너무도 많다. 타자의 하나님께 기도하기 보다는 나의 하나님께 나를 위한 램프의 지니가 되어 달라고 기도할 때가 너무나도 많다. 솔로몬과 같이 직설적으로 나를 위해 램프의 지니가 되어 달라고 기도하지 않지만 조금 더 고상한 방법으로 하지만 내용은 같은 기도를 올려 드리고 있는 것 같다. 

하나님은 결코 나를 위한 나만의 램프의 지니가 될 수 없다. 하나님을 나에게 맞추려고 하지 말고, 나를 하나님께 맞추자. 하나님께 내 편이 되어 달라고 기도하지 말고, 내가 하나님 편에 서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자. 하나님을 나를 위한, 나만을 위한 작은 신으로 만들지 말고, 우주보다 더 크신 그 분의 자리에 계시도록 하자. 결국은 마음의 주인 문제이다. 하나님이 내 삶의 왕이신가? 아니면 내가 왕인가? 내가 램프를 지닌 알라딘과 같은 존재라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내가 왕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오늘은 기도의 모습을 좀 바꿔보기 원한다. ‘~해주세요’의 기도 보다는 ‘주님의 마음이, 주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라는 기도를 드리기 원한다. 정말로 묻는 은혜가 있기를 원한다. 조금 더 나를 비워내고 조금 더 주님으로 채워내는 하루가 되기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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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18. 11. 22. 1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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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상 8:22-32 그들의 하나님(타자의 하나님)을 만나자.

오늘 본문에서 솔로몬이 성전을 완성하며 하나님께 기도 드린 것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1. 아버지 다윗에게 하신 말씀을 지켜달라는 것과
  2. 자신의 기도와 간구를 들어 달라는 것
  3. 그리고 악은 심판하시고, 의로운 행위에 대해서는 갚아 달라는 것이었다.

근데 이 세 문장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자면 ‘우리(이스라엘) 좀 잘 되게 해주세요’라고 요약이 된다고 본다. 내 후손들 잘 되게 해주시고, 우리 백성들이 기도할 때 들어주시고, 혹시 잘하는 것 있으면 갚아주세요 라는 것이다. 솔로몬은 여전히 하늘도 용납하지 못하는 하나님을(27절) 이스라엘의 하나님만으로 생각하고 제한해서 생각하고 있다. 솔로몬에게 그것이 어쩌면 당연해 보이기도 한다. 여전히 유대인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 처럼 말이다. 

많은 순간 하나님을 우리의 하나님으로 그들의 하나님으로 보기 보다는 ‘우리의 하나님’으로 축소시켜 생각한다. 특히 한국 사람에게는 ‘우리’라는 단어는 좀 특별하다. 그래서 영어를 쓸 때도 가끔 틀리지 않는가? 나와 우리의 개념의 차이 때문에… 솔로몬에게 하나님은 이스라엘 공동체의 하나님이었다. 그런데 나의 삶에서도 하나님이 나만의 하나님 혹은 우리만의 하나님일 때가 매우 자주 있다. 

우리 모두의 하나님으로, 또 그들의 하나님으로 보지 못하고 나만의 하나님으로만 보기 때문에 타인들의 아픔과 슬픔에 무관심하게 되고, 내가 얻을 것만을 간구한다. 내가 더 먹으면 다른 사람들은 못 먹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것만을 구했다. 함께 이 길을 걷기 보다는 그들은 그들이고, 나는 나로 살아가려고 할 때도 많다. 내가 가장 우선이 되고, 내 가족이 가장 우선이 된다. 그것을 조금이라도 침해하면 ‘나의 하나님’께 그들의 잘못을 낱낱이 아뢴다. 진정한 ‘우리의 하나님, ‘그들의 하나님’이 내 삶에서 실종된 것은 아닌지? 오늘 솔로몬의 기도를 보며 회개하게 된다. 

예수님은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라고 하셨는데, 나는 나의 나라와 나의 의만 구하는 것 같다. 어찌할꼬.. 어찌할꼬… 언제쯤 ‘나 좀 잘 되게 해주세요’의 신앙에서 벗어나서 공동체와 우리를 볼 수 있을까? 답답하기만 하다. 언제쯤 ‘우리’의 개념이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더 넓은 하나님의 자녀들로 품을 수 있을까? 
예수님께서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해 우리의 이웃이 누구인지를 넓혀 주셨다. 내 삶에서도 우리 가족들, 우리 형제들, 우리 교회, 우리… 가 아니라 그 지경이 선한 사마라이인까지 넓혀지기 원한다. 오늘은 묵상하는데 참으로 서글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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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Thinking)/Meditation2018. 11. 21. 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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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상 8:12-21 내 몸이 성전이다. 

솔로몬이 성전을 봉헌하고 있다. 그런데 누구를 위해 하고 있는가? 그는 오늘 본문에서 여러번 이야기 한다. 13절에서는 ‘주를 위하여’ 성전을 건축했다 말하고, 20절에서는 ‘여호와의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했다 말한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그는 우주보다 더 크고 광대하신 하나님을 작고 작은 성전에 가두려고 하고 있다. 우주보다 크신 하나님을 이스라엘의 하나님만으로 축소시키고 있다. 그런데 실제로 하나님이 그들을 위해 그 위에 임재하신다. 우리의 작은 머리로 하나님을 제한하고, 제한하지만 하나님은 그러한 우리 위에 역사하신다. 이것이 은혜이다. 

어제 페이스북에 열왕기상을 묵상하면서 솔로몬 안티가 되어 간다고 올렸었다. 그런데 어느 한 분이 댓글에다가 '솔로몬과 우리가 다른 것은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습니다.’ 라고 달아주셨다. 정말로 맞는 말이다. 나 또한 하나님을 제한하고, 내 작은 머리로 하나님을 작게 보며 내 마음대로 하려고 한다. 그런데, 그런 나를 어떻게 구언해 주시는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케 하셨다. 이것이 복음이다. 솔로몬에게도 나에게도 우리는 모두 복음이 필요하다. 솔로몬과 내가 무엇이 다른가?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은 다르지만 결국 우리는 하나님을 작게 보고, 제한하고, 그 크고 광대하신 하나님을 내 작고 작은 어느 지점에서 내가 원하는 그 무엇인가를 해달라고 기도하는 존재로 여기지 않는가? 

사도바울은 고전 3:16에서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라고 이야기 하고 있다. 정말 우주에서 먼지도 안되는 우리 같은 작은 존재들 안에 그 크신 하나님께서 오셔서 거하시는 것이다. 우리의 몸이 성전이고, 이 안에 성령 하나님께서 거하신다. 복음은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없는 우리가 하나님을 알게 하는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성전’이 되게 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 이시지만, 그렇다고 나만의 하나님은 아니시다. 온 우주의 하나님이시다. 

우리의 몸이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인 것을 전해야 한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님이시고, 하나님이시며, 그 분이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이 기쁜 소식을 말이다. 내 몸이 성전이다. 
온 천하보다도 더 크신 하나님께서 이 몸에 거하시니, 이 몸의 소망은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다. 오늘도 그 분의 사랑과 복음을 기억하며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기 위해 애써야겠다. 하지만 이 애씀조차도 내 힘으로 할 수 없는 것이다. 그저 주님이 거하시도록 내 몸을 내어 드리는 것, 내가 죽고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 바로 그것이 오늘 내가 살아야 하는 삶이다. 분을 죽이고, 혈기를 죽이고,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자. 웃는 얼굴과 용서받은 자 로써 용서하자. 내 몸이 성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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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Thinking)/Meditation2018. 11. 20. 1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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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상 8:1-11 말씀대로, 말씀 외에 아무것도 없는 삶으로의 초대

성전 완성 이후 언약궤는 제 자리로 돌아갔다 (1-5절). 언약궤 이동에 있어서 계속 반복되는 단어는 ‘메다’ 이다. 1절, 2절, 4절 계속해서 연약궤를 메고 올라감을 보여 준다. 이것이 무엇인가? 하나님이 말씀하신대로임을 이야기 하고 있다. 솔로몬은 다윗의 실패를 반복하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께서 언약궤를 옮기는 방법에 대해서 알려주신대로 행했다. 말씀대로 순종했다. 

언약궤 안에는 무엇이 있길래 그렇게 소중하게 옮겼을까? 9절에서 '그 궤 안에는 두 돌판 외에는 아무것도 없으니’라고 이야기 하고 있다. 이 돌판은 시내산에서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받아온 말씀이 적힌 판이다. 즉 그렇게 귀중하게 옮긴 그 안에 실제적으로 담겨 있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9절에서 가장 확실하게 말하고 있다. ‘두 돌판 외에는 아무것도 없으니…’ 그렇다. 하나님의 약속과 말씀 이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우리의 삶에도 그 약속과 하나님의 말씀 외에는 아무것도 없어야 한다. 그것이 진짜 우리의 믿음의 실제이다. 

그리고 10-11절에 여호와의 영광이 가득했다. 예전에는 하나님이 성전 건축을 기뻐하셔서 그 안에 가득하게 임재하신다고만 생각했다. 타이망상 그렇게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계속해서 열왕기상 말씀을 보며 느끼는 것은 성전건축이 완성되어서 하나님이 기쁘셔서 그 안에 영광으로 임재하신 것이 아니란 생각이 든다. 그들이 말씀에 순종하여 궤를 메어 옮기고 (1-5절), 그 궤 안에 말씀 이외에 아무것도 없는 데 언약궤를 그렇게 소중히 여기는 그 마음에 하나님이 임재하여 주신 것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해 보인다. 

즉 말씀대로 순종함과 앞으로도 그 말씀에 우선순위를 두고 살 것을 다짐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하나님께서 그 영광을 보여주신다. 성전을 주님께 드리는 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우리의 전 존재가 하나님 한 분으로 기뻐하는 것,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과 말씀 외에는 아무것도 사랑하지 않기로 결정하고, 그것에 우리의 전 존재를 드리는 것을  기뻐하신다. 율법적인 순종함을 말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사랑에서 우러러 나오는 순종을 기뻐하신다. 

나도 오늘 내 삶에 그러한 순종이 먼저 있기 원한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들을 자의적으로 해석하지 말고, 먼저 사랑함으로 순종하기 원한다. 궤를 어깨에 매든 손으로 들든 무슨상관인가? 라는 내 이해의 방식의 순종이 아니라 그것이 내 이해의 범위를 벗어나거나 혹은 비상식적으로 생각되더라도 그것에 기쁨으로 순종하기 원한다. 말씀에 대한 순종은 이해를 넘어서야 한다. 이해가 먼저가 아니라 순종이 먼저이다. 두 번째로 내 삶에서도 오늘 말씀과 약속 이 외에는 아무것도 없기를 원한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하나님 외의 것들을 얼마나 사랑하고, 쫓고 있는가? 말씀을 가장 소중히 여기기 원한다. 태국 성경을 계속 보고 있다. 지금 마태복음을 절반 정도 읽은 것 같다. 읽으면서 이것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대하기 보다는 공부의 대상으로 여기며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 오늘은 이것을 공부의 대상이 아니라 진짜 말씀으로 대하는 은혜가 있기 원한다. 

오늘을 주님께 의탁드리며 주님의 은혜가 있기를 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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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18. 11. 19.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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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상 7:40-51 묻는 은혜, 동행하는 은혜

어느 순간 묵상을 하면서 '~을 위하여'라는 단어가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아마도 내 삶에서 하나님을 위하여 한다는 그 헛된 포장이 많아서 그렇게 느껴졌나 보다. 오늘 솔로몬은 드디어 성전 기구들을 죄다 완성해서 옮겼다. 다 좋았는데, 51절을 읽는데 이 단어가 못내 마음이 불편했다. ‘여호와의 성전을 위하여…’
솔로몬은 이 성전의 모든 내용들을 여호와를 위해 만든 것이 아니었고, 성전을 위해서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이 성전의 설계와 내용물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것이 아무것도 없다. 성막은 모세에게 어떻게 만들라고 하나님이 모조리 지시하셨고, 모세는 거기에 순종했지만, 성전은 하나님이 어떤 것도 말씀하시지 않았다. 솔로몬의 지혜대로, 솔로몬의 생각대로 만들어져가고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하나님을 위한 것도 아니고, 하나님의 성전을 위한 것이라는 말에서 느껴지는 이 불편함… 하지만 많은 순간 내 삶도 ‘주를 위해’라는 타이틀을 걸어놓고, 내 맘대로 하고 있는 것이 많다는 생각이 든다. 왜 하나님께서는 이 성전 지으시는데 간섭하지 않으셨을까? 왜 아무런 말씀도 하지 않으셨을까? 주신 그 지혜 안에서 알아서 하라는 자유의지의 표현일까? 여러가지 생각이 들지만 처음으로 돌아가면 솔로몬이 하나님께 묻지 않았던 것 같다. 다윗의 인생은 묻는 은혜가 있었다. 솔로몬의 인생은 묻는 은혜가 없다. 묻지 않고 자의적으로 한다. 자의적으로 하니 ‘하나님으로 인해, 하나님과 함께’라기 보다는 ‘하나님을 위해, 성전을 위해’라고 표현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하나님께 물어야, 여쭤보고 들어야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걸어갈 수 있다. 학생 때 가장 싫어했던 표현이 하나 있다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공부한다’라는 표현이었다. 이것만큼 내 중심적인 표현이 어디에 있는가? 내가 무엇이길래 주님의 영광이 나한테 달려 있는가? 우리는 그 분을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들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없어도 충분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함께 공부한다’가 더 적절해 보인다. 

오늘도 내 삶에 무엇인가를 ‘하나님을 위해’ 한다는 잘못된 비복음적인 생각을 하고 있는 영역이 없는가? 나는 하나님을 위해 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있는 존재이다. 내가 누구인지를 망각하지 말자. 은혜로 구원받았고, 내가 내 구원을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임과 마찬가지이다. 나는 주를 위해 아무것도 할 수도 없고, 그런 생각도 버려야 한다. 내가 오늘 붙잡아야 할 것은 그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다. 그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그 하나님께 묻는 것이다. 묻는 은혜가 오늘도 내 삶에 있기를 원한다. 

하나님께 물어야 산다. 물어야 듣는다. 물어야 순종한다. 어떤 모양, 어떤 모습으로 섬길 수 있을지 물어야 한다. 오늘도 묻는 은혜, 함께하는 은혜가 충만하게 내 삶에서 나타나기 원한다. 제발 좀 묻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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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