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Thinking)/Meditation2018. 11. 6. 1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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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상 2:13-25 내 안에 있는 아도니야 

아도니야는 자신의 입으로 아우 솔로몬이 왕이 된 것은 여호와로 말미암았다고 고백한다. 하지만 진정한 그의 고백은 아니었다. 그는 다윗을 섬겼던 수넴 여자 아비삭을 요구한다. 이것은 둘째 아들 압살롬이 아버지를 몰아내고 아버지의 후궁과 동침했던 것과 유사하게 자신이 왕위를 계승할 수 있는 정통자임을 주장하기 위해서였다. 잔머리를 굴린 사건이었다. 특별할 것이 없는 것 같았던 요구 속에 그의 욕망과 욕심이 꿈틀거린다. 그는 여호와로 말미암은 일을 자신의 생각과 행동을 통해 돌이킬 수 있다고 믿었던 것 같다. 

심히 큰 교만이다. 그 교만한 자의 마지막은 죽음 밖에 남지 않았다 (23절). 솔로몬이 주일 본문에서 악한 것이 보이면 죽을 것이라고 경고를 했는데, 그는 자신의 죽음을 자초하고 있다. 그의 교만한 모습을 보며 나에게도 동일한 교만이 있음을 보게 된다. 하나님의 일이라고 말하면서, 이 사역은 하나님의 것이라고 말하면서 얼마나 많은 내 생각을 더하고, 얼마나 많은 내 계략과 내 의견, 내 마음, 등등의 것들을 더하고 있는가? 내 것이 아닌데도, 내 것처럼 붙잡고 있는 것들이 수도 없이 있는 것을 발견한다. 그것도 아도니야처럼 간교한 모습으로.. 아닌 척 하면서.. 겸손하고, 공손한 태도로 말이다. 

언어 공부를 하면서도 내 안에 계속 꿈틀거리는 욕망들이 있다. 팀 켈러의 복음을 공부하면서 머리로는 복음을 이해하면서도, 여전히 삶에서는 복음이 아니라 나의 공로를 의지하고 있다. 내가 이렇게 하니까, 내가 이런 부분에서 이렇게 헌신 하니까, 내가 이렇게.. 내가 이렇게.. 내가 이렇게.. 내가, 내가, 내가.. 아도니야가 멀리 있지 않다. 바로 내 안에 아도니아가 있다. 복음이 아니라 공로로, 내 행위를, 내 생각을 의지하는 내가 내 안에 있다. 더욱 더 복음 앞에 내 자신을 내려놓는다. 은혜 아니면 설 수 없는 나 같은 사람을 하나님께서 선교사로 불러 주셨고, 은혜가 아니고서는 단 한 걸음도 내 딛을 수 없는 나를 선교사로 이 태국 땅까지 보내셨다. 더욱 더 복음 위에 서기 원한다. 내 존재와 내 세계관이 여전히 내 힘으로, 내 지혜로, 내 생각으로 하겠다는 마음이 아니라 오직 은혜로 내가 그 주님의 일에 참여하는 것임을 배울 수 있기를 원한다. 

어제 읽었던 팀 켈러의 ‘당신을 위한 갈라디아서’ 에서 두 구절 함께 나눕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생각하기를 구원은 복음으로 받지만 성장하려면 성경 원리들을 삶 전반에 적용해야 한다고 여긴다. 하지만 사실  우리는 복음으로 구원 받을 뿐 아니라 복음을 삶 전반에 적용하여 성장한다”

“우리가 순종하지 못하고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지 못함은 단지 의지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따라서 더 열심히 해서는 이런 실패를 해결할 수 없다. 더 열심히 하겠다는 결심은 어차피 자력으로 율법을 지키겠다는 결심에 불과하다. 그보다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게 있다. 모든 불순종의 뿌리는 행위를 통한 의로 자신의 삶을 통제하려는 우리의 고질적 습성에 있다.”

내 안에 아도나아를 뿌리뽑기 원한다. 교묘하게 복음이 아닌 것들로 내 삶을 채우려고 하는 시도들을 멈추고, 오직 하나님의 역사와 일하심만이 내 삶에 나타나기 원한다.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았고, 나는 그 분의 손 안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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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18. 11. 5. 1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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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상 2:1-12 ‘Be strong, and be courageous’

우리 모두는 누구나 죽는다. 모든 사람들이 그 길로 가게 되어 있다 (2절). 다윗이 마지막 그의 걸음을 정리하면서 하는 유언이 오늘 본문이다. 유언은 아마도 그의 전 생애를 통해서 전하게 되는 그 무엇인가일 것이다. 유언을 통해서 그 사람이 남기고 싶어 하는 가치, 그 사람이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다윗의 유언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 길로 행하여 그 법률과 계명과 율례와 증거를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 대로 지키라’라고 유언하였다. 다윗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었고, 그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그 분과 함께 가는 것이었다. 

그리고 잘못한 사람에게 갚을 것은 갚고 (5-6절), 그간 은혜를 베풀어 준 사람들에게는 또한 그것을 갚으라는 (7-12절) 것이다. 이 모든 것을 한 단어로 굳이 표현하자면 오늘 본문에 나온 것 처럼 ‘힘써 대장부가 되고’ (2절 후반부) 로 표현할 수 있겠다. NRSV 영어 성경은 이 부분을 ‘Be strong, and be courageous’ 로 번역하고 있다. 단순히 남자에게 명한 말씀이 아니라 용기있게 행동하라는 관용적 표현임을 알 수 있다. 진정으로 용기 있는 것은 진정으로 멋진 길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옳은 것은 옳다고, 잘못된 것은 잘못 되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삶을 이끌어 가시면, 우리가 그의 말씀을 붙들고, 그의 명령에 순종한다면 우리는 진정으로 용기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용기있게 말하면서 사회의 부조리나 정의롭지 못함에 대해서 침묵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킨다고 하면서 그것이 내 안에만 머물러 있는 것은 용기있는 행동도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에 정말로 순종하는 길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진정으로 정의롭고, 고아와 과부들을 돌아보기를 원하신다. 그런데 자꾸만 예수 믿는다는 것을 내 개인 신앙으로 축소시키려고 한다. 복음이 선포되는 곳에서는 그 곳의 불의와 문제들도 함께 해결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내가 돌아봐야 할 고아와 과부들, 그리고 불의들은 무엇일까? 

아직 잘 모르겠다. 내가 어떻게 섬기고, 어떤 길로 가야 할지 모르겠다. 단순히 복음만 선포하고, 복음 공동체를 만든다면 그 다음에는? 미리 관심을 가지고 사회를 바라보자. 정말로 내가 먼저 말씀 안에서 ‘Be strong, and be courageous’ 해야 하고, 그리고 주변을 이 마음으로 바라보아야겠다. 고아와 과부, 미혼모, 성적혼란이 있는.. 성전환자들, 가난한 자들.. 주님이 나에게 어떠한 부분을 더 보게 해주시는지 기도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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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18. 11. 4. 2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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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상 1:40-53 그들은 (우리는) 각기 갈 길로 갔지만...

아도니야의 계략이 실패했다. 모든 일은 하나님이 정하신대로, 약속하신 메시아를 오게 하는 방법으로 가고 있다. 자신이 잘 나가고 있고, 이제 곧 왕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아도니야는 아주 큰 소리를 듣는다. 그들은 이제 잔치를 통해서 자신의 왕위 등극을 밝힐 참이었다. 얄굳게도 식사가 마쳐가는 시간이 될 때 이 환호성을 들었고 (41절), 그 모든 소식을 들은 그들은 다 놀라 일어나 각기 갈길로 갔다 (49절). 

그들의 시작은 화려해보였다. 많은 사람들을 따돌리고, 자신들이 얼마나 유력한 자들인지를 보여주며 그들만의 리그를 만들었다. 하지만 자신의 욕심을 따라 움직이는 그 길에 하나님은 계시지 않았다. 주와 같이 가는 길이 아니면 그 길은 주의 길이 아니다. 주의 길을 걷지 않는 그 마지막은 자신의 욕심을 따라 각기 제 갈 길로 가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이사야 53:6

결국 그 마지막은 망하는 길이고, 넘어지는 길이고, 죽음의 길이다. 우리가 하나님과 같은 길을 걷지 않는 그 모든 순간의 마지막은 이와 같다. 우리가 아도니야와 같지 않다고 어떻게 자신할 수 있는가? 늘 하나님 핑계를 대면서도 하나님과 같이 가지 않는 길을 걸어갈 수 있는 것이 우리이다. 하지만 늘 이렇게 각기 제 길로 가는 우리들을 하나님은 살려 주셨다. 그 방법은 이사야서 53:6절의 후반부에서 말씀하시는 것 처럼 우리 모두의 그런 죄악들을 그(예수)에게 담당시키신 것이다. 

솔로몬은 아도니야에게 그에게 악한 것이 보인다면 죽을 것이라고 했다 (52절). 행위로 판단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삶도 행위로 판단하면 다 죽을 목숨이다. 그 누가 살아남겠는가?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죄악들을 예수님께 담당시키셨다. 우리가 할 것은 그 분의 이름을 믿는 것, 그 분을 우리의 구주, 구세주로 받아 들이는 것 뿐이다. 이것이 복음이고, 이것을 우리의 삶으로 실천하는 것이 복음으로 살아내는 삶이다. 

오늘 영광교회 팀이 치앙마이 북부 매해쪽으로 선교를 떠났다. 나는 수요일에 조금 늦게 합류하게 된다. 우리가 가서 전할 것은 바로 이 복음이다. 나를 살려주신 그 복음을 그들에게 정확하게 전하기 원한다. 그들이 복음을 전하는 아름다운 발을 통해서 예수를 알게 되고, 만나게 되고, 믿게 되길 원한다. 그리고 나도 아도니야와 같은 나를 살려주신 그 값없는 복음을 더 복음을 정확하게 깨닫고, 복음으로 더 살아내길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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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18. 11. 3. 1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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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상 1:28-39 '내가 노래 하듯이 또 내가 얘기 하듯이 살길…난 그렇게 죽기 원하네'

이제 다윗은 그가 이전에 말한대로 솔로몬은 왕으로 세우려고 한다. 그 근거는 다윗이 이전에 밧세바에게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29절) 한 것이다. 그는 그가 말했던 것을 그의 삶에서 실천한 사람이었다. 30절에서 ‘내가…. (말) 하였으니 내가 오늘 그대로 행하리라’ 라고 이야기 한다. 말이 삶이 되는 삶을 살았다. 다윗은 참 그의 삶에 밧세바라는 오점이 있었지만 (물론 다른 것도 있었지만) 그것을 제외하고는 참 하나님 곁에서 하나님을 사랑했던 사람이었던 것 같다. 그는 말하는대로 살았다. 

자신의 말하는대로 살았던 한 사람 다윗이 있었다면 기록된대로 살았던 한 사람이 있었다. 바로 예수님이셨다. 그 분 자체가 말씀이셨고, 그 분은 말씀을 응하게 하려고 이 땅에 오셨다. 예수님은 그 분이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을 입은 그 자체셨고, 예수님의 삶은 그 자체가 말씀의 성취였고, 어디로 가든지 무엇을 하든지 말씀을 성취하기 위함이셨다. 

자신의 말의 약속을 지키는 다윗, 자신의 말씀을 예수님을 통해서 지키신 하나님 아버지, 그 아버지께서 보내셔서 이 땅에서 그 말씀을 성취하신 예수님을 보면서 어제 하루가 참으로 부끄럽다. 여러가지 이유가 있지만 특별히 요엘이 때문에 아내와 우리 부부가 먼저 서로에게 작은 소리로 대화하고, 큰 소리를 내지 않기로 4시 정도에 이야기 했었다. 그런데 어제 저녁 7시 정도에 (내 기준으로는 많이 참았다고 생각한다) 계속 참다가 아이들에게 큰 소리를 치며 화를 내는 일이 있었다. 요엘이가 너무 억지를 부리는 바람에 그걸 못 참고 화가 터져나왔고, 요엘이에게 큰 소리를 치며 화를 쏟아내었다. 그 몇 분이 지나고 나니 너무 속이 상하고, 아내에게 아이들에게 볼 낯도 없고, 또한 내 마음도 풀리지 않아서 바로 잠을 청하였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요엘이에게 사과를 했다. 어제 일에 대한 마무리는 되었지만 내 마음은 아직 여전히 갈등중이다. 

내 스스로에게 한 약속을 지키는 것도 참으로 어렵다. 내 기준으로는 많이 참았다고 생각하지만 말씀에서는 일흔 번씩 일곱 번까지 용서하라고 (마18:21-22) 하셨다. 결국 나와의 약속도, 말씀도 내 삶에서 담아내지 못한 것이다. 최근 내 삶이 사춘기 소년 같단 생각이 든다. 뭔가 옹졸하고, 뭔가 업다운이 심하고, 생각도 많고… 다시 말씀 앞으로, 주님 앞으로 나아간다. 아침에 잠시 묵상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하루종일 이 말씀과 더불어 살아내고, 계속해서 묵상하고, 고민해야 하는데.. 너무 아침에 묵상하고, 땡 해버리는 느낌이다. 

다윗은 그가 하나님 앞에서 말한대로 살았다. 예수님도 그 자신의 삶으로 말씀을 성취하셨다. 나도 오늘 내 삶에서 작은 것이라도 순종하며 실천하기 원한다. 
소원의 한 가사가 떠 오른다. '내가 노래 하듯이 또 내가 얘기 하듯이 살길…난 그렇게 죽기 원하네’ 이게 다윗의 삶이었을 것이고, 예수님의 삶이었을 것이고, 나의 삶이 되기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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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Thinking)/Meditation2018. 11. 2. 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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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상 1:11-27 새롭게 부여된 이름 ‘하나님의 자녀'

오늘 본문은 나단과 밧세바가 약속대로 솔로몬을 왕위에 앉게 하기 위한 전략과 급함들이 엿보인다. 그런데 본문과 크게 상관없이 11절 첫 부분에서 밧세바를 부르는 부분이 눈에 들어온다. 아마도 내가 몇일전에 마태복음을 읽었기 때문일 것이다. 마태복음 1:6에서는 밧세바를 그녀의 이름으로 부르지 않는다. 그저 '다윗은 우리아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라고 기록되어 있다. 사무엘하 11:3에서도 그녀는 헷 사람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라고 소개되고 있다.  그리고 그녀는 사무엘하 11장에서 계속해서 우리아의 아내라고 불리운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그녀는 '솔로몬의 어머니 밧세바’라고 불리운다. 

그녀는 이스라엘 안에 살고 있는 헷 (히타이트) 사람의 아내였고, 본인도 헷 족속이었다. 이방인이었다. 밧세바에 대한 기록은 열왕기상 1장 이후에는 더 이상 나오지 않는다. 이방인이었던 그녀는 왕과의 간음이라는 죄를 통해서 이스라엘 공동체 안으로, 그리고 예수님의 족보 안으로 편입되게 되었다. 그녀의 죄는 매우 악했지만 그러한 죄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 그녀가 예수님의 족보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이제 그녀는 그녀의 이름으로, 또한 왕이 될 솔로몬의 어머니로 불리우게 된다. 그리고 이제 다윗의 뒤를 이어 왕이 될 솔로몬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 나단과 함께 고군분투 하고 있다.

하나님은 우리의 연약함과 죄를 통해서도 그 분의 계획을 이루어 가신다. 우리 역시 이방인에서, 이름없는 무명한자에서 아들로, 유명한 자로 불러 주셨다 고후 6:8-10절에서 이를 설명하고 있다. 

8 영광과 욕됨으로 그러했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그러했느니라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9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10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밧세바의 인생은 달라졌다. 이전에 누구의 아내로 불렸던 그녀는 자신의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이것이 복음이다. 
우리를 죄에서, 저주에서, 이름 없음에서, 죽을 자에서 우리를 살려내신게 복음이다. 그래서 이제 우리의 이름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이제 더 이상 다시 누구의 아내로, 혹은 이름 없음으로 돌아가지 말아야 한다. 나를 불러주신 주님 앞에, 나를 구원해주신 하나님 앞에서 나에게 부여하신 이름 ‘하나님의 자녀’ (요1:12) 에 맞게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족보를 갈아탔다. 밧세바와 같이 더 이상 이방의 족보가 아니라 왕의 족보로 편입되었다. 왕의 자녀 답게 사는 하루가 되자. 죄를 미워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며, 사람들을 살리고, 섬기는 왕의 자녀 말이다.

오늘 하루를 그렇게 살자. 오늘을 사랑하자. 오늘 만날 사람들을, 오늘 함께 할 사람들을 사랑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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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Thinking)/Meditation2018. 11. 1. 1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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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상 1:1-10 하나님이, 하나님의 약속이 내 삶을 움직이는 이유입니다. 

결국 사람을 움직이는 많은 동기 중에 하나는 욕심인 것 같다. 내가 누구인지 정확하게 알지 못할 때, 하나님이 누구이신지 모를 때 이 욕심이 발동한다. 학깃의 아들 아도니야가 다윗의 아픈 틈을 타 자신이 왕이 되려고 할 때, 그는 사람들에게 자신과 함께 하자고 청하였다. 주석을 보니 그는 실질적인 다윗의 큰아들이었다. 넷째 아들이었지만 큰 아들 암논과 셋째 아들 압살롬은 그 누이의 사건을 통해 이미 죽었고, 둘째인 길르압은 병으로 죽었던 시점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 이야기는 그가 가장 유력한 '다윗의 후계자' 라는 사실이다.

7절에 스루야의 아들 요압과 제사장 아비아달은 아도니야를 따르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8절에 제사장 사독과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와 선지자 나단과 시므이와 레이와 다윗의 용사들은 그 청을 거절했다. 아도니야를 움직인 것도 자신의 야망, 욕심이었고, 아마도 7절에 등장하는 요압과 아도니야를 움직인 것도 그들의 야망과 욕심이었을 것이다. 더 이상 하나님이 이유가 되지 않고, 대의와 명문이 그들을 움직이는 이유가 되지 않았다. 반면에 8절에 등장하는 더 많은 인물들은 인간적으로 다윗을 배신할 수 없었던 것도 있었을 것이고, 하나님이 세우신 다윗을 하나님의 말씀없이 버릴 수도 없었을 것이다. 인간적인 이유들 말고도 그들은 그들의 인간적인 기대, 즉 다윗이 늙었으니 새로운 인물을 지지함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유익을 포기하였고, 여전히 그들을 움직이는 이유가 하나님이고 하나님의 약속이었던 사람들이었다. 

실제로 그러하다. 때로는 나를 움직이는 이유가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의 약속인 때가 있지만, 또한 때로는 내 욕심에 휩쓸려서 하나님은 잊고 내 맘대로, 내 생각대로, 내가 생각하기에 유익이 되는 방향으로 움직일 때도 있다. 내가 그 시점에 서 있었다면 나는 늙고, 더 이상 소망이 없어 보이는 다윗을 지지했을까? 아니면 젊고, 유망하고, 잘나갈 가능성이 높은 왕이 될 가장 유력한 자 아도니야를 지지했을까? 참으로 쉽지 않은 질문이다. 

오늘도 나를 움직이는 것이 진정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의 약속인가? 아니면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내 욕망이 투사된 욕심인가?(창 3:6) 눈에 보이는 것, 좋아 보이는 것, 있어 보이는 것을 쫓은 인생이 되지 않기를 원한다. 특별히 이 태국은 눈에 보이는 것, 있어 보이는 것이 매우 중요한 곳이다. 더워도 긴 팔 옷을 입어야 하고, 외모도 열심히 꾸며야 한다. 물질주의, 외모만능주의가 아주 극대화 되어 있는 곳이다. 이 곳에서 같이 그러한 가치를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약속과 하나님을 쫓는 삶을 살아내기를 원한다. 그렇게 복음을 따라가는 삶을 살아냄으로 하나님이 주인이심이 이 땅에도 나타나기 원한다. 오늘도 불러주신 그 약속을 붙들고 살아내기 원한다. 약속이 내 욕망을 이기는 하루되기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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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18. 10. 31. 1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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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106:32-48 그들이 또?? 그러나 또!!

오늘 본문은 32절은 ‘그들이 또’ 로 시작한다. 성경을 볼 때 마다, 나의 삶을 대할 때 마다 드는 안타까움이다. '나는 또’ 죄를 짓고, ‘나는 또’ 내 삶의 왕관을 차지하려고 한다. 아침마다 묵상을 통해 마음을 다잡아도, '또, 또, 또' 그렇다. 이스라엘 백성들만 그랬던게 아니다. 내 삶도 마찬가지이다. 43절 상반부 ‘여호와께서 여러 번 그들을 건지시나’ 진실로 '또, 또, 또' 의 절망적인 인생을 하나님께서는 늘 건져주신다. 43절 하반부는 ‘그들은 교묘하게 거역하며’ ‘또, 또, 또, 또’가 되었다. 그다지 놀랍지도 않다. 이게 우리의 삶이며, 이게 우리 먼지와 같은 인생들의 연약함이다. 

우리는 교묘하게 거역한다. 하나님을 믿기 보다는 무엇인가 교묘하게 하면 하나님을 속일 수 있을거라는 내 전제를 믿는다. 다른 사람을 속이는 것 처럼 하나님도 속일 수 있을거라 믿고 행한다. 착각이다. 하나님은 절대 속지 않으신다. 그러한 우리에게 하나님은 우리의 ‘또’의 숫자보다 항상 한 번 더 많은 ‘그러나 또’의 은혜를 주신다. 44절은 그래서 ‘그러나’로 시작하고 있다. 

지겹고 지겨운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반역과 죄의 쳇바퀴 같은 삶이지만, 이 삶이 그래도 의미있고, 가치있을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러나 또’의 은혜를 주시기 때문인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이 시편도, 내 삶도 ‘할렐루야’로 마무리 될 수 있는 것 같다. 오늘도 이 ‘그러나 또’의 은혜를 구한다. 우리의 죄보다, 우리의 연약함보다 더 크신 은혜가 내 삶에 있음에 감사한다. 나를 보며 좌절되고, 안타깝지만 그럼에도 이 ‘그러나 또’의 은혜를 얻기 위해 은혜의 보좌 앞으로 담대하게 나아간다. 

오늘도 또 나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 오늘도 나를 아무런 이유 없이 받아주시는 하나님으로 인해 이 하루를 힘차게 살아간다. 그 은혜로 더 사랑하고, 더 섬기고, 더 돌아보기를 원한다. 복음이 실제가 되는 삶, 내가 용납받은 것과 같이 용납하는 삶, 내 안에 살아내기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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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18. 10. 30. 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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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106:13-31 기억할 것인가? 잊을 것인가? 살릴 것인가? 같이 죽을 것인가? 

본문을 보며 잊어버린 자들의 태도를 보게 된다.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잊어버리고, 하나님께서 주신 구원의 감격을 잃어버린 자들의 태도는 다음과 같다.
  1. 기다리지 아니한다 (13절)
  2. 광야에서(거기에 뭐가 있다고..) 욕심을 낸다 (13절)
  3. 하나님을 시험한다 (14절)
  4. 영광의 하나님을 우상과 바꾸었다 (20절)
  5. 원망하고 듣지 아니한다 (25절)

오늘 본문에는 여호와를 기억한 자 두 사람이 또한 나온다. 한 사람은 모세이고, 한 사람은 비느하스이다.
모세는 23절에 보면 ‘그 어려움 가운데서 그의 앞에 서서 그의 노를 돌이켜 멸하시지 아니하게 하였도다’ 모세는 자신의 생명을 담보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살려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했다.
또 한 사람 비느하스는 우상숭배와 행음으로 인해 염병이 들었을 때,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거룩함으로 간음한 자들을 창으로 찔러 죽였고, 이로 인해 재앙이 그치게 해 그들을 살렸다. 

오늘 나 또한 내가 어떤 사람으로 살지 선택해야 한다. 하나님을,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린 자로 살든지, 아니면 하나님을 기억하고, 그 은혜에 감사하는 자로 살든지 해야 한다. 잊어버린 자들을 다른 자들을 죽게 하고, 함께 원망하게 했지만, 기억한 자들은 사람을 살렸다. 잊을 것인가? 기억할 것인가? 죽일 것인가? 살릴 것인가? 

나는 살리러 오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기억해야 한다. 기억만 하는 정도가 아니라 그 하나님과 더 깊이, 뜨겁게, 만나고 사랑해야 한다. 좀 더 충분한 묵상의 시간과, 좀 더 충분한 기도, 독서, 하나님께만 집중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살리는 자는 기억하는 자이다. 계속해서 하나님을 만나는 자이다. 나의 자리가 살리는 자의 자리임을 잊지 말고, 잊은 자와 같이 원망하고, 욕심내고, 듣지 아니하는 자가 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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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18. 10. 29. 1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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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106:1-12 In all I do, I honor You. 

우리가 구원받은 것, 즉 복음은 우리의 어떠함 때문이 결코 아니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잘해서도, 우리가 무엇인가 받을만해서도, 우리가 주님의 눈에 너무 꼭 드는 아름다운 존재여서도 아니다. 이 모든 것은 8절에 나오는 것처럼 ‘자기의 이름을 위하여’이다. 8절의 본문은 ‘그러나 여호와께서 자기의 이름을 위하여 그들을 구원하셨으니 그의 큰 권능을 만인이 알게 하려 하심이라’ 라고 기록되어 있다. 우리 스스로가, 혹은 내가 세상의 중심처럼 생각하면 안된다. 내가 주님의 눈에 가득 차 있는 사랑스러운 존재(어떻게 보면 맞지만)일 거라고 착각하며 살아가면 안된다. 

우주와 모든 만물들은 그 분의 영광을 외치며 지금도 운행하고 있다. 그런데 나라는 존재는 혼자 역으로 가고 있다.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 하는 척 하며 나의 성을 쌓아가는 존재이다. 어제 내가 태국어를 공부하면서 힘들어 하는 이유 중에 하나를 ‘나를 증명해 내고 싶은 마음’이라고 하였다. 누구에게 증명하고 싶은 것일까? 하나님에게? 결코 아닐 것이다. 나는 나를 다른 사람들에게 증명하기 원하는 것이다. 우리 가정과 관계 있는 후원자들과 교회들에게, 그들로 부터 태국어를 잘한다고, 오래 쉬었는데도 잘한다는 칭찬을 듣고 싶었고, 인정을 받고 싶었을 것이다. 결국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이름을 위해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힘든 것이고, 그러니까 스트레스를 받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을 위해 구원하신다. 그렇게 하시는 이유는 만인이 그것을 알게 하셔서 그들 역시 구원하기 위해서이다. 하나님은 모든 일을 자신의 영광과,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 하시는데, 나는 여전히 선교사로써 살아가면서도 나를 위해서, 나의 인정을 위해서, 나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서 한다. 모순이다. 
중고등학교때 기독교인 친구들과 ‘왜 공부하냐? 라고 물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공부한다’고 공식처럼 대답했었다. 정말이었을까? 순수하게 정말 그렇게 한 적도 없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순간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거들먹 거리며 내가 원하는 인정과, 내가 원하는 존재 증명을 한 것이었을 것 같다. 

오늘도 나에게 말씀해 주시는 하나님이 계심에 감사하다. 선교사로써 나를 증명하기 위해, 나의 존재를 드러내기 위해 무엇인가를 하지 않겠다. 다짐으로 된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마는… 그래서 오늘도 예수님을 붙든다. 철저히 낮아지시고, 하나님께 죽기까지 순종하심으로 우리의 구원자가 되신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기 원한다. 잘 안되어도 바라보고, 또 바라보고, 넘어져도 또 묵상하고 하면서 언젠가 내 안에 그 분이 진짜가 되는 삶을 기대하며 오늘 하루를 살아내련다. 

‘하나님의 영광’ 쉽지 않은 이야기이다. 성경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히브리서 1:3) 임을 증언하고 있다. 
예수님만 바라보고 예수님만 의지하자. 
In all I do, I honor Y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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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18. 10. 28. 2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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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105:24-45 나의 삶의 주어가 누구인가? 

시편기자는 출애굽 사건과 광야 시대를 회상하고 있다. 그런데 24절부터 42절까지의 모든 구절의 주어가 ‘여호와께서’ 혹은 ‘그’로 지칭되고 있다. 한마디로 출애굽도, 광야 시대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잘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할 수 있어서(그러할 능력이 있어서) 출애굽 한 것도 아니고, 그들이 출애굽 할 만한 무엇가를 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출애굽 시킨 것도 아니었다. 그저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었다. 인생의 주어가 누군인지를 알게 되면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순종이고, 찬양이다. 오늘 시편 105편의 마지막은 할렐루야로 끝나게 된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 찬양이 되는 것이다.  

오늘 시편을 보면서 나 또한 '나의 삶의 주어가 누구일까?' 라는 생각을 다시 해보게 된다. 내 삶에 대해서 소개하면서 나도 ‘하나님께서 하셨다,’ ‘예수님께서 일하셨습니다’ 라고 이야기 할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을 빙자해서 내가 한 것들을 드러내고 싶어할지, 그것도 아니면 그냥 당연하게 내가 한 일들에 대해서 이야기 하면서 내가 어떤 사람임을 드러내려고 할 것인지..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을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 신실하게 인도해가고 계신다. 하나님이 주체가 되어 모든 것을 이끌어 가신다. 약속을 하신 분도, 약속을 이루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다. 내 삶도 마찬가지이다. 내가 하려는 조급함 (약속을 기다리지 못하는 마음일 것이다), 내가 해내어 무엇인가를 보여주려고 하는, 즉 내 존재를 증명해내고 싶어 하는 마음들을 내려 놓는다. 특별히 태국어를 하고 있는 이 시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조금씩 조금씩 분명히 늘고 있을텐데 마음은 한없이 조급하기만 하다. 예전에는 이것보다 분명히 잘했을텐데… 그래도 내가 태국 선교사로 한 텀을 마친 사람인데.. 내가 왜 이렇게 말이 안되고, 내가 말하는 것들을 왜 이렇게 이해 못하지? 이러한 마음들 속에는 조급함과 나를 증명해내고 싶은 마음들이 가득해 보인다. 

요즈음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이유가 이러한 마음들 때문에 조급한 것 때문이 아닐까? 라는 생각도 든다. 하나님이 하실 수 있도록 조금만 더 내 조급함과 나를 증명해내고 싶은 마음들을 내려놓자. 하나님이 하실 일들을 조금 더 넉넉하고 여유로운 마음으로 지켜보자. ‘여호와께서’ 도우실 것이고, ‘여호와께서’ 행하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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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