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Thinking)/Meditation2021. 8. 16. 1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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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 17:16-34 자존감의 근원, 예수 그리스도

1. 바울이 아테네(아덴)에서 전도를 하고 있다. 어려서 읽었던 그리스 신화 이야기가 생각이 나는 대목이다. 많은 신들이 그리스에는 존재했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을 이렇게 평가한다.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심이 많도다" (22절)

2. 종교심이 많다는 말은 그들이 진리를 알기에 갈급하단 말로도 들린다. 무엇이 진리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솔깃한 것들이 들리면 그것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다. 21절에 보면 아테네 사람들의 삶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모든 아덴 사람과 거기서 나그네 된 외국인들이 가장 새로운 것을 말하고 듣는 것 이외에는 달리 시간을 쓰지 않음이더라" 그들의 관심은 이전에 자신들이 알지 못하던 외국에서 들어온 오직 새로운 신이었다. 

3. 한마디로 속이 빈 깡통같은 곳이었다. 종교성도 많고, 새로운 신에 대한 관심도 많아 탐구를 하지만 막상 살아계신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곳이었다. 그 곳에서 바울은 하나님에 대해서 소개하고 있다. 

4. 하지만 바울의 소개에도 그들은 듣지 않는다. 새로운 것에 관심이 많았던 아덴 사람들이 왜였을까? 그들은 찬란한 문명과 철학을 자랑하는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후손들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문화와 철학을 자랑했고, 한낱 유대인에 불과한 바울의 말을 무시했다고 보여진다.

5. 한 마디로 해본다면 바울을 어디 시골에서 온 촌뜨기로 생각했던 것 같고, 그 결과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소개에게 귀를 기울이지 않게 되었다. 그들의 종교성은 모르는 새로운 신에 대한 것이라기 보다는 어쩌면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신들(조상들로부터 내려오던 문화와 역사)에 대한 동경과 비교우위를 통한 만족이었을지도 모른다. 

6. 그랬기에 한낱 시골뜨기인 바울은 무시당한 것이다. 그렇게 그들은 진리를 무시하고, 거룩한 것을 개에게 줘 버렸다. 하지만 복음은 그렇지 않다. 복음은 우리로 하여금 타인과 비교하게 하지 않는다. 내가 저 사람보다 더 죄인인지, 덜 죄인인지를 비교하지 않는다. 그저 우리모두는 하나님의 아들의 피로만 속죄할 수 있는 죄인이고, 하나님께서는 한 사람 한 사람을 가장 사랑하신다. 그렇기에 복음은 타인이 아니라 오히려 내 자신에 대해 더 깊이 들여다 보게 한다.

7. 복음을 더 깊이 붙듬으로 비교우위를 점하려고 하는 생각을 내려놓기 원한다. 남보다 조금 나으면 안심하고, 조금 떨어지면 불안해 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이 나로 하여금 어떤 상황에서도 내가 창조주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존재임을, 그 분의 사랑으로 인해서 새롭게 된 존재임을  깨닫기 원한다. 

8. 아테네 사람들처럼 내가 가진 것을 자랑하고, 내가 가진 것에 나의 존재를 세우지 않기 원한다. 비교우위가 나의 자존감이 아니라 오직 복음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자존감의 근원이 되기를 원한다. 

9.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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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21. 8. 12. 1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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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 16:6-15 나의 열심이 아니라 인도하심으로

1. 바울은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열정에 사로잡혀 있었고, 그는 어디든 가서 복음을 전하기 원했다. 아시아로 가고자 하였으나 성령께서 막으셨다 (6절). 비두니아로 가고자 하였으나 다시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않으셨다.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는지라" (7절)

2. 복음을 전하는 일을 하고자 하였는데 막혔다. 선한 일이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인데 왜 막힌 것일까? 그 이유는 다른데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그로 하여금 다른 곳에 복음을 전하게 하기 원하셨다. 

3. 복음을 전하는 일이라고 해서 좋은 일이라고 해서 다 내가 해야 하고, 내가 관여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계획에 맞는 부분에서 나에게 허락하신 부분만 하면 된다. 내가 다 하려고 하는 것은 교만이다.

4. 바울과 같이 열심이 있는 사람에게는 못하게 하는 것이 오히려 더 힘든 일이었을 것 같다. 분명 7절에 예수의 영이(성령이) 허락하지 않으셨다고 하는데도 그는 또 다른 곳으로 간다. 멈춰 있는게 하지 않는게 그에게는 오히려 힘든 일이었다. 

5.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때로는 그래야만 한다. 할 수 있지만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없다면 하지 않는 것, 말할 수 있지만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신다면 말하지 않는 것, 갈 수 있지만 하나님께서 가라고 하지 않으신다면 멈춰야 하는 것이 필요하다. 

6. 왜냐하면 하나님의 일은 내 열심으로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선교는 “하나님의 선교”이며 하나님께서 하고 계시며,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일이기 때문이다. 

7. 수쿰빛언약교회 가운데도 그런 일들이 종종 생긴다. 말하고 싶지만 기다려야 하는 것, 잘 안되고 있는 일이 있어서 내가 해버리면 금방 끝날 수 있을 것 같은 것 등등의 일들이 있다. 그때 내 열정과 내 열심으로 해버리면 교회는 성장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선교사를 의지할 수 밖에 없다. 그 때 멈추고, 그 때 힘들지만 기다리고, 그 때 인내해야 하나님의 일들이 이루어진다. 기도하며 분별해야 한다. 멈춰야 하는 것인지, 내가 해야만 하는 것인지.. 그것을 알지 못하면 반대로 가야할 때 멈추게 되고, 해야 할 때 하지 않을 수도 있다. 

8. 이 어렵고도 쉽지 않은 일들 속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분별하고 싶다. 바울이 환상을 보며 주의 마음을 깨달았듯이, 우둔한 나의 속에 하나님의 지혜를 알게 해주시기를 원한다. 내가 해야 할지, 그들로 하게 해야 할지를 분별케 해주시기를 원한다. 

9.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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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21. 8. 10. 1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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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 15:22-35 일상의 충성됨

1. 예루살렘 공의회라는 큰 일이 있었다. 그들은 이방인들에게도 생명의 구원이 임했음을, 그리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이방인들에게 유대인의 율법의 멍애를 지우지 않는 것임을 확신했다.

2. 복음의 역사에서 엄청난 진보가 일어난 일이었고, 하나님의 계획과 뜻에 따라 결정을 한 것이었다. 그리고 나서 그들이 한 일은 신뢰할 수 있는 유다와 실라를 보내어 이 일의 결정사항을 전했다 (27절). 

3. 그리고 그들은 하던 일로 돌아갔다. "얼마 있다가 평안히 가라는 전송을 형제에게 받고 자기를 보내던 사람들에게로 돌아가되" (33절) 유다와 실라는 일을 마치고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간다. 

4. 그리고 함께 갔던 바울과 바나바도 그들의 하던 일로 돌아간다. "바울과 바나바는 안디옥에서 유하며 수다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주의 말씀을 가르치며 전파하니라" (35절)

5. 특별한 은혜로 큰 일을 경험하고, 중요한 결정을 내렸지만 그들은 결국 다시 원래 그들이 하고 있는 곳으로, 하고 있던 일로 돌아간다. 특별한 일은 중요하지만 일상적인 일, 내가 부르심을 받은 그 곳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6. 일상이 없이는 특별한 일도 없다. 평소의 말씀전파와 가르침이 없었다면 예루살렘 공의회도 없다. 일상을 충성되게 살아내야만 특별한 순간도 오는 것이다. 평소에 전도하고 가르쳐서 이방인들이 회심하지 않았다면 예루살렘 공의회로 이방인들에 대한 것을 결정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7. 결국은 특별해 보이지 않고, 화려해보이지 않는 일상을 가장 소중하게 여기고 정성껏 살아가야 한다. 나는 오늘, 이 일상을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 순간순간 특별하지 않게 여기고 특별한 어떤 은혜나 다른 것들을 구하고 있지는 않은가? 

8. 다람쥐 쳇바퀴 같은 일상을 충성되이 살아가기 원한다. 말씀을 읽고 연구하고, 큐티 영상을 찍고, 책을 읽고,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고, 설겆이를 하고 쓰레기를 버리고 하는 뭔가 세상을 바꾸는 일과는 전혀 상관 없는 것 같은 그 일들을 충성되이 하자. 그 일상의 충성됨이 결국은 하나님 나라를 확장케 하며, 예루살렘 공의회 같은 특별한 일들이 생기도록 할 것이다. 

9. 오늘도 일상을 정성껏 살아가기 원하며,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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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 15:12-21 복음의 정신과 본질에 집중하는 삶

1. 예루살렘 공의회에서 그들은 드디어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의 의미를 제대로 발견한다. 16-17절에 "이 후에 내가 돌아와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 또 그 허물어진 것을 다시 지어 일으키리니 이는 그 남은 사람들과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모든 이방인들로 주를 찾게 하려 함이라" 

2. 그 분의 오심은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시는 것이다. 장막은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는 곳이다. 그 장막이 다시 필요한 것은 유대인들 뿐만이 아니라 모든 이방인들로 주를 찾게 하려 함이다. 

3. 유대인들이 깨달인 이후에 그들이 결정한 것은 이방인들에게 율법의 멍애를 지우지 않기로 했다. 율법에서 꼭 지켜야 할 중요한 몇 가지를 제외하고는 이방인들에게 그 의무를 지게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4. 사도들은 복음의 본질을 깨닫고, 복음의 본질에 집중하기로 하였다. 복음을 깨닫는 다는 것은 본질에 집중한다는 것이다. 더 이상 식사하기 전에 손을 씻었느냐 안 씻었느냐로 논쟁하고 정죄하는 아니라 내가 그 복음의 본질을 믿고, 다른 이들로 하여금 그 복음 안으로 들어오도록 초청하는 것이다. 

5. 그렇기 때문에 '율법을 지킬 필요가 없다'가 아니라 율법의 정신에, 율법의 본질에 집중하여 하나님을 우리의 온 힘과 온 마음과 온 정성을 다하여 사랑한다는 것일 것이다. 또한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기에 그들에게 어떠한 악한 일도 행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6. 코로나 상황 속에서 교인들의 신앙도 양극화 되고 있음을 느낀다. 잘 모이는 사람은 더 잘 모이고, 잘 모이지 않는 사람은 더 자주 볼 수 없게 된다. 그들만의 이유가 분명히 있다. 하지만 복음의 본질은 그들로 하여금 모임에 나오고 안오고를 통해서 판단하는 것이 아니다.

7.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만나도록 돕고,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도록 격려하고 세워주는 것일 것이다. 선교사로써 더 집중해야 할 사람이 복음을 들어야 할 잘 보이지 않는 사람임을 잊지 말자. 그러나 내 본성은 은혜 받기에 합당한 사람(?)들 즉, 잘 나오는 사람들에게 집중하고 싶다. 

8. 하지만 그것은 결코 복음의 본질이 아니다. 복음은 유대인들과 이방인들로 하여금 주를 찾게 하는 것이다. 복음의 정신과 본질에 집중할 수 있게 되기를 원한다. 내가 좋고 익숙하고 편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것, 기뻐하시는 것을 하기 원한다. 

9.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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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 13:44-52 말씀, 성령충만함의 시작

1. 우리가 복음을 듣고, 복음을 믿고 나면 삶이 달라지게 된다. 왜냐하면 복음은 하나님의 능력이고, 그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 안에 들어와서 그저 멈춰있지 않기 때문이다. 복음을 들은 자는 변화를 겪게 된다.

2. 오늘 본문에서는 두 집단, 복음을 들었지만 믿지 않은 유대인들과 복음을 듣고 믿은 이방인들이 비교되어서 나온다. 유대인들의 태도를 보자. "유대인들이 그 무리를 보고 시기가 가득하여 바울이 말한 것을 반박하고 비방하거늘" (46절)

3. 이방인들의 태도는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독기가 가득차고, 시기하고 비방하는 유대인들과 달리 이방인들은 기뻐하고 찬송하였다. 유대인들의 이러한 태도는 50절에서도 볼 수 있다.

4. "이에 유대인들이 경건한 귀부인들과 그 시내 유력작들을 선동하여 바울과 바나바를 박해하게 하여 그 지역에서 쫓아내니" (50절) 선동하고, 박해하고, 쫓아낸다. 하지만 그렇게 당했던 제자들은 어떠했는가?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이 충만하니라" (52절)

5. 복음을 듣고 깨달은 자들의 삶은 화평과 온유함, 사랑과 기쁨이 충만했다. 성령의 열매들이 맺힌 것이다. 하지만 유대인들의 모습은 성령의 열매가 아닌 악한 것들이 가득찼고, 시기와 질투, 폭력과 기만이 가득했다. 복음이 모든 것을 변화시킨다고 말하는 이유이다.

6. 나는 복음을 거절했던 유대인들과 복음을 듣고 성령이 충만했던 사람들의 사이의 어디 즈음에 있는 것일까? 복음을 듣고 믿었는데, 성령의 열매가 맺혀가고 있는가? 아니면 시기와 질투, 기만하는 모습들이 있지는 않은가? 먼저 복음을 들었다 말하는 나를 돌아보자.

7. 매일 밤 10시에 Line에서 교인들 대상으로 성경읽기를 live로 하고 있다. 어제는 사도행전 11장을 읽었다. (아이러니하게도 태국말을 제일 못하는 내가 태국 교인들을 대상으로 태국어로 성경을 읽고 있다.) 교회를 다니고, 예배를 드리고, 찬양을 좋아하지만 하루에 성경을 한 장도 잘 읽지 않는 교인들을 위해 시작했는데, 결국은 가장 은혜를 받고 있는 사람은 다름아닌 '나'이다.

8.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면서 결국은 내가 그 말씀의 은혜와 능력을 누리고 있기 때문이다. 태국어로 읽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에 준비를 하면서 읽고, 또 라이브때 읽고, 다 읽고 나서 마음에 와 닿은 말씀을 나누고 하며 한 장을 여러차례 읽다보니 누리는 은혜들이 있다. 성령의 충만함의 시작은 결국 들음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대함에서 나오는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9. 하나님의 말씀이 충만할 때 오는 그 신비함, 나는 연약하고, 나는 여전히 유대인들과 사도들 그 사이 어딘가에 어정쩡하게 있지만 나를 채우시는 그 말씀으로 인한 가슴의 뜨거움이 성령의 충만함의 모습 중에 하나가 아닐까? 물론 성령의 충만함을 어찌 한 가지로만 정의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성령의 충만함을 위해서 결코 뗄 수 없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일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롬 10:17) 더욱 더 말씀으로 충만한 사람이 되기 원한다. 

10. 말씀이 없으면 내가 얼마나 쉽게 유대인의 모습이 되는지는 스스로도 잘 알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내 삶을 채우는 사람으로 살아가고 싶다. 오늘도 샬롬

*사진은 어제밤 성경읽기 live 사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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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 13:13-31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

1. 나의 영어 이름은 david이다. 물론 태국에서의 이름도 아짠 데이빗이다. '데이빗 선생님'이란 뜻이다. 나는 처음 신앙생활 시작할 때 부터 다윗이 참 좋았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묻고 순종하는 다윗이 참 좋았다.

2. 그래서 영어 이름도 그를 따랐고, 성경을 읽을 때에도 늘 관심은 다윗은 어떻게 하였는가? 였다. 왜냐하면 그는 내가 되고 싶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3. 그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는 그 한 마디는 나로 하여금 그를 사랑하게 하였고, 그의 연약함에도 그를 계속 사랑하게 되었다. 하지만 오늘 본문을 보면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었지만, 그는 그의 후손을 예표하는 사람에 불과했다. 진짜는 따로 있었다. 

4. 23절을 보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그 한 사람이 나온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이 사람의 후손에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주를 세우셨으니 곧 예수라" 여전한 연약함과 넘어짐, 그리고 하나님의 결정에 반하는 불순종이 있었던 다윗과는 달리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은 완전하셨다.

5. 하나님의 마음에 온전히 합하고, 하나님께 전적으로 순종하고, 하나님의 모든 뜻을 이루신 바로 그 분이다. 여자가 낳은 자 중에서 가장 큰 자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던 세례요한의 고백은 이를 더 분명하게 이해하게 해준다. 

6. "요한이 그 달려갈 길을 마칠 때에 말하되 너희가 나를 누구로 생각하느냐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있으니 나는 그 발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리라 하였으니" (25절)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다고 했던 다윗도 가장 큰 자였던 세례요한도 그 분에 비할 바가 아니다. 

7.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마음에 온전히 합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지금 전하고 있는 것이다. 다윗과 같이 평안할 때 밧세바를 범하는 그런 분이 아니시다. "상한 갈대를 꺽지 아니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마12:20) 하시는 분이다. 온전한 왕이시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분이시다. 내가 믿고 내가 전하는 분이 바로 이렇게 위대한 하나님이시다.

8. 그러니 두려워하지도 말고 쭈뼛거리지도 말자. 염려하지도 말자.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는 호칭이 온전히 합당한 그 분 께서 나의 모든 죄를 대신하셨고, 나를 죽음에서 건지셨고, 영원한 생명을 주셨다. 그 분 안에 거하며, 그 분과 동행하며 그 분의 증인이 되는 그 한 사람이 되고 싶다. 아무리 그 분을 사랑해도 이름을 예수라 지을 수 없으니 아쉽긴 하지만 말이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그 한 분을 따라가는 삶이 되길 원하며…

9.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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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 13:1-12 사람의 눈과 경험이 아니라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1. 안디옥 교회에는 많은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었다.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 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 사울이라" (1절)

2. 바나바는 워낙 유명했을테고, 니게르라는 것은 흑인 혹은 아프리카 사람을 의미하는 것으로 안디옥 교회는 다양한 인종들이 함께 공존했던 곳으로 보여진다. 구레네 사람 루기오는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로 보기도 한다. 그리고 헤롯의 젖동생이면 헤롯과 젖을 같이 먹은 동생이니 적어도 친척이나 그에 상응하는 지위를 가진 사람이었을 것이다. 

3. 그리고 마지막은 사울이다. 그는 가장 나중 된 사람이었다. 그런데 성령께서는 유력해 보이는 그 누군가를 세우지 않으시고 바나바와 가장 나중된 사울을 세우신다. 그리고 안디옥 교회 사람들은 그것에 순종한다.

4. 교회에서 헤롯의 젖동생과 같이 유력해 보이고, 지위가 높아 보이는 사람이 있다면 또 그 사람이 함께 기도하고 열심으로 섬긴다면 그러한 사람에게 우리는 쉬이 마음이 기울 수 밖에 없지만 성령께서는 가장 나중된 사울을 말씀하셨고, 안디옥 교회는 순종한다.

5. 이것이 성령이 이끌어 가는 교회이다. 인간적인 눈으로는 그 사람의 출생, 신분, 지위, 재력 등등이 보이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것으로 사람을 세우시지 않는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우리 인간적이 눈과 달라 보이더라도 순종해야만 하는 것이다. 

6. 나는 무엇을 바라보고, 무엇을 더 귀하게 여기는가? 인간적인 스펙인가? 내 눈으로 보이는 그의 신앙인가? 선교사가 실수하기 쉬운 부분이 바로 내가 눈으로 보는 현지인들의 모습일 것 같다. 성령께 묻지 않고 내 인간적인 눈을 의지하면 실수할 수 밖에 없다.

7. 하나님께 물어야 하고, 하나님께서 세우시도록 결정권을 내어 드려야 한다. 인간적인 눈은 자꾸 스펙과 그 사람의 보이는 모습을 선호할 수 밖에 없다. 만약 안디옥 교회가 성령의 음성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으로 다른 사람을 세웠다면 정말 역사는 달라질 수 있었을 것이다.

8. 조그마한 것도, 내 생각과 경험을 의지하지 말자.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지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잠 3:5-6. 그렇게 하나님만 의지하는 내가 되길 원한다.

9.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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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21. 7. 27. 2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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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 10:17-33 신뢰함으로 오늘을 살아가자


1. 하나님은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사람들을 불러 하나님의 일을 이루신다. 오늘 본문을 보면 베드로는 어제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거룩하지 않은 짐승들을 먹으라는 환상을 보여주셔서 그의 마음을 먼저 준비시키셨다.

2. 고넬료에도 천사로 나타나셔서 베드로라고 하는 사람을 청하라고 하셨다 (5절). 각 사람에게는 자신에게만 일어나는 특별한 일이었겠지만 하나님은 이 모든 일들을 하나로 꿰어 마음과 자세를 준비시킨 두 사람을 만나게 하신다. 

3. 그랬기에 베드로는 이방인인 고넬료의 집에 들어가서 유숙하게 되고, 하나님이 거룩하다 하신 것(이방인들)을 더럽다 하지 않게 되었다. 고넬료는 거룩한 사람이었고, 늘 기도와 구제를 하던 사람이었지만 이제 하나님이 아닌 사람 베드로로부터 들을 준비가 되었다. 

4. 특별한 관계가 없을 것 같았던 두 사람에게 일어난 하나님의 임재가 하나의 일로 묶이고 있다. 바로 이방인들에게도 이제 더 이상 그들을 더럽다 하지 않으며 하나님의 복음이 전해질 준비가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5. 상관없어 보이는 일들.. 나랑 특별히 관계 없어 보이는 일들도 하나님의 계획 안에서는 어쩌면 하나로 묶여져 있다. 물론 내가 지금은 이해하지 못하고, 알 수도 없다. 하지만 언젠가 하나님의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준비시키시고, 이뤄가시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6. 기도 중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자가, 하나님의 환상이 이방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계획의 확장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었을까? 베드로도 고넬료도 절대 몰랐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께 자신들이 해야 하는 일들을 했을 뿐이다. 기도했고, 베드로를 부르라고 해서 불렀고, 베드로는 그 부름에 응답해서 간 것이다. 

7. 나의 삶도 마찬가지다. 오늘을 최선을 다해 살아가야만 한다. 답답해 보이는 코로나의 상황도, 때로는 힘들게 느껴지는 온라인 사역도, 아이들과의 찌지고 볶는 이 시간들도.. 어떠한 하나님의 계획과 준비가 되어지는지 모르지만 모든 것은 하나님의 손 안에, 하나님의 능력 아래에 있음을 고백할 수 밖에 없다. 

8. 오늘도 주어진 일들에 최선을 다하자. 최선을 다해 묵상하고, 최선을 다해 예배하고, 최선을 다해 말씀을 읽고, 최선을 다해 필요한 연락들을 하며, 최선을 다해 오늘을 살아가자. 그러다보면 주님께서 주님의 때에 이루실 것이다. 신뢰함으로 오늘을 살아가자.

9.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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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21. 7. 26. 1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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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 10:1-16 하나님만 결정자 되시도록

1. 베드로는 유대인으로써 음식에 대한 율법을 가지고 있었다. 그에게 있어서 율법은 절대적이었고, 율법의 완성이시며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께서 오셔서 함께 지내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율법에 매여 있었다. 

2. 그러한 베드로에게 하나님의 소리가 들려온다.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하더라" 율법을 누가 정하는가? 모세가 정한 것인가? 아니다. 모세도 율법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일 뿐이다. 

3. 하지만 유대인인 베드로는 이 율법을 절대화하였고,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중요하게 여겼다. 하나님의 음성에 순종하여 간 빌립과는 다르게 그는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에 순종하지 못했다. 황홀한 중에 들은 이 음성은 하나님의 음성이었다.

4. 하나님이 우리에게 율법을 주신 것은 율법의 주체, 거룩하고 속한 것을 결정하는 주체가 하나님이심을 드러내신 것이다. 하지만 지금 베드로는 자신이 결정자의 자리에 앉아 있다. 하나님이 먹으라고 하시나 자신이 그것은 속한 것이기 때문에 먹을 수 없다고 하나님께 말하고 있는 것이다.

5. 유대인으로써 거룩하지 못한 음식을 먹는 일은 분명히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율법보다, 생각보다, 내가 결정자의 자리에 앉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다. 하나님의 말씀이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이고, 하나님의 심판자의 자리에 앉으시는 것이다. 

6. 얼마나 많은 순간 내가 판단자의 자리에 심판자의 자리에 앉아 있는가? 그렇게 남을 판단하고, 심지어는 말씀도 판단하고, 하나님의 인도하심도 판단한다. 내 경험, 내 합리적인 생각이 더 옳고 하나님의 말씀은 비합리적인 것이라고 생각할 때가 얼마나 많은가? 

7. 교회 성도들과 함께 라인그룹에서 성경읽기를 시작했다. 목양팀에 제안을 했고, 다들 좋다고 해서 어제 밤 10시에 첫 시작을 했는데 문제는 외국인이고, 태국어 발음도 썩 좋지 않은 내가 읽으면 좋겠다고 하였고, 시간도 쉬는 날 없이 매일 밤 10시에 읽자고 했다. 혼자 생각하기엔 태국 사람이 읽는게 더 좋을텐데.. 그리고 주일은 쉬면 좋을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8. 주님이 주셨던 마음은 함께 하나님의 말씀을 읽으며 함께 그 은혜를 누리는 것인데.. 내가 가진 생각이 이미 있었고, 내가 바라는 모습이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주셨던 마음에 내가 바라는 것이 추가된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누가 읽으면 어떻고, 언제 읽으면 어떻고, 안 쉬면 어떤가? 그런데 나는 베드로와 같이 내가 결정의 자리에 앉으려고 하였고, 내가 바라는 모습으로 가기를 원했던 것이다. 

9. 교회를 개척하며 가졌던 마음처럼 하나님이 이끌어 가시는 교회가 되기를 원한다. 하나님이 결정하시는 교회가 되기를 원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제와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아야겠다. 주시는 마음만으로 충분하고, 나머지는 함께 결정하면 된다. 내가 결정자의 자리에 앉을 필요도 없고, 내가 바라는 모습으로 가야하는 것도 아니다. 오늘도 겸손을 배우며 배운 데로 살아가기 원한다.

10.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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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Thinking)/Meditation2021. 7. 24. 1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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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 9:19b-31 복음의 정신과 태도로 살아가기

1. 사울이 예수님을 만난 이후에 180도로 바뀌어서 이제는 그가 핍박하던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증언하며 전도하고 있다 (22절). 유대인들은 당황했고, 그들은 사울을 죽이려고 하였다. "여러 날이 지나매 유대인들이 사울 죽이기를 공모하더니" (23절).

2. 아마도 입을 막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 바로, 죽여 버려서 더 이상을 말을 하지 못하게 하는 방법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러한 폭력적이고 잔인한 방법을 택한 것은 사도 바울이 처음이 아니었다. 그들은 그들이 옳다고 여기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3. 하나님께서 보내신 수 많은 선지자들을 죽였고, 심지어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서 못 박아 죽였고, 얼마전에는 스데반을 돌로 쳐 죽였다. 왜? 그들이 옳고, 그들의 옳은 생각을 지키기 위해서 다른 생각을 말하는 사람은 죽어야 마땅했기 때문이다. 혹은 율법이 그것을 지지 하기 때문에…

4. 지나친 확신과 자만은 오히려 진리를 가리워 버렸고, 진리로 나가는 길을 막아 버렸다. 그리고 그들이 택한 방법은 가장 폭력적이면서도 가장 쉬운 방법으로 메신저를 막아 버리는 방법이었다. 이러한 유대인들을 보며 나는 어떤 태도를 가지고 있는지 생각해보게 되었다.

5. 나는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과 어떻게 대화하고, 어떻게 하고 있는가? 유대인들과 비슷한 태도를 가졌음을 깨닫게 된다. 이미 몇번 마음 속으로 회개한 부분이지만 나눠보자면 아내가 이야기를 할 때, 그 이야기 자체로 들어주지 않고 자꾸만 다른 관점에서 보라고 이야기를 하거나 아니면 아내의 이야기를 지례 짐작하고, 넘겨짚어서 이야기를 끊거나 그런거 아니라고 이야기를 종종 하였다.

6. 아내는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데, 나는 이미 내가 안다고 혹은 그런 방향으로만 보면 안된다고 선비질을 한 것이다. 심지어 아내가 틀린 말이나 생각을 한 것도 아니고 정당하고, 옳은 이야기였다. 그래서 아내는 나에게 이런 이야기들을 하지 않으려고 했고, 나의 이런 태도를 매우 싫어하였다. 사울을 입을 막귀 위해 쉽게 죽이려고 했던 유대인들의 태도가 내 안에 동일하게 있었다. 

7. 물론 그 이후로 노력하고, 잘못한 부분을 회개하였지만 여전히 내 안에 이러한 부분들이 있다. 아이들이 뭔가 잘못했을 때에도 지례짐작 해서 아이들을 혼낼 때가 있다. 그러면 아이들은 억울해하고, 때로는 울기도 한다. 그게 다 아빠가 유대인과 같이 내가 맞다고 생각하는 것을 하기 위해 다른 사람들의 입을 틀어막는 쉬운 방법으로 양육을 했기 때문이다.

8. 오늘 본문을 보며 나의 태도를 다시 한번 생각하며 또한 회개한다. 쉬운 방법으로 다른 이들의 다른 생각을 막으려고 하거나, 나의 옳음이나 내 생각을 지키기 위해 다른 사람들을 쉽게 대했던 태도를 회개한다. 복음은 수 많은 선지자들을 죽이고, 예수를 못 박고, 스데반을 돌로 친 나 같은 사람을 용서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다. 

9. 복음의 정신으로 살아가고, 복음의 정신으로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용납하고, 복음의 정신으로 다른 사람들을 대해야 한다. 그게 아니라면 내 생각에 갇혀서 다른 이들을 억압하고 짓누르고 마음으로 죽일 수 밖에 없다. 오늘도 예수를 굳게 붙드는 하루가 되기를 원한다.

10.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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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