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Thinking)/Meditation2019. 4. 17. 12:44
728x90
반응형

막 14:66-72 부인하지 않으려면 그 분 안에 있어야 한다.  

 

예수 안에 혹은 예수와 함께 있는 베드로는 자신이 절대 예수를 부인하지 않을 것이라고 큰소리 쳤다. 정말 그럴 수 있을거라 생각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살아계신 하나님이 자신과 함께 계셨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 베드로는 예수님을 멀찍이 쫓아갔다. 예수님 안에, 예수님과 함께 있지 못하고 멀찍이 떨어져서, 66절을 보면 베드로는 아랫뜰에 있었다. 예수님과 함께 지내는 시간이 아닐 때에 일은 벌어졌다.

 

베드로는 건장한 남자 어부였기에, 대제사장의 여종 한 사람이 자신에게 예수의 제자라는 혐의(?)를 씌울 때 부인하지 않고 충분히 도망할 수도 있었다. 그게 아니라면 자연스럽게 무시하고 갈 수도 있었다. 하지만 베드로는 부인하게 된다. 68절에 이제 그는 앞뜰로 나아간다. 다른 여종이 혐의를 씌울 때 그는 또 부인한다. 마지막으로 곁에 있는 사람들이 그에게 말할 때 (70절) 그는 세 번째로 예수님을 부인하게 된다. 

 

단순히 물리적인 공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처럼 우리가 그 분 안에 거할 때, 그 분이 우리 안에 거할 때라야 우리는 우리의 성정과 연약함을 이기고 주님을 쫓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베드로는 지금 주님 안에 거하는 그 일을 실패한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를 향해 ‘내 안에 거하라’ (요 15:4) 라고 말씀하신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 거하지 않을 때 우리는 언제든지 베드로가 부인한 것과 같은 일들을 경험할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베드로의 부인을 보면서 내가 저 상황이었다면? 나는 과연 어땠을까?를 생각해보게 된다. 당연히 쉽지 않다고 생각된다. 지금 내 삶에 발생하는 여러 복잡다단한 일들도 마찬가지이다.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상황에서 내가 하나님과 동행하고 있는가? 내가 주님 안에 있는가? 내가 그 분 안에 거하는가? 이것이 핵심임을 잊지 말자. 

 

오늘도 그 분 안에 거하기를… 주어진 상황과 결정해야 할 일들 속에서 주님 안에 거하길… 

정말 그렇게 하루를 살아내길… 아멘

728x90
반응형
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19. 4. 15. 12:19
728x90
반응형

막 14:43-52 내 분량만큼 예수님 뒤를 쫓아가기

 

예수님이 잡히셨다. 예수님은 말씀을 이루시기 위해서 그저 무력하게 잡히셨다 (49절). 주를 부인하지 않겠다고 했던 그들의 다짐과 무색하게 그들은 다 도망갔다. 

50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한 청년이 벗은 몸에 홑이불을 두르고 예수를 쫓아갔다. 도대체 그는 누구인가? 왜 쫓아갔는가? 자료를 찾아보니 그에 대한 언급이 이 곳에만 나오고, 이름이나 다른 자료가 없어서 이 청년을 마가복음의 저자 마가로 추측한다고 이야기 하고 있다. 그가 부끄러워서 이름도 기록하지 못하고 자신의 일을 이 마가복음에만 삽입했다고 추측하고 있다. 

 

왜 벗고 있었는지 잘 모르겠다. 소란한 소리에 잠에서 깨서 그냥 옷을 못 찾고 그냥 보이는데로 덮고 있던 이불을 들고 나온 것인지… 아니면 어떤 상황이었는지... 솔직히 왜 벗은 몸에 이불만 걸치고 나왔는지 추측하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아마도 그가 급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가기 위해서 한 선택 정도로 보여진다. 그렇게 눈에 잘 띄는 모습으로 예수를 쫓다가 그는 예수를 잡은 무리들에게 붙잡혔다. 그 이후 그가 한 선택은 베 홑이불을 버리고 벗은 몸으로 도망하는 것이었다. 

 

그는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으로 주님의 뒤를 쫓았다. 그렇게 쫓다가 잡히자 도망갔다. 그에게는 아픈 과거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렇게 무력하게 도망갈 수 밖에 없을지라도, 베 홑이불을 두르고 벗음 몸으로라도, 그렇게라도 예수님을 쫓아가는 선택을 하였다.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예수님을 절대 버리지 않을거라고… 그렇게 다짐하던 제자들은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갔다. 하지만 이름도 기록되어 있지 않은, 마가라고 추측만 하는 이 청년은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서 예수를 쫓아갔다. 그렇게 쫓아가다가 잡히니 도망갔다. 하지만 그럼에도 계속 예수를 쫓아서 마가복음의 저자가 되었다. 

 

엄청난 헌신, 엄청난 사역, 엄청난 그 무엇인가를 해서 성경에 이름이 나온 위대한 믿음의 영웅이 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그저 자신의 분량만큼 계속해서 예수를 쫓아가는 선택을 했다. 

 

오늘 나의 삶은 어떠한가? 내가 지금 예수를 쫓고 있는가? 화려해 보이는 그 무엇인가를 쫓고 있는 것은 아닌가?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방법으로 예수를 쫓고 있는가? 계속해서 쫓아가고 있는가? 

 

이 이름모를 청년과 같이 계속해서 예수를 쫓아갈 수 있게 되기를 원한다. 작아도, 보잘 것 없어도, 벗고 있어도 그저 그 분의 뒤를 쫓아가기 원한다. 예수께서 보여주시는 것 까지만 쫓아가기 원한다. 주님 나의 마음을 붙잡아 주소서

728x90
반응형
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19. 4. 13. 13:22
728x90
반응형

막 14:22-31 주님이 계시는 그 자리, 갈릴리

 

성만찬 이후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신다. 27절을 보면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제자들의 고백은 베드로가 먼저 자신은 그리하지 않겠다고 말한다 (29절). 그리고 베드로와 모든 제자들이 다시 한 번 말한다.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30절)’ 제자들은 자신에 차 있었다. 어떠한 고난이 와도 그들은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을 용기가 있었다. 절대로 부인하지 않을 자신도 있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를 다 아시고 먼저 말씀하셨다. 

28.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

 

예수님이 먼저 갈릴리로 가겠다고 하신 말씀이 무슨 의미일까? '아마도 너희들이 나를 배신하고, 말씀과 같이 양들이 흩어짐 같이 다 흩어지더라도 내가 먼저 너희들이 있게 될 그 갈릴리에 있을 것이다' 라고 말씀하신 것일 것이다. 우리는 늘 주님을 배반하고, 주님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주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하지만 그럼에도 주님께서는 언제나 우리가 돌아갈 그 갈릴리에 먼저 가서 계신다. 우리가 태어나고 나고 자랐을 뿐만 아니라 실패하고 넘어지고 좌절해서 돌아갈 수 밖에 없는 그 갈릴리로 말이다. 

 

요엘이를 키우면서 이 녀석의 반응을 잘 견디지 못하는 날 보면서 늘 제자리인 것 같을 때가 있다. 

큐티를 하지만 내 삶이 변하지 않는 것을 보면서 내가 늘 제자리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선교사로 살아가지만 여전히 이기적이고, 여전히 다른 사람에 비해서 내가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인정받기 원하는 그 욕구를 보면서 예수를 25년이나 믿었는데도 내 신앙이 제자리에 있는 것 같아 좌절스러울 때가 있다. 

 

그런 나에게 오늘 주님께서는 내가 그 갈릴리에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 같다. 내가 너의 좌절과 실패와 넘어짐과 그 마음의 욕망을 알고 계신다고 말한다. 마치 제자들이 예수님을 배신할 것을 아시면서도 그들의 용감무쌍한 고백을 들으시고 그 이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에서 기다리겠다고 하신 것 처럼 말이다. 

 

입술로는 제자들과 같이 주를 위해 죽을 수 있을 것 처럼 말하지만 여전히 나는 죽기가 싫다. 손해보기가 싫다. 더 움직이고, 더 섬기고 싶지 않은 마음이 가득하다. 하지만 주님께서 그런 나를 아시고 내가 돌아갈 그 갈릴리에서 기다리시고 계신다고 말씀하신다. 그래서 용기가 난다. 주님이 내가 모든걸 완벽하게 해내길 바라시는게 아니라 내가 실수하는 그 자리에서 나를 잘 아시고 나를 돕기위해 기다리고 계심을 말씀을 통해서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도 좌절하지 않기를… 그리고 다시 한번 갈릴리에 계신 주님을 만나 힘을 내기를 원한다. 늘 제자리인 것 같지만 그 제자리는 주님이 함께 계신 바로 그 자리이기 때문이다. 여전히 입술로만 주님을 섬기는 것 같은 나이지만, 부활하셔서 나를 찾아오신 그 주님을 만남으로써 생명도 주를 위해 내놓을 수 있는 그런 믿음을 가지는 내가 되고 싶다. 내가 받은 위로를 요엘이에게 나눠줘야겠다. 아빠도 늘 제자리인 것 같다고… 요엘아 그 자리에 주님이 함께 계신다고.. 

728x90
반응형
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19. 4. 12. 12:44
728x90
반응형

막 14:12-21 각기 다른 모습으로 다시오심을 준비하는 자들

 

유월절 만찬에 대한 본문이다. 만찬을 하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준비를 해야 한다. 예수님과 제자들의 유월절 만찬이니, 제자들이 준비하든지, 아니면 예수님이 준비하시든지 둘 중의 하나이다. 질문은 먼저 제자들이 한다. 12절에서 ‘우리가 어디로 가서 선생님께서 유월절 음식을 잡수시게 준비하기를 원하시나이까?’ 라고 질문하였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면 자신들이 어디론가 가서 준비하겠다고 말한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은 제자들 너희들도 아니고, 예수님 자신도 아니고 물 한 동이를 가지고 가는 사람을 만나서 그에게 물어보라고 하셨다 (13-14절). 그가 큰 다락방을 예비하여서 제자들에게 열어주었고, 제자들이 거기서 유월절 음식을 준비하였다. 

 

도대체 그 물동이를 지고 가던 사람은 누구인가? 도대체 그는 왜 자신의 다락방을 예수님을 위해 열어 주었는가? 우리는 그가 누구인지를 모른다. 왜 그랬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또한 예수님께 쓰임받은 사람 중에 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초림의 길에, 특별히 십자가를 지시는 길을 준비한 사람이었다.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딱 한번 이 곳에 등장하였다. 물론 그 이후에 그가 어떤 사람이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성경이 기록하지 않기 때문에…

 

하지만 어제 예수님의 머리에 향유를 부은 여자와 같이 물 동이를 가지고 가던 이 사람 또한 예수님의 길을 준비한 사람이었다. 그가 다락방을 열어서 예비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예수님이 제자들을 위해 발을 씻기는 것을 볼 수 없었을 것이고, 성만찬도 볼 수 없었을 것이다 (물론 예수님이 다른 방식으로 하셨겠지만…).

 

결국 우리의 역할이 다르고, 예수님을 만난 시기가 다르고, 예수님의 길을 준비하는 모습이 다르지만 우리가 그 분을 사랑함으로 하는 모든 일은 그 분의 길을 준비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사랑함으로 향유를 부었고, 사랑함으로 자신의 다락방을 열어드렸다. (물론 본문 어디에도 물동이를 지고 가던 사람이 예수님을 사랑했다든지 혹은 제자였다고 말하진 않는다. 하지만 단순한 기적의 사건으로만 보려고 하지 않는다면 얼마든지 추측이 가능하다고 본다) 우리는 여러 각기 다른 모습으로 그 분의 다시오심을 준비하는 자들인 것이다. 

 

마리아가 향유를 부은 것처럼, 자신의 다락방을 열어 드린 것처럼 우리는 오늘도 그 분의 재림을 준비하는 하루를 보내고 있다. 16절에서 언급하고 있는 것 처럼 ‘말씀대로… 준비하니라’ 우리는 말씀을 쫓아 오늘도 재림을 준비하는 하루를 보내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오늘 하루를 쉬이 보낼 수 없다. 오늘 하루를 그냥 어제와 같이 보낼 수 없다. 오늘도 말씀대로 순종하며 준비하는 삶을 살아내야 하는 것이다. 

 

송끄란 연휴기간이라고는 하지만 요즈음 독서를 좀 소홀히 했다. 태국어 공부도 조금 소홀히 했다. 다시 한번 마음을 정하고 준비하기 원한다. 예수님의 다시 오심을 준비하는 오늘 하루가 되도록 대충 살지 않고, 대충 보내지 않기 원한다. 오늘도 나는 준비하고 있는 자로 깨어 있기 원한다. 

728x90
반응형
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19. 4. 11. 11:19
728x90
반응형

막 14:1-11 허비?? 준비!!

 

내가 성경에서 참 좋아하는 본문이다. 예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향유 옥합을 예수님의 머리에 붓는 여인과 돈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에 대해서 비난하는 예수님의 제자… 뭔가 선명한 대비가 되는 본문이다.

 

오늘 예수님은 가난한 자들을 돕지 말라고 말씀하신게 아니었다. 그들을 원하는대로 도우라고 말씀하신다 (7절). 하지만 때로는 가난한 자들을 돕는 것 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고 말씀하신다. 그것이 오늘은 여인의 향유를 깨뜨려 부어 예수님의 장례를 미리 ‘준비'하는 것이었다. 예수님께 좋은 일을 하는 것이 가난한 자들을 돕는 것 보다 더 우선시 되어야 한다. 그것이 오늘 주님이 하신 말씀하신 것이다. 

 

가난한 자를 돕는 것보다 예수님께 좋은 일을 하는 것, 그것은 때때로 아니 종종 사람들에게 불편함을 줄 수 있다. 오늘 본문에서는 '어떤 사람들이 화를 내어 서로 말하되 (4절)’ 라고 말하고 있다. 예수님을 위해 좋은 일을 할 때, 그것을 비난하고 비판하는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들은 또한 향유를 ‘허비’한다고 비난한다. 어떻게 보면 그들의 판단은 합리적이다. 계산해보면 그들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그들의 눈에 낭비 같아 보이는 일을 우리는 지금 시간과 물질과 열정을 사용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허비’같이 보이는 일을 예수님은 ‘준비’라고 말씀하신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 일을 해야만 한다

 

합리적인 생각을 넘어서, 때로는 사람의 눈에 중요해 보이는 일을 넘어서, 예수님께 좋은 일을 하는 내가 되기를 원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내 인생의 ‘낭비’가 아니라 주님의 오실 길을 ‘준비’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람들의 판단에 목숨걸지 않기 원한다. 그들이 뭐라고 말하던 예수님께 좋은 일을 뚝심 있게 해 나가는 내가 되기를 원한다. 물론 독선적으로 나만 옳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준비’할 수 있게 되기를 원한다. 

 

오늘 우리 형제, 자매들 중에서 송끄란(태국 설날임)때도 기숙사에 남아 있는 형제, 자매들과 함께 점심식사를 하려고 초청했다. 어제 저녁부터 청소하고, 아내는 음식을 준비하고 바쁘다. 함께 식사와 교제함을 통해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 가족임을 그리고 예수님의 사랑과 우리 가족의 사랑이 그들에게 흘러 가기 원한다. 짧은 교제의 시간이지만 이 시간을 하나님께서 축복해주시길 원한다. 그리고 오늘도 이 모임을 통해서 예수님께 좋은 일을 하며 ‘준비’하는 우리 가정이 되기를 원한다. 

 

매일 이렇게 예수님께 좋은 일을 하며 예수님의 다시 오심을 ‘준비'할 수 있기를 원한다. 오늘도 향유를 부을 수 있기를 원한다.

728x90
반응형
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19. 4. 10. 11:31
728x90
반응형

막 13:28-37 깨어 있으라

 

결국 우리는 시대를 분별하는 눈을 가져야 한다. 28절의 말씀처럼 무화과나무가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가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 아는 것 처럼 인자가 오는 때의 그 징조를 보고 우리는 그 때가 가까운 줄을 알아야만 한다. 그런데 32절 부터는 그 날과 그 때를 아무도 알지 못한다고 말씀하신다.  천사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신다고 하셨다 (34절). 그러고 하시는 말씀은 깨어 있으라는 것이었다. 

 

시대가 분별이 되었다면 예수 그리스도가 오신 그 이후 부터의 모든 시대는 예수께서 다시 오심을, 그리고 이 땅을 회복시키실 것이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땅을 심판하실 것임을 기다리는 세대가 되었다. 우리가 분별하든 분별하지 못하든 재림의 날이 오늘 또 하루가 더 가까워졌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깨어서 분별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말씀은 어느 누구에게만 하신 것이 아니라 모든 자에게 하신 하나님의 말씀이다 (36절). 우리는 지금 깨어 있어야 한다.

 

단순히 졸지 않는다고 우리의 삶이 깨어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깨어있으라'는 것은 단순히 자지 말라는 말이 아니다. 시대를 분별하고, 그리스도 인으로써 그 안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고민하고, 새 하늘과 새 땅이 임하기 전까지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살아내라는 말이다. 멍하게 있으면, 정신 줄 놓고 있으면 절대로 깨어 있을 수 없는 것이 우리의 삶이다. 멍 놓고 있으면 세상이 주는 가치관에 물들고, 그것의 위험성도 깨닫지 못하고 따라가게 되는 것이 지금 우리의 삶이다. 

 

어제 아내와 좀 오래 대화를 나누었다. 내가 그 동안 멍놓고 지냈던 부분들에 대해서 깨닫는 시간이었다. 아이들에게도 아빠란 권위로 나도 모르게 짖눌러서 내가 원하는 아이로 만들려고 하는 것을 보게 되었다. 혼자 생각했던 것은 그간 내가 깊이 생각하지 못하고, 중요한 것을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내가 그냥 하던대로 일반적으로 다른 사람이 하던대로 하며 쫓아가고 있었다는 것이었고, 무척이나 후회가 되었다. 깨어 있지 못했기에 아내와 아이들이 나로 인해 힘들었던 것이었다. 

 

좀 더 정신을 차려야겠다. 그냥 사니까 사는 삶이 아니라, 복음으로 정말 살아내는 삶을 살아가고 싶다. 아내의 어려움을 이해해주는 남편이 되고 싶다. 아이들에게 아버지의 권위로 누르는 자가 아니라 아이들과 정말 마음이 통하고 대화가 통하는 아버지가 되고 싶다. 세대를 분별하는 크리스챤이 되고 싶다. 정신 차리고 나를 세상을 돌아보자. 마지막이 가까웠다. 

728x90
반응형
Posted by 신애친구™
728x90
반응형

막 13:1-13 복음을 전파해야 한다

 

끝, 마지막은 반드시 온다. 그것이 어떠한 형태로 오든지간에 말이다. 

우리의 삶에도 죽음이라는 끝이 온다. 과학자들에 따르면 (그들이 신앙이 있든 없든간에…) 이 우주에도 언젠가 종말이 있을거라고 말한다. 무엇인가가 시작이 되었다면 당연히 끝도 있는 것이다. 

 

마지막이 올 것을 아는 자의 삶은 언제나 그 마지막을 준비해야 한다. 오늘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그 마지막이 올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준비하라고 말씀하신다. 특별히 예수의 이름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그 마지막에 매질과 권력자들과 임금 앞에 서야 함을 말씀해주신다 (9절). 하지만 그럼에도 무엇을 말할지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신다. 왜냐하면 성령께서 우리의 할 말을 주장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핍박을 생각하면 두렵다. 그럼에도 예수님께서는 10절에 '또 복음이 먼저 만국에 전파되어야 할 것이니라'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내가 반드시 죽게 되고, 이 세상에 마지막은 반드시 오게 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해야 할 일은 먼저 만국에 복음을 전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마지막이 두려워 벌벌 떠는 자가 아니라 마지막을 알기 때문에 더 열심으로 복음을 전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마지막이라는 두려움이 나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그 마지막까지 나와 함께 하시며 그 마지막을 다른 시작으로 만들어 가시는 분과 내가 동행하기 때문에 더이상 두려워하지 않고, 더 지금 해야 할 일에, 지금 해야만 하는 일에 충성해야 하는 것이다.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이 바로 이 10절 말씀이다.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다. 내가 하는 말로, 삶으로 태국의 영혼들에게 복음을 전파해야 하는 것이 마지막을 아는 내가 해야 할 일이다.특별히 어제는 주일 설교였다. 주일 설교를 통해서 복음을 전했다. 말을 통해 우리 형제, 자매들에게 복음을 전한 것이다. 이제 나머지 6일은 내가 삶을 통해 그들에게 복음을 전할 차례이다. 송끄란 휴일이라 많지 않은 형제, 자매들이 샬롬 기숙사에 남아 있다. 송끄란은 여기 설날인데,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 그들과 함께 더 가족의 교제할 수 있는 이번 한 주가 되기를 원한다.  

728x90
반응형
Posted by 신애친구™
728x90
반응형

막 12:13-27 산 자의 하나님께서 동행하신다

 

부활이 없다고 믿는 사두개인들이 (18절) 예수님께 부활에 대해서 묻는다. 아무리 봐도 정상적인 물음이 아니다. 예수님을 어려움에 빠뜨리고 싶어 하는 의도이다. 13절 표현에 의하면 예수님을 책잡으려 하는 행동이다. 부활에 대한 질문은 결국 다 죽고 나서 어떻게 될 것이냐에 대한 질문이다. 이 땅에서의 부활의 삶을 살아내는 삶 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 천국에 가는 것이라는 질문에 불과하다.

 

예수님은 이러한 그들에게 우문현답을 하신다. 중요한 것은 너희들이 죽어서 천국에 가서 만나는 하나님이 아니라 지금 이 땅에서 살아서 만나는 하나님임을 이야기 하고 계신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살아계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27절). 하나님은 우리에게 단지 천국에 가기 위한 티켓을 주시기 위해, 그 티켓을 얻어 그 천국이라는 곳에서 만나기 위해 존재하시는 분이 아니다. 오히려 지금의 일상의 삶에서 늘 함께 하시며 우리의 삶에 늘 간섭하시고, 나의 일거수 일투족을 아는 분이 우리 하나님이신 것이다. 왜냐하면 그 분이 바로 살아계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은 아브라함의 그 갈 바를 알지 못하고 약속의 땅을 향해 가는 삶 속에서 아브라함의 하나님을 만났고, 

이삭은 이삭의 잠잠하고 조용한 일상의 삶 속에서 이삭의 하나님을 만났고,

야곱은 야곱의 그 힘들고 두려운 삶을 이겨내기 위해 속이고, 또 속임받는 삶 속에서 야곱의 하나님을 만났다. 

 

오늘 내가 만나야 할 하나님, 내 삶의 여정 속에서 만나야 할 하나님을 내가 만나고 있는가? 

아브라함과 같이, 이삭과 같이, 야곱과 같이... 내 삶의 고단하고 피곤한 여정을 나와 함께 걷고 계신 그 분을 만나고 있는가? 

죽은 자의 하나님, 단순히 내가 천국에 가서 만날 하나님이 아니라 지금의 오늘을 함께 하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고 있는가? 

 

하나님께서 산 자의 하나님이라는 사실은 나에게 큰 위로가 된다. 나그네와 같이 살았던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삶에 함께 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지금 오늘을 살고 있는 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아시고, 우리를 돌보신다. 이렇게 묵상하면서도 이사를 생각하면서 수 많은 고민을 하게 된다. 하나님이 아시고, 하나님이 동행하심에도 이 고민들이 떨쳐지지 않는다. 아이들의 통학을 고려하고, 교회와의 사역지와의 거리를 고려해 위치를 고민하고, 렌트비와 이사에 따른 재정을 고려하고, 앞으로의 사역 방향과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어떤 것인지를 고민한다. 무엇도 한 가지 쉬운 것이 없다. 

 

하지만 그래도 감사한 것은 산 자의 하나님께서 나의 이런 고민 가운데 함께 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이시고, 고민은 고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런 고민과 생각들 가운데 함께 하신다. 모든 것을 다 말씀해주시지 않아도, 모든 것을 다 깨닫게 해주시지 않아도, 한 걸음 한 걸음 내딛게 하신다. 

 

두려워 말자. 나는 산 자와 함께 하시는 살아계신 하나님과 함께 걷고 있다. 

내 두려움과 고민, 생각들을 주님께 더 나누고 올려드리자. 주님이 지금 함께 하신다. 

728x90
반응형
Posted by 신애친구™
728x90
반응형

막 12:1-12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아는)지혜와 (내게 주어진 구역을 아는)은혜

 

농부들은 세를 내고 이 포도원에서 지냈다. 포도원을 만들고 산울타리를 두르고 즙 짜는 틀을 만들고 망대를 만든 사람이 주인이다 (1절). 그런데 그 사실을 잊어버린 것인지 아니면 잊기를 원한 것인지… 그들은 주인이 포도원 소출 얼마를 받기 위해 보낸 종들을 다 죽였다 (3-5절). 아마도 주인이 1절에서 타국에 갔다고 하니 그 동안 자신들이 주인이 될 수 있을거라 생각한 것 같기도 하다.

 

주인이 누구인지 모르면, 주인이 지금 같은 공간이 아니라 다른 곳에 있다고 생각하면 사람이 이렇게 뻔뻔해진다. 주인이 아니면서 주인행세를 하게 되는 것이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지구, 그 위에 우주, 내가 먹고 있는 물, 숨쉬는 공기, 그리고 심지어 내 몸까지 내가 만든 것이 하나도 없다. 내가 안 만들었다면 만드신 그 누구인가가 있다는 것이고, 그 분이 창조주 하나님이시다. 그런데 내가 만들지 않았으면서도, 내가 이 모든 것들에 주인행세를 하려는 것은 이 농부들과 비슷한 행동이다. 

 

결국 주인행세를 하는 농부들은 그 주인이 왔을 때 진멸당하고, 포도원은 다른 사람들에게 주게 된다 (9절). 분명히 이것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은 이스라엘을 향한 경고이다. 하지만 또한 마찬가지로 창조주를 무시하고 내 삶의 주인이 내가 되려는 자들에게 주시는 경고임에 분명하다. 오늘 내 삶에, 내 하루에, 내 일상의 주인은 누구이신가? 주인되신 하나님이신가? 아니면 농부와 같은 나인가?

 

주인 행세를 하는 그 마지막은 진멸이다 (9절). 내가 주인이 아닐 때에는 결코 주인이 되려고 해서는 안된다. 내가 주인이 아님을 내 주변의 모든 자연과 이 땅과 하늘이 증명하고 있지 않은가? 그렇기에 내가 누구인지,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아는 것이 지혜가 되는 것이다. 내게 줄로 재어진 구역이 어디인지를 알고 그 구역 안에 머무르는 것이 은혜이다. 오늘도 그 지혜와 그 은혜로 하루를 살아내기 원한다. 그 지혜와 은혜가 있었던 이가 바로 세례요한이었다. 그의 고백과 같이 주인이신 하나님은 흥하시고, 농부와 같은 나는 쇠하는 그런 하루가 되기를 원한다.

 

특별히 내가 살고 있는 (내게 주어진) 구역을 옮기려고 집을 보고 있는 중이다. 이사는 언제나 쉽지 않다. 이사를 하면서 늘 느끼는 것은 내가 나그네라는 것이다. 한국에서 이사할 때에도 '이렇게 집이 많은데 왜 내가 살 집은 없지?’라는 생각이 많이 했었다. 지금 태국에서는 더 많이 그런 기분을 느낀다. 우리 가정의 상황과 재정에 맞는 집을 찾는 일이 정말 쉽지가 않다. 그래도 분명히 우리가 머물 곳이 분명히 있을 것이고, 우리는 그것을 확실히 알게 될 것이다 (영광교회 주변에 빈 집이 별로 없다는 것을 새롭게 알게 되었다). 하지만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 분의 선하신 계획대로 인도하실 줄을 믿는다. 왜냐하면 그 분께서 나를 이 곳으로 이끌어 오셨고, 그 분이 나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가장 좋은 길로 우리를 인도해주시기를… 

그 은혜가 정해주시는 구역 안으로 들어가길 원한다. 

저희 가정의 상황에 맞는 적절한 집을 만날 수 있게 기도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728x90
반응형
Posted by 신애친구™
728x90
반응형

막 11:20-33 권위의식이 아니라 소명의식으로 사는 사람이 되자

 

오늘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의 권위에 대해 묻는다. 한 마디로 우리는 권위가 있는 대세사장과 서기관들인데, 너는 쥐뿔도 없는 시골 나사렛 출신의 촌놈 아니냐? 니가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 와 같은 질문이다. 아마도 목사나 선교사로 따지면 '너 어디서 안수 받았어? 너 어느 파송교회 출신이야?' 정도의 질문일 것이다. 예수님을 한마디로 출신도 잘 모르고, 권위도 없어 보여 믿을 수 없는데 기적이 일어나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 이것에 대해서 그들은 동의할 수 없는 것이다.

 

이들의 말이 어느정도는 맞다. 권위는 주어지는 것이다. 권위는 내가 가지고 싶다고 가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내가 내 스스로에게 권위를 부여할 수도 없다. 권위는 위로부터 오는 것이다. 요한의 세례의 권위가 하늘로 부터 오는 것과 같이 예수님의 권위도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다. 우리는 그 권위를 따라야 한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주신 하나님의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서도 예수님은 그 권위에 대해서 따로 말씀하시지 않았고, 권위를 내세우지도 않으셨다. 그런데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는 왜 권위가 필요했을까? 그들은 자신의 기득권과 자신들의 지위를 지키기 위해서 권위가 필요했던 것이다. 즉 자신의 이기적인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권위라는 것을 이용한 것이고, 그 인간의 권위라는 것은 오히려 하늘로부터 내려온 권위들을 박살내고 있다. 세례요한이 그렇게 죽었고, 이제 예수님에게까지 왔다. 예수님을 그들의 권위로 찍어누를 셈이었다. 

 

하나님의 말씀과 주신 사명 위에는 별로 권위가 필요없다. 하늘로부터 내려오고, 사람들이 인정한다. 하지만 우리의 것, 그 무엇인가를 지키기 위해서, 내가 다른 사람보다 높다는 그 어떠함을 누리기 위해서는 인간이 세운, 인간들이 만들어내는 권위가 필요하다. 모든 권위가 필요없고, 권위는 나쁜 것이란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어떠한 사람인가? 위로부터 오는 권위가 있는가? 

그게 아니라 내 지위, 나의 우월함을 표현하기 위해 사람들이 세워가는 권위에 나를 기대는가?  나는 도대체 어떤 사람인가? 

권위의식이 아니라 소명의식으로 사는 사람이 되기 원한다. 

대접받고 싶고, 상석에 앉고 싶고, 누군가가 나를 알아주기를 원하는 그런 권위가 나를 이끌어 가지 않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하나님께서 주신 소명이 나를 이끌어가는 그런 삶을 살아내고 싶다. 내 스스로의 권위로 나를 증명하려고 하지 말고, 오직 말씀으로 나의 소명으로 나의 삶을 살아내고 싶다. 

 

아이들에게, 아내에게…

그리고 우리 형제, 자매들에게…

권위가 아니라 사랑으로, 소명으로 이들을 대하고 싶다. 

 

정말 나는 내가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너무 커서 사랑과 소명이 나의 삶을 이끌어 가는 것이 힘들다. 

하지만 실패해도, 잘 안되어도 오늘 다시 말씀을 붙들고 예수와 같이 소명의식으로 살아내기 원한다. 

728x90
반응형
Posted by 신애친구™