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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하 34:14-33 정확한 기준, 그리고 그 기준을 정확하게 해석하기

1. 어떠한 것이라도 선하고, 악한 것을 구분하려면 그것을 구분할 수 있는 기준이 있어야 한다. 기준이 없이는 어떠한 것도 서로 다르다고 구별할 수 없다. 

2. 우리 믿는 자들의 삶에서는 이거싱 바로 말씀이다. 말씀이 없이는 사사기 때 처럼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게 된다. 오늘 요시야 왕은 율법책을 발견하게 된다 (14절) 그리고 그 책을 읽으매 (18절) 자신의 옷을 찢게 된다 (19절). 

3. 자신의 옷을 찢은 이유는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무엇을 잘못하고 있는지를 말씀이라는 기준을 통해 발견했기 때문이다. 말씀에 비추어 보니 자신들은 죄를 범했고, 하나님의 노여움을 살 일들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25절)

4. 그들은 무리들에게 말씀을 읽어주고 (30절) 백성들을 언약의 말씀에 참여하게 하고 (32절) 가증한 것들을 다 제하여 버리고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섬기도록 하였다 (33절). 이 모든 것이 기준이 명확했기 때문이다. 

5. 무엇을 기준으로 삼고 살아갈 것인가?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왜냐하면 기준이 없다면 아무런 구분을 못하게 되는 것이겠지만 만약 잘못된 기준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더 큰 문제를 초래할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간 우상의 기준을 가지고 있다가 하나님의 기준으로 돌아오게 된 것이다.

6. 나는 어떠한 기준을 가지고 있는가? 하나님의 말씀인가? 아니면 내 생각과 내 기준인가? 혹은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이라고 말하면서도 자꾸만 내 생각과 기준으로 모든 것을 생각하고 판단하려고 하고 있지는 않은가? 

7. 요시야 왕과 같이 말씀으로 기준을 삼고 말씀으로 살아가기 원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말씀을 잘 알고 이해해야 한다. 바리새인들처럼 말씀을 가지고 사람을 죽이려고 하면 안된다. 하나님의 마음과 말씀의 배경들을 더 잘 이해하고, 더 열심히 공부해서 말씀이 말하려고 하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8. 요즈음 말씀을 오독하거나 자의적 해석으로 인해 얼마나 많은 일들이 발생하고 있는가? 기준은 있는데, 그 기준을 내 마음대로 이해하고 해석한다면 절대로 그 기준대로 살아갈 수 없다. 목사가 할 일이 그 말씀을 바로 이해하고 해석해서 전달하는 것일텐데.. 공부하지 않는 목사들이 많고, 나도 그런 자로 선교지에서 말씀을 전할까 두렵다. 

9. 다시 말씀 앞으로 나아가고, 부지런히 공부하고, 말씀을 자의적으로 해석하지 않는 자가 되기를 원한다. 요시야 왕 처럼 율법이 의미하는 것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다른 이들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자로 쓰임받고 싶다. 

10.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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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하 32:1-19 히스기야의 삶의 태도

1. 십일조를 모두에게 공평하게 나눠주고 난 이후 이스라엘은 앗수르왕 산헤립이 쳐들어왔다 (1절). 하나님 앞에서 좋은 일을 하고, 충성스럽게 섬겼는데 어려움이 닥쳤다. 하나님께 더 집중해서 예배 드리기 위해서 십일조를 레위인들에게 나눴지만 결과는 전쟁이었다. 사실 이러한 일은 우리의 일상에서 자주 있는 일이다. 

2. 그럴 때 어떤 자세를 취하게 되는가? “하나님 나한테 어떻게 이러실 수 있습니까? 제가 이것도 하고 이것도 하고…” 이렇게 대들 수도 있고, 여전히 충성스럽게 섬길 수도 있다. 오늘 히스기야 왕은 두 번째의 모습이었다. 

3. 그 자세는 하나님을 향한 사람의 생각과 자세에서부터 비롯된다. 첫 번째 태도는 하나님에게 내가 이만큼 했으면 하나님도 나한테 이만큼 해줘야 한다는 기복신앙에 가깝다. 하나님은 내가 이해되는 방법으로 나의 삶에 간섭해야만 하는 작은 신에 불과하다. 사실은 내가 하나님인 것이다.

4. 내가 원하는 시점에 내가 원하는 방법으로 하나님이 일하여 주시기 원한다. 왜냐하면 내가 내 삶의 주인이고, 하나님은 램프의 지니같이 나를 서포트 하는 존재 밖에 안되기 때문이다. 두 번째 태도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진정 하나님 되게 하는 방법이다.

5. 히스기야의 말을 들어보자. “너희는 마음을 강하게 하며 담대히 하고 앗수르 왕과 그를 따르는 온 무리로 말미암아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우리와 함께 하시는 이가 그와 함께 하는 자보다 크니” (7절) 그는 하나님께 이 전쟁을 마치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않았다. 이 전쟁을 없게 해달라고도 기도하지 않았다. 

6. 왜 이러한 일이 일어났는지 불평하지도 않았다. 그는 오직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선포하였다. 하나님은 자신의 생각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 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셨다면 하나님께서 빠져나갈 방도도 주실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7. 이러한 삶의 태도가 있었으면 좋겠다. 하나님은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은 온 우주를 다스리시고, 그 하나님께서는 나를 사랑하사 나의 편에 서 계신다. 그렇기 때문에 그 하나님을 의지할 때에는 내 앞에 시련이 얼마나 크든지 상관없이 그 하나님의 은혜로 넘어갈 것이다. 내 힘으로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하시는 그 분으로 말미암음이다.

8. 히스기야 왕과 같이 오늘을 살아갔으면 좋겠다. 내가 하나님 되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을 나만의 램프의 지니 만들지 말고 그 완전하시고 온전하신 하나님께서 나의 편에 서 계심을 믿고 지금 이 어려운 순간들을 잘 헤쳐나갈 수 있기를 원한다. 지금의 앞이 잘 보이지 않는 상황 속에서 더더욱 하나님을 붙들기 원한다. 그리고 그 분 편에 더 서기 원한다. 

9.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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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하 31:11-21 율법을 지킴에서 나오는 선순환

1. 어제 본문에서 보면 예배가 회복되고 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율법대로) 많은 십일조를 가져왔고 (5절) 10절에 보면 그 십일조는 많이 쌓이게 되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는 그 십일조를 창고에 쌓아두거나 혹은 부를 늘리는데 사용되지 않고, 그것을 (율법대로) 나눠주었다 (15절).

2. 그런데 이 나눠주는 모습이 너무나도 아름답다. “그의 수하의 에덴과 미냐민과 예수아와 스마야와 아마랴와 스가냐는 제사장들의 성읍들에 있어서 직임을 맡아 그의 형제들에게 반열대로 대소를 막론하고 나눠 주되” (15절) 특별한 제한이 없이 섬기는 모든 자들에게 공평하게 나눠준다.

3. 그리고 16절에서 19절을 보면 “삼 세 이상 족보에 기록된 남자 외에 날마다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서 그 반열대로 직무에 수종드는 자들에게 다 나눠주며”(16절), “또 그들의 족속대로 족보에 기록된 제사장들에게 나눠 주며 이십세 이상에서 그 반열대로 직무를 맡은 레위 사람들에게 나눠주며” (17절) “또 그 족보에 기록된 온 회중의 어린 아이들 아내들 자녀들에게 나눠 주었으니” (18절) “성읍 가까운 들에 사는 아론 자손 제사장들에게도 나눠 주되 제사장들의 모든 남자와 족보에 기록된 레위 사람들에게 나눠 주었더라” (19절) 

4. 이들은 모두 예배를 섬기고, 율법에 열심을 다해야 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온전히 율법과 예배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필요한 것을 나눠주었고, 어느 누가 독차지 하려고, 혹은 성전 창고의 부를 넘치게 하려고 모아두거나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들은 율법이 정한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나눠주었다. 사실 하나님은 우리의 십일조가 필요하지 않으시다. 모든 것이 풍성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십일조를 내라고 하신 것은 두 가지 목적이었다.

5. 첫째는, 하나님께서 모든 물질의 주인이심을 하나님의 주되심(Lordship)을 우리에게 배우게 하시기 위해서, 둘째는, 이 십일조를 통해서 하나님의 일을 섬기는 자들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서였다. 율법을 지킴으로서 모든 사람들이 함께 넉넉해졌고, 굶거나 그가 맡은 일을 못하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 

6. 원래 율법은 이런 용도였지만 율법을 지키는 것에 포커스를 맞추면서 이스라엘은 오히려 율법에 매이는 자들이 되어 버렸다. 율법의 계명을 지키게 되면 우리 모두가 함께 부유해지고, 행복해지게 된다. 그들은 모두 행복해졌고, 레위 자손들은 더 예배와 율법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선순환이 시작된 것이다. 

7. 모세의 율법은 폐기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법으로 대체되었다.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의 큰 두 가지 계명으로 우리에게 주어졌다. 함께 행복하고, 행복의 선순환이 일어나려면 우리가 이 계명을 지켜야 한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한다면 많은 불공정과 불법이 사라지고, 함께 행복할 수 있을 것이다.

8. 하지만 누구로 부터 시작할 것인가? 결국은 예수를 믿는 나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믿고, 그 분의 사랑을 받은 나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사랑이 예수 그리스도로 부터 온전히 시작된 것 처럼 또한 우리로 시작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사랑의 선순환이 일어나고 모두 함께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더욱 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게 된다.

9. 온라인으로 예배하고 교제하는 것 만으로는 많이 부족하다. 이럴 때 일수록 더 사랑하고, 더 섬기고, 더 먼저 연락하지 않는다면 사랑의 선순환은, 행복의 선순환은 일어날 수 없다. 그것이 먼저 나로부터 시작되기를 원한다. 예수께서 나에게 주신 율법을 지킴을 통해서 사랑의 선순환이 우리 가정과 공동체에 일어나기 원한다.

10.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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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하 31:1-10 복음에 힘쓰는 자가 되자

1. 이스라엘 백성들은 유월절을 지켰고, 히스기야 왕은 이제 다시 예배를 시작한다. 2절을 보면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의 반열(순서)을 정하고 그들의 반열에 따라 각각 그들의 직임을 행하게 하되” 라고 기록하고 있다. 

2. 순서에 따라 예배가 드려지게 되었다. 이 야기는 기존에 반열을 따라 예배를 드리지 않았음을 시사한다. 그리고 히스기야 왕은 왕의 재산중에서 얼마를 정하여 제사에 필요한 재정으로 쓰게 한다 (3절). 그리고 예루살렘 사람들을 통해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 몫의 음식을 이 보장해 주도록 하였다 (4절). 

3. 그렇게 했던 이유는 단 한 가지였다. “그들에게 여호와의 율법을 힘쓰게 하니라” (4절 후반부) 그들이 생업에 신경쓰지 않게 하여 오직 여호와의 율법에만 집중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이 부분을 읽는데 어제 선교비를 송금 받은게 생각이 났다. 우리 단체는 선교비를 모았다가 매월 1일에 필요한 것을 제하고 송금을 해준다. 

4. 하나님께서 이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여러 후원자를 통해서 우리 가정의 필요를 공급해주시는 이유는 동일하다. 바로 우리로 하여금 여호와의 복음 전하는 일을 힘쓰게 하기 위해서이다. 오직 복음을 전하고, 사람을 양육하는 일에 집중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5. 내가 정말 다른 일을 하는 것을 고민하거나 생업에 대해 깊이 고민하지 않고, 교회를 세우고, 사람을 세워가는 일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오늘 본문과 같이 역사해주시는 것이 생각나서 감사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드는 생각은 '내가 정말 그에 합당하게 살아가고 있느냐?' 였다. 나는 정말 복음에 힘쓰고 있는가? 

6. 어제 방콕의 끝자락에 살기 때문에 한 30km를 운전해서 가야만 하는 지역에 사는 한 자매의 생일이었고, 코로나로 상황은 어렵지만 함께 생일축하파티를 하기로 하고 방문했다. 출발 전에는 운전을 오래 해야 한다는 생각과 다른 할 일들이 생각이 나서 가고 싶지 않은 마음도 있었다. 하지만 아내가 미리 식사까지 챙겨주면서 조언을 해줬고, 축하를 위해 다녀왔다.

7. 사실 함께 모인 그 시간이 너무 감사했고, 함께 축복하고 기도하면서 많은 감사를 하게 되었다. 또한 오늘 본문을 보면서 우리를 위해 후원하시고 헌금하시는 손길들이 다 우리의 생업이 아니라 복음에 집중하도록 하기 위한 것임이 생각이 나서 어제 망설였던 그 마음이 참으로 죄송하게 느껴졌다. 나에게 송금되는 재정은 내가 한 일에 대한 대가, 즉 월급이 아니다.

8. 오직 복음에 집중할 수 있도록 주님께서 여러 귀한 교회와 후원자들을 통해 주시는 재정이고, 나는 오늘 본문처럼 복음을 위해 힘써야만 한다. 태국이 코로나로 상황이 매우 심각한 상황이기게 방역에 더 조심하며 복음에 더 힘쓸수 있는 자가 되기 원한다. 우리 가정을 위해 어려운 중에도 헌금해주시는 모든 분들의 마음처럼 더 복음을 위해 힘쓰는 자가 되기 원한다. 

9. 정말로 복음을 위해 아낌없이 나의 삶과 시간을 내어드릴 수 있는 선교사가 되길 원한다. 오늘도 샬롬

*생각해보니 정말로 감사한게 많습니다. 저희 가정이 복음에 힘쓸 수 있도록 어려운 중에도 아낌없이 기도와 후원을 해주시는 모든 동역자님들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 큐티처럼 더 복음에 힘쓰는 자가 되겠습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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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하 30:13-27 히스기야의 리더십과 기도

1. 이스라엘 백성들은 유월절을 지키게 되었다. 그동안 지켜지지 못하던 유월절이 절기를 따라 지켜지게 되었다. 참 감사한 일이다. 어제 히스기야 왕이 보발꾼을 보내어 유월절을 지키도록 명했지만 그것을 거절한 지파들이 있었다. 그 지파들은 오늘도 규례대로 행하지 아니하고 자기들 멋대로 한다. 

2. 18절 상반절을 보면 “에브라임과 므낫세와 잇사갈과 스불론의 많은 무리는 자기들을 깨끗하게 하지 아니하고 유월절 양을 먹어 기록한 규례를 어긴지라” 그들은 참석하지 않은 것 뿐만 아니라 유월절의 규례를 자기들만 지키지 않았다. 거룩한 예식을 파토내는 것 같은 행동들을 한 것이다.

3. 이 때 히스기야의 기도가 참 마음에 와 닿는다. 18절 후반부 부터 20절까지이다. “히스기야가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여 이르되 선하신 여호와여 사하옵소서 결심하고 하나님 곧 그의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구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비록 성소의 결례대로 스스로 깨끗하게 못하였을지라도 사하옵소서 하였더니 여호와께서 히스기야의 기도를 들으시고 백성들을 고치셨더라"

4. 히스기야는 마치 모세의 기도를 연상하게 한다. 그들이 정말 오랫만에 지켜지는 유월절을 지키려 하지 않았고, 절기를 지키는 가운데 그들은 규례를 따르지 않고 자기들 마음대로 했는데도 히스기야는 그들을 사하여 달라고 기도한다. 모세도 이와 비슷하게 기도했던 것 처럼 이것이 리더의 기도인 것 같다. 

5. 정말 살다보면 '이 사람은 이럴꺼면 왜 여기에 있는걸까?’라는 생각이 드는 경우가 있다. 같은 한국 사람들끼리 있어도 그런 사람들은 있다. 태국 사람들을 섬기면서도 때로는 문화적인 차이, 가치관의 차이로 내가 잘 그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도 생긴다. 일례로 우리 교회에서 부활절, 성탄절에 버금가는 절기 중에 하나는 발렌타인데이였다.

6. 처음에는 그게 너무 이해가 가지 않았다. 도대체 발렌타인데이가 뭐길래 부활절 성탄절급으로 생각을 할까? 라는 생각이 많았고, 어느정도 이해는 했지만 솔직히 아직도 다 이해가 되지는 않는다. 그럴 때 히스기야와 같이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자는데 싫다고 하고, 그러면 참여를 안하면 될 것을 참여해서 깽판을 놓는 사람들에게도 하나님의 자비와 용서를 하는 것이 리더의 기도여야 한다.

7. 선교사는 특별히 더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를 구해야 한다. 서로 다른 언어, 문화, 생각 속에서 내가 결코 항상 옳은 것이 아니라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이 옳아야 한다. 그리고 기다려주고, 이해해주고, 정말로 틀린 것이 아니라면 그저 지적하기 보다는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구해야 한다. 그것이 선교사의 기도여야 한다. 문화와 복음을 구분해야 하며, 복음(진리)에는 일치를 구해야 하지만 문화에는 다양성을 인정해야 한다. 

8. 나는 어떠한 선교사로 살고 있는가? 그들을 위해 기도하며, 내 생각과 달라도 하나님께서 그들을 받으셨음을 믿고 인정하고 용납하는가? 아니면 내가 옳다고 믿는 것을 강요하는가? 히스기야는 강요하지 않고 기다렸고, 하나님의 용서를 구했다. 그 결과는 26절을 보면 “예루살렘에 큰 기쁨이 있었으니 이스라엘 왕 다윗의 아들 솔로몬 때로부터 이러한 기쁨이 예루살렘에 없었더라”라고 기록하고 있다.

9. 히스기야와 같은 리더십으로 하나님께 자비와 은혜를 구하니 참여했던, 참여하지 않았던 모든 사람들에게 큰 기쁨이 일어났다. 내가 어떠한 리더, 어떠한 선교사,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를 말해준다고 생각된다. 너그럽고, 넒은 그리고 기도하는 선교사가 되자.

10.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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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Thinking)/Meditation2021. 5. 31. 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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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하 30:1-12 무엇이 내 삶의 결정의 기준인가?

1. 이스라엘의 타락상은 그들이 유월절을 지키지 않았던 것에서도 알 수 있다. 5절 말미를 보면 “이스라엘 하난미 여호와의 유월절을 지키라 하니 이는 기록한 규례대로 오랫동안 지키지 못하였음이더라” 라고 기록하고 있다. 

2. 오랫동안 지키지 못했다면 유월절이 기억 속에만 남아 있었을텐데 그것을 끄집어낸 히스기야 왕은 그런 면에서 대단한 왕이다. 심지어 그의 아버지가 악했던 아하스 왕이 아니었는가? 유월절에 대해서 들어보지도 못하고 자랐을텐데 하나님의 유월절을 꺼내어낸 히스기야는 이런 면에서 하나님에 대한 열심이 있는 사람이었다.

3. 히스기야의 명령을 따라 온 이스라엘과 유다에 사람을 보냈고(1절)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돌아가면 하나님께서 앗수르 왕의 손에서 벗어난 자들을 도와주실 것을 선포했다 (6절). 사람들의 반응은 두 가지였다. 조롱하고 비웃든지 (10절), 혹은 스스로 겸손한 마음으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든지(11절) 였다. 

4. 마침 요즈음 세대와 비슷한다. 복음을 전할 때 듣는 사람들의 반응도 두 가지이다. 조롱하고 비웃든지(겉으로든 속으로든) 아니면 믿든지… 우리는 언제나 두 가지 선택만 할 수 있다. 그게 왕의 명령이든 복음이든 우리는 결국은 순종하든지 불순종하든지.. 중에서 결정할 수 밖에 없다. 

5. 거절한 사람의 기준은 자신의 생각이었다. 히스기야 왕이 이야기한 유월절 이야기가 너무 판타지나 전설 같았든지.. 자기 생각에 믿지 못하겠다고 느꼈든지.. 근거가 무엇이든 자신의 생각에서 비롯되었다. 하나님의 말씀이나 하나님의 율법이 근거가 아니었다. 유월절을 섬기기로 한 아셀과 므낫세와 스블론 중에서 몇 사람이(11절) 유월절을 섬기기로 한 것은 그 근거가 말씀이었던 것 같다.

6. 그래서 그들은 “스스로 겸손한 마음”으로 예루살렘에 이르렀고 라고 11절에 기록하고 있다. 죄인인 인간이 스스로 겸손한 마음은 가지는 순간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대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때할 때이다. 이들이 유월절을 섬기기로 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섰기 때문이다. 무엇이 나의 결정이 기준이 될 것인가? 나의 생각인가? 하나님의 말씀인가?

7. 내 생각을 나의 결정의 기준으로 삼는 것은 망하는 길이다. 내 생각이 어찌 하나님보다 크겠는가? 복음이라는 인간의 생각으로는 이해되지 않는 겸손함과 그 분의 구원방법이 어찌 이해가 되겠는가? 조롱하고 비웃는 것은 자유지만 그 대가는 내가 대신 져줄 수 없다. 결정의 기준을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으로 잡아야 한다. 

8. 한낱 인간의 생각으로, 내가 모든 것을 다 아는 것 처럼 결정하는 것은 무서운 교만이다. 오늘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교만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나온다. 하지만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에 기준을 두고 결정하는 사람들도 있다. 나는 오늘 어떠한 길을 선택할 것인가? 하나님의 말씀인가? 아니면 내 생각인가?

9. 이해되지 않아도, 이성적으로 이상하게 느껴져도 말씀이 그렇다고 하면 그 말씀을 기준으로 삼을 수 있는 내가 되기를 원하고, 오늘 하루 묵상의 말씀이 내 삶에 적용되기를 원한다.

10.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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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Thinking)/Meditation2021. 5. 28. 1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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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하 28:16-27 신뢰와 감사가 있으면 다윗의 길로 그렇지 않으면 아하스의 길로

1. 아하스 왕은 하나님의 심판을 경험하면서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는 여전히 자신의 머리를 굴리고 있다. 21절을 보면 “아하스가 여호와의 전과 왕궁과 방백들의 집에서 재물을 가져다가 앗수르 왕에게 주었으나 그에게 유익이 없었더라” 다 가져다줘도 앗수르는 도와주지 않는다.

2. 이 때 회개해야 하는데 이 아하스는 오히려 더 악한 길로 가게 된다. “이 아하스 왕이 곤고할 때에 더욱 여호와께 범죄하여”라고 기록되어 있다. 어려운 시기가 닥치고, 힘든 상황이 발생하면 어디로 갈 것인가? 하나님께로 돌아갈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을 원망하며 불평하며 악한 길로 갈 것인가?

3. 사실 선택은 내가 할 수 있다. 그런데 아하스는 최악의 선택을 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더 돌아서는 선택을 한 것이다. 다른 신을 찾았으나 그 신은 그들을 도울 힘이 없고 오히려 그들을 더 망하게 하였다. “자기를 친 다메섹 신들에게 제사하여 이르되 아람 왕들의 신들이 그들을 도왔으니 나도 그 신에게 제사하여 나를 돕게 하리라 하였으나 그 신이 아하스와 온 이스라엘을 망하게 하였더라” (23절)

4. 힘들다고, 하나님께 실망했다고 원망하고, 불평하겨 죄의 길로 가는 것은 더더욱 절망으로 가는 길이다. 아하스 왕은 고난이, 어려움이(설령 그가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그를 하나님께로 이끄시는 가이드라인임을 배워야만 했다. 하지만 그는 그러지 못했고, 심지어 죽어서도 이스라엘 왕들의 묘실에 들지 못하고 예루살렘 성에서 장사하게 되었다 (26절). 

5. 세상이 우리에게 도전하는 것은 “너희들의 하나님이 어디에 있느냐?”의 질문인 것 같다. 이 절망적이고, 어려운 상황에서 "너희들이 믿고 예배하는 그 하나님은 어디에 있느냐?" 라고 묻는 것 같다. 그들은 절망의 상황에서 기독교인들을 조소하고, 조롱한다. 물론 교회가 잘못한 부분들이 많다. 그들은 우리 또한 불평하도록 하며, 하나님을 원망하도록 유도한다. 하지만 이런 상황 속에서 나는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6. 하나님께 실망했다고 하나님을 거역하고 멋대로 사는 길을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그래도 모든 생명의 근원이시고, 창조주이신 하나님께로 더욱 더 나아갈 것인가? 아하스의 길을 갈 것인가? 다윗의 길을 갈 것인가? 코로나 팬데믹이 길어지는 상황에서 나는 어떠한 스탠스를 취할 것인가? 아하스인가? 다윗인가?

7. 이렇게 물어보면 사실 답은 간단하다. 그 누구도 아하스의 길을 쫓겠다고는 말하지 않는다. 하지만 입술의 고백이 아니라 중요한 것은 내 삶이다. 내 삶은 지금 어디를 향해 있는가? 다윗의 길인가? 아하스의 길인가? 입만 다윗의 길이고, 삶은, 마음은 아하스의 길은 아닌가? 내 삶을 계속 점검하자. 내 안에 아하스가 더 이상 성장하지 못하도록 불평과 불만이 아니라 감사로 마음을 채우자.

8. 불평과 불만이 가득차 있는 상태에서는 내 안에 아하스가 커진다. 이해되지 않더라도 감사하는 것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더라도 미리 감사하는 것이 다윗의 길로 걸어가는 첩경이다. 두려워말자. 하나님은 나의 두려움보다 크시며, 나의 이해보다 크시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 하나님의 행하심에 대해 감사하는 것이 다윗의 길로 걸어가는 방법이다. 

9.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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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Thinking)/Meditation2021. 5. 27. 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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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하 28:1-15 나의 죄가 지겹지만 오직 은혜로만 

1. 아하스 왕은 나쁜 왕이었다. 좋은 왕이냐 나쁜 왕이냐의 기준은 그가 누구의 길로 갔느냐를 따르게 된다. 1절 후반부에 그에 대한 평가를 내리고 있다. “그의 조상 다윗과 같지 아니하여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지 아니하고” 2절에 따르면 “이스라엘 왕들의 길로 행하여…”

2.  온갖 나쁜 짓을 하는데 그의 모든 삶은 다윗이 아니라 이스라엘 왕들과 같았고, 그가 한 일은 바알 우상을 만들고(2절) 우상에게 분향하고, 자녀들을 불사르고(3절), 제사를 드리고 분향했다 (4절). 하지말아야 하는 나쁜 짓은 다하고 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아람 왕의 손에 넘기신다 (5절).

3. 아침에 역대하를 묵상하면서 참 지겹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우리 입장에서야 한 번의 인생이고, 모든게 첨이자 마지막이니 얼마나 새롭겠는가? 하지만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이 모든 것이 무한 반복처럼 느껴지실 것 같다. 한 사람이 태어나서 죄를 짓고, 회개하고를 반복하다가 죽고 나면 또 그의 자식이 그 짓거리를 반복하고… 나도 이렇게 지겨운데 하나님은 어떠실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4. 좋은 왕의 기준이 되는 다윗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도 죄인이었고, 살인자였고, 간음자였다. 하나님 입장에서는 이 인간들의 끝없는 죄의 쳇바퀴가 얼마나 힘드실까? 거룩하시고 공의로우신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이 끝없는 죄는 하나님으로 하여금 엄청 분노하게 만들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5. 인간의 역사가 얼마나 될까? 대부분의 인간들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보다는 자기 욕심을 채우고, 죄를 쌓다가 죽었을테고.. 뭐 그건 그 사람들 뿐만 아니라 나도 마찬가지이고…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우리들을 사랑의 눈으로 보아주시고, 사랑해주시고, 용서해주신다. 

6. 그리고 이 모든 죄의 악순환을 끊으시기 위해서 하나님 자신이 오셔서(예수 그리스도) 이 모든 악의 문제를 해결하셨다. 정말로 구원에 문제에 인간이 개입할 조그만 틈도 없음을 보게 된다. 그런데도 늘 누가 잘났냐.. 누가 높으냐를 따지고 있는 인간의 삶은 참으로 절망적이다. 그리스도가 없는 삶은 절망 그 자체일 수 밖에 없다.

7. 아하스의 우상숭배는 나의 삶에는 없다고 자신할 수 없다. 그와 내가 별 차이가 없다. 정말 지겹다. 하지만 이 죄의 문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보혈이 아니라면 결코 해결될 수 없다. 죄를 나의 시선이 아니라 하나님의 시선으로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오늘 다시 십자가와 그리스도 앞으로 나아간다. 그 분의 도우심만 구한다. 

8. 높아지려고 하는 마음, 잘나려고 하는 마음, 죄를 내 힘으로 안 지으려고 하는 마음까지도 내려놓고.. 오직 그 분의 은혜만 구한다. 죄의 사슬이 지겨운 인생이 아침마다 늘 새로운 하나님의 은혜와 성실을 맛보며 살아가기 원한다애 3:22-23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아니이다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

9.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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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Thinking)/Meditation2021. 5. 26. 1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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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하 27:1-9 역사를 통해 배워야 바른 길을 갈 수 있다

1. 요담이 왕위에 올랐다. 매일 큐티를 할 때마다 왕이 바뀐다. ㅎㅎ 요담은 아버지의 좋은 점을 본받았다. 아버지의 장점대로 정직하게 살았다. “요담이 그의 아버지 웃시야의 모든 행위대로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였으나” (2절 상반부)

2. 그는 또한 아버지의 연약함은 따라하지 않았다. “여호와의 성전에는 들어가지 아니하였고” 26장에서 그의 아버지 웃시야가 교만하여져서 성전에서 잘못된 분향을 하다가 나병이 발병한 것을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역사를 아는 것은 오늘을 제대로 살아가기 위함일 것이다. 

3. 요담은 아버지의 행위를 통해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 지를 배웠다. 우리 또한 성경에서 배워야 하는 것이다. 믿음의 조상들의 삶을 보면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하지만 그러한 요담의 아버지를 따라가는 삶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전했다. “백성은 여전히 부패하였더라” (2절 하반부)

4. 자신들의 왕은 역사를 통해 배웠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배우지 못했다. 그래서 그들은 그대로 살아가고 있다. 역사를 통해서 배울 것인가? 배우지 못할 것인가? 성경을 읽으면서 매일 큐티를 하면서 나는 그들의 인생을 통해 나의 인생을 살펴보고 있는가? 혹은 나도 배우지 못하고 그저 시간만 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5. 6절을 보면 “요담이 그의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바른 길을 걸었으므로 점점 강하여졌더라” 라고 기록하고 있다. 아버지의 실수를 역사를 통해 배운 그는 그가 어느 길로 걸어야 할지를 확실히 알았다. 나는 오늘 성경을 통해 배우고 있는가? 성경의 역사를 통해 내가 가야 하는 길과 가지 않아야 하는 길을 구분하고 있는가?

6. 요담의 지혜가 나에게도 있기를 원한다. 웃시야 왕의 사례를 보며, 여러 왕들의 사례를 보며 나는 그들의 실패의 길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고 따랐던 그 길을 나도 걸어가기 원한다. 그리하여 하나님만 사랑하고, 하나님 앞에서 바른 길을 걷기를 원한다. 

7. 그리고 우리 아이들이 아버지의 실수와 실패를 보며.. 또 제대로 가끔 가는 길을 보며 우리 아이들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발견하고, 그렇게 배우기를 원한다. 우리 성도들도 선교사의 실패와 연약함을 통해 그들이 가야 할 길을 발견하고, 가지 않아야 하는 길을 구별해내길 원한다. 

8. 그러기 위해서는 나의 실패를 더 나누고, 나의 연약함을 더 나누고, 하지만 그 보다 더 크신 은혜가 나를 어떻게 인도해 나가시는지를 더 자주 나눠야겠다. 그래야 그 나눔 속에서 교훈을 얻을 수 있지 않겠는가? 더 잘 나눌 수 있는 아빠, 남편, 친구, 선교사가 되기를 원한다. 큐티 속에서도 나의 연약함과 말씀의 능력을 더 나누자.

9.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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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Thinking)/Meditation2021. 5. 24. 1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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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하 26:1-15 기이한 도우심

1. 웃시야가 그의 아버지 아마샤를 대신하여 왕이 되었다 (1절). 그는 아버지의 영향을 받은 것 같다. 4절에 “웃시야가 그의 아버지 아마샤의 모든 행위대로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며” 라고 기록되어 있다. 

2. 성경에는 아버지가 악하지만 반대로 아들은 선한 왕이되는 혹은 반대로 아버지는 선하지만 아들은 악한 왕이되는 케이스들이 자주 있다. 그런데 웃시야는 아버지의 길을 걸어갔다. 사실 아들도 아들이지만 아버지가 어떻게 했길래? 라는 생각이 든다. 

3. 자녀들을 키우면서 나의 연약함이 드러나기 때문에 마음이 어려운 적이 사실 한 두 번이 아니다. 사실은 거의 매일 겪는 일이다. 이 아이들을 믿음으로, 인격적으로 어떻게 키워야 하는지가 늘 숙제이자 고민이다. 도대체 아마샤 왕은 어떻게 했던 것일까? 

4. 인간의 삶은 조금의 차이는 있겠지만 다 거기서 거기가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든다. 조금 더 성숙하고, 조금 더 인격적이고 하는 차이가 있겠지만 우리는 모두 죄인일 뿐이고, 그것이 자식의 인격과 성격을 전부 결정하지는 않는 것 같다. 무척이나 인격적인 부모 밑에서도 엉망이라고 생각되는 자식은 얼마든지 나올 수 있고 또 반대의 경우도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왕들의 역사도 그렇지 않은가? 

5. 그 해답은 15절에 있는 것 같다. “또 예루살렘에서 재주 있는 사람들에게 무기를 고안하게 하여 망대와 성곽 위에 두어 화살과 큰 돌을 쏘고 던지게 하였으니 그의 이름이 멀리 퍼짐은 기이한 도우심을 얻어 강성하여짐이었더라” 무기를 고안하게 하고 망대와 성곽 위에서 던지게 하는 것은 특별한게 아니다. 

6. 오히려 특별한 것은 마지막에 나오는 ‘기이한 도우심’이란 표현이다. ‘기이한’이란 표현을 히브리어 사전에서 찾아보니 하나님의 구원의 일과 연결되는 단어라고 나온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있어야 평범한 것들이 비범해진다. 그저 망대와 성곽 위에서 돌을 던지는 평범한 일들도 비범해진다.

7. 자녀 양육도 마찬가지이다. 부모들도 모두 연약한 인간일 뿐이다. 조금 차이는 있겠지만 부모는는 결국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할 뿐이다. 물론 자녀들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의 기이한 도우심이 없이는 우리의 자녀들을 잘 양육할 수도 없다. 부모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 하고 나서는 그 분의 도우심을 구해야 한다. 하지만 내 아이가 잘 못되는 것이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어서라고 생각하는 것은 금물이다. 

8. 왜냐하면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이시지만 내 아이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이다. 그저 은혜를 구한다. 쉽게 화내고, 연약함이 흘러 넘치는 나의 양육과 사역 가운데 ‘기이한 도우심’ 있기를 원한다. 이 도우심이 없이는 내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아무것도 변화시킬 수 없다. 내 자신도 변화되지 않는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지 않는가?

9. 그 도우심을 구한다. 하나님의 주권적이시지만 인격적인 도우심을 나의 양육과 사역위에 구한다. 오늘 웃시야와 같이 그 도우심이 내 삶에 충만하기를 원한다. 

10.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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