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Thinking)/Meditation2018. 11. 17. 1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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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상 7:13-26 무엇이 더 중한디? 

이야기는 다시 성전건축으로 돌아간다. 이 성전 건축의 책임을 아이러니하게도 이방인인 두로사람 히람이 맡게 된다. 그런데 그의 이력은 아버지는 두로 사람이었지만, 어머니는 납달리 지파의 이스라엘 여인이었다. 즉 이방인과 혼인한 이스라엘 여자의 아들이었다. 태생적으로 그는 이스라엘이라는 사회에서 중요한 자리에 앉을 수 없는 사람으로 보여진다. 하지만 솔로몬은 지혜와 총명과 재능을 가지고 있는 그에게 이 모든 공사를 맡긴다. 솔로몬은 더 중요한 성전 공사를 위해서 덜 중요한 출신이나 신분을 고려하지 않는다. 

무엇이 중요한가를 아는 것이 지혜이다. 살아가다 보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찮은 것에 목숨 걸 때가 더 많음을 느낀다. 아내랑도 다툴 때 보면 중요한 일에서 기분이 상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말투나 태도로 기분이 더 상해서 무엇 때문에 이야기를 시작했는지를 잊어버리기 일수이다. 태국어를 공부하고, 우리 형제들을 만나면서도 가끔은 무엇이 더 중요한지를 잊어버리게 된다. 왜 지금 태국, 방콕에 있는지, 지금 그들과 해야 하는 일이 무엇인지? 그리고 내가 무엇을 준비하고 있는지를 잊어버릴 때가 너무도 많다.

무엇이 더 중요한가를 잊어버리고 나면 가야할 길도 잃어버리게 된다. 어디로 가야 되는지, 어디를 먼저 가야 하는지, 어떤 길로 가야하는지도 잃어 버린다. 그래서 혼란에 빠지게 되고, 악순환은 반복되게 된다. 오늘도 말씀 앞에서 우선순위를 세우기 원한다. 요즈음 우선순위 없이 닥치는데로 무엇인가를 하고 있는 느낌이다. 다시 한번 내 삶을 돌아보고, 복음을 위한 삶에서 무엇이 더 중요한지를 점검하자. 혼란의 구렁텅이에 빠지지 말자. 주님과 함께 걸어가는 귀한 하루 되기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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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18. 11. 16. 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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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상 7:1-12 하나님을 높이는 것 같지만 결국은 자신을 높인 솔로몬

하나님의 성전은 7년, 솔로몬의 왕국은 13년
지은 방식은 여호와의 성전 건축 방식을 따라서…

솔로몬은 뭐가 하고 싶었던 것일까? 성전 건축일까? 자신의 왕국 안에 하나님을 집어 넣고 싶었던 것일까? 솔로몬의 성전건축에서 진심이 느껴지지 않는다. 하나님도 굳이 칭찬하지 않으신다. 그의 성전은 지나치게 화려했고, 12절 마지막을 보면 '마치 여호와의 성전 안뜰과 주랑에 놓은 것 같더라…’ 하나님의 성전보다 더 화려하고, 여호와의 성전 안에 넣은 것들이 그의 궁 안에 있는 것 처럼 느껴지도록 만들었다. 결국 그는 하나님을 높이는 것과 같은 방식 (하나님의 성전 건축)으로 자신을 높이기 시작한 것이다. 다윗은 자신이 백향목 궁에 살면서 하나님의 전이 휘장에 있다고 안타까워하며 성전을 짓기로 했는데 (삼하 7:2), 솔로몬은 이미 있는 다윗 왕궁을 두고, 다시 13년에 걸려서 더 화려한 자신의 왕궁을 지은 것이다. 

솔로몬의 모습은 내가 드러나야 하는 사람의 모습이다. 하나님을 높이는 것 같은데, 하나님을 드러내는 것 같은데 결국은 자신이 드러난다. 교묘하게, 때로는 은밀하게 진행되는 것이다. 오늘 아침에 아내와 어떤 일에 대해서 이야기 나눴다. 그러다가 아내와 서로 좀 맘이 상했다. 아내가 내 마음을 잘 이해를 못해주는 것 같아서였다. 오늘 본문을 묵상하면서 솔로몬과 비슷한 마음이 내 안에 은밀하게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일에 대해서 내가 깊이 생각하는 것 같고, 위해주는 것 같고, 걱정하는 것 같이 말하지만 혹시 이 것이 내 의를, 내 자신을 드러내고 싶은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아닐까? 100% 악한 마음은 분명히 아니지만 내 안에 이러한 마음이 없는 완전한 순수한 동기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말하던 당시에는 몰랐지만 이 일에 대해서 아내에게 사과를 하고 말씀을 대하면서 알게되었다). 나는 좀 더 알고, 나는 좀 더 경험했기 때문에 내가 생각하는 것이 맞다는 마음이 분명히 있었다. 

솔로몬과 같이 하나님을 위하는 척 성전을 짓고, 그 이후에 자신의 성전은 두배의 시간과 두배 이상의 크기로 화려하게 지어버리는 것 처럼 말이다. 결국 내가 드러나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 일에 대해서 회개하게 되었다. 말씀에 나를 비춰보아야 내가 어떠한 사람인지를 아는 것 같다. 좀 마음이 어렵다. 내 마음의 동기가 순수하지 않다는게… 하지만 뭐 사실 부끄러운 일이 이것 뿐이겠는가? 내가 드러나는 방식이 아니라 나는 없어지고, 예수님께서만 드러나시는 세례요한의 삶의 태도가 내 안에 있어야겠다. 솔로몬의 실패를 거울 삼고, 오늘의 실패를 거울 삼아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내가, 그리고 오늘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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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18. 11. 15. 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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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상 6:14-38 허세의 금칠을 벗어 버리자. 

성전의 외부를 먼저 짓고, 내부를 지었던 것 같다. 성전의 내부는 너무 아름답게 설계하고, 귀중함을 표시하기 위해 아마도 금칠을 한 것 같다. 금을 여기, 저기 입혔다. 짧게 이야기 하면 솔로몬의 하나님의 경외함의 표현일수도 있고, 혹은 자신의 부의 자랑? 일 수도 있겠다. 솔로몬이 지금 어느 자리에 서 있는지 정확히 분간하기는 어렵다. 아마도 경외함의 표현이라 보고 싶다. 

아마도 안에서 보면 번쩍 번쩍 했으리라… 금을 입혔으니까… 무엇인가를 입혀 놓으면 겉에 입혀 놓은 것만 보이고 그 속에 것은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이 성전을 보면서 ‘회칠한 무덤’이란 단어가 떠 오르는 것은 왜일까? 아마도 금을 입혀 놓은 듯 한 내 모습 때문이리라. 겉은 번지르르한데, 속은 썩어가는 그러한 삶… 마치 이 성전이 하나님의 성전이 되도록 번쩍이게 금을 입혀 놓았지만, 결국 이 성전은 하나님이 경외함이 아니라 그들의 욕심 때문에 무너지게 되는 역사를 알기 때문이라. 

좋은 의도로 했지만 그 좋은 의도가 오래가지 못하도록 하는 우리의 죄, 가식이 떠올랐다. 오늘 성전에 입히고 있는 금처럼 나도 내 얼굴에 내 삶에 금칠을 하고 있는건 아닌지? 솔직하게 겸손하게 연약함을 드러내고, 혹은 연약함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내가 이렇게 잘 해나가고 있어'라고 말하려고 하는 것은 아닌지? 기도를 부탁하기 보다는 조금 더 좋게 보이고, 조금 더 있어 보이게, 나를 드러내는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지?를 돌아보게 된다. 금칠을 하는 이유는 ‘체면’ 혹은 ‘내가 좋은 사람으로 보여지고 싶은 욕망’ 때문일 것인데, 한국 사람으로써 나는 내 맘 속에 저 두가지 마음이 모두 가득하다. 

얼굴에, 삶에 금칠을 떼버리고 싶다. 그리고 단순하고, 겸손하게 주님 앞에 나아가고 싶다. 성전보다 크신 그 분 앞에 서기 원한다. 성전보다 더 크신 그 분은 흠모할 모습이 아니라 이 땅에서 가장 낮은 곳, 가장 겸손한 모습으로 오셨다. 나 또한 금딱지, 체면, 가식, 벗어 버리고, 주님 앞에 겸손하게 서는 하루.. 그런 하루가 되기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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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18. 11. 14. 1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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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상 6:1-13 ‘주를 위해’의 삶이 아니라 ‘주로 인해,’ ‘주와 함께’의 삶

엄청난 규모로 성전 건축이 시작되었다. 몇 규빗, 몇 규빗, 다락방, 골방… 머리가 나빠서인지 이 내용으로 건물이 그려지지 않는다. 하지만 엄청난 규모와 화려한 성전임에 틀림없다. 건축하는 그 누구나 여호와의 전을 만든다는 사실에 무척이나 흥분되었을 것 같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성전에 속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성전의 화려함과 웅장함이 아니라 솔로몬에게 다시 한번 말씀을 붙들고, 말씀대로 살라고 명령하고 계신다 (11-13절). 하나님과 관계하기 위해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엄청난 규모의 성전을 짓는데도 하나님께서 강조하시는 것은 그 하나님과의 관계를 말씀하고 계신다. 

하나님을 위해서 하는 일인데, 정작 하나님과의 관계를 방해하는 일들이 사실 많이 있다. 뭔가 주를 위해 하고 있는 일 같은데, 그 일 중에서 오히려 하나님과의 친밀한 시간들을 방해하는 것들이 있다. 나에게는 그것이 시간이다. 나에게 주어진 시간들을 사용해서 하나님을 예배하고, 복음과 예수를 전하는 것인데, 이 시간을 잘 사용해야 한다는 부담감들이 오히려 묵상의 시간을 짧게 만들고, 하나님 안에 충분히 거할 친밀함들의 시간들을 막고 있는 것 같다. 늘 바쁘게 살아왔고, 그래서 어떻게 하면 시간을 잘 써서 이 모든 일을 실수하지 않고, 잘 해낼 수 있을지가 늘 나에게 부담이었고, 그래서 늘 효율성을 추구했다. 내 삶을 하나님께 드리고, 하나님을 위해 매일을 살아간다고 하면서도, 그 주님과의 충분한 교제를 누리기 보다는 묵상 빨리 하고 다른거, 성경 빨리 읽고 다른거 하자라는 생각과 부담 속에 있었던 것 같다. 실제로 그렇게 하지도 못하면서도 말이다. 

성전이 중요한게 아니다. 하나님이 중요한 것이다. 성전의 화려함이 아니라 성전에서 일어나는 하나님과의 예배가,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가 더 중요한 것이다. '주를 위해’라는 말이 무색하다. ‘주를 위해’의 삶이 아니라 ‘주로 인해,’ ‘주와 함께’의 삶이 되어야 한다. 효율성을 따지다 보니 늘 입으로는 ‘주를 위해’의 삶을 외치지만 진정 나의 삶은 ‘주와 함께’의 삶은 아니었던 것 같다. 내가 바라보아야 하는 것은 성전이 아니다. 오히려 성전보다 더 크신 이, 예수를 깊이 바라보아야 한다 (마 12:6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오늘 나의 삶에서 정말 ‘주와 함께’의 삶이 이루어지길 원한다. 바쁨보다, 해야 할 것 보다, ‘주님과 동행’하는 삶이 되기 원한다. 성전이 아니라 성전보다 더 크신 이를 바라보는 하루가 되자. 
I will run to You, to the Words of tru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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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18. 11. 13.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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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상 5:1-18 성전건축의 모든 시작은 다윗으로부터 시작되였다. 

솔로몬의 성전은 가장 귀한 나무인 백향목으로 지어진다. 이스라엘에는 백향목이 없었다. 그래서 솔로몬은 그 백향목으로 하나님의 전을 짓기 위해서 이웃나라 두로에서 나무를 공수해 온다. 백향목 재목과 잣나무 재목을 공수해오며 (10절), 매우 지혜롭게 이 일들을 감당한다. 하나님께 가장 좋은 것으로, 가장 귀한 것으로 드리려고 하는 그 마음이 보여진다. 사실 이 마음은 다윗에게서 시작된 마음이다. 삼하 7:2에서 ‘나는 백향목 궁에 살거늘 하나님의 궤는 휘장 가운데 있도다.’ 다윗은 온 세상보다 더 크신 하나님이 자신보다 더 초라한 곳에 있는 것을 원치 않았었다. 이러한 마음에서 시작된 성전 건축이 이제 그 아들 솔로몬을 통해서 가장 귀한 나무인 백향목으로 시작되는 것이다. 

솔로몬은 지혜를 하나님께 받았지만, 하나님을 섬기는 법에 대해서는 그의 아버지 다윗을 통해서 배운 것으로 보인다. 다윗의 성전 건축 정신이 그의 아들 솔로몬에게 그대로 보여진다. 다윗의 소원을 하나님이 거절 하신 이후에 자신의 아들로 이 성전을 짓게 하신다는 말씀 (삼하 7:13)을 받고나서 얼마나 열심히 아들에게 이것에 대해서 가르쳤을까? 그리고 그 돌들과 필요한 것들을 얼마나 많이 준비해 뒀던가? 결국은 솔로몬이 아버지의 삶을 통해서 왜 이 성전을 세워야 하는지, 어떤 마음으로 이 성전을 세워야 하는지를 배운 것이다. 

자녀는 부모의 말을 통해서 배우는 것이 아니라 부모의 등을 보고 배운다고 들었다. 천 마디의 말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 삶이고, 내 행동이다. 그것이 아이들에게, 제자들에게 흘러가는 것이다.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내 입으로 백번 말하는 것 보다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이 내 삶에서 한 번이라도 보여지는 것이 더 그들이 잘 배울 수 있는 것이다. 다윗은 솔로몬에게 그러한 삶을 보여줬고, 솔로몬은 그것을 배웠다. 그의 준비는 따라서 철저할 수 밖에 없었다. 솔로몬의 성전건축에 대한 준비(물질적, 정신적)는 사실 다윗의 삶과 그의 정신으로부터 다 시작된 것이다. 

나는 말하는대로 살아가고 있는가? 내가 보여주려고 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풍성한 삶을 나는 지금 살아가고 있는가? 두렵고 떨리는 질문이다. 내 아이들은 내가 원하는 이 풍성한 삶을 배우고 있는가? 우리 태국 형제, 자매들은 내 삶을 통해서 그러한 풍성한 삶을 맛보고 있는가? 결국은 내가 먼저 그러한 삶을 살아내지 못하면 '말 뿐인 복음’이 되고 만다는 생각이든다. 내가 전하고자 하는 복음에 합당한 삶은 입술로만, 머리로만 살아낼 수 있는 삶이 분명 아니다. 그런데 내가 전하고자 하는 삶을 내가 먼저 살아내지 못하면 나는 무엇을 전할 것인가? 두려워지는 오늘 말씀이다. 

조금 더 내 삶을 점검하기 원한다. 무엇을 위해 움직이고, 무엇을 위해 헌신하는가? 내가 정말로 그들에게 주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 복음의 정신과 복음의 삶이 더 내 삶 가운데 전부가 되기 원한다. 복음으로 내 삶이 진심으로 거듭나기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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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18. 11. 12. 1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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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상 4:20-34 하나님께 ‘묻는 지혜’가 ‘듣는 마음’보다 낫다

솔로몬은 지혜를 얻었고, 그의 지혜와 명성은 높아졌다 (26-34절).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지혜를 구하러 올 정도였다. 그는 부도 얻었다. 하루에 먹는 음식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였다 (22-23절).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계속 불안한 암시들을 보내고 있다. 그의 왕국은 번영했지만 21절 후반부를 보면 '솔로몬이 사는 동안’ 이었다. 그의 왕국에는 평안이 있었지만 25절 초반부에 ‘솔로몬이 사는 동안’이었다. 제한적이고, 유한한 번영과 평화였다. 

그 이유는 30절, 34절에서 이야기 하고 있는 것 같다. '솔로몬의 지혜가,’ ‘솔로몬의 지혜를’ 이제 주어가 솔로몬이 되었다.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이고, 그는 그 지혜를 하나님의 나라와 백성을 위해 사용해야 하는 사람인데, 이제 그는 하나님이 주신 지혜를 그 자신의 지혜로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26절을 보면 그는 이제 자신이 가진 군사력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있다. 어제 본문에서 그는 분명히 우선순위가 예배, 말씀, 그리고 군대였는데, 이제 그는 그가 가진 군사력을 자랑하고 있다. 

너무 잘 나가고 있어서 연약함이 부족함이 보이지 않는 순간처럼 보인다. 그가 가진 부와 명예가 군사력을 의지하는 그의 마음을 가리게 한다. 아마도 자신도 모르는 방식으로 그는 조금씩 자신이 가진 것들을 의지하고 있나보다. 교만함이다. 하나님보다 내가 가진 것들이 우선되는 것, 하나님보다 내 자신을 의지하는 것 바로 교만이다. 그러한 그에게 하나님은 여전히 지혜와 총명을 부어주신다 (29절).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만 바라보았던 다윗과 다르게 솔로몬은 그 번영함 속에서 하나님을 잊어 버린다. 애굽 공주와 결혼을 통해서 나라를 강하게 하려고 하고, 군대의 힘을 자랑하며, 자신의 지혜로 명성을 얻는다. 대신 그가 살아 있는 동안이었다. 그의 뒤로 이스라엘은 분열되고, 망가지며, 우상숭배를 시작한다. 

다윗이 가졌던 하나님께 '묻는 지혜'가 솔로몬이 가졌던 '듣는 마음’보다 더 귀하게 느껴지는 순간이다. 물어야 한다. 물어야 안 망한다. 물어야 다음세대까지 살아남는다. 물어야 내가 주인이 아니고, 내가 결정자가 아니고, 내가 하나님이 아니란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물어야 들을 수 있다. 오늘도 주님게 묻는 은혜가 있기를 원한다. 내 맘대로, 내 뜻대로, 내 생각대로 사는 하루가 아니라 겸손하게 묻기 원한다. 물을 수 있는 것이 은혜이고, 물을 수 있는 것이 지혜이다. 

오늘도 묻자. 묻고 듣고 순종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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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18. 11. 12. 0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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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상 4:1-19 삶의 우선순위 셋팅하기 

오늘 본문은 잘 조직된 솔로몬의 이스라엘이 어떠한지를 보여준다. 1절에서 그가 왕이 되었고, 2절부터 그의 중앙정부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 그런데 순서를 보면 그가 무엇을 중요하게 여겼는지를 알 수 있다. 2절은 제사장, 3장은 서기관, 4절은 군사령관, 5절은 지방 관장, 6절은 노동 감독관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 솔로몬의 관심이 예배, 말씀, 그리고 그 이후가 군대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대 사회에서 군대는 나라의 운명을 결정하는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당연히 가장 중요하게 여겨도 충분할 수 있었지만, 솔로몬은 그러지 않았다. 첫째는 예배, 둘째는 말씀.. 그의 우선순위를 보며 이스라엘이 어떠한 나라인지를 알 수 있다. 하나님이 가장 중요한 분이시고, 그 분의 말씀을 가장 중요하게 여길 때에 살아갈 수 있는 나라가 이스라엘이었다. 군사력을 믿는다는 것은 자신의 힘을 믿는다는 것인데, 그 보다도 먼저 예배와 말씀을 붙잡는다는 것은 내 힘으로 살지 않겠다는 의미인 것이다.

하나님이 아니라 군사력을 믿고 살아갈 때가 얼마나 많은가? 내가 가진 은사들, 재정, 계획, 힘을 믿고  살아갈 때가 얼마나 많은가? 가진 것이 없을 때가 아니라 가진 것이 손 안에 있을 때 그것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솔로몬은 다 가졌는데, 적어도 오늘 본문에서는 그것들을 의지 하지 않았다. 나 또한 손에 쥔 것으로 살아가는 자가 되지 않기를 원한다. 있어 봤자 얼마나 있으며, 그것들이 얼마나 나를 도울 수 있는가? 내가 하나님보다 지혜로울 수 있는가? 모든 대답은 아니다. 내가 믿고 있는 군사력을 포기하고 하나님을 예배하고, 그 분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으로 내 삶을 다시 세팅해야 한다.

아웃리치가 끝나고 돌아왔다. 많이 보고, 듣고, 배웠다. 특별한 시간들이었다. 이제 더 중요한 것은 내 삶을 다시 원래대로 자리 잡도록 세팅하는 것일 것이다. 말씀으로부터 시작하고, 하나님으로 부터 힘을 공급받고, 내 힘과 계획을 의지하지 않도록 내 삶의 우선순위를 다시 세우는 것이다. 오늘도 말씀만 붙들자.

아웃리치 기간동안 기도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잘 다녀왔고, 많은 것들을 보고, 듣고, 경험하고 왔습니다. 매우 좋은 시간이었고, 우리 형제, 자매들과도 더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아웃리치 관련해서는 한번 정리해서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다시 한번 감사합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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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18. 11. 9. 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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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상 3:1-15 종교놀이 그만, 삶의 예배 시작

솔로몬은 1절에서 애굽왕 바로의 딸과 혼인을 한다. 나라의 유익을 위해 정략적인 결혼을 한다. 하지만 그는 3절에서 보면 여전히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의 아버지 다윗의 법도대로 행하는 자였다. 하지만 ‘산당에서 제사하며 분향하였다.’ 아버지의 모습을 계속 봐왔다면 산당에서 제사하지 않았으리라. 아버지의 모습을 계속 봐왔다면 바로의 딸과 결혼하지 않았으리라. 이 둘은 모두 솔로몬의 연약함이었고, 어쩌면 작은 타협이었다. 그가 옳다고 믿는대로 행동하고 원하는대로 그가 원하는 방식으로 하나님을 예배했다. 예배에 관해서도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잘 몰랐을 뿐이다. 모르는 것도 죄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호 6:3 상반부)'. 하지만 이 잘 모르는 행동을 통해서 그는 문제의 씨앗들을 남겼다. 훗날 이 것들은 우상숭배로 이어지게 된다. 이스라엘을 멸망으로 이끄는 시작점이 되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우리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법으로 예배해야 한다. 내가 생각하고 바라는 방식이 아니어야 한다. 어떤 예배의 순서나 절차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예배는 상한 심령의 예배이고, 삶의 예배 (롬12:1-3)이다.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는 하나님 앞에 우리의 연약함을 올려 드리고, 우리의 삶이 하나님 앞에 드려지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려져야 한다. 그래서 더 어렵게 느껴진다. 우리의 종교놀이를 그만두고 진짜 삶의 예배가 시작되어야 한다. 예수님은 그렇게 이스라엘의 종교놀이를 뒤엎으셨다. 그들에게 이해되지 않을 하나님의 나라를 이야기 하셨다. 결국 그들은 이해하지 못하는 하나님의 신비로 인해 예수 그리스도를 못 박았다. 

나의 삶도 종교놀이를 하던 이스라엘의 리더쉽들과 결코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예수를 빙자해서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지… 하나님이 원하시는 상한 심령의 예배와 삶의 예배를 드리지 못하고, 수요예배, 주일예배로 퉁 치려고 하는건 아닌지? 물론 이렇게 살아도 하나님이 은혜를 부어 주신다. 솔로몬에게 주신 지혜처럼… 솔로몬이 그렇게 살아도 하나님은 역사하시고, 돌보신다. 하지만 다윗이 세웠던 하나님의 나라의 모형인 이스라엘은 그렇게 조금씩 넘어지게 된다. 그러다가 결국은 멸망하게 된다. 

삶의 예배가 오늘도 드려지기 원한다. 순간 순간 내 영혼을 깨우기 원한다.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삶을 살아내고 싶다. 매 순간 좌절하지만 또 다시 일어서기 원한다. 오늘은 지역교회에서 아이들을 모아서 함께 놀이하고 예배 드리는 마지막 날이다. 더 깊은 삶의 예배, 아이들을 향한 중보, 그들을 향한 섬김이 내 안에서 나타나기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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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Thinking)/Meditation2018. 11. 8. 1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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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상 2:36-46 ‘익숙해져버림’이 가져온 죽음을 넘어서자

예루살렘에서는 집을 짓고 살아도 되지만 밖으로는 나가지 말라. 이것이 솔로몬의 시므이를 향한 명령이었다. 그에게 구역을 정해주고, 이 선을 넘어가면 죽는다고 말한 것이다. 시므이도 당장 죽지 않아도 되니 ‘이 말씀이 좋사오니’ 라고(38절) 대답했고, 실제로 시므이가 3년을 지켰다. 하지만 자신의 종이 도망가는 일이 발생했다. 그리고 시므이는 이 명령을 잊어버리고 예루살렘 밖으로 그들을 잡으러 쫓아갔다. 솔로몬의 말을 무시한 것인지? 아니면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은 것인지? 아니면 시간이 흘러 잊어 버렸는지?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그가 예루살렘 밖으로 나간 것은 결국 솔로몬의 귀에 들어가게 되었고, 시므이는 결국 죽게 된다. 시므이를 죽게 한 것은 3년의 시간으로 인한 ‘익숙해져버림’ 이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고, 뜨거운 마음으로 주님과 동행하기를 원하지만 어느새 그 마음은 식어 버리고, 주님과의 관계가 그렇게 심각한 것이 아니게 되어 버린다. 너무 익숙한 나머지 그 보다 더 중요해 보이는 것 (도망간 종을 잡아오는 일)에 우리의 마음을 쏟다가 하나님을 잊어버리게 된다. 기도가 익숙해지고, 예배가 익숙해지고, 말씀이 익숙해져 버린다. 그래서 덜 중요한 것이 전부인 것 처럼 되어 버린다. 시므이를 죽게 한 ‘익숙해져버림’이 나도 죽게 한다.

북부 치앙마이에서도 차로 2시간을 이동해야 하는 카렌족 마을로 왔다. 오늘 오후는 매해라는 곳으로 이동하게 된다. 이 곳에서 만나는 아이들, 그리스도인들, 우리 형제, 자매들에게서 그 ‘익숙해져버림’을 찾기는 힘들었다. 그들은 열정적이었고, 무엇을 하든 행복해 보인다. 너무 추운날씨(태국에서 12도 ㅜㅜ)로 인한 어려움도 그들에겐 중요하지 않다. 이 속에서 예수가 너무 익숙한 사람은 ‘나 한사람’ 밖에 없는 것 같다. ‘익숙해져버림’을 ‘신선한, 새로운 예수님과의 만남’으로 채우고 싶다. 

언어의 답답함을 느낀다. 정체되어 있는 것 같다. 이들에게 함께 사랑을 나누고 싶은데 언어의 한계가 너무 답답하다. 이 한계가 나에게 ‘익숙해져버림’을 깨고 ‘신선함, 새로움’으로 나를 채우기 원한다. 오늘도 매해라는 곳에서 새로운 아이들을 만나게 되는데, 기대된다. 그리고 예전에 양육했던 ‘위라시니’ 자매와 ‘렛’ 형제를 만나게 될 것 같은데 이것 또한 너무 기대된다. 예수 안에서의 새로움, 신선함으로 새 힘을 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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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18. 11. 7. 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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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상 2:26-35 현실의 유력함 (두려움)을 붙잡은 자들의 최후

왕상 1장에서 시작된 반역이 이제 마침표를 찍는다. 반역에 가담했던 세 사람이 모두 마지막을 맞게 된다. 
아도니야는 그 마지막이 어떠한지 성경은 기록하지 않지만, 아비아달은 파면되었고, 요압은 성소에서 죽게 되었다. 여전히 회개하지 않은 사람들에 대한 심판들이다. 요압은 이미 많은 무죄한 자들의 피를 흘렸던 장군 아닌가? 우리는 우리가 잘못한 댓가를 분명히 치뤄야 하는 존재들이다. 

새로 임명받은 군대장관 브나야와 제사장 사독은 왕상 1장에서 유력해 보이는 왕자에게 가담하지 않았던 자들이다. 그 순간에 더디어 보이고, 유력해 보이지 않더라도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은 사람들이었다. 다윗의 대는 아도니야가 아니라 솔로몬이 잇게 된다는 것을 정말로 아도니야가 왕이 될 것 같은 그 순간까지도 믿고 있었던 자들이다. 그들에게 이제 영광의 관이 씌워진다. 이들은 현실이 아니라 약속을, 유력해 보이는 상황이 아니라 하나님을 선택했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에게 이렇게 하나님께서 상급을 주시는 것이 당연해 보인다. 

이들의 삶을 보면서 나의 삶을 반추하게 된다. 나는 무엇을 쫓아가고 있는가? 
반짝이고 빛나는 유력해 보이는 것들을 쫓고 있는 것은 아닌지? 약속보다는 현실을, 지금 당장 보이지 않는 하나님 보다는 유력해 보이는 상황을 선택하고 있지는 않은지?
약속을 붙들고 광야와 같은 메마른 땅을 걸어가기 보다는 순간 좋아보이는 것을 붙들고 좋은 길을 가려는 자는 아닌지? 반성하게 된다. 
내 안에 그러한 욕심들이 있다. 좋고 편한 가능성의 유혹들에 자주 휩싸인다. 어제는 내 안에 아도니야를 봤다면 오늘은 내 안에 아비아달과 요압을 보게 된다. 

현실아 아니라, 유력해 보이는 상황이 아니라 약속과 하나님을 택해야 한다. 그것이 믿는 자의 길이고, 하나님이 기뻐 하시는 길이다. 
아비아달과 같이 요압과 같이, 그리고 아도니야와 같이 살지 말자. 

이렇게 될 수 밖에 없을 것 같다는 그러한 내 안에 두려움을 해결하자. 두려움을 넘어서서 하나님을 믿자. 그래야만 아비아달, 요압, 아도니야와 같지 않을 수 있다. 결국은 믿음 싸움이다. 오늘부터 토요일까지는 치앙마이 매해 지역으로 전도여행을 간다. 이 시간들을 통해서 내 안에 약속과 하나님이 더 선명해지길 구해본다. 내가 할 수 없는 일들을 하나님이 하라고 하시지 않으셨다. 그저 주님 손 붙들고 같이 가면 되는 것이다. 두려워 말자. 두려워 하여 조급한 것을 붙들지 말고, 하나님을 붙잡자. 하나님의 약속을 붙드는 약속의 자녀가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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