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Thinking)/Meditation2019. 3. 18. 1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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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 5:35-43 함께 걷는 자에게 주어지는 은혜, '두렵지 않음, 믿음'

지금 누구와 함께 있느냐는 매우 중요한 이야기이다.내가 함께 있는 그 분이 누군가 인가가 우리가 가진 두려움을 이길 수 있는지를 결정한다. 예수님이 아이를 살리러 가는 길에서 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35절). 하지만 예수님이 회당장에게 하신 말씀은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지금 가고 있는 분이 예수님이시기 때문이다. 

회당장의 집으로 들어가신 예수님은 그 아이가 잔다고 표현하셨다 (39절). 그때 그 이야기를 들은 자들은 다 비웃었다 (40절). 그 사람들은 지금 누가 오신지를 몰랐기 때문이다. 동네 아무개가 와서 아이가 잔다고 말했다면 그 누구라도 충분히 비웃을만한 이야기이다. 하지만 집으로 들어오신 분이 하나님이시라면…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온 세계와 열방의 구원자로 오신 분이시라면… 절대 비웃을 수 없는 이야기이다. 

나에게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고 말씀하시는 분이 누구이신가? 나와 이 모든 상황을 함께 걸어가고 계신 분이 누구이신가? 하나님이 아니신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아니신가? 그 분이 함께 하는데 무엇이 두렵고, 무엇이 못 믿을만한 내용인가? 문제는 내가 그 분과 함께 있지 않을 때 두려움은 찾아오게 된다. 

회당장 야이로는 아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도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그와 함께 걸어가고 있는 분이 누구신지 알았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그래서 어디로 가는지보다 누구와 함께 가는지가 더 중요한 것이다. 지금 나는 누구와 함께 걸어가고 있는가? 

오늘 태국어 과외를 시작했다. 그간 한다한다 하다가 시작을 못했던 것을 오늘 시작하게 되었는데, 왜 진작 하지 못했을까에 대한 후회가 든다. 언어를 다시 공부하게 되면서 너무 좋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두려움이 생긴다. 아내와 함께 부부가 다 언어를 하게 되니 재정이 부담이 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오늘 주님이 오늘 본문을 통해 말씀하신다. ‘너 누구랑 함께 가고 있니?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해라, 너를 이 곳에 보낸 것이 나라는 것을 잊지 말아라’

그렇다. 뭐가 그리 염려되고, 뭐가 그리 두려운가? 나와 함께 걷고 계신 분이 하나님이신데… 그 분이 보내셨는데, 그 분이 함께 하시는데 뭐가 그리 염려 되는가? 내일 일이 뭐가 그리 두려운가? 주님이 함께 걸으시는데… 주님이 함께 걸어 가신다는 그 믿음이 오늘 나에게 있기를 원한다. 그래서 두려워하지 않기를 원한다. 
나는 주님과 함께 걷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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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19. 3. 18. 1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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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 6:45-56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의 인생은 언제나 두려움을 느낀다. 늘 두려움을 느끼는 이유는 우리가 우리의 미래를 확실하게 알지 못하기 때문에 두렵다. 이 불확실성이, 이 염려가 우리의 인생을 두렵게 만드는 것 같다. 인간이 가진 한계이다. 우리는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존재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갖은 안전장치들을 내 삶에 두려고 한다. 그 안전장치들은 대부분 내 삶을 스스로 통제할 수 있게 하려는 시도들이다. 내가 내린 결정이 틀리더라도 만회할 수 있는 그 어떤 것, 뭔가 잘못 했더라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그 어떤 것들을 원한다. 나의 삶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향해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50절) 라고 말씀하신다. 상황을 보면 분명 두려운 상황이다. 유령처럼 바다를 걸어서 오는 그 이상한 것이 눈에 보이기 때문에 당연히 두려워 할 수 밖에 없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나이니까 두려워 하지 말라고 하신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우리의 상식과 이성을 초월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물리적 법칙이 그 분이 만드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눈에, 우리 이성에, 우리 생각에 이 일은 이렇게 될거야.. 이렇게 될 수 밖에 없어. 왜냐하면 이런이런 이유 때문이지.. 라고 말하는 그것을 전혀 소용없게 만드시는 분이 바로 예수님이시기 때문이다. 

오늘 본문 앞에 막 6:30-44에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000명을 먹이시고, 열두 광주리에 남았다. 오늘 본문 위에서는 물 위를 걸어 오신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알고 있는 물리적 법칙 위에 계신다. 불가능한 일이 없으시다. 그 분과 함께라면 무엇이 두렵겠는가? 

하지만 제자들이 두려워했던 이유는 52절에서 설명하고 있다. 
이는 그들이 그 떡 떼시던 일을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그 마음이 둔하여졌음이러라

예수님을 잘 모를 때, 영적인 일에 마음이 둔감해질 때, 우리는 두려워진다. 왜냐하면 모든 것 위에 계신 하나님이신 그리스도를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광야에서 먹을 것이 없는 그 때에, 물위를 걸어오고 있는 예수님을 보면서도 우리는 우리가 가진 법칙으로, 우리가 가진 생각으로, 우리가 가진 상식으로 판단하게 되는 것이다. 영적으로 둔한 자의 연약함이다.

모든 것 위에 계신 하나님을 보지 못하면, 그 분을 느끼지 못하면, 그 분을 만나지 못하면 알량한 우리의 생각과 이성으로 상황을 판단하게 되고, 인간의 한계인 미래를 보지 못하는 그 두려움이 우리를 지배하게 되는 것이다. 오늘 나는 무엇이 두려운가? 

모든 것 위에 계신 하나님께서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라고 말씀하시는데 나는 무엇을 두려워 하겠는가? 도대체 무엇이 주님보다 더 위에 있을 수 있겠는가? 예수님을 믿으며, 예수님이 그리스도라고 고백한다면 예수님이 우리의 삶에 그저 죄의 문제만을 해결해주러 오신 분이라고 그 분을 작게 봐서는 안된다. 그 분은 만물을 새롭게 하는 하나님이시다. 

계 21:5 보좌에 낮으신 이가 이르시되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 또 이르시되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 하시고

그 분은 내 삶을 새롭게 하시는 분이시다. 그 분은 내 삶을 온전하게 하시는 분이시다. 
두려워 말자. 내 삶에 무슨 일이 일어나든, 어떠한 일이 생기든 내 삶을 온전하게 하시는 이는 예수님이시다. 그 분께서 내 삶에 간섭하셔서 말씀하신다.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
답답한 마음도 내려놓자. 힘든 마음도 내려놓자. 두려움도 내려놓자. 그리고 온전히 내 삶을 그 분께 의탁 드리자. 예수님께서 내 삶을 인도하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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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19. 3. 13. 1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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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 5:21-34 사랑이 삶을 움직이는 힘이 되어야 한다. 

본문 전체를 읽어야 하는데, 5:21절을 읽으며 충격을 받아 뒤로 쉬이 읽어 나갈 수 없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어제 돼지의 가치와 함께 고민했던 그 귀신들린 한 영혼을 위해 일부러, 의도적으로 그 곳으로 가셨다.그리고 그 영혼을 고치시고 나서는 바로 다시 돌아오셨다. 

‘예수께서 배를 타시고 다시 맞은편으로 건너가시니’ (5:21)

예수께서는 그 영혼을 고치시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시간을 내신 것이다. 지금과 같이 교통이 좋은 때도 아니고 적어도 몇 일을 걷고, 배를 타고 하셔야 했을텐데.. 예수께서는 3년이라는 정해진 공생애 중에서 아마도 몇 일 시간을 내셔서 다녀 오셨을 것이다. 이 3년의 공생애 시간이 얼마나 중요한 시간인가? 성경의 모든 것을 이뤄야 하는 그런 중요한 시간이 아니었던가?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그 시간을 그 한 영혼을 위해 쓰셨다. 

예수님의 마음이 느껴진다. 예수님을 움직인 것은 효율성이 아니라 사랑이었다.'현대인은 효율성의 노예가 되어 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라는 어느 글에서 본 글귀가 생각이 난다. 나 또한 효율성이 매우 중요하다. 물론 선교사의 시간과 재정은 소중하다.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이 많은 사람의 기도와 후원을 통해 나에게 지금 소유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선교사의 시간과 재정을 효율성으로만 보기 시작하면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나의 사역은 비즈니스가 결코 아니다. 투입된 대로 혹은 투입된 이상으로 이익을 남겨야 하는 사업이 아니다. 나는 기업도 아니다. 나는 효율성이 아니라 반드시 사랑으로 움직여야 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잊으면 안된다. 나의 시간과 재정의 사용이 효율성으로 우선순위가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사랑으로 정해져야 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 처럼 말이다.

하지만 사랑으로 움직이신 예수님은 실제로 결코 시간을 낭비하지 않으셨다.사랑으로 움직이셨지만 그 분이 이 땅에 오신 목적에 맞게 움직이셨다. 돌아오자 마자 회당장 야이로를 만나셨고, 그 딸을 고치기 위해서 움직이셨다. 그리고 가는 도중에 혈루병 걸린 여인을 고치신다. 물론 이 여인을 예수님께서 고치셨다기 보다는 그의 믿음을 통해 고침을 받았다. 예수님께서 사랑으로 움직이시는 그 시간에 그 자리에서 예수님을 만짐을 통해 고침을 받았다. 변두리에 있었던 그 여자조차도 예수님은 그녀의 믿음을 사용하셔서 구원해주셨다. 

나의 삶을 돌아본다. 오늘 나를 움직이는 이유는 사랑인가? 한 영혼인가? 아니면 효율성인가? 
예수님처럼 사랑이 나를 움직였으면 좋겠다. 하나님을 그리고 이웃을 사랑하는 그 사랑이 나의 삶에 드라이브를 거는 동력이 되었으면 좋겠다. 때로는 효율적이지 못해도,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해도, 느리고 천천히 가는 것 같이 보여지더라도 사랑으로 움직이는 나이기를 원한다. 하지만 사랑이라는 이유를 대며 나태함을 피우지 않기도 원한다. 나를 이 땅으로 보내신 그 목적을 잊지 않고, 청년들을 세우는 일, 복음을 전하는 그 일에 나태하지 않기를 원한다. 

오늘도 효율성이 아닌 사랑으로 움직이며, 사랑으로 내어주며, 사랑으로 섬기는 하루가 되기를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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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Thinking)/Meditation2019. 3. 12. 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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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 5:1-20 결국은 하나님과, 이웃과의 관계(사랑)이다. 

만약 한 영혼과 돼지 한 마리의 가치를 이야기 하라고 하면 아무런 고민없이 한 영혼이 소중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돼지의 숫자가 자꾸 올라가서 2,000마리가 된다면… 그 귀신들린 한 영혼이 돼지 2,000마리보다 더 소중하다고 쉽게 말할 수 있을까? 나 자신의 마음 안에서도 아깝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다. 돼지가 아니라 다른 곳으로 들어갔으면 안 되었을까? 그 한 영혼이 귀신의 속박에서 자유롭게 된 것은 참 감사한데, 돼지 몇 마리로만 들어가도록 허락 하셨으면 안 되었을까?

한 영혼의 가치가 얼마나 되는 것일까? 한참을 생각했다. 도대체 돼지 몇 마리면 안 아까웠을까? 한 영혼과 바꿔도 안 아까운 돼지의 숫자는 몇 마리로 생각할 수 있을까? 한참을 생각했는데, 적절한 숫자가 떠오르지 않았다. 돼지가 몇 마리 안되면 사람의 영혼이 이렇게 싼건가 싶고, 돼지가 많으면 너무 많은 것 같고… 이렇게 하면 영혼을 경시하는 것 같고, 저렇게 하면 물질주의자 같고… 그래서 포기했다.

그런데 만약 그 한 영혼이 내 영혼이라면? 혹은 내 가족이라면? 나와 관계가 있는 친한 사람이라면? 내가 돼지 2,000마리를 아까워 했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돼지 2,000마리와 영혼의 가치를 계산한다는 그 자체가 그 영혼과 내가 상관이 없기 때문이었다.상관이 없다는 것은 사랑이 없다는 것이고, 관심이 없다는 것이고, 그 사람이 어떻게 되든지 나와 아무런 연관성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영혼이 어찌 되냐보다도 돼지 2,000마리의 가치가 커 보였던 것이다. 마치 예수님이 머리위에 값 비싼 나드 향유를 부었을 때 가롯 유다의 고백처럼 말이다.

요 12:5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그 여인의 관심은 오직 예수님께만 있었고, 예수님을 위해서는 어떤 것도 아깝지 않았다. 그래서 그 값 비싼 향유를 깨뜨려서 예수님께 칭찬을 받았다. 하지만 가롯 유다는 그의 관심이 예수님이 아니라 돈에 있었다. 그래서 그 향유만 보고도 얼마라는 계산이 바로 나온 것이다. 마치 오늘 아침에 내가 묵상할 때 돼지와 영혼의 가치를 계산하려고 시도했던 것 처럼 말이다. 

결국엔 관계인가 보다. 예수님과의 관계, 잃어버린 영혼들과의 관계
그 관계가 정말 사랑의 관계라면 우리는 다른 것들을 얼마든지 아깝지 않게 쓸 수 있게 되는 것 같다. 그 영혼을 위해 준비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 사랑의 관계가 없어지면 그러한 일들이 낭비가 되고 만다. 그러니 아까운 것이다. 돼지 숫자도 아깝고, 향유도 아깝고… 다 아까운 것이다. 

오늘도 예수님과 이웃들과 어떠한 관계를 맺고 있는가? 사랑하고 있는가? 아니면 내 것을 쓰기에도 아까운 관계를 맺고 있는가? 
예수님은 이미 답을 주셨다. 

마 22:37-39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결국 해답은 사랑이다. 관계의 중심은 사랑이다.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
오늘도 그렇게 하나님을 이웃을 사랑하며, 아깝지 않을 만큼 그들을 사랑하기 원한다. 계산하지 않고, 재지 않고, 사랑하기 원한다.
아이들에게도 큰 소리 내지 말고 인내로 참고 견디자. 나에게서 아이들이 사랑을 보게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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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19. 3. 11. 0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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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 4:35-41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제대로 알아야 내 태도가 결정된다. 

유명한 본문이다. 광풍이 일어 제자들이 무서워 할 때, 예수님은 배에서 주무시고 계셨고, 제자들은 죽을까봐 예수님을 깨웠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믿음이 없다고 꾸짖으시고, 광풍을 잠잠하게 하셨다. 잘 아는 내용이지만 찬찬히 읽을 때 마음에 와 닿는 구절은 마지막 41절이었다.

  1. 그들이 심히 두려워하여 서로 말하되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도 바다도 순종하는가 하였더라

그들이 정말 예수님이 누구신지 몰랐을까? 그들은 그물도, 배도, 가족도 버려두고 예수님을 쫓았던 제자들이 아닌가? 예수님을 몰랐다기 보다는 그들의 기대와 생각에 합한 예수님을 기대하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특별히 유대인들이 기다렸던 정치적으로 자신들을 독립시켜 줄 그런 메시아… 정치적인 메시아를 기다렸는데, 이 분은 바람도 바다도 잔잔케 하시는 분이였다. 

예수님을 누구로 보느냐는 매우 중요한 문제 중에 하나라고 보여진다. 이 세대에서도 예수님을 여러 면으로 두고 그 분을 자신의 입맛에 맞게 이용하려고 한다. 어떤 사람은 체 게바라와 같은 혁명의 전사로, 어떤 사람은 도덕적인 스승으로, 또 어떤 사람은 우리에게 행복을 가져다 주시는 램프의 지니와 같은 존재로 예수님을 축소 시키고, 자신의 기대와 생각에 부응하는 존재로 예수님을 사용하려고 한다. 

하지만 절망 앞에 섰을 때 제자들은 여전히 그들이 예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음을 고백하게 되었다. 그가 진정 누구이신지 모르기에 그들의 믿음도 작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제자들이 예수님이 부활하신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게 되었을 때, 그들은 그때에 가서야 순교도 불사하는 진정한 사도들이 되었다. 결국 중요한 것은 내가 기대하는 예수님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정말로 어떠한 분이신지를 알아야 하는 것이다. 

오늘 나는 그 분을 누구라 하는가? 그 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말씀으로 온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능력이셨다. 그래서 그 분도 말씀을 통해 파도를 잠잠하게 하셨다. 혹시 나는 예수님을 다른 목적으로 사용하려고 하지 않는가? 내 안에도 예수님을 구원자가 아니라 내 삶의 유익을 위해 사용하고자 하는 동기들이 있다. 이러한 동기들로 예수님을 바라보는 자가 아니라 예수님을 예수님 그대로 바라볼 수 있는 내가, 오늘 하루가 되기 원한다. 그래서 ‘그가 누구이기에’라는 질문을 던지는 자가 아니라 ‘예수는 그리스도이시며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는 베드로의 고백이 내 삶에 나타나기 원한다. 

기적을 보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아니라 삶의 순간 순간에 나의 신앙 고백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오늘 하루가 되기 원한다. 하나님의 능력이신 예수님의 말씀 앞에서 바람도 바다도 순종하는데.. 나는 순종을 선택할 것인가? 그렇지 않을 것인가? 예수님을 제대로 알아 순종하는 그 하루가 되기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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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 3:20-35 오늘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있는가? 

한 몸끼리 한 편끼리 다투거나 분쟁하면 결코 어떤 선한 일도 일어날 수 없다. 선한 일 정도가 일어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아예 망한다 (26절). 그것이 사탄의 나라이든, 하나님의 나라이든 마찬가지이다. 예수님께서 사탄의 힘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는 그들의 주장은 별로 가능성이 없는 주장이다. 오히려 강한 자를 먼저 결박해야만 그 집을 강탈할 수 있다고 말씀하고 계신다 (27절). 

본문을 보며 하나님 나라를 위한 사역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대부분의 일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든다. 함께 한 몸을 이루어 협력하고, 서로 섬겨야만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가 이뤄질 수 있는 것이다. 다투거나 분쟁하면 그 결국은 망하는 길이다. ‘협력,' '서로 섬김' 말은 참 쉬운데 삶으로 나타나는 것은 정말 쉽지 않은 길이다. 때로는 참 모르겠다. 내 생각과 다른 사람의 생각이 다를 때, 나는 과연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지… 내 생각이 맞는지, 그의 생각이 맞는지 아니면 둘다 맞는지, 둘다 틀리는지… 하나님은 도대체 나를 어떻게 인도하고 계신지...

하지만 그러한 '서로 다름' 속에서도 내가 선택해야 할 길은 ‘협력,’ 과 ‘서로 섬김’이라는 것을 나 스스로가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서로 다름과 서로 틀림은 엄청나게 큰 차이가 아닌가? 다름을 틀림으로 해석하지 않기를 원한다. 다른 상황과 다른 모습으로 서 있지만 우리는 한편이 아닌가? 하나님 나라가 든든히 서기를 원한다. 

그런데 이 때 예수님을 붙들러 온 사람들은 예수님의 친족(21절) 이었다. 그리고 31절에서는 예수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밖에 찾아왔다. 동생들은 그렇다쳐도 왜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는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했을까? 그녀는 천사를 통해 예수님에 대한 계시를 받았고, 여러 경험도 하지 않았는가? 그런데 왜 예수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 것일까? 

예수님의 대답은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35절)’ 라고 대답하셨다. 이전에, 과거에 내가 경험했고, 내가 알고 있었고… 는 지금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있음을 증명하지 못한다. 과거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오늘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내가 오늘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가운데 있어야 예수님이 바로 보이는 것이다. 신앙의 년수를 자랑하지 말고, 내 포지션을 말하지 말고, 오직 오늘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있는지를 돌아보자. 주님 부족한 저를 붙들어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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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 3:1-19 예수님과 같이 생명을 살리는 일에 관심을 가지자.

안식일은 유대인들에게 매우 예민한 문제였다. 안식일을 처음 주신 하나님의 의도와 상관없이 율법화 시켰다. 안식일에 참된 안식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그 날 조차도 율법의 계명 가운데 얽매이게 되었다. 예수님께서 회당에 들어 가시니 (1절)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고발하려 주시하고 있었다 (2절).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병든 자를 보고 그냥 가실 분이 아니시기 때문이다. 

바리새인들은 생명에는 관심이 없었고, 율법에만 관심이 있었다. 생명이 살아나는 일 보다는 안식일에 하지 말아야 하는 일을 하는가? 혹은 하지 않는가가 그들의 주된 관심사였다. 하나님의 자녀가 참 안식으로 들어가는 일은 뒷전이고, 율법적으로 지켰는데, 혹은 어겼느냐가 그들의 관심사였다. 

예수님은 그러한 그들의 논쟁에 얽매일 수 없었다. 왜냐하며 예수님은 생명을 구하러 오신 분(5절)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이 두 눈을 부릅뜨고 예수님의 행동을 보고 있는데도 그 손 마른 사람을 고쳐 주셨다 (5절). 예수님의 사명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야만 했던 이유가 예수님의 행동을 이끌어 나간다. 자신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뜻을 올바로 알았기에 예수님은 그 길을 걸어가실 수 있었던 것이다. 

예수님과 같이 생명에만 관심이 있는가?아니면 생명이 아니라 다른 부수적인 것에 관심이 있는가? 매우 핵심적인 질문이면서 매우 두려운 질문이다. 왜냐하면 자주 생명보다는 다른 것들에 마음을 쓸 때가 많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시선이나 사람들의 평가가 생명보다 더 우위에 놓여질 때가 많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하지만 사람을 기쁘게 하려는 때가 많기 때문이다. 사람들을 만족시키려는 마음 뿐 아니라 사람들을 두려워 하는 마음도 많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비난과 심지어 자신을 죽이려는 음모 속으로 생명을 살리기 위해 걸어 들어가셨다. 이것이 내가 붙잡아야 할 본이다. 나는 우리 형제, 자매들을 나의 사역을 펼칠 장으로 보는가? 아니면 생명으로 보는가? 내가 섬기고 있는 영광교회를 생명을 살리는 곳으로 함께 섬기고 있는가? 내 마음의 동기를 다시 한번 점검한다. 생명을 위한 것이 아닌 다른 동기들은 내려놓고, 오직 생명을 살리기 위한 동기로 움직여지는 내 삶이 되기를 원한다. 

우리 아이들에게도.. (특별히 요엘이에게도…) 아빠가 자신의 힘들었던 삶의 기억에 도움을 준 사람으로 남게 되기를 원한다. 오늘 오후에 비자를 받아서 다시 태국으로 돌아간다. 생명을 살리는 일에 몰두하는 내가 되길 원한다. 그리고, 생명을 살리는 일이 아닌 일에는 좀 덜 관심을 가지는 내가 되기를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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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 1:35-45 주께서 원하시면...

오늘 본문을 여러번 읽으면서 마음에 지속적으로 들어오는 말씀은 40절의 ‘원하시면’ 이었다. 
이 고백을 한 사람은 나병환자였다. 이스라엘 사회에서 나병환자들을 대하는 당시의 사회적 태도를 생각해 보면 (불결한 자로 무시하고 격리했던...), 그들이 예수님께 요구해야만 할 것 같은 내용은 예수님의 마음이 어떠하신지가 아니라 자신들의 마음이 어떠한지 였을 것이다. 

고침 받고 싶다고… 더 이상 이러한 인생은 싫다고… 왜 우리 인생은 이렇게 힘들고 고통스럽냐고 주님께 물어야 정상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름이 나오지 않는 한 나병환자의 고백은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40절)’ 였다. 

지금 이 인생의 절대절명의 순간(그가 다시 예수님을 만날 수 있을지는 누구도 알 수 없지 않은가?) 에도 그는 자신의 뜻을 주장하지 않고 예수님의 뜻을 보여달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원하시면 자신을 고쳐 달라는 고백이었다. 어마어마하게 넓은 그의 마음이 사실 실감이 잘 나지 않는다. 

그런데 묵상하면서 이 나병환자야말로 주님의 마음을 가장 잘 알았던 사람이란 생각이 든다. 우리 주님의 마음은 고난받는 자들과 억눌린 자들과 병든 자들과 늘 함께 계셨다. 주님이 과연 이러한 자들을 고쳐주기 싫어서 안 고치신 적이 있었을까? 주님의 마음은 늘 그들과 함께 계셨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장 깊이 아는 자가 할 수 있는 고백이 바로 ‘주께서 원하시면’ 인 것 같다.내가 원하는 대로의 삶, 내가 바라는 대로의 삶,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을 하는 삶이 아니라 나의 한 번 뿐인 인생을 주께서 원하시는 것들을 하기 위한 삶으로 살겠다는 고백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아는 자가 할 수 있는 고백이다. 하나님은 그런 고백을 하는 자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일들을 이뤄가신다. 

한 나병환자의 그러한 고백을 통해 나병환자는 고침을 받았고, 예수 그리스도는 높아지셨다 (45절).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 나는 ‘주께서 원하시면’의 인생인가? 아니면 ‘내가 원하는 것’을 하려는 인생인가?삶을 살면 살 수록 주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내 욕심과 생각이 무엇인지 때로는 너무나도 확실하고 때로는 너무나도 혼란스럽게 느껴질 때가 많다. 사실 잘 모르겠다. 하지만 내 마음은 ‘주께서 원하시면’을 묻고 있는가? 아니면 묻지 않고 내가 원하는 것을 하고 있는지 쉬이 알 수 있다.

어제 밤 캄보디아로 비자를 받기 위해 급하게 들어왔다. 수요일 밤에 방콕으로 돌아가게 되는데, 이렇게 어렵게 기다려서 받는 비자를 누구를 위해 쓸지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내가 이 곳에서 얼마든지 체류하는데 사용할 수 있고, 내 욕심을 채우는데도 쓸 수 있는 비자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지 않기를 원한다. ‘주께서 원하시면’의 질문을 하며 이 비자를 사용하게 되기를 원한다. 이 비자를 주님께 올려 드린다. 내가 잘해서 받은 비자가 아니지 않은가? 주를 위해 주께서 원하시면의 인생을 위해 사용되는 비자가 되기를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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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 1:12-20 광야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도 광야를 견디셨다. 그러고 보면 예수님은 늘 그러셨던 것 같다. 
새벽 미명에 기도의 자리를 지키는 것, 사역을 시작하기 전에 광야를 견뎌내신 일, 그리고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신 일…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몸으로 오셨기 때문에 특별한 능력으로 그러한 일들을 견뎌내신 것이 아니라 우리와 같이 힘든 시간들을 보냈지만 그 시간들을 하나님과 함께 걸어가는 길을 택하셨던 것이다. 

세례를 받고, 하늘에서 소리가 들리고, 그리고 나서 간 곳이 광야였다. 뭔가 어울리지 않는 자리로 간 것 같지만 가장 정확하고 적절한 자리였다. 바로 성령이 인도하셔서 간 곳이기 때문이다. 이제 예수님께서 흔들리지 않고 사역을 시작하셔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광야의 시간을 견뎌내야 하고, 그 광야에서 하나님을 독대해야 하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조차도 그러하셨다. 그리고 불평없이 견뎌내셨다.

그리고 나서 그의 사역의 선포가 시작되었다.‘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예수님이 광야를 통과하신 것은 예수님을 예수님되게 한 중요한 사건으로 여겨진다. 물론 그 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하나님이시다. 하지만 그 분도 통과하셔야 할 만큼 광야는 중요한 곳이다. 모범을 보여 주시기 위함이었든, 혹은 정말 예수님도 통과 하셨어야만 했든… 
예수님은 광야의 시간을 충실하게 보내셨다. 예전의 어느 책에서 이 시간을 예수님의 무명의 시간이라고 표현한 것이 기억이 난다. 그 무명의 시간을 충실하게 보내심으로 유명의 시간에도 교만하지 않고 자신의 사명을 잃어버리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다.

광야의 시간들을 충실하게 보내고 하나님 나라는 시작이 되었다. 우리에게 가장 적절한 때에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신다. 하나님께서 나를 광야로 불러주셨으니 기쁘게 이 시간들을 감당하고 싶다. 광야에는 시험과 들짐승이 함께 있는 곳이지만, 그 곳에는 하나님이 함께 계신 곳이다. 내 상황이 예수님과 동일한 것은 분명히 아니지만 이 시간을 하나님과 함께 가려 한다. 

광야에서는 뭔가 엄청난 것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이시간을 견뎌내고, 그리고 하나님을 더 깊이 만나는 것 뿐이다. 
오늘도 그러한 한 하루가 되기를… 사람의 눈에 보이기 위한 엄청난 것을 하려고 하기 보다는 이 시간들을 견뎌내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법을 배우는 하루가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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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 1:1-11 나 자신과 하나님을 제대로 아는 것 위에 다른 것을 더하자 

마가복음의 시작은 매우 빠르게 전개된다. 하나님 나라가 급하게 임하고 있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걸까? 그 중에 한 사람이 보인다. 그는 세례요한이다. 그는 이 바삐 전개되는 하나님 나라의 임재 속에서도 그에게 주어졌던 그 길을 걸어가고 있다. 바로 주의 길을 준비하고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해야 하는 것이었다 (3절). 

그는 그의 사명을 수행했다. 아니 그냥 해낸 정도가 아니라 잘 해냈다. 그 이유는 그가 그 자신에 대해서 정확히 알았고, 그리고 자기 뒤에 오실 분에 대해서 정확히 알았던 것이었다. 내가 누구인지를 정확히 아는 것,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정확히 아는 것이 우리 인생의 가장 중요한 일이란 생각이 든다. 이 두 가지가 확실하면 그 다음부터는 명확해진다. 

하나님은 하나님 되시고, 나는 내가 되어야 하고… 
내가 결코 하나님의 자리에 오르려 하지 않고, 내가 내 삶의 주인되지 않고, 
내 삶에 하나님이 하나님 되심을 보는 것….

이것이 바로 내가 누구인지, 하나님이 누구인신지를 아는 자의 삶인 것 같다.
세례요한은 그렇게 살았다. 그래서 그 유명한 그의 고백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요 3:30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세례요한은 당시 자신의 인기나 모여드는 사람들의 숫자를 보며 얼마든지 오해하거나 자신의 작은 왕국이라도 건설할 수 있을만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를 확실히 알았고, 뒤에 오실 분이 누구인지를 확실히 알았다. 그는 그 분 뒤에 오실 그리스도를 예비할 자이고, 뒤에 오실 분이 그리스도임을 알았기에 그는 월권하지 않았고, 그는 그의 삶에서 헛된 시도를 하지 않고 불꽃처럼 살다가 갈 수 있었다. 

오늘 나는 내가 누구인지를 정확히 알고 있는가? 태국에서 선교사로 살아가는 이 삶에서 나는 누구인가? 나는 오늘도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고 있는가? 
그렇다면 하나님은 누구신가? 정말로 살아계시며 내 삶을 인도하시는 하나님, 전능하시며, 내 모든 것을 아시는 아버지로 오늘도 만나고 있는가? 내가 누구인지도,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도 모르면서 까불지 말자. 

작은 일에 기뻐하고, 작은 일에 슬퍼하지 말고, 
오늘도 내가 누구인지를 알고,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알아서 그 안에서 참 평안과 기쁨을 누리자. 세례요한과 같이 불꽃같이 살다가 가더라도, 내가 하나님의 자리에 앉으려는 시도를 하지 않는 내가 되자. 
묻지 않는 자는 듣지 않는 자는 내가 하나님이라고 시인하는 꼴이니 묻고, 듣는자가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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